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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백성을 핍박하던 사또, 한 어린아이의 눈물에 무너지다
부제
백성을 핍박하던 한 탐관오리 사또가 굶주린 어린 백성의 눈물 한 방울 앞에서 지난 죄를 뉘우치고, 빼앗은 곡식을 돌려주며 평생 청백리로 거듭나는 개과천선 야담, 출처: 『동패낙송』 소재 각색
태그 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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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여러분, 만약 굶주린 어린아이가 관아 마당에 꿇어앉아 눈물 한 방울을 뚝 떨어뜨린다면, 돌같이 굳은 사람 마음도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오늘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는 백성을 쥐어짜던 사또가 바로 그 눈물 앞에서 무너진 사연입니다. 사람은 정말 한순간에 달라질 수 있는 것일까요? 자, 『동패낙송』 속 이야기 한 자락으로 들어가 보시지요.
※ 1. 탐욕스러운 사또가 부임하다
조선 후기 어느 산골 고을에, 조태문이라는 사또가 새로 내려왔답니다. 이 조태문이라는 사람, 글도 잘하고 말도 번듯하여 한양에 있을 적엔 장래가 크다 소리를 들었지요. 그런데 사람 속이란 겉모습만 보고는 모르는 법입니다. 비단 도포를 입고, 갓끈을 단정히 매고, 수염을 쓰다듬는 모양새는 그럴듯했으나, 마음속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뜻보다 제 이름을 높이고 제 주머니를 채우려는 욕심이 더 컸던 게지요.
그가 고을에 부임하던 날, 관아 앞마당에는 백성들이 엎드려 새 사또를 맞았습니다. 늙은 농부도 있었고, 등에 아이를 업은 아낙도 있었고, 장터에서 소금 팔아 입에 풀칠하는 장사치도 있었지요. 그들은 새 사또가 제발 전임자보다 나으리라 믿고 머리를 조아렸답니다.
그런데 조태문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더랍니다.
'고을은 작아도 거둘 것은 있겠구나. 백성들이 가난하다 하나, 쥐어짜면 기름 한 방울은 나오기 마련이지.'
허허, 여러분, 사람 욕심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남의 굽은 등은 보지 않고, 그 등 위에 얹힌 짐만 더 얹을 궁리를 하는 것이지요.
부임한 지 사흘도 지나지 않아 조태문은 이방과 호방을 불러 앉혔습니다. 이방이란 관아 문서를 맡아보던 아전이고, 호방은 세금과 곡식 장부를 맡던 자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고을 살림살이 장부를 쥐고 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지요.
조태문이 부채를 탁 접으며 말했습니다.
"전임 사또 때 밀린 세금이 많다 들었다. 장부를 낱낱이 뒤져 한 푼도 남기지 말고 거두어라."
이방이 슬쩍 눈치를 보며 대답했지요.
"사또, 지난해 흉년이 들어 백성들 형편이 말이 아니옵니다. 지금 몰아치면 원성이 클까 염려되옵니다."
그러자 조태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방을 바라보았습니다.
"원성? 백성이 관아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나라 기강이 서겠느냐. 울면 울수록 더 단단히 다스려야 하느니라."
그 말 한마디에 관아 안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그날부터 고을에는 바람보다 먼저 관아의 독촉장이 날아다녔답니다. 밀린 환곡을 갚으라, 부역에 나오라, 군포를 바치라, 명목도 가지가지였지요. 환곡이란 본래 흉년에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 뒤 갚게 하던 제도인데, 세월이 흐르며 탐관오리 손에서는 백성을 옥죄는 밧줄이 되곤 했답니다.
아전들은 사또의 기세를 등에 업고 마을마다 들이닥쳤습니다. 닭 한 마리 남은 집에서는 닭을 빼앗고, 베 한 필 숨겨둔 집에서는 베를 끌어냈습니다. 아이가 울면 "관아에 끌려가고 싶으냐" 윽박질렀고, 늙은이가 애원하면 "장부에 사정은 적히지 않는다"며 냉정히 돌아섰지요.
그 고을 끝자락, 산 그림자가 먼저 내려앉는 작은 초가에 만복이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열 살 남짓 되었으나, 몸집은 여덟 살 아이처럼 작았답니다. 아버지는 몇 해 전 부역을 나갔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순덕은 삯바느질로 겨우 아이를 먹였습니다. 만복이는 새벽이면 냇가에 나가 물을 긷고, 낮이면 산에 올라 나무 잔가지를 주워다 팔았지요.
어린것이 제 어미 기침 소리만 들리면 벌떡 일어나 등허리를 쓸어주곤 했습니다.
"어머니, 조금만 참으세요. 제가 장에 나가 나무 팔아 약 지어올게요."
순덕은 창백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지요.
"아가, 약보다 네가 밥 한술 더 먹는 게 어미 약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제가 이야기할 때마다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가난한 집에서는 밥 한술도 사랑이고, 물 한 그릇도 효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만복의 집에도 관아 아전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사립문이 덜컹 열리고, 짚신에 흙을 잔뜩 묻힌 포졸 둘이 마당으로 들어섰지요. 뒤에는 세금 장부를 든 아전이 서 있었습니다.
"이 집이 김만복의 집이냐?"
만복이가 놀라 나무단을 내려놓고 대답했습니다.
"예, 제가 만복입니다."
아전은 장부를 손가락으로 탁탁 치며 말했답니다.
"네 죽은 아비가 남긴 환곡이 아직 석 섬이나 남았다. 내일까지 갚지 못하면 집안 살림을 관아로 가져가겠다."
만복은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석 섬이라니요. 그 집에는 쌀 한 되도 넉넉지 않았습니다. 순덕이 방 안에서 기침을 참으며 기어 나오듯 말했습니다.
"나리, 아이 아비가 죽은 뒤로 저희가 갚으려 애썼으나 흉년이 이어져 도무지 길이 없었습니다. 조금만 말미를 주십시오."
아전은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말미는 장부에 없소. 사또께서 엄히 명하셨으니 내일 관아로 나오시오."
그렇게 말하고는 마당 한쪽에 놓인 낡은 가마솥까지 눈여겨보고 돌아갔답니다. 만복이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꼭 쥐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날 밤, 초가 지붕 위로 찬바람이 스산하게 지나가고, 방 안에서는 어머니의 기침 소리만 콜록콜록 이어졌지요.
자, 여러분, 이제 이야기는 관아 마당으로 넘어갑니다. 돌처럼 굳은 사또 마음에 처음으로 금이 가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답니다.
※ 2. 어린 만복이 관아로 끌려오다
이튿날 아침이었습니다. 밤새 서리가 하얗게 내려 마당의 짚단이 은빛처럼 굳어 있었지요. 만복이는 낡은 저고리 앞섶에 작은 보자기를 꼭 품고 관아로 향했습니다. 그 안에는 어머니가 밤새 바느질해 받은 동전 몇 닢과, 만복이가 산에서 주워 판 나무값이 들어 있었답니다. 모두 합쳐도 환곡 석 섬에는 턱없이 모자랐지만, 아이는 그래도 빈손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걸음마다 발이 시렸습니다. 짚신 사이로 찬 기운이 스며들어 발가락이 얼얼했지만, 만복이는 울지 않았습니다. 울면 어머니가 더 아파할 것 같았거든요. 아이 마음이란 참 그렇습니다. 제 몸 아픈 것은 참아도, 어미 걱정할까 봐 눈물부터 숨기는 법이지요.
관아 앞에 이르니 벌써 여러 백성이 모여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닭장을 들고 왔고, 어떤 이는 베보자기를 안고 왔고, 어떤 늙은이는 낡은 놋그릇을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모두 세금 대신 내놓을 살림이었지요. 관아 마당 한가운데에는 형틀이 놓여 있었고, 포졸들은 긴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것만 보아도 백성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답니다.
조태문 사또는 동헌 마루에 앉아 있었습니다. 붉은 관복 자락이 마루 끝에 가지런히 내려와 있었고, 옆에는 이방과 호방이 장부를 펼쳐 들고 있었지요. 사또는 백성들을 하나하나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나라 곡식을 빌렸으면 갚는 것이 도리다. 사정이 딱하다 하여 모두 봐주면 관아는 무엇으로 나라 일을 하겠느냐."
말은 그럴듯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지요. 바른 말도 누구 입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칼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합니다. 조태문의 말은 백성을 살리는 약이 아니라, 이미 굶주린 백성의 가슴을 더 찌르는 칼이었답니다.
차례가 만복에게 왔습니다. 호방이 장부를 넘기다 말고 눈을 찌푸렸습니다.
"김만복, 죽은 김서방의 아들. 환곡 석 섬, 이자까지 더하여 넉 섬 반."
만복이는 마루 아래 엎드렸습니다. 작은 어깨가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처럼 떨렸지요.
"사또 나리, 저희 어머니가 병중이시라 오늘 다 갚지는 못했습니다. 여기 동전이 조금 있습니다. 제가 산에 가 나무를 더 해다 팔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이는 보자기를 풀어 마당에 내려놓았습니다. 동전 몇 닢이 딸그락 소리를 내며 흩어졌습니다. 그 소리가 왜 그리 처량했는지, 구경하던 백성들 몇몇은 고개를 돌렸답니다. 가난한 아이의 전 재산이 관아 마당에서 그렇게 작게 울린 것이지요.
조태문은 그 동전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습니다.
"이것으로 관아를 희롱하느냐?"
만복이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닙니다, 사또 나리. 저희 집에 지금 이것뿐입니다."
"집에 솥은 있느냐?"
그 물음에 만복이가 움찔했습니다.
"예, 작은 가마솥 하나가 있습니다. 어머니 죽이라도 끓여야 해서……."
사또는 차갑게 말했습니다.
"그 솥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집 문짝이라도 떼어다 팔아 갚아라. 나라 곡식은 눈물로 갚는 것이 아니다."
아이고, 이 대목을 말할 때마다 저는 속이 서늘해집니다. 솥이란 가난한 집에서는 그저 살림살이 하나가 아닙니다. 밥을 짓는 목숨줄이지요. 병든 어머니의 죽을 끓이는 솥을 빼앗겠다는 말은, 그 집의 숨을 끊겠다는 말과 다름없었습니다.
만복이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그러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습니다. 아이 눈에는 아직 눈물이 맺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무 놀라고 두려워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얼굴이었지요.
"사또 나리, 솥을 가져가시면 어머니는 무엇을 드십니까?"
조태문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산에서 나무를 한다지? 나무를 더 팔아 새 솥을 사면 될 일이다."
그 말에 마당 한쪽에서 누군가 작게 탄식했습니다. 포졸이 눈을 부라리자 백성들은 다시 고개를 숙였지요. 권세 앞에서는 탄식조차 죄가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만복이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앞으로 조금 기어 나왔습니다.
"사또 나리, 제가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밥은 굶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약 달일 솥만은 가져가지 말아주십시오."
조태문은 아이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얼굴에는 귀찮다는 빛이 스쳤지요.
"그만 물러가라. 포졸은 저 아이 집에 가서 솥과 쓸 만한 물건을 압류하라."
압류라는 말, 요즘에도 쓰지요. 빚이나 세금 때문에 재산을 억지로 거두어 가는 것입니다. 옛날 백성에게 그 말은 벼락 같은 소리였답니다.
포졸 둘이 만복의 팔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 순간 아이 품에서 작은 천주머니 하나가 툭 떨어졌습니다. 사또가 턱짓하자 이방이 주워 펼쳤습니다. 그 안에는 말라붙은 약초 몇 뿌리와 낡은 종이쪽지가 있었습니다. 종이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답니다.
'어머니 기침 멎게 하는 약값.'
그 글씨를 본 백성들 사이에서 낮은 흐느낌이 번졌습니다. 만복이는 그제야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아이의 눈가가 붉어지더니, 맑은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내려와 얼어붙은 마당 흙 위에 뚝 떨어졌습니다.
"사또 나리, 저는 나라 곡식이 무서운 줄 압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저는 누구에게 갚아야 합니까?"
그 말이었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큰소리도 아니고, 원망도 아니고, 그저 어린아이가 제 어미를 살려달라 한마디 한 것뿐인데, 그 말이 조태문의 가슴 한복판을 콕 찔렀답니다. 마치 오래 묻어두었던 기억의 문고리를 누가 조용히 잡아당긴 것처럼 말이지요.
※ 3. 눈물 한 방울이 사또의 마음을 찌르다
만복이의 눈물 한 방울이 흙 위에 떨어진 뒤, 동헌 마당에는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습니다. 바람도 잠시 숨을 죽인 듯했고, 포졸들의 몽둥이 끝도 움직이지 않았지요. 조태문 사또는 그대로 앉아 있었지만, 눈빛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남들은 알아채지 못했어도, 제가 이 이야기를 오래 들여다보니 알겠더군요. 사람 마음이 무너질 때는 큰 북소리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소리, 아이 눈물 떨어지는 소리 같은 것이 먼저 들리는 법이지요.
조태문은 아이를 보다가 문득 자기 어린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그도 본디 부잣집 자식은 아니었습니다. 어린 날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 자랐지요. 어머니는 남의 집 삯바느질을 하며 아들을 공부시켰답니다. 겨울밤이면 등잔 기름이 아까워 달빛 아래 책을 읽게 했고, 자신은 찬밥 한 술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아들에게는 따뜻한 죽을 밀어주곤 했습니다.
그때 어린 태문이 묻곤 했지요.
"어머니는 왜 안 드십니까?"
어머니는 늘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먹는 것만 보아도 배부르다."
허허, 어머니들은 어찌 그리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지요. 세월이 달라도, 집안 형편이 달라도, 자식 앞에서는 굶주림마저 숨기려 하십니다.
조태문이 과거 공부를 하던 어느 해 겨울, 그의 집에도 관아 아전이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밀린 세금을 내라며, 어머니가 아끼던 작은 가마솥을 가져가려 했지요. 어린 태문은 울며 매달렸습니다.
"그 솥은 안 됩니다. 어머니가 병중이십니다."
그때 어머니가 아전 앞에 엎드려 사정했습니다.
"아이만은 공부시켜야 합니다. 이 아이가 훗날 벼슬길에 오르면, 부디 백성 눈물 닦는 사람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 말이 조태문의 귀에 다시 살아났답니다. 오래전, 가난한 초가의 흙냄새와 어머니의 거친 손, 식은 죽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그 어머니의 소원을 등에 업고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이제는 남의 어머니 약 달일 솥을 빼앗으려 하고 있었던 겁니다.
조태문은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움켜쥐었습니다. 손등에 핏줄이 불끈 솟았지요. 이방이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사또, 어찌하오리까? 포졸을 보내 압류하게 하오리까?"
그 한마디가 조태문을 현실로 끌어냈습니다. 그는 만복을 다시 보았습니다. 아이는 여전히 엎드려 있었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습니다. 그 작은 등이 어찌나 가냘프던지, 마치 찬바람에 꺾일 듯한 보리싹 같았답니다.
조태문은 갑자기 목이 메었습니다. 하지만 사또 체면이라는 것이 있지요. 수많은 백성과 아전 앞에서 바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헛기침을 한번 했습니다.
"그 아이를 잠시 물러나게 하라."
이방은 사또가 마음을 누그러뜨린 줄도 모르고 얼른 말했습니다.
"예, 곧 포졸을 보내 집안 물건을 거두겠습니다."
그 말에 조태문이 눈을 번쩍 떴습니다.
"누가 그리하라 했느냐?"
마당이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이방은 얼어붙은 듯 고개를 숙였습니다.
"소인이 잘못 들었사옵니다."
조태문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습니다. 마루가 삐걱 소리를 냈지요. 그는 만복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백성들은 숨을 죽이고 보았습니다. 사또가 아이를 꾸짖을지, 아니면 형벌을 내릴지 아무도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태문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네 어미 병이 깊으냐?"
만복이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습니다.
"밤마다 기침을 하십니다. 피가 섞일 때도 있습니다."
"의원은 불렀느냐?"
"돈이 없어 약초만 달여 드렸습니다."
조태문은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귓가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습니다.
'태문아, 훗날 네가 높은 자리에 오르거든, 네 어린 날을 잊지 말거라.'
사람이 가장 무서운 것은 악해서가 아니라 잊어서인지도 모릅니다. 배고팠던 날을 잊고, 손 내밀던 사람을 잊고, 누군가의 은혜로 살았다는 사실을 잊을 때 마음이 굳어지는 것이지요.
조태문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습니다.
"호방은 장부를 가져오라. 이 아이 집의 환곡 내역을 내 눈앞에서 다시 읽어라."
호방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장부라는 것이 깨끗하면 왜 두렵겠습니까. 썩은 장부는 펼치는 순간 냄새가 나는 법이지요.
호방이 더듬거리며 장부를 펼쳤습니다.
"김서방에게 본래 빌려준 곡식은 한 섬이었사온데, 해마다 이자가 붙고, 보관료와 운반료가 더하여……."
"보관료? 운반료?"
조태문의 목소리가 차가워졌습니다.
"죽은 사람 집에 누가 곡식을 운반했단 말이냐? 병든 과부와 어린아이에게 무슨 보관료를 물렸느냐?"
호방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이방도 슬그머니 눈을 피했지요. 그제야 조태문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백성의 사정을 모르고 장부만 믿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 장부 뒤에 숨어 백성을 짓눌렀던 것입니다. 아전들은 사또의 욕심을 핑계 삼아 제 배를 채웠고, 사또는 아전들의 장부를 핑계 삼아 제 마음을 속였던 게지요.
만복이는 영문을 몰라 사또를 바라보았습니다. 조태문은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사또가 백성, 그것도 어린아이 눈높이에 맞추어 앉는다는 것은 당시로선 보기 드문 일이었습니다.
"아이야, 네 이름이 만복이라 했느냐?"
"예."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 어미 곁에 있어라. 관아에서 의원과 약을 보내겠다."
만복이 눈이 커졌습니다.
"정말이옵니까?"
조태문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작게 덧붙였답니다.
"그리고 그 솥은 아무도 가져가지 못한다."
그 순간 마당에 있던 백성들 사이로 아주 작은 숨소리가 퍼졌습니다. 안도의 숨이었지요.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사람이 마음 한번 약해졌다고 곧장 새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진짜 개과천선은 그다음 발걸음에서 드러나는 법입니다. 조태문 사또는 이제 처음으로 자기 손에 묻은 백성의 눈물을 들여다보게 되었답니다.
※ 4. 사또가 처음으로 장부를 들여다보다
그날 오후, 관아 동헌 안쪽 방에는 장부가 산처럼 쌓였습니다. 먼지 묻은 환곡 장부, 군포 장부, 부역 명단, 벌금 기록까지 줄줄이 끌려 나왔지요. 조태문은 평소 같았으면 이방과 호방에게 맡겨두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문서들을 직접 펼쳐 보았습니다. 종이마다 먹 글씨가 빽빽했는데, 그 글씨들이 어쩐지 백성의 한숨처럼 보였답니다.
여러분, 장부란 본디 바르게 쓰면 살림의 길잡이지만, 악한 자 손에 들어가면 사람을 묶는 올가미가 됩니다. 글자를 모르는 백성은 장부에 제 이름이 어떻게 적히는지도 모르고 당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니 아전들이 마음만 먹으면 한 섬을 두 섬으로 만들고, 한 해 이자를 세 해 이자로 불리는 일이 어렵지 않았답니다.
조태문이 만복의 집 기록을 다시 짚어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빌린 곡식은 분명 한 섬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김서방이 죽은 뒤에도 장부에는 마치 그가 살아서 해마다 곡식을 더 빌린 것처럼 적혀 있었지요. 죽은 사람 손도장을 누가 찍었겠습니까? 알고 보니 호방 밑에서 일하던 서리가 멋대로 손도장을 위조하고, 그 곡식을 중간에서 빼돌린 것이었습니다.
조태문은 장부를 탁 덮었습니다.
"호방을 불러라. 그리고 서리 박가도 함께 들라 하라."
잠시 뒤 호방과 박 서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둘 다 얼굴이 흙빛이었지요. 호방은 그래도 오래 관아 일을 한 사람이라 처음에는 능청을 떨었습니다.
"사또, 장부란 원래 복잡한 법이옵니다. 백성들이 제때 갚지 않아 이자가 불어난 것이지, 아전들이 어찌 감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태문이 장부 한 권을 그의 앞에 던졌습니다. 퍽, 하고 묵직한 소리가 났습니다.
"죽은 김서방이 지난해에도 곡식을 빌렸다고 적혀 있다. 죽은 자가 관아에 와서 손도장을 찍더냐?"
호방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박 서리는 아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소인이 잠시 눈이 어두워……."
"잠시?"
조태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습니다.
"네 잠시 눈먼 동안, 한 과부는 밤새 바느질을 했고 어린아이는 산에서 나무를 주웠다. 네가 빼돌린 곡식 한 말이 그 집에는 겨울 목숨이었다."
이 말을 하면서 조태문 자신도 가슴이 뜨끔했답니다. 왜냐하면 그 죄가 오로지 아전들만의 죄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윗사람이 욕심을 내니 아랫사람이 더 악해졌고, 사또가 백성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으니 아전들이 마음 놓고 백성의 눈물을 훔친 것이지요. 그는 그제야 알았습니다. 제 손으로 직접 때리지 않아도, 모른 척한 죄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날 저녁, 조태문은 관아 뒷마당을 혼자 걸었습니다. 해가 기울며 담장 그림자가 길게 누웠고, 감나무 마른 가지가 바람에 사각사각 흔들렸지요.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어머니가 마지막 병석에서 그의 손을 잡고 했던 말도 생각났습니다.
"태문아, 벼슬은 높은 데 앉는 자리가 아니라 낮은 데를 굽어보는 자리다."
그때는 그 말뜻을 다 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높아지면 낮은 데가 잘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조태문도 어느새 마루 위에서만 세상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게지요.
그는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습니다. 방 안 등잔불이 흔들릴 때마다 만복의 눈물이 떠올랐습니다. 흙 위에 뚝 떨어지던 그 눈물,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저는 누구에게 갚아야 합니까?" 하던 목소리 말입니다. 그 말은 빚을 탓하는 말도 아니요, 사또를 저주하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살고 싶다는 말, 어머니를 살리고 싶다는 말이었지요.
이튿날 새벽, 조태문은 관아의 종을 울리게 했습니다. 둥, 둥, 둥. 이른 아침 고을에 관아 종소리가 퍼지자 백성들은 놀라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무슨 큰 벌이라도 내리는가 싶어 두려워했지요.
조태문은 동헌 마루에 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관아 마당 한복판에 섰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그는 이방에게 명했습니다.
"오늘부터 사흘 동안, 환곡과 세금으로 억울함을 당한 자는 모두 관아로 나오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말고, 글을 몰라도 좋다. 입으로 말하면 내가 직접 듣겠다."
백성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눈물로 갚을 수 없다던 사또가, 오늘은 그 눈물을 듣겠다고 한 것입니다.
한 늙은 농부가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사또 나리, 사실대로 아뢰어도 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조태문은 잠시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또렷이 말했답니다.
"벌을 받아야 할 자가 있다면, 먼저 나부터다."
그 말이 마당에 떨어지자 백성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일었습니다. 이방과 호방은 사색이 되었고, 포졸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조태문의 얼굴은 전날과 달랐습니다. 아직 완전히 맑아진 얼굴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자신이 어둠 속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얼굴이었지요.
그때 저 멀리서 만복이가 어머니 손을 잡고 나타났습니다. 순덕은 의원이 보내준 약을 먹고 기운을 조금 차린 듯했으나, 여전히 몸이 약했습니다. 만복이는 어머니를 부축하며 관아 마당 가장자리에 섰습니다. 조태문은 그 모자를 보자 가슴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만복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이야, 네 눈물이 이 관아의 문을 열었다."
만복이는 무슨 뜻인지 몰라 어머니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순덕은 떨리는 손으로 아이 어깨를 감싸 안았지요.
자, 여러분, 여기서부터가 진짜 중요한 대목입니다. 뉘우침은 마음속에서 시작되지만, 세상을 바꾸려면 손과 발이 움직여야 합니다. 조태문 사또가 과연 말뿐인 후회에 머물렀을까요, 아니면 정말 백성 앞에 죗값을 치렀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장면에서 이어가 보겠습니다.
※ 5. 관아 창고의 문이 열리다
사흘 동안 관아 마당은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무서워 멀찍이 서 있기만 했지요. 어제까지 백성을 잡아들이던 관아가 하루아침에 억울함을 말하라 하니, 누가 선뜻 믿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늦게 열리는 것이 굳게 닫힌 관아 문이고, 그보다 더 늦게 열리는 것이 겁먹은 백성의 입이라 했답니다.
그런데 만복이 어머니 순덕이 먼저 나섰습니다. 여윈 몸을 만복이에게 기대고 마당 한가운데로 나와 조용히 절을 했지요.
"사또 나리, 저희 집 환곡 장부가 거짓이라 하셨으니, 죽은 아이 아비의 이름을 이제는 더럽히지 말아주십시오. 아이 아비는 가난했으나 남의 것 탐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 말이 어찌나 담담하던지, 오히려 듣는 이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답니다. 원망을 퍼붓지도 않고, 살려달라 울부짖지도 않고, 그저 죽은 남편의 이름 하나 깨끗이 해달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태문 사또는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 백성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늙은 농부는 말했습니다.
"소인은 한 섬을 빌렸는데 장부에는 세 섬이라 적혀 있사옵니다."
장터의 과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군포를 내라 하여, 어린 딸 혼수로 모아둔 베를 빼앗겼습니다."
군포라는 것은 본디 군역 대신 바치는 베나 돈을 말하지요. 그런데 죽은 사람에게까지 군포를 물렸다니, 참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사람의 욕심이란 산 사람의 등만 누르는 줄 알았더니, 죽은 사람 이름까지 붙들고 늘어진 게지요.
조태문은 말없이 들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그만하라" 소리쳤을 터인데, 이날은 달랐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말을 하나하나 장부와 대조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거짓이 드러날 때마다 그 옆에 붉은 먹으로 표시를 했답니다. 붉은 점이 늘어날수록 이방과 호방의 낯빛은 점점 창백해졌지요.
마침내 조태문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호방과 박 서리를 당장 잡아 가두어라."
포졸들이 달려들자 호방이 엎드려 빌었습니다.
"사또, 소인이 잘못했사옵니다. 허나 예전부터 내려오던 관례였사옵니다. 소인 혼자 한 일이 아니옵니다."
그 말에 조태문이 차갑게 웃었습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네 혼자 한 일이 아니다. 나 또한 눈감은 죄가 있다."
이 대목이 참 묵직합니다. 보통 탐관오리는 제 죄를 아랫사람에게 떠넘기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조태문은 그날 처음으로 제 죄를 입 밖에 냈습니다. 그 한마디가 백성들 귀에는 천둥처럼 들렸답니다.
곧이어 사또는 관아 창고로 향했습니다. 창고 문 앞에는 오래된 자물쇠가 매달려 있었고, 그 안에는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인 곡식과 베, 놋그릇, 농기구까지 쌓여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만복이네 집에서 가져가려던 가마솥과 비슷한 솥들도 있었지요. 누군가의 저녁밥이었고, 누군가의 약탕기였고, 누군가의 겨울 목숨이었답니다.
조태문이 열쇠를 받아 들고 잠시 멈추었습니다. 그의 손이 떨렸지요. 제가 보기엔 그 자물쇠는 창고 문에만 걸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태문 마음에도 걸려 있던 자물쇠였지요. 욕심과 체면과 무심함으로 잠가둔 문 말입니다.
철컥, 자물쇠가 열렸습니다. 삐걱, 창고 문이 양쪽으로 벌어졌습니다. 묵은 곡식 냄새와 먼지 냄새가 훅 밀려 나왔답니다.
조태문이 큰소리로 명했습니다.
"억울하게 거둔 곡식과 물건은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어라. 주인이 죽었으면 그 가족에게 주고, 가족마저 없으면 굶주린 이웃에게 나누어라. 오늘부터 관아 창고는 백성의 눈물로 채우지 않을 것이다."
그 말에 마당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습니다. 어떤 이는 땅에 엎드려 절했고, 어떤 이는 잃어버린 농기구를 품에 안고 울었습니다. 장터 과부는 빼앗겼던 베 한 필을 받아 들고 딸 이름을 부르며 울었지요.
만복이는 어머니 손을 잡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또가 만복이 앞으로 다가와 작은 쌀자루 하나와 약값이 든 주머니를 내밀었습니다.
"이것은 관아에서 네 집에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 어미에게 진 빚이다."
만복이는 두 손으로 받으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사또 나리, 어머니가 살 수 있으면 저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허허, 어린아이 입에서 나온 그 말에 조태문은 또 한 번 무너졌답니다. 사람을 벌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사람을 살리다 보면 제 마음도 함께 살아나는 법이지요.
※ 6. 돌을 맞을 각오로 백성 앞에 서다
관아 창고가 열린 뒤에도 조태문 사또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습니다. 곡식을 돌려주고 아전을 벌했다고 해서 지난 죄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제가 오래 야담을 보아오며 느낀 것이 있습니다. 벌은 겉일을 바로잡지만, 참회는 속사람을 바꾸는 법입니다. 조태문에게는 아직 그 참회의 문턱이 남아 있었답니다.
며칠 뒤, 그는 고을 백성들을 다시 관아 마당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이번에는 장부를 바로잡기 위해서도 아니고, 곡식을 나누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지나 싶어 조심조심 모여들었지요. 어떤 이는 아직도 사또를 믿지 못했고, 어떤 이는 혹여 변덕이 나서 다시 벌을 내릴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날 조태문은 관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비단 도포도 벗고, 수수한 무명옷 차림으로 마당에 섰습니다. 갓도 낮게 눌러쓰지 않았고, 손에는 부채도 들지 않았지요. 권세의 껍데기를 하나씩 벗어놓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백성들이 웅성거리자, 조태문이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이 고을에 온 뒤, 백성을 부모처럼 섬기지 못하고 장부 속 숫자로만 보았다. 굶주린 집의 솥을 빼앗으려 했고, 병든 어미의 약값마저 세금 앞에 하찮게 여겼다."
마당이 조용해졌습니다. 바람에 나뭇잎이 서걱이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지요.
"아전들이 죄를 지었다 하나, 그 죄가 자란 밭은 내 무심함이었다. 그러니 오늘 나는 이 자리에서 백성들에게 죄를 청한다."
그 말과 함께 조태문은 마당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또가 백성 앞에 무릎을 꿇다니,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숨을 삼켰답니다. 조선 시대 관아에서 수령은 하늘 같은 존재였습니다. 백성은 그 앞에 엎드리는 쪽이었지, 사또가 백성 앞에 엎드리는 일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었지요.
조태문은 이마를 땅에 대고 말했습니다.
"내게 원망이 있는 자는 말하라. 돌을 던지고 싶은 자는 던져도 좋다. 다만 오늘 이후로 내가 다시 백성을 울린다면, 그때는 하늘이 나를 벌할 것이다."
여러분이라면 그 자리에서 어찌하셨겠습니까? 집안 살림을 빼앗기고, 부모 약값을 빼앗기고, 억울한 세금에 시달렸다면 마음속에 쌓인 원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마당 한쪽에서 어떤 젊은이가 주먹만 한 흙덩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부역을 견디다 병들어 죽었다 했지요. 젊은이는 이를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았습니다.
"이 흙덩이 하나로 제 아버지가 돌아오겠습니까?"
그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소리였지요. 조태문은 고개를 들지 않았습니다.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더 큰 죄인이다."
젊은이는 한참 서 있다가 흙덩이를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툭,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는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그럼 살아 있는 사람이라도 살리십시오. 다시는 우리 같은 집 나오지 않게 하십시오."
그 말에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사또가 진심이면 앞으로를 보겠습니다."
또 다른 이가 말했습니다.
"굶는 집부터 살펴주십시오."
조태문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습니다. 눈가가 젖어 있었지요. 그는 다시 한 번 절했습니다.
"그리하겠다. 내 남은 벼슬길을 걸고 그리하겠다."
그날 이후 고을의 일이 하나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조태문은 매달 초하루마다 장터에 나가 백성의 말을 직접 들었습니다. 장터라는 곳이 물건만 오가는 곳이 아니지요. 소문도 오가고, 한숨도 오가고, 억울함도 오가는 곳입니다. 그는 장터 어귀에 작은 자리를 펴고 앉아 누구든 찾아오게 했답니다.
또 고을마다 굶주린 집 명단을 다시 만들게 했고, 병든 노인과 어린아이를 먼저 살피게 했습니다. 부역도 형편에 따라 나누게 했습니다. 홀어미 집, 병든 집, 어린아이만 있는 집은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했지요. 환곡 이자는 크게 줄이고, 거짓 장부에 이름이 오른 사람은 모두 지워주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모두가 믿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 마음에 난 상처는 하루아침에 아물지 않으니까요. 어떤 백성은 "저러다 말겠지" 했고, 어떤 이는 "높은 사람이 얼마나 가겠느냐" 수군거렸습니다. 저도 그 마음 이해합니다. 한 번 데인 사람은 식은 숭늉도 불어 먹는다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어도 조태문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름 장마 때는 무너진 다리를 먼저 고쳤고, 가을 추수 때는 관아 몫보다 백성 먹을 양식을 먼저 계산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는 관아 땔감을 줄여 홀몸 노인들에게 나누어 주었지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만복의 어머니 순덕은 어느 날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복아, 사람을 미워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용서하는 일이다. 그러나 더 어려운 것은 잘못한 사람이 끝까지 바뀌는 일이다. 저 사또가 끝까지 간다면, 네 눈물이 헛되지 않은 게다."
만복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린아이였지만, 그 말뜻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답니다. 자기 눈물 하나가 사또를 바꾸었다기보다, 그 눈물을 보고 자기 죄를 인정한 사또의 다음 걸음들이 고을을 바꾸고 있었던 것이지요.
※ 7. 탐관오리에서 청백리로
세월은 흘러도, 사람 마음에 깊이 새겨진 일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조태문 사또가 그 고을을 다스린 지 삼 년이 지나자, 고을 풍경은 예전과 달라졌답니다. 관아 앞을 지나던 백성들이 더는 고개만 푹 숙이고 달아나지 않았습니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문을 두드렸고, 굶주린 집이 있으면 이웃이 먼저 관아에 알렸지요. 두려움으로 닫혀 있던 고을 입들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조태문이 하루아침에 성인군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옛 버릇처럼 성을 내려 할 때도 있었고, 장부 숫자만 보고 판단하려는 마음이 고개를 들 때도 있었지요. 그럴 때마다 그는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둔 작은 물건 하나를 꺼내 보았습니다. 무엇이었느냐 하면, 만복이가 처음 관아에 가져왔던 낡은 천주머니였습니다. 그 안에는 이미 말라버린 약초 한 뿌리와, 삐뚤삐뚤한 글씨가 적힌 종이쪽지가 들어 있었답니다.
'어머니 기침 멎게 하는 약값.'
그 글귀를 볼 때마다 조태문은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내가 이 글을 잊으면 다시 짐승 같은 관리가 되는 것이다."
허허, 사람에게는 이렇게 자신을 붙들어 매는 작은 증표가 필요한 법입니다. 어떤 이는 부모의 유언이고, 어떤 이는 자식의 눈빛이고, 어떤 이는 남에게 받은 은혜 한 조각이지요. 조태문에게는 어린 만복이의 천주머니가 그런 물건이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 조태문에게 전근 명이 내려왔습니다. 다른 고을로 옮기라는 조정의 명이었지요.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이 관아 앞에 모였습니다. 예전 같으면 탐관오리 떠난다 하여 속으로 손뼉을 쳤을 터인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늙은 농부가 쌀 한 줌을 가져왔고, 장터 과부가 손수 짠 베 조각을 가져왔고, 아이들은 산에서 꺾은 들꽃을 들고 왔습니다.
조태문은 그 선물들을 보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나는 받을 자격이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뒤늦게 한 것뿐이다."
그러자 한 노인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사또, 늦게라도 사람 노릇 했으면 그것도 귀한 일입니다. 처음부터 곧은 사람도 좋지만, 굽었다가 바로 선 나무도 그늘은 드리우는 법이지요."
그 말이 참 좋지요. 저는 이 대목을 이야기할 때마다 잠시 쉬어갑니다. 우리네 삶도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나 한때는 욕심에 눈멀고, 체면에 갇히고, 남의 아픔을 못 본 척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돌아서서 남은 길을 바르게 걸을 수 있다면, 그 삶도 결코 버릴 삶은 아닌 게지요.
떠나는 날 아침, 만복이가 관아 앞에 섰습니다. 이제 만복이는 예전의 마른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순덕은 약을 먹고 차츰 기운을 회복했고, 만복이는 관아의 도움으로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답니다. 글 배우는 손끝이 야무지고, 눈빛이 반짝였지요.
만복이가 두 손으로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습니다.
"사또 나리, 어머니께서 드리라 하셨습니다."
조태문이 풀어보니, 그 안에는 새로 지은 작은 천주머니가 있었습니다. 바느질은 투박했지만 정성이 담겨 있었지요. 그 속에는 말린 감잎차와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종이에는 만복이가 배운 글씨로 또박또박 적어 놓았답니다.
'백성을 울리지 않는 사또가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조태문은 그 글을 읽고 끝내 눈물을 보였습니다. 이번에는 체면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만복 앞에 무릎을 굽혀 아이의 손을 잡았습니다.
"만복아, 네가 나를 살렸다. 네 눈물이 나를 사람으로 만들었다."
만복이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사또 나리, 제가 한 일은 울었던 것뿐입니다. 바뀌신 것은 사또 나리 마음입니다."
아이고, 어린아이가 어찌 저리 깊은 말을 했을까요. 때로는 아이의 말이 어른의 경전보다 더 깊습니다. 조태문은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새 임지로 떠났답니다.
그 뒤 조태문은 가는 고을마다 먼저 창고를 살피고, 다음에는 장부를 살피고, 마지막에는 백성의 얼굴을 살폈다고 합니다. 세금을 정할 때는 굶는 집이 없는지 물었고, 부역을 시킬 때는 병든 부모를 모시는 자가 없는지 먼저 확인했지요. 아전들이 부정한 장부를 꾸미려 하면 그는 만복이의 천주머니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것 앞에서 거짓을 말할 수 있겠느냐."
그 말 한마디에 아전들이 감히 장난을 치지 못했다 합니다. 세월이 흘러 조태문은 청백리로 이름이 났습니다. 청백리란 말 그대로 맑고 깨끗한 관리라는 뜻이지요. 처음부터 맑았던 사람이 아니라, 더러워진 마음을 씻어내고 끝내 맑아진 사람이었기에, 그의 이름은 더 오래 남았는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만복이는 자라서 글을 익히고, 고을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칠 때마다 이런 말을 했답니다.
"글은 남을 이기려 배우는 것이 아니다. 남의 눈물을 알아보려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 순덕은 오래오래 살며, 아들이 아이들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했다지요. 그 작은 초가에는 더 이상 관아 포졸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대신 아이들이 글 읽는 소리가 아침마다 낭랑하게 울렸답니다.
자, 이렇게 해서 백성을 핍박하던 사또가 어린아이의 눈물 한 방울로 마음을 고치고, 끝내 청백리로 살아간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권선징악이라 해서 꼭 악인이 벼락 맞아 죽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가장 큰 벌은 자기 죄를 똑바로 보는 것이고, 가장 큰 복은 그 죄를 갚으며 남은 생을 바르게 사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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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오늘 이야기 들으시며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사람은 한때 그릇될 수 있어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끝까지 갚아가면 다시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지요. 어린 만복이의 눈물이 사또를 바꾸었듯, 우리도 누군가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이야기 좋게 들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리며, 다음 야담광장에서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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