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영혼 바뀐 공주와 궁녀의 운명 『출처 - 어우야담』
태그 (20개)
#조선시대, #야담, #설화, #어우야담, #궁녀, #공주, #운명, #신분상승, #신분전환, #하룻밤의실수, #궁중로맨스, #역사드라마, #조선왕조실록, #킹메이커, #금지된사랑, #치정, #권력, #암투, #해피엔딩, #드라마리뷰
후킹멘트 (Hooking Ment)
“네가 정녕 공주란 말이냐?” 촛불이 꺼진 하룻밤의 정사(情事), 천하디 천한 궁녀가 공주의 영혼을 품고, 공주는 그런 궁녀를 질투하게 되었다. 뒤바뀐 운명의 소용돌이 속,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사랑을 지키려는 자와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자의 위험하고도 은밀한 이야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디스크립션 (Description)
조선 후기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실린 기이한 설화. 하룻밤의 실수로 몸과 마음이 뒤바뀐 공주와 궁녀의 이야기입니다. 엇갈린 운명 속에서 피어나는 애틋한 사랑과 신분을 둘러싼 궁중의 암투를 그려냅니다. 과연 그들은 제자리를 찾고 금지된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요? 야담도감이 들려주는 한 편의 드라마, 그 끝은 과연 해피엔딩일까요?
※ 달빛 아래, 엇갈린 연심
깊은 밤, 창덕궁 후원의 정자는 고요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오직 휘영청 밝은 달만이 연못 위를 비추며 수면에 은가루를 흩뿌릴 뿐이었다.
혜명공주는 창백한 얼굴로 연못을 내려다보며 애꿎은 손톱만 깨물었다.
그녀의 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내일이면 부마도위로 낙점된 성균관 유생, 이겸과의 초야가 치러질 터였다.
정해진 국혼, 거스를 수 없는 운명. 허나, 혜명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진정으로 연모하는 이는 이겸의 막역지우이자, 그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호위무사 ‘윤성’이었다.
날카로운 콧날과 서늘한 눈빛, 과묵하지만 언제나 자신을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을 혜명은 잊을 수가 없었다.
“월영아… 정녕 이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냐?” 혜명이 불안한 목소리로 곁에 선 나인, 월영에게 물었다.
월영은 혜명과 같은 해에 태어나 함께 자란 유일한 동무이자 심복이었다.
작고 가녀린 몸, 겁이 많아 보이는 선한 눈망울을 가졌지만, 혜명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는 아이였다.
“공주마마. 이 길이 아니면, 마마께서는 평생을 한을 품고 사실 것입니다.
오늘 밤, 이겸 나으리는 이곳에서 공주마마를 기다릴 것입니다.
허나 마마께서는 약조된 장소로 가시면 아니 됩니다.
제가 마마의 서신을 들고 대신 나으리를 만나, 마마의 진심을 전하고 오겠습니다.”
월영은 혜명의 손을 굳게 잡으며 말했다.
그 손의 온기가 혜명의 불안한 마음을 조금은 진정시키는 듯했다.
혜명은 품속에서 고이 접은 서신을 꺼내 월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서신에는 윤성을 향한 그녀의 애끓는 연심과, 이겸에게는 차마 부부가 될 수 없다는 절절한 거절의 말이 담겨 있었다.
약속된 시간, 월영은 혜명이 입던 옥색 비단 당의를 걸친 채 후원의 정자로 향했다.
공주가 입던 옷이라 그런지 품은 컸지만, 은은하게 풍기는 난향이 마치 자신이 정말 공주라도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정자에 다다랐을 때, 짙은 묵향과 함께 한 사내의 그림자가 달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멀리서 보기만 했던 이겸이었다.
훤칠한 키와 다부진 어깨, 학처럼 고고한 기품이 흘러넘쳤다.
월영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저런 사내가 자신의 서방님이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분수에 맞지 않는 생각이 스치자 월영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공주마마이십니까?” 이겸의 나직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어둠 속이라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그의 강직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월영은 잔뜩 긴장한 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나으리. 이 밤중에 소첩을 부르신 연유가 무엇입가요.”
최대한 공주처럼 위엄 있는 목소리를 꾸며냈지만,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이겸은 월영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월영의 작은 몸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월영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이겸은 월영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는 달빛이 비치는 쪽으로 그녀의 얼굴을 돌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눈에, 잔뜩 긴장한 채 떨고 있는 월영의 모습이 어렴풋이 들어왔다.
“내일이면 부부가 될 터인데, 이리 숨어 연모의 정을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여 불렀소.”
이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는 월영을 공주라 조금도 의심치 않는 듯했다.
그는 월영이 손에 쥔 서신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그것은 무엇이오? 나에게 주는 연서라도 되는 것이오?”
월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신을 내밀려 했다. 하지만 이겸의 행동이 한발 빨랐다.
그는 월영의 손에서 서신을 부드럽게 빼앗아 품에 넣고는, 그대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월영의 입에서 ‘아!’ 하는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품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뜨거웠다.
월영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나으리, 잠깐…!”
월영이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이겸의 팔은 더욱 단단히 그녀를 옭아맬 뿐이었다.
“마마, 두려워 마시오. 나는 그저, 마마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오.”
이겸의 뜨거운 숨결이 월영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의 손이 어느새 월영의 옷고름으로 향하고 있었다.
월영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안 된다고, 자신은 공주가 아니라고 소리쳐야 했다.
하지만 쾌락에 대한 원초적인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스르륵, 옷고름이 풀리는 소리가 정자 안에 울려 퍼졌다.
달빛 아래, 월영의 하얀 속살이 밤이슬처럼 영롱하게 드러났다.
이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월영의 몸이 굳었지만, 이내 그의 뜨거운 혀가 입안을 헤집자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풀렸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쾌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겸은 월영을 안아 들어 정자 안, 미리 깔아둔 푹신한 담요 위에 눕혔다.
그날 밤, 정자를 밝혔던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다 이내 꺼져버렸다.
짙은 어둠 속에서 두 남녀의 거친 숨소리와 살 섞는 소리만이 달빛 아래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 뒤바뀐 몸, 흔들리는 마음
새벽녘, 차가운 공기에 월영이 먼저 눈을 떴다.
낯선 감각에 몸을 일으키려던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몸이 아니었다.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 옥처럼 희고 고운 피부, 그리고… 여인의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풍만한 가슴.
꿈인가. 월영은 제 뺨을 세게 꼬집었다.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것은 필시 혜명공주의 몸이었다!
월영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옆에 누워 있던 이겸도 잠에서 깨어났다.
“마마, 어찌 이리 소란이시오.” 그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말하며 월영, 아니 혜명공주의 몸을 한 월영의 어깨를 감쌌다.
그의 맨살이 월영의 등에 닿자, 어젯밤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월영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월영은 자신도 모르게 공주와는 어울리지 않는 높은 톤의 목소리로 소리치고는 이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곤 허둥지둥 옷을 꿰어 입기 시작했다.
이겸은 그런 월영의 모습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젯밤, 수줍어하면서도 자신의 애무에 격렬하게 반응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행동 하나하나가 어설프고 불안해 보였다.
“마마,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시오?” 이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니… 그저, 날이 밝았으니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서….” 월영은 이겸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이겸은 월영의 턱을 잡고 자신을 보게 했다.
“오늘 밤, 초야를 치르고 나면 우린 정식 부부가 될 것이오.
그때까진 이리 숨어 만나야겠지만, 그 후엔 매일 밤 내 곁에 있게 될 터이니 너무 아쉬워 마시오.”
그의 다정한 목소리와 눈빛에 월영의 심장이 다시금 쿵쾅거렸다.
이 사내의 다정함은 오직 ‘혜명공주’만을 향한 것인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이 너무나도 미웠다.
월영은 황급히 정자를 빠져나와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한편, 같은 시각 월영의 누추한 다락방에서 눈을 뜬 혜명공주 역시 자신의 몸을 보고 경악하고 있었다.
거칠고 투박한 손, 볼품없이 마른 몸.
이것은 분명 궁녀 월영의 몸이었다.
“이게 무슨…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혜명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절규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다른 궁녀가 들어왔다.
“월영아, 아침부터 웬 소란이야? 어서 공주마마 시중 들러 가야지!” 혜명은 자신을 ‘월영’이라 부르는 궁녀를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이제 자신은 공주가 아니라 천한 궁녀 월영이었다.
혜명은 망연자실한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의 몸을 하고 있을 월영과, 어젯밤 이겸에게 가기로 했던 일이 떠올랐다.
‘설마… 설마 월영이가….’ 끔찍한 상상이 혜명의 머리를 스쳤다.
혜명은 급히 공주의 처소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자신의 얼굴을 한 월영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앉아 있었다.
혜명은 주변의 눈을 피해 월영을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갔다.
“월영아!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어젯밤, 그분과… 그분과 함께 있었던 것이냐?”
혜명의 다그침에 월영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침묵은 긍정이었다.
혜명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연모하는 이는 윤성이었지만, 정혼자인 이겸과 자신의 심복이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는 배신감과 모멸감을 안겨주었다.
“어찌… 어찌 네가 감히!” 혜명이 월영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월영의 몸이지만, 아픔은 혜명의 것이기도 했다.
월영은 붉게 부어오르는 뺨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죽여주시옵소서.”
월영의 눈물에 혜명의 마음도 약해졌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연심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다.
월영을 탓할 수만은 없었다.
“일단… 몸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는 서로의 신분으로 살아야 한다.
내가 네 일을 할 테니, 너는 공주로서 흠잡히지 않도록 행동거지를 조심하거라. 알겠느냐?”
혜명은 월영에게 단단히 이르고는 자리를 떴다.
공주의 몸을 한 월영은 홀로 남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날 이후, 월영은 어설픈 공주 연기를 시작했다.
이겸은 그런 월영을 살뜰히 챙겼다.
국혼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이겸은 더욱 적극적으로 월영에게 다가왔다.
함께 후원을 산책하고, 시를 지어 선물하고, 아름다운 비녀를 머리에 꽂아주었다.
그의 다정함에 월영의 마음은 솜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것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겸의 곁에 있는 시간이 꿈결처럼 달콤했다.
궁녀가 된 혜명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속을 태웠다.
이겸을 향한 질투와 월영에 대한 원망, 그리고 윤성을 향한 그리움이 뒤섞여 그녀를 괴롭혔다.
※ 싹트는 의심, 깊어지는 사랑
국혼이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이겸은 월영과 함께 서고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평소 시와 서예에 능했던 혜명공주와 달리, 월영은 글보다는 몸을 쓰는 일에 더 익숙했다.
어려운 한자가 나올 때마다 월영이 미간을 찌푸리자, 이겸은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그 뜻을 알려주었다.
“마마, 최근 들어 어려운 글은 잘 읽지 못하시는 듯합니다. 혹, 혼례 준비로 심신이 고단하신 것입니까?”
이겸의 말에 월영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눈치챈 것일까?’
월영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그저… 나으리와 함께 있으니,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뿐입니다.”
월영은 서툰 애교를 부리며 이겸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이겸은 그런 월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스치듯 의심의 빛이 어렸다.
예전의 혜명공주는 총명하고 기품이 넘쳤다.
때로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빈틈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공주는 어딘가 어설프고 순진했다.
겁이 많아 작은 벌레에도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고, 어려운 시구 앞에서는 아이처럼 울상을 지었다.
말하는 법이나 걷는 모습, 심지어는 음식을 먹는 습관까지도 미세하게 달라져 있었다.
처음에는 국혼을 앞둔 긴장감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위화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결정적인 의심은 혜명공주의 몸을 한 월영의 손을 보았을 때 확신으로 변했다.
공주의 손은 마땅히 희고 고와야 했다.
하지만 월영의 손에는 가늘게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손톱 밑에는 희미하게 흙물이 든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오랜 시간 허드렛일을 한 사람의 손이었다.
이겸은 그날 이후, 궁녀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공주의 곁을 그림자처럼 맴도는 한 궁녀를 발견했다.
바로 월영의 몸을 한 혜명공주였다.
그녀는 다른 궁녀들처럼 허리를 굽히고 조용히 시중을 들었지만,
문득문득 드러나는 고고한 자태와 월영(공주의 몸)을 바라보는 애틋하고도 원망스러운 눈빛은 숨길 수가 없었다.
특히 이겸 자신이 월영에게 다정하게 대할 때면, 그 궁녀의 눈빛은 질투와 슬픔으로 이글거렸다.
이겸은 혼란스러웠다. 두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 그리고 기이한 상황들.
그는 진실을 확인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날 밤, 이겸은 월영(공주의 몸)을 자신의 처소로 몰래 불렀다.
“마마, 드릴 말씀이 있소.” 월영은 아무것도 모른 채 설레는 마음으로 이겸을 찾아갔다.
이겸은 월영을 자리에 앉히고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차라며 향긋한 국화차를 내어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혜명공주가 알레르기 때문에 입에도 대지 못하는 차였다.
월영은 이겸이 주는 차를 아무 의심 없이 마셨다.
차를 마시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이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마지막 확인을 위해 월영에게 물었다.
“마마, 혹… 어릴 적 나와 함께 연을 날렸던 것을 기억하시오?” 월영은 당황했다.
그런 기억이 있을 리 없었다.
“기, 기억이 잘….” 월영이 말을 더듬자, 이겸은 나직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마마께서는 나와 그런 추억이 없소. 내가 연을 날렸던 아이는, 마마의 몸종이었던 월영이라는 아이였지.”
이겸의 말에 월영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제야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이겸이 자신을 떠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찌 된 일이오. 어찌하여 마마의 몸에 다른 이의 영혼이 들어있는 것이오. 그리고 진짜 공주마마는, 지금 어디에 계신 것이오!”
이겸의 날카로운 추궁에 월영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월영의 울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울 때, 이겸은 분노보다는 알 수 없는 연민과 함께 더욱 깊어지는 연심을 느꼈다.
어설프고 순진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따뜻했던 그녀.
자신이 사랑에 빠진 것은 혜명공주의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월영의 영혼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우는 월영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제 그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뒤바뀐 운명의 진실을 밝히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사랑을 위해 이 잔혹한 비밀을 묻어둘 것인가.
그의 마음은 이미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랑, 월영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진짜 혜명공주를 찾아, 이 모든 것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랑은 이제 막, 위험한 진실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 드러나는 진실, 잔혹한 운명
월영의 눈물 어린 고백으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겸은 그날 이후,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히 부마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밤이 되면 비밀리에 월영의 몸을 한 혜명공주와 접촉했다.
처음에는 이겸을 경계하며 밀어내던 혜명 역시,
자신의 본모습을 꿰뚫어 보고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그의 모습에 조금씩 마음의 빗장을 열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이 기이한 운명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방법을 찾기 위해 밤마다 머리를 맞댔지만,
영혼이 뒤바뀐 전례 없는 사건에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세 사람의 위태로운 비밀을 눈치챈 또 다른 이가 있었으니, 바로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대비였다.
대비는 일찍이 아들을 잃고, 지금의 왕이자 자신의 조카를 허수아비로 세운 채 수렴청정을 하며 막후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야심가였다.
그녀의 눈에 손녀인 혜명공주는 그저 정적을 견제하고 자신의 세력을 넓히기 위한 장기판의 졸에 불과했다.
대비는 최근 들어 눈에 띄게 어수룩해진 혜명공주(월영)의 행동과,
그런 공주의 곁을 맴돌며 안절부절못하는 한 궁녀(혜명)의 모습을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궁의 모든 눈과 귀였다.
결국 대비는 자신의 심복 상궁을 시켜 두 사람의 뒤를 밟았고,
이겸까지 셋이서 몰래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월영과 혜명의 영혼이 뒤바뀌었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대비의 입가에 뱀처럼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이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그녀는 이 비밀을 빌미로 이겸의 가문을 옭아매고, 눈엣가시였던 혜명공주를 폐위시킨 뒤,
그 자리에 자신의 친족을 앉힐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희생양, 바로 궁녀의 몸을 하고 있는 진짜 혜명공주였다.
며칠 뒤, 대비는 혜명(월영의 몸)을 자신의 처소로 불렀다.
“네년이 감히, 천한 것의 영혼으로 옥체를 더럽히고 공주 행세를 해?!”
대비의 서슬 퍼런 호통에 혜명은 납작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아니, 빌어야 했다.
자신은 이제 힘없는 궁녀 월영일 뿐이었으니까.
“할마마마, 소인이 아니오라… 저 아이가…!” 혜명이 다급하게 진실을 말하려 했지만, 대비는 들을 생각조차 없었다.
“닥치거라! 어디서 감히 왕손의 몸에 저주를 내리고도 발뺌을 하려 드느냐!”
대비는 혜명에게 ‘공주를 저주하여 몸을 빼앗은 요망한 계집’이라는 누명을 씌웠다.
그리고는 혜명을 옥에 가두고 혹독한 고문을 시작했다.
뜨겁게 달군 인두가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을 지지고, 날카로운 비녀가 손톱 밑을 파고들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의 고통 속에서 혜명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월영(혜명의 몸)과 이겸은 사색이 되었다.
월영은 당장이라도 대비에게 달려가 모든 것을 자신이 꾸민 일이라 자백하고 혜명을 구해내려 했다.
“안되오! 지금 마마께서 가시면, 대비는 기다렸다는 듯 마마를 폐위시키고 두 사람 모두를 죽일 것이오.
이것은 처음부터 우리 모두를 노린 함정이오.”
이겸은 월영을 가로막으며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했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과 지켜야 할 주군 모두를 잃을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그는 더 이상 다정한 서생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가문이 가진 모든 힘과 인맥을 동원해 대비의 계략에 맞서 싸울 준비를 시작했다.
밤의 장막이 내려앉은 궁궐, 잔혹한 운명의 굴레 속에서 세 사람의 목숨을 건 싸움이 조용히 막을 올리고 있었다.
※ 운명을 건 선택
차가운 돌바닥의 한기가 온몸을 파고드는 옥사 안, 혜명은 만신창이가 된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고문으로 찢어진 옷 사이로 붉은 피멍과 살점이 흉하게 드러났지만, 육체의 고통보다 그녀를 더 괴롭히는 것은 절망감이었다.
이대로 죽는구나.
자신의 몸과 신분을 되찾기는커녕, 요망한 계집이라는 누명을 쓴 채 잊혀 가겠구나.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이겸이었다. 그는 옥졸을 미리 매수해두고, 모두가 잠든 깊은 밤 혜명을 찾아왔다.
그는 차가운 약과 깨끗한 천을 꺼내 혜명의 상처를 직접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이 상처에 닿을 때마다 혜명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그리고 월영이가… 아니, 공주마마께서 반드시 그대를 구해낼 것이오.”
그의 단단한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믿음이 실려 있었다.
혜명은 그제야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이겸이 옥사를 다녀간 그 시각, 월영은 공주의 몸으로 대비의 처소 앞에 엎드려 석고대죄를 하고 있었다.
차가운 밤이슬이 소복을 적시고 온몸의 감각을 앗아갔지만, 월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혜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고통도 감내할 수 있었다.
그녀의 간절함은 ‘공주를 아끼는 마음’으로 포장되어 궁궐 전체에 퍼져나갔다.
대비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신하들 사이에서 동정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이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영의정인 이판서와 뜻을 같이하는 대신들을 비밀리에 규합하여
대비의 부당함을 고하고 왕의 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준비했다.
왕은 비록 힘없는 허수아비였지만, 왕실의 적통성은 그에게 있었다.
명분은 이겸에게 있었다.
결전의 날이 밝았다.
조회 시간, 이겸과 신하들은 왕 앞에 엎드려 대비의 죄상을 낱낱이 고했다.
증좌는 차고 넘쳤다.
대비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국고를 횡령하고, 무고한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증거들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음모의 중심에 ‘궁녀 저주 사건’이 있음을 폭로했다.
당황한 대비는 모든 것이 날조라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고 있었다.
그때, 옥에서 풀려난 혜명(월영의 몸)이 이겸의 호위를 받으며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엉망이 된 행색이었지만, 그녀의 눈빛만은 꺾이지 않은 난초처럼 꼿꼿했다.
혜명은 왕 앞에 엎드려 자신의 몸에 깃든 영혼이 진짜 ‘혜명공주’임을 눈물로 호소했다.
그리고 이 모든 비극이 자신의 어리석은 연심에서 시작되었음을 고백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그때, 월영(혜명의 몸)이 입을 열었다.
“소녀, 월영이옵니다. 하오나 이 몸의 주인은 혜명공주마마가 확실하옵니다.”
그녀는 혜명공주만이 알 수 있는 어릴 적의 비밀, 왕과 단둘이 나눴던 약속들을 막힘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왕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마지막으로 월영은 자신의 팔뚝에 있는 작은 흉터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십 년 전, 마마께서 절벽에서 떨어지려는 저를 구하다 돌에 긁힌 상처이옵니다. 마마의 몸에는 지금 이 상처가 없을 것이옵니다.”
그 말에 대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모든 것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결국 왕은 대비에게서 수렴청정의 권한을 거두고 그녀를 유폐시키는 교지를 내렸다.
세 사람의 위험한 도박은, 일단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과연 그들은 뒤바뀐 운명을 되돌리고,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눈빛이 허공에서 애틋하게 얽혔다.
※ 제자리를 찾은 사랑
대비가 몰락하고 며칠이 지난 깊은 밤, 혜명공주의 처소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월영(혜명의 몸)과 혜명(월영의 몸), 그리고 이겸. 세 사람은 마주 앉아 있었지만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듯했지만, 가장 중요한 그들의 몸은 여전히 뒤바뀐 채였다.
온갖 의서를 뒤지고 용하다는 무당까지 불러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쩌면 평생을 이리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세 사람을 짓눌렀다.
그때, 혜명이 먼저 침묵을 깼다.
“이젠…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내가 월영이로, 네가 공주로….”
그녀의 목소리는 체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월영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었다.
공주의 삶, 이겸의 사랑, 꿈결 같던 시간이었지만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이겸은 말없이 두 여인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월영(혜명의 몸)의 앞에 섰다.
그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내가 사랑한 것은 공주의 신분이 아니오.”
이겸의 시선은 오롯이 월영의 영혼을 향해 있었다.
“그대의 어설픔, 그대의 선함, 그대의 따뜻한 마음…
나는 그 모든 것을 사랑했소. 내 아내가 될 사람은, 바로 당신이오.”
그는 품에서 작은 옥가락지 하나를 꺼내 월영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가락지가 손가락에 끼워지자마자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며 세 사람의 몸을 감쌌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강렬한 빛이 사라지고, 정신을 차렸을 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
월영과 혜명이 원래의 제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혜명공주의 고귀한 몸으로 돌아온 월영,
그리고 궁녀의 누추한 몸에서 벗어난 진짜 혜명.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혼란도 잠시, 혜명은 자신 앞에 서 있는 이겸과,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월영을 보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그의 마음만은 아니었다.
이겸의 눈빛은 여전히 월영을 향해 있었다.
혜명은 깨달았다. 그가 사랑한 것은 공주라는 허울이 아니라, 월영이라는 한 여인이었음을.
자신의 어리석은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혜명은 두 사람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사람… 행복해야 한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며칠 뒤, 혜명공주는 자진하여 국혼을 파기하고, 궁을 떠나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뜻을 왕에게 전했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왕은 그녀의 청을 윤허했다.
혜명은 궁을 떠나기 전, 자신을 찾아온 호위무사 윤성과 마주했다.
늘 그랬듯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그녀를 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새로운 인연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월영은 이겸의 정식 부인이 되었다.
천한 궁녀가 정승 댁 며느리가 된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지만, 그들의 사랑 앞에서는 신분의 벽도 무의미했다.
초야를 치르는 날, 월영은 수줍은 새색시가 되어 이겸의 앞에 섰다.
이겸은 그녀의 옷고름을 천천히 풀며 속삭였다.
“그날 밤, 정자에서의 일이 실수였다 생각하시오?”
월영이 고개를 젓자, 이겸은 그녀의 입술에 뜨겁게 입을 맞추었다.
촛불이 꺼지고, 방 안에는 두 사람의 사랑이 무르익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하룻밤의 실수는 기나긴 운명의 밤을 지나, 마침내 굳건한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어긋났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고, 상처 입었던 모든 이들은 마침내 행복을 손에 쥐었다.
유튜브 엔딩멘트
하룻밤의 실수가 불러온 기묘한 운명의 장난, 재미있게 보셨나요?
자신의 것이 아닌 옷을 입고, 남의 인생을 살아야 했던 두 여인.
그리고 껍데기가 아닌 영혼을 사랑한 한 남자.
여러분이 만약 이겸이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하셨을까요?
진짜 공주를 택했을까요, 아니면 사랑하는 영혼을 택했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야담도감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구독과 좋아요 잊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