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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산 처녀귀신의 한 - 금기의 혼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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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 시대, 구월산 기슭의 부유한 양반가에서 혼례를 앞둔 신부가 혼례 전날 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후 매년 같은 날이면 혼례복을 입은 처녀귀신이 나타나 혼례를 치르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300년이 지난 현대, 그 집터에 지어진 한옥 스테이에서 또다시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1: 사라진 신부
구월산의 달빛이 가장 밝은 때는 이른 가을이었습니다. 숙종 40년, 구월산 기슭의 명망 높은 이씨 가문에 경사가 있던 날이었죠. 가문의 꽃이라 불리던 규수 이월정의 혼례를 하루 앞둔 밤이었습니다.
"아가씨, 족두리가 참으로 잘 어울리시네요." 묵직한 족두리를 달아주던 몸종 금단이가 말했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이월정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와 백옥 같은 피부, 그리고 붉은 입술이 달빛 아래 곱게 빛났습니다.
"내일이면 신부가 되시는 거예요." 금단이가 설레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월정의 눈빛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습니다.
"금단아... 어젯밤 꿈에서 누군가가 자꾸 날 부르는 것 같았어." 월정이 조심스레 말했습니다. "시집가지 말라고... 그러면 죽게 될 거라고..."
"아이고, 아가씨. 그저 혼례를 앞둔 긴장 때문이지요. 신랑 측은 조선 제일의 양반가문이라 하고, 글재주며 풍채며 모두 빼어나다 하지 않습니까."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방 안의 촛불이 모두 꺼져버렸습니다. 달빛만이 희미하게 방 안을 비추었습니다.
"도련님 가문에서 보내온 혼례복이에요." 금단이가 붉은 비단 상자를 들고 왔습니다. 상자를 열자 선명한 붉은빛의 혼례복이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혼례복의 색이 순간 시커멓게 변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온 것입니다. 월정만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저, 잠시 혼자 있고 싶구나." 월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금단이는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며 방을 나섰습니다.
달이 구름에 가려진 그 순간, 방 안에서 작은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급히 달려온 금단이가 문을 열었을 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람에 나부끼는 붉은 혼례복과 거울 속에 비친 희미한 그림자만이 남아있었을 뿐...
2: 붉은 혼례복
"어머, 이게 뭐지?"
한옥스테이 '구월당'의 주인 송하은이 오래된 장롱 속에서 붉은 비단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리모델링 과정에서 발견된 오래된 가구들을 정리하던 중이었죠. 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 놓여있던 상자였지만, 이상하게도 비단의 촉감은 새것처럼 선명했습니다.
"300년이나 된 한옥인데..." 하은이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습니다. 순간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고, 등줄기가 서늘해졌습니다.
상자 안에는 선홍빛 혼례복이 고스란히 접혀 있었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 천의 빛깔도, 수놓인 금사도 전혀 바래지 않았습니다. 하은이 혼례복을 들어올리는 순간, 달빛이 창문을 통해 비취며 붉은 비단이 은은히 빛났습니다.
"이상하다..." 하은이 거울 앞에 혼례복을 대어보았습니다. 그 순간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마치 다른 사람이 혼례복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가씨, 이제 입어보실까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 하은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구월산의 능선이 달빛에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하은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문화재청 학예사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혹시 조선시대 혼례복이 이렇게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어?"
수화기 너머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불가능해. 비단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부식되거든. 300년이나 된 혼례복이 멀쩡하다고? 장난치는 거야?"
그때였습니다. 방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더니, 혼례복에서 은은한 향내가 피어올랐습니다. 백년초 향이었습니다. 조선시대 혼례 때 신부가 즐겨 사용하던 향이라고 하은은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하은이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혼례복을 다시 상자에 넣으려는 순간, 비단 소매 사이로 무언가가 떨어졌습니다. 오래된 종이 한 장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옛 한문으로 한 줄이 적혀 있었습니다.
'달빛이 가득한 밤, 신부는 영원히 사라지리라...'
3: 거울 속 신부
한옥스테이 '구월당'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밤마다 거울 속에서 혼례복을 입은 여인이 보인다는 것이었죠.
"어젯밤에 분명히 봤어요." 302호 투숙객이 아침 식사 시간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거울 속에서 혼례복 입은 여자가 저를 보고 있었다니까요. 제가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는데, 거울 속에는..."
하은은 투숙객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비슷한 이야기가 하나둘 늘어났습니다. 누군가는 한밤중에 비단 스치는 소리를 들었다 했고, 또 다른 이는 백년초 향이 은은히 퍼지더니 방이 갑자기 차가워졌다고 했습니다.
"사장님, 저기..." 청소를 하던 직원이 조심스레 다가왔습니다. "304호 거울이 또 흐려졌어요. 어제 닦았는데..."
하은이 304호에 들어섰을 때였습니다. 방 안 가득 달빛이 들어와 있었고, 거울은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뿌옇게 흐려져 있었습니다. 하은이 거울을 닦으려 수건을 들어올린 그 순간이었습니다.
"이상하다..." 하은이 거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지는가 싶더니, 문득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똑같은 얼굴이었지만, 분명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 쪽머리를 한 여인이 하은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도와주세요..."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은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서 있었습니다. 거울 속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붉은 색이었습니다.
"당신은..." 하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나는 이월정이에요..." 거울 속 여인이 답했습니다. "300년 전, 이 방에서 사라진 신부예요."
그 순간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고, 하은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직원이었습니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혼자 말씀하시길래..."
하은이 다시 거울을 보았지만, 그곳에는 겁에 질린 자신의 모습만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울 표면에는 붉은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습니다.
4: 과거로의 여행
그날 밤, 하은은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아니,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선명했습니다.
한밤중, 구월산 깊은 곳에 횃불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검은 도포를 입은 남자들이 산속 깊숙한 곳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은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그들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오늘이 바로 300년만의 기회다." 맨 앞에 선 노인이 말했습니다. "우리 가문이 이렇게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구월산 산신의 덕이었다. 이제 그 대가를 치를 때가 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산속의 오래된 사당이었습니다. 사당 안에는 피비린내 나는 제물들과 함께 검은 무쇠솥이 놓여있었습니다. 솥 안에서는 시커먼 액체가 끓고 있었습니다.
"자정이 되면 신부가 도착할 것이다." 노인이 말을 이었습니다. "그때 의식을 시작한다."
하은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이것이 신랑 측 가문의 비밀스러운 제사였고, 이월정은 그들의 제물이 될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장면이 바뀌었습니다. 이월정의 방 안이었습니다. 창문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스며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월정은 그것을 보고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림자에 휩싸였습니다.
"이제 시작이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300년 동안의 번영을 위해..."
하은은 눈을 감았다 떴습니다. 이월정이 끌려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 검은 가마에 실려 구월산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달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을 때, 하은은 숨을 멈췄습니다. 이월정의 얼굴이 마치 자신의 것과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안 돼..." 하은이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손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습니다.
갑자기 이월정이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직접 하은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이제 알겠지요? 왜 제가 당신을 찾아왔는지..."
하은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습니다. 방 안에는 달빛만이 가득했고, 어디선가 백년초 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습니다.
5: 숨겨진 진실
하은은 도서관 깊숙한 곳에서 오래된 문서들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꿈에서 본 끔찍한 장면들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숙종 40년의 관보에서 한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구월산 기슭 이씨 가의 규수 실종 사건. 혼례를 앞두고 흔적 없이 사라짐. 신랑 측 박씨 가문에서는 혼례 파기와 함께 거액의 위로금을 전달...'
하은은 박씨 가문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중기부터 이어져 온 명문가였고, 300년이라는 주기로 엄청난 부와 권력을 쌓아올렸다는 기록들이 나왔습니다.
"이상한 건..." 하은이 기록들을 넘기며 중얼거렸습니다. "매번 300년째 되는 해에 며느리가 될 신부가 사라졌다는 거야."
그때였습니다. 창밖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한 여인이 하은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조선시대 복식을 한 젊은 여인이었습니다.
"저는 정씨 가문의 둘째 따님이었어요." 여인이 말했습니다. "300년 전의 300년 전... 저도 박씨 가문의 신부가 될 뻔했죠. 하지만 혼례 전날 밤..."
또 다른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600년 전 김씨 가문의 딸이었습니다. 저도 같은 운명이었죠."
하나둘 여인들이 나타났습니다. 모두 박씨 가문의 신부가 되어야 했던 이들이었습니다. 900년, 600년, 300년... 그리고 이월정까지.
"박씨 가문은 구월산 산신과 계약을 맺었어요." 이월정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300년마다 처녀의 혼을 바치는 대가로 엄청난 부와 권력을 얻는 거예요. 그들은 우리를 제물로 바친 거예요."
하은의 손에 들린 문서가 떨어졌습니다. 그녀는 방금 현대의 박씨 가문 족보를 보고 있었고, 거기에는 충격적인 사실이 적혀 있었습니다.
'박씨 가문 종손 박준혁, 현 구월산 개발공사 대표이사'
그는 바로 어제 한옥스테이에 투숙한 사업가였습니다. 달력을 보니 오늘은 이월정이 사라진 지 정확히 30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6: 저주의 시작
도서관에서 돌아온 하은은 장롱 속 혼례복을 다시 꺼내보았습니다. 이제는 알았습니다. 이 붉은 비단이 단순한 혼례복이 아니라는 것을...
"이 옷에는 제 원한이 담겨있어요."
이월정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거울 속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습니다. 이번에는 평소와 달리 붉은 혼례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300년 동안..." 이월정이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박씨 가문의 며느리가 될 뻔한 신부들이 이 혼례복을 입는 순간, 저는 그들을 데려갔어요. 그들도 저처럼 제물이 될 운명이었으니까요."
하은의 눈앞에 환영이 펼쳐졌습니다. 100년 전, 양장을 입은 신부가 박씨 가문으로 시집가기 전날 밤, 이 혼례복을 보관하던 장롱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쁜 한복은 처음 봐요..." 그녀가 혼례복에 손을 댄 순간, 붉은 비단이 그녀를 감싸안았고, 달빛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20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갓 시집온 새댁이 장롱을 정리하다가 혼례복을 발견했고... 그녀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처음에는 복수심이었어요." 이월정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박씨 가문의 대를 끊고 싶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저는 그저 더 많은 희생자가 생기는 걸 막고 싶었을 뿐이에요."
하은은 혼례복을 들어올렸습니다. 달빛에 비친 붉은 비단이 마치 피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월정이 슬픈 눈으로 하은을 바라보았습니다. "300년 만에 처음으로, 제가 지키지 못할 것 같아요. 당신은... 저와 너무 같은 걸요."
그때,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은은 창밖을 내다보았고, 한옥스테이 마당을 걸어가는 박준혁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의 손에는 낡은 제사 도구가 들려있었고, 등 뒤로는 구월산의 어두운 능선이 보였습니다.
7: 운명의 연결
한옥스테이의 모든 투숙객이 잠든 시간, 하은은 거울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달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자,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 저는 왜 구월산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모두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나요?"
어머니는 대답 대신 한숨만 쉬었었죠. 그리고 항상 하시던 말씀...
"네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사를 가자꾸나..."
하지만 어머니는 하은이 열여섯 살 때 돌아가셨고, 하은은 결국 구월산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아니, 떠날 수 없었습니다.
"이제 기억나시나요?" 거울 속 이월정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제가 죽은 그날, 이 방에서 태어나셨어요."
하은의 눈앞에 또 다른 기억이 스쳐갔습니다. 생일날마다 꾸던 꿈. 달빛 아래 검은 솥이 끓고,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는... 그리고 매년 생일이면 목에서 느껴지던 이상한 통증.
"맞아요..." 하은이 떨리는 손으로 목을 만졌습니다. 그곳에는 희미한 상처 자국이 있었습니다. "전 이월정씨의... 환생인가요?"
"단순한 환생이 아니에요." 이월정이 슬픈 눈으로 말했습니다. "당신은 제 영혼의 반쪽이에요. 제가 죽던 순간, 저의 원한과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
창밖에서 누군가 하은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박준혁이었습니다. 그의 눈빛은 300년 전 그의 선조들과 똑같았습니다.
"가문의 기록에는 모두 적혀있었습니다." 박준혁이 창가에서 말했습니다. "처녀귀신의 환생이 태어날 것이라고... 그리고 300년 만에 그 영혼을 완전히 제물로 바칠 수 있다고..."
하은은 이제 모든 것을 이해했습니다. 자신이 이 한옥스테이의 주인이 된 것도, 박준혁이 이곳에 나타난 것도, 모두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알고 계셨던 거예요..." 하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저를 이곳에서 멀리 데려가려 하셨던 거예요..."
8: 반복되는 의식
구월산 전체가 이상한 기운에 휩싸였습니다. 달이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자, 한옥스테이 '구월당'의 모든 거울이 동시에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작됐군요." 박준혁이 말했습니다. 그의 뒤로 검은 도포를 입은 남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300년 만의 기회... 이제 진정한 의식을 시작할 시간입니다."
하은의 몸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흐려지더니, 달빛처럼 하얗게 변했습니다. 입술은 붉게 물들었고, 검은 머리카락이 마치 물결치듯 흩날렸습니다.
"이월정..." 하은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조선시대 혼례복을 입은 이월정이었지만, 현실의 하은은 여전히 현대식 옷차림이었습니다. 마치 거울이 두 시간대를 동시에 비추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박준혁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300년 전 실패한 의식을 완성할 진정한 제물을..."
방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구월산의 모습이 일그러지더니, 산 전체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제 시작이다!" 박준혁이 외쳤습니다.
그 순간 모든 거울이 동시에 깨졌고, 유리 파편 사이로 수백 년 동안 사라졌던 신부들의 모습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은과 이월정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300년을 기다린 건..." 이월정의 목소리가 하은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습니다. "당신들을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이 끔찍한 의식을 끝내기 위해서였어요."
달빛이 가장 밝아지는 순간, 하은의 모습이 완전히 이월정으로 변했습니다. 300년 전 그날처럼, 붉은 혼례복을 입은 신부가 달빛 아래 서 있었습니다.
9: 악습의 대면
"혼자서 이곳에 오신 이유는... 알고 계셨던 거죠?" 이월정의 모습으로 변한 하은이 박준혁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달빛이 그들 사이로 쏟아졌습니다.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박준혁이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조상님들의 일기에서, 그리고 가문의 오래된 서책에서... 우리 가문이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검은 도포를 입은 무리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려 했지만, 박준혁은 손을 들어 그들을 멈춰 세웠습니다.
"더는 안 됩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300년 동안 이어진 살생의 제사를... 제 대에서 끝내려 합니다."
하은/이월정의 눈이 커졌습니다. 이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이었습니다.
"가문의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죠." 박준혁이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의식을 끝내는 방법은 단 하나... 가문의 종손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것."
"그래서 혼자 오신 거군요..." 하은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박준혁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이 가문의 마지막 자손입니다. 제가 스스로 목숨을 바치면, 구월산 산신과의 계약은 끝나게 됩니다."
달빛이 점점 더 밝아졌습니다. 검은 도포 무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안 됩니다! 종손님!" 그들이 외쳤습니다. "300년의 영화를 포기하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박준혁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은 없어야 합니다. 이제... 저로 인해 모든 것이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였습니다. 구월산 정상에서 거대한 바람이 불어왔고, 검은 구름이 달을 가리기 시작했습니다. 산신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10: 마지막 선택
구월산 전체가 검은 구름에 휩싸였습니다. 달빛만이 한옥스테이 마당을 비추고 있었고, 그 빛 아래서 하은과 이월정의 모습이 계속해서 교차되었습니다.
"멈추세요..." 하은의 목소리였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은..."
"안 돼요!" 이월정의 목소리가 그 위를 덮었습니다. "300년의 한을 풀 기회예요!"
박준혁이 한 걸음 다가섰습니다. "두 분의 영혼이 하나가 된 이유...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복수와 용서, 그 선택을 함께 하라는 운명인 거겠죠."
주변의 거울 조각들이 떠올랐고, 그 안에 비친 과거의 장면들이 펼쳐졌습니다. 이월정이 끌려가던 순간, 제단에서 목숨을 잃던 순간, 그리고 하은이 태어나던 순간까지...
"당신의 선조들은 저를 죽였어요." 이월정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달라요." 하은의 목소리가 이어졌습니다.
그때 검은 도포 무리 중 한 명이 달려들었습니다. "감히 300년의 전통을 깨려 하다니!"
하지만 그의 몸이 하은/이월정을 통과해 지나갔고, 그대로 거울 조각들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보이시나요?" 박준혁이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영혼도 잃은 허상일 뿐입니다. 300년 동안 우리 가문을 지배해 온 어둠의 그림자들..."
하은/이월정의 눈앞에 환영이 펼쳐졌습니다. 박준혁의 어린 시절, 가문의 비밀을 알게 된 후 끊임없이 의식을 끝낼 방법을 찾아 헤매던 모습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내린 결단.
"이제 선택하세요." 박준혁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제 목숨으로 300년의 악습을 끝낼지, 아니면 복수를 위해 또 다른 희생을 만들어낼지..."
달빛이 가장 밝은 순간이었습니다. 하은과 이월정의 모습이 완전히 하나로 합쳐졌고, 붉은 혼례복이 바람에 나부꼈습니다. 이제 마지막 선택만이 남았습니다.
11: 금기의 해제
달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구월산 전체가 은은한 빛으로 물들었습니다. 하은/이월정의 내면에서 오랜 갈등이 마침내 끝나고 있었습니다.
"이제 알겠어요..." 두 영혼이 하나 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을 뿐이에요. 300년 동안 우리는 그것을 보아왔죠."
박준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의 발 아래로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습니다.
"그만하세요." 하은/이월정이 그를 막아섰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끝낼 일이 아니에요. 살아서 이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해요."
그 순간 구월산 정상에서 거대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산신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감히 계약을 파기하려 하느냐!"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검은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박준혁을 휘감기 시작했습니다.
"안 돼요!" 하은/이월정이 외쳤습니다. 그녀의 손에서 갑자기 밝은 빛이 퍼져나갔고, 붉은 혼례복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축복이에요." 하은/이월정의 목소리가 맑게 울렸습니다.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모든 것을 끝내야 해요."
그녀의 손이 뻗어나가 박준혁을 감쌌습니다. 검은 안개가 물러나기 시작했고, 달빛이 점점 더 밝아졌습니다.
"이제 이해해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용서였어요. 당신을 용서하고, 또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 것..."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300년 동안 사라졌던 신부들의 영혼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의 붉은 혼례복이 모두 하얗게 변했습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의식의 완성이었던 거예요." 하은/이월정이 미소지었습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구월산의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고, 300년 만에 처음으로 맑은 달빛이 산 전체를 비추었습니다.
12: 새로운 시작
이른 아침, 구월산에 안개가 걷히고 있었습니다. 한옥스테이 '구월당'의 마당에는 어젯밤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깨진 거울 조각들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 하얀 꽃들이 피어있었습니다.
"괜찮으신가요?" 하은이 박준혁에게 물었습니다. 그의 검은 도포는 사라지고, 평범한 양복 차림이었습니다.
"네... 이제야 진정한 자유를 얻은 것 같습니다." 박준혁의 눈빛이 맑아져 있었습니다. "300년 동안 우리 가문을 짓눌러온 무게가 사라졌어요."
거울 속에 이월정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비쳤습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붉은 혼례복이 아닌, 순백의 원삼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갑니다." 이월정이 미소 지었습니다. "하은 씨... 제 영혼의 반쪽이자, 저를 구원해 준 은인이에요. 이제 당신만의 삶을 사세요."
하은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것은 이월정의 붉은 눈물과는 달랐습니다.
"박준혁 씨..." 이월정이 말을 이었습니다. "당신의 선조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던 당신의 용기... 잊지 않을게요."
이월정의 모습이 달빛처럼 흩어지기 시작했고, 그녀의 원삼 자락이 하얀 나비가 되어 날아올랐습니다. 수백 마리의 나비가 구월산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은 마치 축복의 행렬 같았습니다.
그 후로 구월당에는 새로운 전설이 하나 더해졌습니다. 달이 가장 밝은 밤이면, 하얀 나비들이 한옥스테이 마당에 내려앉아 꽃을 피운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날 묵는 투숙객들의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
하은은 이제 매일 밤 창가에 하얀 매화 한 송이를 놓습니다. 이월정을 기억하며, 또 새로운 시작을 기원하며...
구월산의 달빛은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한이 서려있지 않습니다. 대신 용서와 화해의 빛으로 가득합니다. 간혹 산을 오르는 이들은 하얀 나비 떼를 본다고 합니다.
300년의 한이 사랑으로 피어난 꽃이 된 것처럼, 구월당의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전설이 되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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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지금까지 구월산에 전해 내려오는 '구월산 처녀귀신의 한 - 금기의 혼례'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구월산 기슭의 어느 한옥스테이에서는 하얀 나비들이 꽃을 피우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달빛 가득한 밤, 혹시 구월산을 찾으시게 된다면... 흰 나비 떼를 보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땐 꼭 소원을 빌어보세요.
300년의 한이 사랑이 되어 여러분의 소원을 이뤄줄지도 모르니까요.
다음 이야기도 기대해주세요.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도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