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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통교 아래, 은밀한 거래의 밤 (출처: 어우야담)
※ 태그 (2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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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250자 내외)
달빛조차 흐르기를 멈춘 한양의 광통교 아래. 매일 밤, 장막 뒤의 여인이 세상에 없는 귀한 물건을 판다. 신분을 숨긴 사내는 그녀의 물건이 아닌 비밀을 사려 하고, 권력자는 그녀의 재주를 통째로 삼키려 한다. 비단실보다 위태롭고, 칠흑보다 깊은 그날 밤의 은밀한 거래. 과연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은 파멸일까, 구원일까.
※ 디스크립션 (300자 내외)
역모죄로 몰락한 양반가의 여인 '서화'. 그녀는 생계를 위해 매일 밤 광통교 아래에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정교한 수공예품을 팝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분을 숨긴 의금부 도사 '이건'이 그녀의 물건에 관심을 보이며 접근합니다. 한편, 그녀의 비범한 재주를 탐내는 세도가의 검은 손길 또한 뻗쳐오기 시작하는데... 한양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피어난 가장 뜨거운 사랑과 정의. 야담도감에서 그 은밀한 밤의 기록을 펼칩니다.
※ 광통교의 장막 뒤 여인
한양의 심장을 가로지르는 개천, 그 위로 수많은 사연이 발자국처럼 찍혀있는 광통교. 낮에는 오가는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지만, 자시가 가까워 오는 깊은 밤이 되면 이곳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도성 안의 모든 어둠과 비밀이 개천의 퀴퀴한 물비린내와 함께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곳. 그곳은 법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자들의 해방구요,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무법지대였다. 그날 밤도 광통교의 가장 깊숙한 교각 아래, 희미한 등불 하나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등불 앞에는 작은 좌판이 펼쳐져 있었고, 그 뒤에는 얇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그림자처럼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장막 뒤의 여인'이라 불렀다. 그녀가 파는 것은 화려한 비단 주머니와 정교한 수술 장식들이었다. 하지만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한 땀 한 땀 수놓아진 학과 소나무는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생생했고, 작은 주머니에 수놓인 꽃잎에서는 실제 향기가 나는 듯했다. 그 비범한 솜씨 덕분에, 그녀의 좌판은 알음알음 찾아오는 손님들로 늘 조용한 활기를 띠었다. 그녀의 진짜 이름은 서화.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사대부가의 어엿한 여식이었으나, 아버지가 역모의 누명을 쓰고 가문이 풍비박산 나면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비운의 여인이었다. 병든 노모와 어린 동생의 생계를 위해, 그녀는 규방 아씨의 고왔던 손으로 밤의 상인이 되는 길을 택해야만 했다. 그날따라 유난히 밤안개가 짙었다. 서화는 옷깃을 여미며 좌판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묵직한 가죽신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그녀의 좌판 앞에 멈춰 섰다. 고급 비단으로 지은 도포에 잘 벼린 먹물 냄새가 풍기는 것으로 보아 범상치 않은 신분의 선비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내는 말없이 좌판 위의 물건들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소나무 가지에 앉은 학이 수놓인 비단 주머니에 머물렀다. "참으로 빼어난 솜씨로군. 이 정도의 솜씨라면, 궐내 수방 나인이라 해도 믿겠소." 나직하게 감탄하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는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움이 숨어 있었다. 서화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신분이 드러나서는 안 되었다. "주머니 하나를 사려 하오. 값을 얼마에 치르면 되겠소?" 서화가 작은 나무판에 붓으로 가격을 적어 보여주었다.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엽전 꾸러미를 꺼내 좌판 위에 놓았다. 셈을 할 필요도 없을 만큼 넉넉한 액수였다. 그가 주머니를 집어 들고 돌아설 때였다. "이런 귀한 재주를 가진 이가 어찌하여 이런 어두운 곳에 숨어있는 것이오?" 그의 질문은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했다. 서화의 등이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내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서화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단순한 손님은 아니었다. 한편, 사내는 광통교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하와 마주쳤다. 그의 정체는 신분을 숨기고 한양의 비리를 파헤치던 의금부의 도사, 이건이었다. "찾으시던 물건이 맞습니까, 나리?" 수하의 물음에 이건은 방금 산 비단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래. 이 자수의 기법… 얼마 전, 왜국과의 밀거래 현장에서 발견된 비단함에 새겨져 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건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는 지금 나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거대한 밀수 조직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직의 수괴로 지목되는 인물은 바로 막강한 권세를 누리는 허 판서였다. "저 여인을 주시하게. 허 판서와 분명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섣불리 접근하지는 마라. 아마추어가 아니야." 이건은 다시 한번 여인이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장막 너머로, 그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과 강인한 의지를 동시에 읽었다. 단순한 범죄의 하수인이 아니었다. 그 이면에 거대한 사연이 숨어 있음을 직감했다. 그날 밤, 이건의 머릿속은 온통 비단 주머니의 정교한 수와 장막 뒤 여인의 미스터리한 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위험한 손길과 뜻밖의 구원
며칠 뒤, 서화는 그날 밤의 서늘한 눈빛을 가진 선비를 잊으려 애쓰며 다시 광통교 아래에 좌판을 펼쳤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처럼 틀리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막 좌판을 정리하고 돌아가려던 찰나,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 두 명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저잣거리의 왈패들과는 다른,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자들 특유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네년이 밤마다 여기서 요망한 물건을 판다는 장막 뒤의 계집이냐?" 대장 격으로 보이는 사내가 음흉하게 웃으며 서화의 턱을 거칠게 쥐었다. 서화는 비명을 삼키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사내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우리 대감께서 네년의 손재주가 그리 용하다 하여 한번 보러 오셨다. 얌전히 따라오시지." 그들이 말하는 대감이란, 며칠 전부터 집요하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공방으로 들어오라 종용하던 허 판서임이 분명했다. 서화는 그의 악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재주 있는 장인들을 헐값에 부리다 단물이 빠지면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말을 듣지 않으면 온갖 비열한 방법으로 괴롭히는 자였다. "싫습니다! 저는 누구의 밑에서도 일할 생각이 없습니다." 서화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사내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이년이 좋게 말할 때 듣지 않으니, 험한 꼴을 당해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사내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어두운 교각 뒤편으로 끌고 가려던 순간이었다. "거기서 멈추거라." 어둠 속에서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며칠 전 비단 주머니를 사 갔던 바로 그 선비, 이건이었다. 그는 여전히 선비의 모습이었지만, 온몸에서는 검으로 단련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팽팽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뉘신데 남의 일에 참견이오? 목숨이 아깝지 않거든 제 갈 길이나 가시오!" 사내들이 경고했지만, 이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 여인을 놓아주거라. 내 그리 말했을 텐데."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사내 하나가 주먹을 휘두르며 이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건의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이건은 가볍게 몸을 피하며 사내의 팔을 꺾어 순식간에 제압했다. 비명과 함께 사내가 바닥에 나뒹굴자, 남은 한 놈은 겁을 먹고 제 동료를 버려둔 채 줄행랑을 쳤다.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자, 이건은 놀라 굳어있는 서화에게 다가갔다. "괜찮소? 다친 데는 없소?" 그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달리 한결 부드러웠다. 서화는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건은 그녀가 주저앉으려 하자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부축했다. 그의 품에 안기게 된 서화는 당황하여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의 단단한 가슴팍과 은은한 먹물 냄새에 순간 저항을 잊었다. 남자의 품에 안겨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이곳은 위험하니, 우선 피하는 것이 좋겠소. 내가 잠시 머무는 곳이 근처에 있소." 그는 서화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좌판을 정리해 챙겨 들고는 앞장섰다. 서화는 얼떨결에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작은 주막의 별채였다. 그는 서화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고는, 아까 사내에게 붙잡혔던 그녀의 팔목을 살폈다. 붉게 멍이 든 자국을 본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말없이 약상자를 가져와 손수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상처에 닿자, 서화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허 판서의 사람들이오?" 이건의 물음에 서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의 수하에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오." 그의 목소리에는 경고와 함께 깊은 연민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촛불 아래 마주 앉은 두 사람. 그는 왜 자신을 도와주는 것일까. 그녀는 대체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서로에 대한 궁금증과 경계심, 그리고 알 수 없는 끌림이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채웠다. 이건은 그녀의 얼굴을 가린 장막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것을 걷어내려 했다. 서화는 반사적으로 피하려 했지만, 그의 진지한 눈빛에 저항을 멈췄다. 이윽고 장막이 걷히고, 촛불 아래 그녀의 온전한 얼굴이 드러났다. 역모죄인의 딸이라는 낙인이 찍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에는 고고한 기품과 총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순간 숨을 삼켰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위험한 사건의 용의자가 아닌, 슬픔을 간직한 한 떨기 수선화 같은 여인이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지만, 이미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위험한 구원 속에서 싹튼 미묘한 감정의 불씨는, 걷잡을 수 없는 운명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 비단 위를 오가는 밀담
그날 밤 이후, 서화는 두려움에 며칠 동안 광통교에 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병든 노모의 약값과 어린 동생의 끼니를 생각하면 마냥 숨어 지낼 수만은 없었다. 그녀가 다시 좌판을 펼 용기를 내지 못하고 고뇌하던 어느 날, 이건이 그녀의 허름한 초가집으로 직접 찾아왔다. 쌀과 약재를 들고 찾아온 그의 등장에 서화의 가족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지나가던 나그네’라 둘러대고는, 서화에게 잠시 이야기를 나눌 것을 청했다. 두 사람은 집 근처의 작은 개울가에 나란히 앉았다. “어찌 이곳을….” 서화의 물음에 이건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신에 대해 알아보았소. 부친이셨던 서 참판께서는 훌륭한 분이셨지. 역모라니… 말도 안 되는 누명이오.” 그의 말에 서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버지가 역모죄로 돌아가신 이후, 모두가 자신들을 죄인 취급하며 손가락질할 때, 그의 억울함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상처를 알아주는 그에게, 서화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건은 본론을 꺼냈다. 그는 품에서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 보였다. 얼마 전 밀거래 현장에서 증거물로 수거한 것이었다. “이것 역시 당신의 솜씨인 것 같소만.” 그가 내민 주머니는 분명 서화가 만든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녀가 판 기억이 없는 물건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물건을 훔쳐 다른 곳에 비싼 값으로 팔아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허 판서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허 판서는 단순한 탐관오리가 아니오. 그는 왜국과 내통하여 나라의 귀한 물건들을 밀수출하고, 그 자금으로 조정을 어지럽히려는 역심을 품고 있소. 나는 지금 그 증거를 찾고 있소.” 그는 마침내 자신의 진짜 목적을 털어놓았다. 의금부의 도사라는 신분까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가 단순한 선비가 아님을 서화는 직감했다. “저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물건을 만들어 팔았을 뿐입니다.” “알고 있소. 하지만 나를 도와주시오. 허 판서를 잡아야, 당신 아버지의 누명도 벗길 수 있소.” 이건은 서화에게 위험한 제안을 했다. 허 판서가 탐낼 만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주 특별한 자수품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비밀 표식을 넣어달라고 했다. 그것을 미끼로 허 판서를 덫으로 유인하려는 계획이었다. 서화는 고민에 빠졌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은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숨어 지낸다면 평생 죄인의 딸로 살아야 하고, 언제 또 허 판서의 수하들에게 끌려갈지 모를 일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주고 손을 내밀어 준 이 남자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나리께서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이건의 얼굴에 비로소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의 은밀한 만남이 시작되었다. 이건은 밤마다 서화의 집을 찾아와 함께 자수품의 도안을 구상했다. 좁은 방 안, 작은 등불 하나에 의지한 채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었다. 이건이 먹으로 대략적인 밑그림을 그리면, 서화는 그 위에 어떤 색의 실을 쓰고 어떤 기법을 사용할지를 설명했다. “이 부분에는 금사를 사용하여 봉황의 위엄을 살리고, 꼬리 깃털은 여러 색의 견사를 꼬아 입체감을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녀가 도안 위를 짚어주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이건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도안에 대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의 손이 스치자, 서화는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건은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비밀 표식은… 이 봉황의 눈동자 안에 넣는 것이 어떻겠소. 아주 작은 먹점으로, 나만이 알아볼 수 있도록.” 그는 붓을 들어 봉황의 눈에 작은 점을 찍었다. 서화는 그의 진지한 얼굴과 자신의 손에 들린 비단을 번갈아 보았다. 이것은 단순한 거래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운명, 그리고 어쩌면 나라의 운명까지도 이 작은 비단 한 폭에 달려 있었다. 작업이 깊어질수록 두 사람의 관계도 깊어졌다. 밤늦게까지 수를 놓는 서화의 어깨가 지쳐 보이면, 이건은 말없이 따뜻한 차를 내어주었다. 때로는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주기도 했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서화의 심장은 크게 울렸다. 그들의 밀담은 단순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공모가 아니었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서로의 재능을 존경하며, 위험 속에서 서로에게 유일한 의지가 되어가는, 그 어떤 연인의 밀어보다도 더 애틋하고 긴밀한 교감의 시간이었다.
※ 운명을 건 자수 함정
서화의 손끝에서 마침내 운명의 자수품이 완성되었다. 가로세로 한 자 남짓한 비단 위에는 금실로 수놓은 봉황 한 쌍이 구름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모습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었다. '쌍봉희운도(雙鳳戱雲圖)'. 봉황의 깃털 하나하나는 살아있는 듯 생생했고, 눈동자는 영롱하게 빛나 보는 이를 압도했다. 특히 이건과 약속했던 대로, 수컷 봉황의 눈동자 한가운데에는 머리카락보다도 가는 검은 실로 아주 작은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아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 찾아낼 수 없는, 완벽한 비밀 표식이었다. 열흘 밤낮으로 이 작품에 매달리는 동안 서화는 수없이 많은 감정에 휩싸였다.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고 가족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함, 자신을 믿어주는 이건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허 판서에 대한 서늘한 분노. 이 모든 감정들이 한 땀 한 땀 비단실에 녹아들어 갔다. 이 자수품은 단순한 미끼가 아니라, 그녀의 모든 것을 건 복수의 칼날이었다. “완성되었소.” 밤늦게 그녀를 찾아온 이건에게 서화가 완성된 작품을 내밀었다. 작품을 본 이건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것은 단순한 자수가 아니라, 혼이 담긴 예술 작품이었다. 그는 이토록 아름다운 것에 그토록 위험한 덫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수고 많았소. 이제 이 물건을 세상에 내놓을 차례요.” 이건의 계획은 치밀했다. 서화가 직접 나서는 대신, 저잣거리에서 입이 가장 무거운 중간 상인을 통해 ‘몰락한 양반가에서 가보로 내려오던 희귀한 자수품이 급히 돈이 필요해 시장에 나왔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예술품에 대한 욕심이 많고, 특히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좋아하는 허 판서라면 반드시 이 미끼를 물 것이라 확신했다. “거래는 사흘 뒤, 자시, 광통교 아래에서 이루어질 것이오. 그자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니, 당신은 절대 그 자리에 나와서는 안 되오. 내가 모든 것을 끝내고 찾아가겠소.”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서화를 바라보는 눈빛은 불안함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은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서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그의 안전이 걱정되었다. 거대한 권력에 맞서 홀로 싸우는 그의 어깨가 너무나도 무거워 보였다. 이건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려 할 때였다. “나리.” 서화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품에서 작은 향낭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것을… 몸에 지니고 가십시오. 마음을 안정시키는 향입니다.” 향낭에는 그녀가 직접 말린 박하 잎과 백단향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아주 작게, 푸른 소나무 한 그루가 수놓아져 있었다. 언제나 푸르게, 굳건하게 돌아오라는 그녀의 마음이 담긴 부적과도 같은 선물이었다. 이건은 향낭을 받아 들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향낭에서 풍겨오는 은은한 향기가 그의 긴장된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듯했다. 그는 서화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그녀의 손은 바늘에 찔린 상처투성이였지만,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귀한 손이었다. "반드시… 돌아오겠소.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면, 당신에게 정식으로 내 마음을 고하겠소." 그의 약속에 서화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닥쳐올 위험을 예감하면서도, 서로를 향한 굳건한 믿음과 애틋한 감정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사흘 뒤, 약속된 밤이 다가왔다. 서화는 자신의 작은 방 안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초조하게 시간을 보냈다. 지금쯤 광통교 아래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이건은 무사할까. 그녀는 그가 준 옥가락지를 만지작거리며 그의 무사귀환을 간절히 기도했다. 그녀의 운명과 사랑, 모든 것이 이제 광통교의 깊은 어둠 속에서 결정될 터였다.
※ 광통교, 최후의 거래
약속의 자시, 광통교 아래는 그 어느 때보다 짙은 어둠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건은 교각의 가장 깊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거래 현장을 예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의금부의 정예 병력들이 숨을 죽인 채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약속된 중간 상인이 쌍봉희운도를 비단 보자기에 싸 들고 나타나 자리를 잡았다. 곧이어 반대편에서 허 판서의 수하들이 나타났고, 그들 뒤로 마침내 당사자인 허 판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소문 속의 명작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제 발로 함정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이었다. “물건은 가져왔느냐?” 허 판서의 거만한 목소리에 중간 상인이 비단 보자기를 풀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쌍봉희운도의 화려하고 정교한 모습에 허 판서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는 자수품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깃털의 질감과 금실의 광택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나! 이 정도의 물건이라면 값을 얼마를 쳐주어도 아깝지 않지.” 그가 흡족해하며 돈주머니를 던져주려는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이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물건, 그리도 마음에 드시오, 대감?”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허 판서와 수하들이 경악했다. “네… 네놈은 누구냐!” “의금부 도사 이 건이다. 지금부터 허 판서, 그대를 내란 음모 및 국禁 물품 밀거래 혐의로 체포한다!” 이건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손에 든 의금부 신패를 보여주자, 허 판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네… 네놈이 어찌… 무슨 증거로!" 이건은 차갑게 웃으며 쌍봉희운도를 가리켰다. "증거는 바로 대감의 손에 들려있지 않소. 그 봉황의 눈동자를 자세히 보시오. 얼마 전, 대감의 밀거래 창고에서 발견된 장부책에 찍혀있던 비밀 낙인과 정확히 일치할 것이오." 그제야 모든 것이 함정이었음을 깨달은 허 판서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냐! 저놈들을 당장 죽여라!" 그의 명령에 수하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 이건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이건의 신호에 따라 숨어있던 의금부 병력들이 사방에서 횃불을 밝히며 나타나 그들을 포위했다. 광통교 아래는 순식간에 칼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 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허 판서는 혼란을 틈타 도망치려 했지만, 이건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두 사람 사이에 불꽃 튀는 검투가 벌어졌다. 허 판서 역시 무예가 만만치 않았지만, 나라의 정의를 짊어진 이건의 검은 더욱 빠르고 날카로웠다. 마침내 이건의 칼이 허 판서의 어깨를 베고, 그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땅에 떨어졌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허 판서와 그의 수하들은 밧줄에 묶여 죄인으로 끌려갔다. 모든 것이 끝난 광통교 아래에는 새벽의 차가운 공기와 피비린내만이 남았다. 이건은 지친 몸을 이끌고 서화의 집으로 향했다. 동이 틀 무렵,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그를 기다리던 서화는 멀리서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고 버선발로 뛰쳐나갔다. 그의 옷은 군데군데 찢어지고 피가 묻어 있었지만, 그의 걸음걸이는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힘이 넘쳤다. 서화는 그의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렸다. 이건은 그런 그녀를 자신의 품에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품 안에서, 서화는 비로소 길고 길었던 악몽이 끝났음을 실감했다. “모든 것이… 끝났소.”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치열했던 밤의 흔적과 안도감, 그리고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뒤섞여 두 사람을 감쌌다. 이건은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리고, 눈물로 젖은 그녀의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처음에는 놀란 듯 굳어있던 그녀도 이내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어둠과 위험 속에서 서로의 유일한 빛이 되어주었던 두 사람. 길고 긴 밤이 지나고, 마침내 밝아오는 새벽의 여명 속에서 나눈 입맞춤은 그 어떤 말보다도 뜨겁고 진실된 사랑의 약속이었다.
※ 어둠이 걷히고, 사랑이 피어나다
허 판서의 역모는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의 집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왜국과 내통한 서신들과 불법으로 축재한 막대한 재물이 발견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정의 부패한 관리들이 줄줄이 파직되었고, 민심은 크게 안정되었다. 서화의 아버지, 서 참판의 억울한 누명 역시 벗겨졌다. 그는 역모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 판서의 비리를 고발하려다 모함을 당한 것이 밝혀졌다. 가문의 명예는 회복되었고, 몰수되었던 재산도 일부 돌려받았다. 서화는 더 이상 광통교 아래의 어둠 속에 숨어 지내는 장막 뒤의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의 비범한 자수 솜씨는 오히려 나라를 구한 공신으로 칭송받았고, 궐내의 수방 나인들조차 그녀에게 가르침을 청할 정도가 되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어느 화창한 봄날, 이건이 서화의 집을 찾아왔다. 그날은 더 이상 어둠을 틈타 찾아온 밀사가 아닌, 늠름한 의금부 도사의 관복을 차려입은 당당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그는 병세가 회복된 서화의 노모에게 큰절을 올리고, 정식으로 서화에게 청혼했다. “부인께 소중한 따님을 제게 허락해 주십사 청하러 왔습니다. 평생을 아끼고 사랑하며, 다시는 눈물 흘리는 일이 없도록 지켜주겠습니다.” 그의 진심 어린 청혼에 서화의 노모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두 사람의 혼사를 허락했다. 그해 가을,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성대한 혼례를 올렸다. 한양의 어두운 다리 밑에서 위태롭게 만났던 두 사람이, 마침내 양지바른 곳에서 평생을 함께할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이다. 혼례를 치른 후, 서화는 자신의 재주를 더 이상 생계를 위해서만 쓰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처럼 가세가 기울어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여인들을 모아 작은 공방을 열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자수 기술을 가르쳐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고, 공방에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수공예품들은 나라의 큰 자랑거리가 되었다. 이건 역시 승승장구하여 더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결코 초심을 잃지 않고 백성을 위한 공정한 정치를 펼쳤다. 그는 아내 서화의 지혜를 존중했고, 나라의 큰일이 있을 때마다 그녀와 의논하며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어느 달 밝은 밤, 부부가 된 두 사람은 혼례를 올리기 전 처음 만났던 광통교를 거닐었다. 이제 그곳은 더 이상 어둡고 위험한 장소가 아니었다. 정비된 개천과 밝은 등불 덕분에, 밤에도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낭만적인 장소로 변해 있었다. “기억하시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 밤을.” 이건의 말에 서화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어찌 잊겠습니까. 서슬 퍼런 눈으로 저를 꿰뚫어 보시던 나리의 눈빛을요.” “그때는 몰랐소. 내 평생의 운명을 그 어두운 다리 밑에서 만나게 될 줄은.”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과거의 시련과 아픔은 이제 희미한 추억이 되었고, 그 자리에는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만이 가득했다. 이건은 서화의 시린 손을 잡고 자신의 따뜻한 도포 자락 안으로 끌어당겼다. "이제 다시는 그대의 손이 시릴 일은 없을 것이오." 한양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마침내 나라의 가장 밝은 빛이 되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이어졌다고 한다.
유튜브 엔딩멘트
한양의 가장 어두운 다리 밑에서 시작된 위험한 거래가, 결국 나라를 구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이뤄내는 이야기, 재미있게 보셨나요? 때로는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가장 찬란한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정의를 향한 용기와 서로를 향한 믿음이 결국 해피엔딩을 만들어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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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시간에는 어우야담이 들려주는 또 다른 기묘한 이야기, '밤을 훔친 자, 그림자 도둑' 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