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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잡혀간 스님의 환생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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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300자 미만)
명부에 적힌 이름 석 자가 잘못되었다면, 그 죗값은 누가 치러야 하는가. 여기, 아직 갈 때가 아닌데도 저승사자에게 덜미를 잡혀 끌려간 스님이 있었다. 이레 동안 저승을 헤매다 돌아온 그가, 흙바닥을 파헤치며 외친 한마디. "경전을 마저 완성해야 한다!" 죽었다 살아난 사내는 어째서 땅부터 파기 시작했을까. 저승 명부의 실수 한 번이 부른, 웃지 못할 소동과 눈물겨운 약속의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 1: 이른 봄, 경전을 베끼던 선율 스님이 홀연 쓰러지다
신라 땅 어느 산자락에 오래된 절 하나가 있었다. 이름은 망덕사. 봄이라 하나 아직은 이른 봄이라,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이 낮이면 녹아 뚝뚝 떨어지고 밤이면 다시 얼어붙기를 반복하던 무렵이었다.
그 절에 선율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나이는 예순을 훌쩍 넘겼으되 눈빛만은 젊은이 못지않게 맑았고, 손끝은 붓을 쥐면 떨림 하나 없었다. 스님이 평생을 두고 매달린 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반야경 육백 권을 손수 베껴 쓰는 일이었다.
"이제 겨우 절반을 넘겼구나."
먹을 갈던 스님이 창밖을 내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벌써 십수 년째였다. 어린 사미승이 백발이 성성한 노승이 되도록, 선율은 하루도 붓을 놓지 않았다. 새벽 예불이 끝나면 자리에 앉아 경을 베끼고, 해가 중천에 뜨면 잠시 붓을 놓았다가, 다시 저녁까지 한 글자 한 글자를 정성껏 옮겼다.
'부처님 말씀을 옮기는 일에 어찌 게으름을 부리겠는가. 이 육백 권을 다 마치는 날, 나는 비로소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으리라.'
절의 젊은 승려들은 그런 선율을 두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저 연세에 저리 무리하시다가는 큰일 나실 텐데."
"말려도 소용이 없으시니 어쩌겠나. 저 경전이 스님의 목숨줄이나 다름없으신 게지."
그날도 선율은 여느 때처럼 자리에 앉아 붓을 놀리고 있었다. 창호지를 뚫고 들어온 봄볕이 방바닥에 네모난 빛을 드리웠고, 그 빛 위로 먹 냄새가 은은하게 번졌다. 스님의 손끝에서 글자가 하나둘 태어났다. 반야바라밀다심경, 그 오묘한 뜻을 담은 글자들이 종이 위에 촘촘히 내려앉았다.
한창 붓을 놀리던 스님이 문득 손을 멈추었다. 가슴 한복판이 서늘해지는가 싶더니, 눈앞이 아뜩해졌다.
'이것이 무슨 조화인가. 갑자기 천지가 빙글빙글 도는 듯하구나.'
붓을 쥔 손이 스르르 풀렸다. 먹물이 뚝 떨어져 애써 베낀 종이 위에 검은 점을 남겼다. 스님은 그것을 닦아 낼 겨를도 없이 옆으로 스르륵 기울었다.
"아이고, 스님!"
마침 차를 올리러 들어온 사미승이 그 광경을 보고 기겁을 했다. 찻잔을 내던지듯 내려놓고 달려와 스님을 부축했으나, 이미 선율의 몸은 축 늘어진 뒤였다.
"스님! 눈을 뜨십시오! 스님!"
사미승의 외침에 절 안이 발칵 뒤집혔다. 승려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누군가는 물을 떠 오고 누군가는 약초를 찾으러 뛰었다. 그러나 선율은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다. 숨은 붙어 있는 듯 아닌 듯 가늘었고, 얼굴빛은 창호지처럼 하얗게 바래 갔다.
주지 스님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선율의 손목을 짚어 보았다.
"맥이... 맥이 잡히질 않는구나."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젊은 승려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스님, 그럼 선율 스님께서는..."
주지 스님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경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육백 권 가운데 이제 겨우 삼백 권을 넘긴, 절반의 반야경이 방 한쪽에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평생을 이 일에 바치셨거늘, 끝을 보지 못하고 가시다니.'
그 시각, 정작 선율 자신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사방이 온통 잿빛 안개였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땅인지 구름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고,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끝을 알 수 없는 뿌연 길만이 아득하게 뻗어 있었다.
"허, 이곳이 어디란 말인가."
스님은 어리둥절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 붓을 쥐고 경을 베끼던 자신이 어찌하여 이런 낯선 길 위에 서 있는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꿈인가. 아니면 내가 잠시 정신을 잃은 겐가.'
볼을 꼬집어 보았으나 아프기는커녕 감각조차 희미했다. 스님은 그제야 등골이 오싹해졌다. 살아생전 무수히 읽고 외웠던 경전 속 한 구절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사람이 숨을 거두면 혼백이 몸을 떠나 저승길에 오른다던, 바로 그 이야기였다.
"설마... 설마 내가 죽었단 말인가?"
스님의 목소리가 안개 속으로 힘없이 흩어졌다. 대답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저 멀리 안갯속에서, 무언가 검은 형체 하나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을 뿐이었다.
※ 2: 낯선 관복의 사내가 명부를 들고 나타나다
안개를 헤치고 다가온 것은 사람의 형상이었다. 검은 두루마기에 검은 갓을 눌러쓴 사내. 얼굴빛은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게 창백했고, 두 눈은 깊은 우물처럼 어두웠다. 사내의 손에는 두툼한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선율은 그 모습을 보고 대번에 알아차렸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 마지않는 존재, 죽은 이의 혼을 저승으로 끌고 간다는 바로 그 저승사자였다.
"어허, 거기 스님. 한참을 찾았소이다."
저승사자가 갓 밑으로 스님을 훑어보며 말했다. 목소리는 뜻밖에도 무덤덤하니, 마치 관아의 서리가 세금을 걷으러 온 듯한 말투였다.
"나를 찾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선율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저승사자는 대꾸도 없이 들고 있던 책을 척 펼쳤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로 빼곡한 글씨가 드러났다. 저승의 명부, 곧 죽을 이의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다는 그 책이었다.
저승사자가 손가락으로 한 줄을 짚으며 읽어 내렸다.
"망덕사 승려, 선율. 오늘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날이라 여기 똑똑히 적혀 있소. 자, 군말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 갈 길이 머니."
"자, 잠깐만 기다리시오!"
선율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내가 아직 죽을 때가 아니오. 나는 반야경 육백 권을 베끼기로 서원을 세웠고, 이제 겨우 절반을 넘겼을 뿐이오. 나머지를 마치지 못하고 어찌 눈을 감는단 말이오?"
저승사자는 그 말을 듣더니 피식 웃었다. 산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한다는 듯한, 지겹다는 웃음이었다.
"허허, 스님. 여기 오는 이들치고 사연 없는 이가 어디 있겠소. 어떤 이는 자식 혼사를 못 보고 왔다 하고, 어떤 이는 논밭을 아직 못 팔았다 하고, 또 어떤 이는 원수를 갚지 못했다 하오. 한데 그 사연을 다 들어주다가는 저승 문이 미어터져 나도 밥줄이 끊기고 만다오."
"그런 사사로운 미련과 내 서원을 어찌 견주시오! 나는 부처님 말씀을 옮기는 일을 두고 하는 말이오!"
선율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러나 저승사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부처님 말씀이든 임금님 말씀이든, 명부에 이름이 적히면 오는 게 이곳 법도요. 스님, 순순히 따라오시면 서로 편하지 않겠소. 괜히 버티다가 험한 꼴 당하지 말고."
말을 마친 저승사자가 스님의 소맷자락을 덥석 잡았다. 그 손이 어찌나 차가운지, 선율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손목을 타고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스며들었다.
'아, 정녕 이대로 끌려가는구나. 나의 반야경은... 나의 서원은 어찌 되는가.'
스님의 눈앞에 절 한쪽에 쌓아 둔 경전 더미가 어른거렸다. 절반의 반야경. 아직 옮기지 못한 삼백 권의 글자들이, 종이 위에 채 태어나지도 못한 채 스러져 가는 듯했다.
끌려가면서도 선율은 발버둥을 쳤다.
"나으리, 나으리! 한 번만 다시 살펴봐 주시오. 그 명부가 정녕 틀림이 없소? 나 같은 늙은 중이 하루라도 빨리 온다고 저승에 무슨 이득이 있겠소!"
"이 양반이 정말..."
저승사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스님을 홱 잡아끌었다. 그러다 문득, 손에 든 명부를 다시 한번 흘깃 내려다보았다. 스님의 하도 절절한 하소연에, 저승사자 나름대로도 아주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선율이라... 망덕사 선율이라 분명 적혀 있는데. 헌데 이 양반, 어째 기력이 너무 팔팔하지 않은가. 저승 올 사람 치고는 혼백에 힘이 너무 넘쳐.'
저승사자는 잠시 갸웃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명부에 적힌 이상 틀릴 리 없다는 오랜 믿음이 의심을 눌러 버린 것이다.
"에잇, 명부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내가 언제 사람 잘못 데려간 적 있었나. 자, 스님. 잔말 말고 갑시다. 저 안개 너머가 바로 저승 문이오."
저승사자는 스님을 끌고 안갯속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선율은 끌려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으나, 저승사자의 힘은 산을 옮길 듯 억셌다. 발끝이 잿빛 땅에 질질 끌렸다.
한참을 걸으니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저 앞에 거대한 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붉은 기둥에 무쇠로 만든 문. 문 위에는 저승을 지키는 무시무시한 형상들이 조각되어 있었고, 좌우로는 창을 든 옥졸들이 눈을 부라리며 서 있었다.
'저것이 바로 저승 문이로구나. 살아서는 상상도 못 했던 곳에 내가 오다니.'
선율은 침을 꿀꺽 삼켰다. 두려움이 밀려왔으나, 그보다 더 강한 것은 억울함이었다. 아직 할 일이 태산인데, 이대로 끌려 들어가면 다시는 저 붓을 쥘 수 없으리라.
저승사자가 문지기 옥졸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자, 무쇠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안쪽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 나왔다.
"자, 다 왔소. 스님, 이제 저 안으로 들어가 심판을 받으면 되오. 나는 여기까지가 임무니, 이만 다른 이를 데리러 가야겠소."
저승사자가 스님을 문 안으로 툭 밀어 넣으려는 그 순간이었다. 문 안쪽에서 다급한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멈추어라! 그 자를 함부로 들이지 말라!"
저승사자와 선율이 동시에 흠칫 놀라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 3: 저승 문턱에서 벌어진 이름 석 자의 소동
무쇠 문 안쪽에서 걸어 나온 것은 관복을 갖춰 입은 판관이었다.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손에는 붉은 도장이 찍힌 두루마리를 든 채였다. 저승의 문서를 관장하는 관리였다.
판관은 못마땅한 얼굴로 저승사자를 노려보았다.
"자네, 또 일을 저질렀는가?"
저승사자가 영문을 몰라 눈을 껌뻑였다.
"저지르다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소인은 명부에 적힌 대로 망덕사 승려 선율을 데려왔을 뿐입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란 말일세!"
판관이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척 펼치며 언성을 높였다.
"오늘 저승에 들 이는 망덕사 선율이 아니라, 자네 명부에 적혀야 할 이름이 잘못 옮겨진 것이야. 이 자는... 아직 이승에서 마쳐야 할 일이 남은 자란 말일세!"
저승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얼른 제 명부를 다시 펼쳐 판관의 두루마리와 나란히 놓고 대조하기 시작했다. 두 문서를 번갈아 살피던 저승사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럴 수가. 이름은 같은 선율이나... 하나는 아랫마을 절의 선율이요, 이자는 망덕사의 선율이라. 절 이름이 뒤바뀌어 적혔구나!'
저승의 명부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하필 같은 이름을 쓰는 두 승려가 있었던 것이다. 저승 문서를 필사하던 관리가 그만 두 사람의 절 이름을 뒤바꿔 적는 바람에, 아직 갈 때가 멀었던 망덕사 선율이 애먼 저승길에 끌려온 것이었다.
선율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서야 사태를 파악했다. 억울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보시오! 내가 뭐라 하였소! 아직 갈 때가 아니라 하지 않았소! 이 늙은 중이 그리 애원했건만, 명부가 어쩌고 하며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오다니!"
저승사자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갓을 푹 눌러쓰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 이거 참... 면목이 없소이다, 스님. 소인이 그만..."
판관이 혀를 끌끌 찼다.
"자네가 이런 실수를 한 게 벌써 몇 번째인가. 지난번엔 김 서방 대신 김 첨지를 데려오질 않나, 그전엔 장가도 못 간 총각을 잡아와 저승 혼삿길을 어지럽히질 않나. 자네 때문에 이 판관이 뒤치다꺼리하느라 아주 허리가 휘겠네!"
"며, 면목 없습니다..."
저승사자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까 산 사람 앞에서 위세를 부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선율은, 억울함 속에서도 어쩐지 웃음이 나올 뻔했다.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무서워하는 저승사자가, 정작 저승에서는 상관 앞에서 쩔쩔매는 말단 관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허, 저승도 이승과 다를 게 없구나. 관아의 아전이 사또 앞에서 굽실대는 꼴이나, 저 저승사자가 판관 앞에서 굽실대는 꼴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판관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선율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고는 아까와는 딴판으로 자못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스님, 이거 저승의 불찰로 큰 결례를 범하였소이다. 스님께서는 아직 이승에서 마쳐야 할 서원이 남은 몸. 응당 돌아가셔야 마땅하오. 허나..."
판관이 말끝을 흐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무엇이오?"
선율이 다급하게 물었다.
"이미 저승 문턱까지 든 혼백을 그냥 돌려보내는 법은 없소. 저승 문을 넘었으니, 최소한 염라대왕 전하를 뵙고 정식으로 환생의 명을 받아야만 이승으로 되돌아갈 수 있소이다. 그저 규정이 그러하니, 잠시 수고로우시더라도 나를 따라오셔야겠소."
선율은 그 말에 오히려 안도했다. 돌아갈 수 있다는 말 한마디에, 조금 전까지의 두려움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야 염라대왕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분이라도 뵙겠소. 어서 안내하시오!"
판관이 앞장서고, 그 뒤를 선율이 따랐다. 저승사자도 풀이 죽은 채 슬금슬금 뒤를 따라붙었다. 판관이 그런 저승사자를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자네는 또 어딜 따라오는가?"
"소, 소인도 함께 가서 죄를 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달이 다 소인 탓인데..."
"흥, 이제야 죄를 아는가. 하기야 자네가 함께 가서 자초지종을 아뢰는 게 순서겠지. 따라오게."
세 사람은 저승 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 안은 바깥의 잿빛 안개와 달리, 어스름한 붉은빛이 감도는 기묘한 세계였다. 좌우로는 크고 작은 전각들이 늘어서 있었고, 저마다 문 위에 알 수 없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길을 걸으며 선율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느 전각에서는 곡소리가 새어 나오고, 또 어느 전각 앞에서는 죄인들이 오랏줄에 묶인 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아생전 경전 속에서만 읽었던 저승의 광경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죽은 이들이 심판받는 곳이로구나. 나 또한 실수만 아니었다면 저 죄인들 틈에 끼여 심판을 기다렸을 터.'
문득 선율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무리 실수로 끌려왔다 한들, 염라대왕이 무슨 트집을 잡아 자신을 붙잡아 두지는 않을까. 혹여 지금껏 살아오며 지은 작은 허물들이 낱낱이 드러나,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선율은 마음을 다잡고 판관의 뒤를 따라, 저승에서 가장 크고 위엄 있는 전각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 전각의 현판에는 붉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염라전.
염라전의 거대한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그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안쪽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게 누구냐! 오늘은 또 무슨 소란이더냐!"
※ 4: 염라대왕 앞에서 밝혀진 어처구니없는 착오
염라전 안은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붉은 기둥이 하늘 높이 솟아 있고, 그 끝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정면 높은 단 위에는 거대한 옥좌가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 염라대왕이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었다.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붉은 곤룡포를 걸친 염라대왕은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졌고 두 눈은 횃불처럼 이글거렸다. 옥좌 옆에는 죽은 이의 생전 행실을 낱낱이 비춘다는 업경대가 놓여 있어, 거울 표면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판관이 얼른 앞으로 나아가 허리를 굽혔다.
"전하, 아뢰옵니다. 오늘 저승에 든 이 가운데 잘못 끌려온 자가 있어 이렇게 데려왔나이다."
"잘못 끌려온 자라?"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전각을 쩌렁쩌렁 울렸다. 선율은 그 위엄에 눌려 저도 모르게 무릎이 꺾일 뻔했으나, 가까스로 몸을 가누고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렸다.
"소승은 망덕사의 승려 선율이라 하옵니다. 반야경 육백 권을 베끼기로 서원을 세우고 이제 그 절반을 마쳤을 뿐인데, 뜻하지 않게 저승사자에게 끌려와 이곳까지 이르렀나이다."
염라대왕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판관을 돌아보았다.
"명부를 가져와 보아라."
판관이 두툼한 명부를 옥좌 앞에 펼쳐 올렸다. 염라대왕이 손가락으로 명부를 훑어 내리다가, 이내 한 대목에서 멈추었다. 그러고는 업경대를 향해 손짓을 하니, 거울 표면에 두 승려의 모습이 나란히 떠올랐다. 한 사람은 이 자리에 선 망덕사 선율이요, 또 한 사람은 아랫마을 절의 늙고 병든 선율이었다.
"허어, 이런 일이 있나."
염라대왕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름이 같은 두 승려를 명부에 옮기며, 절 이름을 뒤바꾸어 적었구나. 오늘 와야 할 자는 병들어 명이 다한 아랫마을 선율이거늘, 어찌 멀쩡한 망덕사 선율을 데려왔단 말이냐!"
염라대왕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저승사자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저, 전하! 소인의 불찰이옵니다! 명부에 적힌 대로 데려왔을 뿐이온데, 이런 착오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사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염라대왕이 수염을 부르르 떨며 저승사자를 내려다보았다.
"이놈, 네가 사람을 잘못 데려온 게 어디 한두 번이더냐. 지난달에도 이웃 고을 김가를 잘못 데려와 소란을 피우더니, 이번에는 아예 산 사람이나 다름없는 스님을 끌고 왔어? 명부만 믿고 눈앞의 혼백조차 제대로 살피지 않으니, 이 무슨 게으름이란 말이냐!"
"자, 잘못했사옵니다! 이 스님께서 하도 기력이 팔팔하시기에 소인도 잠시 이상하다 여겼사오나..."
"이상하다 여겼으면 그 자리에서 확인을 했어야지! 명부에 적혔으니 그만이라 여긴 게 게으름이 아니고 무엇이냐!"
저승사자는 고개를 땅에 처박고 벌벌 떨었다. 선율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조금 전까지 자신을 끌고 오던 저 위세는 다 어디로 갔나 싶어 속으로 혀를 찼다.
'딱한 것. 저도 명을 받아 움직이는 처지이니, 어찌 보면 저 또한 이 저승의 아전 노릇 하느라 고달픈 게지.'
한바탕 호통을 친 염라대왕이 이번에는 선율을 향해 돌아섰다. 조금 전의 노기는 온데간데없이, 그 목소리에 자못 미안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스님, 저승의 불찰로 애먼 고초를 겪게 하여 참으로 면목이 없소이다. 스님께서는 아직 이승에서 마쳐야 할 큰 서원이 남은 몸. 마땅히 돌아가셔야 할 것이오."
선율은 그 말에 두 손을 모으며 깊이 머리를 숙였다.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 백골난망이옵니다."
염라대왕이 문득 업경대로 눈을 돌렸다. 거울에는 선율이 평생 붓을 놀리며 경전을 베끼는 모습이 하나둘 떠올랐다. 새벽부터 밤까지, 십수 년을 하루같이 먹을 갈고 붓을 든 노승의 모습이었다.
"스님, 업경대를 보니 참으로 갸륵하오. 반야경 육백 권을 손수 베낀다는 것은 예사 원력으로 될 일이 아니오.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았으니, 오늘의 이 착오도 어쩌면 스님의 남은 일을 마치라는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겠구려."
"과분한 말씀이옵니다."
염라대왕은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윽고 판관에게 명을 내렸다.
"이 스님을 즉시 이승으로 돌려보내라. 그리고 저승사자, 네놈은 벌로 스님을 안전히 몸으로 되돌아가시게 끝까지 모셔라. 가는 길에 터럭 하나라도 잘못되는 날에는, 이번에는 네놈을 저 지옥 가마솥에 처넣을 것이니라!"
"며, 명 받들겠나이다!"
저승사자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절박한지, 선율은 하마터면 다시 웃음이 터질 뻔했다.
염라대왕이 마지막으로 선율을 향해 당부했다.
"스님, 돌아가시거든 부디 남은 서원을 이루시오. 그리고 한 가지, 저승에서 겪은 일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시오. 이승에서 지은 업은 반드시 저승에서 헤아려진다는 것을. 착한 이는 복을 받고 악한 이는 벌을 받는다는 것을. 그것이 스님을 다시 돌려보내는 이유이기도 하오."
"명심하겠나이다, 전하."
선율이 다시 한번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는가 싶던 그때, 판관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전하, 한 가지 아뢸 것이 있사옵니다. 스님을 이승으로 돌려보내는 길은 지옥 곁을 지나는 험한 길이온데, 그 길목에 오래도록 구천을 떠도는 원혼 하나가 있어 길을 막고 있나이다."
"원혼이라?"
"예. 생전에 풀지 못한 한이 있어 저승에도 이승에도 들지 못하고, 그 길목을 맴돌며 지나는 혼백마다 붙잡고 하소연을 늘어놓는 통에, 도무지 길을 지날 수가 없나이다."
염라대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허, 그 딱한 혼이 아직도 거기 있더냐. 스님, 돌아가시는 길에 그 원혼을 마주하실 터인데, 부디 그 하소연을 한 번 들어주시구려.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일이야말로 스님 같은 분이 하실 수 있는 공덕이 아니겠소."
선율은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산 목숨이든 죽은 넋이든, 한을 품은 이가 있다면 어찌 모른 척하겠나이까. 소승, 그 원혼의 이야기를 들어 보겠나이다."
염라대왕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명을 내렸다.
"그럼 어서 스님을 모셔라. 저승사자, 명심하렷다. 스님을 무사히 모시는 것이 네 죄를 씻는 유일한 길이니라!"
저승사자가 벌떡 일어나 스님 앞에 굽실거렸다. 아까의 뻣뻣하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상전 모시듯 공손하기 짝이 없었다.
"스님, 소인이 안전히 모시겠사오니 이쪽으로 드시지요. 아이고,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여기 문턱이 높사옵니다."
선율은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헛웃음을 지으며 저승사자를 따라나섰다. 염라전을 나서는 스님의 발걸음은, 들어올 때와는 사뭇 달리 가벼웠다.
※ 5: 돌아가는 길, 구천을 떠도는 한 여인과의 약속
염라전을 나선 두 사람은 이승으로 향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저승사자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선율의 걸음을 살폈다. 조금이라도 스님이 비틀거리면 얼른 팔을 부축하려 손을 내밀었고, 길이 험한 곳에서는 앞장서서 돌부리를 치워 주기까지 했다.
"스님, 괜찮으십니까? 이 길이 좀 험하옵니다."
"허허, 이제 와 이리 극진히 대접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선율이 놀리듯 말하자, 저승사자가 머쓱한 얼굴로 갓을 매만졌다.
"그, 그런 말씀 마십시오. 소인이 스님께 큰 죄를 지었는데, 이 정도야 당연한 것이지요. 게다가 스님을 무사히 모시지 못하면 소인이 가마솥 신세가 되니... 아이고, 생각만 해도 아찔하옵니다."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길수록, 길가의 풍경은 점점 을씨년스러워졌다. 붉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고, 어디선가 신음 소리와 곡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저승사자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스님, 이제부터가 지옥 곁을 지나는 길이옵니다. 마음 단단히 잡수십시오."
과연 길 양옆으로 무시무시한 광경이 펼쳐졌다. 어느 쪽에서는 불길이 치솟았고, 또 어느 쪽에서는 칼날 같은 산이 솟아 있었다. 살아생전 지은 죄에 따라 벌을 받는 죄인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쳤다. 선율은 그 참혹한 광경에 절로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갈림길 어귀에 이르렀을 때, 어디선가 서럽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의 울음이었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길목 한가운데에 소복 차림의 여인 하나가 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머리는 산발이었으며, 그 모습이 저승에도 이승에도 속하지 못한 구천의 원혼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승사자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스, 스님. 저것이 바로 판관 나으리께서 말씀하신 그 원혼이옵니다. 저 원혼이 어찌나 하소연이 많은지, 한번 붙들리면 도무지 놓아주질 않아 저승사자들도 이 길을 피해 다닌다 하옵니다. 어서 못 본 척 지나가시지요."
그러나 선율은 걸음을 멈추었다. 여인의 울음소리가 어찌나 처량한지,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리도 서럽게 우는 넋을 어찌 모른 척한단 말이오. 잠깐 기다리시오."
선율이 여인에게 다가가자, 여인이 눈물 젖은 얼굴을 들었다. 그 눈빛에는 원망이 아니라 끝없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스님... 스님께서는 이승으로 돌아가시는 몸이시지요? 부디, 부디 제 이야기를 들어주소서."
"그러하오. 무슨 사연인지 말씀해 보시오."
여인이 흐느끼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저는 생전에 어느 고을에 살던 아낙이었나이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어린 자식 하나를 키우며 살았지요. 그런데 몹쓸 병에 걸려 그만 자식을 두고 먼저 눈을 감고 말았나이다. 제 나이 겨우 스물다섯이었나이다."
"저런, 딱한 사연이구려."
"허나 제가 이승도 저승도 들지 못하고 이 길목을 떠도는 것은, 죽음이 억울해서가 아니옵니다. 다만... 다만 제가 남긴 어린 자식이 눈에 밟혀 차마 저승으로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옵니다."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제가 죽기 전, 자식에게 물려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제 손으로 짠 무명천 한 필을 마루 밑 항아리에 숨겨 두었나이다. 헌데 갑작스레 숨을 거두는 바람에, 그 사실을 자식에게 미처 일러 주지 못했나이다. 그 아이가 지금 헐벗고 굶주려 지내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어미 된 마음에 어찌 눈을 감을 수 있겠나이까."
선율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식을 향한 어미의 정이 죽음마저 넘어선 것이었다.
"제가 하도 이 하소연을 늘어놓으니, 지나는 혼백마다 저를 귀찮아하며 피해 갔나이다. 저승사자들조차 저를 못 본 척하였지요. 허나 스님께서는... 스님께서는 이승으로 돌아가시는 몸이시니, 부디 제 자식을 찾아 그 무명천의 소재를 일러 주소서. 그리하면 저는 여한 없이 저승으로 들 수 있겠나이다."
선율은 여인의 두 손을 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었으나, 스님은 개의치 않았다.
"염려 마시오. 그 아이가 어느 고을 누구인지 소상히 일러 주시오. 소승이 이승으로 돌아가거든 반드시 그 아이를 찾아, 어미의 뜻을 전하리다. 부처님을 모시는 몸으로, 어찌 이런 딱한 청을 저버리겠소."
여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화색이 돌았다. 여인은 고을 이름과 자식의 이름, 그리고 무명천을 숨겨 둔 자리를 자세히 일러 주었다. 이야기를 마친 여인이 스님을 향해 몇 번이고 절을 올렸다.
"고맙습니다, 스님. 이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나이다. 스님께서 부디 남은 서원을 무사히 이루시고, 오래도록 강녕하시기를 비옵니다."
말을 마친 여인의 모습이 스르르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토록 이 길목을 떠나지 못하던 원혼이, 한을 풀 실마리를 얻자 비로소 저승으로 발을 옮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여인은 마지막으로 환하게 웃어 보이고는, 붉은 안갯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곁에서 지켜보던 저승사자가 입을 딱 벌렸다.
"이럴 수가. 그 어떤 저승사자도 저 원혼을 저리 순순히 저승으로 보내지 못하였는데... 스님께서는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청 하나 받아 주셨을 뿐인데 말이옵니다."
선율이 잔잔히 웃었다.
"산 자든 죽은 자든,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 주면 그뿐인 것을. 무섭게 다그친다고 풀릴 한이었다면 애초에 저리 오래 떠돌지도 않았을 게요."
저승사자는 그 말에 무언가 크게 깨달은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명부만 믿고 혼백을 함부로 다루던 자신의 태도가 새삼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스님, 소인이 오늘 스님께 큰 가르침을 얻었나이다. 앞으로는 혼백 하나하나를 소중히 살피는 저승사자가 되겠나이다."
"허허, 그리 마음먹었다면 오늘의 이 착오도 헛된 일만은 아니었구려. 자, 이제 그만 갈 길을 서두릅시다. 나를 기다리는 몸으로 어서 돌아가야 하지 않겠소."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원혼이 사라진 길목은 어느새 훤히 트여 있었고, 저 멀리 이승으로 통하는 희미한 빛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 6: 이레 만에 눈뜬 스님, 흙을 파헤치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이르자, 저승사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스님, 소인은 여기까지밖에 모시지 못하옵니다. 이 빛줄기를 따라 곧장 나아가시면 스님의 몸으로 돌아가실 수 있사옵니다."
선율이 저승사자를 돌아보며 합장했다.
"먼 길 배웅해 주어 고맙소. 부디 앞으로는 혼백을 잘 살펴, 나 같은 이가 또 애먼 고생을 하지 않도록 해 주시오."
"명심 또 명심하겠나이다, 스님. 부디 강녕하시옵소서."
저승사자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선율은 그 모습을 뒤로하고, 빛줄기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눈부신 빛이 온몸을 감싸는가 싶더니, 이내 정신이 아득해졌다.
한편 망덕사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선율이 쓰러진 지 어느덧 이레째. 스님의 몸은 숨이 붙은 듯 아닌 듯 미약하게 이어지고 있었으나, 좀처럼 깨어나지 않으니 절 안의 모든 이가 애를 태웠다.
"벌써 이레째다. 이대로 다비를 모셔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 되네. 스님의 몸이 아직 온기가 남아 있질 않은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
주지 스님은 밤낮으로 선율의 곁을 지키며 목탁을 두드렸다. 젊은 승려들은 번갈아 스님의 몸을 보살피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미음을 끓여 두었다.
바로 그 이레째 되던 날 밤, 기적이 일어났다.
꼼짝도 않던 선율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곁을 지키던 사미승이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스, 스님! 손가락이 움직였습니다! 스님이 움직이셨어요!"
승려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선율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스르르 열렸다. 이레 만에 스님이 눈을 뜬 것이었다.
"스님! 정신이 드십니까!"
선율은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저승에서 겪은 그 모든 일이 꿈이었나 싶었으나, 온몸에 남은 저승의 한기가 그것이 결코 꿈이 아니었음을 일깨워 주었다. 스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내가 돌아왔구나."
주지 스님이 선율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이 사람아, 자네가 이레 동안이나 깨어나질 않아 우리가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아는가! 대체 그동안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선율은 자신이 저승에서 겪은 일을 소상히 들려주었다. 이름이 뒤바뀐 명부 때문에 잘못 끌려간 일, 판관 앞에서 쩔쩔매던 저승사자, 착오를 인정하고 자신을 돌려보낸 염라대왕,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원혼의 이야기까지. 승려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신묘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야기를 마친 선율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레를 앓아누웠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다급한 몸짓이었다.
"스님, 어디를 가시려고!"
승려들이 놀라 만류했으나, 선율은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마당 한구석, 오래전 도반과 함께 경전을 묻어 둔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저승 문턱에서 판관이 흘린 말과, 오래도록 마음 한구석에 잊고 있던 옛 약속 하나가 문득 되살아난 것이었다.
'그렇다. 세상을 먼저 떠난 도반이 있었지. 그와 함께 경전을 베끼다가, 미처 마치지 못한 부분을 이 자리에 묻어 두지 않았던가. 언젠가 반드시 마저 완성하겠노라 약속했건만, 세월에 묻혀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선율은 맨손으로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레를 앓아누웠던 노승의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힘차게, 흙을 퍼내고 또 퍼냈다.
"스님, 대체 무얼 하시는 겁니까!"
영문을 모르는 승려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잠시 후, 선율의 손끝에 딱딱한 것이 걸렸다. 흙 속에서 오래된 항아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항아리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세월에 누렇게 바랜 경전 두루마리가 고이 잠들어 있었다.
"이것이었구나. 도반과 내가 함께 베끼다 만 반야경의 나머지 부분. 내가 저승까지 다녀와서야 비로소 이 약속을 떠올리다니."
선율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스님은 흙 묻은 두루마리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승려들은 그제야 사태를 알아차렸다. 스님이 저승에서 겪은 일이 결코 헛된 꿈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그 잘못된 명부의 착오가 실은 잊힌 약속 하나를 되살리기 위한 기묘한 인연이었음을.
그날 이후 선율은 남은 반야경 베끼기에 전보다 더욱 정성을 쏟았다. 그리고 저승에서 한 약속대로, 원혼이 일러 준 고을을 찾아가 그 어린 자식에게 마루 밑 무명천의 소재를 알려 주었다. 헐벗고 굶주리던 아이는 어미가 남긴 무명천 덕에 겨울을 무사히 났고, 훗날 그 아이는 자라서 선율을 은인으로 모셨다 한다.
선율은 마침내 반야경 육백 권을 모두 완성하였다. 붓을 놓던 날, 스님은 하늘을 우러러 조용히 웃었다.
'저승사자의 실수 한 번이 없었다면, 나는 이 서원도 옛 도반과의 약속도 다 이루지 못했으리라. 세상만사,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일어나는 일은 없구나.'
그 뒤로 선율은 자신이 저승에서 겪은 일을 만나는 이마다 들려주었다. 이승에서 지은 업은 반드시 저승에서 헤아려진다는 것을, 착한 이는 복을 받고 악한 이는 벌을 받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저마다 제 삶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 신묘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늘날까지도 잘못 잡혀간 스님의 환생담으로 전해 내려온다.
유튜브 엔딩멘트 (250자 내외)
저승 명부의 실수 한 번이, 잊힌 약속과 한 맺힌 넋을 모두 풀어낸 신묘한 인연이 되었습니다. 아직 갈 때가 아니었던 선율 스님은 이승으로 돌아와 남은 서원을 마쳤고, 저승사자는 혼백 하나하나를 소중히 살피는 법을 배웠지요. 세상만사,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일어나는 일은 없나 봅니다. 오늘 이야기 재미있게 들으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립니다. [저승사자 야담]의 다음 이야기도 기대해 주세요. 여러분의 삶에도 좋은 인연이 가득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