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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사자와 기생의 로맨스

황금 인생 21 2025. 8. 12. 21:21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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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승사자와 기생의 로맨스 - 인간과 죽음의 신 사이에 벌어진 사랑 (출처: 청구야담)

    태그 (Ta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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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Hooking ment)

    "네게서… 산 자의 냄새가 나지 않는군." 죽음을 거두는 신, 저승사자의 서늘한 속삭임. 가장 화려한 기생의 공허한 마음에 깃든 단 하나의 사랑. 인간과 죽음의 금지된 하룻밤, 그 치명적이고도 슬픈 로맨스가 시작됩니다.

    디스크립션 (Description)

    한양 최고의 기생 매혹. 모두가 그녀를 갈망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늘 겨울처럼 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음의 냄새를 따라 그녀 앞에 나타난 검은 옷의 사내, 저승사자. 인간의 욕망에 염증을 느끼던 그녀는, 모든 것을 끝내는 죽음의 신에게서 기묘한 평온과 매력을 느낍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펼쳐지는 가장 위험하고도 애틋한 사랑. 과연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 한양 최고의 기생 매혹.

    조선 한양, 가장 화려한 불빛이 모여드는 교방 ‘월향루’. 그곳에는 매혹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있었습니다. 이름처럼, 그녀의 춤사위 한 번에 당대 최고의 권세가들은 혼을 잃었고, 노래 한 가락에 제물을 바치듯 금은보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녀는 가장 비싸고 아름다운 꽃이었지만, 그 꽃은 이미 향기를 잃은 지 오래였습니다. 매일 밤, 역겨운 술 냄새와 탐욕에 번들거리는 사내들의 눈빛을 받아내며 억지웃음을 파는 삶. 그녀에게 살아있다는 것은, 그저 더럽고 끈적한 욕망의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그날도, 병조판서 김대감의 요란한 잔치가 끝난 뒤였습니다. 그는 매혹의 오랜 단골이었지만, 술에 취하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추악한 버릇이 있었습니다. 간신히 그를 돌려보낸 매혹은 떨리는 손을 감추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방 안에는 아직도 독한 술과 사내들의 땀 냄새, 그리고 값비싼 향유 냄새가 뒤섞여 머리를 어지럽혔습니다.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고, 차가운 밤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월향루의 늙은 행수가 머무는 작은 골방에서, 가래 끓는 기침 소리가 몇 번 이어지더니, 이내 세상의 모든 소음이 뚝, 하고 끊기는 듯한 정적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매혹은 보았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둠보다 더 짙은 검은 도포를 입은 한 사내가 나타나는 것을. 사내의 얼굴은 밀랍처럼 창백했고, 눈은 심연처럼 깊었으며, 입술은 핏기 하나 없이 서늘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단 한 올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하게 조각된 얼음 인형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성큼성큼 늙은 행수의 방으로 걸어 들어갔고, 잠시 후 푸른빛을 띤 희미한 혼백 하나를 손에 쥔 채 다시 나타났습니다. 다른 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오직 죽음을 앞둔 자와, 살아있으되 죽은 자처럼 공허한 영혼을 지닌 자에게만 보이는 존재. 바로 저승사자였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비명을 지르며 혼절했겠지만, 매혹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그 사내에게서, 난생처음으로 어떤 ‘절대적인 평온’을 느꼈습니다. 위선도, 탐욕도, 갈망도 없는, 모든 것을 끝내는 무(無)의 상태. 그것은 그녀가 평생 갈망해왔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승사자는 자신의 앞을 막아서듯 서 있는 매혹을 보고 걸음을 멈췄습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처음으로 그녀를 향했습니다. “비켜라, 인간.” 그의 목소리는 겨울밤의 바람처럼 차갑고 건조했습니다. 하지만 매혹은 비켜서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술기운인지, 아니면 삶에 대한 깊은 권태 때문인지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데리러 오셨습니까? 제 차례는 아직 멀었을 터인데.” 저승사자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찌푸려졌습니다. 수천 년간 수억의 혼을 거두었지만, 자신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처음이었습니다. “네게서는… 산 자의 냄새가 나지 않는군. 어찌하여 네년의 눈에 내가 보이는 것이냐.” 그는 기이하다는 듯 그녀를 응시했습니다. 매혹은 웃었습니다. 텅 빈 웃음이었습니다. “산송장에게 산 냄새가 날 리가 있겠습니까. 이 역겨운 곳에서 유일하게 정직한 분을 뵈니 반가워서 그럽니다. 모두가 거짓된 삶을 노래할 때, 당신만은 진실된 죽음을 가져다주시니 말입니다.” 그날 밤, 죽음을 거두는 신과, 죽음을 갈망하는 기생의 기묘한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 매혹을 기이하게 여긴 저승사자는 그녀의 곁을 맴돈다.

    그날의 만남 이후, 저승사자는 기이하게도 매혹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혼을 거두러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신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삶과 죽음을 논하던 그 기묘한 기생에게 설명할 수 없는 호기심을 느꼈을 뿐입니다. 그는 비가 내리는 처마 밑에서, 달빛이 비치는 창가에서, 아무도 없는 뜰의 매화나무 아래에서, 예고 없이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매혹은 더 이상 놀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담담하게 그를 맞았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언제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 걸쳐 있었습니다. “당신은 수많은 죽음을 보았겠지요. 죽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입니까? 고통스러운가요, 아니면 평온한가요?” 매혹이 물으면, 저승사자는 늘 무심하게 답했습니다. “죽음은 느낌이 아니다. 그저 끝일 뿐. 모든 고통과 기쁨이 사라지는 무한한 정적이다.”

    어느 날, 매혹은 달빛 아래서 검무를 추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춤은 처절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마치 삶에 대한 미련을 베어내려는 듯, 그녀의 몸짓은 격렬했습니다. 춤이 끝나고,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저승사자가 말했습니다. “그 춤은 삶을 갈망하는 몸짓이구나. 죽음을 입에 담는 것과는 다르군.” 매혹은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답했습니다. “죽음을 갈망하기에, 역설적으로 삶의 순간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는 법이지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단 한 순간이라도, 살아있다고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질문에 저승사자는 처음으로 침묵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존재했지만, 살아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매혹은 그런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차가운 손등을 만지려 했습니다. 그 순간, 저승사자는 전기에 감전된 듯 손을 뒤로 뺐습니다. “내게 닿지 마라. 나의 한기는 산 자에게는 독이다.” 그의 경고에도 매혹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독이라도 좋습니다. 당신이라는 독이라면, 기꺼이 마셔보고 싶군요.”

    그의 차가움 뒤에 숨겨진 깊은 고독을, 그녀는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승사자 역시 변화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인간을 ‘거두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매혹은 달랐습니다. 그녀의 눈을 통해, 그는 처음으로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춤을 출 때의 아름다움, 그녀가 시를 읊을 때의 슬픔, 그녀가 억지웃음을 지을 때의 고통. 그 모든 것이 그의 텅 빈 세상에 아주 미세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혼란스러웠습니다. 한낱 인간 계집 하나가, 수천 년간 유지해온 자신의 절대적인 평정을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혹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더 이상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 하지만 매혹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처음으로 애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가지 마십시오. 당신마저 없으면, 나는 정말로 텅 비어 버립니다.” 그녀의 손이 닿은 옷자락에서부터, 차가운 한기가 아니라 기묘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저승사자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자신 역시, 이 기묘한 인간에게 속박되고 있음을. 죽음이 삶에게 매혹되고 있었습니다.

    ※ 인간 세상에 환멸을 느낀 매혹은 저승사자에게 자신을 안아달라 청한다.

    그들의 위태로운 만남이 계속되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매혹은 유난히 지쳐 있었습니다. 병조판서 김대감이 기어코 그녀의 방에까지 들어와 행패를 부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녀를 힘으로 눕히려 했고, 매혹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다 옷이 찢기고 몸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간신히 그를 쫓아냈지만, 그녀의 영혼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뒤였습니다. 매혹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자신의 몸을 씻고 또 씻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씻어내도, 더러운 욕망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 듯했습니다. 모든 것에 환멸을 느낀 그녀는, 방 안에 홀로 앉아 허공에 속삭였습니다. “거기 있는 것 압니다. 제발… 나와주세요. 오늘 밤은…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방 한쪽의 어둠이 스르르 걷히며 저승사자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깊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매혹은 흐트러진 옷차림 그대로, 비틀거리며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차가운 가슴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나를… 데려가 주십시오.” 그녀의 목소리는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너의 명은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저승사자가 냉정하게 말했지만, 매혹은 그의 옷자락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습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이 역겨운 육신에서 저를 벗어나게 해달란 말입니다. 오늘 밤만이라도… 당신의 것이 되게 해주세요. 당신의 그 차가움으로, 이 몸에 새겨진 더러운 흔적들을 전부 지워주세요.” 그것은 사랑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요청이었습니다. 저승사자는 그녀를 밀어내야만 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섞일 수 없는 법. 그의 죽음의 기운이 그녀의 생명력을 단숨에 소멸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밀어낼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절망이, 그의 수천 년 묵은 고독을 건드리고야 만 것입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떨고 있는 그녀의 뺨을 감쌌습니다. 그의 손길은 겨울밤의 고드름처럼 차가웠지만, 매혹은 그 차가움 속에서 역설적인 평온함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의 손길에 자신의 얼굴을 기댔습니다. 저승사자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습니다. 그의 입맞춤은 불꽃처럼 뜨겁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깊은 호수 밑바닥처럼 차갑고, 고요하고, 모든 것을 잠재우는 맛이었습니다. 매혹은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차가움을 더욱 갈망하듯,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입술을 깊이 빨아들였습니다. 그녀의 뜨거운 숨결과 그의 차가운 기운이 뒤섞이는 순간, 방 안의 촛불이 파르르 떨며 꺼져버렸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습니다. 찢겨진 저고리가 스르륵 벗겨져 내리고, 달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하얀 살결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했습니다. 저승사자의 차가운 손이 그녀의 뜨거운 육신을 더듬었습니다. 그의 얼음 같은 손길이 닿는 곳마다, 그녀의 피부는 짜릿한 한기와 함께, 모든 고통과 더러운 기억들이 사라지는 듯한 기묘한 쾌감이 동시에 피어올랐습니다. 그녀의 입에서는 뜨거운 신음 대신,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평온한 한숨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것은 삶이 죽음의 품에 안겨 느끼는 궁극의 안식이었습니다. 그 밤, 가장 뜨거운 욕망의 공간인 기방에서, 가장 차갑고도 관능적인 정사가 펼쳐졌습니다. 삶과 죽음이 서로를 탐하고, 서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는 금지된 사랑이었습니다.

    ※ 매혹의 주변에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진다.

    죽음과 하룻밤을 보낸 뒤, 매혹의 세상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녀의 영혼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았습니다. 그 텅 빈 자리는, 저승사자의 서늘한 기운과 기묘한 평온함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를 거스른 대가는 혹독하고 즉각적이었습니다. 그녀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 어정쩡하게 걸친, 저주받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녀에게는 새로운 감각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임박한 죽음의 그림자를 보는 능력이었습니다. 며칠 뒤, 월향루에서 가장 큰 손님 중 하나인 호조판서의 연회가 열렸습니다. 그는 겉보기에 강건하고 호탕했으나, 매혹의 눈에는 그의 얼굴 위로 해골의 형상이 겹쳐 보이고, 어깨 위에는 검은 죽음의 그림자가 아른거렸습니다. 섬뜩한 예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그에게 술을 따르다 손을 떨어 그의 비단 도포에 술을 쏟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호조판서는 길길이 날뛰었고, 매혹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모욕을 당하고 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호조판서가 잠을 자다 심장마비로 급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날 이후, 월향루의 모든 이들은 매혹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름다운 기생이 아니라, 죽음을 부르는 불길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녀의 주변에서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녀가 아끼던 난초는 하룻밤 사이에 검게 말라 죽었고, 그녀가 머무는 방은 한여름에도 서늘한 한기가 감돌았습니다. 그녀의 오랜 경쟁자였던 기생 춘홍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매혹이 요물에 씐 것이라며 흉흉한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년 방에서는 밤마다 곡소리가 들린다지 않나. 분명 귀신과 내통하는 게야!” 동기들의 노골적인 기피와 하인들의 공포 어린 시선 속에서, 그녀는 월향루 안에서 완벽하게 고립되었습니다. 이 모든 변화를, 저승사자는 그림자 속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의 기운이 그녀의 영혼에 스며들어, 그녀를 반인반귀(半人半鬼)와 같은 존재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그날 밤, 텅 빈 방에 홀로 앉아 있는 매혹 앞에 그가 나타났습니다. “이게 당신이 말한 독입니까? 이제 나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피하고, 나는 그들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맡습니다. 대체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그녀의 절규에, 저승사자는 처음으로 무언가 대답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습니다. “네가 원했던 것이다. 너는 나에게 너를 지워달라 청했고, 나는 너의 소원을 들어주었을 뿐.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은 자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너는 세상의 이치를 어지럽힌 존재가 되었다. 이제 이 세상은, 너를 이물질로 여기고 밀어내려 할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희미한 후회의 감정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는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수천 년간 지켜온 법칙을 어기고, 한낱 인간 계집에게 마음을 주어 그녀의 운명을 뒤틀어버린 자신을. 하지만 매혹은 그의 대답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예, 제가 원한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의 차가운 손을 붙잡았습니다. 이제 그의 한기는 더 이상 그녀에게 독이 아니었습니다. 익숙한 위안이었습니다. “이 능력 덕분에, 나는 이제 저들의 역겨운 욕망 뒤에 숨겨진 허무한 끝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당신이 내 곁에만 있어준다면… 나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녀의 체념 섞인 고백은, 저승사자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은, 사랑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 매혹의 수명이 다했음을 알게 된 저승사자.

    그들의 위태로운 사랑이 깊어질수록, 운명의 시간 또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승사자는 염라의 부름을 받고 저승의 가장 깊은 곳, 명부전(冥府殿)으로 향했습니다. 차가운 얼음 기둥과 푸른 도깨비불로 이루어진 그 거대한 전각 안에는, 인간 세상의 모든 생명이 기록된 거대한 책, 명부(冥府)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은 옥좌에 앉아, 그에게 다음 달 보름에 거두어야 할 혼들의 명단을 하사했습니다. 저승사자는 무심하게 명부를 받아들고, 그 이름들을 훑어 내려갔습니다. 그러던 그의 눈이, 어느 한 이름 위에서 그대로 멈추고 말았습니다. ‘월향루 기생, 매혹(梅惑)’. 그녀의 이름이었습니다. 사인(死因)은 심장의 기운이 다하여 멎는, 심허증(心虛症). 바로 자신과의 만남으로 인해 그녀의 생명력이 급격히 소진된 탓이었습니다. 수천 년간 기계처럼 혼을 거두어왔던 그의 손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떨렸습니다. 그는 염라에게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명부가 잘못되었을 리는 없지만, 그는 단 한 번이라도 운명에 저항해보고 싶었습니다. “아직 젊고, 큰 죄를 짓지도 않은 아이입니다.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하지만 염라는 추상같은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사자, 네가 할 말이 아니다. 세상의 이치를 어지럽힌 장본인이 바로 너 자신이거늘. 너의 한기가 그 아이의 남은 수명을 모두 태워버렸다. 네가 뿌린 씨앗이니, 거두는 것 또한 너의 몫이다. 이것은 네게 내리는 형벌이다.” 그것은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혼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거두어야만 하는 것.

    그는 명부전을 나와, 끝없는 어둠 속을 정처 없이 걸었습니다. 처음으로 그는 고통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가슴이 얼음 칼로 도려내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필멸자들의 사랑이 어째서 그토록 처절하고 비극적인지를 비로소 이해했습니다. 유한하기에 더욱 찬란하고, 끝이 있기에 더욱 애틋하다는 것을. 그 시간, 매혹 역시 자신의 끝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졌고, 이제는 죽음의 냄새를 맡는 것을 넘어, 자신의 몸 주위에 어른거리는 검은 그림자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을 데리러 올 저승의 그림자임을 직감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가 자신을 데리러 올 그 순간을. 그날 밤, 저승사자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차마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평소처럼 그녀의 곁에 앉아, 말없이 밤을 지켰습니다. 매혹은 그런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당신을 만난 뒤로,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습니다. 세상 모든 사내들이 나의 몸을 탐할 때, 당신만은 나의 영혼을 바라봐 주었으니까요.” 그녀는 그의 차가운 뺨에 손을 뻗어, 부드럽게 어루만졌습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당신의 손에 내 마지막을 맡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일 테지요.”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승사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그녀의 손을 잡고, 다가올 이별의 시간을 함께 견딜 뿐이었습니다.

    ※ 마침내 그녀를 데리러 온 저승사자.

    마침내 약속된 운명의 날, 보름달이 세상을 하얗게 비추는 밤이었습니다. 매혹은 월향루의 모든 소란을 뒤로하고, 가장 깊숙한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지난 며칠간, 자신이 평생 모아온 모든 비단옷과 값비싼 장신구들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화려했던 기생 ‘매혹’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한 사람의 ‘여인’으로서 그를 맞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깨끗한 흰 소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히 빗어 내린 채, 방 한가운데에 고요히 앉아 있었습니다. 이윽고 방 안의 공기가 차가워지고, 촛불이 흔들리더니, 방 한가운데에 저승사자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손에는 저승의 법도를 상징하는 붉은 명부와, 혼을 묶는 쇠사슬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그녀의 연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신, 저승사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매혹이 먼저 침묵을 깨고 옅게 미소 지었습니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승사자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무겁게 끄덕였습니다. 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슬펐습니다. 그는 법도에 따라 그녀의 죄목을 읊어야 했습니다. “너는 산 자로서 죽은 자와 내통하여 세상의 이치를 어지럽혔으니, 명을 다하기 전 그 혼을 거두어….” 하지만 그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매혹이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저 사랑을 했을 뿐입니다.” 그녀의 말에, 저승사자는 손에 들고 있던 명부와 쇠사슬을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연인에게 청하듯, 조용히 손을 내밀었습니다. 매혹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을 그의 차가운 손 위에 포갰습니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그녀의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하며 푸른 혼백이 서서히 빠져나왔습니다. 육신을 벗어나는 순간, 그녀는 고통 대신 완전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그녀의 영혼은 그의 곁에 서서, 평온하게 잠든 자신의 육신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저승사자가 말했습니다. 그의 뒤로, 저승으로 향하는 안갯길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매혹이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저승사자는 그녀를 돌아보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희미하게 미소 지었습니다. 그것은 수천 년의 고독과 슬픔, 그리고 영원한 사랑이 담긴 미소였습니다. “기다리마. 네가 저승의 강을 건너 모든 기억을 잃고, 수백 번의 생을 반복하여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 해도. 나는 너를 찾아낼 것이다. 너의 영혼에 새겨진 나의 한기를, 나는 결코 잊지 않을 테니. 그리고 다음 생에 너를 데리러 가는 것 또한, 나일 것이다.” 그것은 죽음의 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절절한 사랑의 약속이었습니다. 매혹의 혼은 눈부신 빛에 휩싸여 그의 손 안에서 사라졌고, 저승사자는 홀로 남아 그녀의 온기가 사라진 방을 오랫동안 지키고 섰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월향루 사람들은 마치 잠을 자는 듯 평온한 얼굴로 숨을 거둔 매혹을 발견했습니다. 그녀의 입가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삶의 끝에서 시작된 죽음과의 슬픈 사랑, 어떻게 들으셨나요? 인간과 죽음의 신,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 속에서도 서로의 유일한 구원이었던 두 사람. 여러분의 마음을 울린 이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로 응원 부탁드립니다. 다음 시간에는 법과 질서의 상징인 염라대왕마저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든 조선의 기묘하고도 미스터리한 사건, 《해동잡록》 속의 【염라대왕도 해결 못한 조선의 미스터리 사건】 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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