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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게 숨진 청렴한 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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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270자)
숙종 임금 시절, 충청도 청산현에 나귀 한 마리만 끌고 걸어서 부임한 현감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이정순. 그가 곳간 문을 열었을 때, 사백 석이라 적힌 가마니 속에는 모래와 겨가 들어 있었지요. 죽은 사람 이름으로 세를 물리고, 젖먹이를 장정으로 올려 군포를 걷던 자들. 그 비리를 낱낱이 적어 한양으로 향하던 밤, 그는 주막의 국 한 그릇을 받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흘 뒤 벼랑 아래에서 발견되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저승차사가 그의 명부를 펼쳤을 때, 이름 옆에는 아직 스물일곱 해가 남아 있었답니다.
※ 1: 걸어서 온 현감
충청도 땅 청산현이라는 조그만 고을에, 새 현감이 부임해 온다는 소문이 돌았지요.
그런데 고을 사람들은 도무지 반기는 기색이 없었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난 십 년 동안 이 고을 현감이 여섯 번이나 바뀌었는데, 오는 이마다 곳간 열쇠부터 챙기고는 이태를 못 넘기고 떠나 버렸거든요.
"이번엔 또 얼마나 긁어 가려나."
장터 국밥집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은 늙은이들이 혀를 끌끌 찼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해 삼월 초사흗날, 고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로 들어서는 행렬을 보고 사람들이 눈을 비볐답니다.
가마도 없고, 비단 깃발도 없고, 짐수레 하나 없었어요. 그저 늙은 나귀 한 마리에 낡은 궤짝 두 개가 얹혀 있고, 그 뒤로 무명 도포 차림의 사내 하나가 흙먼지를 밟으며 걸어 들어오는 겁니다. 나이는 서른아홉쯤. 몸은 대나무처럼 마르고 볼은 홀쭉한데, 눈매 하나가 유난히 맑았습니다.
새 현감 이정순이었습니다.
"아니, 현감 나리께서 걸어서 오신단 말이오?"
논둑에 서 있던 김 첨지가 저도 모르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굽히더니 이러는 겁니다.
"나귀는 늙었고 짐은 무겁고, 사람 다리는 아직 성하니 걷는 게 이치에 맞지요."
와, 이 한마디에 논둑에 서 있던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봤습니다. 이런 현감은 처음이었거든요.
관아에 들어서니 이방 최달구가 마당 한가운데 엎드려 있었습니다. 나이는 쉰 줄, 배는 장독만 하고 목소리는 기름을 바른 듯 미끄러웠지요.
"소인 이방 최달구, 나리를 뫼십니다. 변변찮으나 주안상을 차려 놓았습니다요."
동헌 대청에 차려진 상을 보고 이정순의 눈썹이 움찔했습니다. 통닭이 두 마리, 잉어찜에 산적에 약과에, 술병이 넷. 시골 고을 아전이 차릴 상이 아니었어요.
"이 상 하나에 쌀이 몇 말이나 들었소?"
"예? 그, 그야 뭐 대단찮은…"
"물리시오."
최달구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이정순은 저고리 소매를 걷더니 이렇게 말했지요.
"내 밥상은 보리밥에 나물 한 접시, 국 한 그릇이면 족하오. 앞으로도 그리하시오. 그리고 오늘 이 음식은 관아 문밖에 나가 늙은이들과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시오. 한 점도 남기지 말고."
'허, 첫날부터 유별을 떠는구나. 사흘이면 꺾일 것을.'
최달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습니다. 지금껏 현감이 여섯이나 왔지만, 처음엔 다들 그렇게 뻣뻣했거든요. 열흘이면 술상에 앉고, 한 달이면 은자 자루를 셌지요.
그런데 이 현감은 좀 달랐습니다.
그날 밤, 동헌에 불이 꺼지지 않았어요. 이정순은 문서고에서 장부를 끌어다 놓고 밤새 넘겼습니다. 호적 대장, 군적 대장, 그리고 환곡 장부까지요. 새벽닭이 울 무렵, 그는 붓을 놓고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숫자가 너무 곱다.'
장부라는 게 원래 지저분한 법이지요. 흉년이 들면 미납이 생기고, 사람이 죽으면 빈칸이 생기고, 그래서 여기저기 지운 자국이 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청산현 장부는 자로 잰 듯 맞아떨어졌어요. 환곡을 내준 것도 사백 석, 거둬들인 것도 이자까지 딱 맞아 사백육십 석. 십 년 치가 한 해도 어긋남 없이 딱딱 맞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고을이 어디 있나. 이건 살림이 좋은 게 아니라, 누군가 붓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튿날 새벽, 이정순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관아 곳간으로 갔습니다. 자물쇠를 열고 들어서니 가마니가 층층이 쌓여 있는데, 겉보기엔 그럴듯했어요. 그런데 손을 넣어 한 줌 쥐어 보니 손끝에 걸리는 게 쭉정이였습니다. 뒷줄 가마니를 헤쳐 보니 아예 속이 겨와 모래로 채워져 있었지요.
장부엔 사백 석. 실제로 사람 입에 들어갈 알곡은 잘해야 팔십 석이나 될까 말까였습니다.
이정순은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습니다. 곳간 문틈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와 먼지가 반짝반짝 떠다니는데, 그 사람 눈에는 그게 먼지가 아니라 사람들 목숨처럼 보였다지요.
곳간을 나와 관아 밖으로 걸어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담장 모퉁이에서 웬 할머니가 쪼그려 앉아 뭔가를 뜯고 있었어요. 가까이 가 보니 소나무 속껍질이었습니다.
"할머니, 그건 왜 뜯으시오."
"보릿고개 아니오. 손주 놈 죽이라도 쒀 먹여야지."
"관아에서 환곡을 내주지 않던가요?"
그러자 할머니가 이 빠진 입으로 웃었습니다. 그 웃음이 어찌나 서늘하던지요.
"내주지요. 열 말 빌리면 서른 말 갚으라 하지요. 우리 영감은 삼 년 전에 죽었는데,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영감 이름으로 환곡을 타 갔다고 종이가 날아왔다오. 죽은 사람이 무슨 재주로 쌀을 지고 갔겠소."
이정순의 손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관아로 돌아온 그는 최달구를 불러 세웠습니다.
"곳간에 알곡이 팔십 석뿐이오. 장부에는 사백 석이라 적혀 있고. 나머지 삼백이십 석은 어디로 갔소?"
최달구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쥐가 먹고 습기에 상하고, 그런 게 시골 곳간 인심입지요. 나리, 그런 건 어느 고을이나 다 그렇습니다요. 굳이 파고들면 나리 손만 더러워집니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보퉁이 하나를 대청 위에 올려놓는 겁니다. 매듭을 푸니 은자가 소복이 쌓여 있었어요.
"약소하지만 부임 축하올시다. 매달 이만큼씩은 아무 소리 없이 올라옵니다요. 나리께서는 그저 사냥이나 다니시고, 시나 읊으시고, 삼 년 뒤에 웃으며 떠나시면 됩니다."
동헌 마당에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이정순은 은자를 하나씩 세었습니다. 서른 냥, 예순 냥, 백 냥… 다 세고 나서 보퉁이를 도로 묶더니, 최달구 발밑으로 툭 밀어 놓았지요.
"백스무 냥이오. 소나무 껍질 뜯는 할멈 스무 집이 한 해를 넉넉히 날 돈이지. 이방."
"예."
"나는 사냥도 못 하고 시도 못 짓소. 할 줄 아는 게 셈밖에 없어요. 그러니 앞으로 석 달, 나는 이 고을 셈을 처음부터 다시 할 참이오."
최달구의 미끄럽던 얼굴에서 그제야 웃음이 걷혔습니다.
'이 양반, 그냥 두면 안 되겠구나.'
그날 밤 이방의 집 사랑방에 호장 박승만이 불려 왔고, 등잔불은 새벽까지 꺼지지 않았답니다.
※ 2: 두 개의 장부
그날부터 이정순 현감은 동헌에 앉아 있질 않았습니다.
새벽이면 짚신을 꿰고 나가서, 해가 져야 돌아왔어요. 아전 하나 데리고 다니지 않고 혼자서요. 논둑을 걷고, 초가집 마당에 들어가 앉고, 물레방앗간 앞에서 사람들과 담배를 나눠 피웠습니다.
처음엔 백성들도 입을 열지 않았지요. 괜히 말했다가 아전들한테 밟히는 걸 여러 번 봤으니까요. 그런데 열흘쯤 지나니 슬슬 말문이 트였습니다.
"나리, 저희 마을은 스무 집인데 군포를 서른두 명 몫으로 뭅니다요."
"서른두 명? 사내가 서른둘이나 되오?"
"어른 사내는 열넷입니다. 나머지 열여덟은… 죽은 사람 여섯에, 아직 젖도 안 뗀 갓난쟁이가 다섯이고, 나머지는 아예 있지도 않은 이름입지요."
죽은 사람에게 세를 물리는 걸 백골징포라 하고, 강보에 싼 아기를 장정으로 올려놓는 걸 황구첨정이라 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그 일이 이 작은 고을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이정순은 그 자리에서 종이를 꺼내 이름을 적었습니다. 스무 집, 서른두 명, 어긋난 열여덟. 그렇게 마을마다 돌면서 적어 나갔지요. 스무 날쯤 지나자 그 종이가 두툼한 뭉치가 되었습니다.
'모으면 모을수록 이상하다. 이건 이방 하나가 삼키기엔 너무 큰 덩어리다.'
그도 그럴 것이, 청산현에서 사라진 곡식과 무명이 십 년 치를 합치면 수천 석 어치였거든요. 한 고을 아전이 그 많은 걸 어디다 쌓아 두겠습니까. 어딘가로 흘러 나가는 물길이 따로 있다는 뜻이었지요.
그 물길을 알려 준 건 뜻밖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비 오는 밤이었어요. 이정순이 등잔 밑에서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문밖에서 기척이 났습니다. 문을 여니 관아 부엌일을 하는 여종 향이가 비를 쫄딱 맞은 채 서 있었습니다. 열아홉이나 됐을까요. 어깨가 사시나무처럼 떨렸습니다.
"나리… 소인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무슨 소리요. 우선 들어와 몸부터 녹이시오."
향이는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서 한참을 울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 년 전에 오신 현감 나리께서도… 나리처럼 장부를 뒤지셨습니다. 그러다 두 달 만에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그 전 나리는 말에서 떨어져 돌아가셨고요. 소인은 그때 부엌에서 다 봤습니다. 나리께 올라간 마지막 밥상을요."
이정순의 등줄기가 서늘해졌습니다.
"향이야. 밥상에 뭐가 있었느냐."
"…소인은 모릅니다. 다만 그날은 이방 어른이 손수 상을 보셨습니다.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요."
향이는 소맷자락에서 꼬깃꼬깃한 종이 한 장을 꺼냈습니다. 짐수레에 실린 물목을 적은 쪽지였어요. 쌀 몇 석, 무명 몇 필, 그리고 그 아래 적힌 글자가 눈을 찔렀습니다. 감영, 그리고 도사 윤사겸.
"해마다 두 번, 그믐밤에 짐수레가 여섯 대씩 나갑니다. 감영으로 간다고들 하는데, 소인 같은 것들은 문밖으로 못 나가게 하지요."
"이걸 왜 내게 주느냐. 네 목숨이 위태로울 텐데."
향이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습니다.
"작년에 소인 아비가 굶어 죽었습니다. 곳간에 쌀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요. 나리께서 관아 음식을 문밖 사람들에게 나눠 주시던 날, 소인 어미가 그 국을 받아 마시고 사흘을 더 살았습니다. 그거면 됐습니다요."
그날 밤, 이정순은 문서고 뒤 헛간의 마루청을 뜯었습니다. 향이가 일러 준 자리였지요. 거기 기름 먹인 보자기에 싸인 장부가 한 궤짝 들어 있었습니다.
진짜 장부였습니다.
겉장부엔 사백 석, 속장부엔 팔십 석. 겉장부엔 이자 두 할, 속장부엔 다섯 할. 그리고 맨 뒷장에는 해마다 감영으로 올려보낸 액수가 붉은 글씨로 적혀 있었고, 그 옆에 도장이 찍혀 있었어요. 이방 최달구, 호장 박승만, 그리고 감영 도사 윤사겸의 인장까지요.
이정순은 밤을 꼬박 새워 그 장부를 베꼈습니다. 손가락에 쥐가 나서 붓을 놓쳤다가 다시 잡기를 몇 번이나 했지요. 새벽닭이 울 때 필사본을 궤짝에 넣고, 원본은 있던 자리에 감쪽같이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제 이걸 어디로 보내느냐가 문제다. 감영으로 보내면 도둑에게 도둑을 잡아 달라 하는 꼴이지.'
며칠 뒤, 최달구가 동헌에 찾아왔습니다. 이번엔 은자가 아니라 문서 한 장을 들고요.
"나리, 감영 도사 어른께서 나리를 좋게 보셨답니다. 내년에 큰 고을로 옮겨 주시겠다는 언질이 있었습니다요. 사람 팔자란 게 줄을 잘 서야 피는 법 아니겠습니까."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나리."
최달구의 목소리가 낮아졌습니다.
"이 고을에 오셨던 현감 나리 세 분이 어떻게 되셨는지 아십니까. 한 분은 낙마, 한 분은 급한 병, 한 분은 물에 빠지셨지요. 시골 인심이 참 사납습니다요. 부인마님도 계시고 어린 도련님도 계신데,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이정순은 붓을 놓고 최달구를 똑바로 쳐다봤습니다.
"이방. 나는 오늘 아침에 열두 살 먹은 아이가 흙을 퍼먹는 걸 봤소. 흙이오. 그 아이 앞에서 내가 몸조심을 하면,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오."
그날 밤, 이정순은 안방에 들어가 부인 유씨와 마주 앉았습니다. 열세 살 난 아들 인석이도 곁에 앉혔지요.
"부인. 내가 사나흘 안에 한양에 다녀와야겠소."
부인의 손이 바느질하던 옷고름을 꼭 쥐었습니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 이미 알고 있었거든요.
"…꼭 나리께서 가셔야 합니까."
"고을 원이 고을 도둑을 못 잡으면, 그 원은 도둑의 발판이오."
이정순은 아들을 불러 앉히고 필사한 장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인석아. 이 궤짝은 오늘 밤에 향교 뒤 은행나무 아래 묻을 것이다. 항아리에 넣어 석 자 깊이로 묻는다. 아비가 돌아오면 같이 파낼 것이고, 혹여 아비가 못 돌아오거든…"
"아버지."
"끝까지 들어라. 아비가 못 돌아오거든, 너는 이걸 파내지 말고 그냥 두어라. 네가 어른이 되어 이 종이를 들고 갈 곳이 생겼을 때, 그때 파내거라. 알겠느냐."
인석이는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밖에서는 늦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빗소리 사이로, 담장 밖에서 누군가 조용히 발길을 돌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이정순은 미처 듣지 못했지요.
그날 밤 이방의 집 사랑방에는 처음 보는 사내 둘이 들어와 앉았습니다. 손등에 칼자국이 있고 말수가 지독히 없는 자들이었답니다.
※ 3: 회덕 고개의 국 한 그릇
사흘 뒤 새벽이었습니다.
이정순은 낡은 도포 위에 삿갓을 눌러쓰고 마당에 섰습니다. 등에는 봇짐 하나, 그 안에는 밤새 쓴 상소문과 장부 필사본 가운데 요긴한 대목만 골라 옮긴 종이 뭉치가 들어 있었지요. 진짜 궤짝은 이미 향교 뒤 은행나무 아래 땅속에 있었고요.
부인 유씨가 대문간까지 따라 나와 옷고름을 여며 주었습니다.
"길에서 아무 데서나 잡숫지 마세요."
"허허, 내가 어린애요?"
"…어린애만도 못하십니다. 사람을 너무 믿으셔요."
이정순이 껄껄 웃었습니다. 그런데 웃고 나서 부인의 손을 한참 잡고 있었답니다. 평소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요.
"인석아."
"예, 아버지."
"어미 잘 모시고 있어라. 아비가 열흘 안에 돌아오마."
인석이는 아버지 뒷모습이 안개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사립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 열세 살 아이가 그때는 몰랐지요. 그게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는 마지막 아침이었다는 것을요.
한양 가는 길은 사흘 걸음이었습니다. 이정순은 큰길을 피해 산길로 돌았어요. 사람 눈에 띄지 않으려고요. 그런데 아무리 조심을 해도, 그 사람 뒤에는 이미 그림자 둘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틀째 되던 날 저녁, 회덕 고개 아래 주막에 닿았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밤이었지요. 방이 하나뿐이라 봉놋방에 나그네 네댓이 뒤엉켜 자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손님, 옷이 다 젖으셨네. 탁주 한 사발 하시구려. 몸이 확 풀립니다."
주모가 김이 오르는 술사발을 내밀었습니다. 이정순은 손을 저었습니다.
"나는 술을 못 하오. 뜨끈한 국이나 한 그릇 주시오."
주모의 눈이 잠깐 흔들렸습니다. 잠시 후 나온 국은 시래깃국이었어요. 구수한 냄새가 방 안에 퍼졌습니다. 이정순은 하루 종일 산길을 걸어 시장하던 참이라 국그릇을 들었지요.
한 숟갈, 두 숟갈…
세 숟갈째에 목구멍이 싸하게 아렸습니다.
'…쓰다.'
이정순은 숟가락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봉놋방 구석에 앉아 있는 두 사내를 보았어요. 벙거지를 눌러쓰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앉아 있던 자들입니다. 손등에 칼자국이 있었지요. 그 자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정순은 천천히 일어섰습니다.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어요. 그래도 봇짐을 챙겨 문지방을 넘었습니다. 마당에 나서니 빗줄기가 얼굴을 때렸습니다.
"어디 가시오, 현감 나리."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정순은 돌아보지 않고 걸었습니다. 걷다가 무릎이 꺾여 진흙탕에 손을 짚었어요. 숨이 가빠지고 눈앞이 노랗게 물결쳤습니다.
'아직은 안 된다. 아직은…'
그 사람은 기어서 갔습니다. 진짜로요. 손톱에 흙이 박히도록 진흙바닥을 긁으며, 고갯길 쪽으로요.
사내 둘이 느긋하게 따라와 봇짐을 낚아챘습니다. 안에 든 종이 뭉치를 꺼내 등불에 비춰 보더니 하나가 픽 웃었습니다.
"이거로구먼. 이방 어른 말씀대로 종이가 다요."
"그 양반, 참 미련하지. 은자 백 냥 받고 눈 한 번 감으면 될 것을."
그들은 종이를 그 자리에서 불살랐습니다. 젖은 종이가 지글지글 타면서 재가 빗물에 씻겨 내려갔지요. 이정순은 그 불빛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저건 종이일 뿐이다. 진짜는 은행나무 아래 있다. 인석아, 부디…'
그때 등 뒤에서 억센 손이 그의 뒷덜미를 잡았습니다.
이정순의 몸은 이튿날 아침, 회덕 고개 아래 벼랑 밑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곁에는 안장이 벗겨진 말 한 마리가 다리를 절며 서 있었고요. 관가에서는 사흘 만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청산 현감 이정순, 야반에 산길을 가다 말에서 떨어져 죽다.
부고를 받은 부인 유씨는 그 자리에서 혼절했습니다. 인석이는 울지 않았어요. 울지도 않고, 아버지 시신 앞에 사흘을 꼬박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아이가 넋이 나갔다고 수군거렸지요.
장례 날, 관아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방도 호장도 감영에 볼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았어요. 그런데 상엿소리가 울리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소나무 껍질을 뜯던 할머니도 왔고, 지팡이를 끌며 김 첨지도 왔고, 부엌데기 향이도 뒷전에 서서 소맷자락으로 눈을 꾹 눌렀지요. 부임한 지 겨우 두 달 된 원님의 상여를 따라 백여 명이 십 리 길을 걸었답니다. 그런 일은 청산현이 생긴 이래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으면 이건 그냥 슬픈 이야기일 뿐이겠지요.
이정순의 혼이 자기 몸에서 빠져나온 건 벼랑 아래에서였습니다. 그는 자기 몸이 진흙에 처박혀 있는 걸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이상하게도 아프지가 않았습니다. 그저 억울했지요. 억울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이정순."
빗속에서 목소리가 났습니다.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검은 도포에 검은 갓을 쓴 사내가 서 있었습니다. 비를 맞는데도 옷이 젖지 않았어요. 얼굴은 창백하고 눈은 깊었습니다. 손에는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 있었지요.
"저승차사 현우요. 갈 시간이오."
"…나는 못 가오."
"가기 싫은 사람은 여태 하나도 없었소. 그래도 다들 갔소이다."
이정순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차사님. 나는 억울해서 못 가는 게 아니오. 아니, 억울하긴 하오. 그런데 그것보다…"
그가 산 아래를 가리켰습니다. 빗속 저 아래, 청산현 마을에서 불빛이 몇 점 깜빡이고 있었습니다.
"저 아래 사백 집이 있소. 올봄에 벌써 아홉이 굶어 죽었소. 곳간엔 쌀이 있는데도 말이오. 내가 지금 가 버리면 저 도둑놈들은 새 현감을 또 갈아 치우고, 또 십 년을 파먹을 거요. 나 하나 죽는 건 상관없소. 그런데 저 사람들은 어쩌란 말이오."
저승차사 현우는 말없이 두루마리를 폈습니다. 명부를 확인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두루마리를 내려다보던 그의 눈썹이 처음으로 움찔했습니다.
"…이상하군."
"뭐가 말이오."
"당신 이름 옆에 적힌 햇수가."
현우가 두루마리를 접으며 나직이 말했습니다.
"이건 내 손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오. 따라오시오. 위에서 직접 보셔야 할 물건이오."
그러고는 지팡이로 땅을 한 번 쳤습니다. 빗속에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더니, 진흙길이 사라지고 잿빛 벌판 하나가 끝도 없이 펼쳐졌습니다.
이정순의 저승길 첫걸음이었습니다.
※ 4: 스물일곱 해가 남은 명부
잿빛 벌판이었습니다.
하늘도 잿빛, 땅도 잿빛, 발밑에는 마른 억새가 끝도 없이 흔들리는데 바람 소리는 나지 않았어요. 이정순은 그 길을 걸으면서 이상한 걸 느꼈습니다. 배가 고프지도 않고, 다리가 아프지도 않고, 비에 젖었던 도포도 어느새 말라 있었지요.
"차사님. 여기가 어디요."
"황천 초입이오."
앞서 걷던 저승차사 현우가 짧게 답했습니다. 걸음이 어찌나 조용한지 억새 한 포기 스치는 소리도 나지 않았어요.
한참을 걸으니 저 앞에 시커먼 문이 하나 서 있었습니다. 담장도 없이 문만 덜렁 서 있는데, 그 문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지요. 늙은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고, 갓난아이를 안은 아낙도 있었습니다. 다들 표정이 멍했어요.
이정순은 줄 끝에 서면서 앞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노인장, 어디서 오셨소."
"…경상도 상주요. 자다가 왔소이다. 여든둘이니 갈 때가 됐지."
노인은 담담했습니다. 그런데 이정순은 담담해지지가 않았어요. 가슴 한복판에서 뜨거운 게 자꾸 치밀어 올랐습니다.
'나는 서른아홉이다. 자다가 온 것도 아니고, 병들어 온 것도 아니다. 국 한 그릇 때문에 왔다. 이게 어찌 담담할 일인가.'
문 안쪽에는 커다란 청사 하나가 있었고, 그 한가운데 붉은 관복을 입은 판관이 앉아 있었습니다. 수염이 허옇고 눈이 매서운 어른이었지요. 앞에는 사람 키만 한 장부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다음."
이정순이 앞으로 나섰습니다. 현우가 두루마리를 내밀며 나직이 말했습니다.
"조선국 충청도 청산현 현감 이정순, 서른아홉. 그런데 판관 어른, 명부를 다시 한번 보셔야겠습니다."
판관이 붓을 들어 장부를 훑었습니다. 그러다 손이 멈췄어요. 다시 한번 훑고, 또 한 번 훑고, 결국 안경을 고쳐 쓰고 얼굴을 바짝 들이댔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이정순의 정명은 예순여섯이다. 아직 스물일곱 해가 남았어."
청사 안이 술렁였습니다. 서기들이 붓을 놓고 고개를 들었지요.
저승에서는 사람이 언제 오느냐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그걸 정명이라고 하지요. 병이 들어도 정명이 남았으면 살아나고, 멀쩡해도 정명이 다하면 가는 겁니다. 그런데 정명이 스물일곱 해나 남은 사람이 명부에 이름도 없이 저승 문 앞에 서 있다는 건, 하나뿐입니다.
누군가 손을 댔다는 뜻이지요.
판관이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차사. 이 사람이 어떻게 왔느냐."
"회덕 고개 아래 주막에서 국을 한 그릇 먹었습니다. 국에 초오 뿌리를 곱게 갈아 넣었더군요. 사람 손에 죽었습니다. 그것도 사주한 자가 있습니다."
"…이건 내 선에서 마름질할 일이 아니다. 대왕께 올려라."
그리하여 이정순은 저승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요. 검은 돌기둥이 하늘까지 솟은 커다란 전각이 나타났습니다. 기둥마다 등이 걸려 있는데, 그 등불이 사람 숨소리처럼 일렁였어요.
그 한가운데, 염라대왕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정순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서워서가 아니었어요. 그 앞에 서니 자기가 살아온 서른아홉 해가 전부 훤히 비쳐 보이는 것 같았거든요. 어릴 적 남의 참외밭에서 참외 하나 서리한 것까지도요.
"이정순."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울렸습니다.
"네 죄부를 가져오너라."
서기가 두 권을 들고 왔습니다. 하나는 죄를 적는 죄부, 하나는 공을 적는 공덕부였지요. 죄부를 펼치자 몇 줄이 있었습니다. 참외 서리 한 번, 젊은 시절 술김에 벗과 주먹다짐 한 번, 벼슬살이 중에 아내에게 모진 말 한 번.
염라대왕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습니다.
"고작 이것뿐이냐."
이번엔 공덕부를 펼쳤습니다. 그런데 이게 참 신기하지요. 이정순 자신도 잊고 있던 일들이 빼곡히 적혀 있는 겁니다.
과거 급제하고 받은 첫 녹봉을 다리 놓는 데 보탠 일. 흉년에 자기 집 곡식 스무 섬을 이웃에 나눈 일. 관아 음식을 문밖 늙은이들에게 내준 일. 그리고 맨 끝에 붉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은자 백스무 냥을 받지 아니하고 되돌려준 일. 그 돈으로 목숨을 이었을 스무 집.
염라대왕이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물었습니다.
"이정순. 너는 네가 왜 죽었는지 아느냐."
"압니다. 청산현 이방 최달구와 호장 박승만이 사람을 시켰고, 그 뒤에는 충청 감영 도사 윤사겸이 있습니다."
"그렇다. 저들은 네 정명을 스물일곱 해나 훔쳤다. 저승 법에 이런 걸 명 도둑이라 하여, 도적 중에 가장 무거운 도적으로 친다. 하여 묻겠다."
전각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원하면 저들의 명을 당장 걷어 오마. 오늘 밤 셋이 다 피를 토하고 죽게 할 수도 있다."
이정순은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속이 시원하겠지. 나도 사람인데 왜 안 그렇겠나. 그런데…'
그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대왕님. 저 셋이 오늘 밤에 급사하면, 사람들은 뭐라 하겠습니까. 아이고 아까운 사람들 갔다, 하겠지요. 그자들이 십 년 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는 땅속에 그대로 묻힙니다. 곳간은 여전히 잠겨 있고, 백성들은 여전히 소나무 껍질을 뜯을 겁니다."
"…그러면?"
"저는 저들이 죽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저들이 제 입으로 자백하기를 원합니다. 온 고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요. 그래서 저 곳간 문이 열리기를 원합니다. 제 원한을 푸는 것보다 그게 먼저입니다."
염라대왕이 오래도록 이정순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저승은 산 사람의 일에 직접 손을 대지 못한다. 그것이 법이다."
"…그럼 방도가 없습니까."
"다만."
염라대왕이 손을 들어 올렸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들어 있는 것을, 그 사람 눈앞에 비춰 보이는 것은 할 수 있다. 죄지은 자의 마음에는 언제나 그 죄가 살아 있으니, 그건 없는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있는 것을 꺼내는 일이니라."
이정순의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차사 현우는 들어라. 이정순에게 사흘 말미를 준다. 오늘 밤부터 사흘, 이승의 어둠이 내린 동안만이다. 손을 대서는 안 되고, 말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오직 저들의 마음에 있는 것을 비추어라. 사흘째 새벽닭이 울면 반드시 돌아와야 하느니라."
"명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정순은 다시 잿빛 벌판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이번엔 오는 길이 아니라 가는 길이었지요.
벌판 끝에서 현우가 처음으로 살짝 웃었습니다.
"현감. 나는 이 일을 오백 년 했소이다. 그런데 대왕 앞에서 자기 원수 살려 달라는 사람은 처음 보오."
"살려 달라 한 적 없소이다. 죽는 것보다 무서운 걸 주십사 했지."
이정순의 도포 자락이 저승 바람에 펄럭였습니다.
이승은 마침 초승달도 없는 그믐밤이었습니다.
※ 5: 사흘 밤의 손님
첫째 날 밤이었습니다.
청산현 이방 최달구는 그날도 사랑방에서 술상을 받았습니다. 현감이 죽고 나서 마음이 아주 편해졌거든요. 은자 자루를 세다가 그대로 베개에 머리를 묻었지요.
그런데 잠이 들자마자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그락, 사그락. 곡식 쏟아지는 소리였어요.
눈을 떠 보니 자기가 관아 곳간 한가운데 서 있는 겁니다. 가마니가 층층이 쌓여 있는데, 그 가마니들이 저절로 터지면서 안에 든 게 쏟아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쏟아지는 게 쌀이 아니었습니다.
모래였습니다. 겨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래 속에서 사람 손이 하나둘 올라오는 겁니다.
"…아, 아니."
최달구는 뒷걸음질 쳤습니다. 모래 더미에서 늙은이가 일어나고, 아낙이 일어나고, 젖먹이를 안은 여자가 일어났어요. 하나같이 볼이 홀쭉하고 배만 불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굶어 죽은 사람들이었지요.
"이방 어른, 우리 몫은 어디 있소."
"열 말 빌려 서른 말 갚았는데, 그 스무 말은 어디 있소."
최달구는 비명을 지르며 곳간 문으로 달려갔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니 마당인데, 마당 한가운데 사람 하나가 서 있었어요.
젖은 도포에 삿갓을 쓴 사내였습니다. 비도 안 오는데 그 사람 옷에서만 물이 뚝뚝 떨어졌지요.
"…나, 나리."
이정순이었습니다.
"이방."
"소, 소인은 아무것도 모릅니다요. 소인은 그저 시키는 대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이정순은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달구의 입이 저절로 움직이는 겁니다.
"초오 뿌리는 소인이 구한 게 아니라 호장 어른이! 사람 둘도 호장 어른이 붙였고! 그, 그리고 감영에는 해마다 그믐에 여섯 수레씩…"
말하다가 제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습니다.
이정순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보시오. 내가 시킨 게 아니오. 그건 원래 이방 마음속에 있던 말이오. 나는 다만 거기 등불을 하나 켰을 뿐이오."
최달구는 이불 위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요. 등잔은 꺼져 있었고, 방 안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방바닥에 모래가 한 줌 흩어져 있었답니다.
둘째 날 밤이었습니다.
호장 박승만은 그날 술을 대여섯 병이나 마셨습니다. 최달구가 낮에 찾아와 벌벌 떨며 꿈 이야기를 했거든요.
"헛것을 봤으면 굿을 하든가 할 것이지, 사내대장부가 무슨 추태요!"
큰소리는 쳤지만 박승만도 속이 편치 않았습니다. 술기운에 겨우 눈을 붙였는데, 이번엔 꿈도 아니었어요.
한밤중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쿵, 쿵, 쿵.
"게 누구냐!"
문을 열었더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 문을 닫으니 또 쿵, 쿵, 쿵. 세 번을 그러다 네 번째에 문을 확 열었더니, 마당 가득 사람들이 서 있는 겁니다. 삿갓 쓴 이정순이 맨 앞에 있었고요.
박승만은 그때부터 정신이 온전치 못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장터 한복판에 웬 사내가 맨발로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장 박승만이었어요. 상투가 풀려 산발이 되고 눈이 뒤집혔는데, 입에서 나오는 말이 기가 막혔습니다.
"내가 그랬다! 회덕 고개 주막 주모한테 은자 스무 냥 줬다! 술에 못 타면 국에 타라고 내가 그랬다! 현감 나리 벼랑에 굴린 것도 내 사람이다!"
장터가 얼어붙었습니다. 콩나물 팔던 아낙이 대야를 떨어뜨렸고, 엿장수 가위가 뚝 멈췄지요.
"윤 도사 어른이 다 아신다! 해마다 여섯 수레! 여섯 수레!"
아전들이 달려와 박승만의 입을 틀어막고 끌고 갔지만, 이미 장터에 있던 백 명이 넘는 사람이 그 소리를 다 들은 뒤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장터 한구석에, 패랭이를 눌러쓴 나그네 하나가 조용히 국밥을 먹고 있었어요. 사흘 전부터 청산현을 어슬렁거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국밥값을 놓고 일어서면서 봇짐 속 마패를 한 번 매만졌지요.
암행어사 심규영이었습니다.
셋째 날 밤이었습니다.
이정순에게 남은 마지막 밤이었지요. 그는 이날 밤, 관아로 가지 않았습니다. 자기 집으로 갔어요.
부인 유씨는 상복을 입은 채 바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잠든 아들 인석이 머리맡에서요. 이정순은 문지방 앞에 서서 한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들어가지는 못했어요. 산 사람 곁에 너무 가까이 가면 정이 붙어 못 떠난다고, 현우가 일러 주었거든요.
'부인. 미안하오. 참으로 미안하오.'
그러고는 잠든 아들 곁으로 갔습니다.
인석이의 꿈속에서, 아버지는 예전처럼 웃고 있었습니다.
"인석아. 아비다."
"아버지!"
아이가 달려와 도포 자락을 붙잡았습니다. 이정순은 아들의 머리를 쓸어 주었어요. 손이 닿지 않는데도 아이는 그걸 느꼈다고 합니다.
"울지 마라. 아비는 잘 있다. 그보다 인석아, 아비가 뭐라 했더냐."
"…어른이 되어 갈 곳이 생기거든 파내라 하셨습니다."
"그 갈 곳이 왔다. 오늘이다."
"오늘요?"
"내일 아침, 장터에 패랭이 쓴 나그네가 국밥을 먹고 있을 것이다. 왼쪽 눈썹 위에 작은 흉터가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 앞에 가서 절하고 이리 말하여라. 우리 아버지가 목숨과 바꾼 물건이 있습니다, 하고."
인석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아버지, 안 가시면 안 됩니까."
이정순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인석아. 아비는 네 곁을 떠나는 게 아니라, 조금 먼 데로 벼슬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거라. 그리고 이 말은 꼭 기억해라. 사람이 벼슬을 하는 건 남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먹이기 위해서다. 알겠느냐."
멀리서 첫닭이 울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열세 살 인석이는 삽을 들고 향교 뒤 은행나무로 갔습니다. 석 자를 파 내려가니 항아리 주둥이가 나왔지요. 기름 먹인 보자기에 싸인 궤짝, 그 안에 아버지가 밤을 새워 베낀 두 개의 장부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습니다.
아이는 그 궤짝을 안고 장터로 뛰었습니다.
패랭이 쓴 나그네가 국밥집 앞에 앉아 있었어요. 왼쪽 눈썹 위에 작은 흉터가 있었습니다.
인석이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목숨과 바꾼 물건이 있습니다."
※ 6: 나누어 준 스물일곱 해
그날 오시, 청산현 관아 앞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암행어사 출도야!"
역졸들이 육모방망이를 들고 삼문을 부수며 들이닥쳤습니다. 마패가 햇빛에 번쩍 하고 들리는 순간, 동헌 마루에 앉아 있던 이방 최달구가 그대로 오줌을 지렸다고 하지요.
암행어사 심규영은 곧장 곳간부터 열게 했습니다. 자물쇠를 부수고 가마니를 갈랐더니, 어사가 보는 앞에서 모래와 겨가 좌르르 쏟아졌습니다. 뒤에서 지켜보던 백성들 사이에서 곡소리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어요.
"장부를 대령하라."
관아 장부를 펼쳐 놓고, 그 옆에 인석이가 가져온 궤짝 속 장부를 나란히 폈습니다. 겉장부와 속장부. 사백 석과 팔십 석. 두 할과 다섯 할. 그리고 맨 뒷장, 붉은 글씨로 적힌 감영 상납 내역과 세 개의 인장.
심규영은 그 마지막 장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습니다.
"…죽은 사람이 이렇게 꼼꼼할 수도 있구나."
닷새 만에 모든 게 드러났습니다. 최달구는 매 세 대에 다 불었어요. 회덕 고개 주막 주모가 잡혀 와 초오 뿌리를 판 약재상까지 나왔고, 사내 둘도 상주 땅에서 붙잡혀 왔습니다. 그리고 그 실을 끝까지 당기니, 충청 감영 도사 윤사겸이 걸려 나왔지요.
윤사겸은 끝까지 발뺌했습니다.
"나는 모르는 일이오! 아전 나부랭이가 제 배 채우려 내 이름을 판 것이오!"
그런데 인석이가 가져온 장부 맨 뒷장에, 윤사겸 자신이 직접 쓴 글씨 한 줄이 있었습니다. 올해는 여섯 수레로는 부족하니 여덟로 하라. 필적을 대조하니 꼼짝없이 그 사람 손이었지요.
조정에서 내려온 판결은 이러했습니다.
호장 박승만은 살인을 주도한 죄로 참형. 이방 최달구는 공모하고 재물을 훔친 죄로 참형. 주모와 사내 둘도 각각 죄를 받았고요. 감영 도사 윤사겸은 벼슬을 삭탈당하고 온 재산을 몰수한 뒤, 절도로 유배되어 다시는 육지를 밟지 못했습니다. 그 집에서 나온 곡식과 무명은 수천 석 어치였는데, 조정에서는 그걸 몽땅 청산현으로 돌려보내라 명했지요.
그리고 이런 한 줄이 덧붙었습니다.
전 청산 현감 이정순은 죽음으로 직분을 지켰으니, 통정대부를 추증하고 그 행적을 읍지에 실어 후세에 알리게 하라.
곳간 문이 열리던 날, 청산현 사백 집 사람들이 전부 관아 마당에 모였습니다. 진짜 알곡이 가마니째 풀려 나오는데, 소나무 껍질을 뜯던 할머니가 쌀 됫박을 받아 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답니다.
"나리, 나리… 이 늙은 것이 나리 국 한 그릇을 얻어먹고, 나리 목숨값으로 쌀을 받네…"
같은 시각, 저승에서는요.
이정순이 다시 그 검은 전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사흘 말미가 끝나고 돌아온 것이었지요.
염라대왕이 명부를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이정순. 네 원은 풀렸다. 명 도둑 셋은 이미 이승의 법이 다스렸고, 곳간은 열렸다. 이제 남은 건 네 몫이다."
"제 몫이라 하심은…"
"저들이 훔친 스물일곱 해다. 훔친 물건은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저승 법이니라. 오늘 밤 네 몸으로 돌아가거라. 사흘 안이면 아직 늦지 않았다. 부인은 상복을 벗을 것이고, 아들은 다시 아비를 얻을 것이며, 너는 예순여섯까지 살다 제 발로 여기 오게 될 것이다."
전각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이정순의 어깨가 아주 조금 떨렸어요.
'…돌아갈 수 있다. 인석이 자라는 걸 볼 수 있다. 부인 손을 다시 잡을 수 있다.'
사람이라면 누군들 안 그렇겠습니까. 그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대왕님. 여쭐 것이 있습니다."
"말하라."
"이 스물일곱 해는,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제 물건이 맞습니까."
"네 것이다. 도로 찾은 네 것이니라."
"그렇다면."
이정순이 이마를 땅에 대었습니다.
"이 스물일곱 해를 제가 쓰지 않겠습니다. 청산현에서 이번 봄에 굶어 죽은 사람이 아홉입니다. 그중에 젖먹이가 둘이고,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셋입니다. 그 아이들은 저처럼 도둑맞은 것도 아니고, 그저 먹을 것이 없어 왔습니다. 대왕님, 제 스물일곱 해를 그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전각 안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염라대왕이 물었습니다.
"네 아들은 어찌하려느냐. 아비 없이 자랄 것이다."
"…제 아들은 아비의 얼굴은 잃었지만 아비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압니다. 그 아이들은 아무것도 없이 왔습니다. 저는 서른아홉 해를 살았고, 벼슬도 해 보았고, 아내도 얻었고, 아들도 안아 보았습니다. 그 젖먹이는 젖도 못 떼고 왔습니다. 어느 쪽이 더 급하겠습니까."
한참 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염라대왕이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저승 서기들 말로는, 대왕이 사람 앞에서 일어선 것은 아주 오래간만의 일이었다고 하지요.
"내가 이 자리에 앉은 지 오래되었으되, 제 명을 남에게 나눠 준 자는 손에 꼽는다. 이정순, 네 이름을 명부에서 지운다. 너는 이제 죽은 자도 아니고 산 자도 아니다."
"…예?"
"저승 제육전 판관 자리가 비었느니라. 억울하게 온 자들의 사연을 가려내는 자리다. 네가 앉거라. 붓을 들어 억울한 자의 이름을 찾아내는 일이니, 셈밖에 할 줄 모른다는 네게 딱 맞겠구나."
옆에 서 있던 차사 현우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고 합니다.
그해 봄, 청산현에서는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곳간 문이 열리고 며칠 지나, 다 죽어 가던 아이 다섯이 하룻밤 사이에 눈을 뜨고 미음을 넘겼거든요. 의원은 도무지 까닭을 모르겠다며 고개만 갸웃거렸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정순의 아들 인석이는 열여덟에 소과에, 스물넷에 대과에 급제했습니다. 임금이 벼슬을 내리며 어디로 가고 싶으냐 물으니, 이 젊은이가 이렇게 답했다지요.
"충청도 청산현으로 보내 주십시오."
"어찌 하필 그 궁벽한 고을이냐."
"신의 아비가 두 달 하고 못 마친 일이 있사옵니다."
그리하여 인석이는 아버지가 걸어 들어갔던 그 느티나무 길로, 이번에는 현감이 되어 들어갔습니다. 나귀 한 마리에 궤짝 두 개, 그리고 걸어서요. 백성들이 길가에 나와 울었답니다.
지금도 그 고을 향교 뒤 은행나무 아래에는 자그마한 비석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돈을 걷어 세운 것인데, 앞면에는 이렇게만 새겨져 있다지요.
우리를 먹이려다 굶주린 이가 여기 계신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밤새 울다 잠들면, 꿈에 붉은 관복을 입은 판관 하나가 나타나 그 사연을 붓으로 적어 간다고요.
이름을 물으면 이렇게 답한다고 합니다.
"나는 청산현에서 두 달 원 노릇을 한 사람이오."
유튜브 엔딩멘트 (238자)
오늘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이정순 현감은 자기 원한을 갚는 대신, 도로 찾은 스물일곱 해를 굶주린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이 벼슬을 하는 건 남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먹이기 위해서다. 아들에게 남긴 그 한마디가 오래 남습니다. 여러분은 이 현감의 마지막 선택을 어떻게 보셨는지 댓글로 들려주세요.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눌러 주시면 다음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오늘 밤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