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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사자와 농부의 내기 (어우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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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어느 날 깊은 밤, 당신의 방 문앞에 서늘한 기운과 함께 검은 도포의 저승사자가 찾아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도 특유의 배짱과 기지로 저승사자에게 내기를 제안한 조선시대 한 농부의 기상천외한 이야기! 오싹하면서도 유쾌한 어우야담 속 그 전설적인 하룻밤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편안하게 눈을 감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보세요.
※ 1: 달빛 아래 드리운 검은 그림자
소슬한 가을바람이 황금빛으로 물든 들녘을 한바탕 훑고 지나가는 조선의 어느 작은 산골 마을. 낮 동안 부산하게 움직이던 마을 사람들의 발소리와 타작하는 소리는 일찌감치 잦아들고, 고즈넉한 밤의 정적이 마을 전체에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운데 둥근 보름달만이 한가운데 탐스럽게 떠올라, 낡은 초가집 창호지 문창살 위로 은은하고 시린 빛을 길게 드리우고 있었지요. 이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에는 유독 부지런하고 낙천적이기로 소문난 한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뙤약볕 아래서 흙투성이가 된 무명 바지적삼을 툭툭 털며 하루의 고된 농사일을 마친 그는, 장작을 넉넉히 때어두어 기분 좋게 따뜻해진 아랫목에 고단한 몸을 뉘인 채 달콤한 잠에 빠져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손발은 굵은 마디와 굳은살로 덮여 있었지만, 그것은 평생 가족을 위해 땀 흘려온 자랑스러운 훈장과도 같았습니다.
'올해는 징글징글하던 가뭄도 어찌어찌 잘 넘기고, 벼 이삭도 제법 튼실하게 여물어서 참으로 다행이야. 내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이슬이 걷히기 전에 뒷산 너머 밭에 있는 무를 마저 다 뽑아둬야겠군. 겨우내 우리 식구들 배불리 먹이고, 남은 것은 장터에 내다 팔아 우리 막내 따뜻한 솜저고리라도 한 벌 지어 입혀야지. 쿨쿨 자는 식구들 얼굴을 떠올리면 이깟 뼛골 빠지는 고단함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농부는 입가에 흐뭇하고 옅은 미소를 띠며 스르르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습니다. 아궁이에서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자장가처럼 귓가를 간질였습니다. 그런데 온몸의 긴장이 풀리고 막 깊은 수면의 나락으로 빠져들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동네 어귀에서부터 이따금씩 들려오며 밤의 평온함을 알려주던 개 짖는 소리가 일순간 누군가 목이라도 조른 듯 뚝 끊기더니, 사방이 무덤처럼 기괴할 정도로 고요해졌습니다. 가을밤을 수놓던 풀벌레 소리조차 일제히 숨을 죽인 듯 기이한 적막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숨 막히는 고요함 속에서, 방문 밖 툇마루 쪽에서 바스락거리는 낯선 발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묵직한 발걸음이라기엔 너무나 가볍고, 또 어딘가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섬뜩한 한기를 머금은 소리였습니다.
스윽, 스윽, 스으윽.
마치 마른 낙엽 위를 미끄러지듯 걷는 기분 나쁜 마찰음이 점점 방문 앞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 정체 모를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방 안의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방금 전까지 절절 끓던 아랫목의 온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한겨울 섣달그믐의 삭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입에서 하얀 입김이 훅훅 새어 나올 정도로 매서운 추위가 방 안을 장악했습니다. 농부는 번쩍 눈을 떴습니다.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습니다.
'이 야심한 한밤중에 대체 뉘신가? 남의 집 담장을 넘은 도둑이라도 든 게야? 아니, 도둑의 발소리치고는 너무 당당하고 거침이 없는데… 게다가 이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시려오는 추위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마치 죽은 자의 무덤가에 서 있는 듯한 이 불길한 기운은…'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농부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달빛이 비치는 창호지 문 너머를 숨을 죽이고 살폈습니다. 달빛에 비친 방문 밖에는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거대한 그림자가 우뚝 서 있었습니다. 챙이 비정상적으로 넓고 위로 길쭉하게 솟은 검은 갓, 그리고 바닥까지 길게 늘어져 바람 한 점 없는데도 스산하게 펄럭이는 새카만 도포 자락. 훤칠하다 못해 기형적으로 껑충한 키의 그 불길한 실루엣은 미동조차 없이 방문을 향해 똑바로 서 있었습니다. 농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발끝까지 곤두박질치는 듯했습니다. 어린 시절, 마을 어르신들이 화롯가에 모여 앉아 밤을 새우며 무서운 목소리로 들려주던 옛날이야기 속의 그 무시무시한 존재. 이승의 인연을 무참히 끊어내고 혼을 거두러 온다는 명부의 사자, 바로 저승사자임이 틀림없었기 때문입니다.
문 밖의 거대한 그림자는 잠시 가만히 서서 방 안의 동정을 살피는 듯하더니, 이내 뼈만 남은 듯 앙상하고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손을 뻗어 조용히 방문의 문고리를 쥐었습니다. 끼이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스르르 열리자, 달빛을 등지고 선 저승사자의 서늘하고 무감각한 얼굴이 여과 없이 드러났습니다.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밀랍 같은 하얀 얼굴 위로, 칠흑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두 눈이 농부를 단번에 꿰뚫어 보듯 응시했습니다. 그 눈빛과 마주친 순간, 방 안의 온도는 순식간에 절대 영도의 얼음장처럼 곤두박질쳤고, 농부는 자신도 모르게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공포가 코앞까지 성큼 다가온 순간, 평온하고 따뜻했던 농부의 하룻밤은 그렇게 전혀 예상치 못한 벼랑 끝으로 내몰리며 기묘한 이야기의 서막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 2: 죽음 앞의 배짱, 기막힌 제안
"네가 이 산골 마을에 사는 그 농부련가. 명부의 적힌 엄중한 바에 따라 너의 이승에서 허락된 정해진 수명이 오늘 밤 자시를 기해 모두 다하였으니, 더 이상 헛된 미련을 품지 말고 지체 없이 나를 따라 저승으로 가야겠다."
저승사자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된 무쇠 쇳덩이가 바위에 긁히는 듯 낮고 건조했으며, 묘한 울림을 동반하고 있었습니다. 슬픔이나 연민 따위의 감정은 단 한 톨도 섞이지 않은 그 차가운 선고는 방 안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짓눌러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농부는 눈앞이 하얗게 아득해지며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 겨우 빚을 털어내고 자식들 입에 하얀 쌀밥 좀 먹여보나 싶었는데, 이렇게 하루아침에 허망하게 눈을 감아야 한다니 억울함과 슬픔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절대 안 돼! 내가 어떻게 피땀 흘려 일군 내 논밭이고, 굶주려가며 어떻게 키워낸 내 금쪽같은 새끼들인데! 내일 당장 뽑아야 할 무가 밭에 널려있고, 지붕에 이을 볏짚도 채 다듬지 못했는데 여기서 이대로 순순히 끌려간다면 나는 억울해서 이승을 떠도는 지박령이 되고 말 게야.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길이 보인다고 옛 어른들이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궁리해 보자, 내 얄팍한 머리통을 굴려서라도 무슨 수든 내어보자!'
농부는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과 애써 떨리는 무릎을 진정시키며 방바닥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고 불쌍한, 다 죽어가는 목소리를 정교하게 꾸며내며 입을 열었습니다.
"아이고, 저승사자 나으리! 이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놈의 냄새나는 목숨을 거두러 이 누추하고 먼 산골짜기까지 오시느라 그 노고가 얼마나 많으셨습니까. 제 명운이 다하여 하늘의 뜻에 따라 저승으로 가야 한다면 마땅히 군말 없이 따르는 것이 인간 된 도리이오나, 이렇게 갑작스레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려니 마음이 황망하기 그지없습니다. 부디 저승길에 오르기 전, 사자 나으리께 제 정성을 담아 대접할 수 있는 마지막 술 한 잔의 여유만 굽어살펴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대로 가면 제 마음의 짐이 무거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듯하옵니다."
저승사자는 농부의 뜻밖의 반응에 흠칫 놀란 듯 잠시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습니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거두러 팔도를 누비고 다녀보았지만, 살려달라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매달리거나, 공포에 질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려 발버둥 치는 인간들만 숱하게 보았을 뿐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수고했다며 융숭하게 술을 대접하겠다며 이토록 넉살 좋고 뻔뻔하게 나오는 인간은 단군 이래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자는 차갑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엎드린 농부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이내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습니다.
"어차피 동이 트려면 아직 시간이 넉넉히 남아있다. 죽음 앞에서도 아부를 떠는 네놈의 그 발칙한 배짱이 가상하여, 이승에서의 그 마지막 청은 자비롭게 들어주도록 하마. 허나 헛수작을 부릴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거라."
농부는 겉으로는 연신 굽신거리면서도 속으로는 만세를 부르며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는 쏜살같이 부엌으로 달려가 아내 몰래 부뚜막 가장 안쪽, 짚단 아래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두었던 술항아리를 꺼내왔습니다. 그것은 다가올 명절에 쓰려고 아껴둔, 마을에서 가장 맛이 좋고 향이 깊기로 소문난 잘 익은 동동주였습니다. 정갈한 바가지에 뽀얀 술이 찰랑거릴 정도로 가득 퍼서 두 손으로 공손히 사자에게 건네자, 냉기만 감돌던 방 안에는 곧 향긋하고 달큰한 누룩의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나갔습니다. 사자는 잠시 술바가지를 응시하다가 말없이 받아 들고는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이승의 달콤한 술이 저승사자의 차가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던 뻣뻣했던 사자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나마 누그러지는 듯 보였습니다.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농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준비했던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사자 나으리, 기왕 이렇게 마주 앉아 정겹게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으니 저와 내기 하나 하시지 않겠습니까? 먼 저승길 오가시느라 매번 무료하고 심심하셨을 터인데, 저승길 떠나기 전 아주 훌륭한 여흥이 될 것입니다."
"내기라니? 네놈이 감히 저승차사인 나와, 인간 주제에 무엇을 걸고 내기를 하겠다는 것이냐. 맹랑함이 도를 지나치는구나."
"제가 지면 단 한마디의 군말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으리를 따라 이승을 미련 없이 떠나겠습니다. 하오나 만약 기적처럼 제가 이긴다면, 제 수명을 딱 십 년만 늘려주십시오. 아직 밭에 추수하지 못한 곡식이 남아 마음이 편치 않고, 막내딸 시집보낼 밑천도 마련하지 못했사옵니다. 그저 십 년이면 족합니다."
저승사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헛웃음을 흘렸습니다. 한낱 하루살이 같은 인간이 명부에 뚜렷하게 적힌 죽음을 걸고 감히 저승의 차사와 지혜를 겨루려 들다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하지만 달큰한 동동주 기운이 기분 좋게 핏줄을 타고 돌아선지, 아니면 두려움조차 잊은 채 자신을 똘망똘망한 눈으로 마주하는 이 농부의 엉뚱함에 깊은 호기심이 동해선지, 사자는 길게 늘어진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좋다. 수백 년 동안 저승의 사자 노릇을 하며 이리 맹랑하고 재밌는 놈은 참으로 처음 보는구나. 한낱 흙먼지 같은 네놈이 어찌 영겁을 사는 나를 이기겠냐마는, 그 발칙한 내기, 기꺼이 받아주마. 어디 한번 네놈의 그 알량한 재주를 부려보거라."
※ 3: 승부를 가를 첫 번째 수수께끼
어두컴컴한 방 안에는 아까의 공포와는 또 다른 기묘한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고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여전히 닿기만 해도 얼어붙을 듯한 거대한 그림자를 뿜어내는 저승사자가 턱을 괸 채 여유롭고 오만한 자태로 앉아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흙먼지가 묻은 허름한 적삼 차림의 농부가 두 눈을 반짝이며 당당하게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촛불조차 켜지 않아 오직 달빛에만 의지한 방 안은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시계추처럼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농부는 마음속으로 수백, 수천 가지의 생각들을 빠르게 굴리며 전략을 짰습니다.
'저승사자는 이승의 모든 인간의 생사와 명부를 다루는 영험하고 무시무시한 존재다. 힘으로 대항하는 것은 바위로 계란을 치는 격이고, 사서삼경을 읊으며 글공부로 내기를 거는 것도 수백 년을 살아온 저들에게는 통하지 않을 게 뻔해. 그렇다면 저승사자가 절대 모를 만한 것, 영원한 죽음의 세계에 사는 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 그래, 바로 우리네 이승 사람들의 땀 냄새 짙게 배인 팍팍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 정답을 찾아내야만 승산이 있다!'
농부는 목을 가다듬기 위해 헛기침을 크게 한 번 하고는, 짐짓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저승사자를 향해 승부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수수께끼를 던졌습니다.
"사자 나으리, 그럼 첫 번째 문제를 올리겠습니다. 귀를 활짝 열고 잘 들어보시지요. 이것은 이승 땅을 밟고 살아가는 백성들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다 아는 아주 흔한 것입니다. 아침에는 네 발로 엎드려 기어 다니며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고, 해가 쨍쨍한 점심에는 두 발로 위태롭게 서서 온몸으로 피땀을 비 오듯 흘리며, 해가 지는 저녁에는 세 발로 비스듬히 기대어 깊은 한숨을 푹푹 쉬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저승사자는 농부의 말을 끝까지 듣자마자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서역에서 넘어온 오래된 괴물 스핑크스가 냈다는 수수께끼처럼, 저승의 기록물에도 수없이 등장하는 너무나도 고전적이고 유명한 질문이라 여겼기 때문이지요. 사자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가득 번졌습니다.
"하하하! 고작 그따위 얕고 얄팍한 수로 감히 저승의 지혜를 이기려 들었느냐? 네놈의 지능이 참으로 짐승만도 못하구나. 그것은 묻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바로 '인간'이 아니더냐! 어릴 땐 아무것도 모른 채 네 발로 방바닥을 기고, 머리가 굵어져 자라서는 두 발로 세상을 걷고, 이빨이 빠지고 늙어서는 굽은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해 짚으니 세 발이 되는 것. 이 어리석고 둔한 놈아, 단번에 네놈의 철저한 패배로구나! 어서 짐을 싸서 명도전으로 갈 준비나 하거라!"
사자가 승리를 확신하며 통쾌하다는 듯 몸을 일으키려 하자, 농부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오히려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크게 가로저었습니다.
"아이고, 나으리. 섣부른 판단은 금물입니다요. 그것은 옛날 옛적 머나먼 서역 땅에서나 통하는 케케묵은 답이지요. 조선 땅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우리네 불쌍한 촌부들의 삶을 어찌 그리 책에 적힌 대로만 쉽게 재단하려 하십니까. 안타깝게도 나으리의 정답은 틀렸습니다!"
순간, 저승사자의 득의양양하던 표정이 굳어지며 미간이 험악하게 찌푸려졌습니다. 절대적인 지혜를 자랑하는 자신의 답이 일개 농부 따위에게 부정당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날카로운 비수 같은 눈초리로 농부를 쏘아보며 으르렁거렸습니다.
"무엇이라? 내 답이 틀렸다고? 그렇다면 대체 정답이 무엇이란 말이냐! 만약 내 불호령을 피하기 위해 억지 춘향 격으로 답을 꾸며내거나 납득할 만한 연유를 대지 못한다면, 약조와 상관없이 당장 네놈의 그 건방진 혓바닥부터 산채로 뽑아 지옥의 불구덩이로 끌고 갈 것이다."
분노한 저승사자의 호통에 방 안의 물그릇이 흔들릴 정도였지만, 농부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눈시울을 붉히며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차분하고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을 이어갔습니다.
"정답은 바로, 뼈 빠지게 일해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소작농의 하루'입니다. 아침에 해가 뜨면 눈비비고 일어나 네 발로 진흙탕을 박박 기면서 남의 논밭의 잡초를 뽑느라 설움의 눈물을 흘리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에는 두 발로 꼿꼿이 서서 제 몸집보다 큰 지게를 지고 피땀을 비 오듯 흘립니다. 그리고 어스름한 저녁이 되면 하루 종일 시달려 부서질 듯 지친 몸을 이끌고, 닳고 닳은 호미자루에 의지해 세 발로 비틀거리며 초가집으로 돌아와, 텅텅 비어 거미줄만 쳐진 곳간을 보며 처자식 먹일 걱정에 깊은 한숨을 쉬지요. 이것이 바로 거친 흙바람 맞으며 이승을 살아가는 핍박받는 가난한 농부의 진짜 삶입니다. 그저 저승의 화려한 전각에 앉아 먹물로 적힌 차가운 명부나 들여다보시는 나으리께서, 어찌 이토록 고단하고 쓰라린 이승 백성들의 속사정을 깊이 헤아려 아시겠습니까?"
그 절절한 말을 들은 저승사자는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잠시 멍한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언제나 냉혹한 우주의 규칙과 명부에 적힌 건조한 글자들만 들여다보던 그에게, 흙내음 진동하고 눈물이 마를 날 없는 이승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무게는 감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전혀 새로운 영역이었습니다. 사자는 분노조차 잊은 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고, 농부가 빙그레 웃으며 내민 두 번째 동동주 술잔을 홀린 사람처럼 묵묵히 받아들었습니다. 공포로 질식할 것 같았던 방 안을 팽팽하게 감싸던 차가운 사자(死者)의 기운이, 농부의 씁쓸하면서도 진한 애환이 묻어나는 이야기에 아주 조금씩, 이승의 따뜻하고 끈끈한 온기로 물들어 녹아내리는 듯했습니다.
※ 4: 농부의 기지, 엎치락뒤치락하는 승부
방 안의 공기는 아까 처음 저승사자가 방문을 열어젖혔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온몸의 솜털을 곤두서게 만들던 매서운 칼바람 같던 저승사자의 기운은 농부가 정성스레 건넨 동동주 몇 잔과 이승 백성들의 절절한 애환이 담긴 이야기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었지요.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교교한 달빛은 찢어진 창호지 문틈으로 스며들어와 어느새 방 한가운데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그 빛은 이승의 필멸자와 저승의 불멸자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거대한 그림자를 나란히 바닥에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수수께끼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해 보기 좋게 패배를 맛본 저승사자는, 수백 년간 지켜온 자신의 자존심이 몹시 상한 듯 헛기침을 연거푸 내뱉으며 빈 술잔만 만지작거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창백하고 서늘한 얼굴에는 분노보다는 묘한 오기와 승부욕이 짙게 서려 있었습니다. 영겁의 시간 동안 저승의 명부를 한 치의 오차 없이 관리하며 단 한 번도 나약한 인간에게 주도권을 내어준 적 없던 그에게, 눈앞에 앉아있는 이 허름하고 당돌한 농부는 참으로 성가시면서도 기이할 정도로 강렬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승부는 네놈의 그 얄팍하고 감상적인 말장난에 내가 잠시 속아 넘어간 것뿐이다. 이승 인간들의 그 구질구질하고 복잡한 속사정이야 내 알 바 아니지만, 한 번 뱉은 약조는 저승의 법도보다 무거운 것이니 첫 판은 네놈이 운 좋게 이긴 것으로 쳐주마. 허나 두 번째부터는 어림없는 소리다. 어서 지체 말고 다음 수수께끼를 내보거라. 이번에도 얼토당토않은 억지를 부리며 궤변을 늘어놓는다면, 그 즉시 자비 없이 네놈의 혼줄을 옭아매어 거꾸로 매단 채 명도전으로 끌고 갈 것이야."
저승사자의 으름장에는 여전히 서릿발 같은 위엄이 서려 있었지만, 농부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농부는 능청스러운 손놀림으로 비어있는 사자의 술잔에 다시 뽀얀 동동주를 찰랑거릴 정도로 가득 채워 올렸습니다.
'좋아, 사자도 슬슬 이 내기에 흥미를 느끼며 오기가 발동한 모양이군. 처음의 그 무시무시하던 살기는 많이 가라앉았어. 저승사자는 죽음의 세계에서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변하지 않는 영원의 시간만을 살아온 굳건한 존재지. 그렇다면 두 번째는 저승의 이치로는 절대 계산할 수 없는 것, 이승에서 쉼 없이 변하고 흐르며 살아 숨 쉬는 끈끈한 생명과 정에 관한 것을 물어야겠다. 그래야만 저 무뚝뚝한 사자의 허를 찌를 수 있을 테니까.'
농부는 덥수룩한 턱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짐짓 신중하고도 엄숙한 태도로 두 번째 수수께끼를 던졌습니다.
"사자 나으리, 그렇다면 곧바로 두 번째 문제를 올리겠습니다. 이번에는 더욱 귀를 기울여 주시지요. 세상에서 가장 날카롭고 무서운 칼이면서도,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이불이 되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형태가 없어 눈에 보이지 않으나 세상의 그 어떤 단단한 것도 가차 없이 벨 수 있고, 깃털처럼 무게가 없으나 천하의 모든 만물을 포근하게 덮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승을 지탱하는 가장 거대한 힘 중 하나이지요."
저승사자는 매서운 눈초리로 허공을 응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핏기 없는 그의 미간이 좁아지며 방 안에는 다시금 숨막히는 정적이 찾아왔습니다. 사자는 자신이 가진 저승의 무한한 지혜와 수백 년간 쌓아온 세상의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머릿속으로 수많은 형상들을 빠르게 그려보기 시작했지요.
'형태가 없으나 모든 것을 벤다... 그것은 필시 흐르는 시간이나 세상을 휩쓰는 바람일 것이다. 허나 천하를 덮는 따뜻한 이불이 된다고? 시간은 그저 만물을 늙게 만들 뿐이고, 저승의 매서운 칼바람은 결코 따뜻해질 수 없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불인가? 아니, 불은 모든 것을 시커멓게 태워버릴 뿐 이불이 될 수는 없지. 칼이면서 동시에 이불이라니, 이 어찌 모순된 억지가 아니란 말인가.'
사자의 미간에 패인 깊은 주름은 좀처럼 펴질 줄 몰랐습니다. 사자의 침묵이 길어지고 고뇌가 깊어질수록 농부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점점 더 짙게 번져갔습니다. 한참을 턱을 괴고 끙끙거리며 고심하던 저승사자가 마침내 무언가 깨달은 듯 번쩍 고개를 들며,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달싹여 자신만만하게 정답을 내놓았습니다.
"하하, 알겠다! 네놈이 아무리 교묘하게 말을 배배 꼬아도 내 지혜를 벗어날 수는 없지. 그것은 필시 '세월'일 것이다! 세월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인간의 정해진 수명을 깎아내고 찬란했던 젊음을 무참히 베어버리지만, 때로는 늙고 병들어 고통받는 자들에게 죽음이라는 영원한 안식의 이불을 덮어주지 않더냐. 죽음이야말로 이승의 모든 고통을 덮어주는 가장 완벽하고 따뜻한 이불인 셈이지. 어떠냐, 이번에는 내 논리에 한 치의 빈틈도 없으니 무조건 정답일 것이다!"
사자는 자신의 완벽한 논리에 스스로 깊이 감탄한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농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다시 한 번 크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번에는 아예 배를 잡고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아이고, 사자 나으리. 이번에도 정말 보기 좋게 빗나가셨습니다. 어찌 나으리께서는 그리 세상 만사를 죽음과 끝맺음으로만 연관 지어 삭막하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이 어찌 죽음으로만 돌아가겠습니까."
"무엇이라? 내 완벽한 답이 또 틀렸다는 말이냐! 감히 죽음의 안식을 모욕하다니. 그렇다면 대체 네놈이 생각하는 그 잘난 정답이 무엇이란 말이냐!"
"정답은 바로,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농부의 입에서 흘러나온 전혀 예상치 못한 따뜻한 정답에 저승사자는 눈을 커다랗게 떴습니다.
"자식이 엇나가고 잘못된 길을 갈 때, 어머니의 마음은 그 어떤 매서운 칼바람보다 날카롭게 자식의 잘못을 도려내고 혼을 내는 무서운 칼이 됩니다. 허나, 그 자식이 험난한 세상에 부딪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질 때면, 어머니는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며 자식의 허물을 덮어주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이불이 되지 않습니까. 형태도 없고 무게도 없지만, 우리네 이승 사람들을 모진 세상 속에서도 평생토록 버티고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힘. 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위대한 마음이지요. 어찌 세월이나 죽음 따위가 감히 어머니의 마음에 비견될 수 있겠습니까."
농부의 진심이 담긴, 따뜻하고도 묵직한 목소리가 차가웠던 방 안을 나직하고 포근하게 채워나갔습니다. 저승사자는 농부가 건넨 술잔을 차마 입으로 가져가지 못한 채 허공에 든 채로, 완전히 넋을 잃고 농부의 투박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차갑게 굳어 있던 사자의 검은 눈동자가 처음으로 수면에 돌을 던진 듯 잘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철저한 인과율과 저승의 차가운 이치로는 도저히 셈할 수 없는 인간들의 질긴 정과 무한한 내리사랑. 그것은 오직 죽음과 끝만을 다루며 생명을 거두어가는 저승의 사자로서는 영원히 풀지 못할, 이승만의 눈부시게 찬란한 비밀이었습니다.
※ 5: 저승사자의 헛웃음과 물러난 죽음
연이은 두 번의 철저한 패배. 저승사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공을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을 길게 흘렸습니다. 수백 년이라는 까마득한 세월 동안 수만, 수십만의 영혼들을 차가운 저승길로 인도하면서, 이토록 철저하고 완벽하게 한낱 인간의 지혜와 말재주에 휘둘려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신기하게도 기분이 상하거나 불쾌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눈앞의 늙숙한 농부가 담담하게 들려주는 이승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이야기들이 묘하게 굳어있던 마음 한구석을 뭉클하게 건드리고 있었지요. 농부와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새 커다란 동동주 항아리는 바닥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고,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던 사자의 창백한 양 뺨에는 이승의 술기운이 올라 희미한 홍조마저 기분 좋게 띠고 있었습니다.
"허허, 네놈의 그 혓바닥이 참으로 세상을 홀리는 요물이구나. 엄격한 저승의 법도와 절대적인 죽음의 이치를 들먹이던 내가, 끈끈하고 질척거리는 이승의 정에 가로막혀 두 번이나 연거푸 패배를 뼈아프게 인정하게 되다니. 좋다, 어차피 수명을 십 년 연장해 주기로 한 처음의 내기는 네놈의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났다. 약조한 대로 네놈의 명부에 십 년을 더해주마. 허나... 이대로 순순히 물러서기에는 명색이 명부의 차사인 내 자존심이 도무지 허락하지를 않는구나. 마지막으로 내기를 딱 하나만 더 하자꾸나."
저승사자의 뜻밖의 제안에 농부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이미 원래의 목적이었던 수명 연장을 달성했기에 굳이 더 이상 위험천만한 도박을 이어갈 이유는 없었지만, 처음의 그 무시무시하던 살기는 온데간데없이 한결 부드럽고 인간적으로 변한 사자의 태도에 농부 역시 넉살 좋게 무릎을 치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아이고, 사자 나으리께서 그리 간절히 원하신다면 까짓것 제가 못 해 드릴 것도 없지요. 하오나 이번에는 제가 나으리께 건방지게 문제를 내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우신 나으리께서 제게 직접 문제를 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약 제가 나으리의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맞히지 못한다면, 방금 천금같이 얻어낸 십 년의 수명을 다시 고스란히 반납하고 기꺼이 저승길을 따라나서겠습니다."
"호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국에 그 배짱 한번 참으로 두둑하구나. 좋다! 네놈의 그 기개가 마음에 쏙 드니 내 특별히 조건을 걸마. 만약 네가 내는 이 마지막 수수께끼마저 통쾌하게 맞힌다면, 십 년이 아니라 곱절인 이십 년의 수명을 두둑하게 늘려주마. 그리고 네놈이 이십 년 뒤 진짜 명운이 다하여 흙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두 번 다시는 이 집 문턱을 넘으며 널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 엎어지면 코 닿을 데까지 온 마당에 밑져야 본전이다! 저승사자가 쥐어짜 내봤자 내는 문제라 해봤자 명부의 차가운 규율이나 죽음, 형벌에 관한 것이겠지. 어떻게든 이승의 논리로 이리저리 둘러대면 승산이 있다.'
농부는 바짝 타들어 가는 입술을 축이며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사자의 입술만을 뚫어지게 주시했습니다. 저승사자는 헛기침을 큼큼 한 번 하더니, 이전의 위압적인 태도와는 다르게 조금은 장난기가 섞인, 사뭇 기대에 찬 목소리로 나직하게 물었습니다.
"자, 그럼 잘 들어보아라. 이 세상에서 가장 기분 좋은 '도둑질'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남의 것을 탐하는 도둑질임에도 아무리 많이 훔쳐도 포졸들에게 관아로 끌려가지 않고, 오히려 도둑맞은 자가 더욱 기뻐하며 미소를 지으며, 훔친 자와 도둑맞은 자 모두의 배를 든든하게 부르게 하는 아주 기이한 도둑질이다. 어디 한번 네놈의 그 잘난 혀로 정답을 말해보거라."
순간, 농부는 등골이 서늘해지며 허를 찔린 듯 몹시 당황했습니다. 죽음과 심판만을 말할 줄 알았던 저승사자의 입에서 '기분 좋은 도둑질'이라는 모순된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도둑질인데 관아에 끌려가지 않고, 훔친 자와 도둑맞은 자 모두가 배를 부르게 한다고? 게다가 세상에, 도둑맞은 자가 오히려 기뻐한다니... 이것은 내가 평생 해온 흙 파먹는 농사일도 아니고, 앞서 말한 이승의 고단함이나 설움에 관한 것도 아니다. 무언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도대체 무엇을 훔쳐야 도둑맞은 사람이 웃을 수 있단 말인가.'
농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째깍거리는 시간의 흐름조차 완전히 멈춘 듯 방 안에는 숨 막히는 적막만이 짙게 흘렀습니다. 이마에는 송글송글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지요. 먼 옛날, 자신이 피 끓는 젊은 시절 수줍음 많던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 단칸방에서 첫아이가 태어나 가녀린 손가락으로 자신의 거친 손가락을 꽉 쥐었을 때의 그 경이로웠던 감각,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꽁보리밥을 넘기며 웃음꽃을 피우던 가족들의 얼굴들이 낡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가족이라는 단어 속에서 정답의 실마리를 찾으려 애쓰던 찰나, 돌연 그의 머릿속에 번쩍하고 섬광처럼 하나의 포근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농부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는 환하고 벅찬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탁 쳤습니다.
"하하하! 사자 나으리, 참으로 오묘하고도 아름다운 문제를 내셨습니다. 천하의 저승사자께서 이리도 따뜻한 문제를 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답은 바로... '어미의 젖을 물고 훔쳐 먹는 갓난아기'입니다!"
그 순간, 거대한 바위 같던 저승사자의 넓은 어깨가 크게 움찔했습니다. 농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배고픈 아기가 어미의 품에 안겨 마치 도둑질하듯 젖을 온 힘을 다해 훔쳐 먹고 빨아먹어도, 세상 천지에 어느 포도대장이 그 핏덩이 같은 갓난아기를 오라줄로 묶어 잡아갈 것이며, 제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제 배를 불리느라 젖을 빠는데 세상 어느 어미가 그 모습을 보며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아기는 달콤한 젖을 훔쳐 먹어 배가 빵빵하게 부르고, 어미는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내려다보며 세상을 다 가진 듯 마음의 배가 부르니, 이승을 통틀어 이보다 더 완벽하고 기분 좋은 도둑질이 어디 있겠습니까!"
팽팽한 정적이 흐르던 방 안, 돌연 저승사자의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 오르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벼락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하하하! 껄껄껄! 아하하하하!"
그것은 밤길을 걷는 사람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귀기를 품은 소름 끼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깨달음을 얻고 감탄하며 즐거워하는, 더없이 호탕하고도 맑은 인간적인 웃음이었습니다. 저승사자는 자신의 무릎을 퍽퍽 치며 농부의 놀라운 기지와 이승의 따뜻한 정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언제나 차갑고 무자비했던 죽음의 절대적인 사자가, 한낱 흙먼지 같은 인간 농부의 지혜와 재치, 그리고 가족을 향한 지극한 사랑 앞에 완벽하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무장 해제되어 버린 기적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 6: 마을에 남겨진 유쾌한 전설
"네놈이 이겼다. 단 한 치의 변명할 여지도 없는 완벽한 나의 패배로구나."
한참을 호탕하게 웃던 저승사자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훌쩍 몸을 일으켰습니다. 어느새 짙은 어둠이 깔려 있던 창호지 문 너머로는 먼 동이 서서히 터오며, 밤의 장막을 걷어내는 푸르스름하고 신비로운 새벽빛이 방 안으로 은은하게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꼬끼오- 하고 우는 수탉의 길고 우렁찬 울음소리가 고요했던 산골 마을의 아침을 경쾌하게 깨우기 시작했지요. 사자는 흐트러진 검은 도포 자락의 옷매무시를 단정히 가다듬고 비뚤어진 갓을 바로 쓴 뒤, 처음 방에 들어와 죽음을 선고했을 때보다 한결 따뜻하고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바닥에 엎드린 농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너의 그 놀라운 지혜와 팍팍한 삶에 대한 강렬한 애착, 그리고 가족을 향한 그 질긴 정이 오늘 밤 너의 목숨을 구했다. 내 비록 저승의 율법을 어기는 짓을 하였으나 이 내기에서의 패배를 달게 인정하마. 약조한 대로 너의 명부에 적힌 수명에 이십 년을 덧붙여 고쳐 쓸 것이니, 그동안 밭에 남은 곡식도 부지런히 넉넉히 거두고, 걱정하던 막내딸 시집도 번듯하게 보내며 자식들 커가는 모습도 원 없이 실컷 보거라. 허나 명심해라. 이십 년 뒤, 네놈에게 허락된 진정한 명운이 얄짤없이 다하는 날에는 그 어떤 달콤한 수수께끼나 동동주 한 사발도 절대 통하지 않을 것이니 하루하루를 허투루 쓰지 말고 그리 알거라."
"아이고, 사자 나으리! 망극하옵니다, 참으로 망극하옵니다. 오늘 밤 베풀어주신 이 크나큰 은혜와 자비는 제가 흙으로 돌아가 저승에 가서도 뼈에 새겨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요!"
농부는 눈물을 글썽이며 방바닥에 이마가 닿도록 엎드려 연신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렇게 몇 번의 절을 올리고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보니, 방 안을 무겁게 가득 채우던 서늘하고 불길한 기운과 거대한 검은 그림자는 아침 안개처럼 스르르 허공으로 흩어져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진 뒤였습니다. 오직 바닥까지 말라붙은 텅 빈 동동주 항아리와 바닥에 뒹구는 빈 술잔 두 개만이, 간밤에 벌어졌던 생사를 넘나드는 숨 막히는 내기가 결코 한낱 헛된 꿈이 아니었음을 묵묵히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여보! 이 양반이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나지도 않고 혼자 방구석에서 술판을 벌였나! 술 냄새가 진동을 하네그려. 어서 털고 일어나서 이슬 마르기 전에 뒷산 밭에 무 뽑으러 가야지요!"
부엌에서 가마솥에 불을 지피며 아침을 짓던 아내의 앙칼지고도 활기찬 목소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들려왔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또 아침부터 귀청 떨어지게 잔소리라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을 텐데, 오늘따라 그 바가지 긁는 목소리가 그렇게 반갑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의 목소리는 곧 자신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생생한 증거였으니까요. 농부는 껄껄껄 크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을 두 팔 벌려 활짝 열어젖혔습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내리며 그의 주름지고 흙투성이인 얼굴을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게 비추었습니다.
'그래, 나는 살았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내기 한 판으로 이승에서의 이십 년이라는 귀하고도 눈부신 시간을 새로 얻어냈어. 오늘부터는 불평불만 없이 더 부지런히 내 땅을 일구고, 우리 식구들과 더 많이 웃고 사랑하며 미련 없이 살아야겠군!'
이후 농부와 저승사자가 벌였던 그 기상천외한 하룻밤의 내기 이야기는, 주막에서 막걸리를 들이켜던 농부의 입을 통해 바람을 타고 마을 전체로, 또 이웃 마을로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술에 취해 지어낸 맹랑한 허풍이라며 콧방귀를 뀌고 믿지 않았지만, 이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단 한 번의 잔병치레도 없이 언제나 긍정적이고 지혜롭게, 이웃을 도우며 땀 흘려 살아가는 농부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점차 그 이야기를 경이로운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죽음 앞에서도 굴복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우리네 삶에 녹아있는 특유의 기지와 해학으로 꿋꿋하게 새로운 삶을 쟁취해 낸 농부의 전설. 그 이야기는 조선 팔도를 굽이굽이 넘어 오늘날까지도 팍팍하고 고단한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시원한 웃음과 삶에 대한 작은 위로를 전하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하고 따뜻한 야담으로 오래도록 남게 되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특유의 재치와 배짱으로 저승사자를 이겨낸 농부의 이야기, 재미있게 들으셨나요? 때로는 우리 앞을 가로막는 커다란 두려움도 여유로운 마음과 지혜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유쾌한 야담이었습니다. 오늘 밤은 여러분도 근심 걱정 다 내려놓으시고 편안한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이야기가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리며, 다음에도 흥미로운 옛날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