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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사자는 삶의 스승이었다 (출처: 어우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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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200자 이내)
"네 이놈,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무고한 자를 잡아왔느냐!" 염라대왕의 불호령에 저승 한복판에 떨어진 한 사나이. 그곳에서 마주한 저승사자에게 듣게 된 삶과 죽음의 비밀. 죽음의 문턱에서 비로소 깨닫게 된 진짜 인생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디스크립션 (300자 이내)
어우야담에 실린 '윤덕준'의 기이한 경험담. 저승사자의 실수로 저승에 가게 된 한 남자가, 그곳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고 돌아옵니다. 죽음의 신이 가르쳐 준 '잘 사는 법'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공포의 대상이 아닌, 삶의 스승으로 다가오는 저승사자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어우야담 #저승사자 #삶과죽음
※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선비 윤덕준.
조선 중기, 경상도 땅에 윤덕준이라는 선비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젊어서는 부지런히 일해 제법 너른 땅을 일구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자식 농사 또한 훌륭히 지어 주변의 칭송이 자자한 인물이었습니다. 장성한 아들들은 저마다 제 몫을 하며 부모를 봉양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고, 그의 아내는 온화한 성품으로 집안을 평안하게 다스렸지요. 그야말로 남부러울 것 없는, 복되고 평온한 삶이었습니다. 그날은 마침 윤덕준의 예순 번째 생일, 즉 환갑 잔치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마당에는 아침부터 고기 삶는 냄새와 술 익는 냄새가 진동했고, 이웃과 친지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그의 만수무강을 기원했습니다. 윤덕준은 자식들이 차려준 새 옷을 곱게 차려입고 사랑방에 앉아,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가득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자신이 이룬 이 모든 것들이 대견하고 뿌듯했습니다. ‘그래, 이만하면 내 인생, 헛되이 살지는 않았구나.’ 그는 흡족한 마음으로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잔치가 무르익고, 거나하게 취한 손님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간 뒤, 집안에는 다시 평온한 저녁이 찾아왔습니다. 윤덕준은 아내가 정성껏 차려준 저녁상을 받고는, 노곤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습니다. 오랜만의 잔치로 피곤했던 탓인지, 그는 자리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잤을까, 그는 문밖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 문득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쏴아아아- 하고 비가 쏟아지는 듯한 소리, 그러면서도 귀가 멍멍해지는 듯한 이상한 소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창호지 너머의 밤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했습니다. 그가 의아하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스르르륵. 마치 연기처럼, 닫힌 방문을 세 명의 인영(人影)이 통과하여 방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윤덕준은 너무 놀라 숨을 쉴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은 머리에는 검은 갓을 쓰고, 온몸에는 검은 두루마기를 걸친, 이 세상 사람들 같지 않은 기이한 행색을 하고 있었습니다.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이 감도는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고,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윤덕준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직감적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윤덕준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저승사자. 이야기로만 듣던, 죽은 자를 데리러 온다는 명부의 사자(使者)들이었습니다. 세 명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것처럼 건조하고 차가웠습니다. "경상도에 사는 윤덕준. 네 명(命)이 다하였으니, 우리를 따라 길을 떠나야겠다." "벼, 변고라니요! 내 명이라니요! 나는 아직 건강하고, 오늘이 내 환갑날이었소!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오!" 윤덕준은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저승사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딱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그리 말한다. 허나, 명부에 적힌 이름 앞에서는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법. 어서 일어나거라." 저승사자가 손에 든 쇠사슬을 한번 흔들자, 윤덕준의 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는 기묘한 감각과 함께, 그의 발은 더 이상 방바닥에 닿아있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잠들어있는 이 집, 평생을 바쳐 이룩한 모든 것들이 눈앞에서 희미해져 갔습니다. 그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지만, 저승사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윤덕준은, 자신의 예순 번째 생일날 밤,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기나긴 저승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 저승사자들에게 이끌려 낯선 저승길을 걷는 윤덕준.
저승사자들에게 이끌려 집을 나선 윤덕준의 눈앞에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집이 있던 공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 외길 하나만이 아스라이 놓여 있었습니다. 길 양옆으로는 꽃도 풀도 없는 황량한 벌판이 펼쳐져 있었고, 이따금씩 정체 모를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바람을 타고 들려와 등골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윤덕준은 공포에 질려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길 위에는 자신처럼, 말없이 저승사자들에게 이끌려 가는 수많은 영혼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갓난아기의 영혼을 업고 가는 어미의 영혼도 있었고, 전장에서 죽은 듯 온몸에 피를 칠한 장수의 영혼도 있었습니다. 모두들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얼굴에는 깊은 절망과 체념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하나의 강물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강물에 다다르자, 그곳에는 거대한 배 한 척이 영혼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배에 오르자, 뱃사공은 아무 말 없이 강 저편을 향해 노를 젓기 시작했습니다. 강물은 핏빛처럼 붉고 탁했으며, 그 속에서는 수많은 손들이 나타나 배에 오르려는 듯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승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강물에 빠진 원귀들인 듯했습니다. 한참을 갔을까, 강 건너편에 거대한 성문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성벽은 하늘 끝까지 닿아있는 듯 높았고, 그 위에는 '풍도(酆都)'라는 두 글자가 서늘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저승의 입구였습니다. 성문을 지나자, 그곳은 마치 이승의 거대한 관아와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수많은 관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영혼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윤덕준 역시 저승사자들에게 이끌려, 가장 높은 건물의 대청마루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는 머리에 거대한 관을 쓰고 온몸에 용포를 두른, 엄청난 위엄을 가진 존재가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저승의 시왕(十王) 중 하나인 염라대왕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의 앞에 놓인 책상 위에는 사람의 얼굴이 비치는 거울, 업경대(業鏡臺)와 이름이 빼곡히 적힌 거대한 책, 명부(冥府)가 놓여 있었습니다. 저승사자 중 하나가 앞으로 나아가 공손히 아뢰었습니다. "대왕 전하, 명부에 적힌 대로 경상도에 사는 윤덕준을 잡아 왔나이다." 염라대왕은 귀찮다는 듯, 수염을 한번 쓰다듬으며 명부를 펼쳐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버럭 호통을 쳤습니다. "이 어리석은 놈들! 내가 잡아오라고 한 윤덕준은 경상도 상주 땅에 사는 윤덕준이거늘, 어찌하여 같은 도에 사는 동명이인을 잡아왔단 말이냐! 이놈의 나이는 예순, 아직 스무 해나 명이 더 남아있지 않느냐! 당장 이 자를 데려온 놈들에게 큰 벌을 내리고, 이 자는 육신이 썩기 전에 속히 이승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염라대왕의 불호령에 대청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윤덕준을 잡아왔던 세 명의 저승사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윤덕준은 그 순간,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실수였습니다. 저승사자들이 이름만 보고, 엉뚱한 사람을 잡아온 것이었습니다. 안도감과 함께,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한 허탈함이 밀려왔습니다. 곧이어 저승의 관리가 다가와 윤덕준에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운이 좋았소. 허나, 그대를 다시 이승으로 돌려보낼 배편을 마련하는 데 며칠의 시간이 걸릴 터이니, 그때까지 저 객사에서 얌전히 머물고 있도록 하시오." 윤덕준은 관리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저승의 한쪽 구석에 마련된 허름한 객사로 향했습니다. 졸지에 죽었다 살아나게 되었지만, 아직 이승으로 돌아간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텅 빈 방에 홀로 앉아, 이 기묘하고도 황당한 경험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었습니다.
※ 돌려보내질 때를 기다리며 저승의 한 객사에 머물게 된 윤덕준.
윤덕준이 저승의 객사에 머문 지 사흘째 되던 날 밤이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처한 비현실적인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채,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방문이 조용히 열리며 익숙한 인영이 들어섰습니다. 자신을 이승에서 잡아왔던 세 명의 저승사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염라대왕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던 탓인지, 그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 보였습니다. 윤덕준은 자신을 이 고생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을 보자 울화가 치밀었지만, 동시에 그 역시 저승의 하급 관리일 뿐이라는 생각에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승사자는 아무 말 없이 방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저승사자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위압감 대신 깊은 피로감이 묻어 있었습니다.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더군. 살아서는 어찌 그리 아등바등 탐욕을 부리는지, 그러다가도 막상 명부의 부름을 받으면 한결같이 억울하다 말하니 말이야." 윤덕준은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러자 저승사자가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그대를 원망하는 마음은 이해한다. 우리의 실수로 그대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게 하였으니. 허나, 어차피 그대도 언젠가는 오게 될 곳이었다. 조금 일찍 구경하게 된 셈 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의 뻔뻔한 태도에 화가 난 윤덕준이 쏘아붙였습니다. "구경이라니!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와 죽은 목숨 취급을 당했소! 당신들은 대체 무슨 권리로 산 사람의 운명을 이리도 함부로 재단하는 것이오?" 그러자 저승사자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습니다. "함부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명부에 적힌 대로 행할 뿐.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정해진 수명, 즉 명(命)을 가지고 태어난다. 우리는 그 명이 다하는 날, 그 영혼을 거두러 가는 임무를 맡았을 뿐이다." "정해진 명이라니! 그렇다면 인간의 삶이란 그저 정해진 길을 걷다 죽는 허무한 것에 불과하단 말이오?" 윤덕준의 질문에 저승사자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렇지 않다. 명(命)은 하늘이 정하지만, 그 명을 채우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일찍 생을 마감하기도 하지. 큰 죄를 짓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혹은 탐욕으로 타인의 복을 빼앗은 자들이 그러하다." 저승사자는 잠시 말을 끊고는, 윤덕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반대로, 아주 드물게는 자신의 명을 늘리는 이도 있다. 남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덕(德)을 쌓은 자들이 그러하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수많은 사람을 구하거나, 평생을 바쳐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을 보살핀 자들. 그들의 선행은 하늘을 감동시켜, 명부의 기록을 바꾸기도 한다." 윤덕준은 저승사자의 말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덕(德)이라… 그렇다면, 내가 평생을 성실하게 일해 재산을 모으고 자식들을 훌륭히 키워낸 것은 덕이 아니란 말이오?" 저승사자는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그가 저승에 온 뒤 처음 보는 미소였습니다. "그것은 복(福)이지, 덕(德)이 아니다. 그대가 뿌린 씨앗의 대가를 그대가 거둔 것일 뿐. 그것은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족을 위한 것이었지, 세상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 않느냐." 그의 말은 윤덕준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습니다. 평생을 떳떳하게, 남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저승의 관점에서 본 자신의 삶은 그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덕이란 말이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오?" 그의 간절한 물음에, 저승사자는 창밖의 어두운 저승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습니다. "그 답은 나도 모른다. 나는 그저 죽은 자를 데려갈 뿐, 산 자의 삶을 논할 자격은 없으니. 다만 이것 하나만은 알려주지. 이 저승에서는, 그대가 이승에서 쌓았던 재물이나 명예는 단 한 푼의 가치도 없다는 것을. 오직 그대가 타인에게 베풀었던 마음만이, 유일한 그대의 재산이 된다는 것을 말이네." 저승사자는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습니다. 홀로 남은 윤덕준은 거대한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비로소 마주하게 된 자신의 삶. 그는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통스럽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 저승사자는 남에게 베푼 작은 선행이 저승에서는 얼마나 큰 빛이 되는지를 설명해준다.
저승사자의 말은 윤덕준의 평생의 가치관을 뿌리부터 뒤흔들었습니다.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되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평생 땀 흘려 일군 저의 논밭과, 가족들의 비바람을 막아주던 저의 집은… 정녕 아무런 가치가 없단 말입o니까? 제가 가족을 위해 헌신한 모든 세월이, 그저 저 하나만을 위한 복(福)에 불과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회한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러자 저승사자는 말없이 일어나, 윤덕준에게 손짓했습니다. "나를 따라오시오. 그대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 더 빠를 테니." 저승사자는 윤덕준을 데리고 객사 밖으로 나섰습니다. 그들은 저승의 관아에서도 가장 높은 망루(望樓) 같은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 오르자, 저승에 도착한 수많은 영혼들이 대기하고 있는 거대한 광장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저승사자는 광장의 한쪽 구석을 가리켰습니다. "저기, 용포를 입고 있는 자가 보이는가. 그는 생전에 한 나라의 왕이었던 자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수천의 목숨을 제 손에 쥐고 흔들었지. 허나 지금은 어떤가. 그 옆에 누더기를 걸치고 웅크리고 있는 거지의 영혼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이곳 저승에서는, 이승의 신분이나 재물이란 그저 잠시 입었다 벗어놓는 옷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그의 말대로, 왕이었던 영혼은 더 이상 아무런 권위도 없었으며, 그의 옆에 앉은 거지의 영혼 또한 더 이상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들은 완벽하게 평등했습니다. 저승사자는 말을 이었습니다. "그대가 평생 일군 논밭은 다른 누군가의 차지가 될 것이고, 그대가 살던 집은 다른 누군가의 안식처가 되겠지. 그대의 자식들 또한 언젠가는 그들만의 삶을 찾아 떠날 것이다. 그대가 움켜쥐고 있던 모든 것은, 결국 시간 속에서 흩어지는 연기와도 같다. 하지만, 그대가 진심으로 베풀었던 단 한 번의 선행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이번엔 광장의 다른 쪽을 가리켰습니다. 그곳에는 유난히 온화하고 밝은 빛을 내뿜는 영혼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저들은 누구입니까?" 윤덕준이 묻자, 저승사자가 답했습니다. "저들은 생전에 큰 덕(德)을 쌓은 자들이다. 저기 저 여인은, 평생 삯바느질을 해 번 돈으로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에게 밥을 지어 먹인 사람이다. 그녀가 평생 지은 밥의 양보다, 굶주린 이에게 나누어 준 한 그릇의 밥이 이곳에서는 더 큰 공덕으로 여겨진다. 저기 저 사내는, 억울한 누명을 쓴 친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변호하다가 목숨을 잃은 자다. 그가 지켰던 우정의 가치는, 그가 잃었던 목숨의 가치보다 이곳에서는 더 높게 친다." 저승사자는 윤덕준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그대가 정말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그대가 움켜쥔 것이 아니라 그대가 내어준 것이다. 굶주린 이에게 내어준 밥 한 그릇은, 이곳에서 그대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헐벗은 이에게 내어준 옷 한 벌은, 저 차가운 강을 건널 때 그대의 몸을 덥혀주는 외투가 된다. 억울한 이를 위해 흘려준 눈물 한 방울은, 이곳에서 그대의 목을 축여주는 감로수가 되는 법이다." 윤덕준은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재산이라는 것이, 이 거대한 저승의 법칙 앞에서는 얼마나 하찮고 무의미한 것인지를. 그는 자신의 삶이 너무나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잘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지난 세월이, 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던 공허한 시간이었음을, 그는 죽음의 문턱에 와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 며칠 만에 되살아난 윤덕준.
저승의 객사에서 며칠을 더 보낸 뒤, 마침내 윤덕준이 이승으로 돌아갈 날이 왔습니다. 그를 데려왔던 저승사자가 다시 그를 찾아와, 이승으로 가는 배가 기다리는 강가로 안내했습니다. 강가로 가는 길,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없었지만, 처음과는 다른 기묘한 유대감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배에 오르기 전, 윤덕준은 저승사자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사자님, 비록 저의 어리석음으로 시작된 만남이었으나, 제게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저승사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조금 부드러워진 듯했습니다. "은혜랄 것까지야. 나는 그저 이곳의 법칙을 설명해 주었을 뿐. 그 가르침을 어찌 쓰는가는 이제 다시 살아갈 그대의 몫이다." 그는 뱃사공에게 눈짓하며, 윤덕준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습니다. "가서, 살아라. 허나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라. 그리하여 스무 해 뒤, 그대의 진짜 명이 다하여 다시 나를 만나는 날에는… 부디 지금처럼 후회와 회한으로 가득한 얼굴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 말을 끝으로, 배는 안개 속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갔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윤덕준은 자신의 방, 자신의 이부자리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자신의 몸을 붙들고 오열하고 있는 아내와 자식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방에는 낯선 약재 냄새와 향냄새가 가득했습니다. 이승의 시간으로 그는 꼬박 닷새 동안이나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장례를 준비하고 있던 가족들은, 죽었던 그가 조용히 눈을 뜨자 혼비백산했습니다. "아, 아버님! 정신이 드십니까!" "영감! 세상에,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윤덕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몸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고 가벼웠습니다. 그는 자신을 부축하는 아들의 손을 잡으며,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얘들아, 곳간을 열어라." "네? 아버님, 지금 무슨…." "곳간을 열어, 굶주리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주어라. 단 한 톨도 남기지 말고, 모두 다."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가족들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의 눈빛이 너무나도 진지하고 확고하여 감히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윤덕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데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재산을 사용하여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가난한 과객에게는 기꺼이 사랑방을 내어주고, 병든 이웃에게는 약값을 보태주었습니다. 마을에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생기면,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서 그들의 편이 되어주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의아하게 생각하던 마을 사람들도, 그의 진심 어린 선행에 감동하여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부자 윤 영감이 아닌, 지혜롭고 인자한 ‘윤 어르신’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에게도 이전보다 훨씬 더 자애로운 아버지이자 남편이 되었습니다.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덕을 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끊임없이 가르쳤습니다. 그의 집에는 재물 대신,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 지혜로운 노인으로 여생을 보낸 윤덕준.
저승에서 돌아온 후, 꼭 스무 해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윤덕준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여든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저승사자가 알려준 대로, 자신의 남은 삶을 오롯이 덕을 쌓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마지막 날을, 오랜 친구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담담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진짜 명이 다하는 날이 찾아왔습니다. 그날 아침, 윤덕준은 유난히 맑은 정신으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는 가족들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얘들아, 오늘 내가 먼 길을 떠나게 될 듯하구나. 너무 슬퍼하지들 말거라. 나는 참으로 복되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 특히 지난 스무 해는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이었단다." 가족들은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눈물을 흘렸지만, 그의 얼굴이 너무나도 평화로워 차마 통곡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자식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고, 아내의 주름진 손등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단정히 자리에 누웠습니다. 해가 저물고, 방 안에 고요한 어둠이 내렸을 때, 그의 눈앞에 스무 해 전 보았던 익숙한 인영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그 저승사자였습니다. 그는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윤덕준의 눈에는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스승을 만난 제자처럼,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윤덕준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저승사자를 향해 허리를 숙여 절을 올렸습니다. "오랜만이오, 나의 스승님. 스무 해 전, 저에게 주셨던 가르침 덕분에 참으로 값지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갑니다." 저승사자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것은 비웃음도, 동정도 아닌, 제자의 성장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스승의 미소와도 같았습니다. "…그대의 얼굴이 참으로 평온해 보이는군, 윤덕준. 지난 스무 해 동안, 그대는 내가 본 그 어떤 인간보다도 현명한 삶을 살았다." 저승사자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예전처럼 차갑고 위압적인 쇠사슬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함께 길을 떠나자는, 친구의 손길과도 같았습니다. "이제 그만 가세. 그대가 이승에서 쌓은 덕이, 저 어두운 저승길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줄 것이니." 윤덕준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는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이 저승사자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의 영혼은 한 점의 고통도 없이 가볍게 육신을 빠져나왔습니다. 다시 걷게 된 저승길. 하지만 스무 해 전의 그 길과는 달랐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공포에 떨지 않았고, 그의 주변은 그가 베풀었던 선행들이 만들어낸 따스한 빛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완성시켜준 가장 위대한 스승, 죽음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향한 마지막 걸음을 평온하게 내디뎠습니다. 그렇게 윤덕준의 이야기는,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삶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관문이라는 깊은 교훈을 남기며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죽음의 문턱에서 비로소 삶의 진짜 의미를 깨달은 윤덕준의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나요?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두려운 손님이지만, 어쩌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가장 엄격하고 지혜로운 스승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떤 덕으로 채워지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는 시간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더욱 기묘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저승길에서 만난 한 상인의 7일간 모험기' 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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