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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를 집어삼킨 망령의 사랑 (출처: 패관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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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250자 내외)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황홀했던 하룻밤이, 실은 당신의 영혼을 잠식하는 저주의 시작이었다면?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의 발을 멈추게 한 치명적인 유혹. 죽어서도 사랑을 갈구했던 기생 귀신의 섬뜩한 사랑 이야기. 그녀의 비단 치마폭에 감춰진 광기 어린 진실 속으로 초대합니다.
디스크립션 (300자 내외)
과거 시험을 보러 가던 야심 찬 선비 이성준. 궂은 비를 피해 우연히 머물게 된 외딴 기와집에서 꿈결처럼 아름다운 기생, 월향을 만난다. 그녀의 요염한 자태와 하룻밤의 뜨거운 사랑에 빠져버린 선비.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의 몸은 야위어 가고, 달콤한 밤의 유혹 뒤에 숨겨진 끔찍한 진실이 서서히 고개를 드는데… 한 편의 19금 영화 같은 조선 시대 에로틱 스릴러 야담.
※ 비에 젖어드는 인연, 살에 스며드는 유혹
조선 팔도를 삼킬 듯이 쏟아붓는 여름 장마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오직 장원급제라는 야망 하나만을 품고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 이성준은, 자신의 처지가 지금 쏟아지는 비에 흠뻑 젖은 한 마리 생쥐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야심 차게 떠난 걸음이었건만, 발목까지 차오르는 흙탕물은 무거운 이상처럼 그의 걸음을 더디게 했고, 사납게 몰아치는 비바람은 금방이라도 그의 마지막 자존심인 삿갓을 날려버릴 듯 위태로웠지요. 해도 이미 저물어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고, 인가는커녕 짐승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깊은 정적만이 감돌았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굶주린 산짐승의 밥이 되거나, 쏟아지는 비에 남은 체온마저 빼앗겨 이름 없는 객이 되어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처절한 공포가 엄습해 올 때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저 멀리 짙은 어둠이 깔린 산 중턱에서 외딴 등불 하나가 망망대해의 등대처럼 깜빡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구원이었습니다. 성준은 마지막 남은 힘과 희망을 쥐어짜 등불이 보이는 곳을 향해 비탈길을 기어오르다시피 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런 깊은 산속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만큼 크고 화려한 기와집이었습니다. 마치 권세 높은 정승의 별채라도 되는 듯, 집은 단아하면서도 위엄 있는 자태를 뽐내고 있었지요. 궂은 비에도 흐트러짐 없이 피어있는 뜨락의 꽃들은 기이할 정도로 색이 선명했고, 주변의 그 어떤 소음도 허락하지 않는 듯한 완벽한 고요함은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자아냈습니다. 성준은 흠뻑 젖은 자신의 행색에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염치불구하고 굳게 닫힌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한참 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고운 비단 옷을 차려입은 어린 계집종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성준이 하룻밤만 묵어가게 해달라 간청하자, 계집종은 잠시 안으로 들어가 주인의 허락을 구하고 오더니 이내 그를 안으로 들였습니다. 집안은 바깥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살을 에는 듯한 빗줄기의 냉기와는 달리 내부는 훈훈한 온기로 가득했고, 복도를 따라 늘어선 등불은 대낮처럼 환했으며, 공기 중에는 여인의 진한 분향과 갓 피어난 난초의 향기가 관능적으로 섞여 감돌았습니다. 성준이 젖은 옷을 갈아입고 객실에 앉아 차가운 몸을 녹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문이 소리 없이 스르르 열리며, 한 여인이 달빛을 등진 채 방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 순간, 성준은 숨을 멈췄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시와 그림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여인이었습니다. 쪽빛 비단 치마에 눈처럼 새하얀 저고리를 입은 여인은, 열일곱이나 되었을까 싶은 앳된 얼굴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깊고 서늘한 눈매를 하고 있었습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는 탐스럽게 틀어 올려져 있었고, 가녀린 목선과 속곳 너머로 살짝 드러난 하얀 어깨는 그 어떤 수행 깊은 선비라도 단숨에 파계승으로 만들 만큼 요염했습니다.
여인은 자신을 이 집의 주인인 월향(月香)이라 소개했습니다. 본디 낙양 제일의 기생이었으나, 한 귀인의 눈에 들어 이 집을 하사받고 속세의 연을 끊은 채 살고 있다고 했지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옥구슬이 비단 위를 굴러가는 듯 맑고 청아했습니다. 성준은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며 예를 갖추었지만, 월향은 괜찮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습니다. 그녀는 성준이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라는 것을 알고는, 몸을 덥혀줄 귀한 술과 정갈한 안주를 내오게 하여 그의 고단함을 위로해주었습니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은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월향은 성준의 글을 청해 듣고는 그의 해박함과 원대한 포부에 감탄했고, 성준은 월향의 거문고 연주와 시를 짓는 솜씨에 넋을 잃었습니다. 그녀는 그저 얼굴만 고운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학문적 깊이를 단숨에 꿰뚫어 보고, 그의 야망 뒤에 숨겨진 외로움을 어루만져주는 지기(知己)와도 같았지요. 밤이 깊어갈수록, 술기운과 여인의 향기에 취한 성준의 이성은 점차 마비되어 갔습니다. 월향의 희고 긴 손가락이 그의 손등을 스칠 때마다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고, 그녀가 귓가에 속삭이는 달콤한 목소리는 그를 몽롱한 꿈속으로 이끄는 듯했습니다. 마침내 월향이 몸을 일으켜 그의 곁으로 다가앉아 그의 술잔을 채워줄 때, 치마폭에서 풍겨 나오는 짙은 사향(麝香)에 성준은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렸습니다. 월향의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고, 성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반사적으로 그녀의 몸을 더듬었습니다.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속살, 한 손에 잡힐 듯 잘록한 허리와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풍만한 가슴, 그리고 짙은 난초 향을 뿜어내는 그녀의 입술. 모든 것이 꿈결처럼 황홀했습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마치 오랜 시간 서로를 그리워한 연인이었던 것처럼 서로의 몸을 뜨겁게 탐했습니다. 성준은 여인의 몸 위에서 굶주린 맹수처럼 그녀를 취했고, 월향은 그런 그를 요염한 신음과 함께 부드럽게 받아들이며 더 깊고 아찔한 쾌락의 세계로 인도했습니다. 성준은 자신이 지금껏 책으로만 배웠던 남녀상열지사가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는지를 깨달으며, 월향이라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향기로운 늪에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습니다.
※ 시들어가는 육신, 만개하는 영감
하룻밤의 뜨거운 인연은 이내 질긴 꿀처럼 성준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빗줄기는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멈추지 않았고, 월향은 궂은 날씨를 핑계 삼아 며칠 더 묵어가라며 그를 붙잡았습니다. 성준은 내심 한시라도 빨리 한양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밤마다 자신을 집어삼키는 그녀의 치명적인 유혹에서 벗어날 힘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었습니다. 과거 시험, 입신양명, 가문의 영광. 그 모든 것들은 이미 기억 저편의 낡은 책갈피처럼 빛이 바래버렸습니다. 성준의 세상은 오직 월향이 잠에서 깨어나는 밤에 시작되어, 그녀가 다시 잠자리에 드는 새벽에 끝났습니다. 두 사람은 낮이면 함께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으며, 밤이면 세상의 모든 윤리와 도덕을 잊은 채 서로의 몸을 섞는 데에만 몰두했습니다. 월향은 마치 그의 머릿속에 들어와 앉아 있기라도 한 듯, 성준이 원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세상을 모르는 순진한 처녀처럼 수줍게 그의 품에 안겨 그의 리드를 따르다가도, 때로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기생처럼 그의 온몸을 애태우며 정사의 주도권을 쥐고 그를 격렬하게 몰아붙였습니다.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 정신없이 몸을 흔들 때면, 성준은 자신의 정기(精氣)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진액까지 남김없이 그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아찔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월향과의 밤이 깊어질수록, 성준의 몸은 눈에 띄게 시들어갔습니다. 불과 며칠 만에 뺨은 수척해지고 눈두덩은 퀭하게 가라앉았으며, 걸음을 걸을 때면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습니다. 하루는 벼루에 먹을 갈기 위해 물을 뜨러 연못가에 갔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습니다. 마치 중병에 걸린 사람처럼 낯빛은 창백했고, 눈빛은 흐리멍덩하게 풀려 있었지요. 하지만 육체의 쇠락과는 반대로, 그의 정신은 기이할 정도로 맑고 예리해졌습니다. 붓을 잡으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심오한 문장들이 막힘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막혔던 학문의 혈이 뚫린 듯, 세상의 모든 이치가 손에 잡힐 듯 명료하게 느껴졌지요. 마치 월향이 밤마다 자신의 진액을 양분 삼아 받아먹고, 그 대가로 그에게 신들린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성준은 자신의 몸이 하루가 다르게 망가져 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 기묘하고 달콤한 거래를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월향이라는, 아름답고 향기롭지만 치명적인 독을 품은 양귀비꽃에 완전히 중독되어 버린 것입니다. 낮이면 핏기 없는 얼굴로 끙끙 앓다가도, 밤이 되어 월향의 부드러운 살결이 몸에 닿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펄펄 끓는 정욕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성준이 월향에게 물었습니다. “낭자는 어찌하여 낮에는 잠만 자고, 밤에만 활동하는 것이오? 혹, 나와의 밤이 고되어 그런 것이오?” 그러자 월향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답했습니다. “저는 본디 달을 닮은 여인이라,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기운을 차릴 수가 없답니다. 오직 서방님의 따뜻하고 강한 양기(陽氣)를 받아야만, 이 밤의 꽃이 시들지 않고 활짝 피어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녀의 대답은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다웠지만, 성준은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녀의 비단 치마폭에 안겨 쾌락의 절정을 맛보는 순간에도, 문득문득 그녀의 몸이 생명체의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살결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창백하게 희었고, 아무리 뜨겁게 몸을 섞어도 그녀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녀는 단 한 번도 집 밖으로 나가는 법이 없었고, 외부 손님을 맞는 법도 없었습니다. 이 크고 화려한 기와집에는 오직 월향과 그녀를 모시는 어린 계집종, 그리고 성준, 단 세 사람뿐이었습니다. 이 모든 기이한 사실들을 애써 외면한 채, 성준은 그저 월향이 차려주는 달콤한 잠자리에 매일 밤 자신의 남은 생명을 기꺼이 내어줄 뿐이었습니다. 한양과 과거 시험, 그리고 자신의 미래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진 지 오래였습니다.
※ 먼지 쌓인 진실, 위패에 새겨진 이름
어느덧 보름의 시간이 꿈결처럼 흘렀습니다. 그날도 성준은 월향이 깊은 잠에 빠진 한낮에,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서재로 향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시작한 글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지요. 하지만 붓을 든 그의 손은 수전증 환자처럼 심하게 떨렸고, 눈앞은 어지러워 글자 하나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문득, 잊고 있던 한양과 자신의 꿈이 희미하게 떠오르자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이 밀려왔습니다. 그는 잠시 머리를 식힐 겸,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섰습니다. 늘 잠겨 있던 월향의 침실을 제외하고, 그는 이 집의 거의 모든 곳을 둘러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집의 가장 후미진 곳, 다른 건물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그마한 별채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곳만은 유독 시간이 멈춘 듯, 퇴락하고 스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지요. 호기심과 함께 정체 모를 불길함이 동한 성준은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곳이 집안의 사당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과는 달리, 사당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처마 밑에는 거미줄이 잔뜩 쳐져 있는 등,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성준은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돌아가려 했지만,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집의 비밀이, 그리고 월향이라는 여인의 정체가 저 문 너머에 있을 것만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굳게 닫힌 문고리를 잡아 힘껏 당겼습니다. 오래된 나무 문이 먼지를 풀풀 날리며, 마치 사람의 비명과도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삐걱이며 열렸습니다. 사당 안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컴컴했고, 짙은 먼지 냄새와 함께 향이 타다 만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성준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자, 창틈으로 들어온 한 줄기 빛이 제단 위를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의 끝에,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쓴 자그마한 나무 위패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성준은 홀린 듯 위패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손으로 위패의 먼지를 닦아내고 그 위에 새겨진 글자를 읽는 순간, 그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위패의 한가운데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달 월(月), 향기 향(香). 월향. 그리고 그 옆에는 그녀가 죽은 날짜가 적혀 있었는데, 날짜를 세어보니 정확히 일 년 전 오늘이었습니다.
머릿속이 아득해졌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기괴한 일이란 말인가. 지난 보름간 내 품에 안겨 웃고 울던 그 여인이, 밤마다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갈 듯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던 월향이, 이미 일 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고? 성준은 헛것을 본 것이라 생각하며 눈을 비비고 다시 위패를 보았지만,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지난밤의 기억들이 파편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그녀의 살결,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던 기이한 몸, 그리고 자신의 정기를 빨아들이는 듯한 섬뜩한 감각까지. 그 모든 것이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닫혀 있던 사당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습니다. 성준은 비명을 지르며 사당을 뛰쳐나왔습니다. 따사로운 햇살이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온 세상이 잿빛으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이제껏 자신이 머물렀던 이 화려한 기와집이, 실은 귀신이 사는 흉가였으며, 자신은 지난 보름간 죽은 자와 동침해왔다는 끔찍한 사실을 깨닫고 만 것입니다. 어젯밤, 그의 귓가에 속삭이던 월향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습니다. “서방님, 이제 우리는 영원히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 달콤했던 사랑의 속삭임이, 이제는 지옥의 나락에서 울려 퍼지는 저주의 메아리처럼 그를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 귀신의 정체, 살기 위한 약조
성준은 정신없이 기와집을 뛰쳐나왔습니다. 이성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육체의 원초적인 본능이 먼저 반응한 것이었지요. 비는 어느새 멎어 있었지만, 축축하고 비릿한 숲의 공기는 그의 폐부를 칼날처럼 파고들었습니다. 나뭇가지에 값비싼 도포가 찢기고 정성껏 기른 살결이 긁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짐승처럼 비탈길을 굴러 내려왔습니다. 등 뒤에서 월향의 애달픈 목소리가 ‘서방님, 어딜 그리 급히 가십니까!’ 하고 부르는 듯한 환청이 뇌리를 파고들었지만, 감히 뒤를 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돌아보는 순간, 그녀의 차가운 손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아 다시 그 지옥 같은 기와집으로 끌고 갈 것만 같았습니다.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숲을 벗어나자, 저 멀리 닭 우는 소리와 함께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작은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성준은 거의 기다시피 하여 마을 어귀의 장승 앞에 다다라서야 긴장이 풀린 채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낯선 초가집의 방 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머리맡에서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독특한 약초 향이 났고,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지요. 마을의 약재상이라는 노인은, 길가에 쓰러져 있는 그를 사람들이 발견하여 이곳으로 데려왔다고 했습니다. 성준은 노인에게 물 한 잔을 청해 마신 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겪은 일을 두서없이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산 중턱의 기와집 이야기, 월향이라는 꿈결 같은 여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먼지 쌓인 사당에서 발견한 위패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의 말이 끝나자,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젊은이가 단단히 홀렸구먼. 그 여인의 비단 치마폭에 들어갔다가 제 발로 걸어 나온 이는 자네가 처음일세.”
노인의 말에 따르면, 월향은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이 고을에서 가장 이름난 기생이었다고 합니다. 빼어난 미색과 뛰어난 기예로 수많은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였지만, 정작 그녀는 가난한 선비 하나에게 온 마음과 재산을 바쳤다고 했지요. 월향은 자신의 몸을 팔아 번 돈으로 선비의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고, 선비는 그런 그녀에게 장원급제를 하면 반드시 그녀를 면천시켜 평생의 반려로 삼겠노라 굳게 약조했습니다. 하지만 한양으로 떠난 선비는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자, 그녀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명망 높은 가문의 여식과 혼인을 해버렸습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월향은 식음을 전폐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선비에 대한 배신감과 지독한 원한을 품은 채 은장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였지. 과거를 보러 가는 젊은 선비들이 그 고개를 넘다가 종종 실종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 몇 해 전에도 자네처럼 장래가 촉망되던 선비 하나가 그 고개 근처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는데, 쭈글쭈글한 몰골이 꼭 팔십 먹은 노인 같았다고 하더군. 그 여인의 원혼(冤魂)이 죽어서도 사랑의 약조를 잊지 못하고, 자신의 정인과 닮은 선비들을 유혹해 정기를 빨아먹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네.” 노인은 성준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혀를 찼습니다. “자네 얼굴에 귀영(鬼影)이 시커멓게 드리워져 있네. 이미 반쯤은 저승에 발을 들여놓은 게야. 하마터면 자네도 그 원귀의 노리개가 되어 뼈도 못 추릴 뻔했어.”
성준은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 황홀했던 밤들이, 실은 자신의 목숨을 갉아먹는 죽음의 향연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노인에게 살려달라며,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습니다. 노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품속에서 누렇게 바랜 부적 한 장을 꺼내 주었습니다. “이것은 귀신을 쫓는 부적이 아니라, 귀신의 눈을 잠시 멀게 하고 그 힘을 흩트리는 부적일세. 오늘 밤 자시(子時)에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게.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평소처럼 그 여인과 정을 통하게. 그 여인이 자네의 정기를 빨아들여 만족한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때, 숨을 참고 이 부적을 그 여인의 이마에 붙이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나오게. 산 자의 숨결이 닿으면 부적의 효험이 떨어질 수 있으니 명심하게. 단, 날이 밝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하네. 동이 트면, 음기(陰氣)가 가장 강해지는 시간이니.” 다시 그 지옥 같은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지만, 살기 위해서는 노인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준은 노인에게 몇 번이고 감사의 절을 올린 뒤, 차가운 부적을 품에 품고 다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산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 광기 어린 집착, 추악한 본모습
밤이 되어 다시 돌아온 기와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화려하고 따뜻한 불빛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준의 눈에는 이제 그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아름답게 피어있던 꽃들은 마치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자란 듯 섬뜩하게 붉었고, 집안을 감돌던 난초 향기는 무덤가의 부패한 냄새처럼 역하게 느껴졌습니다. 성준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를 발견한 월향은 대낮의 소동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 혹은 모르는 척하는 듯, 반가운 기색으로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습니다. “서방님, 어디를 이리 오래 다녀오셨습니까. 서방님 없는 낮 시간은, 저에게는 천년과도 같사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꿀처럼 달콤했고, 그녀의 몸에서는 여전히 그를 미치게 하던 난초 향이 풍겨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이 성준에게는 사람을 홀리는 여우의 둔갑술처럼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그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참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를 마주 안았습니다. “잠시 바람을 쐬고 왔을 뿐이오. 낭자가 보고 싶어 이리 빨리 돌아오지 않았소.”
그날 밤, 월향은 평소보다 더욱 교태를 부리며 성준을 유혹했습니다. 그녀가 내오는 술잔에는 이전보다 더 진한 향기가 담겨 있었고, 그녀의 몸짓은 한시도 그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성준을 자신의 무릎에 눕히고는, “서방님의 정기는 참으로 달고 뜨거워, 저의 텅 빈 몸을 가득 채워주는 듯합니다.”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습니다. 성준은 노인의 말을 떠올리며, 역겨움을 참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녀의 차가운 입술을 받아내고, 생명체의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얼음장 같은 살결을 어루만졌습니다. 그녀가 그의 위에서 허리를 흔들 때마다, 자신의 생명이 한 움큼씩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오히려 더 격렬하게 그녀를 원하는 척 연기해야 했습니다. 드디어 월향이 만족스러운 신음을 길게 내뱉으며 그의 품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때, 성준은 지금이 기회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품속에서 부적을 꺼내, 잠든 그녀의 이마에 붙이려 손을 뻗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감겨 있던 월향의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녀의 눈은 더 이상 사랑에 빠진 여인의 눈이 아니었습니다. 붉은 핏발이 선 그 눈에는 배신감과 증오, 그리고 지독한 원한이 서려 있었습니다. “결국… 당신도 똑같군요. 영원히 함께하겠다던 그 사내처럼, 당신도 나를 버리고 떠나려는 것이었군요!” 월향의 목소리는 더 이상 옥구슬 같은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무덤 속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섬뜩하고 갈라진 목소리였습니다. 그녀는 성준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습니다. 가녀린 여인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엄청난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준의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달빛처럼 곱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얗던 피부는 흙빛으로 변해 고름을 흘리며 떨어져 나갔고, 탐스럽던 머리카락은 한 움큼씩 빠져 흉측한 몰골을 드러냈습니다. 아름다운 기생 월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원한에 사무쳐 썩어가는 송장 하나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서방님! 당신의 그 싱싱한 정기가 없으면, 저는 이 추한 몰골로 다시 차가운 어둠 속을 헤매야 한단 말입니다.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영원히 저와 함께하시겠다고. 어찌하여 사내들은 모두 똑같은 약조를 하고, 이리도 쉽게 저버리는 것입니까!” 귀신은 울부짖으며 성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성준은 마지막 힘을 다해 그녀를 밀쳐내고, 숨을 참은 채 손에 쥔 부적을 귀신의 이마에 정확히 붙였습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부적이 타들어가자, 귀신은 살이 타는 듯한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습니다.
※ 지울 수 없는 흉터
부적이 타들어가며 내뿜는 희미한 빛이 귀신의 힘을 억누르는 것은 아주 잠시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준에게는 그 찰나의 순간이 영원과도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는 귀신이 고통스러워하는 틈을 타, 미친 듯이 방문을 박차고 뛰쳐나왔습니다. 등 뒤에서 “네 이놈, 절대 용서치 않겠다! 너의 살과 피 속에 나의 한을 새겨주마!” 하는 귀신의 저주 섞인 비명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대문을 넘어서는 순간, 그의 눈앞에서 또 한 번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려했던 기와집이, 마치 신기루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윤기가 흐르던 기둥은 썩은 고목처럼 바스러졌고,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던 뜨락은 잡초만 무성한 폐허로 변해버렸습니다. 무너지는 집의 잔해 속에서, 그동안 월향에게 정기를 빼앗겼던 다른 선비들의 앙상한 유골들이 희미하게 보였다가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그가 지난 보름간 머물렀던 모든 것이, 실은 귀신이 만들어낸 헛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집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자리에는, 잡초가 우거진 작은 무덤 하나만이 스산하게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성준은 동이 틀 때까지 뜬눈으로 산길을 달려, 간신히 큰길가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밤새 겪은 일들이 마치 하룻밤의 끔찍한 악몽처럼 느껴졌지만, 온몸에 남은 상처와 뼛속까지 시린 한기, 그리고 텅 비어버린 것 같은 육신은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현실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었지요. 그는 길가의 작은 개울에 이르러서야, 목을 축이고 얼굴을 씻기 위해 몸을 숙였습니다. 그리고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그의 왼쪽 뺨에, 이전에는 없었던 검붉은 반점이 손톱만큼 피어난 것입니다. 마치 노인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검버섯과도 같은 그 흉터는, 그가 귀신과 동침하며 정기를 빼앗긴 자에게 남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미친 듯이 손으로 뺨을 문질렀지만, 흉터는 마치 살갗에 새겨진 저주처럼 피부 깊숙이 뿌리내린 듯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성준은 한양에 도착하여 그토록 원하던 과거 시험을 치렀습니다. 월향의 귀기가 아직 남아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진액을 받아먹고 얻었던 영감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것인지, 그는 놀랍게도 장원 급제를 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는 평생토록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하고, 여인을 가까이하지도 않은 채 홀로 쓸쓸히 늙어갔다고 합니다. 밤마다 꿈속에 나타나는 월향의 원망 어린 눈빛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몸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려 그 어떤 여인을 품어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혼의 온기는 이미 그 기와집에 모두 두고 온 지 오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뺨에 피어난 검붉은 흉터는,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짙어져, 훗날 사람들은 그를 ‘검버섯 대감’이라 부르며 뒤에서 수군거렸다고 합니다.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와 명예를 모두 얻었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영혼과 온기를 귀신에게 저당 잡힌 채,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살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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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지독한 사랑과 집착. 여러분은 어떻게 들으셨나요? 사람의 마음에 한번 품은 원한이 얼마나 무서운 귀신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때로는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 뒤에 가장 치명적인 독이 숨겨져 있는 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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