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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려갈 영혼을 놓친 저승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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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사자, #야담, #전설, #영혼, #오디오드라마, #감동실화, #판타지, #죽음, #삶과죽음, #미련, #저승, #이승, #환생, #가족애,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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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검은 도포 자락이 스칠 때마다 이승의 시간이 멈춥니다. 서늘한 바람결에 실려 온 어느 길 잃은 영혼의 이야기. 왜 저승사자는 그날 밤, 반드시 데려가야만 했던 영혼을 놓치고 말았을까요? 죽음의 문턱에서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한 한 사람과 그를 지켜보는 저승사자의 기묘하고도 슬픈 동행. 당신의 마음을 울릴 밤의 이야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 1: 멈춰버린 빗방울, 그리고 비어버린 명부
차갑고 묵직한 밤공기가 도시의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마저 집어삼킬 듯 무겁게 내려앉은 새벽이었습니다. 하늘에서는 굵은 빗방울이 아스팔트 위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 모든 소란스러움이 거짓말처럼 멈춰버렸습니다. 허공에 떠 있는 빗방울들은 마치 누군가 세상의 시간을 통째로 얼려버린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교차하며 번쩍이던 구급차의 경광등 불빛도, 고통에 신음하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일그러진 표정도 모두 한 장의 사진처럼 정지된 채였습니다.
그 적막하고 기괴한 풍경 속을 유일하게 움직이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칠흑같이 검은 도포 자락을 발목까지 늘어뜨린 채,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며 걸어오는 남자.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혼을 거두는 자, 저승사자였습니다. 그의 발걸음이 빗물 고인 웅덩이에 닿았지만, 수면에는 어떠한 파문도 일지 않았습니다. 사자는 무심하고 건조한 눈빛으로 처참하게 찌그러진 트럭과 그 밑에 깔린 승용차를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매일 밤 마주하는 죽음의 현장이었기에,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동요도 연민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자는 품속에서 검고 낡은 가죽 장정의 책, 명부를 꺼내 들었습니다. 죽은 자의 이름과 생몰 연월일이 적힌 그 명부의 어느 한 페이지에서 붉은빛이 희미하게 명멸하고 있었습니다. 사자의 희고 긴 손가락이 붉은 글씨 위를 천천히 훑고 지나갔습니다.
"망자 최성훈. 마흔두 살. 오늘 새벽 두 시 십오 분, 빗길 교통사고로 명을 다함."
낮고 서늘한, 감정이 철저하게 배제된 사자의 목소리가 정지된 허공으로 흩어졌습니다. 규칙대로라면 명부에 적힌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순간, 육신에서 떨어져 나온 혼백이 사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사자는 찌그러진 승용차 운전석 쪽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곳에는 운전대를 꽉 쥔 채 피를 흘리며 굳어버린 한 남자의 육신이 있었습니다. 사자는 건조한 입술을 열어 다시 한번 이름을 불렀습니다.
"최성훈."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늘 그렇듯 육신을 빠져나와 혼란스러움과 두려움에 떨며 주변을 서성여야 할 영혼의 모습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자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좁혀졌습니다.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영혼을 거두어 명부전으로 인도해 온 그였지만, 망자가 현장을 이탈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영혼이구나. 육신을 벗어난 혼백이 갈 곳은 정해져 있거늘, 대체 어디로 도망쳤단 말인가.'
사자는 눈을 지그시 감고 공기 중에 흩어진 혼백의 기운을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이승의 것에 속하지 않는 서늘하고 옅은 기운. 죽음의 문턱을 갓 넘은 영혼만이 풍기는 그 독특한 잔향이 빗물 냄새에 섞여 아주 희미하게 북쪽을 향해 이어져 있었습니다. 사자는 명부를 다시 품속에 거두며 북쪽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습니다.
"도망친다고 해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고통스러운 시간을 유예할 뿐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사자의 모습이 안개처럼 스르르 흩어지더니, 멈춰있던 시간의 톱니바퀴가 다시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공중에 멈춰있던 빗방울들이 일제히 아스팔트 위로 쏟아져 내리며 요란한 소음을 만들어냈고,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다급한 외침이 다시 새벽 공기를 날카롭게 찢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란스러운 현장 어디에도, 방금 전까지 그곳에 서 있던 검은 도포의 사자도, 그리고 떠나야 할 영혼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비에 젖은 차가운 죽음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 2: 온기를 잃은 손, 이승에 묶인 발걸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끝없이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발바닥이 땅에 닿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몸이 가벼웠지만, 가슴속은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과 묵직한 통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성훈은 자신이 왜 이렇게 비에 젖은 밤거리를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지조차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미친 듯이 맴돌고 있었습니다.
'가야 해. 은수에게 가야 해. 오늘이 지나기 전에 반드시 가야만 해.'
성훈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서울 변두리의 낡고 오래된 다세대 주택 앞이었습니다. 익숙한 대문을 밀고 들어가려던 성훈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습니다. 굳게 닫혀 있던 철제 대문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 그의 손이 마치 물안개를 통과하듯 쇠문 너머로 쑥 빠져나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성훈은 자신의 두 손을 번갈아 내려다보았습니다.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의 몸은 단 한 방울의 비도 맞지 않은 채 기묘하게 건조했습니다. 아니, 비가 그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내 몸이 왜 이래?"
당황한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았지만, 그 소리조차 자신의 귀에 멀고 희미하게만 들려왔습니다. 순간, 찢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헤드라이트 불빛이 자신을 덮쳐오던 끔찍한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핸들을 꺾으며 느꼈던 끔찍한 충격, 유리가 깨지는 소리, 그리고 짙은 어둠. 성훈은 비틀거리며 벽을 짚으려 했지만, 그의 몸은 낡은 벽돌담마저 허무하게 통과해 버렸습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내가 죽었을 리가 없어. 은수가... 우리 은수가 나만 기다리고 있는데!'
현실을 부정하듯 성훈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반투명해진 몸을 이끌고 현관문을 통과해 집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작고 비좁은 거실 안은 고요했습니다. 낡은 스탠드 조명만이 은은하게 켜져 있는 방 안쪽에서, 새근새근 옅은 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성훈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곳에는 이제 겨우 일곱 살이 된 딸, 은수가 이불을 걷어찬 채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은수의 머리맡에는 핑크색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된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고, 달력의 오늘 날짜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은수 생일♥'이라고 적힌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습니다. 성훈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며칠 전부터 갖고 싶다던 토끼 인형을 사 들고, 생일이 지나기 전에 서둘러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야근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면서도, 인형을 품에 안고 기뻐할 딸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토록 서둘렀는데.
"은수야... 아빠 왔어. 우리 딸 생일 축하해주려고 아빠가 왔어..."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며 성훈은 은수의 작은 뺨을 향해 손을 뻗었습니다. 사랑스러운 딸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 뺨을 쓰다듬으려 했지만, 그의 손은 은수의 얼굴을 허무하게 통과해 베갯잇 위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만질 수가 없었습니다. 안아줄 수도, 이불을 덮어줄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온기를 잃어버린 투명한 손으로 허공을 휘젓는 것뿐이었습니다.
"안 돼... 안 돼,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안아보게 해주세요. 내 딸... 가여운 내 딸을 두고 내가 어떻게 가...! 혼자 남을 우리 은수를 두고 내가 어떻게 가냐고!"
성훈은 잠든 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소리 없는 오열을 토해냈습니다. 쏟아지는 눈물조차 바닥에 닿기 전에 증발해 버리는, 철저하게 세상과 분리된 존재의 슬픔. 아내를 병으로 먼저 떠나보내고 세상에 오직 둘만 남겨진 부녀였습니다. 자신이 없으면 이 험한 세상에 완전히 혼자 내버려질 어린 딸을 두고, 성훈은 차마 죽음이라는 거대한 운명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잠든 은수의 곁을 맴돌며,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지박령처럼 스스로의 영혼을 깊고 깊은 미련의 사슬로 꽁꽁 묶어버리고 있었습니다.
※ 3: 어두운 골목길의 추격자, 엇갈린 마주침
비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다세대 주택이 밀집한 비좁은 골목길 어귀,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짙은 어둠 속에서 검은 구두 앞코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사자는 젖은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지듯 걸어오며 주변의 기운을 살폈습니다. 영혼이 머물고 있는 곳 주변은 이승의 공기마저 기이하게 뒤틀리기 마련이었습니다. 사자의 시선이 골목 끝자락에 위치한 낡은 주택 2층 창문으로 향했습니다.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빛의 윤곽이 쉴 새 없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찾았군. 지독한 미련이 발목을 잡은 모양이로다.'
사자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 성훈의 집 현관문 앞에 섰습니다. 굳게 닫힌 문은 사자에게 아무런 장애물도 되지 않았습니다. 짙은 안개가 스며들듯 문을 통과해 집 안으로 들어선 사자의 눈앞에, 잠든 아이의 침대 곁을 초조하게 맴돌고 있는 성훈의 영혼이 보였습니다. 성훈은 아이를 만지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도, 혹여나 아이가 깰세라 곁을 떠나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자의 서늘한 기운이 방 안을 채우자, 방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며 창문에 성에가 끼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이한 한기를 느낀 성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자를 바라보았습니다. 검은 도포 자락, 감정 없는 서늘한 눈동자. 본능적으로 그가 누구인지, 왜 이곳에 왔는지 깨달은 성훈의 반투명한 얼굴이 공포와 절망으로 일그러졌습니다.
"망자 최성훈. 때가 되었다. 이승에서의 인연은 여기까지니, 이제 그만 미련을 거두고 나를 따르라."
사자의 목소리는 고요한 방 안을 날카롭게 베어냈습니다. 성훈은 본능적으로 잠든 은수의 앞을 가로막고 섰습니다. 비록 물리적인 힘은 없지만, 사자로부터 딸을 지키겠다는 듯 두 팔을 벌린 채 절박하게 소리쳤습니다.
"가까이 오지 마! 당신이 누군지 알아. 하지만... 하지만 난 아직 갈 수 없어!"
사자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성훈의 처절한 몸부림을 조용히 응시했습니다.
"죽은 자가 산 자의 곁을 맴도는 것은 순리를 거스르는 일. 네가 뿜어내는 음기가 결국 저 아이의 생기마저 갉아먹게 될 것이다. 진정 저 아이를 위한다면, 당장 이곳을 떠나는 것이 맞다."
"거짓말 마! 내 딸이야... 세상에 피붙이라곤 나 하나뿐인데, 내가 없으면 이 어린것이 어떻게 살라고! 보육원에 버려져서 평생 외롭게 살 텐데... 내가 어떻게 눈을 감아! 제발... 제발 부탁입니다. 아이가 클 때까지만... 아니, 스스로 밥이라도 챙겨 먹을 수 있을 때까지만 곁에 있게 해주세요. 제발!"
성훈은 사자의 발밑에 엎드려 투명한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습니다. 그의 절규가 방 안을 가득 채웠지만, 사자의 눈빛은 변함없이 건조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사자는 이런 장면을 수천 번, 아니 수만 번도 더 보아왔습니다. 남겨진 자식 때문에, 사랑하는 연인 때문에, 억울한 원한 때문에 이승을 떠나지 못하겠다고 울부짖는 영혼들. 그러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냉혹한 법이었습니다. 단 한 번의 예외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 저승의 철칙이었습니다.
"네 심정은 가상하나, 죽음의 법도를 어길 수는 없다. 강제로 끌려가며 흉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일어나 앞장서라."
사자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허공에 진언을 그리자, 성훈의 영혼을 옭아맬 검은 사슬이 스르륵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찰그랑거리는 소름 끼치는 쇠사슬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자, 성훈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습니다.
'안 돼... 이대로 끌려갈 순 없어. 은수야... 은수야!'
성훈이 절망적으로 아이를 부르짖는 순간이었습니다. 잠들어 있던 은수가 작게 뒤척이더니, 감긴 눈술 사이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이의 작은 손이 허공을 더듬더니, 반투명한 성훈의 영혼, 그 소매 끝을 기적처럼 움켜쥐었던 것입니다.
"아빠... 가지 마..."
잠꼬대처럼 흘러나온 아이의 작은 목소리. 동시에 아이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따스하고 강렬한 빛이 검은 사슬을 순식간에 튕겨내 버렸습니다. 이승의 온기와 간절함이 저승의 사슬을 밀어낸 경이로운 순간. 사자의 무심했던 두 눈이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습니다.
※ 4: 부서진 시계와 잊혀지지 않는 약속
방 안을 무겁게 짓누르던 저승의 서늘하고 끔찍한 기운이, 어린아이의 여리고 작은 손끝에서 피어난 따스하고 경이로운 빛에 닿는 순간 속절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수백 년이라는 아득한 세월 동안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들며 수만 명의 혼백을 거두어들였던 사자였습니다. 그 어떤 참혹한 죽음 앞에서도, 피를 토하는 원한과 애끓는 통곡 앞에서도 단 한 번의 흔들림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사자의 깊고 고요한 눈동자에 처음으로 거대한 파문이 일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태초부터 정해진 하늘의 절대적인 섭리였고, 죽은 자의 혼백을 옭아매는 명부의 사슬은 감히 인간의 힘으로는 끊어낼 수 없는 무적의 굴레였습니다. 그 어떤 강력한 미련이나 억울한 원한조차도 살아있는 육신의 맑은 기운이 영혼의 투명한 형체와 물리적으로 맞닿아 밀어내는 기적을 만들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자는 자신도 모르게 검은 구두를 신은 발을 뒤로 한 걸음 물러섰습니다. 허공을 뱀처럼 떠돌며 성훈의 영혼을 결박하려던 차가운 쇠사슬은, 오직 아빠를 잃고 싶지 않다는 아이의 순수한 간절함이 뿜어내는 눈부신 생기의 빛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내 바싹 마른 낙엽이 부서지듯 검은 잿가루가 되어 스르르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승의 핏줄이 뿜어내는 맹렬한 생기가 저승의 사슬을 끊어내다니. 대체 이토록 가녀린 어린 생명 안에, 그리고 저 망자의 혼백 안에 얼마나 깊고 짙은 염원이 깃들어 있단 말인가.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한 집착인가, 아니면 천기의 법도마저 뛰어넘은 사랑인가.'
사자는 굳게 다문 입술 너머로 서늘한 탄식을 남몰래 삼켰습니다. 한편, 허무하게 흩어지기만 하던 자신의 소매를 기적처럼 꽉 움켜쥔 딸의 온기를 온전히 느끼게 된 성훈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숨을 헐떡였습니다. 투명한 안개 같았던 자신의 손끝을 타고, 은수의 작고 보드라운 체온이 고스란히 핏줄을 타고 전해져 오고 있었습니다. 빗물처럼 차갑게 식어버려 아무런 감각도 없었던 성훈의 영혼 깊은 곳에서, 한 줄기 따스한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듯한 벅찬 착각마저 들었습니다. 성훈은 조심스럽게, 행여나 자신이 숨을 크게 쉬면 이 기적이 한순간의 신기루처럼 허무하게 바스러져 버릴까 두려워하며, 떨리는 두 손으로 은수의 작은 손을 마주 잡았습니다. 그리고 왈칵 쏟아져 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아이의 이마에 자신의 차가운 얼굴을 비비며 짐승처럼 억눌린 오열을 토해냈습니다.
"은수야... 내 딸, 우리 가여운 은수야... 아빠가 여기 있어..."
딸의 체온을 느끼는 그 짧고도 강렬한 순간, 성훈의 머릿속으로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선명한 기억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 지독한 병마와 싸우던 아내를 끝내 떠나보내고 장례식을 치르던 비 오는 늦은 밤이었습니다. 향냄새가 무겁게 가라앉은 빈소에서,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 사이로 영문도 모른 채 엄마의 영정사진을 보며 훌쩍이던 네 살배기 은수를 품에 안고 성훈은 숨죽여 울었었습니다. 세상천지에 이제 핏줄이라고는 단둘만 남겨진 그 끔찍한 고립감 속에서, 성훈은 자신의 왼쪽 손목에 차고 있던 낡은 은빛 손목시계를 풀어 아이의 가느다란 손목에 엉성하게 채워주었었습니다. 성인 남자의 손목에나 맞을 법한 묵직하고 커다란 메탈 시계가 아이의 얇은 팔뚝을 타고 헐렁하게 흘러내렸지만, 성훈은 그 차가운 시계의 초침 소리를 아이의 작은 귀에 가만히 대어주며 자신의 영혼을 깎아내듯 맹세했었습니다.
"은수야, 귓가에 이 깍깍거리는 소리 들리지? 이 시계가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한, 아빠는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은수 곁으로 꼭 돌아올 거야. 세상 모든 사람이 우리 은수를 떠나도, 아빠만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은수 혼자 두지 않을게. 아빠가 목숨 걸고 약속할게."
그날의 처절했던 맹세는 어린 딸을 달래기 위한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내를 잃고 무너져 내리던 성훈의 삶을 억지로라도 지탱하게 만드는 유일한 기둥이었고, 그가 하루하루 숨을 쉬며 고된 노동을 견뎌내는 생존의 목적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 새벽, 야근을 마치고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빗길을 달리던 중, 중앙선을 침범해 덮쳐오던 거대한 트럭의 헤드라이트 불빛과 마주친 그 끔찍한 찰나의 순간에도 성훈의 귓가에는 삼 년 전 그날의 시계 초침 소리가 환청처럼 맴돌았습니다. 산산조각이 나버린 유리창과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뜨거운 피를 흘리며 서서히 의식이 꺼져가던 그 마지막 순간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뿐이었습니다. 생일을 맞은 딸의 곁으로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것. 그 지독하고도 시린 약속 하나만을 심장 깊숙이 새긴 채, 성훈의 혼백은 부서진 육신을 빠져나와 빗속을 뚫고 이곳까지 달려왔던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조차 잊게 만든 그 억센 집착과 사랑이 그의 영혼을 이승의 낡은 방구석에 단단히 묶어두었고, 마침내 잠든 아이의 무의식 속에 깃든 간절한 부름과 기적적으로 맞닿아 천기를 거스르는 놀라운 현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성훈은 눈물과 빗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 올려 다시금 어둠 속에 선 사자를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조금 전까지 미친 듯이 도망치려 하고 죽음을 부정하며 절망에 빠져 있던 나약한 망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자신이 가진 존재의 모든 것을 걸고 호소하는 몹시도 단단하고 처절한 눈빛이었습니다. 성훈은 여전히 은수의 손을 꽉 쥔 채, 바닥에 이마가 닿을 듯 깊이 엎드리며 사자를 향해 피를 토하듯 절절하게 애원했습니다.
"보셨습니까. 사자님도 방금 두 눈으로 똑똑히 보시지 않았습니까. 제 어린 딸이... 죽어버려 형체조차 없는 저를 이렇게 온 힘을 다해 붙잡고 있습니다. 이 어린아이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대로 한마디 인사도 없이 떠나버리면, 이 아이가 살아갈 작고 연약한 세상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요. 저승의 법과 규율이 아무리 무섭고 차갑다 한들, 핏덩이 같은 이 아이의 간절한 눈물마저 차갑게 외면할 만큼 잔인한 것입니까? 부디... 부디 제게 딱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육신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고, 제가 다시 살아서 이승의 삶을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은 저도 뼈저리게 알고 있습니다. 살려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이 아이가 아침에 눈을 떠서 저의 부재를 아주 조금이나마 덜 아프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만, 아주 잠시만이라도 인간다운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성훈의 절절하고 애통한 목소리가 좁고 누추한 방 안을 애처롭게 맴돌았습니다. 사자는 아무런 대답 없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묵묵히 엎드려 있는 아버지와 그 손을 잡고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의 차가운 뇌리에는 수백 년간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엄격하게 지켜져야만 했던 명부의 율법이 경고등처럼 번뜩였지만, 동시에 아이의 작은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생명의 빛이 그의 펄럭이는 검은 도포 자락을 너무나도 따스하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죽음이란 본디 산 자의 모든 희망과 인연을 무자비하게 끊어내는 날카로운 칼날이어야 했건만, 오늘 밤 이 초라한 방 안에서 피어난 경이로운 사랑 앞에서는 그 서슬 퍼런 칼날마저 한없이 부드럽게 무뎌지는 듯했습니다. 사자의 깊은 시선이 성훈의 영혼을 옭아매려다 산산이 부서져 내린 쇠사슬의 잿빛 잔해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이내 잠든 아이의 눈물 젖은 긴 속눈썹 위로 천천히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영원처럼 길고 무거운 침묵이 흐른 끝에, 사자는 천천히 품속에 넣었던 낡은 가죽 장정의 명부를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 5: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부르는 슬픈 자장가
사자의 희고 긴 손가락이 펼쳐 든 명부의 페이지 위에는, 본래 선혈처럼 붉은빛으로 타오르며 죽음을 독촉하던 망자 최성훈의 이름이 어느새 옅고 부드러운 금빛으로 물들어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승에 남겨진 자의 지극한 연과 사랑이 죽음의 시계를 아주 잠시 멈추고, 망자에게 찰나의 유예를 허락했음을 의미하는 무척이나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현상이었습니다. 사자는 자신도 모르게 아주 작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묵직한 명부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손을 가볍게 내저어, 방 안을 숨 막히게 옥죄고 있던 저승 특유의 차갑고 소름 끼치는 한기를 조용히 거두어들였습니다. 꽁꽁 얼어붙어 창문에 하얗게 맺혀 있던 성에가 거짓말처럼 스르르 녹아내렸고, 비구름이 서서히 걷힌 새벽하늘의 희미하고 청초한 달빛이 창틈을 넘어와 방 안의 낡은 장판 위로 길게 스며들어왔습니다.
"명부에 이미 또렷하게 적힌 죽음의 운명을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우주를 관장하는 하늘의 거대한 뜻이니, 일개 사자인 나조차도 감히 어찌할 수 없는 무거운 순리다."
사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고요해진 방 안을 부드럽게 울려 퍼졌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라는 단어에 성훈의 넓은 어깨가 다시 한번 깊은 절망으로 무너져 내리려던 찰나, 사자의 서늘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애로운 다음 말이 이어졌습니다.
"허나, 산 자의 지극하고도 순수한 염원이 저승의 쇠사슬을 제힘으로 끊어낸 것은 나 또한 억겁의 세월을 살아오며 처음 마주하는 기적이다. 이 어린아이의 간절한 부름이 굳게 닫히던 저승의 문턱을 잠시나마 늦추었으니, 그 눈부신 기적의 시간만큼은 내 권한으로 너에게 온전히 허락하겠다. 저 창밖의 푸른 달이 완전히 지고, 동쪽 하늘에서 아침 해가 붉게 떠올라 이승의 밤이슬이 모두 바싹 마르기 전까지. 그 짧고도 애틋한 찰나의 시간 동안, 비어버린 네 영혼의 형체는 이승의 온기와 무게를 임시로 되찾을 것이다. 허나 똑똑히 명심해라. 태양의 빛이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순간, 너에게 허락된 마법은 끝이 나며 너는 어떠한 지체도 없이 나를 따라 묵묵히 명부전으로 향해야만 한다. 그것이 이 늙은 사자가 너와 네 딸에게 베풀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자비이니라."
사자는 엄숙한 경고의 말을 마치자마자, 마치 처음부터 이 비좁은 방 안에 존재하지 않았던 환영처럼 어두운 방구석의 짙은 그림자 속으로 스르르 몸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성훈은 사자가 자신들을 버려두고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그저 부녀가 온전히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묵묵히 배려의 거리를 둔 채 어둠 속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사자가 허락한, 아침이 오기 전까지의 찰나의 시간. 성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반투명했던 몸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보았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허공을 헛짚듯 스르륵 통과해 버리던 서늘한 혼백의 몸에, 기적처럼 묵직한 이승의 물리적인 무게감과 피가 도는 듯한 따스한 체온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었습니다. 살아있다는 감각.
"고맙습니다...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허공을 향해 몇 번이나 허리를 굽혀 깊이 고개를 숙인 성훈은, 무릎을 펴고 일어나 은수가 누워있는 침대 가장자리에 아주 조심스럽게 걸터앉았습니다. 성훈의 몸무게가 실리자, 낡은 침대 매트리스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푹 눌러앉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이승에 잠시나마 다시 뿌리를 내렸다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성훈은 은수의 작은 두 손을 소중히 쥐었던 자신의 큰 손을 들어 올려, 식은땀에 촉촉하게 젖은 아이의 앞머리를 너무나도 다정하게 쓸어 넘겨주었습니다. 거칠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따뜻하고 익숙한 아빠의 손길이 닿자, 악몽이라도 꾸는 듯 칭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리던 은수의 굳은 표정이 마법처럼 스르르 풀리며 편안해졌습니다.
"으음... 아빠아...? 우리 아빠야...?"
깊은 잠에 흠뻑 취해 있던 은수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리며 웅얼거렸습니다. 아직 잠에서 덜 깨어 초점이 흐릿한 아이의 맑은 눈동자에,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아빠의 다정하고 든든한 미소가 가득 담겼습니다. 성훈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슬픔과 눈물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아이의 세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세상에서 가장 평온하고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그래, 우리 예쁜 공주님. 아빠가 드디어 왔어. 오늘이 우리 은수 진짜 생일인데, 아빠가 일이 너무 바빠서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너무 늦게 왔지? 정말 미안해, 우리 딸."
"헤헤... 아빠 기다리다가 은수 졸려서 코 잤어... 근데 아빠 옷 다 젖었네... 밖에 비 많이 와서 비 맞았어?"
은수가 작은 손을 뻗어 성훈의 비에 젖어 서늘한 뺨과 어깨를 쓰다듬었습니다. 육신이 흘리는 피가 아닌, 영혼이 흘리는 눈물이자 이승의 차가운 빗물인 그 축축한 물기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정성껏 닦아주는 아이의 손길에, 성훈의 심장은 천 갈래 만 갈래로 무참히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습니다. 당장이라도 아이를 끌어안고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죽기 싫다고, 너를 두고 갈 수 없다고 발버둥 치고 싶었지만, 그는 결코 아이 앞에서 무너지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아이의 기억 속에 평생토록 남을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었으니까요.
"응, 우리 은수가 그토록 갖고 싶다던 예쁜 핑크색 토끼 인형을 사 들고 부지런히 뛰어오느라, 아빠가 비를 조금 맞았네. 아빠가 너무 늦어서, 우리 은수를 푹 자게 꿈나라로 데려다주려고 빗방울 요정님이 오셨나 보다.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장가 불러줄 테니까, 우리 예쁜 딸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다시 푹 자고 일어나렴. 내일 아침에 해가 뜨고 눈을 반짝 뜨면, 아빠가 사 온 선물이 짠 하고 머리맡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성훈은 아이의 이불을 목 끝까지 포근하게 덮어주고 토닥이며, 아내가 살아생전 갓난아기였던 은수를 재울 때마다 좁은 방 안에서 세 식구가 함께 불렀던, 낡고 오래되었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자장가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 까만 밤하늘에 은빛 별빛 내리면... 아빠의 따뜻한 품에 쏙 안기어, 스르륵 단잠에 빠져들어요... 나쁜 꿈은 아빠가 다 쫓아줄 테니, 우리 아가는 예쁜 꿈만 꾸어요..."
목이 메어 조금씩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 어떤 훌륭한 노래보다도 한없이 다정하고 숭고한 성훈의 노랫소리가 고요한 새벽의 방 안을 너무나도 따스하게 채워나갔습니다. 은수는 뺨에 닿는 아빠의 크고 따뜻한 손길과, 귓가를 간지럽히는 익숙하고 편안한 자장가 소리에 깊이 안도하며, 입가에 기분 좋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 깊고 평온한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었습니다. 성훈은 새근거리는 아이의 숨소리에 맞춰 끝없이, 정말 끝없이 자장가를 불렀습니다. 짧은 삶을 살면서 온전히 다 해주지 못했던 넘치는 사랑과, 앞으로의 긴 세월 동안 아이의 곁에서 방패가 되어주지 못할 가슴 터질 듯한 미안함을 모두 그 단순한 멜로디 하나하나에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짙은 그림자 속에 조용히 몸을 숨긴 채 서 있던 사자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찬란하게 빛나는 그 자장가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두 눈을 지그시 감았습니다. 차디찬 얼음 같은 죽음의 세계에서는 억겁의 세월이 지나도 결코 배울 수 없는, 인간이라는 한없이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들이 뿜어내는 눈부신 사랑의 무거운 깊이를, 사자는 그 숭고한 침묵 속에서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 가만히 새겨 넣고 있었습니다.
※ 6: 마침내 열리는 저승문, 눈부신 이별
은수를 토닥이며 부르는 성훈의 자장가가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방 안을 맴돌았을 무렵. 어느덧 창밖을 무겁게 덮고 있던 짙푸른 새벽빛의 장막이 서서히 걷히고, 저 멀리 동쪽 하늘의 능선 끝에서부터 붉고 따스한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번져오기 시작했습니다. 방 안의 낡은 장판을 창백하게 비추던 달빛이 아침의 기운에 밀려 흐려짐과 동시에, 성훈은 자신의 몸에 기적처럼 깃들어 있던 임시적인 이승의 온기와 물리적인 무게감이 다시금 서서히 연기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또렷하게 느꼈습니다. 단단하게 쥐어졌던 주먹의 감각이 희미해지고, 매트리스를 짓누르던 체중이 깃털처럼 가벼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승에서 그에게 마지막으로 허락되었던 은혜로운 찰나의 시간이 완벽하게 끝을 맺고 있음을, 돌이킬 수 없는 대자연의 섭리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알리고 있었습니다.
성훈은 쉼 없이 이어가던 자장가를 천천히 멈추고, 쌕쌕거리며 깊고 달콤한 잠에 빠진 은수의 발그레한 뺨 위로 허리를 숙여 마지막으로 길고도 애틋한 입맞춤을 남겼습니다. 동그란 이마에, 오뚝한 코끝에, 그리고 자신을 꼭 붙잡았던 작은 두 손의 손등 위로 닿은 아빠의 간절한 입술은 이미 점차 그 형태를 잃고 투명해져 가며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지만, 그 입술을 통해 아이에게 전해지는 사랑의 결연한 온도만큼은 세상 그 어떤 불꽃보다도 뜨겁고 선명했습니다.
'나의 전부, 나의 우주 은수야. 아빠가 매일 아침 네 곁에서 눈을 맞추며 안아줄 순 없겠지만, 네가 걸어가는 인생의 모든 길목마다 따뜻하게 비추는 아침 햇살로, 네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시원한 바람으로, 비 오는 날 널 가려주는 튼튼한 우산으로 항상 곁에 함께할게. 우리 착하고 예쁜 딸, 아빠 몫까지 세상에서 제일 씩씩하고 눈부시게 행복하게 살아야 해. 이 험한 세상에 혼자 남겨두고 먼저 떠나서 정말 미안하다. 우주가 끝나는 날까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 내 아가.'
행여나 아이가 깰세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소리 없는 마지막 인사와 피 끓는 축복을 은수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인 성훈은, 이내 굳은 결심을 한 듯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낡은 책상 위로 떨어지는 아침 햇살을 등진 채, 방구석의 짙은 어둠 속에서 고요하고 묵묵하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검은 도포의 사자를 향해 흔들림 없는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성훈의 핼쑥해진 얼굴에는 어젯밤 처음 사자를 마주했을 때 뿜어내던 발악적인 공포와 지독한 절망, 이승에 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추악한 집착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딸에게 온전하고 제대로 된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는 한없이 깊은 안도감과, 세상의 순리에 따라 스스로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숭고하고도 거룩한 평온함만이 그의 투명한 눈동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기다려 주셔서... 제게 감히 바랄 수도 없었던 귀한 기적의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진심으로, 뼛속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그 깊은 배려는 제 혼백이 소멸하는 날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 미련 없이 가겠습니다."
성훈이 정중하고도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혀 깊이 고개를 숙이자, 사자 역시 아무 말 없이 가볍게 목례로 답하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자가 길고 넓은 검은 소매 자락을 허공을 향해 크고 우아하게 가르자, 방 안의 낡은 벽지 한 면이 물결처럼 기이하게 일렁이더니, 세상을 등진 자들만이 넘을 수 있는 거대한 문이 허공을 찢으며 천천히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문은 산 사람들이 흔히들 상상하는,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유황불이 타오르는 두렵고 차가운 지옥의 철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눈이 시리도록 환하고 따뜻한, 마치 포근하고 부드러운 솜구름과 찬란한 금빛 노을로 엮어 만든 듯한 영롱한 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지친 영혼들의 안식처로 향하는 눈부신 저승의 길이었습니다.
"인간의 죽음이란 한낱 육신의 끝일뿐, 영혼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향하는 성스러운 관문일 뿐이다. 네가 이승에 흠뻑 남기고 온 그 지극하고 맹렬한 사랑은 헛되이 흩어지지 않고 이승의 공기 중에 남아, 앞으로 홀로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저 가여운 아이를 지키는 가장 굳건하고 강력한 방패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아비로서의 무겁고 아픈 짐을 기꺼이 내려놓고, 아무런 고통도 슬픔도 없는 평안한 길로 들어서거라."
사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어젯밤 처음 만났을 때의 감정 없고 건조한 기계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셀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찬란한 기쁨과 처절한 슬픔을 묵묵히 지켜봐 온 초월적인 존재의 깊디깊은 위로이자, 숭고한 사랑을 남기고 떠나는 훌륭한 아버지를 향한 진심 어린 축복과도 같았습니다. 성훈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희미하고도 맑게 웃으며, 찬란하게 빛을 뿜어내는 문을 향해 천천히, 그리고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한 걸음, 두 걸음 빛을 향해 내디딜 때마다 이승의 때가 묻어있던 그의 반투명한 영혼은 눈부신 황금빛 속으로 아스라이 스며들며 마치 깃털처럼 가볍고 자유로워졌습니다. 빛의 문턱을 넘어가기 직전, 성훈은 멈춰 서서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이 이 험한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는 유일하고도 가장 귀한 보물, 새근새근 잠든 은수를 뒤돌아보았습니다. 마침내 완전히 밝은 아침 햇살이 창문을 넘어와 은수의 하얗고 통통한 뺨을 따스하게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꿈속에서 빗방울 요정님과 함께 신나는 놀이라도 하는지, 아니면 아빠가 남겨준 포근한 자장가의 여운이 남아있는지, 앙증맞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세상에서 가장 티 없이 맑고 예쁘게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성훈은 그토록 사랑스러운 딸의 모습을 자신의 텅 빈 두 눈동자에 가득, 터질 듯이 담은 채, 마침내 눈부신 빛의 거대한 장막 너머로 완전히 발을 내디뎌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성훈이 이승의 경계를 완벽하게 넘어가자, 온 방 안을 환하게 비추던 거대한 빛의 문도 물거품처럼 스르르 소리 없이 닫히며 원래의 낡고 얼룩진 벽지로 평범하게 되돌아왔고, 새벽 내내 방 안을 무겁게 맴돌던 서늘한 기운과 검은 도포를 입은 사자 역시 빗방울이 증발하듯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사라졌습니다.
완전한 아침이 밝았습니다. 창밖의 전깃줄에 앉아 짹짹거리는 참새들의 경쾌한 노랫소리에 부스스 무거운 눈을 뜬 은수는, 작은 주먹을 쥐고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어젯밤 아빠의 온기로 가득 찼던 방 안은 텅 비어 있었지만, 놀랍게도 은수의 머리맡에는 빗물에 살짝 젖어 색깔이 더욱 짙어진 예쁜 핑크색 리본의 선물 상자가 다소곳이 놓여 있었습니다. 은수는 커다래진 눈으로 선물 상자를 조심스럽게 품에 꽉 끌어안으며, 어젯밤 꿈속에서 생생하게 들었던 아빠의 그 크고 따뜻한 손길과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웠던 자장가 소리를 떠올렸습니다. 아빠가 곁에 없다는 절망적인 슬픔이나 상실감이 아닌, 언제나 자신을 든든하게 지켜줄 영원하고도 사랑스러운 기억이 조그만 방 안을 따스하게 가득 채운 채, 아침의 찬란하고도 생명력 넘치는 태양이 아이가 맞이할 새로운 하루를 벅차게 축복하듯 창문 너머로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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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야담, 어떠셨나요? 차가운 저승의 법도 앞에서도 딸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간절함이 마침내 기적을 만들어낸 순간이 참으로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죽음마저 갈라놓지 못한 숭고한 가족애와, 기꺼이 자비를 베푼 저승사자의 따뜻한 이면이 깊은 여운을 남기네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잊지 마시고 함께해 주세요. 여러분의 평안한 밤을 기원하며, 다음 화에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