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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골 샌님의 기묘한 사랑 (출처 - 청구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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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250자 내외)
매일 밤, 당신의 방문을 두드리는 절세미인이 있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가난에 찌든 남산골 샌님에게 찾아온 하룻밤의 꿈. 달콤한 향기와 아찔한 유혹 뒤에 숨겨진 여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가장 애틋하고 비밀스러운 사랑 이야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디스크립션 (300자 내외)
청구야담에 기록된 가장 낭만적인 이야기. 남산골 가난한 선비 이생에게 매일 밤 신비로운 여인이 찾아옵니다. 그녀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상과 하룻밤의 정염(情炎)은 꿈결처럼 달콤했지만, 날이 밝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녀의 존재는 점점 더 큰 미스터리로 다가옵니다. 그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며, 이들의 기이한 사랑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요?
※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꿋꿋하게 글공부에만 매진하는 선비 이생
조선 한양의 남산골, 그 중에서도 가장 후미진 골목 끝자락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초가집 한 채가 위태롭게 서 있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어스름이 내리면, 이 초가집의 창호지 너머로 희미한 등불 하나가 외로이 밤을 밝혔지요. 등불의 주인은 이생(李生)이라 불리는 젊은 선비였습니다. 그의 가문은 본래 대단한 명문가였으나,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지금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남은 것이라곤 낡은 책 몇 권과 꼿꼿한 자존심뿐. 그럼에도 이생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난이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학문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숫돌이라 여겼지요. 그는 매일같이 멀건 죽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는 법이 없었습니다. 밤이 깊어지면, 온기가 사라진 방안의 한기를 오롯이 등불에 의지한 채 붓을 들었습니다. 사각사각, 붓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만이 그의 유일한 벗이었습니다. 등불이 깜빡이며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텅 빈 방 안에서 홀로 외로이 춤을 추었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생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책 속에 길이 있고 진리가 있다지만, 지독한 허기와 파고드는 외로움은 젊은 선비의 마음을 좀먹고 있었습니다. "내일은 또 무엇으로 주린 배를 채워야 한단 말인가..." 책장을 넘기는 그의 손가락은 길고 곧았지만, 거친 살갗과 때 낀 손톱은 그가 겪는 고생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때로는 너무나 배가 고파 눈앞이 아득해지고, 책의 글자들이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 따뜻한 밥 한 그릇과 온기 어린 눈빛 한번 건네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노라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헛된 망상인지를 알기에, 그는 더욱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다시 글자에 눈을 박았습니다. 창밖에서는 차가운 밤바람이 문풍지를 흔들며 울었습니다. 마치 배고픈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서러운 사람의 흐느낌 같기도 한 그 소리는 이생의 마음을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닳아빠진 붓을 쥔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뚫고 장원급제하여 돌아가신 부모님의 이름을 빛내리라. 스산한 방 안, 외로운 등불 아래에서 젊은 선비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으며 또 하루의 고독한 밤을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녁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멀건 죽 한 사발을 비운 이생은 다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밤은 깊어지고, 온 세상이 고요한 정적에 잠겼습니다. 오직 그의 방에서만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과 사각거리는 붓 소리가 그가 살아있음을 증명할 뿐이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적막을 깨고 누군가 그의 사립문을 조심스럽게 미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끼이익... 낡은 나무가 마찰하며 내는 소름 끼치는 소리. 이 깊은 밤에, 이 누추한 곳을 찾아올 사람이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생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붓을 쥔 채로 얼어붙었습니다. 도둑일까? 하지만 훔쳐 갈 것이라곤 쌀 한 톨 없는 빈집인데. 그렇다면 혹시 나쁜 뜻을 품은 자객이라도... 하지만 자신이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의 심장이 세차게 방망이질하기 시작했습니다.
※ 난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여인이 홀연히 이생의 방문 앞에 나타나고
이생은 숨을 죽인 채 문밖의 기척에 온 신경을 집중했습니다. 사박사박, 마른 흙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발소리는 아주 가볍고 조심스러웠으며, 망설이는 듯 그의 방문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잠시 후, 창호지 너머로 어렴풋한 그림자가 비쳤습니다. 가녀린 여인의 형상. 이생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이 밤중에, 여인이라니. 그것도 이런 누추한 곳에 말입니다. 한참이나 정적이 흘렀습니다. 이생도, 문밖의 여인도 아무런 말이 없었지요. 그저 고요한 밤공기 속에서 서로의 숨결만이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이윽고 정적을 깬 것은 여인이었습니다. "선비님, 안에 계시옵니까?"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맑고 청아한 목소리였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를 애틋함과 간절함이 묻어있었지요. 하지만 이생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 사람의 마음을 홀려 간을 빼먹는다는 구미호는 아닐까. 아니면 원한을 품고 떠도는 처녀 귀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용기를 내어 물었습니다. "뉘시오? 이 깊은 밤에 무슨 일로 나를 찾으시오?" 그의 목소리는 잔뜩 긴장한 탓에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문밖의 여인은 나직이 웃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그저 길을 지나던 과객이온데, 잠시 목을 축이고자 들렀습니다. 행여 길 잃은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문 한 번만 열어주시지 않겠사옵니까?" 여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애처로워, 차마 매정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생은 잠시 망설였습니다. 이성은 위험하다고 경고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지독한 외로움에 지쳐있던 그에게, 여인의 목소리는 가뭄의 단비처럼 달콤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습니다. 삐걱거리는 문고리를 잡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습니다. 심호흡을 한번 한 그는, 굳게 닫혀있던 방문을 천천히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생은 자신의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문밖에는 달빛을 등지고 선 한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희미한 달빛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이 세상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가볍게 쪽을 진 머리는 칠흑같이 검고 윤이 났으며,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흰 피부는 마치 잘 빚은 백자 같았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그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붉은 홍두깨를 머금은 듯한 입술은 세상의 그 어떤 꽃보다도 고혹적이었습니다. 값비싼 비단은 아니었지만, 몸에 꼭 맞는 소복은 그녀의 단아하면서도 풍만한 몸매를 은근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눈빛이었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깊고 검은 눈동자에는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알 수 없는 열망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이생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감정에 휩싸여, 마치 꿈을 꾸는 듯 멍하니 여인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여인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습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많이 놀라셨을 줄 아옵니다. 용서하세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생은 허둥지둥 여인을 안으로 맞이했습니다. "아, 아니오. 어서 들어오시오. 누추하지만... 잠시 쉬어가시지요." 차가운 방 안에 여인이 들어서는 순간, 신기하게도 훈훈한 온기가 감도는 듯했습니다. 그녀에게서는 난초 향기 같기도 하고, 묵향 같기도 한 맑고 그윽한 향이 풍겨왔습니다. 여인은 방 한가운데 얌전히 앉아, 조용히 방 안을 둘러보았습니다. 사방에 쌓여있는 책 더미와 낡은 벼루, 그리고 한쪽 구석에 초라하게 놓인 이불 한 채. 그녀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이생은 얼굴이 화끈거려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보시다시피... 가진 것이 없어 대접할 것도 마땅치 않소." 이생이 멋쩍게 말하자, 여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닙니다, 선비님. 저는 선비님의 글 읽는 소리가 좋아 잠시 머무는 것뿐이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 여인이 차려준 따뜻한 주안상을 받은 이생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이생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인과 단둘이 방 안에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요. 그는 애꿎은 등불의 심지만 만지작거렸습니다. 그때, 여인이 품에서 조심스럽게 작은 보자기를 꺼내 풀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술병과 정갈하게 담긴 안주 몇 가지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변변치는 않사오나, 제가 조촐하게 주안상을 준비해왔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술 한잔 나누어 주시지 않겠사옵니까?" 이생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지독한 허기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꿈에 그리던 따뜻한 음식과 술이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여인의 간절한 눈빛과 맛있는 음식 냄새에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이리 귀한 것을... 정말 고맙소." 이생의 말에 여인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직접 잔에 술을 채워 공손히 건넸습니다. 난생 처음 받아보는 여인의 술잔에 이생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어졌습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향긋한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퍼지며 긴장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인은 그런 이생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워 입술을 축였습니다. 술잔이 몇 순배 오가자, 어색했던 분위기는 금세 부드러워졌습니다. 이생은 그동안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학문에 대한 고민과 세상에 대한 울분을 토해냈고, 여인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는 듯, 그의 모든 이야기를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주었습니다. 그녀는 때로는 따뜻한 격려를, 때로는 날카로운 지혜를 건네며 이생의 막혔던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었습니다. 이생은 여인과 대화를 나눌수록 그녀가 단순히 외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학식과 지혜 또한 매우 깊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어졌고, 어느새 술병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술기운과 함께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등불 아래 비친 여인의 얼굴은 복숭앗빛으로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고, 반쯤 감긴 눈은 짙은 감정을 머금은 채 촉촉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이생은 더 이상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여인의 손을 향해 손을 뻗었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부드러운 손등에 닿는 순간, 여인은 파르르 몸을 떨었지만 피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손을 마주 잡아왔습니다.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그녀의 감촉에 이생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이성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 버렸고, 남은 것은 억누를 수 없는 원초적인 욕망뿐이었습니다. "낭자..." 이생이 잠긴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자,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품으로 스며들듯 파고들었습니다. 그녀의 몸에서는 아찔할 만큼 달콤한 향기가 뿜어져 나와 이생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탐했습니다. 처음 느껴보는 여인의 부드러운 입술과 달콤한 숨결에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의 옷고름이 힘없이 풀려나가고, 마침내 달빛 아래 두 사람의 맨살이 부끄럽게 드러났습니다. 여인의 몸은 눈처럼 희고 부드러웠으며,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과 잘록한 허리는 완벽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생은 마치 꿈을 꾸는 듯, 황홀한 심정으로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어루만졌습니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여인은 교성을 터뜨리며 몸을 비틀었고, 그것은 이생의 욕망에 더욱 불을 지폈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하나의 몸이 되었습니다. 좁은 방 안은 두 사람의 뜨거운 숨결과 격렬한 신음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지독한 외로움과 가난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젊은 선비의 욕망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고, 여인은 그런 그를 바다처럼 넓은 품으로 모두 받아주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를 탐하던 두 사람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지친 몸을 뉘었습니다. 이생은 자신의 품에 안겨 색색거리며 잠든 여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녀의 존재는 여전히 꿈처럼 비현실적이었지만, 자신의 품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심장 고동만큼은 분명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느껴보는 충만함과 행복감에 젖어, 조용히 여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 여인의 지극정성 어린 보살핌 덕분에 이생은 글공부에만 전념하게 된다
그날 이후, 여인은 매일 밤 이생을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따뜻한 음식과 술을 가지고 와 이생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고, 밤이 깊어지면 그의 외로운 몸과 마음을 뜨겁게 위로해주었습니다. 여인이 다녀간 다음 날 아침이면, 이생의 방 한구석에는 그가 미처 다 먹지 못한 음식과 몇 푼의 엽전이 놓여있곤 했습니다. 덕분에 이생은 더 이상 끼니 걱정을 하지 않고 오직 글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굶주림에서 벗어나자 그의 얼굴에는 혈색이 돌기 시작했고, 총명했던 머리는 예전보다 더욱 빠르게 지식을 흡수했습니다. 그의 학문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했습니다. 하지만 이생의 마음 한구석에는 점점 더 큰 의문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대체 이 여인은 누구일까? 양반가의 규수라기엔 밤마다 외간 남자의 집을 드나드는 것이 이상했고, 천한 기생이라기엔 그 품위와 학식이 너무나도 뛰어났습니다. 이생은 몇 번이고 여인에게 이름과 거처를 물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슬픈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피할 뿐이었습니다. "선비님께서는 그저 저를 하룻밤의 귀한 손님(貴客)으로만 여겨주시옵소서. 머지않아 모든 것을 알게 되실 날이 올 것입니다." 여인은 새벽닭이 울기 전에 늘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어디서 나타나는지 이생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에는 희미한 난초 향기만이 남아 그의 마음을 더욱 애타게 할 뿐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이생의 변화를 눈치채기 시작했습니다. 굶어 죽기 직전이라며 수군대던 동네 사람들은 살이 오르고 좋은 옷을 입기 시작한 이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함께 공부하던 동료 선비들은 그의 깊어진 학식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밤마다 그의 방에서 들려오는 의문의 웃음소리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보게, 이생. 자네 요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 얼굴이 아주 폈네그려. 혹시 뒤를 봐주는 귀인이라도 생긴 겐가?" 동료의 짓궂은 물음에 이생은 그저 멋쩍게 웃어넘길 뿐이었습니다. 여인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녀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과 불안감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녀와 함께하는 밤은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행복했지만, 날이 밝고 홀로 남겨졌을 때 밀려오는 공허함과 의심은 그를 괴롭게 했습니다. 혹시 그녀가 정말 사람이 아닌 요물이라면? 그래서 내 정기를 빨아먹고 있는 것이라면? 끔찍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밤이 되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하고 따뜻한 품에 안기는 순간, 그 모든 의심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너무나도 지극하고 진실했기에, 차마 요사스러운 존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나라의 큰 인재를 뽑는 과거 시험일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여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성스럽게 이생을 보살폈습니다. 값비싼 약재를 구해와 그의 몸을 보신시켰고, 밤에는 잠을 줄여가며 그의 글공부를 도왔습니다. "선비님, 이제 고지가 멀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시어 부디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남김없이 펼쳐 보이십시오." 그녀의 간절한 응원에 이생은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반드시 장원급제하여, 그녀에게 떳떳한 사내가 되겠노라고.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녀의 정체를 꼭 밝혀내고 평생을 함께하리라 다짐했습니다. 과거 시험 전날 밤, 여인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유난히 말이 없었고, 이생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애틋하고 격렬하게 서로의 몸을 탐했습니다.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서로의 존재를 자신의 몸에 깊이 새기려는 듯이. 모든 것이 끝나고 여인이 그의 품에 안겨 잠들었을 때, 이생은 결심했습니다. 오늘 밤, 기필코 그녀의 뒤를 쫓아가 정체를 밝혀내리라고.
※ 과거 시험을 앞둔 마지막 밤, 이생은 떠나는 여인의 뒤를 밟는다
새벽의 차가운 기운이 방안으로 스며들 무렵, 여인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녀는 잠든 이생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슬픈 눈으로 내려다보더니, 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소리 없이 옷을 챙겨 입었습니다. 이생은 자는 척 숨을 죽이며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마지막으로 방 안을 한번 둘러본 뒤, 미련이 가득한 발걸음으로 문을 나섰습니다. 이생은 여인이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습니다.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걷는 여인의 발걸음은 이상하게도 인가가 있는 쪽이 아닌, 컴컴하고 외진 뒷산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생의 심장은 불안감에 세차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 깊은 새벽에, 여인이 홀로 산으로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험한 산길을 여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익숙하게 걸어갔습니다. 이생은 바위와 나무 뒤에 몸을 숨겨가며,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녀와의 거리를 유지했습니다. 한참을 올랐을까, 여인의 발걸음이 인적이 드문 곳에 자리한 낡은 무덤 세 개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그 순간, 등골을 타고 오싹한 한기가 흘렀습니다. 설마, 설마 했던 끔찍한 예감이 현실이 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여인은 가장 오른쪽에 있는, 봉분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초라한 무덤 앞에 멈춰 서더니, 이내 스르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이생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습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자신과 매일 밤 정을 나누었던 아름다운 여인이,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공포에 질려 당장이라도 산을 내려가고 싶었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그녀가 보여주었던 따뜻한 사랑과 지극한 정성을 떠올리니, 두려움보다 더 큰 슬픔과 연민이 밀려왔습니다. 한참을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있던 이생은, 동이 트기 시작하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무덤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봉분 앞에는 이름조차 없는 작은 비석 하나가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었습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비석에 낀 이끼와 흙을 닦아냈습니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그날 밤, 이생은 과거 시험장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지난밤의 충격과 슬픔을 곱씹으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리고 약속처럼, 그날 밤에도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이생의 눈에는 그녀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창백하고 슬퍼 보였습니다. 여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선비님, 어찌 아니 주무시고 저를 기다리고 계셨사옵니까? 내일이 드디어 중요한 시험일인데..." 하지만 이생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애써 담담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뒷산에 다녀왔소." 그 말에 여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굳어졌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았습니다. 결국,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모든 것을... 보셨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생은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가 차갑게 식은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당신이 사람이든, 귀신이든 상관없소. 내게는 그저 누구보다 따뜻하고 지혜로운 여인이었소. 그러니...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시오. 당신이 누구인지, 어찌하여 이리 외로운 무덤에 홀로 잠들어 있는지 말이오." 이생의 따뜻한 말에, 여인은 끝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그녀는 이생의 품에 안겨 한참을 서럽게 울다가, 이내 자신의 기구한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본래 이조판서 댁의 외동딸이었으나, 혼인을 약조한 정혼자가 혼례를 치르기 직전 역모에 휘말려 죽고, 그 충격으로 자신 또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탓에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던 그녀의 넋은, 우연히 밤늦도록 글을 읽는 이생의 모습을 보고 깊은 연모의 정을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못다 이룬 사랑과 학문에 대한 열망을, 이생을 통해 이루고 싶었던 것이지요. 모든 이야기를 들은 이생은 말없이 그녀를 더욱 굳게 껴안아 주었습니다.
※ 급제한 이생은 곧바로 여인의 무덤을 찾아가 부부의 연을 맺는다
다음 날, 마침내 과거 시험일이 밝았습니다. 이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은 정신으로 시험장에 들어섰습니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여인의 애달픈 사연과 그녀와의 약속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붓을 들었습니다. 지난 몇 달간, 여인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나누었던 수많은 대화와 토론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녀의 지혜와 격려가 붓 끝에 서려, 막힘없이 답안을 써 내려갔습니다. 그의 답안지는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세상을 향한 깊은 통찰과 백성을 아끼는 따뜻한 마음, 그리고 한 여인을 향한 애틋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며칠 후, 장원급제를 알리는 방이 나붙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높은 곳에 '이생'이라는 이름 석 자가 당당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한양 거리는 새로운 장원급제의 탄생에 떠들썩했지만, 정작 주인공인 이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관복을 입는 것도 미룬 채, 곧장 술과 음식을 챙겨 여인이 잠들어 있는 뒷산의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초라했던 무덤은 며칠 사이에 깨끗하게 벌초되어 있었고, 쓰러져 있던 비석도 바로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생은 정성스럽게 음식을 차리고, 큰 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새로 가져온 술을 잔에 가득 채워 무덤 위에 부었습니다. "낭자, 나 이생이오. 그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소. 나는 이제 장원급제하여 이 나라의 동량이 되었소. 이 모든 것이 다 그대 덕분이오." 그의 목소리는 벅찬 감정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는 무덤 옆에 조용히 앉아, 마치 살아있는 여인에게 이야기하듯 지난 며칠간의 이야기를 두런두런 들려주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을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그의 뺨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마치 여인이 손길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져주는 듯했습니다. 그는 눈을 감고 그 감촉을 음미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반투명한 모습의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예전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얼굴에는 더 이상 슬픔의 그림자가 없었습니다. 그저 평온하고 행복한 미소만이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선비님... 아니, 서방님. 이제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서방님 덕분에 억울하게 죽은 제 한을 모두 풀고, 이제 편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인의 목소리는 바람 소리처럼 맑고 청아하게 들려왔습니다. 이생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손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습니다. "부디... 부디 행복하게 잘 지내시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소..." 여인의 모습은 점점 더 희미해지더니, 이내 한 줌의 빛이 되어 하늘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짙은 난초 향기만이 남아 이생의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이생은 사라진 하늘을 향해 목놓아 울부짖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의 눈물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사랑이 그녀의 한을 풀어주고, 편안한 안식을 선물했다는 안도감과 충만함이 담긴 눈물이었습니다. 그 후, 이생은 높은 벼슬에 올라 어진 정치를 펼쳐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훌륭한 정승이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다른 여인을 마음에 들이지 않고, 오직 죽은 여인만을 아내로 여기며 그녀의 무덤을 돌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고 어리석다 손가락질하기도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단순히 하룻밤의 정을 나눈 귀신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구원하고 영원한 사랑을 가르쳐 준 단 하나의 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그들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청구야담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들려드린 '남산골 샌님과 밤마다 나타난 귀객'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장벽조차 막을 수 없었던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도 깊은 울림을 주었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녀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지만, 선비의 마음속에서 영원한 아내로 남아 그의 삶을 이끌어주었으니, 이 또한 하나의 해피엔딩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희 야담도감은 앞으로도 이렇게 가슴 절절하고 흥미진진한 옛이야기들을 가지고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다음 이야기도 기대해주세요. 구독과 좋아요는 저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