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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승길에서 되돌아온 노인 『청구야담』

    평생을 악착같이 모으기만 했던 한 노인. 그가 마침내 죽어 저승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저승사자가 그를 다시 이승으로 돌려보냅니다. 단, 사흘의 시간을 주면서 말입니다. 저승 문턱에서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저승사자가 그에게 건넨 '깨달음의 선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죽음의 강을 건너다 돌아온 노인의 기적 같은 사흘. 그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그 감동적인 이야기가 지금 펼쳐집니다.

    태그 (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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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269자)

    평생을 오직 돈만 그러쥐고 살았던 지독한 구두쇠, 최 영감. 어느 늦가을 밤, 돈궤를 세다 그만 숨을 거두고 맙니다. 저승길에 오른 그가 저승 곳간에서 마주한 것은, 티끌 하나 없이 텅 빈 자신의 곳간이었지요. 그토록 재물을 쌓았건만 어찌 된 일일까요. 그런데 저승사자가 그에게 뜻밖의 선물을 건넵니다. 딱 사흘, 이승으로 되돌려 보내 준다는 것이지요.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처럼 되돌아온 노인은, 그 귀한 사흘을 과연 어떻게 보냈을까요?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야기가 지금 펼쳐집니다.

    ※ 1: 소문난 구두쇠, 돈궤를 세다 눈을 감다

    옛날 옛적, 어느 산골 마을에 최 영감이라는 노인이 살았더랍니다. 이 최 영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온 고을이 다 아는 소문난 구두쇠였지요. 어찌나 인색했던지, 물 한 방울 허투루 쓰는 법이 없고, 밥알 한 톨 흘리는 법이 없었더랍니다.

    최 영감의 곳간에는 쌀이 그득그득 쌓여 썩어 나갈 지경이었지요. 논밭도 온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였고, 돈궤에는 엽전이 넘쳐 났더랍니다. 한데 정작 최 영감의 몸을 보면, 누더기가 다 된 무명옷을 몇 해째 기워 입고, 짚신 한 켤레를 밑창이 다 닳도록 신었지요. 남들이 보면 영락없는 상거지 행색이었더랍니다.

    "아까워서 어찌 쓴단 말인가. 한 푼을 쓰면 한 푼이 없어지고, 두 푼을 쓰면 두 푼이 없어지는 법. 모으고 또 모아야 이 재물이 늘어나지."

    최 영감의 입에서는 늘 이런 소리가 떠나질 않았더랍니다. 굴비 한 마리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밥 한 술 뜰 때마다 그것을 한 번씩 쳐다보며 반찬 삼았다는 이야기며, 부채가 닳을까 봐 부채는 가만두고 제 머리를 흔들어 바람을 쐬었다는 이야기가 온 마을에 파다했지요.

    그뿐이겠습니까. 장에 갔다가 국밥 한 그릇이 아까워, 남이 먹다 남긴 국물 냄새만 맡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며, 초 한 자루가 아까워 달빛에 의지해 새끼를 꼬았다는 이야기며, 하도 많아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더랍니다. 오죽하면 마을 아이들이 "자린고비 최 영감" 하고 노래를 지어 부르며 놀려 댈 지경이었지요. 그래도 최 영감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도리어 흐뭇해했더랍니다.

    '허허, 남들이 뭐라 하든 상관없다. 저것들은 재물 모으는 재미를 몰라서 저러는 게야. 세상에 돈만큼 든든한 게 어디 있단 말인가. 돈이 곧 목숨이요, 돈이 곧 자식보다 나은 법이지.'

    최 영감은 진심으로 그리 믿었더랍니다. 재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아꼈지만, 사람 정이라는 것은 도무지 알지 못하는 노인이었지요.

    그뿐이겠습니까. 최 영감은 제 식구에게도 어찌나 모질고 인색했던지, 하나뿐인 아들 내외가 끼니를 걸러도 곳간 문을 열어 주는 법이 없었더랍니다.

    "아버님, 손주 녀석이 며칠째 죽도 제대로 못 먹어 얼굴이 노랗습니다. 쌀 한 됫박만 내어 주십시오."

    며느리가 눈물로 애원해도, 최 영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요.

    "어허, 젊은것들이 게을러서 그런 게지. 제 손으로 벌어먹을 생각을 해야지, 늙은 애비 곳간만 넘본단 말이냐. 어림도 없다."

    이렇게 매몰차게 내치기 일쑤였더랍니다. 그러니 아들 내외의 속이 오죽했겠습니까. 손주가 앓아누워도 약 한 첩 지어 주는 법이 없고, 며느리가 헐벗어도 무명 한 필 끊어 주는 법이 없었으니, 한집에 살아도 남만도 못한 세월이었지요. 그래도 자식 된 도리라, 아들 내외는 꾹 참고 늙은 아비를 모시고 살았더랍니다.

    마을 사람들도 최 영감이라면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더랍니다. 동네에 초상이 나도 부조 한 푼 없고, 다리가 무너져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을 때도 나 몰라라 뒷짐만 졌으니, 인심을 잃어도 크게 잃은 게지요. 흉년이 들어 온 마을이 굶주릴 적에도, 최 영감은 곳간에 쌓인 쌀을 풀기는커녕 도리어 값을 두 배로 올려 팔아먹으려 들었더랍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 마음속에 최 영감을 곱게 보는 이가 하나도 없었지요.

    "저 영감, 죽어서 저승 곳간에 그득 쌓아 두려고 저러나. 저승 갈 때 그 재물 한 짐 지고 갈 것도 아니면서. 죽으면 다 두고 갈 것을,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저리 아등바등인지 원."

    사람들이 뒤에서 이렇게 혀를 차며 수군거려도, 최 영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더랍니다. 오히려 재물이 늘어 가는 재미에 밤잠을 설쳐 가며 엽전을 세고 또 셌지요. 그 누구의 말도 최 영감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더랍니다.

    그러던 어느 늦가을 밤이었더랍니다. 그날도 최 영감은 등잔불 아래서 돈궤를 열어 놓고 엽전을 세고 있었지요. 하나, 둘, 셋… 손끝으로 엽전을 넘기는 그 재미가, 최 영감에게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낙이었더랍니다.

    '허허, 오늘도 한 푼 늘었구나. 이 재미에 산다니까. 내년엔 저 아랫녘 김 부자네 논까지 사들여야지. 그럼 이 근방 땅은 죄다 내 것이 되는 게야.'

    최 영감이 흐뭇하게 엽전을 어루만지던 바로 그때였지요. 별안간 가슴 한복판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하더니, 숨이 턱 막혀 왔더랍니다. 마치 커다란 바위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지요.

    "어헉…!"

    최 영감은 가슴을 움켜쥐고 그 자리에 폭 고꾸라지고 말았지요. 손에 쥐고 있던 엽전 꾸러미가 방바닥에 우르르 쏟아졌더랍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데, 최 영감은 그 와중에도 쏟아진 엽전을 붙잡으려 손을 허우적거렸지요.

    '아이고, 내 엽전… 내 돈… 이걸 두고 어딜 간단 말이냐. 안 된다, 아직 안 돼. 저 아랫녘 논도 못 샀는데, 이대로는…'

    허나 그 손은 끝내 엽전에 닿지 못했더랍니다. 평생 그러쥐고 살았던 그 돈이, 정작 마지막 순간에는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이었지요. 최 영감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고, 방 안에는 무거운 정적만 감돌았더랍니다. 등잔불만 홀로 가물가물 타오르고 있었지요. 평생을 모으고 또 모으기만 했던 최 영감이, 그예 그렇게 숨을 거두고 만 것이었더랍니다. 그 많은 재물도, 그 그득한 곳간도, 저승길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게지요.

    이튿날 아침, 아버지를 깨우러 방에 든 아들이 싸늘하게 식은 최 영감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했더랍니다. 방바닥엔 밤새 흩어진 엽전들이 나뒹굴고 있었지요.

    "아버님! 아버님, 눈 좀 떠 보십시오!"

    허나 최 영감은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지요. 온 마을에 최 영감이 죽었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퍼지고, 집안엔 곡소리가 낭자했더랍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바로 그 순간, 최 영감의 넋은 전혀 다른 곳에서 스르르 눈을 뜨고 있었더랍니다.

    ※ 2: 저승길, 삼도천을 건너다

    최 영감이 눈을 떠 보니, 이게 웬일이랍니까. 방 안이 아니라, 사방이 온통 잿빛 안개로 자욱한 낯선 길 위였더랍니다. 발밑에는 시커먼 강물이 소리 없이 흐르고, 저 멀리로는 거대한 무쇠 대문이 어렴풋이 보였지요.

    "여기가… 여기가 대체 어디란 말인가?"

    최 영감이 어리둥절하여 두리번거리는데, 바로 곁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더랍니다.

    "최 아무개, 이제야 정신이 드는가."

    깜짝 놀라 돌아보니, 검은 도포를 입고 머리에 갓을 눌러쓴 이가 우뚝 서 있었지요. 얼굴은 창백하니 핏기가 없고, 손에는 두툼한 명부가 들려 있었더랍니다. 다름 아닌 저승사자였지요. 최 영감은 그제야 제가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왔더랍니다.

    "서, 설마… 내가 죽었단 말이오? 아니, 그럴 리가 없소. 나는 아직 할 일이 태산 같은 사람이오. 저 아랫녘 논도 사야 하고, 곳간도 더 늘려야 하고…"

    저승사자는 그런 최 영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나직이 혀를 찼지요.

    "쯧쯧. 죽어서 이곳까지 와서도 논이며 곳간이며 하는 소리부터 나오는가. 참으로 딱한 노릇이로다. 자, 잔말 말고 따라오게. 저 강을 건너 저승 문으로 들어가야 하네."

    최 영감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더랍니다. 저승이라니, 죽음이라니,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입니까. 최 영감은 얼른 머리를 굴렸지요. 평생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믿어 온 사람이었으니, 이 위기도 돈으로 어찌 넘겨 볼 심산이었더랍니다.

    "저, 저승사자 나리. 내 말 좀 들어 보시오. 내가 이래 봬도 우리 고을에서 제일가는 부자요. 곳간에 쌀이 그득하고 돈궤엔 엽전이 넘쳐 나는 몸이라. 나를 좀 돌려보내 주시면, 내 그 재물을 나리께 몽땅 바치리다. 어떻소, 밑지는 장사는 아니지 않소?"

    최 영감이 손을 싹싹 비비며 이렇게 흥정을 붙이자, 저승사자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빛이 스쳤더랍니다.

    "허허, 이 사람 보게. 저승에서 그 엽전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여기서는 자네가 이승에서 쌓은 재물 따위, 티끌만큼의 값어치도 없느니라. 여기서 값을 쳐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자네가 살아생전 얼마나 남에게 베풀고 덕을 쌓았느냐, 그것뿐이니라."

    "베풀고 덕을 쌓다니… 그, 그게 무슨…"

    최 영감은 그 말뜻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더랍니다. 평생 모으기만 했지, 베푼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노인이었으니 말이지요.

    "나리,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봐주시오. 내 곳간을 통째로 바치겠소. 아니, 논밭까지 다 드리리다. 세상에 그만한 재물이면 안 되는 일이 없질 않소이까."

    최 영감이 그예 매달리자, 저승사자는 딱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더랍니다.

    "자네는 아직도 모르는구나. 이승에서 그토록 움켜쥔 그 재물이, 정작 자네가 죽는 순간 자네 손에 단 한 푼이라도 따라왔던가? 아니지. 그 재물은 죄다 이승에 남고, 자네 홀로 빈손으로 이 길에 오른 게야. 저승에는 빈손으로 오고 빈손으로 가는 법. 그러니 그런 흥정일랑 그만두고, 순순히 따라오게."

    저승사자는 더는 대꾸하지 않고, 최 영감을 이끌어 그 시커먼 강가로 데려갔더랍니다. 강물은 어찌나 깊고 검은지,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지요. 강 위로는 낡은 나룻배 한 척이 떠 있고, 그 사공은 뜻밖에도 사람이 아니었더랍니다.

    우락부락한 얼굴에 뿔이 돋고, 방망이를 든 도깨비 둘이 나룻배의 노를 잡고 있었던 게지요. 최 영감은 그 흉측한 몰골에 기겁을 하고 뒷걸음질을 쳤더랍니다.

    "히익! 저, 저것들은 대체 뭐요!"

    "놀랄 것 없네. 저 도깨비들은 저승 강을 건네주고, 저승 곳간을 지키는 일꾼들이니라. 겉모습은 저래도 제 할 일에는 어긋남이 없는 녀석들이지. 어서 배에 오르게."

    최 영감은 벌벌 떨며 나룻배에 올랐더랍니다. 도깨비들이 방망이 같은 노를 저으니, 배는 검은 강물을 스르르 미끄러져 나갔지요. 도깨비 하나가 노를 저으며 최 영감을 힐끔 보더니, 껄껄 웃으며 이리 말했더랍니다.

    "영감, 이 강을 건너는 넋이 하나같이 하는 소리가 있지. '재물 두고 가기 아깝다'는 소리 말이야. 그런데 정작 강을 다 건너고 나면, 그 소리는 온데간데없고 다들 후회만 하더라고. '베풀며 살 걸, 정 나누며 살 걸' 하고 말이야. 껄껄껄."

    그 말에 최 영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더랍니다. 강을 건너는 동안, 최 영감은 문득 강물 속을 들여다보았지요. 한데 그 검은 물결 위로, 제가 살아온 지난날들이 하나하나 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굶주린 며느리를 매몰차게 내치던 제 모습, 흉년에 쌀값을 올려 마을 사람들을 울리던 제 모습, 초상집에 부조 한 푼 없이 뒷짐만 지던 제 모습… 그 모든 것이 강물 위에 낱낱이 비쳐 왔더랍니다. 그중에서도 최 영감의 가슴을 가장 후벼 판 것은, 손주 녀석이 앓아누웠을 적 약 한 첩 지어 주지 않아 그 어린것이 밤새 끙끙 앓던 모습이었지요. 최 영감은 그 광경에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저며 왔더랍니다.

    '내가… 내가 정말 저리 모질게 살았단 말인가. 그깟 엽전 몇 푼이 뭐라고, 피붙이를 저리 홀대하며 살았단 말인가.'

    평생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뉘우침이, 최 영감의 마음에 처음으로 어렴풋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더랍니다.

    이윽고 나룻배가 강 건너편에 닿았더랍니다. 저 앞에는 아까 멀리서 보았던 그 거대한 무쇠 대문이, 이제는 눈앞에 우뚝 솟아 있었지요. 문의 높이가 어찌나 까마득한지, 고개를 한껏 젖혀도 그 꼭대기가 보이질 않았더랍니다. 문 좌우로는 붉은 등불이 음산하게 타오르고, 그 앞으로는 수많은 넋들이 줄지어 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지요. 저승 문턱에 마침내 다다른 것이었더랍니다.

    최 영감은 그 서슬 퍼런 광경 앞에서, 이제야말로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어 온몸이 오싹해졌더랍니다. 한데 저승사자는 그 문 안으로 최 영감을 곧장 데려가지 않고, 문 옆으로 난 좁은 샛길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었지요.

    "어, 어디로 가는 게요? 저 문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었소?"

    "들어가기 전에, 자네에게 보여 줄 것이 하나 있느니라. 따라오게."

    저승사자의 그 알 수 없는 말에, 최 영감은 영문도 모른 채 그 뒤를 따라갔더랍니다.

    ※ 3: 텅 빈 저승 곳간, 그리고 선물

    저승사자를 따라 좁은 샛길을 얼마쯤 걸었을까요. 최 영감의 눈앞에, 끝도 없이 늘어선 거대한 곳간들이 펼쳐졌더랍니다. 마치 큰 장터의 창고들처럼, 수천수만의 곳간이 줄지어 서 있는데, 그 앞을 뿔 돋친 도깨비들이 분주히 오가며 짐을 나르고 문서를 뒤적이고 있었지요. 어떤 도깨비는 곡식 가마니를 어깨에 지고 곳간으로 나르고, 어떤 도깨비는 붓을 들고 장부에 무언가를 부지런히 적어 넣고 있었더랍니다. 그 모습이 흉측하기는커녕, 어쩐지 부지런하고 정겨워 보이기까지 했지요.

    "여기가 대체 어디요?"

    "저승 곳간이니라. 이승 사람 하나하나마다 여기 제 곳간이 있느니라. 살아생전 남에게 베풀고 덕을 쌓은 만큼, 이 곳간에 그 공덕이 차곡차곡 쌓이는 게지. 밥 한 술을 나누면 밥 한 술이 쌓이고, 옷 한 벌을 벗어 주면 옷 한 벌이 쌓이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면 그 정성까지 고스란히 쌓이느니라. 그리고 저승에 들면, 바로 이 곳간에 쌓인 것으로 그 사람이 갈 곳이 정해지느니라."

    최 영감은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더랍니다.

    '곳간이라고? 재물을 쌓는 곳간이라고? 그렇다면 내 곳간은 필시 이 저승에서도 제일 크고 그득할 게야. 내가 이승에서 얼마나 알뜰히 모았는데.'

    최 영감은 은근히 어깨가 으쓱해졌지요. 이승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으니, 저승 곳간인들 오죽 크겠느냐 싶었던 게지요.

    "저승사자 나리, 그럼 어디 내 곳간 좀 봅시다. 필시 저 중에서도 제일 큰 곳간이 내 것일 테지요?"

    저승사자는 말없이 도깨비 하나를 불러 명부를 확인하게 했더랍니다. 도깨비가 두꺼운 장부를 한참 뒤적이더니, 한구석의 조그맣고 초라한 곳간 하나를 가리켰지요.

    "최 아무개의 곳간은… 저기 저것이구먼요."

    최 영감은 도깨비가 가리킨 곳을 보고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더랍니다. 다른 곳간들은 어찌나 크고 그득한지 문이 미어질 지경인데, 제 곳간이라는 것은 겨우 개집만 한 크기에, 그마저도 문이 삐거덕 낡아 빠져 있었던 게지요.

    "무, 무슨 소리요! 이 조그만 게 내 곳간이라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니오? 내가 이승에서 얼마나 큰 부자였는데!"

    최 영감은 펄쩍 뛰며 그 곳간 문을 벌컥 열어젖혔더랍니다. 한데 이게 웬일이랍니까. 그 안은 텅텅 비어, 거미줄만 잔뜩 쳐 있고 먼지만 폴폴 날릴 뿐이었지요. 엽전 한 닢, 쌀 한 톨 보이지 않았더랍니다.

    "이, 이럴 수가! 내 재물은? 내가 평생 모은 그 많은 재물은 다 어디 갔단 말이오!"

    저승사자는 그런 최 영감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지요.

    "말하지 않았는가. 이 곳간에 쌓이는 것은 이승의 재물이 아니라, 자네가 남에게 베푼 공덕이라고. 자네는 평생 모으기만 했지, 단 한 번도 남에게 진심으로 베푼 적이 없질 않은가. 그러니 이 곳간이 텅 빈 것은 당연한 이치니라. 자네가 이승에서 아무리 곳간을 채웠어도, 정작 저승의 제 곳간은 이리 비어 있었던 게야."

    최 영감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더랍니다. 저 옆을 보니, 이웃에 살던 가난한 박 서방의 곳간이 있었지요. 박 서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제 살림도 넉넉지 않으면서 늘 이웃과 나누고, 굶주린 이를 보면 제 밥을 덜어 주던 마음씨 고운 사람이었더랍니다. 지난겨울, 최 영감네 며느리가 굶주릴 적에도 몰래 쌀 됫박을 담 너머로 건네준 것이 바로 그 박 서방이었지요. 한데 그 박 서방의 곳간은 어찌나 크고 그득한지, 곡식이며 비단이며 온갖 좋은 것들이 넘쳐흐를 지경이었더랍니다. 곳간 앞을 지키는 도깨비들도 흐뭇한 얼굴로 그 곳간을 어루만지고 있었지요.

    '세상에… 나는 그리 많은 재물을 쌓고도 저승 곳간이 텅 비었는데, 저 가난한 박 서방은 어찌 저리 그득하단 말인가. 제 먹을 것도 부족하면서 남을 먼저 챙기던 그 사람이, 정작 저승에서는 나보다 백배 천배 부자였구나.'

    최 영감은 그제야 뼈저리게 깨달았더랍니다. 제가 평생 그러쥐고 산 그 재물이라는 것이, 정작 죽어서는 아무 쓸모도 없는 헛것이었다는 것을 말이지요. 참으로 중한 것은 남에게 베푼 정과 덕이었건만, 그것을 평생 하찮게 여기며 살아온 것이었더랍니다. 재물을 산더미처럼 쌓고도 마음은 거지처럼 가난하게 살았으니, 이보다 더 어리석은 노릇이 어디 있겠습니까. 최 영감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지요.

    "내가… 내가 헛살았소. 평생을 헛살았어. 이 나이 먹도록 대체 뭘 위해 아등바등 살았단 말인가. 아이고, 이제 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최 영감이 땅을 치며 통곡하자, 저승사자는 그 모습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았더랍니다. 그러더니 뜻밖에도, 나직하고도 온화한 목소리로 이리 말하는 것이었지요.

    "최 아무개, 자네의 그 뉘우침이 참으로 진실되어 보이는구나. 원래대로라면 자네는 이대로 저 문 안으로 들어가, 텅 빈 곳간의 값을 치러야 할 것이나… 자네의 그 뉘우치는 마음을 보아, 내 특별히 한 번의 기회를 주려 하네."

    "기, 기회라니요?"

    "자네를 사흘간 이승으로 돌려보내 주겠네. 사흘이라는 시간을 줄 터이니, 그동안 자네의 저 텅 빈 곳간을 채워 보게. 어찌 채우는지는, 자네가 스스로 깨우쳐야 할 일이니라. 이것이 내가 자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니, 부디 헛되이 흘려보내지 말게. 명심하게. 사흘이 지나면 나는 반드시 자네를 다시 데리러 갈 것이야. 그때 자네의 곳간이 어떠할지는, 온전히 자네의 손에 달렸느니라."

    "사흘… 사흘이라 하셨소? 아이고, 고맙소, 고맙소이다! 내 이번엔 결코 헛되이 보내지 않으리다!"

    최 영감은 저승사자의 옷자락이라도 붙들 듯 연신 고개를 조아렸더랍니다. 평생 남에게 고개 한 번 숙일 줄 모르던 그 완고한 노인이, 처음으로 진심에서 우러난 감사를 올린 것이었지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 영감의 눈앞이 다시 아득해지기 시작했더랍니다. 저승 곳간도, 도깨비들도, 저승사자의 모습도 안개 속으로 스르르 멀어져 갔지요. 그리고 최 영감은,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더랍니다.

    ※ 4: 관 앞에서 깨어난 노인

    한편, 이승의 최 영감네 집에서는 초상 준비가 한창이었더랍니다. 아들 내외는 밤새 곡을 하다 눈이 퉁퉁 부었고, 마당엔 이웃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수군거리고 있었지요. 그래도 자린고비 최 영감이라, 진심으로 슬퍼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더랍니다.

    "쯧, 그리 재물을 쌓더니 결국 저리 가는구먼. 저 곳간의 쌀은 이제 다 누구 차지가 되려나."

    "말도 마시게. 살아생전 인심 한 번 못 쓰고 갔으니, 저승 가서도 대접받긴 글렀지. 저 영감 곳간에 쌀이 썩어 나도, 우리 같은 사람한테는 쌀 한 톨 나눠 준 적이 없질 않은가."

    "그러게 말일세. 사람이 죽으면 다 두고 가는 것을. 그 재물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웃들이 이렇게 뒷말을 주고받는 사이, 방 안에는 하얀 천에 덮인 최 영감의 시신이 뉘어 있었더랍니다. 아들은 그 곁에 앉아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물짓고 있었지요. 아무리 모진 아비였어도, 막상 세상을 떠나고 나니 서럽고 허망한 마음이 밀려왔던 게지요.

    "아버님, 그리 모질게 사시더니… 그래도 자식 된 도리로 편히 보내 드리겠습니다. 부디 저승에서나마 편안하십시오."

    바로 그때였더랍니다. 하얀 천이 스르르 움찔하더니, 그 아래에서 최 영감의 손가락이 꼼지락 움직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 어어?"

    아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을 치는데, 최 영감이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하얀 천을 걷어 냈더랍니다.

    "어허, 내가 살아 있다! 내가 돌아왔어!"

    방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지요. 며느리는 기절할 듯 비명을 지르고, 마당의 이웃들은 귀신이 나왔다며 우르르 도망치기 바빴더랍니다. 손주 녀석만이 눈이 휘둥그레져 할아버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지요.

    "하, 할아버지가… 살아나셨어?"

    아들은 놀라 얼이 빠진 채 아버지를 붙들었더랍니다.

    "아버님!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분명 숨을 거두셨는데…"

    최 영감은 제 두 손을 들여다보고, 제 뺨을 만져 보고, 방바닥을 짚어 보았더랍니다. 틀림없는 이승이요, 틀림없는 제 집이었지요. 손끝에 닿는 방바닥의 온기며, 창으로 스며드는 햇살이며, 마당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며, 그 모든 것이 이토록 새삼스럽고 고마울 수가 없었더랍니다. 저승사자가 말한 그 사흘의 말미가, 정말로 시작된 것이었지요.

    '그렇구나. 정말로 돌아왔구나. 저승사자 나리가 내게 사흘을 주셨어. 텅 빈 내 곳간을 채우라고… 이 귀한 사흘을 내게 주셨어. 아이고, 이 은혜를 어찌 갚는단 말인가.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시각도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되겠구나.'

    최 영감의 두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더랍니다. 그러고는 곁에 있던 아들의 두 손을 덥석 붙잡았지요.

    "얘야, 이 못난 애비를 용서해 다오. 내가 그동안 너희에게 참으로 모질게 굴었구나. 손주가 굶어도 쌀 한 됫박 안 내주고, 며느리가 헐벗어도 무명 한 필 안 끊어 주고, 이웃이 굶주려도 문전박대만 하고… 내가 사람이 아니었다. 짐승만도 못했어."

    아들은 제 귀를 의심했더랍니다. 평생 남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방구석에서 겁에 질려 있던 어린 손주도, 할아버지의 그 낯선 모습에 눈만 껌뻑이고 있었지요.

    최 영감은 손주를 손짓하여 불렀더랍니다. 그러고는 그 조그만 손을 꼭 쥐고, 주름진 얼굴을 손주의 뺨에 부비며 흐느꼈지요.

    "아이고, 우리 강아지. 이 할애비가 그동안 너를 얼마나 서럽게 했느냐. 앓아누운 너에게 약 한 첩 못 지어 준 이 할애비를, 어찌 용서하겠느냐. 이제부터는, 이제부터는 이 할애비가 다 갚아 주마."

    그 모습에 아들 내외의 눈에서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더랍니다.

    "아, 아버님. 어인 말씀을… 몸도 성치 않으신데 우선 좀 누우십시오."

    "아니다, 아니야. 나는 지금 눕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다. 얘야, 내 말 잘 들어라. 나는 사실 저승에 다녀왔느니라."

    "저, 저승이라니요?"

    최 영감은 아들 내외 앞에 저승에서 겪은 일을 낱낱이 털어놓았더랍니다. 저승사자를 만난 일, 도깨비 나룻배로 검은 강을 건넌 일, 그리고 저승 곳간에서 텅 빈 제 곳간을 마주한 일까지 말이지요.

    "내 평생 그리 재물을 쌓았건만, 저승 곳간은 거미줄만 가득한 빈 곳간이더구나. 반면에 저 아랫집 박 서방은, 제 살림도 가난하면서 늘 남을 도왔더니, 그 곳간이 넘쳐흐를 지경이었어. 알고 보니 지난겨울 우리 며느리가 굶주릴 적에 담 너머로 쌀을 건네준 이가 바로 그 박 서방이었더구나. 나는 그 은혜도 모르고 살았어. 그제야 내가 뼈저리게 깨달았다. 참으로 값진 것은 재물이 아니라, 남에게 베푼 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재물이란 죽으면 한 푼도 못 가져가지만, 베푼 정은 저승 곳간까지 고스란히 따라가는 게야."

    아들 내외는 그 말을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더랍니다. 아버지가 저리 변한 것이 꿈만 같았지요. 평생 돈밖에 모르던 그 완고한 노인이, 죽음의 강을 건너갔다 오더니 이토록 딴사람이 되어 돌아올 줄,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저승사자 나리께서 내게 사흘을 주셨다. 이 사흘 동안 내 텅 빈 곳간을 채우라고 하셨어. 그러니 얘야, 나는 이제부터 이 사흘을 한 순간도 헛되이 쓰지 않을 것이다. 지난 세월 내가 그러쥐기만 했던 그 재물을, 이제는 아낌없이 풀어 베풀 것이야. 어서, 어서 곳간 문을 활짝 열어라!"

    최 영감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니, 그 눈빛이 예전과는 완전히 딴사람 같았더랍니다. 재물을 그러쥐려 번뜩이던 그 눈이 아니라, 이제는 따뜻하고도 결연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죽음의 문턱을 넘어갔다 돌아온 노인의, 참으로 놀라운 변화였더랍니다. 아들 내외는 눈물을 훔치며, 그런 아버지를 부축해 곳간으로 향했지요. 이렇게 하여, 최 영감에게 주어진 기적 같은 사흘이, 마침내 그 첫걸음을 떼기 시작한 것이었더랍니다.

    ※ 5: 곳간을 열고 정을 나누다

    그날부터 최 영감의 사흘이 시작되었더랍니다. 예전 같으면 곳간 열쇠를 목숨보다 아껴 품에 꼭 지니고 다니던 최 영감이, 그 열쇠를 스스로 꺼내 곳간 문을 활짝 열어젖혔지요. 그러고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더랍니다.

    "자, 다들 오시오! 우리 마을에 굶주리는 이가 있거든 다 오시오! 곳간의 쌀을 아낌없이 나누어 드리리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 제 귀를 의심했더랍니다. 죽었다던 최 영감이 되살아난 것도 놀라운데, 그 지독한 자린고비가 곳간을 열어 쌀을 나눠 준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입니까.

    "저 영감이 정신이 나갔나? 아니면 저승 갔다 오더니 딴사람이 된 겐가?"

    사람들이 반신반의하며 곳간 앞으로 모여들자, 최 영감은 손수 됫박에 쌀을 퍼 담아 한 집 한 집 나누어 주었더랍니다. 굶주린 아이가 있는 집에는 쌀을 곱절로 안기고, 병든 노인이 있는 집에는 약값에 보태라며 엽전 꾸러미까지 얹어 주었지요. 헐벗은 이에게는 곳간 한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무명이며 비단을 끊어 주고, 홀로 사는 과부에게는 겨우살이 땔감까지 넉넉히 마련해 주었더랍니다. 평생 한 톨도 아까워 벌벌 떨던 그 쌀이, 이제는 아까운 줄을 도무지 모르겠더랍니다.

    "어르신, 이 은혜를 어찌… 정말 받아도 되는 겝니까?"

    "암, 받고말고. 도리어 내가 미안하지. 진작에 이리 나누며 살았어야 했는데, 이 늙은이가 어리석어 이제야 정신을 차렸소이다. 부디 마다 말고 받아 주시오. 이 쌀은 내 것이 아니라, 본디 여러분과 나눴어야 할 것이었소."

    최 영감의 진심 어린 말에, 마을 사람들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더랍니다. 평생 미워하기만 했던 최 영감이건만, 저리 진심으로 뉘우치고 베푸니, 어찌 미운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겠습니까. 곳간 앞은 어느새 쌀을 받아 든 사람들의 고마움과 웃음으로 북적북적해졌지요.

    이튿날, 최 영감은 다락 깊숙이 감춰 두었던 문서 뭉치를 꺼내 왔더랍니다. 다름 아닌, 마을 사람들이 최 영감에게 진 빚 문서였지요. 최 영감은 평생 이 빚 문서로 사람들을 옥죄며, 갚지 못하면 논밭을 빼앗고 집을 빼앗아 왔더랍니다. 한데 최 영감은 그 문서 뭉치를 마당 한복판으로 가져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쏘시개에 불을 댕겼지요.

    "자, 다들 보시오.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빚을 모두 없던 일로 하겠소. 이 문서들을 몽땅 태워 버릴 테니, 이제 더는 빚 걱정일랑 마시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빚 문서들이 재가 되어 흩어지자, 마을 사람들은 그만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더랍니다. 그 빚 때문에 밤잠을 설치던 이들이, 그 빚 때문에 자식을 남의집살이로 보내야 했던 이들이, 하나둘 최 영감 앞에 엎드려 절을 올렸지요.

    "어르신! 이 은혜를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아이고, 절은 무슨 절이오. 어서들 일어나시오. 내가 진작 이리했어야 하는 것을."

    최 영감의 두 뺨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더랍니다. 신기한 일이었지요. 재물을 나누어 줄수록 곳간은 비어 갔지만, 최 영감의 마음은 도리어 그득그득 채워지는 것이었더랍니다. 평생 엽전을 세며 느끼던 그 재미와는 비할 수도 없는, 참으로 따뜻하고 벅찬 기쁨이었지요. 곳간의 쌀이 한 됫박 줄어들 때마다, 마음속에는 그보다 몇 곱절 큰 기쁨이 차오르니, 이 어찌 신기한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었구나. 이 기쁨이었어. 내가 평생 몰랐던 이 기쁨을, 이제야 알게 되었구나. 남에게 베푸는 이 기쁨이, 엽전 만 냥보다 값진 것이었어. 나는 그동안 곳간을 채운다고 여겼지만, 실은 내 마음을 텅텅 비우며 살았던 게야. 어이하여 이 간단한 이치를 여태 몰랐단 말인가.'

    베풀면 베풀수록, 최 영감의 얼굴에는 살아생전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더랍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최 영감을 보며, 이제는 손가락질 대신 진심 어린 고마움을 보내기 시작했지요.

    사흘째 되던 날, 최 영감은 그동안 소원했던 이웃, 저 아랫집 박 서방을 찾아갔더랍니다. 저승 곳간에서 넘쳐흐르던 그 마음씨 고운 이웃 말이지요. 최 영감은 박 서방의 손을 꼭 잡고, 지난겨울 며느리에게 몰래 쌀을 건네준 그 은혜에 깊이 고개를 숙였지요.

    "박 서방, 내가 자네에게 큰 빚을 졌네. 자네가 우리 며느리를 몰래 도와준 그 은혜도 모르고, 내 그동안 자네를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지 모르네. 부디 이 어리석은 늙은이를 용서해 주게."

    박 서방은 손사래를 치며 도리어 최 영감의 변화를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더랍니다. 두 노인은 그렇게 오랜 앙금을 풀고, 손을 맞잡고 정답게 웃었지요.

    그날 밤, 최 영감은 아들 내외와 손주를 불러 모아 둥근 밥상에 둘러앉았더랍니다. 곳간의 가장 좋은 쌀로 지은 하얀 쌀밥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이며 정성껏 지진 전이며, 그동안 아까워 상에 올리지 못했던 온갖 음식이 그득한 따뜻한 밥상이었지요. 평생 처음으로, 최 영감은 식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었더랍니다.

    "많이들 먹어라. 그동안 이 애비가 못나서 너희를 참 많이도 굶겼구나. 오늘부터는 마음껏 배불리 먹으렴."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손수 밥을 더 퍼 주자, 그만 참았던 눈물을 툭 떨구고 말았더랍니다. 시집온 뒤로 시아버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할아버지, 이렇게 다 같이 밥 먹으니까 참 좋아요."

    손주의 그 말 한마디에, 최 영감은 그만 눈시울이 붉어졌지요.

    "그래, 그래. 참으로 좋구나. 이 좋은 걸 여태 모르고 살았으니, 이 할애비가 참 어리석었지. 재물이 산더미 같아도, 이렇게 식구들이 웃으며 둘러앉아 밥 한 끼 나누는 것만 못하다는 걸, 왜 진작 몰랐을꼬."

    그렇게 최 영감의 사흘은, 온기와 웃음으로 그득그득 채워져 갔더랍니다. 텅 비어 가는 곳간과는 반대로, 최 영감의 마음도, 그 집안도, 온 마을도 따뜻한 정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지요.

    ※ 6: 다시 저승길, 그득 찬 곳간

    그렇게 꿈같은 사흘이 흐르고, 마침내 사흘째 밤이 깊어 갔더랍니다. 최 영감은 그날도 온 마을에 남은 재물을 아낌없이 나누고, 식구들과 정다운 하루를 보냈지요. 그러고는 잠자리에 들기 전, 마당에 나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더랍니다.

    '저승사자 나리께서 오늘 밤 나를 데리러 오시겠구나. 이제 여한이 없다. 텅 비었던 내 곳간을, 이 사흘 동안 정성껏 채웠으니…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저 길에 오를 수 있겠어.'

    최 영감의 얼굴에는 두려움 대신 잔잔한 평온이 깃들어 있었더랍니다. 죽음이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홀가분하고 개운한 마음이었지요. 지난 사흘, 온 마음을 다해 베풀고 나누고 화해했으니, 이제 이 세상에 미련이라곤 티끌만큼도 남지 않았던 게지요. 최 영감은 아들 내외를 불러 마지막 당부를 남겼더랍니다.

    "얘야, 이 애비는 오늘 밤 다시 저승으로 돌아갈 게다. 슬퍼하지 마라. 이 애비는 이 사흘 동안, 평생 못다 한 것을 다 이루었으니 참으로 복된 사람이니라. 부디 너희도, 재물에 매이지 말고 이웃과 정을 나누며 살거라. 그것이 이 애비가 저승에서 배워 온, 가장 값진 가르침이니라. 곳간을 채우려 애쓰지 말고, 마음을 채우려 애쓰거라. 알겠느냐?"

    "예, 아버님. 명심하겠습니다. 흑흑…"

    아들 내외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번에는 예전처럼 서럽지만은 않았더랍니다. 아버지가 저리 평온하고 복된 얼굴로 떠나니, 그 마지막을 곱게 배웅해 드리고 싶었던 게지요. 어린 손주도 할아버지의 주름진 손을 꼭 잡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 손등을 쓰다듬어 주었더랍니다.

    최 영감은 자리에 반듯이 누워 스르르 눈을 감았더랍니다. 그러자 방 안에 서늘한 바람이 한 줄기 스치더니, 낯익은 검은 도포에 갓을 쓴 저승사자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지요.

    "최 아무개, 약속한 사흘이 다 되었네. 이제 나와 함께 갈 시간일세."

    "예, 나리.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이번엔 도망칠 생각도, 흥정할 생각도 없소. 편안한 마음으로 따르리다."

    최 영감의 넋이 몸에서 스르르 일어나, 저승사자를 따라 다시 그 잿빛 길에 올랐더랍니다. 도깨비들이 노를 젓는 나룻배로 검은 강을 건너는데, 이번에는 강물에 비친 제 모습이 예전과 사뭇 달라 보였지요. 지난 사흘간 베풀며 웃던 제 모습들이, 그 검은 물결 위에 따스하게 어리고 있었던 것이었더랍니다.

    이윽고 저승 곳간에 다다르니, 이게 웬일이랍니까. 지난번엔 거미줄만 가득하던 그 초라한 곳간이, 이제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더랍니다. 뿔 돋친 도깨비들이 분주히 오가며, 최 영감의 곳간에 무언가를 자꾸자꾸 나르고 있었지요. 곡식이며 비단이며, 온갖 좋은 것들이 곳간 안에 그득그득 쌓여 넘쳐흐를 지경이었더랍니다.

    "허허, 이게… 이게 정녕 내 곳간이란 말이오?"

    최 영감이 어리둥절하여 묻자, 저승사자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지요.

    "그렇다네. 자네가 지난 사흘간 이승에서 베푼 정성이, 이렇게 하나도 빠짐없이 자네 곳간에 쌓인 게야. 굶주린 이에게 나눠 준 쌀 한 됫박도, 빚을 탕감해 준 그 넓은 마음도, 식구들에게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도… 그 모든 것이 여기 이렇게 고스란히 담겨 있느니라. 보게, 저 도깨비들이 아직도 자네의 공덕을 실어 나르느라 저리 바쁘질 않은가."

    곳간을 지키던 도깨비 하나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껄껄 웃었더랍니다.

    "영감, 사흘 만에 이리 곳간을 채운 넋은 내 처음 보네. 아주 부지런하셨구먼. 이 정도면 곳간을 하나 더 지어야 할 판이야. 껄껄껄!"

    최 영감은 그 그득한 곳간을 바라보며, 그만 뜨거운 눈물을 주르륵 흘렸더랍니다. 텅 비었던 곳간을 이토록 채울 수 있게 해 준 그 사흘이,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 선물이었는지, 이제야 뼛속 깊이 사무쳤던 게지요.

    "나리, 이 은혜를 어찌 갚으오리까. 나리께서 주신 그 사흘 덕에, 이 어리석은 늙은이가 사람답게 사는 법을 비로소 배웠소이다. 참으로 고맙고 또 고맙소이다."

    저승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최 영감을 아까와는 전혀 다른 길로 인도했더랍니다. 컴컴하고 음산한 그 무쇠 대문이 아니라, 저 멀리 은은한 빛이 감도는 환하고 따뜻한 길이었지요. 복을 지은 넋들만이 갈 수 있는, 좋은 세상으로 향하는 길이었더랍니다.

    최 영감은 그 빛의 길로 걸음을 옮기며, 마지막으로 이승 쪽을 돌아보았지요. 그러고는 나직이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더랍니다.

    '재물은 아무리 쌓아도 저승 문턱을 넘지 못하지만, 남에게 베푼 정은 이렇게 끝까지 나를 따라오는구나. 참으로, 참으로 값진 이치로다.'

    그 후로 최 영감의 이야기는 온 고을에 두고두고 전해졌더랍니다. 죽음의 강을 건넜다 되돌아온 노인이, 사흘 만에 텅 빈 저승 곳간을 그득 채우고 좋은 곳으로 갔다는 이야기 말이지요.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나누며, 저마다 제 마음속 곳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더랍니다. 나는 지금, 무엇으로 그 곳간을 채우고 있는가 하고 말이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마음에 새길 만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도 저마다 저승에 보이지 않는 곳간을 하나씩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곳간은 은자로도, 논밭으로도, 그 어떤 재물로도 채울 수가 없지요. 오직 남에게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 굶주린 이에게 나눈 밥 한 술, 힘든 이웃에게 내민 손길, 그런 정성만이 차곡차곡 쌓이는 곳간이니 말입니다.

    최 영감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그 이치를 깨달았지만, 다행히도 사흘이라는 귀한 시간을 얻어 텅 빈 곳간을 그득 채울 수 있었더랍니다. 허나 우리에게는, 굳이 저승까지 다녀오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사흘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하루, 곁에 있는 이에게 정 한 조각 나누어 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곳간을 채우는 가장 확실한 길일 테지요. 최 영감의 그 기적 같은 사흘이, 오늘 우리에게도 나직이 그리 일러 주고 있는 것이었더랍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265자)

    오늘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평생 재물만 그러쥐던 최 영감이, 저승 문턱에서 텅 빈 제 곳간을 보고서야 참뜻을 깨달았습니다. 재물은 저승 문턱을 넘지 못하지만, 남에게 베푼 정은 끝까지 우리를 따라온다지요. 우리에게도 저마다 보이지 않는 곳간이 하나씩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하루, 곁에 있는 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 보는 건 어떨까요. 이 이야기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좋아요'와 '구독'으로 함께해 주세요. 다음 이야기로 또 정답게 찾아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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