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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온천 - 물귀신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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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 시대, 동래온천에서 일어난 기이한 사건. 불치병을 고치는 신비한 온천물의 비밀과, 그 물속에 사는 귀신의 이야기. 병을 고쳐주는 대신 영혼을 요구하는 물귀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어린 의원. 과연 그가 맺은 약속의 진실은 무엇일까?
1: 신비한 의원
정조 19년, 동래온천 거리는 늘 병을 고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이 모여드는 곳은 객주 뒤편의 작은 초가였습니다.
"들었소? 저기 새로 온 의원 이야기..." 객주 주모가 손님들에게 속삭였습니다. "죽어가던 양반도 살려냈다는..."
초가에는 '지담의원'이라 쓰인 낡은 편액이 걸려있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아픈 이들이 줄을 섰고, 해가 저물 때면 그들은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소?" 한 상인이 말했습니다. "병이 나은 사람들을 아무도 다시 보지 못했다는 게..."
갑자기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지담 의원이 나타난 것입니다. 서른 즈음 되어 보이는 그는 유독 창백한 안색을 지니고 있었고, 깊은 슬픔이 깃든 눈빛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분..." 그의 목소리는 마치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희미했습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노인이 부축을 받으며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노인이 홀로 걸어 나온 것입니다.
"기적이야..." 사람들이 웅성거렸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더욱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노인의 방에서 물소리가 들렸고, 다음 날 아침... 노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번이 벌써 아흔 아홉 번째라지?" 객주 주모가 중얼거렸습니다. "처음 온 날부터 지금까지... 그가 치료한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창밖으로 달빛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똑... 똑... 똑...
2: 어린 시절의 약속
20년 전, 동래온천의 깊은 밤. 열다섯 살의 소년 지담이 어머니를 업고 온천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의원들이 모두 포기한 병을, 온천물만이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것입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견뎌주세요..." 지담의 등에 업힌 어머니는 이미 의식을 잃은 지 오래였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지만, 소년의 눈빛만은 간절했습니다.
달빛이 온천수면에 비칠 때였습니다. 지담은 어머니를 조심스레 물가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온천수 위로 달빛이 일렁이더니, 수면 아래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아이를 살리고 싶으냐..."
지담은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온천수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수증기만이 달빛 아래서 춤추고 있었습니다.
"누... 누구십니까?" 지담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나는 이 물에 사는 자... 네 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
수면 위로 하얀 안개가 모여들더니, 흐릿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습니다. 마치 물로 만들어진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정말... 어머니를 살리실 수 있으신가요?" 지담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하지만 댓가가 필요하다..." 물귀신의 목소리가 점점 선명해졌습니다. "네 영혼을..."
"안 돼요!" 지담이 소리쳤습니다. "제 목숨은 어머니의 것입니다. 어머니를 위해 살아야..."
"그렇다면..." 물귀신이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의 영혼을 가져오거라. 그러면 네 어머니는 살 수 있다."
지담의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숨소리가 더욱 희미해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시간이 없다..." 물귀신의 목소리가 멀어져갔습니다. "선택하거라. 지금 이 자리에서..."
달빛이 구름에 가려지고, 온천수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지담의 앞에 두 갈래 길이 놓였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끔찍한 약속을 받아들일 것인가...
3: 물귀신의 제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보겠다." 물귀신이 말했습니다. "네가 가져와야 할 영혼은 백 개. 그것도 모두 병을 고친 이들의 것이어야 한다."
온천수가 소용돌이치며 물귀신의 형체가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이제는 한 노인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얀 도포를 입고 있었지만, 그 옷자락은 마치 물결처럼 끊임없이 흔들렸습니다.
"어...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지담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내가 의술을 전수해주마. 불치의 병도 고칠 수 있는..." 물귀신이 손을 뻗었습니다. "하지만 네가 고친 자들은 모두 이 물로 돌아와야 한다. 그들의 영혼이 내 힘이 되는 것이다."
지담의 등 뒤에서 어머니의 숨소리가 더욱 약해졌습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는 건가요?" 지담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죽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의 영혼은 이 물에 머물게 될 것이다. 영원히..." 물귀신의 눈빛이 달빛처럼 차갑게 빛났습니다. "대신 그들의 병은 완전히 나을 것이다."
지담은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다른 이들의 영혼을 바친다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하지만 그들도 어차피 죽을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라면...
"약속하겠습니다." 마침내 지담이 입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물귀신이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제가 데려올 사람들은... 모두 제가 직접 선택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미리 말하겠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바치는 대가로 병이 나을 것이라고..."
물귀신의 눈빛이 흔들렸습니다. 이런 조건을 제시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좋다..." 물귀신이 마침내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백 개의 영혼을 모두 모으기 전까지, 너의 어머니는 이 물에 머물러야 한다. 그것이 내 조건이다."
순간 온천수가 소용돌이치며 어머니의 몸을 감쌌습니다. 그리고 달빛이 가장 밝은 순간, 물귀신이 지담의 이마에 손을 얹었습니다. 차가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생사를 다스리는 의술을 얻었다..." 물귀신의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백 개의 영혼... 잊지 말거라."
4: 99번째 환자
스무 해가 지난 늦가을, 단풍이 물든 저녁이었습니다. 지담은 자신의 초가 처마 밑에서 구십구 번째 종이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그가 치료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명단이었죠.
"이제 한 명만 더..." 지담이 중얼거렸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해가 저문 뒤에는 절대 환자를 받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문을 열었습니다.
"제... 제 동생을 살려주세요..."
열 살 남짓한 소녀가 업혀 있었습니다. 업은 이는 열다섯 즈음 되어 보이는 소녀였습니다. 어린 동생의 얼굴은 창백했고, 숨소리는 희미했습니다.
"폐병입니다." 언니가 말했습니다. "다른 의원들은 모두 포기했어요. 하지만 전 알아요. 의원님께서 어떤 병이든 고치신다는 걸..."
지담은 얼어붙었습니다. 어린 소녀의 모습이 스무 해 전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들어오거라."
방 안으로 들어선 소녀는 기침을 하다 손바닥에 피를 묻혔습니다. 지담은 그 모습을 보며 손을 떨었습니다. 마지막 영혼으로 이렇게 어린 생명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가...
"의원님..." 아픈 소녀가 희미하게 미소지었습니다. "저... 전 알고 있어요. 제 병을 고치시면 제 영혼을 가져가신다는 걸..."
지담이 놀라 고개를 들었습니다.
"꿈에서 보았어요. 물속의 할아버지가 알려주셨어요. 제가 마지막이 될 거라고..." 소녀의 목소리는 맑았습니다. "저는 기꺼이 받아들일 거예요. 하지만 그전에... 의원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달빛이 창문으로 스며들었고,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담은 자신의 앞에 앉은 소녀가 단순한 환자가 아님을 직감했습니다.
"스무 해 전, 제가 열다섯이었을 때..." 지담이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니가 위독하셨습니다..."
5: 물귀신의 정체
지담이 이야기를 마치자,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연민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스승님..." 소녀가 속삭였습니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변했고, 달빛이 일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뭐라고?" 지담이 놀라 물었습니다.
"전 스승님을 찾아 200년을 기다렸어요." 소녀의 목소리가 달라졌습니다.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깊고 맑았습니다. "의술의 신... 우리의 스승님을..."
그때였습니다. 방 안에 있던 모든 거울이 동시에 진동하더니, 그 안에 한 노인의 모습이 비쳤습니다. 바로 물귀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기억나시나요?" 소녀가 물었습니다. "200년 전, 동래온천에는 신의 의술을 전수받은 세 명의 제자가 있었어요. 생명을 살리는 의술... 하지만 그중 한 명이 욕심을 부렸죠."
지담의 머릿속에 갑자기 낯선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한 젊은 의원이 스승의 비법을 훔쳐 권세가들의 환심을 사려 했던 순간... 그리고 그를 막으려다 스승이 저주에 걸려 물귀신이 되어버린 그날의 기억...
"맞아요... 스승님은 저주를 받아 이 물에 갇히셨어요." 소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의술이 죽음을 부르는 저주가 되어버린 거예요."
물귀신의 모습이 거울 속에서 점점 선명해졌습니다.
"하지만 스승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200년 동안 기다리셨죠. 배신한 제자와, 충직했던 제자가 다시 만나는 날을... 그들의 환생을 기다리며..."
지담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습니다. 20년 동안 이어져 온 신비한 치유의 능력... 그것은 단순한 계약이 아닌, 전생의 기억을 깨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담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소녀가 슬프게 미소지었습니다. "전 스승님을 배신했던 제자의 환생이에요. 그리고 의원님은... 스승님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제자의 환생이시고요."
6: 의술의 대가
"그렇다면 제가 치료한 사람들은..." 지담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보여드리겠습니다." 소녀가 거울을 가리켰습니다. 달빛이 거울 속으로 스며들자, 그 안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온천 깊은 곳, 푸른빛이 감도는 공간이 보였습니다. 그곳에는 지담이 치료했던 아흔아홉 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고통받는 것이 아닌,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그들은 죽은 게 아니에요." 소녀가 설명했습니다. "스승님의 저주를 조금씩 나누어 가진 거예요. 한 사람이 저주의 일부를 가져가면서, 그들의 병도 함께 치유된 거죠."
물귀신... 아니, 의술의 신이 거울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처음부터 스승님의 계획이었던 거예요." 소녀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저주를 백 개로 나누어, 백 명의 사람을 살리는 동시에 스승님도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지담의 눈앞에 지난 20년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자신이 치료한 모든 사람들이 병을 고치기 전, 반드시 하나의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들 모두 자발적으로 선택했어요." 소녀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습니다.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어 다른 이를 살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치유의 시작이니까요."
그때였습니다. 온천수 깊은 곳에서 은은한 빛이 피어올랐습니다. 아흔아홉 개의 작은 빛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보세요..." 소녀가 창밖을 가리켰습니다. 달빛 아래 온천에는 수면 위로 떠오르는 작은 빛들이 보였습니다. 마치 반딧불이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그것은, 지담이 치료해준 사람들의 영혼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조각만 남았어요." 소녀가 말했습니다. "스승님의 저주를 완전히 풀기 위한... 마지막 선택의 순간이..."
7: 소녀의 비밀
"하나 더 보여드릴 게 있어요." 소녀가 말했습니다. 그녀가 손을 들어올리자, 방 안의 공기가 일렁이며 200년 전 기억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동래온천의 옛 모습이었습니다. 세 명의 제자가 스승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습니다. 한 명은 지담과 똑같은 눈빛을 가진 청년이었고, 다른 한 명은 소녀를 닮은 젊은 의원이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의술은 결코 사적인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다." 스승의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하지만 스승님..." 소녀를 닮은 제자가 말했습니다. "이 의술이 있다면 더 많은 부와 명예를..." 그의 눈빛이 탐욕으로 일렁였습니다.
"안 됩니다!" 지담을 닮은 제자가 외쳤습니다. "의술은 오직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만..."
그때였습니다. 첫 번째 제자가 갑자기 스승의 비법서를 훔쳐 달아났고, 그 과정에서 스승의 영혼을 봉인하는 저주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 저주는 되돌아와 스승과 자신 모두를 물속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전... 전생의 제가..."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스승님을 배신했던 거군요..."
"그래서 네가 마지막 환자가 된 것이다." 물귀신이 된 스승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너의 속죄와, 지담의 용서가 만나는 순간... 그때 비로소 이 저주의 고리가 끊어질 수 있다."
지담은 자신의 전생이 스승을 지키려 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어린 소녀가, 전생에 자신이 막으려 했던 바로 그 제자라는 사실이...
"이제 기억나시죠?"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제가 왜 폐병에 걸려야 했는지... 제가 왜 마지막 환자여야 했는지..."
달빛이 소녀의 얼굴을 비추었습니다. 그 모습이 순간 200년 전 제자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가, 다시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8: 마지막 선택
달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온천수가 끓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선택해야 할 시간이 된 것입니다.
"의원님..." 소녀가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습니다. 병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저를 치료해주세요. 제 영혼을 마지막 조각으로 바치면..."
"안 돼!" 지담이 소리쳤습니다. "이미 한 번 죽음으로 끝났던 이야기를 또다시 죽음으로 끝낼 순 없어."
물귀신이 된 스승의 모습이 거울 속에서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다.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지막 영혼이 필요하다."
지담은 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온천수 위로 아흔아홉 개의 빛이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선택으로 이곳에 온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을 앞둔 지금...
"스무 해 전,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선택했던 그 길..." 지담이 천천히 말을 이었습니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왜 그들에게 항상 선택권을 주었는지..."
소녀의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졌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스승님." 지담이 물귀신을 향해 고개를 숙였습니다. "제자의 마지막 불효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자신의 의원 복장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안 됩니다!" 소녀가 소리쳤습니다. "전생에 제가 저지른 잘못인데... 이번에도 의원님 때문에..."
"아니다." 지담이 부드럽게 미소지었습니다. "이건 나의 선택이다. 200년 전 스승님을 지키지 못했던 제자로서... 그리고 20년간 많은 이들의 영혼을 빌려왔던 의원으로서의 선택이다."
달빛이 지담의 얼굴을 비추었습니다. 그의 눈빛은 더없이 평온해 보였습니다.
9: 스승의 마음
"멈추거라."
갑자기 물귀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지더니, 이제는 완전한 스승의 모습으로 변해있었습니다.
"이제야 깨달았다." 스승의 눈에서 맑은 빛이 흘러내렸습니다. "내가 200년을 기다린 것은 복수도, 속죄도 아니었구나..."
방 안에 있던 모든 거울이 동시에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안에는 지담이 치료했던 순간들이 하나둘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매번 그들에게 선택하게 했지." 스승이 지담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강요하지 않고, 그들의 의지를 존중했어. 마치 내가 너희에게 했던 것처럼..."
소녀의 눈이 커졌습니다. "그럼 스승님... 처음부터..."
"그렇다." 스승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의술은 결코 강요될 수 없는 것. 그것이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진정한 의술의 길이었다."
순간 지담의 눈앞에 새로운 기억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200년 전, 스승이 자신들에게 늘 선택권을 주었던 순간들... 심지어 마지막 순간에도, 스승은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제자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스승님께서 저주를 받으신 거였는데..." 소녀가 흐느꼈습니다.
"아니다." 스승이 부드럽게 미소지었습니다. "그것은 내 선택이었다. 너희가 언젠가 깨닫기를 바라며...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기다림이었다."
방 안에 가득했던 차가운 기운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온천수 위로 떠다니던 영혼들의 빛이 더욱 밝아졌습니다.
"이제 선택할 시간이구나." 스승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희 모두의 진정한 선택이어야 한다."
10: 용서의 치유
달빛이 가장 밝은 순간이었습니다. 방 안의 세 사람... 아니, 세 개의 영혼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스승이 천천히 말을 이었습니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지담은 소녀를 바라보았습니다. 200년 전 자신이 그토록 막으려 했던 제자였지만, 지금 그의 눈에 비친 것은 그저 아픈 영혼을 가진 어린아이였습니다.
"저는..."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욕심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쳤어요. 스승님의 가르침도, 동료의 신뢰도..."
"나도 잘못했다." 지담이 말했습니다. "20년 동안 다른 이들의 영혼을 담보로 살아왔으니..."
그때였습니다. 온천수 위로 떠 있던 아흔아홉 개의 빛이 일제히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습니다.
"우리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지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가 치료해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선택으로 이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보았느냐?" 스승이 미소지었습니다. "진정한 의술은 서로를 살리는 것. 네가 20년 동안 해온 일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소녀의 숨소리가 점점 잦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아닌, 평화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이제 알겠어요..." 소녀가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치유하고 있었던 거예요. 제 욕심이 만든 저주로 인해...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이 구원받았다는 걸..."
스승의 몸에서 퍼져나가던 차가운 기운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200년간의 저주가 마침내 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선택해라." 스승이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너희의 마음으로..."
11: 새로운 시작
지담과 소녀가 동시에 손을 맞잡았습니다. 두 사람의 손에서 은은한 빛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함께..." 지담이 말했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소녀가 답했습니다.
그들의 손에서 퍼져나간 빛이 온천수와 만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흔아홉 개의 영혼이 하나둘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치유의 길이다." 스승의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함께 나아가는 것..."
온천수가 점점 맑아지기 시작했습니다. 200년간 깃들어 있던 어둠이 걷히고, 달빛이 물속 깊숙이 스며들었습니다.
"이제 나의 마지막 가르침을 주겠다." 스승이 두 제자의 이마에 손을 얹었습니다. "진정한 의술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니..."
그 순간, 스승의 손에서 따뜻한 기운이 퍼져나왔습니다. 소녀의 폐병이 깨끗이 나았고, 지담의 창백했던 안색도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스무 해 전, 네가 살리려 했던 어머니도..." 스승이 지담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줄곧 네 곁을 지켜보고 계셨단다."
지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저 멀리 영혼들 사이로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온화한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이제 이 온천은 새로운 치유의 장소가 될 것이다." 스승의 모습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너희가 함께 지켜나가거라..."
달빛이 가득한 순간, 온천수가 은은한 빛으로 물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12: 치유의 온천
동래온천에는 이제 새로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달빛 가득한 밤이면 온천수가 은은한 빛을 내고, 그 물에 몸을 담그면 어떤 병이든 치유된다는 이야기...
지담과 소녀는 작은 약방을 열었습니다. 더 이상 신비한 치유의 능력은 없지만, 그들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새로운 생명이 피어났습니다.
"이상하게도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마치 따뜻한 손길이 감싸안아주는 것 같아요."
달이 가장 밝은 밤이면, 온천가에서 세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고 합니다. 하얀 도포를 입은 노인과 그의 곁을 지키는 두 제자...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온천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죠.
지담의 초가 앞에는 이제 새로운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치유하는 마음이 곧 의술의 시작이니...'
그리고 달빛 아래 온천수에는 작은 연꽃들이 피어납니다. 200년의 세월을 거쳐 맺어진 인연이, 이제는 새로운 생명으로 피어난 것입니다.
오늘도 동래온천에는 많은 이들이 찾아옵니다. 병을 고치러 오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마음의 치유를 위해 이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달빛이 가득한 밤이면 맑은 피리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스승과 제자가 나누었던 진정한 의술의 의미를, 그 소리가 조용히 들려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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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동래온천의 깊은 물속에서 맺어진 한 맺힌 약속… 그 약속은 끝내 이루어졌을까요?
전설이 되어 전해지는 이야기는 때로는 교훈을, 때로는 두려움을 남깁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 이야기 속에서 과거의 흔적을 되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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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에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