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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라대왕조차 두려워한 무당

황금 인생 21 2026. 7. 13.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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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라대왕조차 두려워한 무당

    태그 (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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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승사자들이 벌벌 떨며 피해 다니는 고을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저승사자를 훤히 보고, 명부의 잘못까지 짚어 내는 무당 월화가 살고 있었지요. 저승의 실수가 하나둘 드러나자, 마침내 염라대왕이 진노합니다. "그 무당의 혼을 잡아들여라!" 그런데 저승 법정에 선 무당은 떨기는커녕, 오히려 염라대왕에게 조목조목 따져 묻기 시작합니다. 저승의 왕은 어째서 한낱 인간 무당을 두려워하게 되었을까요? 그 놀라운 이야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 1: 저승사자를 꾸짖은 무당

    조선 숙종 임금 시절, 한양에서 백 리쯤 떨어진 어느 고을에 월화라는 무당이 살았더랍니다.

    월화는 어려서 신병을 심하게 앓고 열여섯에 내림굿을 받은 무당이었는데, 그 신통력이 어찌나 용한지 인근 백 리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월화가 유명한 것은 점을 잘 쳐서도, 병을 잘 고쳐서도 아니었습니다. 월화에게는 다른 무당들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저승사자를 두 눈으로 훤히 보는 능력이었지요.

    보통 사람의 눈에 저승사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에게나 어렴풋이 보인다고 하지요. 그런데 월화의 눈에는 검은 갓에 검은 도포를 입은 저승사자들이, 마치 이웃집 사람처럼 또렷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언제 어느 집에 사자가 드는지, 누구의 명이 다했는지, 월화는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어릴 적 월화가 신병을 앓을 때, 어미가 용하다는 의원을 다 데려와도 소용이 없었다지요. 열병에 들떠 사경을 헤매던 어린 월화가 어느 날 문득 눈을 뜨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머니, 검은 옷 입은 아저씨가 왔다 갔어요. 나를 데려가려다가, 명부를 보더니 아직 때가 아니라고 돌아갔어요. 그런데 이상해요. 그 뒤로... 그 아저씨들이 계속 보여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아이. 그때부터 월화의 눈에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흐려져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아랫마을 김 초시 댁에서 다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스물다섯 난 외아들 만석이가 갑자기 혼절하여 사경을 헤맨다는 것이었지요. 월화가 달려가 보니, 과연 방 안에는 이미 검은 도포의 저승사자가 와 있었습니다. 사자는 붉은 명부를 펼쳐 들고, 누워 있는 만석이의 머리맡에 서 있었지요.

    집안 식구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울고만 있는데, 월화가 성큼 방으로 들어서더니 사자를 향해 또렷하게 말했습니다.

    "사자님, 잠깐 기다리시지요."

    저승사자가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보았습니다.

    "아니, 인간이... 인간이 내가 보인단 말이냐?"

    "보이다마다요. 사자님, 그 명부 좀 봅시다. 지금 데려가려는 혼이 뉘십니까?"

    "김만석. 스물다섯. 오늘 술시가 명이 다하는 시각이다. 명부에 그리 적혀 있느니라."

    그러자 월화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사자님, 그 명부에 적힌 김만석이, 아비 이름이 무엇으로 되어 있습니까?"

    "아비 이름? 그것은... 김덕춘이라 적혀 있다."

    "그것 보십시오! 이 댁 어르신은 김덕춘이 아니라 김덕순이올시다. 산 너머 옻골에 김덕춘이라는 분이 사시는데, 그 댁에도 만석이라는 아들이 있지요. 나이도 스물다섯 동갑입니다. 사자님, 지금 엉뚱한 혼을 데려가시려는 게요!"

    저승사자는 화들짝 놀라 명부를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만석이의 얼굴과 명부를 몇 번이나 번갈아 보더니,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지요.

    '허어... 이거 큰일 날 뻔했구나. 같은 고을에 같은 이름이 둘일 줄이야. 인간의 말이 맞다면, 나는 지금 명부에도 없는 혼을 끊으려 한 것이 아닌가.'

    사자는 헛기침을 하며 명부를 접었습니다.

    "어험... 내 다시 확인해 보고 오겠다. 헌데 인간, 너는 대체 무엇이기에 나를 보고, 명부의 일까지 아는 것이냐."

    "소인은 이 고을 무당 월화라 하옵니다. 신령님들 덕에 저승의 일이 조금 보일 뿐이지요. 사자님, 노여워 마십시오. 사자님을 망신 주려는 게 아니라, 애먼 목숨 하나 살리자는 것뿐이니."

    사자가 사라지고 나자, 신기하게도 사경을 헤매던 만석이가 스르르 눈을 떴습니다. 김 초시 내외는 월화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며 은인이라 불렀지요. 그런데 월화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습니다.

    "소인에게 절할 것 없습니다. 그보다 지금 당장 옻골 김덕춘 어르신 댁에 사람을 보내 보시지요. 그 댁 아드님이...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지막 인사라도 나누게 해 드려야지요."

    과연 그날 밤, 옻골의 만석이는 식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월화 덕분에 임종이라도 지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 일이 있고 나서, 월화의 이름은 더욱 널리 퍼졌습니다. 저승사자와 말을 섞는 무당. 명부의 잘못을 바로잡는 무당. 사람들은 월화를 신처럼 우러렀지만, 월화는 늘 같은 말을 했지요.

    "소인은 신이 아닙니다. 그저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에서, 말을 전하는 심부름꾼일 뿐이지요."

    실제로 월화가 가장 정성을 쏟는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진오기굿, 죽은 이의 혼을 위로하여 좋은 곳으로 보내 드리는 굿이었지요. 억울하게 죽어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 갈 곳을 몰라 이승을 맴도는 넋들. 월화는 그런 혼들의 말을 들어 주고, 맺힌 한을 풀어 주고, 저승 가는 길을 배웅해 주었습니다. 부잣집 굿은 사양해도, 가난한 집의 원혼 굿은 쌀 한 톨 받지 않고도 밤을 새워 해 주는 것이 월화였습니다.

    "무당이 돈맛을 알면 신령님이 등을 돌리시는 법. 한 맺힌 혼을 풀어 보내는 것이 내 일이지, 돈을 버는 것이 내 일이 아니니."

    지난겨울에도 그랬습니다. 나루터에서 물에 빠져 죽은 뱃사공의 원혼이 밤마다 강가에서 울어, 마을 사람들이 무서워 나루를 건너지 못했지요. 월화가 찾아가 사흘 밤낮 굿을 하며 들어 보니, 뱃사공의 한은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홀로 남은 눈먼 노모가 굶고 있는 것이 걱정되어 차마 떠나지 못한 것이었지요. 월화는 마을 사람들과 의논하여 노모를 마을에서 돌보기로 약조해 주었고, 그제야 뱃사공의 혼은 울음을 그치고 편안히 저승길을 떠났습니다. 그 후로 강가의 울음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런 월화의 활약이 저승에서는 어떻게 보였을까요. 처음에는 그저 신기한 인간 하나가 나타났다며 웃어넘기던 저승 관원들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월화 때문에 저승의 실수가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으니까요. 명부를 잘못 옮겨 적은 판관, 혼을 잘못 짚은 사자, 기한을 어긴 관원. 월화가 짚어 낸 잘못이 쌓일수록, 저승사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까지 돌게 되었습니다.

    "그 고을에는 배정받지 마시게. 월화라는 무당이 있어서, 명부 한 자만 틀려도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다네."

    저승사자가 인간을 피해 다니다니, 실로 저승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지요. 그리고 마침내 그 소문이, 저승의 가장 높은 곳. 염라대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 2: 염라대왕의 진노

    저승 시왕전, 염라대왕의 어전이었습니다.

    진홍빛 곤룡포에 면류관을 쓴 염라대왕이 어좌에 앉아 최판관의 보고를 듣고 있었지요. 그런데 보고가 길어질수록, 대왕의 미간에 골이 깊어졌습니다.

    "...하여, 지난 석 달 동안 그 무당으로 인해 되돌려진 혼이 셋, 임종 시각이 미루어진 것이 다섯, 명부의 착오가 드러난 것이 일곱 건이옵니다."

    "일곱 건이라..."

    염라대왕의 낮은 음성에 시왕전 기둥이 웅웅 울렸습니다.

    "최판관. 과인이 지금 무엇을 들은 것이냐. 명부의 착오가 일곱 건? 그것을 저승의 판관들이 아니라, 이승의 무당 하나가 짚어 냈다는 말이냐?"

    "화, 황공하옵니다, 대왕마마."

    "황공할 일이로다! 명부는 하늘의 문서이거늘, 그것을 다루는 관원들이 어찌 이리 소홀하단 말이냐! 착오를 낸 판관들은 모두 벌하라!"

    호통이 떨어지자 시왕전의 판관들이 일제히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염라대왕의 노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지요.

    "헌데... 그 무당 말이다. 월화라 하였느냐. 사자들이 그 인간을 피해 다닌다는 말이 사실이냐?"

    곁에 있던 사자들의 우두머리, 도사자가 머뭇거리며 아뢰었습니다.

    "그, 그것이... 사실이옵니다. 그 무당은 사자의 모습을 훤히 보고, 명부의 내용을 따져 묻고, 조금이라도 어긋난 것이 있으면 산 사람들 앞에서 조목조목 짚어 내니... 사자들이 그 고을 다녀오기를 호랑이 굴 들어가듯 꺼리고 있사옵니다."

    "허어! 저승사자가 인간을 무서워한다? 이런 해괴한 일이 있단 말이냐!"

    염라대왕이 어좌를 내리치자 시왕전이 지진이 난 듯 흔들렸습니다.

    "이는 저승의 위엄이 걸린 일이로다. 인간이 저승의 일에 참견하고, 사자를 꾸짖고, 명부를 논하다니. 이대로 두면 이승의 인간들이 죽음을 우습게 알 것이며, 저승의 법도가 땅에 떨어질 것이다!"

    대왕은 도사자를 불러 명을 내렸습니다.

    "가장 엄하고 냉정한 사자를 보내라. 그 무당의 신통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해 보라 이르라. 만일 그 무당에게 티끌만 한 삿된 구석이라도 있거든, 지체 없이 혼을 거두어 과인 앞에 대령하라!"

    그리하여 저승에서 가장 서슬 푸르기로 이름난 냉혈사자가 이승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삼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인정에 흔들린 적이 없다는, 얼음보다 차가운 사자였지요.

    냉혈사자는 그믐밤을 골라 월화의 신당으로 향했습니다.

    '무당 따위가 감히 저승을 우롱해? 어디 그 낯짝 좀 보자. 신통인지 요망한 술수인지, 내 눈으로 밝혀내리라.'

    그런데 신당 앞에 이른 냉혈사자는 걸음을 우뚝 멈추었습니다. 신당 마루에 웬 소반 하나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 세 그릇에 나물 세 접시, 짚신 세 켤레와 엽전 몇 닢까지. 영락없는 사잣밥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 소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월화가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지요.

    "오시는 길이 머셨지요, 사자님. 밤바람이 찬데 요기부터 하시지요."

    냉혈사자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네 이년... 내가 오늘 올 것을 어찌 알았느냐."

    "사흘 전부터 까마귀가 신당 지붕에서 사흘을 내리 울고, 어젯밤에는 신령님이 꿈에 검은 구름이 북쪽에서 온다 이르셨지요. 저승에서 소인을 보러 오시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흥, 제법이구나. 허면 내가 무엇 하러 왔는지도 알겠구나."

    "알다마다요. 소인의 혼을 거두러 오셨거나... 아니면 소인을 시험하러 오셨겠지요. 허나 그 전에, 우선 진지부터 드시지요. 먼 길 오신 손님을 빈입으로 세워 두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니."

    냉혈사자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저승사자 노릇 삼백 년에, 저를 잡으러 온 사자에게 밥부터 권하는 인간은 처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사잣밥상을 내려다보니, 어딘가 이상했습니다. 밥은 갓 지어 김이 오르는데, 그릇도 수저도 놋쇠가 아니라 정성껏 깎은 나무였고, 밥 곁에는 들국화 몇 송이까지 소담하게 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웬 꽃이냐."

    "먼 길 오가시는 사자님들, 늘 죽음의 곁에만 계시니 꽃 볼 일이 없으시겠다 싶어서요. 저승 가는 혼님들 배웅할 때도 소인은 꼭 꽃을 놓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 고운 것 하나는 보고 가시라고."

    냉혈사자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삼백 년 동안 받아 본 사잣밥은 하나같이 두려움에 떨며 차린 것들이었습니다. 사자님 제발 노여움을 푸시라고, 우리 식구는 데려가지 말라고 벌벌 떨며 차린 밥상. 그런데 이 밥상에서는... 두려움의 냄새가 나지 않았습니다.

    '괴이한 인간이다. 나를 무서워하지 않아. 헌데 무례하지도 않아. 마치... 마치 먼 길 온 길손을 맞는 것 같지 않은가.'

    사자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명부를 펼쳐 들었습니다.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신당에 울렸지요.

    "무당 월화. 저승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고 사자들을 능멸한 죄, 그 죄를 물어 너의 혼을 거두러 왔다. 순순히 따르라."

    그 말에 보통 사람 같으면 혼비백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월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방긋 웃으며 이렇게 되묻는 것이었습니다.

    "사자님, 소인 하나 여쭙겠습니다. 그 명부에 소인의 정해진 수명이 몇으로 적혀 있는지요?"

    "수명?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

    "상관이 있다마다요. 어디 한번 펼쳐 보시지요. 소인, 신령님께 들어 제 명을 알고 있습니다. 예순여섯이지요. 헌데 소인 올해 마흔아홉이올시다. 아직 열일곱 해가 남았는데, 죄를 물어 혼을 거둔다 하셨습니까? 하오면 묻겠습니다. 소인이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잘못 적힌 명부를 바로잡은 것이 죄입니까? 애먼 목숨이 끊기는 것을 막은 것이 죄입니까? 그것이 죄라면... 저승의 법에 그런 죄목이 정말로 적혀 있는지, 사자님께서 먼저 확인해 보셔야 하는 것 아닌지요."

    냉혈사자는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명부를 내려다보니, 과연 월화의 수명은 예순여섯. 그리고 죄목을 적는 난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대왕의 명이라고는 하나, 명부에 없는 혼을 거두는 것은 저승 법도에 어긋나는 일. 삼백 년 얼음 같던 사자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이, 이런... 이 무당의 말이 구구절절 옳지 않은가. 법대로 하자면 오히려 내가 법을 어기는 셈이 되다니.'

    ※ 3: 혼만 데려오라

    냉혈사자는 빈손으로 저승에 돌아갔습니다.

    "무엇이라? 혼을 거두지 못했다?"

    염라대왕의 진노에 시왕전이 뒤흔들렸습니다. 냉혈사자는 바닥에 엎드려 아뢰었지요.

    "대왕마마, 소인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하오나 그 무당의 말에 한 치의 그름이 없었나이다. 명부에 적힌 수명은 예순여섯, 지금 나이는 마흔아홉. 죄목을 적는 난은 비어 있었사옵니다. 명부에 없는 혼을 거두는 것은 저승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 소인이 혼을 거두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무당이 그동안 짚어 온 저승의 잘못을 하나 더 보태는 꼴이 되었을 것이옵니다."

    "허어..."

    염라대왕은 기가 막혔습니다. 무당을 벌하려 보낸 사자가, 오히려 무당의 논리에 설득되어 돌아오다니요. 대왕은 어좌에서 일어나 시왕전을 서성였습니다. 최판관이 조심스레 아뢰었지요.

    "대왕마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 무당을 이대로 두시는 것도 방도가 아닐까 하옵니다. 따지고 보면 그 무당이 저승에 해를 끼친 것이 아니라, 저승의 실수를 바로잡아 준 셈이니..."

    "판관은 입을 다물라!"

    염라대왕의 호통이 떨어졌습니다.

    "과인이 노한 것은 실수가 드러나서가 아니다. 저승과 이승 사이에는 넘지 못할 강이 있어야 하는 법. 인간이 저승의 일을 훤히 들여다보고 사자와 흥정을 하기 시작하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요구하겠느냐. 수명을 늘려 달라, 죽은 이를 살려 달라, 끝이 없을 것이다. 하여 과인이 직접 확인해야겠다. 그 무당이 진실로 곧은 자인지, 아니면 신통을 등에 업고 오만해진 자인지. 도사자!"

    "예, 대왕마마."

    "그 무당의 혼을 데려오라. 목숨줄은 끊지 말고, 혼만 잠시 데려오라. 산 채로 저승 법정에 세워, 과인이 친히 심문하겠노라."

    혼만 데려오라. 이것은 저승에서도 극히 드문 명이었습니다. 몸은 이승에 잠들어 있고 혼만 저승에 불려 오는 것이니, 이승 사람들 눈에는 깊은 잠이나 혼절로 보이는 것이지요. 예로부터 저승 갔다 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경우랍니다.

    그날 밤, 월화는 신당에서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신당의 촛불이 일제히 파랗게 변하더니, 방 안 가득 서늘한 기운이 차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월화는 조용히 눈을 떴지요.

    '올 것이 왔구나. 이번에는... 사자 한 분이 아니다.'

    과연 신당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저승사자 넷이 들어섰습니다. 검은 도포가 네 벌, 검은 갓이 네 개. 그 가운데에는 지난번의 냉혈사자도 있었지요. 냉혈사자가 한 걸음 나서며 말했습니다.

    "무당 월화. 염라대왕께서 너를 친히 보자 하신다. 몸은 두고, 혼만 다녀가야겠다."

    곁에 있던 늙은 신어머니가 사색이 되어 월화의 치맛자락을 붙잡았습니다. 무당들 사이에서 혼이 저승에 불려 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었으니까요. 열에 아홉은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었습니다.

    "월화야, 아니 된다. 핑계를 대서라도 미루어라. 저승 법정에 선 혼이 온전히 돌아온 예가 없느니라..."

    하지만 월화는 신어머니의 손을 가만히 잡아 내리고, 오히려 옷매무새를 단정히 고쳤습니다. 소복 위에 신복을 갖추어 입고, 머리를 곱게 빗어 쪽을 지었지요. 마치 큰굿을 앞둔 무당처럼, 정성스럽게 몸단장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어머니, 염려 마셔요. 소인이 평생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말을 전하는 일이었지요. 헌데 이제 저승의 임금님께서 친히 부르신다니, 이는 심부름꾼에게는 더없는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이 아이가 겁도 없이..."

    "겁이 왜 없겠습니까. 허나 신어머니, 소인은 떳떳합니다. 평생 남의 눈에서 피눈물 낸 적 없고, 신령님 팔아 재물을 탐한 적 없고, 죽은 혼 위로하고 산 사람 살리는 일만 했습니다. 떳떳한 자가 고개를 숙이면, 세상의 굽은 것들이 더욱 기고만장해지는 법이지요."

    월화는 사자들을 향해 돌아서서, 두 손을 모으고 예를 갖추었습니다.

    "사자님들, 가시지요. 헌데 가기 전에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인의 몸이 사흘 안에 돌아오지 못하거든, 신어머니에게 알려 주십시오. 마을에 소인이 돌보던 병자가 둘 있고, 모레가 원혼굿 약조한 날이라, 소인이 못 하게 되면 다른 무당이라도 보내야 하니."

    이 말에 사자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습니다. 저승 법정에 끌려가는 마당에, 제 목숨 걱정이 아니라 두고 가는 병자와 원혼 걱정을 하다니요. 냉혈사자가 저도 모르게 나직이 중얼거렸습니다.

    "...염려 마라. 내 책임지고 전하마."

    월화가 눈을 감자, 그 몸이 스르르 무너지듯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몸에서 뽀얀 혼이 일어나, 사자들을 따라 나섰지요. 신당을 나서며 월화의 혼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믐밤인데도 별이 유난히 밝았습니다.

    '저승길이 이 길이구나. 내가 굿을 하며 수없이 배웅했던 그 길. 오늘은 내가 이 길을 걷는구나.'

    황천길 삼거리를 지나고, 검푸른 강을 건너고, 저승 문을 지나는 동안, 월화는 무서워하기는커녕 길가의 모든 것을 찬찬히 눈에 담았습니다. 굿에서 노래로만 부르던 저승길을 제 눈으로 보게 되었으니, 무당으로서 이보다 더한 공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길을 걷다 보니, 저만치 앞서가는 혼백들의 행렬이 보였습니다. 오늘 세상을 떠난 혼들이었지요. 그 가운데 어린아이 혼백 하나가 겁에 질려 훌쩍이고 있는 것이 월화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월화는 사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가가, 아이의 손을 잡고 나직이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굿판에서 죽은 혼을 달래던 바로 그 가락이었지요. 신기하게도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이내 방긋 웃으며 제 갈 길을 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냉혈사자가 낮게 중얼거렸습니다.

    "저것 보게. 저승길에서도 저 버릇을 못 버리는군. 제 목숨이 어찌 될지 모르는 판국에..."

    말은 그렇게 해도, 사자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타박이 아니라 감탄이 배어 있었지요.

    그리고 마침내, 하늘에 닿을 듯 웅장한 시왕전 앞에 이르렀습니다. 문 앞을 지키던 나졸들이 창을 엇갈려 세우며 외쳤지요.

    "이승의 무당 월화, 대령이오!"

    거대한 문이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열렸습니다. 저 안쪽 깊은 곳, 진홍빛 곤룡포의 염라대왕이 태산처럼 앉아 월화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좌우로 늘어선 판관들, 창을 든 나졸들, 그리고 죄인의 일생을 비추는 업경대까지. 산 사람의 혼이 서기에는 너무나 무시무시한 자리였지요. 하지만 월화는 옷매무새를 한 번 고치고는, 조금도 떨지 않는 걸음으로 그 안에 들어섰습니다. 과연 염라대왕과 무당 월화의 대면은 어찌 될까요.

    ※ 4: 저승 법정의 대결

    시왕전 한가운데에 선 월화는, 염라대왕을 향해 공손히 큰절을 올렸습니다.

    "이승의 무당 월화, 대왕마마를 뵈옵니다."

    절은 올리되, 목소리에는 떨림 한 점 없었습니다. 염라대왕이 어좌에서 월화를 내려다보았지요. 산 사람의 혼이 이 자리에 서면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 것이 보통인데, 이 무당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눈을 내리깔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왕전의 단청과 어좌의 장엄함을 찬찬히 올려다보더니, 나직이 감탄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굿거리에서 노래하던 그대로구나. 시왕전 높은 집에 일월성신 밝았으니. 신어머니께서 들려주시던 그 노랫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어.'

    염라대왕은 그 태연함이 더욱 괘씸했습니다.

    "네가 월화냐. 저승사자를 꾸짖고, 명부를 논하고, 저승의 실수를 들추어 낸다는 그 무당이."

    "꾸짖은 것이 아니라 여쭈었고, 들춘 것이 아니라 바로잡았을 뿐이옵니다, 대왕마마."

    "말 한번 반드르르하구나. 좋다, 과인이 묻겠다. 인간이 저승의 일에 관여하는 것이 옳으냐.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넘지 못할 경계가 있는 법. 네가 그 경계를 함부로 넘나들며 저승의 위엄을 깎아내리니, 이승의 인간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그 책임을 네가 질 것이냐!"

    시왕전이 쩌렁쩌렁 울리는 호통이었습니다. 판관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지요. 그런데 월화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되묻는 것이었습니다.

    "대왕마마, 소인 하나 여쭙겠나이다. 저승의 위엄은... 무엇으로 서는 것이옵니까?"

    "무엇이라?"

    "위엄이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대왕마마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소인이 저승의 실수를 짚을 때마다 두려움은 조금씩 깎였을 터이니. 하오나 대왕마마, 위엄이 미더움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어떠하옵니까. 명부가 한 치의 틀림도 없고, 심판이 털끝만큼도 억울함을 남기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저승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믿게 되옵니다. 그리고 믿음 위에 선 위엄은, 그 어떤 신통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법이옵니다."

    "..."

    "소인이 명부의 착오를 짚은 것은 저승을 욕보이려 함이 아니오라, 저승을 참으로 미덥게 하려 함이었나이다. 억울한 죽음이 하나 생길 때마다, 이승에는 원혼이 하나 늘고 저승에는 불신이 하나 쌓이옵니다. 그것이야말로 저승의 위엄을 갉아먹는 벌레가 아니겠사옵니까."

    시왕전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염라대왕의 눈썹이 꿈틀거렸지요. 노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럴듯하다. 허나 말은 누구나 그럴듯하게 할 수 있는 법. 네가 진정 저승을 위한다면, 어디 증거를 내놓아 보아라."

    그러자 월화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증거라 하시니, 소인이 평생 가슴에 새겨 온 장부를 펼치겠나이다."

    "장부? 빈손으로 온 네게 무슨 장부가 있단 말이냐."

    "여기 있사옵니다."

    월화는 제 가슴을 가리켰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하나하나 읊기 시작했지요.

    "갑자년 동짓달, 청주 고을 돌쇠. 주인의 은수저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매를 맞아 죽었으나, 진범은 따로 있었나이다. 그 혼이 아직 청주 관아 뒷산을 떠돌고 있사옵니다. 을축년 삼월, 나주 고을 분이. 시집살이 모함으로 우물에 몸을 던졌으나, 그 억울함을 아는 이가 없어 우물가에서 십 년을 울고 있사옵니다. 병인년 칠월, 안성 고을 늙은 옹기장이..."

    하나, 둘, 셋... 월화의 입에서 억울하게 죽은 혼들의 이름과 사연이 끝도 없이 흘러나왔습니다. 이름, 죽은 날짜, 맺힌 사연, 지금 떠도는 곳까지. 무려 마흔아홉 혼의 사연이 한 치의 막힘도 없이 이어졌지요.

    읊는 동안 월화의 목소리는 때로 떨렸고, 때로 젖었습니다. 남의 사연을 외운 것이 아니라, 그 혼들과 함께 울었던 밤들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목소리였지요. 시왕전의 판관들도, 창을 든 나졸들도, 어느새 숨을 죽이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어느 판관은 붓을 든 채 저도 모르게 월화가 읊는 이름들을 받아 적기 시작했지요.

    "...이상 마흔아홉이옵니다. 소인이 굿판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 준 원혼들이온데, 이들의 억울함은 이승의 관아도 몰라주고, 저승의 명부에도 적히지 않았사옵니다. 죽어서 저승에 오지도 못하고, 이승에 머물지도 못한 채 그 사이를 떠도는 혼들이옵니다. 대왕마마, 감히 여쭙겠나이다. 이 혼들은... 대체 어느 나라 백성이옵니까?"

    시왕전이 얼어붙었습니다. 최판관이 황급히 명부를 뒤졌으나, 과연 월화가 말한 혼들의 이름은 저승의 어느 장부에도 온전히 정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승과 저승 사이의 틈에 떨어져, 어느 쪽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혼들이었던 것이지요.

    "저승은 죽은 자를 다스리는 나라라 들었사옵니다. 하오면 저 떠도는 혼들도 마땅히 대왕마마의 백성이 아니옵니까. 임금이 백성을 잊으면 백성은 나라를 원망하는 법. 소인 같은 무당이 저 혼들의 울음을 들어 주는 동안, 저승은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요."

    "무엄하다!"

    나졸들이 창을 겨누며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월화는 물러서지 않았지요.

    "무엄하다 하시면 달게 받겠나이다. 하오나 대왕마마, 소인의 목을 치시기 전에 이것 하나만은 알아주시옵소서. 저승이 소인을 두려워할 까닭은 없사옵니다. 소인은 한낱 늙어 가는 무당일 뿐. 만일 저승이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소인이 아니라, 소인의 입에서 나오는 진실일 것이옵니다. 그리고 진실은 소인의 혼을 거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옵니다."

    염라대왕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이 조그만 인간 무당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지요. 그 눈에는 두려움 대신, 맑고 곧은 빛만이 가득했습니다.

    '과인이 다스린 세월이 얼마이던가. 그 긴 세월 동안, 과인 앞에서 이토록 곧게 진실을 말한 자가 있었던가. 판관도, 사자도, 죽어 온 임금과 정승들도, 모두 과인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하였거늘.'

    이윽고 대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업경대를 가져오라. 말이 곧은지 삶이 곧은지, 이제 그것을 보아야겠다."

    ※ 5: 업경대의 시험

    거대한 업경대가 시왕전 한가운데로 옮겨졌습니다. 사람의 한평생을 티끌 하나 숨김없이 비추는 거울. 아무리 말재주가 좋은 자라도, 업경대 앞에서는 삶 그 자체로 심판받는 것이지요.

    "무당 월화. 네 말이 아무리 곧아도, 삶이 굽었다면 모두 헛것이다. 지금부터 네 마흔아홉 해를 낱낱이 비추리라. 신통을 팔아 재물을 탐한 적은 없는지, 남의 두려움을 이용해 잇속을 챙긴 적은 없는지, 죽은 자를 팔아 산 자를 속인 적은 없는지. 티끌 하나라도 나오거든, 각오하라."

    "비추시옵소서. 소인, 부끄러울 것이 없나이다."

    업경대가 빛을 내며 돌기 시작했습니다.

    거울 속에 어린 월화가 나타났습니다. 신병을 앓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소녀.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되던 날, 어미를 붙들고 밤새 울던 열여섯 처녀의 모습이 흘러갔지요. 무당이 되었다고 손가락질하는 마을 사람들, 우물가에서 마주치면 침을 뱉고 지나가던 아낙들. 그 서러운 세월도 고스란히 비쳤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들. 역병이 돌던 해, 시신조차 만지기 꺼려 아무도 장사 지내 주지 않던 죽은 이들을 월화가 홀로 염하고 굿을 해 보내 주는 모습.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이 손사래를 치며 말렸지만, 월화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었지요.

    "산 사람이 무서워 버린 혼을, 나까지 버리면 저 혼들은 어디로 갑니까."

    그때 시왕전 한구석에서 낮은 흐느낌이 새어 나왔습니다. 돌아보니 냉혈사자였습니다. 판관 하나가 의아해 물었지요.

    "사자께서 어인 눈물이시오."

    "저... 저 역병에 죽은 혼들 말이오. 그해에 그 고을 혼들을 데리러 간 것이 바로 나였소. 다른 고을 혼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벌벌 떨며 왔는데, 유독 그 고을 혼들만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얼굴로 왔었소. 곱게 염을 하고, 노잣밥까지 든든히 얻어먹고 왔다면서. 그것이 다... 저 무당의 손길이었구려."

    업경대는 계속 돌았습니다. 부잣집 대감이 궤짝 가득 엽전을 싣고 와 정적을 저주하는 굿을 해 달라 청하자, 월화가 그 궤짝을 도로 밀어내는 모습도 비쳤습니다.

    "신령님의 힘은 사람을 살리라고 있는 것이지, 사람을 해치라고 있는 것이 아니올시다. 그 엽전으로 차라리 굶는 이웃의 쌀을 사시지요."

    가난한 과부의 남편 혼을 위로하는 굿을 사흘 밤낮 해 주고도, 굿값 대신 내미는 수수떡 한 접시를 반만 받고 반은 도로 아이들 입에 넣어 주는 모습. 겨울밤 얼어 죽은 걸인의 혼을 위해 제 쌀독을 털어 노잣밥을 지어 주는 모습. 신당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점값 한 푼 받지 않고 근심을 들어 주는 모습. 장면이 하나하나 지나갈 때마다, 시왕전의 판관들 사이에서 나직한 탄식이 새어 나왔습니다.

    '허어... 티끌을 찾으려 비추었더니, 옥구슬만 줄줄이 나오는구나.'

    업경대는 마지막으로 최근의 어느 밤을 비추었습니다. 월화가 신당에서 홀로 기도하는 모습이었지요. 그런데 그 기도 소리가 시왕전에 울려 퍼지자, 염라대왕의 낯빛이 흔들렸습니다.

    "신령님, 비나이다. 소인의 명이 열일곱 해 남았다 하셨지요. 소인 욕심 없사옵니다. 다만 그 열일곱 해 동안, 한 맺힌 혼 하나라도 더 풀어 보내게 해 주시옵소서. 소인 죽는 날, 저승 문 앞에서 원망하는 혼을 하나도 만나지 않는 것. 그것이 소인의 소원이옵니다."

    업경대의 빛이 잦아들었습니다. 시왕전에는 긴 침묵이 흘렀지요. 이윽고 염라대왕이 입을 열었는데, 그 목소리가 아까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월화야."

    호칭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무당 월화도, 인간도 아닌, 월화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시험하겠다. 과인이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하마. 잘 듣거라."

    염라대왕이 손을 들자, 시왕전 허공에 눈부신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 곳간 가득한 재물, 비단옷과 가마. 그리고 명부 한 권이 떠올랐지요.

    "네가 오늘부로 저승의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 약조하면, 저 부귀영화를 내리마. 아니, 그뿐이 아니다. 네 명부의 수명 예순여섯에 서른 해를 더해 아흔여섯까지 살게 해 주마. 병 없이, 근심 없이. 어떠하냐. 사자를 보고도 못 본 척, 명부가 틀려도 모르는 척, 그저 입을 다물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시왕전의 모든 눈이 월화에게 쏠렸습니다. 부귀영화에 삼십 년의 수명이라니. 인간이라면 누구도 뿌리치기 어려운 제안이었지요. 판관들은 마른침을 삼켰습니다. 이제껏 곧기만 하던 무당이 이 마지막 시험 앞에서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냉혈사자마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꼭 쥐었습니다.

    '월화야, 흔들리지 마라. 여기서 흔들리면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그런데 월화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오히려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왕마마, 소인이 되묻겠나이다. 눈앞에서 애먼 혼이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입을 다물고 얻은 아흔여섯 해와, 억울한 목숨을 살리고 맞는 예순여섯 해. 어느 쪽이 더 긴 삶이옵니까?"

    "...무엇이라?"

    "삶의 길이는 해로 재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 없는 날로 재는 것이라 배웠나이다. 입 다물고 산 서른 해는 소인에게 삶이 아니라 감옥일 것이옵니다. 하오니 대왕마마, 그 서른 해는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정히 소인에게 무언가를 내리고 싶으시거든..."

    월화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 눈이 형형하게 빛났지요.

    "아까 소인이 읊은 마흔아홉 원혼의 사연을 다시 살펴 주시옵소서. 그 혼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옵소서. 소인이 받고 싶은 상은 그것 하나뿐이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판관들이 소스라치게 놀랐지요. 대왕이 어좌에서 일어나는 것은 큰 변고가 있을 때뿐이니까요.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염라대왕이 한 계단, 두 계단, 어좌의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승이 생긴 이래, 염라대왕이 인간의 혼 앞으로 몸소 걸어 내려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 6: 이승과 저승의 다리

    염라대왕이 월화 앞에 마주 섰습니다. 태산 같은 대왕과 조그만 무당이 마주 선 광경에, 시왕전의 모든 혼들이 숨을 죽였지요. 이윽고 대왕이 입을 열었습니다.

    "월화야. 과인이 너에게 고백할 것이 하나 있다."

    "하교하시옵소서, 대왕마마."

    "사자들이 너를 두려워한다는 보고를 처음 들었을 때, 과인은 진노했다. 저승의 왕인 과인조차... 솔직히 말하마. 네가 두려웠느니라."

    시왕전이 술렁였습니다. 염라대왕이, 죽음을 다스리는 왕이, 인간이 두려웠다고 제 입으로 말하다니요.

    "헌데 오늘에서야 그 두려움의 정체를 알았다. 과인이 두려워한 것은 너의 신통이 아니었다. 사자를 보는 눈도, 명부를 아는 능력도 아니었다. 과인이 두려워한 것은... 네 앞에 서면 과인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숨김없이 드러난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느니라."

    염라대왕은 시왕전을 천천히 둘러보았습니다.

    "거울을 두려워하는 것은, 제 얼굴에 묻은 티끌을 아는 자이니라. 과인은 저승의 명부가 완전하다 믿었고, 저승의 심판에 억울함이 없다 자부했다. 헌데 너라는 거울 앞에 서니, 잘못 적힌 명부가 보이고, 틈에 떨어져 우는 혼들이 보이는구나. 그것이 두려워, 과인은 거울을 치우려 했던 것이다. 티끌을 닦을 생각은 않고 말이다."

    대왕은 월화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허나 월화야,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곧은 거울이 아니라, 거울이 없는 세상이더구나. 잘못을 비춰 주는 이가 없으면, 잘못은 곪아서 썩는 법. 하여 과인은 오늘 거울을 치우는 대신, 거울을 곁에 두기로 하였다."

    염라대왕이 손을 들자, 최판관이 두루마리 하나를 받들고 나왔습니다.

    "들으라. 저승의 왕 염라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첫째, 무당 월화가 고한 마흔아홉 원혼의 사연을 낱낱이 다시 조사하여, 억울함이 밝혀지는 대로 그 한을 풀고 좋은 곳으로 인도하라. 둘째, 이승과 저승의 틈에 떨어진 혼들을 살피는 관원을 새로 두어, 다시는 잊히는 백성이 없게 하라. 셋째..."

    대왕의 눈길이 월화에게 머물렀습니다.

    "무당 월화를 이승과 저승을 잇는 다리, 영매관에 봉하노라. 월화는 이승에 살며 명이 다하는 날까지, 떠도는 혼들의 말을 저승에 전하고, 저승의 뜻을 이승에 전하라. 사자들은 월화를 만나거든 관원의 예로 대하고, 월화가 고하는 원혼의 사연은 지체 없이 과인에게 올리라."

    월화는 그 자리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 눈에서 비로소 눈물이 흘렀지요. 저승 법정에서도 흘리지 않던 눈물이었습니다.

    "대왕마마... 소인, 분에 넘치는 소임이오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받들겠나이다. 하온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여쭙겠나이다. 어찌하여 마음을 바꾸셨는지요."

    염라대왕이 처음으로 껄껄 웃었습니다. 그 웃음소리에 시왕전의 얼음장 같던 공기가 봄눈 녹듯 풀렸지요.

    "업경대 때문이니라. 과인은 네 삶에서 티끌을 찾으려 했다. 헌데 티끌 대신 다른 것을 보았지.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곳에서, 아무 상도 바라지 않고, 마흔아홉 해를 한결같이 산 사람. 월화야, 저승의 왕이 삼천 년을 살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신통한 자는 많아도 한결같은 자는 드물다는 것이다. 과인이 오늘 얻은 것은 영매관이 아니라... 스승이니라."

    월화의 혼은 사흘 만에 이승의 몸으로 돌아왔습니다. 신어머니는 깨어난 월화를 붙들고 통곡했지요.

    "이 무심한 것아, 사흘 동안 숨만 붙어 있고 깨어나지를 않아 애간장이 다 녹았다. 저승은... 저승은 어떻더냐."

    "신어머니, 저승도 사람 사는 곳과 똑같습디다. 잘못도 있고, 뉘우침도 있고... 그리고 그곳의 임금님도, 백성 걱정에 잠 못 드는 것은 이승 임금님과 매한가지였어요."

    그리고 그날부터, 월화의 굿은 전과 같으면서도 전과 달랐습니다. 월화가 원혼의 사연을 굿으로 풀어 올리면, 며칠 지나지 않아 신기하게도 그 억울함이 세상에 밝혀지곤 했으니까요. 청주 돌쇠의 누명을 씌운 진범이 제 발로 관아에 자수하고, 나주 분이를 모함한 시누이가 잘못을 빌었으며, 우물가의 울음소리가 그쳤습니다. 안성 옹기장이의 원한도, 나머지 마흔여섯 혼의 사연도 하나하나 풀려 나갔지요. 사람들은 월화의 굿을 하늘이 듣는 굿이라 불렀지만, 그 뒤에 저승의 명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지요.

    저승에서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명부를 다루는 판관이 늘고, 이름이 같은 혼은 아비의 이름과 태어난 시까지 세 번을 맞추어 보게 되었으며, 이승과 저승 사이를 살피는 관원이 새로 생겼습니다. 사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돌았다지요.

    "요즘 저승 일이 예전보다 훨씬 반듯해졌어. 이것이 다 그 무당 덕이지."

    한때 월화를 피해 다니던 사자들이, 이제는 월화의 신당 앞을 지날 때면 갓을 고쳐 쓰고 예를 갖추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월화의 나이 예순여섯 되던 해 가을. 월화는 마지막 굿을 마치고 신당에 정갈하게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명부에 적힌 바로 그 수명이었지요. 그런데 그날 밤, 마을 사람들은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고 합니다. 신당 앞에 검은 도포의 사자들이 줄지어 서서, 마치 큰 어른을 모시듯 공손히 예를 갖추고 있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행렬의 맨 앞에서, 낯익은 사자 하나가 꽃 한 송이를 들고 월화의 혼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영매관 월화님, 모시러 왔습니다. 가는 길에... 꽃이라도 보고 가시라고."

    바로 그 냉혈사자였습니다. 월화가 사잣밥상에 놓아 주던 들국화를, 삼백 년 얼음 같던 사자가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염라대왕도 두려워한 무당. 그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이었습니까. 신통력도, 재주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움 없는 삶, 그리고 그 삶이 비추는 진실이었지요. 권세 앞에서도 굽지 않고, 부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곧은 마음. 저승의 왕도 그 앞에서는 자리에서 내려와 예를 갖추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러워 마십시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한결같이 쌓은 정성은, 하늘이 보고 저승이 보고 있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그 값을 돌려주는 법이지요.

    부디 오늘 밤도 편안한 꿈 꾸시기를 바랍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250자 내외)

    오늘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나요? 염라대왕이 두려워한 것은 무당의 신통력이 아니라, 부끄러움 없는 삶이 비추는 진실이었습니다. 부귀영화와 서른 해의 수명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월화처럼, 곧은 마음 하나면 저승의 왕도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드는 법이지요. 이야기가 마음에 드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다음 이야기에서 또 만나요. 편안한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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