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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관이 이름을 잘못 적어 백정이 정승 대신 저승 구경을 다녀온 사연 [청구야담]
※ 본 콘텐츠는 청구야담 등 고전 야담을 바탕으로 각색한 창작 오디오 드라마입니다.
태그 (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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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300자 미만)
한양 반촌 뒷골목의 백정 돌쇠가 한밤중에 저승사자에게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저승 판관이 정승의 이름을 잘못 적는 바람에, 애먼 백정이 대신 끌려온 것이었지요. 염라대왕이 노발대발하며 돌려보내려는 순간, 업경대에 돌쇠의 지난 삶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저승 전체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천하디천한 백정의 업경대에 대체 무엇이 비쳤기에, 염라대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까요? 붓 한 번 잘못 놀린 실수가 만들어낸, 조선에서 가장 황당하고도 따뜻한 저승 구경 이야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 1: 반촌의 백정 돌쇠
조선 숙종 임금 시절, 한양 반촌 뒷골목에 돌쇠라는 백정이 살았더랍니다. 나이는 마흔 줄에 접어들었고, 몸집은 황소처럼 우람했지만 눈매만은 순한 송아지 같았지요. 백정이란 것이 그 시절에는 사람 취급도 제대로 못 받는 신세였습니다. 갓도 못 쓰고, 좋은 옷도 못 입고, 길에서 양반을 만나면 진흙 바닥에라도 넙죽 엎드려야 했지요. 아이들조차 돌쇠를 보면 돌을 던지며 놀려대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돌쇠는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얼굴 한 번 붉히는 법이 없었습니다.
"허허, 오늘도 아이들이 기운이 좋구먼. 저리 팔팔해야 무럭무럭 크지."
돌을 맞은 이마를 쓱 문지르면서도 그저 사람 좋게 웃을 뿐이었지요. 동네 사람들은 그런 돌쇠를 두고 바보라 수군거렸습니다. 하지만 돌쇠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더랍니다.
돌쇠는 소를 잡고 나면 가장 좋은 고기 한 근을 반드시 따로 떼어놓았습니다. 그러고는 밤이 이슥해지면 그 고기를 품에 안고 슬그머니 집을 나섰지요. 돌쇠가 향하는 곳은 마을 끝자락, 병든 홀어미와 어린 남매가 사는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이었습니다. 돌쇠는 고기를 문 앞에 살며시 놓아두고, 인기척도 없이 돌아서곤 했습니다.
'백정 놈이 주는 고기라 하면 저 어린것들 마음이 상할지도 모르지. 그저 모르고 먹는 게 약이야.'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겨울이면 얼어 죽을까 걱정되는 거지들의 움막에 몰래 땔감을 쌓아두었고, 장마철이면 떠내려간 징검다리를 밤새 혼자 놓았습니다. 이른 새벽 개천을 건너던 아낙들은 밤사이 반듯하게 놓인 돌다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지요.
"거참 이상도 하지. 어젯밤 물난리에 다리가 다 떠내려갔는데, 누가 밤새 이걸 놓았을꼬."
"산신령님이 도우셨나 보지 뭐."
사람들은 그저 산신령의 조화려니 했습니다. 그 산신령이 소 잡는 백정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요. 굶어 죽은 행려병자가 있으면 돌쇠는 제 돈을 들여 거적에 싸서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무덤 앞에 술 한 잔까지 부어주었습니다.
"이보게, 이름도 모르는 양반. 저승 가는 길에 배는 곯지 마시게."
그렇게 이십 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돌쇠가 남몰래 베푼 정이 쌓이고 쌓였지만, 정작 세상 사람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내도 자식도 없이 혼자 사는 돌쇠였으니, 그 속을 들여다볼 사람조차 없었지요. 돌쇠 자신조차 그걸 선행이라 여기지 않았으니까요.
'배부른 놈이 배고픈 놈 챙기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던 어느 해 가을밤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바람이 스산하게 불고, 달은 구름에 가려 온 세상이 먹물을 뿌린 듯 캄캄했지요. 하루 일을 마친 돌쇠가 잠자리에 들려는데, 사립문 밖에서 서늘한 기운이 훅 끼쳐왔습니다.
"거기 뉘시오?"
문을 열자 마당에 웬 사내가 우뚝 서 있었습니다. 검은 도포에 검은 갓을 눌러쓰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한데, 발밑에는 그림자가 없었습니다. 사내가 품에서 붉은 글씨가 적힌 패를 꺼내 보이며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돌쇠. 명이 다하였다. 나를 따라 저승으로 가야겠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자리에서 기절초풍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돌쇠는 잠시 눈을 끔벅이더니,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사자 어른이시구먼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갈 때 가더라도 빈속에 갈 수야 있겠습니까. 마침 어제 삶아둔 고기가 있는데, 한 점 자시고 가시지요."
저승사자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사람을 데리러 다녔지만, 살려달라 매달리는 자는 봤어도 고기부터 내오는 자는 처음이었으니까요.
"허어, 네놈은 죽는 것이 두렵지 않으냐."
"두렵기야 하지요. 하지만 어른께서 헛걸음하시게 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소인 같은 천한 것 데리러 이 밤중에 예까지 오셨는데요."
돌쇠는 정말로 부엌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육 한 접시와 탁주 한 사발을 내왔습니다. 저승사자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먹었지요. 그런데 그 고기가 어찌나 부드럽고, 그 술이 어찌나 달던지, 사자는 저도 모르게 사발을 싹 비우고 말았습니다.
'수백 년 저승길을 오갔지만, 이승 음식이 이리 맛있는 줄은 미처 몰랐구나.'
돌쇠는 그 사이 방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겼습니다. 저승사자가 슬쩍 들여다보니, 돌쇠는 장롱 깊숙이 넣어둔 엽전 꾸러미를 꺼내 문지방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무엇에 쓰려고 그러느냐."
"아, 이거요? 마을 끝에 병든 홀어미와 어린 남매가 사는데, 소인이 없어지면 당장 이번 겨울 나기가 힘들 겁니다. 내일 아침 이웃 김 서방이 소인을 찾으러 왔다가 이걸 보면, 눈치껏 그 집에 전해줄 겁니다. 김 서방이 입은 무거워도 인정은 많은 사람이거든요."
저승사자는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제 목숨이 오늘 밤으로 끝나는 판국에, 남의 집 겨울 걱정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자, 그럼 가시지요. 집도 대충 치워놨으니 여한은 없습니다."
돌쇠는 낡은 짚신을 단단히 동여매고 앞장서듯 마당으로 나섰습니다. 마지막으로 살던 오두막을 한 번 휙 둘러보더니, 허리를 굽혀 꾸벅 절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집아, 그동안 비바람 막아줘서 고마웠다."
저승사자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알 수 없는 찜찜함에 명부 패를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
'돌쇠라. 분명 돌쇠라 적혀 있는데... 어찌 이리 마음 한구석이 께름칙한고.'
그날 밤, 백정 돌쇠는 그렇게 저승사자를 따라 캄캄한 밤길을 나섰더랍니다. 이것이 조선 팔도가 두고두고 이야기할 황당한 저승 구경의 시작이 될 줄은, 그때는 아무도 몰랐지요.
※ 2: 저승길 동행
저승 가는 길은 멀고도 캄캄했습니다. 이승의 밤길과는 달라서, 하늘에는 별 하나 없고 발밑에는 뿌연 안개만 자욱했지요. 보통 망자들은 이 길에서 서럽게 울며 뒤를 돌아보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쇠는 어땠을까요.
"사자 어른, 이 길로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사흘 밤낮을 걸어야 한다."
"아이고, 그럼 어른께서는 이 길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시는 겁니까? 다리가 남아나질 않겠습니다그려."
저승사자는 또 한 번 어리둥절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이 길을 오가면서, 사자의 다리 걱정을 해주는 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요.
"네놈은 참으로 이상한 놈이로구나. 제 죽은 것은 서럽지도 않으냐."
"서럽지요. 왜 안 서럽겠습니까. 하지만 소인 같은 백정이 마흔 넘게 살았으면 오래 산 것이지요. 그보다 어른, 저기 저 사람들은 왜 저리 울고 있답니까?"
안개 저편에 흰옷 입은 망자들이 무리 지어 걸어가며 구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저승사자가 무심하게 대답했지요.
"이승에 두고 온 것이 많은 자들이다. 재물이 아까워 우는 자, 원한이 남아 우는 자, 못다 한 일이 서러워 우는 자들이지."
그러자 돌쇠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그 울음소리 쪽으로 대뜸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통곡하는 노인 망자의 등을 커다란 손으로 토닥토닥 두드려주었지요.
"어르신, 어르신. 그만 우시지요. 이왕 가는 길, 울면서 가나 웃으면서 가나 가는 건 매한가지 아닙니까. 기왕이면 좋은 것만 생각하면서 갑시다. 살면서 제일 맛있게 먹었던 밥이 뭐였는지, 그런 거 말입니다."
노인 망자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돌쇠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맛있게 먹은 밥이라니...?"
"예. 소인은 열두 살 때 어머니가 끓여준 시래깃국이 제일 맛있었습니다. 지금도 눈 감으면 그 냄새가 나는 것 같지요. 어르신은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나는 젊어서 아내가 해주던 굴비 구이가..."
"거 보십시오. 그 생각 하니까 벌써 얼굴이 좀 펴지시지 않습니까. 허허."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돌쇠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망자들의 울음이 하나둘 잦아들었습니다. 어느새 망자들은 서로 살아생전 맛있게 먹은 음식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었지요. 시래깃국이니, 굴비니, 잔칫날 국수니 하는 이야기에 캄캄하던 저승길이 어쩐지 조금 훈훈해진 것 같았습니다.
저승사자는 그 광경을 보며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습니다.
'허, 별놈을 다 보겠구나. 저승길을 잔칫길로 만들어버리네.'
이윽고 일행은 삼도천 나루에 다다랐습니다. 검은 강물이 소리 없이 흐르는 강가에서, 어린 여자아이 망자 하나가 다리를 절뚝이며 무리에서 자꾸 뒤처지고 있었지요. 돌쇠가 그것을 보더니 두말없이 아이 앞에 등을 내밀고 쭈그려 앉았습니다.
"아가, 어서 업히거라. 이 아저씨 등짝이 넓어서 소 한 마리도 업고 다녔단다."
"아저씨는... 무섭게 안 생겼네요. 저승 가는 길인데 하나도 안 무서워요."
"암, 무서울 게 뭐 있느냐. 아저씨랑 같이 가면 하나도 안 무섭지. 자, 꽉 잡아라. 간다!"
돌쇠는 아이를 업고 성큼성큼 나룻배에 올랐습니다. 뱃사공 귀졸마저 그 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보았지요. 저승 생기고 이래 처음 보는 광경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사자의 마음 한구석에는 아까부터 께름칙한 것이 하나 걸려 있었습니다. 명부 패에 적힌 이름 석 자였지요. 사자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 번 패를 꺼내 들여다보았습니다.
'돌쇠. 분명 돌쇠라 적혀 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이번 명은 분명 지체 높은 자를 잡아오라는 어명 같은 것이었는데... 판관 나리께서 특별히 서두르라 하시며 직접 적어주신 패인데...'
원래 저승 명부에는 이름과 함께 사는 곳, 나이, 생시가 함께 적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번 패에는 어쩐 일인지 '한양 사는 돌쇠'라고만 덜렁 적혀 있었지요. 판관이 급히 갈겨쓴 듯 글씨도 삐뚤빼뚤했습니다.
"어이, 돌쇠야."
"예, 사자 어른."
"네놈, 혹시 벼슬을 한 적이 있느냐?"
돌쇠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아이고 어른도 참,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백정이 벼슬이라니요. 소인은 관아 문턱도 못 넘어보고 살았습니다. 벼슬은커녕 갓 한 번 써본 적이 없는걸요."
"...그렇겠지. 그렇겠지만."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사자는 얼버무렸지만 속은 점점 타들어갔습니다.
'판관 나리가 이번 망자는 이승에서 큰 권세를 누린 자이니 도망치지 못하게 단단히 포박해 오라 하셨는데... 포박은커녕 저놈은 제 발로 앞장서서 걷질 않나, 망자들을 달래질 않나, 애를 업질 않나. 권세를 누린 자의 행색이 어디 저렇단 말인가.'
사자는 입맛을 쩝 다셨습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예감이 등골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랐지만, 이미 저승 문이 코앞이었습니다. 시커먼 안개 너머로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한 문이 모습을 드러냈지요. 문 위에는 붉은 글씨로 '유명계'라 적혀 있었습니다.
"저것이 저승 문이다. 저 문을 넘으면 다시는 이승으로 돌아갈 수 없다."
망자들이 그 말에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돌쇠는 문을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이구, 문 한번 으리으리합니다. 대궐 문도 이만은 못하겠는데요. 저 문짝은 무슨 나무로 짰답니까? 못질 솜씨 좀 보게. 야, 이거 지은 목수는 저승에서도 알아주는 장인이겠습니다."
저승사자는 이마를 짚었습니다.
'이놈은 저승 문 앞에서 목수 솜씨 타령을 하는구나. 아무래도... 아무래도 뭔가 크게 잘못된 것 같은데.'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잠시 후 염라대왕 앞에서 그대로 들어맞고 말았더랍니다.
※ 3: 판관의 붓 실수
저승 문을 지나 시왕전 앞뜰에 이르자, 하늘을 찌를 듯한 전각이 나타났습니다. 붉은 곤룡포에 면류관을 쓴 염라대왕이 높은 옥좌에 앉아 있었고, 그 아래로 판관들이 두루마리 명부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있었지요. 좌우로 늘어선 귀졸들의 창검이 번쩍번쩍 빛나는 것이, 이승의 어느 대궐보다 삼엄한 광경이었습니다.
망자들은 차례차례 이름이 불려 염라대왕 앞에 섰습니다. 어떤 이는 살아생전의 죄가 드러나 통곡했고, 어떤 이는 선행이 인정되어 좋은 곳으로 인도되었지요. 돌쇠는 제 차례를 기다리며 전각 구석구석을 신기한 듯 둘러보았습니다.
'야, 단청 색깔 좀 보게. 저승 환쟁이들 솜씨가 이승보다 낫구먼. 저 기둥은 또 얼마나 굵은지, 몇백 년 묵은 나무일꼬.'
죽어서 끌려온 처지에 대궐 구경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저승 천지에 돌쇠 하나뿐이었을 겁니다. 이윽고 귀졸의 우렁찬 목소리가 전각에 울렸습니다.
"다음 망자, 앞으로 나오라!"
돌쇠가 성큼성큼 걸어 나가 넙죽 큰절을 올렸습니다.
"소인 한양 반촌 사는 백정 돌쇠, 대왕님께 문안 여쭙습니다. 먼 데까지 불러주셔서... 아니, 이런 말씀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잘 도착했습니다요."
전각 안이 일순 조용해졌습니다. 염라대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지요.
"방금... 백정이라 하였느냐?"
"예, 대왕님. 소 잡는 백정이옵니다."
"백정이라니. 이번에 잡아 올 자는 한양의 정승 김석금이거늘, 어찌 백정이 왔단 말이냐!"
염라대왕의 호통에 전각 기둥이 흔들렸습니다. 판관 하나가 허둥지둥 명부를 뒤지기 시작했고, 저승사자는 사색이 되어 명부 패를 두 손으로 받쳐 올렸습니다.
"대, 대왕님. 소인은 그저 패에 적힌 대로 '한양 사는 돌쇠'를 잡아왔을 뿐이옵니다!"
"패를 이리 가져오너라!"
염라대왕이 패를 받아 들여다보더니, 이번에는 판관을 향해 벼락같이 소리쳤습니다.
"최 판관! 이 패는 네가 적은 것이 아니냐!"
최 판관이 벌벌 떨며 기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명부와 패를 번갈아 보던 판관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갔지요.
"대왕님... 그, 그것이...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어서 고하지 못할까!"
"정승의 이름이 김석금, 돌 석 자에 쇠 금 자를 쓰는지라... 그날 밤 잡아 올 망자가 삼백을 넘어 소인이 경황이 없었사온데... 붓을 놀리다 그만 한자 대신 언문 훈으로... 돌 석은 '돌'로, 쇠 금은 '쇠'로 적어버려서..."
"그래서?"
"석금이... 돌쇠가 되어버렸사옵니다..."
전각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돌 석에 쇠 금, 김석금. 한자를 우리말로 풀면 영락없는 '돌쇠'였던 것입니다. 그 바람에 정승 김석금 대신, 한양에 사는 진짜 돌쇠가 끌려온 것이었지요. 저승사자는 저승사자대로 기가 막혔습니다.
'어쩐지! 어쩐지 처음부터 이상하다 했다. 정승이라는 자가 수육에 탁주를 내오지 않나, 저승길에서 망자들 등을 두드려주지 않나 했더니만, 애초에 사람이 바뀐 것이었구나!'
"이런 멍청한 놈! 붓 한 번 잘못 놀려 산 사람을 잡아 와? 저승 명부가 애들 낙서판인 줄 아느냐!"
염라대왕의 진노에 최 판관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사시나무 떨듯 떨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뜻밖의 목소리가 전각에 울려 퍼졌습니다.
"대왕님, 고정하시지요."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다름 아닌 돌쇠가 입을 연 것입니다.
"저 판관 나리 말씀을 들어보니, 하룻밤에 삼백 명 이름을 적으셨다지 않습니까. 사람이 하는 일에 실수가 없을 수야 있습니까. 소인도 소 잡을 때 칼이 빗나가는 날이 있는걸요. 너무 나무라지 마시지요."
"...뭐라?"
"게다가 소인은 덕분에 좋은 구경 실컷 했습니다. 저승 문도 보고, 삼도천 배도 타보고, 이런 으리으리한 대궐까지 와봤으니, 백정 팔자에 이만한 호강이 어디 있겠습니까. 허허."
염라대왕은 어이가 없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저승 생기고 수만 년, 잘못 끌려온 망자치고 노발대발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판관을 물어뜯을 듯 원망하고, 보상을 내놓으라 악을 쓰는 것이 보통이었지요. 그런데 이 백정은 오히려 판관을 감싸고 있으니 말입니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최 판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돌쇠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천한 백정이라는 자의 얼굴이 어쩐지 부처님처럼 넉넉해 보여, 판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지요.
'내 붓 실수로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사람이... 나를 감싸주는구나. 이승의 정승 판서도 이리는 못할 것이다.'
"허... 네놈 참 희한한 놈이로구나. 좋다. 착오는 착오이니 너는 곧 이승으로 돌려보내 주마. 허나 그 전에 절차는 절차. 저승에 온 자는 누구든 업경대 앞에 서야 하는 법이다."
업경대. 살아생전의 모든 행적이 낱낱이 비치는 저승의 거울이었습니다. 귀졸들이 커다란 거울을 돌쇠 앞으로 끌고 왔지요. 최 판관이 조심스레 아뢰었습니다.
"대왕님, 어차피 착오로 온 자이온데 업경대까지 비출 필요가..."
"법도는 법도다. 비추어라."
돌쇠는 거울 앞에서 뒤통수를 긁적였습니다.
'백정 놈 사는 게 뭐 볼 게 있다고. 소 잡는 것만 잔뜩 나오면 대왕님 눈만 버리실 텐데. 에라, 모르겠다. 보여드리라면 보여드려야지.'
돌쇠는 거울 앞에 공손히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습니다. 평생 남 앞에 나설 일 없던 백정이, 저승 대왕 앞에서 제 인생을 통째로 열어 보이게 된 것입니다.
이윽고 업경대가 뿌옇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거울에 비친 광경을 본 저승 관원들의 입이 하나둘 떡 벌어지기 시작했더랍니다. 저승이 발칵 뒤집히는 순간이 시작된 것이지요.
※ 4: 발칵 뒤집힌 저승
업경대에 가장 먼저 비친 것은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돌쇠가 제 솜옷을 벗어 다리 밑 거지 노인에게 덮어주고, 저는 홑겹 바람으로 오들오들 떨며 돌아가는 모습이었지요. 그다음에는 흉년이 든 해, 제 몫의 곡식 자루를 통째로 굶주린 이웃집 마루에 올려놓고 달아나듯 사라지는 돌쇠가 비쳤습니다.
거울은 쉬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병든 홀어미네 문 앞에 이십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놓인 고기 꾸러미. 밤마다 홀로 개천에 들어가 놓은 징검다리가 자그마치 서른일곱 개. 이름 모를 행려병자의 무덤이 마흔여섯 자리. 돌에 맞고도 웃어넘긴 것이 수백 번. 장면이 하나씩 지나갈 때마다 전각 안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커져갔습니다.
"아니, 저것이 다 한 사람의 업이란 말인가?"
"백정이... 백정이 저리 살았단 말이오?"
곁에서 지켜보던 저승사자는 그제야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랬구나. 내게 수육을 내온 것도, 망자들을 달랜 것도, 다리 저는 아이를 업어준 것도, 저놈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그저 평생 해오던 대로 한 것이었구나!'
판관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명부를 담당하는 녹사 귀졸이 황급히 붓을 놀려 선행을 기록하는데, 두루마리가 모자라 새 두루마리를 잇대고 또 잇대야 했지요. 저승 생기고 이런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대왕님! 선행 기록 두루마리가... 두루마리가 열두 폭을 넘었사옵니다!"
"뭐라? 열두 폭?"
염라대왕이 옥좌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습니다. 이승의 이름난 정승이며 큰 부자며 고명한 선비들도 선행 두루마리가 두어 폭을 넘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갓도 못 쓰는 백정의 선행이 열두 폭이라니요.
그때 업경대에 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어느 해 봄, 소를 잡기 전의 돌쇠였습니다. 돌쇠는 커다란 소의 목을 끌어안고 나지막이 속삭이고 있었지요.
"소야, 미안하다. 네 덕에 사람들이 배를 채우고 병자가 기운을 차린다. 다음 생에는 부디 좋은 몸 받아 태어나거라. 내 너를 위해 매일 빌어주마."
그러고는 소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눈을 가려주고, 단칼에 고통 없이 보내주는 것이었습니다. 잡은 소의 넋을 위해 뒷산에 조그만 돌탑을 쌓고 절을 올리는 모습까지 비치자, 전각 안이 숙연해졌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저승 뜰 한쪽이 갑자기 환해지더니, 소 형상의 짐승 혼백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돌쇠의 손에 저승으로 온 소들의 넋이었습니다. 귀졸들이 창을 들고 막아서려는데, 소들은 사납기는커녕 돌쇠 주위에 둘러서서 순한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중 가장 큰 황소 혼백이 앞으로 나와 사람의 말을 하였지요.
"대왕님께 아뢰옵니다. 저희는 저 사람의 손에 이승을 떠난 소들이옵니다. 허나 저희 중 누구도 저 사람을 원망하지 않사옵니다. 저 사람은 저희의 두려움을 달래주었고, 넋을 위해 빌어주었고, 저희 살과 뼈가 헛되지 않게 배고픈 사람들을 먹였사옵니다. 부디 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수백 마리 소의 혼백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승 수만 년 역사에 짐승의 혼백들이 사람을 위해 탄원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더랍니다. 염라대왕도, 판관들도, 귀졸들도 할 말을 잃었습니다. 시왕전 서기를 맡은 늙은 판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지요.
"내 이 자리에서 삼천 년을 지켰건만... 소가 백정을 위해 비는 것은 처음 보는구나. 이것은 필시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정작 어쩔 줄 모르는 것은 돌쇠였습니다.
"아이고, 이놈들아. 너희가 왜 무릎을 꿇느냐. 내가 너희한테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돌쇠는 소들에게 다가가 커다란 손으로 목덜미를 하나하나 쓸어주었습니다.
"검둥아, 너 여기 있었구나. 누렁아, 워낭 소리 좋던 우리 누렁이. 다들... 다들 잘 있었느냐."
돌쇠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이십 년 동안 제 손으로 보낸 소들의 이름을, 돌쇠는 단 하나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들도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채, 돌쇠의 어깨며 등에 넓적한 얼굴을 부비댔지요. 원수로 만나야 마땅할 백정과 소들이 저승 한복판에서 얼싸안고 재회하는 광경이라니요. 그 광경에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저승사자마저 고개를 돌려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훔쳤지요.
'내 수백 년 저승길을 오갔지만... 오늘 같은 광경은 처음 보는구나.'
이윽고 염라대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곤룡포 자락이 크게 출렁였지요. 대왕은 옥좌 아래로 천천히 내려와, 놀랍게도 백정 돌쇠 앞에 마주 섰습니다.
"돌쇠야."
"예, 예! 대왕님!"
"내 저승을 다스린 지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왕후장상에 만석꾼에 도학군자까지 수없이 이 거울 앞에 세워보았다. 허나 업경대가 이리 환하게 빛나는 것은 오늘 처음 본다."
과연 업경대는 마치 보름달처럼 온화한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은 한동안 그 빛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최 판관."
"예, 대왕님!"
"오늘 네 붓 실수는... 실수가 아니라 하늘의 뜻이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이 사람의 삶을 저승이 몰라보고 지나칠 뻔하지 않았느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대왕님!"
최 판관은 엎드린 채 흐느꼈습니다. 문책을 면해서가 아니라, 제 실수 하나가 이런 귀한 인연을 저승에 데려왔다는 것이 그저 벅찼던 것이지요.
전각 안의 모든 눈이 돌쇠에게 쏠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승 역사상 가장 황당하고도 따뜻한 판결이 내려질 참이었더랍니다.
※ 5: 염라대왕의 판결
염라대왕이 다시 옥좌에 올라 위엄을 갖추고 앉았습니다. 전각 안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지요.
"백정 돌쇠는 들으라."
"예, 대왕님."
"너는 판관의 착오로 잘못 불려온 자이니 마땅히 이승으로 돌려보낸다. 허나 그냥 보낼 수는 없구나. 저승 법도에 이르기를, 음덕을 쌓은 자에게는 그 덕만큼 갚아주라 하였다. 하여 판결하노라. 백정 돌쇠의 남은 수명에 사십 년을 더하노라!"
"예에? 사, 사십 년이요?"
돌쇠가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습니다.
"대왕님, 그건 너무 과합니다요. 소인 같은 것이 그리 오래 살아 무엇 합니까. 한 십 년이면 족합니다."
전각 안에 웃음이 터졌습니다. 저승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 오늘 하루에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지요. 염라대왕도 어이가 없다는 듯 껄껄 웃었습니다.
"허어, 저승 판결을 흥정하려 드는 놈은 네가 처음이다. 게다가 깎아달라는 것도 아니고 줄여달라니, 별놈일세. 어째서 줄여달라는 것이냐."
"소인 혼자 오래 살면 뭐 합니까. 그럴 수명이 있으면 차라리 마을 끝 병든 홀어미한테 나눠주십시오. 어린 남매 장성하는 것은 보고 가야 눈을 감을 것 아닙니까."
"저런, 저런. 끝까지 제 것을 남 주려 드는구나. 안심하거라. 그 여인의 병은 이미 명부에서 지워두었다. 네 곳간의 복이 그리로도 흐를 것이야. 판결은 판결이니 토 달지 말라. 그리고 하나 더. 돌쇠는 저승 곳간을 구경하고 가라."
염라대왕이 손짓하자 최 판관이 앞장을 섰습니다. 제 실수를 감싸준 은인을 모시게 된 판관은 정성을 다해 돌쇠를 안내했지요. 시왕전 뒤편으로 돌아가니, 끝이 보이지 않는 곳간 행렬이 나타났습니다. 이승 사람 하나하나마다 제 곳간이 있는데, 살아생전 베푼 것이 그대로 쌓이는 창고라 했습니다.
"이것이 이승의 아무개 부자의 곳간입니다."
판관이 가리킨 곳간을 들여다본 돌쇠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만석꾼 부자라는데, 곳간 안에는 짚신 두어 켤레와 좁쌀 한 줌이 전부였으니까요.
"아니, 그 큰 부자의 곳간이 왜 이리 텅 비었습니까?"
"이승의 재물은 이승에 두고 오는 법이지요. 여기 쌓이는 것은 오직 남에게 베푼 것뿐입니다. 저 부자는 평생 제 배만 불렸으니 곳간이 빌 수밖에요."
"저런, 쯧쯧. 그 재산 반의반만 풀었어도 곳간이 그득했을 텐데, 아깝습니다그려."
돌쇠는 남의 곳간을 두고도 제 일처럼 혀를 찼습니다. 판관은 그런 돌쇠를 보며 빙그레 웃었지요.
이윽고 판관이 어느 곳간 앞에 멈춰 섰습니다. 다른 곳간과 달리 문틈으로 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돌쇠 님의 곳간입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돌쇠는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곳간 안에는 곡식 섬이 천장까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비단이며 엽전 꾸러미가 헤아릴 수 없이 그득했습니다. 그 사이사이로 따뜻한 금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지요.
"이, 이게 다 뭡니까? 소인은 평생 남한테 뭘 받아본 적도, 모아본 적도 없는데요."
"받은 것이 아니라 주신 것들입니다. 고기 한 근, 땔감 한 단, 징검다리 돌 하나, 따뜻한 말 한마디까지. 베푼 것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고 전부 여기 쌓입니다. 돌쇠 님의 곳간은 저승에서 첫째가는 곳간입니다."
돌쇠는 곳간 앞에 주저앉은 채 한참을 울었습니다. 평생 천대받으며 살아온 세월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밤들이, 이곳에서는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던진 돌멩이는 여기 없었습니다. 백정이라 손가락질하던 소리도 여기 없었습니다. 오직 돌쇠가 남에게 건넨 것들만이 산처럼 쌓여 빛나고 있었지요.
'어머니... 보고 계십니까. 사람답게 살라 하셨던 말씀, 이 못난 아들이 그래도 헛살지는 않았나 봅니다...'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자, 염라대왕이 두루마리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이것은 저승이 내리는 복 문서다. 이승에 돌아가거든 네 곳간의 복이 흘러넘쳐 네게 닿을 것이다. 허나 명심하라. 복이란 물과 같아서 가두면 썩고 흘려보내면 맑아지는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대왕님. 흘려보내는 것이라면 소인이 평생 한 일이라 자신 있습니다요."
"허허, 그래. 그래서 네게 주는 것이다."
"그리고 최 판관."
"예, 대왕님."
"네 붓 실수 덕에 저승이 귀한 것을 배웠다만, 벌은 벌이다. 너는 백 일 동안 명부의 글자를 다시 익히거라. 특히 한자와 언문을 헷갈리지 않도록, 하루 천 자씩 쓰기다."
"백, 백 일 동안 하루 천 자씩이요?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울상이 된 판관을 보고 돌쇠가 껄껄 웃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염라대왕이 저승사자를 불렀지요.
"너는 돌쇠를 이승 집까지 편히 모셔다드려라. 오는 길처럼 걷게 하지 말고, 구름 가마를 내어주마."
"분부 받들겠나이다."
돌쇠가 구름 가마에 오르자, 소 혼백들이 우르르 몰려와 배웅했습니다. 그중 누렁이가 눈물 그렁한 눈으로 말했지요.
"주인님, 부디 오래오래 사시다 오십시오. 그때는 저희가 마중 나오겠습니다."
"오냐, 오냐. 너희도 부디 좋은 몸 받아 태어나거라. 다음 생에는 내가 너희 꼴을 베어다 먹이마."
저승사자도 가마 곁에 서서 정중히 허리를 숙였습니다. 처음 돌쇠네 사립문 앞에 나타났을 때의 그 음산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었지요.
"돌쇠 님. 그날 밤 주신 수육과 탁주, 수백 년 사자 노릇에 가장 따뜻한 대접이었소. 잊지 않겠소."
"별말씀을요. 사십 년 뒤에 또 오실 것 아닙니까. 그때는 더 맛난 걸로 대접하지요. 허허."
구름 가마가 두둥실 떠오르자, 저승 전각이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염라대왕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더랍니다.
"허허. 저승이 생긴 이래 가장 보람 있는 착오였도다."
※ 6: 이승에서의 새 아침
"돌쇠야! 이 사람 돌쇠야! 눈 좀 떠보게!"
돌쇠가 눈을 번쩍 뜨자, 이웃 김 서방이 울다가 웃다가 야단이 났습니다. 돌쇠가 숨이 끊어진 채 사흘이 지나, 마침 거적에 싸서 내가려던 참이었으니까요.
"아이고, 이 사람아! 죽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면 어쩌자는 겐가! 간 떨어질 뻔했네!"
"허허, 김 서방. 내가 저승 구경을 좀 하고 왔네. 아, 그리고 문지방에 엽전 꾸러미는 잘 전했는가?"
"그, 그걸 자네가 어찌... 아무튼 홀어미네에 전했네만... 그나저나 저승 구경이라니, 이 사람이 사흘 굶더니 헛소리를 하는구먼."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 걸세. 그나저나 배가 고픈데, 시래깃국이나 한 그릇 끓여 먹세. 저승에도 없는 게 시래깃국이더구먼."
돌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국 한 그릇을 뚝딱 비웠습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치고 이리 태평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돌쇠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한양 바닥에 퍼졌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소문이 뒤따랐지요. 정승 김석금 대감이 사흘 밤낮 사경을 헤매다가, 돌쇠가 깨어난 바로 그 시각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김석금 대감은 혼수상태에서 이상한 꿈을 꾸었다 했습니다. 저승 문 앞까지 끌려갔는데, 웬 우람한 사내가 대신 문 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저는 되돌아왔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꿈속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이렇게 일렀다 했습니다.
"네 이름 두 글자 덕에 백정 돌쇠가 대신 다녀갔으니, 그 은혜를 잊지 말라. 그리고 네 업경대는 아직 비어 있으니, 남은 생은 채우며 살라."
대감은 깨어나자마자 수소문 끝에 반촌의 돌쇠를 찾아왔습니다. 한양이 발칵 뒤집혔지요. 정승 대감의 행차가 백정촌으로 들어가다니, 조선 개국 이래 없던 일이었으니까요. 구경꾼들이 골목마다 담장마다 새까맣게 매달렸습니다. 돌쇠는 마당에서 태연히 칼을 갈다가 대감을 맞았지요.
"자네가 돌쇠인가."
"예, 대감마님. 소인이 돌쇠올시다."
"내 이름이 석금이라, 돌 석에 쇠 금일세. 자네가... 내 대신 저승을 다녀왔다지."
"허허, 뭐 덕분에 좋은 구경 잘하고 왔습니다요. 대감마님 이름자가 아니었으면 소인이 언제 저승 대궐 구경을 해보겠습니까."
김석금 대감은 그 자리에서 갓을 벗고, 백정 돌쇠에게 넙죽 큰절을 올렸습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모두 제 눈을 의심했지요.
"대, 대감마님! 이 무슨 당치 않은..."
"당치 않기는. 자네는 내 목숨의 은인이자 스승일세. 저승 문턱에서 내 지난 삶을 돌아보니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네. 정승이라는 자의 업경대가 백정의 업경대보다 못하다니, 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그날부터 김석금 대감은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곳간을 열어 굶는 백성에게 곡식을 풀고, 사재를 털어 다리를 놓고 우물을 팠지요.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대감은 껄껄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저승 곳간이 텅 비어서 그러네. 이제부터 부지런히 채워야지."
대감은 철마다 반촌의 돌쇠를 찾아와 탁주를 나누었습니다. 정승과 백정이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저승 곳간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는 모습에, 처음에는 혀를 차던 양반들도 차츰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지요. 두 사람의 우정은 신분의 벽도 어쩌지 못했더랍니다.
돌쇠의 삶도 달라졌습니다. 염라대왕의 복 문서 덕인지, 돌쇠가 하는 일마다 술술 풀렸지요. 돌쇠가 잡은 고기는 유난히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나서 장안의 반가에서 줄을 섰고, 형편이 피자 돌쇠는 번 것을 족족 흘려보냈습니다. 이제는 남몰래가 아니라 떳떳하게 베풀 수 있게 된 것이 돌쇠는 무엇보다 좋았지요. 흉년에는 가마솥을 걸어 죽을 쑤어 돌렸고, 겨울이면 백정촌 아이들에게 솜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병든 홀어미는 씻은 듯이 나아 삯바느질로 남매를 키웠고, 그 남매가 자라 혼인하던 날에는 돌쇠가 아비 노릇으로 상석에 앉았더랍니다. 색시가 큰절을 올리며 말했지요.
"어릴 적 저희 집 문 앞에 고기를 놓아주신 분이 어르신인 것을, 저희 남매는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발자국이 어찌나 크던지요."
"허허, 이런. 이십 년 들키지 않았다고 좋아했더니만."
훗날 사람들은 돌쇠를 백정이라 부르지 않고 '돌쇠 어른'이라 불렀습니다. 아이들은 더 이상 돌을 던지지 않았고, 대신 돌쇠의 무릎에 앉아 저승 구경 이야기를 조르곤 했지요.
"어르신, 저승 이야기 또 해주세요! 업경대 이야기요!"
"허허, 이놈들아. 몇 번을 말해주랴. 좋다, 대신 잘 들어라. 업경대라는 거울에는 말이다, 감춘 것도 다 비치고, 남몰래 한 것도 다 비친단다. 그러니 너희도 남이 보건 안 보건..."
"착하게 살아라!"
"옳지! 하하하!"
돌쇠는 염라대왕이 약조한 대로 꼭 사십 년을 더 살았습니다. 여든 넘어 곱게 눈을 감던 날, 돌쇠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떠 있었다 하지요. 마을 사람들은 그날 밤, 돌쇠네 오두막 위로 금빛 구름 가마가 내려오고, 소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다 합니다. 약조대로 누렁이와 검둥이가 마중을 나온 것이었겠지요. 가마 곁에는 낯익은 검은 도포의 사자가 서서, 이번에는 음산한 기색 하나 없이 공손히 길을 안내했다던가요.
"돌쇠 님, 다시 뵙습니다. 이번에는 이름이 틀림없으니 안심하시지요."
"허허, 어른도 참. 그나저나 가는 길에 그 시래깃국 이야기나 또 합시다."
청구야담은 이 이야기 끝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늘은 신분을 보지 않고 마음을 보며, 저승 곳간은 재물이 아니라 베풂으로 채워진다. 판관의 붓 실수 하나가 이 진리를 세상에 알렸으니, 세상에 헛된 실수란 없는 법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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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 어떠셨습니까. 판관의 붓 실수 하나가 백정 돌쇠의 숨은 이십 년을 세상에 드러냈지요. 업경대에는 남몰래 한 일도 빠짐없이 비친다 합니다. 여러분의 저승 곳간에는 무엇이 쌓이고 있을까요. 오늘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도 분명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 겁니다.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드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그리고 댓글로 소감 남겨주세요. 다음 이야기에서 더 놀라운 저승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복 많이 지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