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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적 떼를 만난 보부상,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산적 두목의 등 뒤에 서 있는 저승사자를 보고 "당신 뒤에 죽음이 서 있소"라고 예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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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
서슬 퍼런 산적의 칼날이 보부상의 목줄기를 겨누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 찰나였습니다. 50전을 아끼려다 황천길을 가게 된 보부상 김 씨의 눈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형체가 보였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산적 두목의 등 뒤, 시꺼먼 갓을 쓰고 창백한 얼굴을 한 저승사자가 붉은 명부를 펼쳐 들고 서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명 대신 김 씨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고작 "당신 뒤에 죽음이 서 있소"라는 기괴한 예언이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자의 미친 소리라며 비웃던 산적 두목에게, 그 순간 어떤 소름 끼치는 일이 벌어졌을까요? 산적 떼의 칼날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은 보부상의 배짱과, 오직 비명 소리만 가득하던 산속에서 피어난 기적 같은 대반전의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끝까지 듣지 않으시면 평생 후회하실 가슴 뜨거운 교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1.
해 질 녘, 붉게 물든 하늘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하며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지리산 자락. 까마귀조차 둥지를 찾아 숨어들고, 짐승들도 숨을 죽인다는 악명 높은 까마귀 골짜기의 험한 고갯길이었습니다. 집채만 한 무거운 짐짝을 등에 진 늙은 보부상 김 씨의 앙상한 목줄기에,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서슬 퍼런 칼날이 빈틈없이 와닿았습니다. 고단한 삶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짐을 지고 험산을 넘던 김 씨를 막아선 것은, 이 일대에서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하찮게 여긴다는 잔혹한 산적 떼였습니다. 굶주린 승냥이 떼처럼 포악한 십여 명의 산적들은 시뻘건 횃불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김 씨를 에워쌌고, 그들이 내뿜는 살기와 비릿한 피 냄새에 김 씨의 두 무릎은 이미 사시나무 떨듯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곰처럼 거대한 체구를 가진 험상궂은 산적 두목이 도끼눈을 부릅뜨고 다가와, 턱 밑까지 칼날을 깊숙이 들이밀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습니다.
"이 비루한 늙은이 놈아! 목숨을 구걸하며 가진 것을 모조리 내어놓아도 모자랄 판국에, 어찌 봇짐 속에 돈 되는 것이 이리도 없단 말이냐! 고작 엽전 몇 닢과 다 해진 무명천 나부랭이로 우리를 기만하려 들다니, 네놈이 정녕 간덩이가 부었구나. 오늘이 바로 네놈이 짐승 밥이 되는 제삿날인 줄 알아라!"
두목의 살기 어린 호통에 김 씨는 바싹 마른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평생을 발바닥에 피가 나고 부르트도록 조선 팔도의 거친 장터를 떠돌며 악착같이 모은 돈이었습니다. 뱃삯으로 낼 50전을 아껴보겠다고, 남들이 모두 말리는 이 험하고 위험한 산길을 기어코 택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이 뼛속 깊이 사무쳤습니다. '아아, 앓아누우신 늙은 어머니의 약값 50전을 아끼려다, 내 하나뿐인 목숨이 그 50전짜리도 안 되게 이 깊은 산중에서 허망하게 끝나는구나.' 가슴을 쥐어뜯는 후회와 비통함이 칼날의 서늘함보다 더 아프게 그의 숨통을 조여왔습니다. 체념한 듯 마지막으로 검게 물든 밤하늘을 올려다보려던 김 씨의 초점 잃은 눈동자가 순간, 공포심으로 찢어질 듯 거대하게 확장되었습니다. 그의 눈앞, 자신을 당장이라도 베어버릴 듯 씩씩거리는 산적 두목의 등 뒤, 시꺼먼 그림자가 드리운 공간 속에 도저히 이승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기괴한 형체가 소리 없이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듯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한 얼굴에, 칠흑처럼 검고 거대한 갓을 깊게 눌러쓰고 자락이 땅에 끌리는 시꺼먼 도포를 입은 저승사자였습니다. 산적 두목의 넓은 어깨너머로 우뚝 솟아 있는 저승사자의 뼈만 남은 하얀 손에는, 죽은 자들의 이름이 붉은 피로 빽빽하게 적혀 있는 명부가 무겁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저승사자의 깊고 어두운, 끝을 알 수 없는 텅 빈 눈동자는 김 씨가 아닌 산적 두목의 정수리를 섬뜩할 정도로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순간, 김 씨는 극도의 두려움과 절망감에 휩싸여 자신이 마침내 미쳐버린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자의 형체는 횃불의 흔들림 속에서도 지독하게 선명했고, 그 기괴한 존재가 뿜어내는 소름 끼치는 냉기는 산적들이 들고 있는 횃불의 뜨거운 열기마저 일순간에 얼려버릴 듯 사나웠습니다. 목에 닿은 칼날의 고통조차 잊어버릴 만큼 죽음의 공포가 극에 달한 찰나, 김 씨의 입에서는 살려달라는 비명 대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하고 쉰 목소리의 외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당신 뒤... 당신 등 뒤에 죽음이 서 있소! 시꺼먼 갓을 쓴 사자가, 붉은 피로 쓴 당신의 명부를 펼쳐 들고 있단 말이오!"
목줄기에 서늘한 칼날이 파고드는 절체절명의 순간, 벌벌 떠는 늙은 보부상 김 씨가 내뱉은 이 한마디는 숲의 적막을 깨는 비명보다 훨씬 처절했고, 무당의 굿판에서 나오는 예언보다 수백 배는 더 섬뜩하고 불길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 2.
지리산 까마귀 골짜기에서 산적의 칼날 앞에 무릎을 꿇기 전, 사실 김 씨는 조선 팔도 안 가본 장터가 없을 정도로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뼈가 굵어진 베테랑 보부상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이미 지천명을 넘긴 오십, 남들 같으면 따뜻한 아랫목에서 손주들 재롱이나 보며 편안히 여생을 보낼 나이였지만, 그는 여전히 제 몸무게와 맞먹는 오십 근이 훌쩍 넘는 짐짝을 지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에 꼬박 백 리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굽은 등과 갈라진 발뒤꿈치가 말해주듯 그의 인생은 하루하루가 생존을 건 전쟁터였고, 단돈 1전, 2전을 아끼기 위해 뼈를 깎는 땀과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주막에서 막걸리 한 사발도 사 먹지 않는 '지독한 구두쇠', '돈밖에 모르는 귀신'이라며 손가락질하고 비웃었지만, 그가 이토록 지독하게 돈에 집착하며 50전이라는 푼돈에 목숨을 걸게 된 데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가슴 갈기갈기 찢어지는 비통한 사연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15년 전, 온 나라에 끔찍한 역병이 창궐하여 고을마다 곡소리가 끊이지 않던 혹독한 겨울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그의 아내는 역병에 걸려 차가운 단칸방에서 피를 토하며 시름시름 앓아누웠습니다. 김 씨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꽁꽁 언 맨발로 의원을 찾아가 약 한 첩만 지어달라며 마당에 머리를 찧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의원은 약값 50전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차갑게 문을 걸어 잠갔고, 결국 그의 아내는 제대로 된 의원의 손길 한 번 받지 못한 채, 김 씨의 품 안에서 차갑게 식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굳어가는 아내의 앙상한 손을 부여잡고 김 씨는 하늘이 무너져라 울부짖었습니다. '내가, 이 못난 지아비가 고작 돈 50전이 없어서 당신을 이리 허망하게 황천길로 보내는구나! 내 평생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다시는, 두 번 다시는 돈이 없어 피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게 만들어 주마!' 그날 이후 김 씨에게 돈은 단순한 재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내를 죽음으로 내몬 세상에 대한 복수이자, 아내를 지키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잔인한 죗값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거칠고 싼 짚신을 주워 신었고, 남들이 먹다 버린 찬밥 덩어리로 끼니를 때웠으며, 산적이나 들짐승이 출몰하여 남들이 모두 꺼리는 가장 험하고 가파른 길만을 골라 다녔습니다. 이 모든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악착같이 돈을 모은 이유는 단 하나, 아내를 떠나보내고 유일하게 곁에 남은 병든 홀어머니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강을 건너는 안전한 나룻배 뱃삯 50전을 아끼기 위해 굳이 도적이 들끓는 지리산의 가파른 산길을 꾸역꾸역 기어오른 것도, 그 50전이면 어머니의 기침을 멎게 할 귀한 약재를 일주일 치나 더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깟 산적 놈들, 내 평생 험한 꼴 다 보고 살았는데 운 좋게 피해서 숨어 넘어가면 그만이지.' 그는 자신의 오랜 경험과 질긴 목숨을 과신하며 요행을 바랐습니다. 하지만 돈에 눈이 멀어 죽음의 골짜기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그 오만함이, 평생을 피땀 흘려 쌓아온 어머니를 향한 효심을 이토록 허망하고 비참하게 끝장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관아의 포졸들조차 순찰 가기를 꺼린다는 음산한 골짜기, 그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산적 두목의 시퍼런 칼날을 맞닥뜨린 순간 김 씨는 비로소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평생을 비참하게 굶주리며 아끼고 아꼈던 그 50전이, 정작 자신의 목숨 앞에서는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못한, 한낱 부질없는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하지만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했습니다. 돈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간 아내의 한을 제대로 풀기도 전에, 또다시 약값 50전을 아끼려다 산적의 칼에 목이 잘려 이름 모를 들짐승의 먹이가 될 자신의 비참한 운명이 너무나 가혹하게 느껴졌습니다. 극도의 분노와 절망감, 그리고 살갗을 파고드는 죽음의 냉기가 온몸을 무자비하게 휘감던 그 찰나의 순간, 그의 눈앞에 마치 환영처럼 불쑥 나타난 저승사자는 마치 평생 돈의 노예로 살아온 자신의 비루한 인생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아, 나는 결국 아내를 삼켰던 그 지독한 돈 귀신에게 이끌려, 이 험한 산중에서 황천길로 끌려가는구나. 아내를 지키지 못한 죗값을 이제야 내 목숨으로 치르는구나.'
※ 3.
자신의 등 뒤에 갓을 쓴 저승사자가 붉은 명부를 들고 서 있다는 김 씨의 기괴하고도 절박한 외침에, 짐승처럼 날뛰던 산적 두목은 아주 잠시 흠칫하며 목을 겨누던 칼날을 멈추었습니다. 인간의 본능적인 두려움에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등 뒤를 확인하려 했지만, 칠흑 같은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내 두목은 어리석은 자신이 보잘것없는 늙은이의 수작에 속아 넘어갈 뻔했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끼며, 산이 떠나갈 듯 호탕하고 잔인한 비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횃불의 시뻘건 불빛을 받아 기괴하게 일그러진 그의 흉터투성이 얼굴은 지옥에서 갓 튀어나온 악귀보다 더 흉측하고 섬뜩했습니다.
"으하하하하! 이 미친 늙은이 놈이 보따리를 빼앗기고 명줄이 끊어질 때가 되니 드디어 헛것을 보며 실성했구나! 내 등 뒤에 저승사자가 서 있다고? 오냐, 그래! 그 사자가 다 늙어빠진 네놈의 혼줄을 지금 당장 빼가려고 곁에서 대기하고 있나 보구나! 그런 시시콜콜한 헛소리 따위는 당장 황천길로 굴러떨어져서 염라대왕 앞에서나 짓껄여라!"
두목은 김 씨의 말을 완벽한 조롱거리로 삼으며, 다시금 핏줄이 선 굵은 팔뚝에 힘을 꽉 주고 김 씨의 목을 단숨에 내리치기 위해 시퍼런 칼을 허공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하지만 칼날이 번쩍이며 아래로 떨어지려는 바로 그 절체절명의 찰나, 시간이 멈춘 듯한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두목의 억센 등 뒤에 우뚝 서 있던 저승사자가 펼쳐 들고 있던 핏빛 명부를 아주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탁 소리를 내며 덮어버린 것입니다. 이어서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짤랑, 하는 오싹하고도 기분 나쁜 쇠사슬 끌리는 소리가 오직 김 씨의 귓가에만 선명하게 메아리쳤습니다. 저승사자는 김 씨의 목을 내리치기 위해 잔뜩 힘이 들어간 산적 두목의 정수리를 향해, 창백하고 앙상한 손가락을 뱀처럼 스르륵 뻗어 가볍게 얹었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윽...!"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뿜어내던 산적 두목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습니다. 살기로 번득이던 그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뒤로 확 뒤집히더니, 집채만 한 거구의 몸뚱어리가 마치 밑동이 잘려 나간 거대한 고목나무처럼 앞으로 푹 고꾸라지며 흙바닥에 처박혔습니다. 비명 한마디,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숨이 끊어진, 그야말로 허무하고도 완벽한 즉사였습니다. 두목의 거구는 김 씨의 무릎 앞을 가로막으며 무겁게 나뒹굴었고, 그의 손에 단단히 쥐여 있던 시퍼런 칼은 허공을 갈라 김 씨의 짚신 발치에 힘없이 툭 떨어졌습니다. 주변을 에워싸고 횃불을 흔들며 승전고를 울리려던 십여 명의 산적들은 도무지 눈앞에서 무슨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인지 도저히 머리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입을 떡 벌린 채, 칼자국 하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돌연사한 두목의 끔찍한 시신만을 숨죽여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김 씨 역시 마찬가지로 온몸이 굳어있었습니다. 자신을 짓누르던 죽음의 칼날이 기적처럼 눈앞에서 사라졌음에도, 극도의 공포와 경외감에 짓눌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김 씨의 덜덜 떨리는 눈동자 속에만, 흙바닥에 쓰러진 두목의 몸뚱어리 위로 천천히, 아주 우아하게 걸어 나가는 저승사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저승사자는 고꾸라진 두목의 보이지 않는 영혼의 목덜미에 시꺼먼 쇠사슬을 거칠게 옭아매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땅바닥에 주저앉은 김 씨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습니다. 감정이 거세된 듯 깊고 어두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연민이 묻어나는 눈동자였습니다. 저승사자는 창백한 입술을 미세하게 달싹였고, 주변의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된 진공 상태에서 오직 김 씨의 머릿속으로만 낮고 기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비루한 보부상아, 네놈의 어리석음과 명줄은 아직 다하지 않았으나, 푼돈에 목숨을 거는 그 아둔한 오만함이 오늘 너를 사지로 몰아넣었구나. 허나 명심하거라. 네가 이 험산을 넘으며 악착같이 아끼려던 그 50전, 그 속에 담긴 병든 어미를 향한 깨끗하고 눈물겨운 효심이 명부의 심판을 비껴가 너를 이 죽음의 골짜기에서 구원했음을 잊지 말아라. 죽음은 결코 너의 등 뒤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 살아 숨 쉬는 하루하루를 헛되이 낭비하지 말고 귀하게 여기거라.'
그것은 이승을 떠도는 흔한 귀신의 저주나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습니다. 평생을 돈이라는 감옥에 갇혀 죽어간 아내의 환영에 시달려온 김 씨의 멍든 가슴에,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명부의 사신이 직접 꽂아 넣은 위대하고도 따뜻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김 씨는 그제야, 자신이 피눈물을 흘리며 아끼려던 그 50전이 단순한 엽전 쪼가리나 구두쇠의 탐욕이 아니라, 늙은 어머니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숭고한 효심이자 죽은 아내를 향한 절박한 속죄였음을 온몸으로 깨달았습니다.
※ 4.
산이 떠나갈 듯 호탕하게 비웃던 산적 두목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밑동 잘린 고목나무처럼 쿵 하고 흙바닥에 고꾸라지자, 시뻘건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김 씨의 봇짐을 털어먹을 생각에 낄낄대던 십여 명의 산적들은 일순간 얼음기둥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습니다. 까마귀의 울음소리도, 앙상한 나뭇가지를 흔들던 매서운 산바람 소리마저 완벽하게 멎어버린 듯한 지독하고도 기괴한 정적 속에서, 누군가 사시나무 떨리는 손을 조심스레 뻗어 두목의 코밑에 손가락을 대보았습니다. "수... 숨을 안 쉰다! 두목이 죽었어! 숨이 끊어졌다고!" 그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동시에 산적 무리 사이로는 걷잡을 수 없는 끔찍한 공포가 전염병처럼 번져나갔습니다. 방금 전까지 시퍼렇게 날이 선 대도(大刀)를 휘두르며 자신만만하게 늙은 보부상의 목줄기를 단숨에 베어버리려던 천하장사 두목이, 그 어떤 외상이나 징후도 없이 눈을 까집고 급사하다니 도무지 인간의 머리로는 믿을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공포에 질린 산적들의 시선이 일제히 바닥에 주저앉아 넋이 나간 김 씨를 향해 천천히 쏠렸습니다. 불과 몇 초 전, 김 씨가 미친 사람처럼 허공을 향해 핏대를 세우며 "당신 등 뒤에 죽음이 서 있소! 시꺼먼 갓을 쓴 사자가 붉은 명부를 들고 있단 말이오!"라고 부르짖었던 그 기괴하고 섬뜩한 예언이 그들의 뼛속 깊이 소름 끼치게 되살아난 것입니다. "이... 이 비루한 늙은이 놈이 사악한 주술을 부렸다! 보이지 않는 저승사자를 불러내 우리 두목의 혼줄을 빼앗아간 게 틀림없어!" 겁에 질린 산적들은 김 씨를 향해 들고 있던 칼과 도끼를 허우적거리며 빼 들었지만, 그들 중 단 한 명도 감히 앞으로 나서서 김 씨의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시꺼먼 사신이 어둠 속 어디선가 나타나, 당장이라도 자신들의 등 뒤에 바짝 붙어 목줄기에 서늘한 쇠사슬을 옭아맬지 모른다는 극도의 두려움이 그들의 발목을 꽁꽁 묶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끔찍한 아수라장 속에서도 김 씨는 여전히 멍한 두 눈으로 텅 빈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만 보였던 시꺼먼 저승사자는, 바닥에 쓰러진 두목의 몸뚱어리에서 빠져나온 영혼에 무거운 쇠사슬을 걸어 질질 끌며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였습니다. 하지만 저승사자가 남기고 간 그 서늘하고도 묵직한 한기는 여전히 김 씨의 거친 피부를 바늘처럼 찌르는 듯 생생했습니다. '네가 아끼려던 그 50전, 그 깨끗하고 눈물겨운 효심이 너를 이 죽음의 골짜기에서 구원했음을 잊지 말거라.'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사자가 남긴 마지막 속삭임이 김 씨의 가슴 한복판을 거대한 망치처럼 강하게 내리쳤습니다. 순간, 15년 전 돈 50전이 없어 불기 없는 차가운 방바닥에서 각혈하며 숨을 거두던 아내의 창백한 얼굴과, 약 한 첩을 어떻게든 지어 먹이려 매서운 눈보라를 뚫고 산길을 오르내리며 피눈물을 흘리던 짐승 같았던 자신의 과거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돈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하고 허망하게 잃었다는 지독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돈 귀신'이라 부르며 학대하듯 억척스럽게 살아온 지난 15년의 세월들. 한겨울에도 짚신 한 켤레를 아끼려다 발바닥의 굳은살이 쩍쩍 갈라져 붉은 피가 배어 나와도 아픈 줄 모르고 악착같이 엽전을 모았던 것은, 결코 자신의 따뜻한 배를 불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늙고 병들어 홀로 남은 가여운 어머니를 끝까지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자, 아내를 지키지 못한 못난 지아비의 피눈물 나는 속죄의 의식이었습니다.
자신을 향해 흉기를 겨누고 덜덜 떠는 십여 명의 산적 떼 앞에서, 김 씨는 투박한 손으로 차가운 흙바닥을 짚고 천천히, 아주 무겁게 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의 주름진 목줄기에는 방금 전 산적 두목의 칼날에 미세하게 베인 가느다란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의 두 눈에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며 목숨을 구걸하던 나약한 보부상의 비굴한 빛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산적들에게 허망하게 빼앗길 뻔했던 집채만 한 오십 근짜리 짐짝을 다시 굽은 어깨에 단단히 둘러메며, 김 씨는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마치 목에서 붉은 피를 토해내듯 처절하고도 우렁찬 목소리로 밤의 산골짜기를 향해 짐승처럼 포효했습니다.
"이 천하의 몹쓸 놈들아!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내 굽은 등에 짊어진 이 무거운 짐짝은 그저 내다 파는 비단이나 곡식이 아니라 내 하나뿐인 목숨이요, 지금도 추운 방바닥에 누워 나만 기다리시는 늙은 어머니의 피와 살점이다! 너희들이 남의 귀한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며 칼로 찔러 빼앗은 재물로 배를 두드리고 고기를 뜯어먹을 때, 세상의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의 숨을 단 하루라도 더 연장하기 위해 발톱이 시커멓게 빠지도록 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산을 넘는다! 정녕 하늘의 심판이 두렵지 않단 말이냐! 방금 니놈들 두목의 더러운 목숨을 거두어 간 저승사자의 서늘한 숨결이 아직도 이 자리에 시퍼렇게 머물고 있음을, 니놈들의 등 뒤에도 시꺼먼 명부가 펄럭이고 있음을 정녕 모른단 말이냐!"
피 맺힌 절규와도 같은 김 씨의 거대한 일갈이 깊고 어두운 산속을 쩌렁쩌렁 울리며 메아리쳤습니다. 횃불과 칼을 들고 있던 산적들은 그 늙은 보부상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기백과, 보이지 않는 죽음의 끔찍한 공포에 완전히 압도되어 하나둘 겁에 질린 채 꽁무니를 빼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단순한 슬픔이나 억울함 때문이 아니라, 삶의 진정한 무게와 구원의 감격에 벅차올라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의 진짜 이유를 알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 5.
김 씨의 핏대 선 포효가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고 서서히 잦아들자, 험준한 까마귀 골짜기에는 오직 산적들이 쥐고 있는 시뻘건 횃불이 타들어 가는 위태로운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이 맴돌고 있었습니다. 기골이 장대하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십여 명의 산적 떼는 굽은 등을 한 왜소하고 늙은 보부상 단 한 명을 에워싸고도, 감히 다가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 사시나무 떨듯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불과 반각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하늘처럼 믿고 따르던 무소불위의 거대한 두목이, 신의 끔찍한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칼집 한 번 뽑아보지 못하고 흙바닥에 허망하게 즉사한 광경. 그리고 피를 흘리며 "당신 등 뒤에 죽음이 서 있소"라고 미친 듯이 외치던 김 씨의 소름 끼치는 예언이 그들의 뼛속 깊은 곳까지 지독한 공포의 낙인으로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칼자루를 바들바들 떨며 쥐고 있던 산적 부두목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낯빛으로 땅바닥에 대도를 내던지며 털썩 하고 두 무릎을 꿇었습니다.
"살려주시오... 대인, 제발 이 비루한 목숨만은 살려주시오! 우리가 짐승만도 못한 짓을 저지르며 평생 남의 피를 빨아먹고 살았으나, 부디 그 시꺼먼 저승사자를 당장 거두어 주시옵소서! 당신의 그 귀한 짐짝에는 평생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을 터이니, 제발 대인의 신통력으로 우리를 살려만 주십시오!"
거구의 부두목이 무릎을 꿇고 흙바닥에 머리를 찧기 시작하자, 공포에 전염된 나머지 산적들도 앞다투어 들고 있던 횃불과 도끼를 팽개치고 맨땅에 바짝 엎드려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기 시작했습니다. 방금 전까지 김 씨의 가냘픈 목숨을 쥐락펴락하며 짐짝을 갈기갈기 찢어 털어먹으려던 잔혹한 포식자들이, 일순간 목숨을 구걸하며 겁에 질린 한낱 벌레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기막힌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김 씨는 엎드려 울부짖는 산적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깊고 무거운 한숨을 길게 내쉬었습니다. 만약 그가 그 끓어오르는 순간에 알량한 복수심을 품고 관아에 내려가 모조리 능지처참을 당하게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면, 코너에 몰려 이판사판이 된 산적들이 살기 위해 다시 독기를 품고 짐승의 이빨을 드러냈을지도 모를 아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라는 얇고도 잔인한 경계선을 방금 전 뼈저리게 넘나든 김 씨의 늙고 지친 마음속에는, 타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을 훌쩍 뛰어넘는 거대하고도 평온한 깨달음의 강물이 이미 조용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김 씨는 어깨를 짓누르는 오십 근짜리 짐짝의 끈을 다시 한번 단단히 고쳐 매고, 덜덜 떨며 엎드려 있는 산적 무리 사이를 지나쳐 묵묵히 하산하는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눈 덮인 산길을 몇 걸음 위태롭게 걷던 그가 잠시 멈춰 서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어깨너머로 무심하게 툭 던진 서늘한 한마디는, 엎드려 있던 산적들의 심장 정중앙에 깊고 날카로운 비수를 꽂아 넣었습니다. "그 사자는 내가 신통력으로 부른 것이 아니다. 니놈들이 평생토록 남의 귀한 눈에 피눈물을 내며 겹겹이 쌓아 올린 그 더러운 죗값이, 니놈들 스스로의 등 뒤로 명부의 사신을 불러들인 것이지. 오늘 밤 내 목을 베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았다고 결코 안도하며 기뻐하지 마라. 남의 목숨을 엽전 몇 닢의 헐값으로 여기는 자의 어두운 등 뒤에는, 언제나 시꺼먼 명부를 치켜든 죽음의 그림자가 찰거머리처럼 바짝 붙어 서 있음을 평생토록 뼛속에 새기고 살아라."
그 서릿발 같은 말 한마디를 차가운 밤공기 속에 남긴 채, 김 씨는 험악한 고갯길을 넘어 짙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산적들은 뼈를 에는 산바람을 맞으며 아침의 붉은 해가 산등성이로 떠오를 때까지 그 자리에서 엎드려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고, 그날 이후 지리산 험지 까마귀 골짜기에는 두 번 다시 길손의 목숨을 노리는 산적 떼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선량한 사람들의 피를 거머리처럼 빨아먹던 흉악한 악당들이, 보이지 않는 저승사자가 남긴 압도적인 공포와 삶의 밑바닥을 전전하던 늙은 보부상의 처절한 일갈에 스스로 쥐고 있던 칼을 꺾어버리고 뿔뿔이 흩어진 것입니다.
며칠 뒤, 발바닥에 물집이 터지고 피가 나도록 걸어 무사히 고향의 허름한 초가집으로 돌아온 김 씨는, 자신의 목숨과도 맞바꿀 뻔했던 귀한 약첩을 정성껏 다려 누워계신 어머니의 마른 입술에 조심스레 떠 넣어 드렸습니다. 고작 50전을 아끼려다 지옥의 문턱까지 발을 들여놓고 왔지만, 기력을 회복한 어머니의 쭈글쭈글하고 따뜻한 손을 두 손으로 꽉 맞잡는 순간 그의 가슴속에는 평생 동안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던 지독한 죄책감이 봄눈 녹듯 씻겨 내려가는 듯한 먹먹하고도 눈물겨운 카타르시스가 벅차게 차올랐습니다. 돈 때문에 불쌍한 아내를 죽게 내버려 두었다는 15년 묵은 원통한 자책감은, 목숨을 걸고 마침내 어머니를 지켜낸 굳은살 박인 두 손의 떳떳함과 따스함으로 완벽하게 승화되었습니다. '여보, 내가 이제야 당신에게 진 그 무거운 빚을, 당신이 남기고 간 어머니를 살림으로써 조금이나마 갚은 것 같소. 부디 저 하늘에서 이제는 마음 편히 웃고 있으시오.'
※ 6.
까마귀 골짜기에서의 그 끔찍하고도 기적 같았던 밤으로부터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훌쩍 흘러갔습니다. 이제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 육십 노인이 된 김 씨는, 더 이상 자신의 몸집만 한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험한 산길을 넘고 물을 건너는 보부상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커다란 장터 어귀 양지바른 곳에 작고 소박한 주막을 하나 열고, 길을 오가는 가난한 봇짐장수들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배고픈 나그네들에게 아주 헐값에, 때로는 거저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하고 푸짐한 고기 국밥을 말아주며 여생을 평화롭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단돈 1전, 2전을 아끼려 제 발등을 찍으며 피눈물을 흘리던 억척스럽고 모질었던 과거 '돈 귀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푹 파인 주름진 그의 얼굴에는 항상 봄볕처럼 인자하고 넉넉한 미소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헐벗고 굶주린 장터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를 가리켜 '돈보다 사람의 목숨을 먼저 거두어 먹이는 살아있는 부처님', 활불(活佛)이라 부르며 깊이 존경했습니다.
문풍지가 찢어질 듯 북풍한설이 매섭게 몰아치고 함박눈이 발목까지 펑펑 내리던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습니다. 모두가 일찍 문을 걸어 잠근 야심한 시각, 닳아빠진 얇은 누더기를 겹겹이 걸치고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초라한 사내 하나가 꽁꽁 언 손으로 주막의 미닫이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섰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덜덜 떨며 구석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국밥 한 그릇을 조심스레 청하던 그 늙은 사내의 얼굴이 희미한 호롱불 아래로 드러난 순간, 국자를 쥐고 있던 김 씨의 맑은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파르르 흔들렸습니다. 얼굴 절반을 덮고 있던 흉터와 절뚝이는 다리. 그는 다름 아닌 십 년 전, 지리산 까마귀 골짜기에서 김 씨의 목에 칼을 들이밀며 짐짝을 빼앗으려다 저승사자의 공포 앞에 무릎을 꿇었던 바로 그 잔혹했던 산적 부두목이었습니다.
사내는 세월의 풍파에 변해버린 김 씨의 얼굴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 채, 김 씨가 듬뿍 퍼다 준 뜨거운 국밥을 마치 며칠 굶은 짐승처럼 허겁지겁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뚝배기 위로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습니다. "어르신... 참으로, 참으로 고맙습니다. 제 평생 젊은 시절에는 남의 귀한 것만 칼로 찔러 훔치며 짐승만도 못하게 살다가, 어느 날 밤 산속에서 벼락같은 죽음의 시퍼런 공포를 겪고 개과천선하여 평생 산비탈 흙을 파먹으며 죄를 씻고 살았습니다. 허나 제가 지은 전생의 죗값이 워낙 깊고 무거워 이리 병들고 한쪽 다리마저 저는 가난한 신세가 되었지만, 남을 베어 훔친 피 묻은 돈으로 기름진 고기를 배 터지게 먹을 때보다... 지금 이렇게 눈 오는 밤 떳떳하게 적선 받아먹는 이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 천 배, 만 배는 더 달고 눈물겹습니다."
그 회한 섞인 고백을 가만히 듣고 있던 김 씨는, 아무런 책망의 말 없이 그저 빙긋 웃으며 따뜻한 아랫목으로 다가가 사내의 거칠고 꽁꽁 언 두 손을 꽉 쥐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몰래 준비해 둔 엽전 꾸러미 하나를 사내의 품에 가만히 밀어 넣으며 속삭였습니다. "그래, 그동안 참으로 고생이 많았네. 등 뒤에 항상 시꺼먼 죽음이 서 있다는 사실을 단 하루도 잊지 않고 참회하며 살아왔으니, 자네는 이미 그 무서운 지옥불을 무사히 피한 것이야. 이제는 과거의 죗값에 얽매이지 말고, 앞만 보고 떳떳하고 사람답게 살아가시게." 김 씨의 부드러우면서도 뼈 있는 그 한마디에, 그제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 씨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사내는, 십 년 전 칠흑 같은 산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일깨웠던 그 늙은 보부상임을 단번에 깨닫고는 짐승처럼 통곡하며 주막 바닥에 엎드려 수십 번의 큰절을 올렸습니다.
자신을 죽이려 칼을 들었던 철천지원수에게 따뜻한 국밥을 말아 내어주고 용서의 손길을 건넨 김 씨의 늙은 마음속에는, 세상 그 어떤 황금으로도 살 수 없는 참으로 깊고 묵직한 평화가 눈꽃처럼 깃들어 있었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 산적의 등 뒤에 나타났던 저승사자는 어쩌면 단순히 악당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생 50전이라는 돈의 감옥에 갇혀 스스로를 잔인하게 갉아먹던 김 씨의 고통스러운 과거의 사슬을 영원히 끊어내고, 욕망이라는 괴물로 변해버린 산적들의 삶에 서늘한 생명의 경종을 울리기 위해 하늘이 내려보낸 위대한 기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이고 피할 수 없는 거울 앞에 벌거벗고 섰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내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사람다운 것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법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저 옛날 산속의 기묘한 전설이 아니라, 끝없는 탐욕을 향해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지금 우리의 하루하루에 너무도 절실히 필요한, 삶의 차가운 이정표처럼 묵직한 울림을 던져줍니다.
엔딩
살다 보면 눈앞에 아른거리는 작은 이익이나 채워지지 않는 탐욕에 눈이 멀어, 정작 내 삶을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진짜 소중한 사람들과 따뜻한 가치를 까맣게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산적 두목의 등 뒤에 소리 없이 서 있던 저승사자의 서늘한 그림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끝없는 욕망을 좇아 정신없이 내달리는 우리들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서서 삶을 경고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어깨에 무겁게 짊어진 삶의 짐짝 안에는 진정으로 땀 흘려 지켜야 할 귀하고 따뜻한 것들이 담겨 있습니까? 아니면 당장 내려놓아야 할 부질없는 욕심의 돌덩이들이 무겁게 자리 잡고 있습니까. 한국의 길에서 발견하는 지혜, 한국의교훈에서 시작됩니다.
썸네일 프롬프트
A cinematic, photorealistic landscape in the deep mountains of the Joseon Dynasty at sunset. A rugged bandit leader with a fierce expression has a sword raised against a terrified Korean peddler (Booboo-sang) with a large backpack. Standing directly behind the bandit leader is a tall, menacing Korean Grim Reaper (Jeoseung Saja) wearing a black gat and robe, holding a death register. Dramatic lighting with strong contrasts between sunset, darkness, and ghostly white, highly detailed, no text --ar 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