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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승과 저승사자의 담판

황금 인생 21 2025. 4. 15.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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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승과 저승사자의 담판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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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크립션

    백 살을 넘긴 고승은 어느 날 자신을 데리러 온 저승사자와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로 저승사자에게 담판을 제안하죠. 단순한 해탈이 아닌, 사람들을 위한 마지막 깨달음을 전하려는 스님의 마지막 수행. 저승사자와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 존재와 업보, 그리고 진정한 이별의 의미를 담은 전설을 만나보세요.

    ※ 백 살을 맞이한 고승, 마지막 예감을 느끼며 홀로 좌선에 들다

    지리산 깊숙한 골짜기, 나무에 이끼가 끼고 바위마다 고요한 이슬이 맺히는 절간. 사계절이 흐르는 동안 어느덧 백 년을 살아낸 한 고승이 있었다. 이름은 법현. 이름보다 오래된 얼굴엔 주름이 새겨졌고, 손마디 하나하나엔 긴 세월이 깃들어 있었다. 제자도, 중생도 없이 혼자 사는 그의 거처엔 부처님의 경전이 가득했고, 탁발 그릇엔 겨우 죽 한 그릇만이 남겨졌다.

    이날 따라 아침의 바람은 유난히도 선명했다. 소슬한 바람이 문풍지를 울릴 때, 법현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작은 목탁을 툭, 치며 좌선에 들었다. 깊은 숨을 들이쉬자, 산 아래에서부터 불어오는 낙엽 냄새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오늘이구나…”

    그는 누구에게 말하는 것도 아닌 듯 중얼거렸다. 백 살을 살아낸 스님의 감각은 세월과 함께 무뎌진 듯 보였지만, 죽음이 다가오는 기척만큼은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속세의 인연을 모두 내려놓고, 이제는 생과 사 그 경계에서 마지막 호흡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감겨 있었지만, 마음은 열려 있었다. 들숨과 날숨 사이, 짧은 공백 속에서 스님은 한평생을 돌아보았다. 열다섯에 출가해, 이십 년 동안은 경전으로 마음을 다듬고, 사십 년 동안은 중생의 고통을 어루만졌으며, 마지막 사십 년은 고요 속의 고요를 좇으며 홀로 산에 들었다.

    “허나, 이 생은 끝이 아니지. 인연 따라 흘러가는 것일 뿐…”

    법현은 문득, 문밖의 그림자를 느꼈다. 마치 누군가 이 절간의 경계를 넘어온 듯한 낯선 기운. 눈을 감고 있지만, 백 살 스님의 감각은 속세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순간, 찬 기운이 방안을 스쳤다.

    “왔구나.”

    고승은 눈을 떴다. 누군가 서 있었다. 흰 도포 자락이 살랑이고, 머리엔 검은 갓. 명부를 들고 천천히 다가오는 자. 고요한 저승의 기운을 두른 이 사내는 다름 아닌 저승사자였다. 대개라면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겠지만, 법현은 그를 바라보며 잔잔히 웃었다. 그 웃음은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맞이하는 듯 따뜻했다.

    “자네가 드디어 왔군. 오래 기다렸네.”

    저승사자는 말이 없었다. 그저 명부의 글자를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님의 이름은 분명히 적혀 있었다. ‘법현(法玄) — 백세, 오늘 입적.’ 그러나, 저승사자는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문득 망설였다.

    법현의 눈은 생을 초월한 자의 눈이었다. 삶과 죽음이 구분되지 않은, 마치 한 송이 연꽃처럼 피고 지는 것을 함께 품은 눈동자. 그것은 단지 목숨을 마친 노인의 눈빛이 아니었다. 마치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처럼 보였다.

    스님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눈을 감지 않은 채,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아직은 아니다.”

    저승사자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는 명부대로 움직이는 사자에게는 처음 듣는 대사였다. 사람들은 죽음을 피하려 애원하거나, 혹은 순응하거나, 아무 말도 못 하고 떨며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스님은 달랐다. 그는 오히려 죽음을 반겨 맞이하면서도, “지금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남겨야 할 말이 있다. 나를 데려가려면… 먼저 담판을 지어야겠지.”

    바람이 절집 마루 밑을 스치듯 지나가며 나뭇잎을 흔들었다. 그 소리는 마치 이승과 저승 사이, 긴 교섭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같았다.

    ※ 저승사자의 등장, 고승과 첫 마주침의 묘한 정적과 시선

    그는 방 안에 있었다. 아니, 방 안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방 안은 그가 된 듯했다. 공기가 달라졌다. 법현 스님의 좌선 방 안은 바람 한 점 없었지만, 저승사자가 발을 들인 순간 차가운 습기가 바닥에서 올라오는 듯한 서늘함이 피어올랐다.

    흰 도포 자락은 흙바닥을 스치지도 않았고, 검은 갓 아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실루엣만 어렴풋이 드러났다. 하지만 스님은 눈을 감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을 본 자의 눈이었다. 그 어떤 생명체도, 그 어떤 영혼도 거기선 스님의 앞에선 숨을 숨길 수 없었다.

    “자네가 참 늦었구먼.”

    법현의 입가엔 잔잔한 웃음이 걸렸다. 말끝은 따뜻했지만, 그 안엔 미묘한 장난기까지 섞여 있었다. 생사를 초월한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담담함이었다.

    저승사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명부를 다시 펼쳐 스님의 이름을 확인하고, 그의 수명을 가리킨 줄을 꾹 눌러 확인하듯 읽었다. "오늘 자시(子時), 백세 입적. 명부에 기록된 대로"라는 뜻이 손끝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법현은 그 눈빛을 마주하고 있었다. 눈길이 닿은 순간,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무언가 말할 듯, 그러나 말하지 않는 존재와의 조우. 그것은 인간과 신, 혹은 인간과 신이 아닌 존재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아주 깊은 침묵이었다.

    법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왔네. 사람들은 죽음을 피하려 애쓰지만… 난 자네와의 만남을 곧 깨달음이라 여겼지.”

    저승사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감정은 없으되, 그 흔들림에는 일순간 “예상과 다른 인간”을 만났다는 이질감이 담겨 있었다.

    법현은 손가락을 들어 아직도 남아 있는 차 한 잔을 가리켰다.

    “차 한 잔 하겠나? 자네와 마주앉아 나눌 이야기가 많을 듯해서.”

    차는 식어 있었지만, 그 제안에는 무언의 권위가 있었다. 무기는 없지만, 그 자리에선 스님이 곧 바람이고, 말씀이 곧 경전이며, 몸은 고요한 산 자체였다. 저승사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 없이, 그는 조심스레 스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두 존재는 마주 앉았다. 하나는 죽음을 수천 번 목격한 자, 하나는 죽음 앞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는 자. 이윽고 법현이 목소리를 낮췄다.

    “자네는 무수한 혼들을 이끌었을 터. 허나… 단 한 명이라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자를 만난 적 있는가?”

    저승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존재는 말이 아니라 이끌림이고, 결정을 받드는 자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결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법현이라는 한 사내 앞에서.

    “나는 내 생의 끝을 이미 준비했네. 하지만 아직 하지 못한 말이 하나 있지. 그것을 마치기 전까진, 자네와 함께 갈 수 없네. 그러니…”

    스님은 미소 지으며 다시 말했다.

    “내가 자네와 함께 가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은 아니다’라는 뜻일세. 자네도 그 뜻을 이해하리라 믿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는 다시 한 번 무거워졌다. 침묵 속에서 저승사자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스님의 눈동자 속에서 어떤 기억, 어떤 진실이 반사되어 그의 얼굴을 비췄다.

    무표정한 사자의 얼굴에 아주 잠깐, 인간의 표정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슬픔도, 분노도 아닌… 어쩌면 이해와 공감의 기척이었다.

    스님은 다시 말 없이 눈을 감고 좌선의 자세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방 안의 중심은 더 이상 저승사자가 아닌, 스님이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저승사자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부를 덮고, 갓을 고쳐 쓰고, 문밖으로 나섰다. 발자국 소리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뒤에도, 법현은 눈을 뜨지 않았다. 방 안은 다시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는 더 이상 죽음을 향한 정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과 죽음 사이, 단 한 줄기 미소가 만들어낸 시간의 유예였다.

    ※ 고승의 단호한 한마디 “아직 갈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말하다

    사흘이 지났다.
    저승사자는 떠났고, 스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방 안엔 여전히 불향이 맴돌았고, 문풍지는 고요히 흔들렸으며, 차가운 바람은 절집 마루를 따라 조용히 흘렀다.

    법현은 입을 닫고 있었지만, 눈빛은 살아 있었다. 그 눈빛은 오히려 살아 있는 자들보다 더 맑고 깊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지 않는 동안에도,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마을에는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스님이 백 살을 맞고도 죽지 않았다더라.”
    “죽으러 온 저승사자가 그냥 돌아갔단다.”
    “그 절간엔 뭔가 다른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아.”

    사람들은 두려움 반, 경외심 반으로 절을 찾았고, 절의 문 앞에 제물이 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법현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준비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말’을.

    그리고, 열흘째 되던 날 밤.
    다시 그가 왔다.
    저승사자였다. 지난번처럼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흰 도포는 먼지 하나 없이 반듯했고, 검은 갓 아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첫 만남보다 더 조심스러운 기척이 있었다.

    법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자네, 또 왔구먼. 기다렸네.”

    저승사자는 명부를 펴들었다.
    “입적일을 열흘 넘겼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스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네. 아직 할 말이 남았으니.”

    “무슨 말입니까?”

    그 순간, 법현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무릎 위에 손을 얹은 채, 아주 또렷하게 말했다.

    “아직 갈 수 없습니다.”

    그 말은 평범하지 않았다. 단호했고, 완강했으며, 그 안엔 진심이 있었다.
    저승사자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역할은 정해진 운명을 따르는 것이다. 인간이 죽으면 영혼을 데려가는 것, 그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노승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침착하게, 마치 생사의 모든 이치를 꿰뚫은 자처럼.

    “당신은 이미 백 살을 넘겼습니다. 수행은 충분했고, 삶도 다했습니다. 더 무엇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법현은 잠시 눈을 감고, 한숨처럼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아직 떠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네.
    나는 아직 ‘말’을 전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말이라뇨?”

    “세상이 너무 시끄럽지 않은가. 사람들은 탐욕에 찌들고, 말은 독이 되고, 마음은 갈피를 잃었지.
    나는 오래전부터 이 세상의 마지막 경계에 서 있었네. 그러다 깨달았지. 내가 입을 다문 채 죽는다면, 나의 마지막 깨달음은 이 세상에 남지 않을 것이라는 걸.”

    저승사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법현은 이어 말했다.

    “사람들은 말이라고 하면 가르침만을 떠올리지.
    허나 내가 남기려는 건… 그들이 평생 잊지 못할 단 하나의 문장일세.
    그 문장이 전해지지 않으면, 나는 완전하지 않은 자가 되고 말지.”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저승사자는 명부를 다시 펼쳤다.
    거기엔 여전히 ‘법현, 입적’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줄이 흐릿해져 있었다. 날짜는 정해져 있었지만, 시간은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죽음’이 스스로 기약을 유예한 듯한 흔적이었다.

    그는 다시 묻는다.

    “그 문장을… 언제 말할 생각입니까?”

    법현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내일 아침이면 될 걸세. 새벽 바람이 마을로 내려가고,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들에게 나의 마지막 말을 전하고, 내가 해탈한 이유를 들려주면…
    그때는 자네를 기꺼이 따라가겠네.”

    저승사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는 그 노인을 데려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마지막 말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법현은 다시 눈을 감았고, 방 안은 고요했다.
    죽음을 미룬 한 마디.
    삶을 연장한 단 한 줄.
    그 말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운명을 바꾸고 있었다.

    ※ 저승사자와 고승의 대화 – 삶, 죽음, 해탈에 대한 철학적 논쟁

    새벽이 오기 전의 깊은 어둠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산짐승의 울음도 잠잠했고, 바람조차 숨을 죽인 듯 절간 주변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이불을 덮은 듯한 어둠 속에서, 고승 법현은 눈을 떴다.

    그는 조용히 촛불을 켜고, 오래된 찻주전자를 불에 얹었다. 푹 끓은 물이 도자기 찻잔에 닿자, 향긋한 차 내음이 서서히 퍼져나갔다. 마치 그의 생각처럼, 서서히 그러나 뚜렷하게 피어나는 향기였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다시 문이 열렸다.

    저승사자가 조용히 들어섰다. 도포 자락은 여전히 바람 한 줄기 일으키지 않았고, 그의 손에는 여전히 명부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눈빛이 달랐다.
    경계가 아닌 궁금함, 명령이 아닌 이해의 기미가 그 눈빛에서 번졌다.

    법현은 그를 보며 말했다.

    “자네, 다시 왔군. 찻잔 하나 준비해 두었네.”

    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리에 앉아 조용히 찻잔을 받아들었다.
    스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죽음은… 두려운가?”

    저승사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나는 죽음을 지켜보는 자이며, 이끄는 자이니까요.”

    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죽음은 결국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네.
    나는 내 생의 시작이 한 아이의 울음에서 비롯됐음을 기억하네.
    하지만 죽음은 울음이 아니라, 침묵이더군. 그 침묵이 말하는 게 있지.”

    “무엇을 말합니까?”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것.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결국 아무것도 갖고 갈 수 없다는 것.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해탈’에 다다르게 되지.”

    저승사자는 그 말을 곱씹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당신은 ‘지금은 갈 수 없다’ 했습니까? 해탈한 자라면, 죽음을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법현은 천천히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 속의 찻물이 떨림 없이 맑았다.

    “나는 죽음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책임을 다하려 한 것일세.
    깨달음이란 홀로 얻어선 부족하네. 반드시 누군가와 나눌 때, 그것이 진짜가 되지.”

    “책임…이라.” 저승사자가 낮게 읊조렸다.

    “그대는 죽음을 인도하는 자지만, 동시에 죽음을 목격하는 자이기도 하지.
    수많은 이들이 삶을 끝내며 무슨 말을 남기는지 자네는 잘 알고 있을 테지.”

    “예. 대부분은 후회요. 때론 원망이요. 또는… 미련입니다.”

    “그래. 그러니 그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가 ‘남겨야 할 말’을 마치지 못한 채 죽는다면, 그건 생의 단절이지. 나는 그 단절을 막고 싶은 것일세.”

    저승사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죽음을 초월한 사람이군요.”

    법현은 웃음을 머금었다.

    “아니. 나는 여전히 인간이네. 다만, 그 인간으로서 죽음을 그저 또 하나의 문이라 여길 뿐.”

    그들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말없이 차를 마셨다. 그리고 문득, 저승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스님. 해탈이란 정확히 무엇입니까?”

    법현은 그 물음에 오래도록 침묵했다. 마치 그 한 마디에 온 우주가 담겨 있는 듯한 표정으로, 아주 천천히 대답했다.

    “해탈이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도 모든 것을 품는 것.
    사랑도, 분노도, 미움도, 연민도… 다 느끼되, 그 어느 것도 나를 흔들 수 없는 상태.
    그게 바로 내가 배운 ‘비움’이지.”

    저승사자는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처음으로 인간의 감정을 느낀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스님의 앞에 무릎을 꿇고, 명부를 닫았다.

    “이제 이해했습니다. 당신의 죽음은 단순한 한 사람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건, 누군가에게 남겨질 하나의 가르침이자…
    세상을 향한 마지막 빛이겠지요.”

    법현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내일. 내가 해야 할 말을 마치고… 자네를 따라가겠네.
    그땐 미련도, 후회도 없을 것이야.”

    저승사자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더 이상 데려가는 자가 아니었다. 이제는 기다리는 자가 되었고, 배우는 자가 되었다.

    ※ 스님의 제안, “내가 마지막으로 깨달음을 전할 시간이 필요하오”

    새벽녘, 하늘이 은은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붉은빛이 산등성이를 물들이며 밤을 밀어내는 순간, 절간의 종각에서 ‘둥—’ 하고 묵직한 종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마치 스님의 내면에서 퍼져 나온 듯한 울림이었다.
    법현은 법복을 고쳐 입고 마당으로 나섰다.
    백발이 새하얗게 흩날리고, 마른 손에는 목탁 대신 작은 지팡이 하나만 들려 있었다.

    산 아래 마을에서는 작은 떨림이 일기 시작했다.
    누군가 외쳤다.
    “스님이 나오셨다…!”

    오랜 세월 동안 침묵 속에 살아온 스님이, 오늘 아침 직접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소식은 구전처럼 퍼졌고, 삽시간에 사람들은 절로 모여들었다.
    농부, 상인, 아이를 업은 어미, 먼 고을에서 온 나그네까지.

    그들은 조용히 마당 한가운데로 자리를 잡고 앉았고, 숨소리마저 삼킨 채 스님의 입을 주시했다.
    법현은 나무 의자에 조용히 앉았고, 저승사자 역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그 뒤편에 서 있었다.

    이윽고 법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그대들은 내게 더 이상 중생이 아니오.
    나는 오늘, 그대들을 친구로 부르고 싶소.”

    사람들 사이에 잔잔한 술렁임이 일었다.

    “나는 백 해를 살았소. 그 세월 동안 수많은 중생의 고통을 보았고, 그보다 더 많은 어리석음을 보았지.
    하지만 가장 무서운 건… 자신조차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이었소.”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뒤편에서 저승사자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내게 죽음을 알리러 온 이가 있었소. 그 존재는 자비도, 증오도 없는 자였지.
    하지만 나는 그 앞에서 이렇게 말했소.
    ‘아직 갈 수 없습니다.’
    왜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그는 마치 자신에게 묻듯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러곤 눈을 들어 군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살아있는 그대들이여. 제발, 삶을 단순히 ‘견디는 것’으로 여기지 마시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소.
    지금, 이 순간 그대가 내뿜는 숨결 안에 있소.
    그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나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고,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지도 보일 것이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눈물짓는 이도 있었고, 조용히 두 손을 모으는 이도 있었다.

    “내 깨달음은 이렇소.
    사람은 스스로 빛나는 별이 될 수 없소.
    하지만 서로를 비춰주는 달빛이 될 수는 있소.
    그 빛으로 서로를 비추면, 어둠은 금세 걷히게 마련이오.”

    그는 천천히 일어나 마지막 말을 남겼다.

    “오늘 나는 내 마지막 ‘말’을 마쳤소.
    이제 더 이상 미련도 없고, 갈 곳도 두렵지 않소.
    이제… 떠날 준비가 되었소.”

    사람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만큼 그가 남긴 말은 무겁고 따뜻했으며,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그 순간, 저승사자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이번엔 아무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 중 일부는 눈물짓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봤다.

    스님은 그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이제야… 자네를 따라갈 준비가 되었네.”

    저승사자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그는 데려가는 자가 아니라, 한 깨달은 자의 여정을 마무리 짓는 동행자가 되었다.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햇살은 법현의 어깨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 빛은, 마치 고요한 환희처럼 절간 마당을 감쌌다.

    ※ 마을 사람들에게 남긴 마지막 가르침, 고승의 눈부신 하루

    스님의 말이 끝났음에도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누군가는 땅에 주저앉은 채 울었고, 누군가는 두 손 모은 채 하늘을 바라보며 한참을 눈을 감았다.
    절간 마당엔 말보다 깊은 침묵이 깔렸고, 그 침묵 안에서 모든 이가 자기 안의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법현은 사람들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붙잡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남은 하루를 쓰기로 했다. 말을 전한 자로서, 마음을 전하는 자로서.

    스님은 절 뒤편 대나무 숲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기척을 느끼고 아이 하나가 뒤따랐다. 얼굴에 먼지를 묻힌 열 살 남짓한 아이였다.
    스님은 아이를 돌아보며 따뜻하게 웃었다.

    “너는… 어찌 여기에 남았느냐.”

    “스님이요… 죽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아직… 말 더 해주셔야 하잖아요.”

    법현은 아이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아이와 같은 눈높이로 앉았다.

    “잘 들으렴.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기억은 남는단다.
    네가 지금 나와 나눈 이 말, 이 침묵, 이 웃음… 그것도 기억이지.
    사람은 결국, 서로의 기억으로 사는 존재란다.”

    아이의 눈이 커졌다.

    “그럼, 스님은 죽어도… 남는 거예요?”

    스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내가 네 마음 안에 이렇게 남는다면, 나는 결코 사라지는 게 아니란다.”

    아이의 눈엔 눈물이 고였고, 그는 도망치듯 뛰어 마당으로 달려갔다.
    스님은 한참을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절 안으로 들어가자, 마침 방 한편에서 아침 공양을 준비하던 중년 여인이 깜짝 놀라 맞았다.

    “스님, 이제 좀 쉬셔야지요. 몸도 약하신데…”

    법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이 하루가, 백 년을 산 시간 중 가장 소중하네.
    하루를 더 살아도 의미가 없다면, 그 삶은 오래된 껍데기일 뿐이야.
    하지만 하루를 살더라도 마음을 나누면, 그것은 영원의 씨앗이 되지.”

    그 말에 여인은 눈을 돌렸다. 스님은 여인의 손을 가만히 덥석 잡았다.

    “그대의 손이 따뜻하구려. 누군가에게 밥을 지어주는 일은 가장 거룩한 수행이오.”

    여인은 끝내 울음을 삼키지 못했다. 그 눈물은 연민도, 감사도, 미안함도 함께 섞인 것이었다.

    스님은 마지막으로 법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부처님 앞에 가만히 무릎을 꿇었다.

    그는 합장한 채 중얼거렸다.

    “이 몸 법현, 백 해를 살았고, 이제 떠나려 하오.
    하지만 그대가 가르쳐준 ‘자비’는 내 안에 깊이 남았고,
    오늘 내가 전한 말이 그 자비의 향기로 남길 바라오.”

    그 순간, 창 밖에서 한 줄기 햇살이 법당 안으로 비쳐들었다.
    스님의 얼굴 위로 맑고 따뜻한 빛이 스며들었고, 마치 부처가 웃으며 그를 반겨주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저승사자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스님의 뒷모습을 보고는 잠시 멈춰 섰다.
    그의 손에 들린 명부는 더 이상 검은 글자가 아니었다.
    이름은 여전히 ‘법현’, 그러나 옆에는 작게 한 줄이 덧붙여져 있었다.

    “마지막 깨달음을 세상에 전하고 떠난 자.”

    스님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자네, 기다려줘서 고맙네.
    이제 나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군.”

    저승사자는 조용히 다가와 그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이 순간은 데려가는 것도, 남겨지는 것도 아닌—
    그저 ‘마지막을 지켜주는’ 침묵이었다.

    스님은 자리에 누워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바람이 문풍지를 흔들고, 대나무가 흔들렸다.
    아이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스님— 꼭 다시 와요! 내 꿈에라도요!”

    그 말에 스님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숨소리는 가늘었고, 고요했으며,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절간의 공기는 한층 더 따뜻해져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 하나 울지 않았다.
    그들은 스님의 마지막 하루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 다시 나타난 저승사자, 스님과의 마지막 인사와 평화로운 입적

    대나무 숲 사이로 찬란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절집 마당엔 여전히 사람들이 남아 있었지만, 누구 하나 큰 소리로 떠들지 않았다.
    스님의 마지막 말, 마지막 걸음, 마지막 웃음이 모두에게 깊은 울림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마당 가장자리에서 소곤거렸고, 노인은 뜨거운 차를 손에 쥔 채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그를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속삭이듯 서로에게 말했다.

    “스님은… 떠난 게 아니라, 돌아가신 거야. 본래 자리로.”

    법현의 몸은 이제 조용히 법당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그의 얼굴은 살아 있을 때보다도 편안했고, 두 눈은 감긴 채로도 뭔가를 깊이 응시하고 있는 듯했다.
    합장한 두 손 사이에는 그가 아끼던 오래된 염주 한 줄이 고요히 놓여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 말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흰 도포에 검은 갓.
    오랜 침묵의 그림자— 저승사자였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는 공포를 주는 자가 아니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스님의 몸 앞으로 조용히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그 손엔 더 이상 검은 명부가 아닌, 은은한 빛이 흐르는 새로운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단 한 줄만이 적혀 있었다.

    “백 세 고승 법현, 세상에 마지막 깨달음을 전하고… 스스로 떠남을 허락하다.”

    저승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절을 올렸다.
    그의 절은 단지 의례가 아니었다. 그것은 ‘존경’이었다.
    천 명, 만 명의 혼을 데려간 존재가— 단 한 사람 앞에서 절을 한 순간이었다.

    그때, 갑작스레 법당 뒤편의 창이 스르르 열리며, 산 바람이 안으로 밀려들었다.
    염화미소(拈華微笑).
    그 바람에 법현 스님의 입가가 살짝 올라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숨을 삼켰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스님이… 웃으셨어…”

    한 아이가 조용히 중얼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염주는 스르르 손을 벗어나 바닥에 놓였다.
    무언의 작별.
    말 없는 마지막 인사.

    저승사자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뒷모습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그는 문을 나서며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그 인사는, 마지막 배웅이자 조용한 경배였다.

    그가 사라진 후, 하늘에 한 줄기 하얀 구름이 길게 늘어졌다.
    그 길은 마치 누군가를 위한 길처럼 곧고 환했다.
    누군가는 말했다.

    “스님은… 그 길을 따라 가셨을 거야.”

    해는 점점 더 높아졌고, 햇살은 절간을 더욱 따뜻하게 감쌌다.
    어느새 대숲에는 작은 새들이 날아들기 시작했고, 부처님 상 앞에는 한 송이 노란 들국화가 놓였다.
    누가 두고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법현 스님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은 여전히 남아 사람들의 가슴에서 살아 있었다.

    살아 있는 자들이 마음속으로 조용히 읊었다.

    “사람은 스스로 빛나는 별이 될 수 없지만, 서로를 비춰주는 달빛은 될 수 있다.”

    그는 떠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영원히 남은 것이었다.

    영상용 엔딩 멘트

    “백 세를 살아낸 고승은 죽음을 맞이하며 가장 따뜻한 하루를 남겼습니다.
    죽음을 거부했던 것이 아니라, 세상에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말은 오늘, 당신의 마음에도 머물렀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저승길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당신은 어떤 마지막 말을 남기시겠습니까?”

    썸네일 문구

    백 살 스님이 저승사자에게 한 말… ‘지금은 못 갑니다’
    죽음을 거부한 스님… 저승사자도 물러났다?
    저승사자 앞에서도 웃은 스님…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죽음을 유예한 단 한 사람… 백세 고승의 전설
    ‘죽음보다 먼저 전할 말이 있다’ 스님의 마지막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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