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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모 피해서 가출하는 아씨를 따라나선 의리있는 머슴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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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내 삶을 내 것이라 여긴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가 데려온 새어머니는 나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찬방에 갇히고, 밥상에서 밀려나고, 하인들 앞에서 모욕당하는 날이 반복되었다. 그래도 참았다. 이 집을 떠나면 갈 곳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날 밤, 계모가 내 혼사를 들먹였을 때 나는 알았다. 더는 이 집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어머니의 은비녀와 몰래 모아둔 엽전, 그리고 어머니에게 배운 염색 비법이 적힌 책 한 권을 품에 안고 담장을 넘었다. 빈손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아씨, 어디를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만복이. 우리 집 머슴. 그가 왜 거기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빛이, 평소와는 달리 단단하고 뜨거웠다는 것만 기억한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그 한마디가 내 도망의 시작이었고, 살아남아 되갚아주겠다는 내 복수의 첫 걸음이었다.
※ 1 달빛 아래의 탈출, 빈손이 아닌 도망
밤이 깊었다. 방 안에 누워 있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보며 계모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은서야, 네 혼사가 정해졌다. 상대는 이 고을 김 주부 댁 셋째 아들이다." 김 주부 댁 셋째라면 나이가 마흔이 넘은, 아내를 둘이나 잃은 사내가 아닌가. 나는 속이 뒤집어지는 것을 느꼈다. 계모는 웃고 있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무도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짐을 꾸렸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뛰쳐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 날을 위해 준비해 온 것이 있었다. 첫째, 어머니의 은비녀 두 개. 급할 때 팔면 석 달은 먹고살 수 있는 값어치다. 둘째, 몰래 모아둔 엽전 서른 닢. 부엌에서 장 보고 남은 푼돈을 삼 년간 한 푼 두 푼 모은 것이다. 셋째,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어머니의 유품 중 하나인 작은 책자. 어머니는 본래 남쪽 고을 염색장의 딸이었다. 이 책에는 쪽빛, 홍화, 치자 등 천연 염료를 다루는 비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계모가 이 집에 들어온 뒤 어머니의 물건은 모조리 태워졌지만, 이 책만은 마루 밑에 숨겨 지켜냈다.
치마를 걷어 올리고 뒷마당 담장에 손을 짚었다. 보름달이 떠 있었다. 온 세상이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담장 위에 몸을 올리려는 순간,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씨."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돌아보니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사내.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만복이였다. 우리 집 머슴. 열여섯에 팔려 와서 칠 년째 이 집에서 일하고 있는 사내.
"뭐, 뭐야. 놀랐잖아."
나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만복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고개를 숙이고 "예, 아씨"라고만 했을 그가, 오늘은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어디를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이 집을 나갈 거야."
"혼자서요?"
"혼자서."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불어 내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만복이는 한 발짝 다가왔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넌 이 집 종이잖아. 도망치다 잡히면 목이 달아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만복이는 대답 대신 자신의 보따리를 들어 보였다. 이미 짐을 싸 온 것이었다. 그 안에는 부싯돌, 작은 낫, 밧줄, 그리고 산에서 쓸 수 있는 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이 사내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보다 먼저, 혹은 나와 같은 때에.
"아씨 혼자서는 산길을 넘을 수 없습니다. 장도 볼 수 없고, 짐도 나를 수 없고, 위험한 일이 생겼을 때 몸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저는 힘이 있고, 길을 압니다."
그의 말은 감정이 아니라 판단이었다. 사실이었다. 나에게는 돈과 기술이 있었지만, 몸으로 부딪히는 일에는 한없이 약했다. 만복이에게는 돈도 기술도 없었지만, 산과 들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같이 가자."
만복이가 담장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오르십시오." 그의 등이 넓었다. 나는 올라탔다. 그의 체온이 등을 통해 전해졌다. 따뜻했다. 나도 모르게 심장이 한 박자 빨라진 것은, 아마도 긴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담장 밖으로 나온 순간,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집. 하지만 더 이상 내 집이 아닌 곳. 언젠가 돌아오겠다. 빈손이 아니라, 이 집보다 더 큰 것을 가지고. 반드시.
"가자, 만복아."
"예, 아씨."
달빛 아래 두 개의 그림자가 한양을 등지고 걷기 시작했다. 도망이 아니었다. 시작이었다.
※ 2 첫 번째 위기, 산적의 길목
도망친 지 나흘째 되는 날, 우리는 충청도로 향하는 산길에 접어들었다. 어머니의 고향이 공주 근처였다. 그곳에 가면 어머니가 거래하던 염색 재료상이 아직 남아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만복이는 쓸모 있는 사내였다. 산속에서 식수를 찾는 법, 먹을 수 있는 풀과 열매를 구별하는 법, 밤에 짐승을 피해 잠자리를 잡는 법을 알고 있었다. 대감 댁에서 나무를 하고 산짐승을 잡아 오던 칠 년의 세월이 이런 데서 빛을 발했다.
"아씨, 이 나물은 삶아 드시면 됩니다. 이건 독이 있으니 손대지 마십시오."
그가 풀을 가려가며 설명할 때, 나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내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집에서는 늘 고개만 숙이고 "예", "아닙니다"만 반복하던 사람이 산속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만복아, 넌 산속에 있을 때가 더 편해 보인다."
"사람 밑에 있는 것보다 산 밑에 있는 게 낫지요."
그 말에 나는 웃음이 났다. 첫 번째로 함께 웃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웃음도 잠시, 산길 모퉁이를 돌았을 때 앞을 가로막는 자들이 있었다. 셋이었다. 차림새를 보니 관군은 아니었다. 산적이었다. 하나같이 험상궂은 얼굴에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었다.
"어디서 온 계집이냐. 보따리를 놓고 가거라."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보따리를 빼앗기면 끝이었다. 은비녀도, 엽전도, 어머니의 책도 모두 그 안에 있었다. 내 미래 전부가 그 보따리 하나에 달려 있었다.
만복이가 내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셋을 상대로 힘으로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잠깐." 내가 앞으로 나섰다. "이 보따리 안에 있는 건 옷가지와 먹을 것뿐이오. 하지만 내가 당신들에게 그보다 값진 것을 줄 수 있소."
산적 우두머리가 코웃음을 쳤다. "뭘 줄 수 있다는 게냐?"
"당신들이 입고 있는 그 누런 옷. 관군 눈에 띄기 딱 좋은 색이오. 내가 그 옷을 검게 물들여 줄 수 있소. 밤에 움직이기 좋게. 하룻밤이면 됩니다."
산적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나는 계속했다. "그뿐이 아니오. 옷감 염색법을 알면 장에서 천을 팔 수도 있소. 산에서 약탈만 하다가는 언젠가 관군에 잡히지만, 장사는 평생 할 수 있소."
나는 도박을 하고 있었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떨리지 않게 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장사꾼은 목소리로 상대를 읽는다고.
우두머리가 한참을 나를 뚫어지게 보더니 입을 열었다. "좋다. 해 봐라. 대신 헛소리였으면 그때는 목숨으로 값을 치른다."
만복이가 내 곁에 바짝 붙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대단하십니다, 아씨." 그의 눈이 놀라움과 또 다른 무언가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애써 무심하게 대답했다.
"대단한 게 아니라 살려고 하는 거야."
그날 밤, 나는 산적들의 근거지에서 밤새 일했다. 계곡에서 진흙을 걷어 오고, 참나무 껍질에서 탄닌을 추출하고, 쇠못을 물에 담가 철매염액을 만들었다. 어머니의 책에 적힌 먹물 염색법이었다. 만복이가 물을 길어 나르고, 불을 지피고, 무거운 솥을 옮겼다. 우리는 말없이 호흡을 맞추었다. 내가 "물", 하면 만복이가 물을 가져왔고, "불", 하면 장작을 넣었다. 마치 오래된 일꾼처럼.
새벽녘, 산적들의 누런 옷이 짙은 검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우두머리가 옷을 들어 보더니 눈이 커졌다.
"이건... 장에서 파는 것보다 낫구나."
"내 어미가 조선 최고의 염색장이었으니까."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산적들은 우리를 보내주었다. 그뿐 아니라 은전 다섯 닢까지 쥐여주었다. 우두머리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네년, 산적 하기엔 아깝다. 장사를 해라."
산을 내려오며 만복이가 말했다.
"아씨, 솔직히 간이 떨렸습니다."
"나도."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그러다 손이 닿았다. 만복이가 황급히 손을 뺐다. 나도 고개를 돌렸다. 아직은 그게 무엇인지 이름 붙일 수 없었다. 다만, 이 사내와 함께라면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조금 더 단단해졌을 뿐이다.
※ 3 공주 장터, 첫 장사의 승부
열흘을 걸어 공주에 도착했다. 어머니의 고향 근처. 하지만 세상은 내 기억 속의 그곳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거래하던 재료상은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였고,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남이었다. 이 넓은 세상에서 아무런 연줄도 없는 두 사람.
은비녀 하나를 팔았다. 쌀 두 말과 콩 한 말, 작은 방 한 칸의 한 달 세를 마련했다. 나머지 은비녀 하나와 엽전은 종잣돈으로 남겨두었다. 이것으로 시작해야 했다.
"만복아, 장에 가자."
공주 장터는 오일장이었다. 나는 장터를 돌며 눈을 크게 뜨고 살폈다. 무엇이 팔리고, 무엇이 부족한지. 어머니가 가르쳐 준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장사는 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하는 것이다.' 파는 사람의 입이 아니라, 사는 사람의 손을 보라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천이었다. 장터에는 무명과 삼베가 넘쳤지만, 색이 입혀진 천은 귀했다. 있다 해도 대부분 품질이 형편없었다. 빛이 탁하고, 물을 대면 색이 빠졌다. 한양에서 내려오는 고급 염색천은 양반들만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여기다. 이 틈새에 내가 들어갈 자리가 있다.
나는 남은 돈으로 무명 열 필과 염료 재료를 샀다. 쪽풀, 치자 열매, 홍화 꽃잎. 만복이는 내가 시키는 대로 산에서 참나무 재를 모아오고, 계곡에서 깨끗한 물을 길어왔다. 방 한 칸이 염색 공방이 되었다.
"아씨, 이걸로 정말 되겠습니까?"
만복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는 어머니의 책을 펼쳤다.
"어머니는 이 비법 하나로 양반집 규수에서 장사꾼의 아내가 되셨어. 아버지 집안에서 반대했지만, 어머니의 솜씨를 본 뒤로는 아무도 뭐라 하지 못했대. 나도 할 수 있어."
사흘을 꼬박 일했다. 잠을 줄이고, 밥도 거른 채. 만복이가 옆에서 묵묵히 도왔다. 무거운 솥을 옮기고, 천을 뒤집고, 장작불의 세기를 조절했다. 그의 힘이 없었으면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쪽빛 염색의 마지막 단계에서 색이 고르게 나오지 않았다. 천의 한쪽은 짙고 한쪽은 연한, 얼룩덜룩한 결과물. 나는 망연자실했다. 어머니의 책에 적힌 대로 했는데 왜.
"아씨."
만복이가 내 옆에 앉았다. 한밤중이었다. 나는 실패한 천 더미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대감 댁에서 마구간 청소를 처음 맡았을 때, 말이 저를 발로 찼습니다. 갈비뼈가 금이 갔지요. 그래도 다음 날 또 갔습니다. 그다음 날도. 석 달 뒤에는 그 말이 저한테만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게 지금이랑 무슨 상관이야."
"처음부터 되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단순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게 필요한 말이었다. 나는 다시 책을 펼쳤다.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그리고 발견했다. 잿물의 농도를 적은 부분에 작은 글씨로 '여름철에는 물을 반으로 줄일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은 여름이었다. 물의 양이 문제였던 것이다.
다음 날, 다시 시도했다. 이번에는 성공이었다. 맑고 깊은 쪽빛이 천 위에 고르게 퍼졌다. 하늘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색. 나는 소리를 질렀다.
"됐어! 만복아, 봐!"
만복이가 천을 들어 빛에 비추었다. 그의 얼굴에 쪽빛이 어렸다.
"아름답습니다."
그가 천을 보며 말했는지, 나를 보며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모른 척했다. 하지만 귀가 뜨거워지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다음 장날, 나는 완성된 쪽빛 무명 다섯 필을 들고 장터에 나갔다. 만복이가 짐을 지고 따라왔다. 자리를 펴고 천을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름 없는 젊은 여자가 파는 천을 누가 믿겠는가.
하지만 한 사람이 멈추었다. 양반집 부인의 몸종이었다. 천을 만져보더니 눈이 커졌다.
"이 색이... 어디서 난 천이오?"
"제가 직접 물들인 것이오."
"한양 것보다 색이 곱구려. 마님께서 좋아하실 것이오."
그날, 다섯 필이 모두 팔렸다. 투자한 돈의 세 배를 벌었다. 나는 장터 한구석에서 번 돈을 세며 손이 떨렸다. 만복이가 옆에 서서 사람들의 시선을 경계하고 있었다.
"만복아."
"예."
"우리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만복이가 웃었다. 과묵한 그의 웃음은 드물어서 더 값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녁노을이 온 세상을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만복이의 손이 내 손 옆을 스쳤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나도 피하지 않았다. 손끝이 살짝 닿은 채,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노을빛 아래서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 4 불길 속에서 지켜낸 것들
장사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쪽빛 무명의 소문이 퍼지면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나는 염색 종류를 늘렸다. 치자로 노란빛, 홍화로 붉은빛, 참나무 재와 쇠못으로 검은빛. 어머니의 책에 있는 비법을 하나씩 되살려 나갔다.
만복이는 재료 조달과 배달을 맡았다. 산에서 재료를 구해오고, 먼 고을까지 완성된 천을 나르고, 무거운 일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만복이에게는 뜻밖의 재주가 있었다. 사람을 읽는 눈이었다.
"아씨, 저 재료상은 눈을 피하며 말합니다.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대감 댁에서 칠 년을 지내며 배운 것입니다. 주인 눈치를 보려면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쓸쓸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덕에 우리는 사기꾼을 피하고, 믿을 만한 거래처를 골라낼 수 있었다. 나의 기술과 만복이의 판단력. 우리는 점점 좋은 조합이 되어가고 있었다.
석 달이 지나자 작은 공방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 방 한 칸짜리에서 마당이 있는 집으로 옮겼다. 일손이 모자라 동네 아낙 두 명을 고용했다. 만복이는 이제 단순한 머슴이 아니라 공방의 관리를 맡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어느 날 밤이었다.
잠을 자다 매캐한 냄새에 눈을 떴다. 연기였다. 창 밖이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공방에 불이 난 것이었다.
"불이야!"
나는 뛰쳐나갔다. 공방 한쪽이 이미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완성된 천 삼십여 필, 아직 말리지 않은 염색천, 재료들이 모두 그 안에 있었다. 하지만 내 발이 먼저 향한 곳은 다른 곳이었다. 방 안 선반 위에 있는 어머니의 책.
연기 속으로 뛰어들려는 나를 만복이가 잡았다.
"안 됩니다!"
"어머니 책이 안에 있어!"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만복이는 젖은 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연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하나, 둘, 셋... 숨을 셀 수가 없었다. 불길이 치솟았다. 서까래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만복아. 만복아! 나는 미칠 것 같았다.
그때 연기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뛰쳐나왔다. 만복이였다. 한 손에 어머니의 책을 들고, 다른 팔로 천 뭉치 두어 개를 끌어안고 있었다. 저고리가 불에 그슬려 있었고, 팔에 화상을 입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가 책을 내밀었다. 그을음 묻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책을 받아들고, 그의 화상 입은 팔을 보았다. 피부가 벌겋게 부풀어 있었다.
"이 바보야!"
"책은 무사합니다. 천도 몇 필 건졌습니다."
"네 팔은? 네 몸은?"
만복이가 웃었다. 어이없게도 웃고 있었다. "살았으니 됐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울었다. 분했고, 무서웠고, 고마웠고, 또 다른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와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만복이가 성한 팔로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단하게.
"울지 마십시오, 은서 아씨. 다시 하면 됩니다."
연기 냄새 사이로 그의 체온이 전해졌다. 뜨거웠다. 화상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뜨거운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한참을 울었다. 그가 부르는 '은서'라는 두 글자가, 이 세상 어떤 말보다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불길이 꺼진 뒤, 피해를 살폈다. 공방의 삼분의 이가 타버렸다. 천과 재료의 대부분을 잃었다. 다시 원점이었다. 아니, 원점보다 못했다. 빚까지 생겼으니.
하지만 어머니의 책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나도, 만복이도 살아 있었다. 살아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다음 날 아침, 폐허가 된 공방 앞에 서서 나는 말했다.
"만복아, 불이 난 원인을 찾아야 해."
만복이가 불탄 잔해를 뒤지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기름이 뿌려진 흔적이었다. 자연 발화가 아니었다. 누군가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었다.
"누가 이런 짓을..."
나는 이를 악물었다. 공주 장터에서 우리가 자리를 잡으면서, 기존 천 장수들의 매출이 줄었다. 그 중 누군가가 한 짓일 것이었다. 분했다. 하지만 무너질 수는 없었다.
"이 빚은 반드시 갚겠어. 그리고 이 불을 지른 자도 반드시 찾아내겠어."
만복이가 화상 입은 팔을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우리는 잿더미 위에서 다시 시작했다.
※ 5 재기, 장사꾼의 이름을 세우다
불 탄 공방을 다시 짓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남은 돈은 바닥이었고, 은비녀 하나가 전 재산이었다. 나는 은비녀를 팔았다. 어머니의 마지막 유품이었다. 손에서 놓는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 빌려 쓰는 겁니다. 반드시 되찾을게요."
나는 이 돈으로 무명과 재료를 사는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 장터에서 이미 짜여 있지만 색이 없는 생지 무명을 사서, 주문 받은 색으로 물들여 파는 방식. 재고를 쌓지 않고,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염색하는 것이다. 위험은 적고, 회전은 빨랐다.
만복이가 발로 뛰었다. 공주뿐 아니라 부여, 논산, 연기까지 주변 고을을 돌아다니며 주문을 받아왔다. 화상이 채 낫지 않은 팔로 짐을 지고 고갯길을 넘었다. 내가 말려도 듣지 않았다.
"아씨가 밤을 새워 물을 들이는데, 저라고 쉴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 사내.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사내가 아니었다.
재기는 빨랐다. 우리 천의 품질이 입소문을 탔다. 한 번 사간 사람은 반드시 다시 찾았다. 색이 선명하고, 물에 빨아도 빠지지 않고, 감촉이 부드러웠다. 한양에서 내려오는 고급천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데, 값은 절반이었다.
두 달 만에 빚을 갚았다. 석 달 만에 새 공방을 얻었다. 이전보다 두 배 넓은 곳이었다. 일꾼도 다섯 명으로 늘었다.
그리고 방화범을 찾아냈다. 만복이가 장터 주막에서 꾸준히 귀를 기울인 끝에, 동쪽 장터의 천 장수 박씨가 건달을 사주한 것을 알아낸 것이었다.
"은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복이가 이제 나를 은서라고 불렀다. 둘만 있을 때에만. 그 이름을 부를 때 그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조금 낮아지고, 조금 부드러워졌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아니, 좋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관아에 고발하겠어."
나는 증거를 모았다. 기름을 팔았던 기름집 주인의 증언, 그날 밤 공방 근처에서 목격된 건달의 인상착의, 박씨가 건달에게 돈을 건넨 주막 주인의 진술. 만복이가 발로 뛰어 모은 증거들이었다.
관아에 소장을 넣었다. 양반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젊은 여자가 소장을 들고 관아에 나타나자 아전들이 비웃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방화는 중죄입니다.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수령 나으리께서 판단해 주십시오."
수령은 증거를 살피고, 박씨를 불러 심문했다. 결국 박씨는 방화를 자백했다. 곤장 삼십 대에 손해 배상 명령이 내려졌다. 나는 배상금을 받아 공방 확장에 투자했다.
장터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어디서 온 젊은 계집'이었던 것이 '은서네 염색집'이 되었고, 이제는 '공주 제일 염색집'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만복이와 마루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만복아."
"예."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야."
"저는 한 것이 없습니다. 다 아씨의 힘입니다."
"은서라고 불러. 둘만 있잖아."
만복이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조용히.
"은서."
그 두 글자에 담긴 온기가 밤바람보다 따뜻했다. 나는 그를 보았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별빛이 그의 눈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웠다. 심장이 빨라졌다. 하지만 그때 동네 개가 짖어대는 바람에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자야겠다."
"그러십시오."
어색한 침묵 속에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닫고 나서, 나는 한참 동안 가슴에 손을 얹고 있었다. 이 심장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건 고마움이 아니야. 의지도 아니야. 다른 이름이 있는 감정이야. 하지만 아직은 그것을 입에 담을 용기가 없었다.
※ 6 한양의 그림자, 계모의 손길
공방을 연 지 일 년이 지났다. 공주 일대에서 '은서염색'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충청 감영의 관복 염색까지 맡게 되면서 규모는 더 커졌다. 일꾼이 열다섯 명으로 늘었고, 인근 고을에서 주문이 쏟아졌다.
나는 더 이상 도망자가 아니었다. 이 고을에서 당당한 장사꾼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양에서 온 그림자가 언제든 나를 덮칠 수 있다는 것을.
그 불안이 현실이 된 것은 가을이었다.
장터에서 돌아오는 길, 만복이가 얼굴이 굳어져서 나를 맞았다.
"은서, 한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가슴이 얼어붙었다. 대문 앞에 말 두 필이 서 있었고, 낯익은 하인 하나가 버티고 있었다. 계모가 보낸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산적 같은 사냥꾼이 아니었다. 정식으로 온 것이었다. 계모의 친서와 함께.
편지를 펼쳤다.
'은서야. 네가 공주에서 장사를 하며 잘 산다는 소문이 한양까지 들렸구나. 아비가 편찮으시다. 속히 올라오거라. 그리고 그 종놈도 데려오너라. 도망친 종의 일은 내가 눈감아 주마.'
눈감아 주마. 나는 코웃음이 났다. 계모가 갑자기 선심을 쓸 리가 없었다. 분명 다른 속셈이 있었다.
"돌려보내. 안 간다고 전해."
하인이 돌아갔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보름 뒤, 이번에는 관아에서 사람이 왔다. 한양에서 공문이 내려온 것이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김 대감 댁 종 만복이, 도주한 지 일 년이 넘었으니 주인에게 돌려보낼 것.'
이것이 계모의 진짜 수였다. 나를 직접 끌고 가지 못하니, 만복이를 빼앗아 나를 흔들려는 것이었다. 만복이가 잡혀가면 나는 공방을 혼자 운영할 수 없었다. 재료 조달, 거래처 관리, 배달, 그 모든 것이 만복이의 몫이었다.
"은서, 저 때문에 일이 이렇게..."
만복이의 얼굴이 어두웠다. 나는 그 앞에 섰다.
"네 탓이 아니야."
"저만 돌아가면 됩니다. 아씨는..."
"은서라니까." 내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안 돼. 너를 보내는 건 안 돼."
"왜요."
나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왜. 그걸 묻는 거야. 공방 때문이야. 장사 때문이야. 그것만은 아니야. 알잖아. 나도 알고, 너도 알잖아.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았다.
"만복아, 네 몸값이 얼마인지 알아?"
"예?"
"종의 몸값을 치르면 자유를 살 수 있어. 그게 조선의 법이야."
만복이의 눈이 커졌다. 자유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는 관아를 찾아갔다. 수령에게 만복이의 속량을 청원했다. 몸값으로 면포 사십 필을 내겠다고 했다. 일 년간 번 돈의 상당 부분이었다.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수령이 한양에 공문을 보냈고, 한 달 뒤 회답이 왔다. 김 대감, 아니 내 아버지가 수락한 것이었다. 계모의 반대가 있었을 테지만, 돈 앞에서는 계모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속량 문서가 발급되던 날, 만복이는 관아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문서를 들고 손이 떨리고 있었다.
"만복아, 이제 넌 자유야."
"...감사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눈이 붉어졌다. 평생을 남의 소유물로 살아온 사내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것이 된 순간이었다.
"이제 원하면 어디든 갈 수 있어. 더 이상 나를 따라다닐 의무도 없고."
만복이가 나를 보았다. 똑바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갈 곳이 있습니다."
"어디?"
"은서 곁입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웃음이 나왔다. 울음도 나왔다. 어느 쪽인지 모르게 두 가지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바보 같은 놈."
"예, 바보입니다."
그날 저녁, 공방 마루에서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만복이의 손이 내 손 위에 놓여 있었다. 거칠고, 두껍고, 화상 흉터가 남은 손.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손.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꽉.
더 이상 아씨와 머슴이 아니었다. 자유인 만복이와 장사꾼 은서. 우리는 처음으로 대등한 두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양에서 전해온 소식 중 하나가 내 가슴에 불을 질렀다. 아버지가 진짜로 편찮으시다는 것. 그리고 계모가 아버지의 재산을 빼돌리고 있다는 것. 이대로 두면 아버지는 빈털터리가 되고, 어머니가 남기신 모든 것이 계모의 손에 넘어갈 것이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도망만 치고 살 수는 없었다. 이제는 되돌아갈 때였다.
※ 7 금의환향, 무릎 꿇은 계모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은 일 년 전 내려왔던 길과 같았지만, 모든 것이 달랐다. 그때는 밤에 몰래 담장을 넘는 도망자였다. 지금은 마차를 타고, 하인을 거느리고, 공주 제일 염색집의 주인으로서 돌아가는 것이었다.
만복이가 마차 옆에서 말을 타고 나란히 갔다. 더 이상 뒤에서 짐을 지고 따라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곁에 서서 같이 가는 사람이었다.
"긴장되느냐?"
"아닙니다."
"거짓말."
만복이가 힐끗 웃었다. "조금."
나도 긴장되었다. 아니, 솔직히 두려웠다. 일 년 전의 나라면 이 두려움에 짓눌려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산적 앞에서 담판을 지었고, 불 탄 공방을 다시 세웠고, 방화범을 잡아 관아에 세웠고, 한 사람의 자유를 사서 돌려주었다. 이 모든 것을 해낸 사람이 계모 앞에서 무릎 꿇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한양에 도착하자 먼저 한 일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집안의 하인들 중 몇몇이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을 통해 알아낸 사정은 이러했다.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지신 뒤 거동이 불편해지셨다. 계모는 이를 틈타 집안의 재산을 자기 친정으로 빼돌리고 있었다. 논밭의 문서를 위조하고, 아버지의 도장을 멋대로 쓰고, 하인들의 입을 돈으로 막았다. 아버지는 알면서도 몸이 불편하여 어찌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증거를 모았다. 공주에서 방화범을 잡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위조된 문서의 원본과 사본을 대조하고, 친정으로 빠져나간 재물의 흐름을 추적하고, 하인들의 증언을 하나하나 모았다. 만복이가 한양 거리를 돌며 정보를 캐냈다. 관아의 아전, 시전의 상인, 주막의 주모까지, 그의 인맥은 놀라울 정도로 넓었다.
"은서, 증거가 충분합니다."
열흘이 걸렸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나는 아버지의 집을 찾아갔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하인들이 술렁였다. 일 년 전 밤에 도망쳤던 아씨가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아씨가 아니었다. 비단 저고리를 입고, 당당한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지르는 젊은 여인. 그 뒤를 자유인이 된 사내가 따르고 있었다.
계모가 대청에서 내려왔다. 일 년 만에 본 그 여자. 여전히 화려한 옷을 입고, 여전히 오만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보는 순간, 그 눈에 당혹함이 스쳤다.
"네가 무슨 낯짝으로..."
"어머님." 나는 차갑게 말을 끊었다. "아버지 뵈러 왔습니다."
"아비는 아프셔서 못 만난다."
"그러면 어머님과 먼저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품에서 문서 묶음을 꺼냈다. 계모의 얼굴이 변했다.
"이것은 지난 일 년간 어머님이 아버지의 도장을 위조하여 빼돌린 재산의 목록입니다. 논밭 여덟 마지기, 전답 문서 세 건, 은 삼백 냥. 모두 어머님 친정으로 옮겨졌지요."
"무, 무슨 헛소리를..."
"이것은 문서 위조의 증거입니다. 원본과 사본의 글씨가 다릅니다. 아버지의 진짜 필체가 아니지요."
계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리고 이것은 어머님이 하인들에게 입막음 비용으로 건넨 돈의 내역입니다. 하인 넷이 증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네, 네년이...!"
"어머님." 나는 한 발짝 다가섰다. "제가 이 증거를 한성부에 넘기면, 어머님은 재산 횡령과 문서 위조로 처벌받으실 겁니다. 양반 집안의 부인이 옥에 갇히는 꼴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대청이 조용해졌다. 하인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계모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일 년 전, 이 자리에서 나에게 마흔 넘은 사내와의 혼사를 통보하던 그 입술이.
"어머님이 빼돌린 재산을 모두 원위치시키고, 아버지 간병을 제대로 하시고, 다시는 아버지의 재산에 손을 대지 않으신다면 저는 관가에 고발하지 않겠습니다."
계모가 나를 노려보았다. 증오가 가득한 눈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두려움이 있었다. 내가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되어 돌아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눈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나는 말을 이었다. "일 년 전 저를 잡아오라고 보낸 사냥꾼 셋. 그 비용도 어머님 친정에서 치르십시오. 아버지의 돈으로 딸을 쫓지 마시고."
계모가 무릎을 꿇었다. 정확히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일 년 전 내가 이 집에서 당했던 모든 모욕이, 그 한 장면으로 돌아왔다.
통쾌했다. 하지만 동시에 허탈했다. 이것이 내가 원했던 것인가. 아니었다. 이 여자의 무릎이 아니라, 내 발로 선 내 삶이 원했던 것이었다.
아버지를 뵈었다. 수척해지셨지만, 나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은서야... 이 아비가 죄인이구나."
"아버지, 저는 잘 지냈습니다. 앞으로도 잘 지낼 겁니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만복이를 앞으로 불렀다.
"아버지, 이 사람은 저를 지켜준 사람입니다. 저와 함께 장사를 일으킨 사람입니다. 저는 이 사람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눈이 만복이에게 향했다. 만복이가 깊이 절을 올렸다. 아버지는 한참을 말이 없으셨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고맙다. 내 딸을... 지켜줘서."
집을 나서는 길, 만복이가 내 옆에 섰다. 한양의 거리에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은서."
"응."
"이제 어디로 갑니까?"
"공주로 돌아가야지. 공방이 기다리고 있잖아."
"그렇군요."
만복이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 거칠고, 두껍고, 화상 흉터가 남은 손. 산적 앞에서 나를 막아선 손. 불 속에서 어머니의 책을 건져낸 손. 장터를 뛰어다니며 주문을 받아온 손.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손.
"같이 가자, 만복아."
"예, 은서."
한양 거리 위로 두 개의 그림자가 나란히 걸어갔다. 아씨와 머슴이 아닌, 장사꾼 은서와 자유인 만복이로서. 그들의 앞에 놓인 길은 여전히 멀고, 험했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가장 값진 것은 계모에게 되갚은 복수가 아니었다. 맨손으로 일어선 내 두 발과, 그 옆에서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한 사내의 손이었다. 그리고 그 손을 잡고 걷는 이 길 위에서, 나는 처음으로 자유롭고, 처음으로 온전히 나 자신이었다.
【엔딩】
계모는 무릎을 꿇었고, 아버지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통쾌함보다 허탈함을 느꼈다. 진짜 값진 것은 복수가 아니었다. 맨손으로 일어선 내 두 발과, 그 옆에서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한 사내의 손이었다. 나는 만복이를 보았다. 그가 나를 보았다. 우리는 웃었다. 이것은 한 아씨와 한 머슴의 이야기. 신분이라는 벽 앞에서도, 세상이라는 폭풍 앞에서도 꺾이지 않은 두 사람의 기록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