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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담광장 - 자정 넘어 종로 뒷골목에서 마주친 소복 여인, 그녀가 내민 손에는 『천예록』 야행 괴담 계열을 각색한 이야기입니다.
통금이 지난 종로 뒷골목, 술에 취해 걷던 사내 앞에 소복 입은 여인이 소리도 없이 나타났습니다. 얼굴을 가린 여인이 말없이 손을 내밀자 사내는 그대로 주저앉았지요.
여인의 손바닥에 놓여 있던 것은 사내가 석 달 전 잃어버린 물건이었습니다. 그것을 되찾은 날부터 그의 집안에 벌어진 놀라운 일들.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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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자정을 알리는 인경 소리가 끊긴 종로의 스산한 뒷골목. 통금을 어기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걷던 사내의 눈앞에, 짙은 안개를 뚫고 소복 입은 여인이 소리 없이 나타납니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스르르 다가온 여인이 창백한 손을 내밀자, 사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주저앉고 맙니다. 과연 여인의 손에 놓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공포가 기적으로 바뀌는 기묘하고도 감동적인 야행 괴담, 지금 시작합니다.
※ 1: 가문의 가보를 잃고 절망에 빠져 통금 시간까지 술을 마신 김생
조선의 심장이라 불리는 거대한 한양 도성, 그중에서도 팔도의 모든 진귀한 물화가 모여들고 수많은 인파로 밤낮없이 북적이는 가장 번화한 종로 운종가의 밤은, 해가 떠 있을 때의 그 찬란하고 소란스러운 화려함과는 전혀 다른 서늘하고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정을 알리는 보신각의 인경(人定) 소리가 서른세 번 도성의 하늘을 장엄하고 묵직하게 울려 퍼지고 나면, 도성을 둘러싼 거대한 성문들은 굳게 닫혀 빗장이 걸렸고, 왁자지껄하던 운종가 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쥐죽은 듯한 적막과 서늘한 어둠 속에 완전히 휩싸였습니다. 통행금지를 알리는 이 인경 소리 이후에 허가 없이 거리를 배회하다 순라군에게 적발되면, 매서운 곤장을 맞고 엄한 경무를 면치 못하는 엄격한 국법이 시퍼렇게 살아있었기에, 백성들은 모두 일찌감치 귀가하여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숨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이 스산하고 뼈가 시리도록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도, 차마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허름하고 후미진 뒷골목 주막 구석에 틀어박혀, 독하고 쓴 탁주만 연거푸 들이켜며 속을 태우는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김생이었습니다.
한때 종로 바닥에서 꽤나 이름이 드높았던 비단 상단의 젊고 유능한 대행수였던 김생의 현재 몰골은, 길거리를 떠도는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참혹하고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던 최고급 비단옷 대신 때와 흙먼지에 찌들어 거칠어진 낡은 도포 자락을 걸치고 있었고, 단정했던 상투는 헝클어져 산발이 된 채 그의 파리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습니다. 푹 패인 두 볼과 초점 잃은 퀭한 두 눈동자는 그가 근래에 겪고 있는 모진 풍파와 지옥 같은 고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승승장구하던 김생이 이토록 처참한 나락으로 한순간에 곤두박질친 것은, 정확히 석 달 전 억수가 같이 비가 쏟아지던 어느 끔찍한 밤의 일 때문이었습니다. 대대로 가문에서 목숨처럼 소중히 물려받아, 상단의 모든 막대한 거래와 중요한 계약에 절대적인 신물로 사용되던 '백옥 인장'을 어이없게 분실하고 만 것입니다. 그 백옥 인장은 단순한 도장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인장이 찍히지 않은 상단의 어음과 계약서는 한낱 불쏘시개 종잇조각에 불과했고, 김생이 가문의 신물인 인장을 잃어버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성에 쫙 퍼지자마자, 평소 굽신거리던 거래처 사람들과 빚쟁이들은 굶주린 승냥이 떼처럼 잔인하게 몰려들어 김생의 상단 재물과 으리으리했던 집문서까지 모조리 강제로 앗아가 버렸습니다.
'내 놈이 참으로 천벌을 받을 죽일 놈이지. 아버님께서 핏발 선 눈으로 임종 직전까지도 네 목숨보다 중히 여기라며 피 토하듯 신신당부하셨던 그 귀한 가보를, 술에 취해 길바닥에 흘리다니! 내가 미친놈이야, 내 두 눈을 내 손으로 뽑아버려야 해. 으흐흑...'
김생은 깨진 사기 술잔을 쥔 손을 바들바들 떨며, 지독한 자책과 후회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허우적거렸습니다. 지난 석 달 동안 잃어버린 인장을 찾기 위해 도성 안팎의 흙바닥을 짐승처럼 샅샅이 기어 다니며 뒤지고, 남은 돈을 모조리 털어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 피눈물을 흘리며 굿판까지 며칠 밤낮으로 벌였지만, 그 영롱한 백옥 인장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비바람도 제대로 막지 못하는 초라한 셋방에서 내일 당장 길거리에 나앉아 굶어 죽게 생긴 늙으신 어머니와 뼈만 남은 어린 자식들, 그리고 평생을 갚아도 갚지 못할 산더미 같은 무서운 빚더미뿐이었습니다. 눈을 뜨면 지옥이었고, 숨을 쉬는 것조차 죄스러웠습니다.
"주모! 여기, 여기 독한 탁주 한 사발 더 가득 내오시오! 오늘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세상을 술로 영영 잊어버릴 작정이니,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 내오란 말이오!"
혀가 꼬인 채 붉게 충혈된 눈으로 고래고래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는 김생을 향해, 주막의 불을 끄고 정리를 하던 늙은 주모가 행주를 던지며 혀를 끌쯧 차며 다가왔습니다.
"아이고, 김 서방! 인경 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러고 있수? 순라군들 칼 차고 뜨기 전에 얼른 뒷길로 숨어 들어가슈. 여기서 이러다 붙잡혀서 포도청에라도 끌려가면, 곤장 맞고 뼈도 못 추릴 텐데 남은 식구들은 어찌 살라고 이러는 게요. 쯧쯧, 내 불쌍해서 한마디 하는 거니 썩 일어나시오!"
늙은 주모의 타박과 현실적인 걱정에도 김생은 눈물을 찔끔거리며 허탈하고 미친 듯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습니다. 곤장이 찢어지게 아프다 한들 지금 그의 찢어진 가슴보다 아플 리 없었고, 포도청의 차가운 감옥이 두려울 처지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순라군에게 붙잡혀 옥살이를 하거나 매를 맞아 죽는 것이, 내일 아침 자신만 바라보는 가족들의 퀭하고 절망 어린 얼굴을 맨정신으로 마주하는 것보다 수백 배는 덜 고통스러울 것만 같았습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난 김생은, 주모가 억지로 쥐여주는 부러진 지팡이에 위태롭게 의지한 채, 차가운 삭풍이 몰아치는 종로의 칠흑 같은 어두운 뒷골목을 향해 무겁고 절망적인 발걸음을 질질 끌며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 2: 인적이 끊긴 종로 뒷골목, 짙은 안개 속에서 나타난 소복 여인
자정을 훌쩍 넘긴 종로의 미로 같은 뒷골목은, 평소 수많은 상인들과 왈패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던 낮의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거대하고 버려진 무덤처럼 음산하고 소름 끼치는 흉흉한 기운만을 차갑게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달빛조차 짙게 드리운 먹구름에 완벽하게 가려져 바닥에 스며들지 못하는 좁은 골목길은, 당장 한 치 앞의 발밑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캄캄하고 먹먹했습니다. 어디선가 스산하고 날카로운 밤바람이 골목을 타고 불어올 때마다, 낡은 집들의 찢어진 문풍지가 부들부들 떠는 소리가 마치 억울하게 죽은 귀신의 서러운 곡소리처럼 귀를 찔러왔고, 청계천 쪽에서부터 밀려온 짙고 축축한 물안개가 골목 바닥을 스멀스멀 뱀처럼 기어 다니며 김생의 시린 발목을 축축하게 휘감아 올랐습니다.
'으스스하고 끔찍하구나... 평소 같으면 이 골목 어귀에 누군가 켜둔 희미한 등불이라도 하나쯤 켜져 있을 터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안개가 짙고 사방이 막막하여 집으로 가는 길을 통 찾을 수가 없네. 취기가 너무 과했나...'
술기운에 비틀거리며 벽을 더듬던 김생은, 이리저리 얽힌 좁은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매다 그만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하고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저 멀리 골목 끝에서 "딱, 딱, 딱," 하며 도성을 순찰하는 순라군들이 차가운 딱따기를 치며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스산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 소리에 김생은 덜컥 겁이 나 등골이 오싹해졌고, 곤장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숨을 헐떡이며 들이마신 채 처마 밑 가장 짙은 그림자가 진 구석으로 몸을 웅크려 짐승처럼 숨었습니다. 차가운 흙벽에 등을 딱 붙이고 거친 숨을 애써 짓누르며 짙은 안개가 걷히고 순라군이 지나가기만을 벌벌 떨며 기다리던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골목 전체의 공기가 한겨울 꽁꽁 언 계곡물처럼 얼음장같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이 피부로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방금 전까지 멀리서 들려오던 개 짖는 소리도, 밤바람에 스산하게 흔들리던 마른 나뭇가지 부딪히는 소리도, 심지어 점점 다가오던 순라군의 딱따기 소리마저 일순간 뚝 끊어지고, 세상이 완벽한 진공 상태에 빠져버린 듯한 소름 끼치고 기괴한 정적이 찾아왔습니다. 김생이 이 비현실적인 기운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이상함을 느끼고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골목 쪽을 바라본 순간, 짙게 깔린 물안개 너머 골목 저 끝에서 무언가 하얗고 기이한 형체가 어렴풋이 아른거리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저, 저게 무엇이냐? 이 야심하고 통행이 금지된 시간에 누가 홀로 길을 나선단 말인가... 사람인가? 아니, 사람의 기운이 아니다...'
김생의 핏줄을 타고 흐르던 뜨거운 술기운이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얼어붙으며 달아났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습니다. 자욱한 안개를 뚫고 점차 선명해지는 그 하얀 형체는, 놀랍게도 새하얀 소복을 길게 늘어뜨려 입은 정체 모를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은 칠흑같이 검고 긴 머리카락을 허리춤까지 헝클어진 채 풀어 헤치고 있었고, 고개는 바닥을 향해 푹 숙인 채 그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완전히 음침하게 가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생의 심장을 멎게 만들고 가장 경악하게 만든 것은 여인의 기괴한 걸음걸이였습니다. 땅에 질질 끌리는 소복 자락 아래로 사람의 발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당연히 나야 할 발소리나 옷깃 스치는 소리조차 완벽하게 무음이었습니다. 여인은 마치 중력이 없는 허공에 반 뼘쯤 뜬 채로, 짙은 안개 위를 미끄러지듯 스르르 총총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헉... 귀, 귀신이다... 사람 살려..."
김생은 머릿속으로 당장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야 한다고 외쳤지만, 그의 두 다리는 차가운 흙바닥에 꽁꽁 얼어붙어 뿌리를 내린 듯 단 한 발자국도 떼어지지 않았습니다. 극도의 공포에 성대가 꽉 마비되어 그토록 지르고 싶은 비명조차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습니다.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려 해도, 알 수 없는 기이한 공포와 마력에 완전히 짓눌려 귀신을 향한 시선을 도무지 피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소복 입은 여인은 아주 천천히, 그러나 절대 피할 수 없는 끔찍한 운명처럼 김생이 웅크리고 숨어있는 캄캄한 처마 밑을 향해 일직선으로 흔들림 없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주변의 공기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살을 에는 듯 차가워졌고, 코끝으로는 오래된 무덤가에서나 맡을 법한 짙고 축축한 흙냄새와 오래된 향내음이 기분 나쁘게 뒤섞여 훅 밀려왔습니다. 여인과 김생 사이의 거리는 이제 불과 세 발자국도 채 남지 않을 만큼 숨 막히게 가까워졌습니다.
※ 3: 다가온 여인이 내민 창백한 손,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익숙한 물건
김생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흉곽의 뼈를 날카롭게 뚫고 밖으로 튀어나올 듯 귓가에서 미친 듯이 쿵쾅거렸습니다. 낡고 더러운 도포 자락을 생명줄인 양 꽉 움켜쥔 두 손마디가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렸고, 온몸은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통제할 수 없이 떨렸습니다. 세 발자국 앞, 코가 닿을 만큼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소리 없이 스르르 다가온 소복 여인은, 마침내 그 소름 끼치는 기괴한 움직임을 멈추었습니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여 창백한 얼굴을 검은 머리카락으로 온전히 가린 상태였고, 미동조차 없는 그 모습은 오히려 살아 움직이는 것보다 수백 배는 더 끔찍한 공포를 자아냈습니다.
숨 막히는 무거운 정적 속에서 김생은 덜덜 떨리는 시퍼런 입술을 간신히 달싹이며, 목구멍에 피가 날 듯 긁히는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 냈습니다.
"뉘, 뉘신지 모르오나... 제발... 제발 이 불쌍한 놈의 목숨만은 살려주시오... 나, 나는 가진 것 하나 없이 빚만 잔뜩 진 채 죽지 못해 살아가는 껍데기뿐인 비루한 사내요... 흑흑, 제발 돌아가 주시오..."
하지만 눈앞의 여인은 애절한 김생의 애원에도 아무런 미동이나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차가운 침묵만이 두 사람 사이를 무겁게 채우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불현듯, 굳어있던 여인의 가냘픈 어깨가 미세하게 움직이더니,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소복 소매 속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른손이 빠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달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지독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여인의 그 손은 기이하게도 자체적으로 소름 끼치도록 창백하고 하얗게 인광을 뿜어내며 빛나고 있었습니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을 것 같은 그 뼈만 남은 마르고 차가운 손이, 덜덜 떠는 김생의 가슴팍을 향해 스르르 허공을 가르고 다가왔습니다.
'아아, 이제 모든 것이 끝이구나. 억울하게 죽은 원귀에게 단단히 홀려 이 밤거리에서 허무하게 혼을 빼앗기겠구나. 불쌍한 내 어머니와 처자식은 어찌 살라고...'
김생은 극도의 공포와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무릎이 꺾이며 축축한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상했던, 목을 조르거나 심장을 파고드는 차가운 죽음의 손길은 끝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의 코앞에서 무언가 묵직하고 서늘한 물건이 쑥 내밀어지는 미세한 기척과 함께, 옅은 옥(玉) 부딪히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습니다.
얼마의 억겁 같은 시간이 흘렀을까. 떨리는 눈꺼풀을 간신히 위로 밀어 올린 김생의 초점 잃은 시선이, 자신의 얼굴 바로 앞에 딱 멈춰있는 여인의 펼쳐진 창백한 손바닥을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 귀신같은 손바닥 위에 고스란히 놓인 물건을 똑똑히 확인한 순간, 김생은 공포에 질린 비명 대신 "헉!" 하고 숨을 거칠게 들이켜며 두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부릅떴습니다.
"이, 이것은...! 말도 안 돼...!"
여인의 창백하고 마른 손바닥 위에 놓여있는 것은, 놀랍게도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영롱하게 빛나는 옥돌이었습니다. 윗부분에는 김생의 가문을 상징하는 정교하고 위엄 있는 해태 문양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아랫부분의 홈에는 붉은 인주 자국이 지워지지 않고 희미하게 묻어 남아있는 그것. 바로 석 달 전, 김생이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밤 어이없게 잃어버리고 온 세상을 짐승처럼 기어 다니며 피눈물로 찾아 헤매던 가문의 절대적인 가보, '백옥 인장'이었습니다!
김생은 방금 전까지 자신의 목을 조르던 귀신에 대한 끔찍한 공포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채, 마법에라도 홀린 듯이 미친 사람처럼 손을 뻗어 여인의 손바닥 위에 놓인 인장을 덥석 움켜쥐듯 집어 들었습니다. 뼛속까지 시리도록 차갑고 매끄러운 옥의 감촉, 눈을 감고도 맞출 수 있는 손끝에 닿는 익숙한 조각의 미세한 결. 수천 번을 어루만졌던, 틀림없는 그의 잃어버린 백옥 인장이었습니다.
"이 귀하고 소중한 것을... 대체 어찌... 어찌 당신이 가지고 있단 말이오... 대체 뉘시오!"
김생이 극도의 흥분과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들어, 마침내 여인의 얼굴을 확인하려던 찰나였습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뼛속을 얼어붙게 만드는 짐승의 울음 같은 차가운 돌풍이 좁은 골목을 거세게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짙은 물안개가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며 순식간에 김생의 시야를 완벽하게 가렸고, 그는 거센 모래바람에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습니다. 돌풍이 잦아들고 안개가 걷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코앞에 서 있던 소복 입은 여인은 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신기루처럼,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텅 빈 어두운 골목에는 오직 멍하니 흙바닥에 주저앉아, 기적처럼 되찾은 백옥 인장을 가슴에 꽉 움켜쥐고 있는 김생 혼자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손에 쥔 인장에서 전해지는 소름 돋게 서늘한 냉기만이, 방금 전 자신이 겪은 그 끔찍하고도 기이한 일이 환상이 아닌 완벽한 현실이었음을 차갑게 증명해주고 있었습니다.
※ 4: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와 물건을 확인하고 기이한 꿈에 빠져드는 김생
김생은 손에 쥔 백옥 인장을 자신의 목숨보다 귀한 듯 품속 깊숙이 단단히 품고는, 미친 듯이 비틀거리며 캄캄한 골목길을 짐승처럼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몸을 가누지 못하게 만들었던 지독한 술기운은 진작에 식은땀과 함께 완벽하게 달아났고, 어두운 돌부리에 걸려 수없이 넘어지고 진흙탕에 구르면서도 그는 오직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을 향해 뛰고 또 뛰었습니다. 순라군에게 들켜 곤장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두려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품에 들어온 이 기적 같은 현실을 당장 밝은 불빛 아래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은 미칠 듯한 간절함만이 그의 온몸을 지배하며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것 같은 상태로 다 쓰러져가는 초라한 셋방의 사립문을 거칠게 벌컥 열고 들어선 김생은, 냉골 같은 방 안에서 얇은 이불 하나를 덮고 웅크린 채 새우잠을 자고 있던 아내와 병든 어머니,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깰세라 황급히 방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화로 깊숙한 곳에 남은 불씨를 간신히 살려 호롱불을 켠 그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품속에서 조심스레 백옥 인장을 꺼내어 흔들리는 노란 불빛 아래 가까이 비춰보았습니다.
"맞아... 내 인장이 틀림없어. 여기 옥의 오른쪽 한 귀퉁이에 어릴 적 내가 떨어뜨려 살짝 금이 간 흔적까지 완벽해... 으흐흑, 아버님, 아버님... 불효자식이 마침내 가문의 신물을 찾았습니다..."
김생은 영롱한 인장을 자신의 더러운 뺨에 비비며 소리 없는 처절한 오열을 쏟아냈습니다. 지난 석 달 동안 밑바닥으로 추락하여 겪었던 짐승만도 못한 굴욕과 절망, 굶주림에 지쳐가며 피골이 상접해가는 가족들의 퀭한 얼굴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 작은 옥도장 하나면 그동안 흩어지고 등을 돌렸던 상단의 굵직한 거래처들을 다시 모을 수 있었고, 땅에 떨어진 가문의 명예를 되찾아 산더미 같은 빚을 청산하고 가족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칠 듯한 기쁨과 환희도 잠시, 거대하고 섬뜩한 의문과 두려움이 그의 머릿속을 차갑게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대체 그 소복 입은 여인은 누구였단 말인가. 어찌하여 이름 모를 귀신이 석 달이나 행방이 묘연했던 내 가보를 정확히 찾아내어, 하필 오늘 밤 그 으슥하고 인적 없는 깊은 뒷골목에서 나타나 내게 돌려준 것이지? 도대체 나에게 무슨 원한이나 인연이 있단 말인가...'
인장을 기적처럼 찾았다는 벅찬 안도감과 극도의 긴장감이 한꺼번에 무너지듯 풀리자, 갑작스레 수일 밤을 새운 듯한 묵직한 피로가 거대한 납덩이처럼 전신을 강하게 짓눌러왔습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져 도저히 뜰 수 없게 된 김생은, 백옥 인장을 두 손으로 가슴에 꽉 쥔 채 차가운 방바닥에 쓰러지듯 눕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깊고 기이하며 서늘한 수마(睡魔) 속으로 속절없이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꿈속에서 김생은 짙은 회색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어느 낯설고 황량한 산기슭을 홑옷 차림으로 홀로 걷고 있었습니다. 주변은 온통 스산한 기운으로 가득했고, 뼈를 깎는 듯한 차가운 바람결에 누군가의 구슬프고도 서러운 여인의 흐느낌이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홀린 듯이 그 애달픈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무겁게 옮기자, 놀랍게도 조금 전 종로 뒷골목에서 마주쳤던 바로 그 기괴한 소복 입은 여인이, 비석조차 제대로 없는 허름하고 낡은 무덤 앞에 등을 보이고 주저앉아 땅을 치며 서럽게 울고 있었습니다.
"뉘신지 모르오나... 어찌하여 이승을 떠도는 혼령이 저에게 그 귀한 가보를 돌려주신 것입니까. 그 연유를 제발 알고 싶습니다. 뉘시옵니까..."
김생이 떨리는 걸음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와 공손히 묻자, 땅을 치던 여인이 천천히 울음을 멈추고 스르르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칠흑같이 긴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여인의 얼굴이 마침내 흩어지는 안개 속에서 창백하게 그 모습을 뚜렷이 드러냈습니다. 그 슬프고도 익숙한 얼굴을 똑똑히 확인한 순간, 꿈속의 김생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큰 충격에 휩싸여 얼음처럼 차갑게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 5: 꿈속에서 밝혀지는 여인의 정체와 가보를 되찾아준 슬픈 사연
짙게 깔려 사방을 분간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던 음산한 회색 안개가 거센 산바람에 서서히 걷히며 드러난 소복 여인의 창백하고 마른 얼굴. 그 슬프고도 처연한 얼굴을 똑똑히 마주한 순간, 꿈속을 헤매던 김생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날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여 그 자리에서 돌장승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비록 온기에 찬 핏기 하나 없이 밀랍처럼 하얗게 창백하고, 푹 꺼져 움푹 패인 두 눈에는 억울함과 원통함이 짙게 서린 붉은 피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지만, 그 슬픈 얼굴은 분명 김생이 너무도 잘 아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아끼고 끔찍이 사랑했던 혈육의 것이었습니다.
"아, 아니... 네가 어찌, 어찌 귀신의 형상으로 이 춥고 외로운 곳에 있단 말이냐... 너는 분명 5년 전, 시집을 가기로 약조한 날을 불과 며칠 앞두고 몹쓸 열병에 걸려 그 고운 꽃다운 나이에 억울하고 허무하게 세상을 뜬 내 불쌍한 누이동생, 연희가 아니더냐! 어찌 네가 아직 저승을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단 말이냐!"
김생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목에서 피를 토하듯 외치자, 여인, 아니 억울한 원귀가 된 누이동생 연희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차가운 무덤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낡은 치맛자락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차가운 흙먼지가 그녀의 뼈저린 한과 기다림의 세월을 고스란히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오라버니... 5년이라는 무심한 세월이 흘렀건만, 저를 아직 잊지 않고 단번에 알아봐 주셨군요. 예, 오라버니가 그토록 아껴주시던 못난 누이, 연희입니다. 오라버니의 얼굴을 이리 뵈오니 맺혔던 한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듯하옵니다."
"연희야, 네가 어찌 험한 저승길을 가지 못하고 귀신의 몸이 되어 이 구천을 서럽게 떠돌고 있단 말이냐! 게다가 아버님의 땀과 피가 서린 유품인 그 귀한 백옥 인장을, 네가 대체 어디서 찾아내어 내게 돌려준 것이냐! 도대체 네게 무슨 기막힌 사연이 있는 것이냐!"
연희는 흙 묻은 소복 치맛자락을 단정히 여미며 김생의 발밑에 스르르 무릎을 꿇고는, 가슴 깊은 곳에 맺힌 피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동안 겹겹이 숨겨져 있던 끔찍하고 구슬픈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오라버니... 실은 석 달 전 오라버니께서 종로 잣골 주막에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피하다 술에 크게 취해 쓰러지셨던 그 밤을 기억하시는지요. 오라버니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을 때, 평소 오라버니가 훌륭하게 이끄는 상단을 몹시도 시기하고 탐욕스럽게 노리던 배다른 숙부께서 몰래 어둠을 틈타 접근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라버니의 품을 짐승처럼 뒤져 가문의 상징인 그 귀한 백옥 인장을 훔쳐내셨습니다."
"무엇이라! 다름 아닌 숙부께서 내 인장을 훔치셨다고? 말도 안 된다, 천하에 어찌 그런 인면수심의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이냐! 인장을 잃어버리고 악랄한 빚쟁이들에게 쫓겨 내가 처자식과 함께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우리 집에 달려와 내 손을 붙잡고 통곡을 하며 쌀을 보태주시고 가문을 걱정해주신 분이 바로 숙부님이신데!"
김생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귀를 막고 고개를 저었지만, 연희의 창백한 목소리는 더욱 차갑고 단호하게 꿈속의 공간을 울렸습니다.
"그것은 모두 오라버니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한 가증스럽고 교활한 속임수였습니다. 숙부께서는 오라버니의 번듯한 상단과 아버님이 일구신 가문의 재산을 송두리째 삼키기 위해 인장을 훔치셨고, 혹여나 훔친 인장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두려워전전긍긍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찾지 않는 인적이 드문 북망산 깊은 곳... 바로 제가 묻힌 이 초라하고 쓸쓸한 무덤의 빗돌 상석 밑을 깊게 파고 몰래 숨겨두셨습니다. 가장 안전한 은신처가 제 무덤이었던 셈이지요."
연희의 끔찍하고 충격적인 진실에 김생은 마치 거대한 쇠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극심한 현기증과 어지러움을 느꼈습니다. 하늘같이 굳게 믿고 의지했던 핏줄인 숙부의 짐승만도 못한 추악한 배신, 그리고 그 더러운 탐욕의 은신처가 다름 아닌 꽃다운 나이에 불쌍하게 죽은 사랑하는 누이의 무덤이었다니. 끓어오르는 분노와 배신감이 솟구쳐 주먹을 꽉 쥔 김생의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시뻘건 피가 맺혔습니다.
"저는 억울한 병으로 죽어서도 가문의 핏줄과 다정했던 오라버니를 잊지 못해, 차마 저승 문턱을 넘지 못하고 이 무덤가를 맴돌며 맴돌고 있었사온데, 어느 날 천둥 번개가 치던 궂은밤, 숙부께서 삽을 들고 몰래 찾아와 제 무덤가에 오라버니의 인장을 깊이 파묻는 것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후로 오라버니께서 인장을 잃고 온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할 위기에 처해, 매일 밤 피눈물로 지새우며 짐승처럼 울부짖으시는 것을 제 넋이 고스란히 지켜보며 제 가슴 역시 갈가리 찢어지는 듯 참담했습니다."
연희는 창백하고 투명한 두 손으로 흙투성이가 된 얼굴을 감싸 쥐고 구슬프게 오열했습니다. 그녀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몽환적인 꿈속의 숲을 슬프고도 기괴하게 울렸습니다.
"허나 저는 이승의 무거운 물건을 오래 쥐고 멀리 떠날 수 없는 몹시 미약하고 가엾은 혼령이옵니다. 제 무덤의 차가운 흙더미에 갇혀있던 인장을 열 손가락에서 피가 나도록 간신히 파내어 흙을 털어내고, 제게 남은 모든 넋의 기운을 쥐어짜 내어 종로의 그 먼 뒷골목까지 찾아가 오라버니께 돌려드리는 것이, 먼저 죽은 불효한 누이가 사랑하는 오라버니와 무너지는 가문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정성이자 도리였습니다. 오라버니... 부디 이 인장으로 간악무도한 숙부를 낱낱이 벌하시고 가문을 보란 듯이 다시 일으켜 세우시어, 늙고 병드신 어머님을 제 몫까지 평안하고 다사롭게 모셔주십시오. 이것이 제 마지막 소원이옵니다."
연희의 피 맺힌 애달프고 절절한 당부가 끝나자마자, 그녀의 슬픈 형체는 거센 밤바람에 흩어지는 짙은 안개처럼 투명하게 바스라지더니 이내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스르르 흩어져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연희야! 연희야! 안 된다, 이대로 가지 마라! 오라비가 널 이 춥고 쓸쓸한 무덤에 어찌 홀로 두고 간다 말이냐! 가지 마라!"
김생이 텅 빈 허공을 향해 처절하게 목놓아 소리치며 손을 뻗는 순간, 그는 자신의 차갑고 비좁은 셋방 바닥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번쩍 두 눈을 떴습니다. 온몸이 깊은 물에 빠진 듯 차가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그의 오른손에는 방금 전 꿈속의 일들이 결코 헛된 망상이 아님을 증명하듯 여전히 서늘하고 묵직한 백옥 인장이 손자국이 남을 만큼 단단히 쥐여 있었습니다. 헛된 개꿈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죽은 누이의 억울하고 원통한 혼령이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원한 것이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김생의 두 눈에는 숙부를 향한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와, 자신을 지켜준 누이에 대한 벅찬 감격과 회한이 뒤섞인 뜨거운 눈물이 끓는 화산처럼 맹렬하게 솟구쳤습니다.
※ 6: 잃어버린 인장을 되찾고 기적처럼 가문의 빚을 청산하며 일어서다
길고 길었던 악몽 같은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 도성에 붉은 아침 햇살이 퍼지자마자, 김생은 세수도 하지 않은 채 가장 먼저 옥 인장을 비단 주머니에 싸서 품속에 단단히 묶어 품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의금부 관아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매서운 포도대장 앞에 엎드려 억울함을 토로하며, 석 달 전부터 숙부가 자신이 맺었던 굵직한 상단의 중요한 계약서들에 몰래 위조하여 찍은 가짜 인장 자국과, 자신이 밤새 기적처럼 되찾은 진짜 백옥 인장을 직접 내어놓고 대조해 보이며, 숙부의 치밀하고도 짐승만도 못한 사악한 사기 행각을 낱낱이 고발했습니다.
관아의 철저하고 엄중한 수사와 압수수색, 그리고 피 튀기는 고문 끝에, 김생의 상단과 막대한 재산을 모두 통째로 삼키기 위해 숙부가 김생이 술에 취한 틈을 타 인장을 훔친 뒤, 감쪽같이 가짜 인장을 몰래 파서 이중 계약을 맺고 빚쟁이들을 선동해 왔다는 추악하고 더러운 진실이 마침내 백일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습니다. 진실이 밝혀지자 발뺌하던 숙부는 포도청 앞마당에 끌려가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매서운 곤장을 맞고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깊은 옥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숙부의 간악한 농간으로 김생에게서 억울하게 빼앗겼던 상단의 모든 권리와 으리으리했던 집문서, 논문서, 그리고 눈덩이처럼 부풀려져 떠안았던 거짓 빚들은 모두 관아의 판결로 무효가 되어 김생의 품으로 온전히 고스란히 돌아왔습니다.
지옥 밑바닥에서 다시 상단의 최고 자리인 대행수에 앉게 된 김생은, 석 달 전 밤낮으로 술에 절어 살며 방탕하게 지내던 예전과는 눈빛부터 뼈대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환골탈태해 있었습니다. 벼랑 끝 죽음의 문턱에서 죽은 누이의 피맺힌 희생과 기적적인 도움으로 다시 한번 목숨을 얻은 그는, 술과 투전, 방탕한 생활을 그날부로 완벽하게 끊어버렸습니다. 매일 아침 새벽을 알리는 인경이 울리기도 전부터 밤늦게 별이 뜰 때까지 상단의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가장 늦게까지 성실하게 일했고,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잃어버린 신용을 되찾기 위해 예전의 양반 행세와 오만함을 버렸습니다. 그는 거래처 사람들을 찾아가 진심으로 허리 굽혀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으며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뛰고 또 뛰었습니다.
"여보게들, 그 소문 들었는가? 그 오만하던 김 서방이 죽다 살아나더니 사람이 아주 뼛속까지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구먼. 예전의 그 뻣뻣한 거만함은 쏙 빠지고, 장사 수완과 악착같은 끈기가 아주 기가 막혀. 비단과 약재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야 원래 도성에서 그를 따라갈 자가 없던 도성 최고 아니었소. 저리 고개를 숙이니 다시 거래를 터도 절대 손해 볼 일은 없을 거요."
종로 운종가 장사치들과 시전 상인들은 그의 뼈를 깎는 처절한 노력과 진정성에 깊이 감복하여, 굳게 닫았던 마음의 빗장을 풀고 다시 하나둘 거래를 트기 시작했습니다. 가문의 숭고한 영혼이 담긴 백옥 인장이 진짜 주인의 품으로 돌아오고 그의 피나는 노력이 더해지자, 멈춰있던 상단의 재물 운도 마치 막혔던 거대한 둑이 터진 폭포수처럼 맹렬하게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김생은 본래 하던 비단 무역뿐만 아니라, 이문을 크게 남길 수 있는 청나라와의 굵직한 인삼 교역까지 과감하게 손을 뻗어 그야말로 막대한 부를 긁어모았습니다. 불과 삼 년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그는 예전 상단의 규모를 훌쩍 뛰어넘어, 종로 바닥과 한양 도성의 상권을 쥐락펴락하는 거대한 거상으로 당당히 우뚝 섰습니다. 비바람이 새어 들어오던 다 쓰러져가던 셋방을 당장 벗어나 북촌 최고 명당자리에 아흔아홉 칸짜리 으리으리한 기와집을 새로 지어, 고생하시며 눈물짓던 늙은 어머니와 고생한 처자식을 남부럽지 않게 극진히 모셨고, 바닥에 떨어졌던 가문의 명예는 그 어느 때보다 드높게 빛났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금은보화가 창고에 태산처럼 쌓이고 수십 명의 하인들이 그의 발아래 엎드려도, 김생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죽은 누이 연희에 대한 깊은 부채감과 가슴 저리는 애잔함이 지워지지 않는 서늘한 멍처럼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푹신하고 따뜻한 비단 이불에 누울 때마다, 그 춥고 쓸쓸한 무덤가에서 흙투성이가 된 가녀린 손으로 짐승 같은 오라비를 위해 인장을 파내어 찾아주던 창백하고 슬픈 누이의 얼굴이 떠올라,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짐승처럼 남몰래 뜨거운 눈물을 훔치곤 했습니다.
※ 7: 거상으로 성공한 김생, 여인의 넋을 기리며 은혜를 갚다
조선 최고의 거상으로 그 지위와 명성을 굳건히 다진 어느 화창하고 눈부신 봄날, 김생은 상단의 산더미 같은 중요한 업무를 모두 밑의 대행수들에게 일임하고 며칠간 상단을 비우겠다 명한 뒤 조용히 집을 나섰습니다. 그가 수많은 짐꾼과 목수들을 대동하여 무거운 발걸음으로 도착한 곳은, 인적이 드물어 스산하기 짝이 없는 북망산 깊은 곳에 쓸쓸히 자리한 누이 연희의 초라한 무덤 앞이었습니다.
"연희야... 못난 이 오라비가 너무도 늦게 널 찾아왔구나. 널 이 어둡고 춥고 쓸쓸한 곳에 홀로 외롭게 두어 참으로 미안하고 뼈에 사무치는구나. 늦어서 미안하다..."
김생은 거상이라는 높은 체면도 까맣게 잊은 채 고급 비단옷을 걷어붙이고, 무덤에 무성하게 흉측하게 자란 잡초를 직접 자신의 거친 손으로 피가 나도록 꼼꼼히 모두 뽑아내었습니다. 그리고 한양에서 제일가는 솜씨 좋은 석공들을 대거 불러들여 초라했던 무덤 주변을 화려하고 웅장하게 단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고급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비석을 높이 세워 누이의 넋을 칭송하여 기렸고, 누이가 생전에 봄마다 그토록 좋아하며 미소 지었던 연분홍빛 복사꽃 나무를 무덤 주변에 한가득 심어, 죽어서라도 향기롭고 따뜻하며 평화로운 곳에 머물 수 있도록 온갖 정성을 쏟아부었습니다.
무덤의 단장이 모두 끝나자, 그는 비석 앞에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온갖 산해진미를 가득 올린 엄청난 제사상을 정성껏 차려 올렸습니다. 최고급 청나라 비단 수십 필과 종이로 만든 금은보화를 불에 태워 누이의 외로운 넋을 위로했고, 밤이 새고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꼬박 무덤 곁을 지키며 끊임없이 슬픈 술잔을 올리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연희야, 네가 내게 목숨 걸고 파내어 찾아다 준 그 백옥 인장 덕분에 처참하게 무너졌던 우리 가문이 보란 듯이 훌륭하게 다시 일어섰다. 어머님도 이승의 아무런 걱정 없이 편안하고 건강히 잘 계신단다. 이제 이승에 맺힌 너의 한과 가문에 대한 무거운 짐은 모두 내게 맡기고, 부디 저승에서는 아무런 걱정 없이 훌훌 털어버리고 꽃구경이나 하며 따뜻하고 편안하게 쉬거라. 내 평생 너의 그 핏빛 은혜를 잊지 않고,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을 어루만지고 구휼하며 하늘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
김생의 뜨거운 눈물이 차가운 비석을 흥건히 적시는 동안, 참으로 신기하게도 무덤가 주변을 스산하게 맴돌며 나뭇가지를 흔들던 차가운 산바람이 잦아들었습니다. 대신 마치 누군가 부드럽고 가녀린 손길로 김생의 머리를 쓰다듬는 듯한 훈훈하고 따스한 훈풍이 불어와 흩날리는 복사꽃잎과 함께 김생의 젖은 뺨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김생은 그것이 한을 풀고 마음을 놓은 누이가 편안히 저승으로 떠나며 남긴 마지막 애틋한 작별 인사임을 직감하고, 비로소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던 죄책감을 털어내며 젖은 얼굴로 환하고 편안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김생은 누이 무덤 앞에서 눈물로 맹세한 약조대로, 상단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재물의 절반을 기꺼이 떼어 한양 도성의 헐벗고 굶주린 빈민들을 적극적으로 구제하는 데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앞장섰습니다. 부모 잃고 거리를 떠도는 고아들을 거두어 큰 서당을 짓고 밥을 먹이며 글을 가르쳤고, 매서운 추위가 닥치는 엄동설한의 겨울이면 빈민촌을 직접 찾아가 장작과 쌀을 아낌없이 풀었습니다. 빚쟁이들에게 쫓겨 종로의 밤거리를 헤매며 통금을 어기고 짐승처럼 방황했던 자신의 끔찍했던 과거를 뼈저리게 떠올리며, 길 잃은 가난한 과객들과 집 없는 백성들이 추위를 피하고 따뜻하게 머물 수 있는 커다란 구휼소도 사재를 털어 도성 곳곳에 세웠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살아있는 보살이자 천심을 가진 자비로운 거상이라며 칭송하고 우러러보았지만, 김생은 사람들의 칭찬을 들을 때마다 늘 겸손하게 고개를 저으며 하늘을 우러러 담담히 말했습니다.
"내 곁에는 늘 나를 지켜보는 맑고 슬픈 눈이 하나 있소. 내가 쥔 이 거대한 재물은 내 능력이 뛰어나서 번 것이 결코 아니라,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짐승처럼 방황하던 나를 일깨워준 귀하고 슬픈 분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니, 당연히 내가 쥐고 떵떵거릴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기꺼이 나누어야 할 뿐이오."
종로의 깊고 캄캄한 뒷골목에서 마주친 소름 끼치는 소복 여인.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로 시작된 그 밤의 기묘한 만남은, 사실 죽어서도 무너지는 가문과 어리석은 오라비를 지키려 했던 가여운 누이의 애틋하고도 숭고한 사랑이었습니다. 원통한 귀신의 차가운 손에 들려 돌아온 작은 백옥 인장 하나가, 벼랑 끝에 선 사내의 썩은 인생을 기적처럼 역전시키고 나아가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살리는 따뜻한 구원의 거대한 씨앗이 된 이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훗날 왁자지껄한 장바닥 사람들의 입을 타고 종로 거리를 맴도는 가장 감동적이고 신비한 야담으로 오래도록 잊히지 않고 널리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자정을 넘긴 종로 뒷골목에서 만난 소복 여인의 정체, 그리고 그녀가 내민 백옥 인장에 얽힌 애틋한 사연... 어떻게 들으셨나요? 귀신이라 하면 으레 공포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이처럼 죽어서도 가족을 위하는 따뜻한 마음을 품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절망 끝에서 찾아온 기적을 나눔으로 갚아나간 김생의 삶도 참으로 훌륭합니다. 오늘 이야기가 흥미로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부탁드리며, 다음에도 소름 돋게 재미있고 가슴 따뜻한 야담으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