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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 구경을 다녀온 동자승 『한국민관설화』
※ 본 이야기는 『한국민관설화』에 전하는 저승 유람담을 바탕으로 각색한 창작 오디오 드라마이며, 등장인물의 대사는 극적 재구성입니다.
태그 (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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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300자 미만)
이름이 같다는 이유 하나로, 열두 살 동자승이 저승길에 끌려갔습니다. 데려가야 할 사람은 아랫말 최 노인이었는데 말이지요. 명부를 펼친 염라대왕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신참 저승사자는 그 자리에 엎드려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 중은 살려달라 울지도 않고, 되레 이렇게 여쭈었다지요. "이왕 왔으니, 사람이 죽어 어디로 가는지 제 눈으로 보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그리하여 사흘. 동자승은 저승사자의 등에 업혀 지옥과 극락을 두루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옥의 형틀 하나에는,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의 이름표가 걸려 있었더랍니다.
※ 1: 연화암의 새벽, 그리고 검은 도포
소백산 깊은 자락에 연화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하나 있었더랍니다. 법당이라야 방 두 칸을 겨우 이어 붙인 정도요, 마당이라야 멍석 서너 닢 펴면 꽉 차는 곳이었지요. 그래도 새벽마다 종소리 하나는 참 맑았습니다. 그 종을 치는 이가 바로 열두 살 동자승 득수였습니다.
득수는 세 살에 어미를 여의고, 여섯 살에 아비마저 병으로 보낸 아이였습니다. 갈 데가 없어 연화암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것을, 노스님 혜운이 거두어 길렀지요. 머리를 깎이고 먹물 옷을 입혔으나, 노스님은 한 번도 이 아이에게 "너는 중이다" 하고 못을 박지 않았습니다.
"득수야, 네가 크거든 산을 내려가고 싶으면 내려가거라. 나는 널 붙들어 두려고 거둔 게 아니야."
그러면 득수는 빗자루를 든 채로 배시시 웃었습니다.
"스님, 저는 여기가 좋은디요."
득수의 하루는 어른 스님 열 사람 몫이었습니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종을 치고, 마당을 쓸고, 계곡까지 내려가 물을 길어 올렸지요. 물통 두 개를 지게에 얹으면 아이 몸이 휘청휘청, 앞으로 고꾸라질 듯 기우뚱거렸습니다. 그래도 물 한 방울 흘리는 법이 없었더랍니다.
'물은 부처님 목이고, 밥은 부처님 배라 하셨으니, 한 방울도 함부로 못 하지.'
그 산 아래, 연화골이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스무남은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자그마한 동네였지요. 그런데 그 마을에도 득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성은 최가요, 나이는 예순여덟. 마을 사람들이 뒤에서 뭐라고 불렀느냐 하면, 이렇게 불렀습니다.
"쇠불알 최 영감."
왜 그런 별호가 붙었는지 아십니까. 쇠불알에서 피 한 방울 나올 성싶소, 그 말이지요. 최 노인은 연화골에서 논밭을 제일 많이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곳간에 쌀가마가 천장까지 그득했지요. 그런데 그 곳간 문은 일 년 열두 달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이웃이 죽 한 그릇을 얻으러 가면, 최 노인은 문틈으로 얼굴만 내밀었습니다.
"우리 집도 없어. 없다니까 그러네."
그러고는 밤중에 몰래 쌀을 퍼내어, 이자를 두 배 세 배로 붙여 빌려주었지요. 못 갚으면 논을 빼앗고, 그래도 모자라면 소를 끌고 갔습니다. 마을 사람 절반이 최 노인에게 코가 꿰여 있었더랍니다.
그래도 득수는 그 노인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탁발을 나갔다가 최 노인의 대문 앞을 지날 때면, 늘 목탁을 두드리며 한참을 서 있었지요. 물론 쌀 한 톨 나온 적은 없었습니다. 나오는 건 언제나 이 소리뿐이었습니다.
"밥 빌어먹는 중놈아, 남의 집 앞에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저리 가!"
그러면 득수는 합장을 하고 꾸벅 절을 했습니다.
"영감님, 오래오래 사시고 복 많이 받으시라요."
노스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 껄껄 웃으셨습니다.
"허허, 그 영감이 복을 받으면 세상이 뒤집어지지."
"스님, 그래도 사람이 죽으면 다 어디로 간대유. 나쁘게 산 사람은 진짜로 지옥에 간대유?"
노스님은 염주를 굴리며 한참 있다가 대답하셨습니다.
"가지. 가고말고. 다만 사람이 살아서는 그걸 못 보니까, 안 믿는 게지. 눈으로 본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세상이 좀 나아질 텐데 말이야."
득수는 그 말을 마음에 콕 새겨 두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궁금했지요. 죽으면 정말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 어머니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
그해 유월 그믐, 장맛비가 사흘 내리 퍼붓다가 뚝 그친 밤이었습니다. 산이 온통 물비린내에 젖어 있었지요. 개구리 소리 하나 없이 사방이 고요했습니다. 그것이 어찌나 이상하던지, 득수는 자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오늘따라 벌레 소리 하나가 없네.'
바로 그때였습니다. 삐이걱, 하고 암자 사립문이 열렸습니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방문 앞 마루가 저 혼자 삐걱, 하고 울었지요.
"연화골 득수, 있느냐."
득수는 숨이 턱 막혔습니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마당 한가운데에 사내 둘이 서 있었습니다. 검은 도포에 검은 갓. 갓 그늘 아래로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달빛이 그렇게 밝은데도, 이상하게 그 두 사람 발밑에는 그림자가 없었더랍니다.
득수는 이불을 끌어안고 벌벌 떨었습니다.
'저이들이 누구여. 어째서 발자국 소리가 안 나지.'
키 큰 사내가 소매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촤르륵 펼쳤습니다. 그러고는 낭랑하게 읽었지요.
"연화골 득수. 오늘 밤 자시가 명이 다하는 시각이라. 이승의 인연이 여기서 끊어졌으니, 순순히 따라 나서라."
방 안에서 노스님이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노스님은 문을 열지도, 목소리를 내지도 못하셨지요. 그저 눈만 부릅뜬 채로, 몸이 굳어 꼼짝을 못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득수는 자기도 모르게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섰습니다. 다리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저, 저는 연화암 득수인디유. 연화골 사는 득수가 아니라, 산에 사는 득수여유."
키 작은 사내가 코웃음을 쳤습니다.
"연화골이나 연화암이나. 여기 명부에 득수라 적혀 있고, 네 이름이 득수가 아니냐."
"그, 그건 맞는디유. 그치만 아랫말에도 득수라는 어른이 계신디유! 최가 성 쓰시는 영감님이 계신디유!"
"어허, 죽은 자가 말이 많구나."
키 작은 사내가 소매를 한 번 휘둘렀습니다. 그 순간 득수의 몸에서 힘이 쭉 빠지며, 무릎이 툭 꺾였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데, 저 뒤에서 노스님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습니다.
"안 된다! 그 아이가 아니야! 그 아이는 아직 아니라니까!"
그러나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암자의 처마도, 마당의 감나무도, 새벽마다 치던 종도 스르르 흐려졌지요. 득수는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을 했더랍니다.
'아이고, 나 오늘 저녁 공양도 못 했는디……. 스님 물도 안 길어다 놨는디…….'
그렇게 열두 살 동자승 득수는, 남의 이름표를 달고 저승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 2: 황천길, 사자들의 말다툼
눈을 떠 보니, 발밑이 온통 흰 안개였습니다.
길은 있었습니다. 폭이 딱 사람 하나 지나갈 만한, 누런 흙길이었지요. 그 길이 안개 속으로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길 양옆으로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무도 없고, 새도 없고, 바람 소리도 없었지요. 다만 발자국 소리만 저벅저벅, 저벅저벅 났더랍니다.
득수는 앞뒤로 사자 둘 사이에 끼어 걷고 있었습니다. 앞에 선 이가 키 큰 사자, 뒤에 선 이가 키 작은 사자였지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키 큰 이는 차사 노릇을 삼백 년 넘게 한 강 차사였고, 키 작은 이는 이승을 떠난 지 얼마 안 된 신참 오 차사였습니다.
앞뒤로 사람들이 줄줄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들 표정이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 저고리 고름이 풀어진 채로, 어떤 이는 짚신 한 짝만 신은 채로, 넋을 놓고 걷기만 했지요. 누구 하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득수는 걸으면서도 계속 조잘거렸습니다.
"차사님, 저기유. 지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닌 것 같은디유."
오 차사가 뒤에서 등을 툭 밀었습니다.
"조용히 좀 걸어라. 저승길에 말이 많으면 혓바닥이 뽑히는 수가 있느니라."
"아니, 그게 아니라유. 지는 열두 살이여유. 열두 살! 명부에 나이가 몇으로 적혀 있는지 한 번만 봐 주시면 안 될까유?"
오 차사가 흠칫하는 게 뒤통수로도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이내 목소리를 높였지요.
"명부에 이름이 있으면 그만이다. 이름이 명(命)이고, 명이 곧 법이야."
"그러믄 세상에 김서방이 몇이고 이서방이 몇인디유. 이름만 갖고 데려가시면, 나중에 진짜 임자는 어쩐대유?"
이 말에 앞서 걷던 강 차사가 걸음을 딱 멈추었습니다. 갓 그늘 아래에서 눈이 번쩍하고 빛났지요.
"오 차사."
"예, 예. 형님."
"명부를 이리 내어 보아라."
오 차사가 우물쭈물하다가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습니다. 강 차사가 그것을 촤르륵 펼치더니, 손가락으로 한 줄을 짚고 읽었습니다.
"연화골 득수. 무진생. 나이 예순여덟. 하는 일은 농사와 돈놀이."
강 차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득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네가 예순여덟이냐."
"아니라니께유! 지는 열두 살이여유! 손 좀 보시라요, 이렇게 쪼끄만 손이 예순여덟이래유?"
득수가 두 손을 쫙 펴서 내밀었습니다. 손등에 지게 자국이 벌겋게 남아 있는, 아직 솜털도 안 벗은 아이 손이었지요.
강 차사가 이마를 짚었습니다. 그러고는 오 차사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착 낮추었습니다.
"이놈아. 너 이번이 몇 번째냐."
"혀, 형님. 지가 문패를 봤단 말입니다. 연화, 연화 하기에……."
"연화골과 연화암이 어떻게 같으냐! 골은 마을이고 암은 절이다! 하나는 산 아래고 하나는 산 위란 말이다!"
오 차사가 갓을 벗어 쥐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아이고, 형님. 저 이번에 걸리면 정말 뼈도 못 추립니다. 저 지난달에도 창고 문서 하나 잘못 접었다가 곤장 서른 대를 맞았지 않습니까."
득수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만 마음이 이상해졌습니다. 저승사자가 무섭기는커녕, 어쩐지 딱해 보이는 것이었지요.
'저 아저씨도 혼나는구먼. 저승에도 상관이 있고 곤장이 있는겨.'
강 차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습니다.
"돌아가자. 지금 도로 데려다 놓으면 아직 늦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개 저편에서 징 소리가 크게 울렸습니다. 두웅— 하는 소리에 흙길이 부르르 떨렸지요. 그러자 강 차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늦었구나. 관문이 열렸다."
"관문이 뭔디유?"
"한번 열린 관문 안으로 들어선 혼은, 염라대왕의 명이 없이는 도로 나갈 수가 없다. 그것이 저승의 법이야."
득수는 그제야 오싹해졌습니다. 그러나 무섭다고 울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물었지요.
"차사님. 그러믄 지가 염라대왕님한테 사정을 말씀드리면 되남유?"
"…뭐라?"
"잘못은 저 아저씨가 했지만, 지가 가서 말씀드리믄 되잖어유. 지가 열두 살이라고, 명부에 적힌 사람이 아니라고 조근조근 말씀드리믄 되잖어유."
강 차사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삼백 년 동안 수만 명을 데려왔지만, 저승 문턱에서 이렇게 말하는 아이는 처음이었지요.
이윽고 안개가 걷히면서 강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물빛이 검고, 물살이 느렸습니다. 강가에는 헐벗은 혼백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지요. 그 위로 다리가 셋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다리, 하나는 나무로 얽은 다리, 하나는 겨우 외나무 하나를 걸쳐 놓은 다리였습니다.
"이것이 삼도천이다. 살아서 지은 업에 따라 건너는 다리가 갈린다."
득수가 보니, 금빛 다리로 가는 이는 열에 하나도 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은 외나무다리 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지요. 그중 한 사내가 발을 헛디뎌 물속으로 첨벙 빠지자, 검은 물속에서 무언가가 스르르 올라와 그를 끌고 내려갔습니다. 득수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았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득수가 염불을 외자, 강물이 잠시 잔잔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벌벌 떨던 혼백들이 그 틈에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지요. 강 차사가 눈을 크게 떴습니다.
"이 아이 봐라."
관문에 이르자, 붉은 기둥에 검은 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문지기 둘이 창을 들고 서서 물었습니다.
"어느 골 혼백이냐."
오 차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여, 연화골 득수요."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습니다. 그 안쪽에서 확 밀려 나오는 바람이 어찌나 서늘하던지, 뼛속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강 차사가 득수의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 손이 뜻밖에도 따뜻했더랍니다.
"아이야. 안에 들어가거든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마라. 저승에서는 입이 거짓을 말하면, 그 자리에서 혓바닥이 안다."
"예. 지는 원래 거짓말 못 해유."
"그리고…… 겁이 나거든 조금 전에 외던 그것을 외거라."
득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저벅저벅 관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열두 살 아이의 등이 어찌나 곧던지, 뒤에 선 두 사자가 오히려 고개를 숙였다지요.
※ 3: 염라대왕과 명부 대조
관문 안은 거대한 대궐이었습니다.
기둥이 어찌나 굵던지 어른 열이 팔을 벌려도 감싸지 못할 듯했고, 천장은 올려다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좌우로는 무장한 나졸들이 창을 들고 늘어서 있었지요. 그 사이로 난 붉은 길을 따라, 득수는 종종걸음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정면 높다란 자리에, 그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진홍빛 곤룡포를 입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면류관 앞으로 늘어진 구슬 발이 흔들릴 때마다 서늘한 소리가 났지요. 수염은 검고 눈썹은 짙었으며, 두 눈은 어찌나 형형한지 마주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분이 곧 염라대왕이셨습니다.
그 곁에는 붓과 명부를 든 최판관이 서 있었습니다.
"연화골 득수, 대령이오!"
나졸의 외침에 대궐이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오 차사가 냉큼 엎드렸고, 강 차사도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데 득수는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 어린 중은 두 손을 모으고, 아주 공손하게 절을 올렸습니다.
"대왕님, 안녕하셔유. 연화암 동자승 득수라고 하는디유."
순간 대궐 안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최판관의 붓이 뚝 멈추었지요.
염라대왕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셨습니다.
"…연화암이라 하였느냐."
"예. 소백산 연화암이여유. 아랫말이 연화골이구유, 지가 사는 데는 산 위 연화암이여유."
염라대왕의 눈길이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습니다.
"판관."
"예, 대왕마마."
"명부를 펼쳐 대조하라. 이름, 생년, 사주, 수명, 선악부 전부다."
최판관이 두툼한 명부를 촤악 펼쳤습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마치 벼락이 떨어지는 듯했지요. 최판관의 손가락이 글자를 훑어 내려갔습니다.
"연화골 득수. 성은 최가. 무진년 정월 초닷새 축시 생. 올해 나이 예순여덟. 생업은 농사와 이자놀이. 수명은 오늘 밤 자시로 다하였음."
최판관이 고개를 들고 득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안색이 확 변했지요.
"…이자는 아이올시다."
염라대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곤룡포 자락이 붉은 물결처럼 출렁였지요.
"아이야. 네 사주를 대라."
"지는유, 어무이가 일찍 돌아가셔서 생일도 잘 몰러유. 근디 스님이 그러시는디 지가 기묘년 시월에 났다구 하셨어유. 올해 열두 살이구유."
"기묘년 시월!"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대궐을 흔들었습니다. 기둥이 부르르 떨리고, 나졸들의 창끝이 덜덜 떨렸습니다.
"판관! 저 아이의 이름을 다시 찾아보라!"
최판관이 명부를 뒤로 한참 넘겼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대목에서 손이 딱 멎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아뢰었지요.
"…연화암 득수. 속성은 없고, 부모 모두 먼저 감. 기묘년 시월 생. 수명은…… 예순여덟까지올시다."
대궐 안이 얼어붙었습니다.
"뭐라?"
"게다가 대왕마마…… 이 아이의 선악부에는 악업이 한 줄도 없사옵니다. 대신 이런 것이 적혀 있사옵니다. 새벽 종 삼천 번, 물 길어 나른 것이 이만 걸음, 병든 노파에게 제 밥을 내어 준 것이 마흔 번, 죽어 가는 산짐승 묻어 준 것이 열두 번……."
염라대왕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그 눈이 그대로 오 차사에게로 꽂혔지요.
"오 차사!"
오 차사가 이마를 바닥에 쿵 찧었습니다.
"주,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이름이 같으면 다 같은 사람이더냐! 골(谷)과 암(庵)을 구별 못 하는 눈으로 어찌 명부를 들고 다니느냐! 네가 하루만 늦었더라면, 나는 죄 없는 아이를 저승에 붙잡아 두고 세상 사람들의 원망을 살 뻔했다!"
염라대왕이 손을 들었습니다. 나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오 차사를 끌어내려 하였지요. 그때였습니다.
"대왕님! 잠깐만유!"
득수가 두 팔을 벌리고 오 차사 앞을 막아섰습니다. 대궐 안 모든 이의 눈이 이 조그만 아이에게로 쏠렸지요.
"저 아저씨, 일부러 그런 게 아니어유. 아까 오면서 계속 손을 벌벌 떨더라구유. 사람이 실수를 안 하고 어떻게 산대유. 지도 물통 엎어서 스님한테 혼난 게 열두 번은 되는디유."
"…네 죄 없이 끌려온 것이 저놈 때문인데, 저놈을 감싸는 것이냐."
"감싸는 게 아니구유. 지가 여기 잡혀 오는 바람에 저 아저씨가 벌을 받으면, 결국 지 때문에 매를 맞는 거 아니어유. 그러믄 지 마음이 안 편해유."
염라대왕은 한동안 말이 없으셨습니다. 면류관의 구슬 발이 잘그랑, 잘그랑 흔들리는 소리만 났지요. 최판관이 슬그머니 붓을 들어, 명부 한쪽에 무언가를 적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이렇게 적었다더군요.
'선(善) 하나 더함.'
이윽고 염라대왕이 껄껄, 하고 웃으셨습니다. 그 웃음소리에 얼어붙었던 대궐이 스르르 풀렸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수천 년을 보냈다만, 제 목숨이 걸린 자리에서 남의 매를 걱정하는 혼은 처음 본다. 좋다. 아이야, 너를 도로 이승으로 돌려보내마."
득수는 넙죽 절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유!"
"헌데 어찌하여 얼굴이 마냥 밝지가 않으냐. 무슨 미련이라도 있느냐."
득수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여쭈었습니다.
"대왕님. 지가……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유."
"말해 보아라."
"우리 스님이 그러셨어유. 사람들이 나쁜 짓을 겁 없이 하는 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를 눈으로 못 봤기 때문이라구유. 딱 한 사람이라도 그걸 보고 와서 말해 주면 세상이 좀 나아질 텐데, 하고 한숨을 쉬셨어유."
득수가 고개를 번쩍 들었습니다. 그 눈이 촛불처럼 맑았지요.
"이왕 잘못 끌려온 거, 지가 보고 가면 안 될까유. 지옥이 어떻게 생겼는지, 극락이 어떻게 생겼는지. 지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가서, 사람들한테 전해 주고 싶어유."
대궐이 다시 한번 조용해졌습니다. 강 차사가 저도 모르게 "허어" 하고 신음을 뱉었지요.
염라대왕은 지그시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리고 한참 만에,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오 차사."
"예, 예!"
"네 죄를 벌하는 대신, 소임 하나를 주마. 사흘 동안 이 아이를 데리고 저승을 두루 돌아라. 지옥의 열여덟 문을 보이고, 극락의 연꽃 못을 보이라. 하나도 숨기지 말고, 하나도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여라."
"자, 잘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아이야."
"예, 대왕님."
"사흘 뒤 네가 이승에 돌아가거든, 본 것을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전하라. 다만 겁을 주려고 전하지는 말라. 사람이 무서워서 착해지면 그것은 사흘을 못 가나, 마음으로 뉘우쳐 착해지면 그것은 평생을 가느니라. 알겠느냐."
"예! 명심할게유!"
염라대왕이 손을 들어 옆문을 가리키셨습니다. 그 문이 스르르 열리자, 저 안쪽에서 붉은 기운이 확 밀려 나왔습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 같은 것이 아득하게 들려왔지요.
득수는 침을 꼴깍 삼켰습니다. 그러고는 오 차사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아저씨. 지 손 놓으면 안 되는 거 알쥬?"
"…놓기는 무슨. 내가 네 놈 덕에 목숨을 부지했는데."
그렇게 열두 살 동자승 득수의, 사흘간의 저승 유람이 시작되었더랍니다.
※ 4: 아직 오지 않은 자의 이름표
문이 열리자 뜨거운 바람이 확 밀려왔습니다.
득수는 오 차사의 손을 꼭 쥔 채, 붉은 통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습니다. 걸음을 옮길수록 발밑이 후끈후끈해지고, 저 멀리서 두드리는 소리와 끓는 소리, 사람들의 신음이 뒤섞여 아득하게 울려왔지요.
"아저씨, 여기가 지옥이여유?"
"그래. 지옥이 하나인 줄 아느냐. 열여덟이나 되느니라. 살아서 지은 죄가 무엇이냐에 따라, 가는 문이 다르지."
가장 먼저 이른 곳은 '도산지옥'이었습니다. 온 산이 칼로 되어 있었지요. 발 디딜 틈마다 시퍼런 칼날이 하늘을 향해 돋아 있었습니다. 그 칼밭을 맨발로 오르는 이들이 있었지요. 한 걸음 뗄 때마다 발이 찢어지는데도, 그들은 멈추지 못하고 자꾸만 위로 올라갔습니다.
"저 사람들은 무슨 죄를 지었대유?"
"살아서 남의 것을 빼앗은 자들이다. 힘없는 이의 논밭을 칼같이 빼앗고, 저울눈을 속여 이문을 남기고, 남의 몫을 잘라 제 배를 불린 자들이지. 살아서는 칼같이 남의 것을 베었으니, 죽어서는 제 살이 칼에 베이는 게야."
득수는 그 말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문득 아랫말 최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지요. 못 갚은 이의 논을 빼앗고, 소를 끌고 가던 그 노인 말입니다.
'설마…… 우리 최 영감님도 죽으면 저기로 가시는 건 아니겄지…….'
두 번째로 이른 곳은 '화탕지옥'이었습니다. 커다란 가마솥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고, 그 안에서 시뻘건 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요. 옥졸들이 긴 쇠갈고리로 사람을 건져 올렸다가, 다시 솥 안에 풍덩 빠뜨렸습니다. 녹아 없어질 듯하면 도로 살아나고, 살아나면 또 던져졌지요. 그 비명이 어찌나 처절하던지, 득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습니다.
"저기는유……?"
"성을 못 이겨 사람을 해친 자들이다. 홧김에 주먹을 휘둘러 사람을 상하게 한 자, 거짓 소문을 끓여 남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 살아서 남을 끓는 물에 넣듯 괴롭혔으니, 죽어서 제가 그 솥에 드는 게지."
세 번째는 '발설지옥'이었습니다. 앞의 두 곳과 달리 조용해서, 그래서 더 무서웠지요. 옥졸이 사람의 혓바닥을 집게로 쭉 잡아 뽑아 넓은 밭처럼 펴 놓고는, 그 위에서 소를 몰아 쟁기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혀가 밭이 되고, 그 밭이 갈아엎어지는 것이지요.
득수는 저도 모르게 제 입을 손으로 가렸습니다.
"이, 이 사람들은 뭘 잘못했대유?"
"입으로 죄를 지은 자들이다. 없는 말을 지어내어 이웃을 이간질한 자, 험한 말로 사람의 마음에 대못을 박은 자. 세상에 칼로 지은 죄만 죄인 줄 아느냐. 혀로 지은 죄가 칼보다 더 깊이 사람을 찌르느니라. 그러니 그 혀가 여기서 밭이 되는 게야."
오 차사의 이 말에, 득수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나직이 중얼거렸지요.
"지도…… 앞으로 말 함부로 안 할래유. 스님한테 심통 부린 적도 있는디……. 그런 것도 죄가 되나유?"
오 차사가 픽 웃었습니다.
"아이야, 심통 한 번이 죄가 되면 이 지옥이 열여덟만 개는 있어야 할 게다. 여기 오는 자들은 남을 아프게 하고도 끝내 미안한 줄 몰랐던 자들이야. 네가 지금 미안해하는 그 마음, 그것이 바로 지옥을 면하는 마음이니라."
네 번째로 이른 곳은 '한빙지옥'이었습니다. 앞서 본 곳들이 온통 불이었다면, 이곳은 온통 얼음이었지요. 살을 에는 바람 속에, 사람들이 발가벗은 채 얼음판 위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곁에 따뜻한 화롯불이 하나씩 놓여 있었지요.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 불을 쬐지 못했습니다. 불 앞에 투명한 벽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득수가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불이 바로 옆에 있는디 왜 못 쬐어유?"
"이곳은 인색했던 자들이 오는 곳이다. 곳간에 곡식을 그득 쌓아 두고도 굶는 이웃에게 한 톨 나누지 않은 자, 남는 것을 썩혀 버릴지언정 없는 이에게 베풀지 않은 자. 살아서 제 것을 나누지 않았으니, 죽어서 바로 곁의 온기조차 나눠 받지 못하는 게지. 저 화롯불은, 저들이 살아서 베풀었어야 할 온정이니라."
이 대목에서 득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아랫말 최 노인의 곳간, 그 굳게 채워진 자물쇠가 다시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이지요.
"아저씨. 지가 하나만 물어봐도 되남유. 여기 오는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쥬? 아직 안 죽은 사람 자리도 있남유?"
오 차사가 흠칫하더니,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어찌 그런 걸 묻느냐."
"그냥유. 궁금해서유."
오 차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한빙지옥 저 안쪽을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저리로 가 보자. 저곳에 가면 네 궁금증이 풀릴 게다."
한빙지옥 가장 안쪽에는, 아직 아무도 앉지 않은 빈 얼음자리가 여럿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마다 이름이 적힌 나무패가 하나씩 걸려 있었지요. 이대로 살면 곧 오게 될 자들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득수는 그 패들을 하나하나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자리 앞에서, 그만 숨이 턱 막히고 말았습니다.
빈 얼음자리 위에 걸린 나무패에,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연화골 최득수.'
"아저씨! 이, 이거 최 영감님 이름이여유! 지랑 이름이 같아서 지가 대신 끌려온, 바로 그 최득수 영감님이여유!"
오 차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다. 아까 명부에 적혔던 그 사람. 오늘 밤 명이 다한다던 바로 그 노인의 자리다."
"그, 그러믄 최 영감님은 죽으면 여기로 오는 거여유? 화롯불 바로 옆에서 얼어 죽는 이 추운 데로?"
"이대로 살다 죽으면 그렇게 되지. 곳간을 그득 채우고도 죽 한 그릇 내어 준 적 없는 사람이니까. 허나 아이야, 저 패는 아직 못이 박히지 않았다. 저 노인은 아직 이승에 살아 있고, 마음을 고쳐먹을 날이 남아 있다. 그래서 자리만 있고, 임자는 없는 게지."
득수는 그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자기를 향해 "밥 빌어먹는 중놈아" 하고 소리치던 얼굴, 그러면서도 어쩐지 늘 쓸쓸해 보이던 그 눈빛이 떠올랐지요.
'영감님이 나빠서 여기 오시는 게 아니라, 나눌 줄을 몰라서 오시는 거구나. 나눌 줄만 아시면 이 자리가 비는 거구나.'
득수는 그 나무패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나직이 절을 했습니다.
"영감님. 지가 이승에 돌아가믄유. 꼭 찾아뵐게유. 이 자리 안 오시게, 지가 꼭 말씀드릴게유."
오 차사가 그 어린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 검은 갓 그늘 아래로, 어쩐지 물기 같은 것이 어렸다지요.
"…가자. 지옥은 이만하면 되었다. 대왕마마께서 극락도 보이라 하셨으니."
득수는 그 빈 얼음자리를 한 번 더 돌아보고는, 오 차사의 손을 아까보다 더 단단히 쥐었더랍니다.
※ 5: 연꽃 못에서 만난 얼굴
지옥의 붉은 기운을 뒤로하고 한참을 걸으니, 공기가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쇠 냄새가 걷히고 대신 은은한 향내가 풍겨 왔지요. 발밑도 더는 뜨겁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늘하고 보드라운 무언가가 밟혔는데, 내려다보니 온통 흰 꽃잎이 깔린 길이었습니다. 어디선가 맑은 물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나직한 풍경 소리가 들려왔지요.
"아저씨, 여기는유…….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는디유."
"여기서부터가 극락이다. 지옥에서 흘린 눈물을 여기서 씻는 게지."
이윽고 눈앞이 환하게 열렸습니다. 득수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지요. 칠보로 지은 누각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습니다. 기둥은 금이요, 기와는 유리요, 처마 끝마다 옥으로 만든 풍경이 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딸랑딸랑 고운 소리를 냈습니다. 누각을 둘러싸고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에 핀 연꽃이 어찌나 크던지, 꽃송이 하나가 초가지붕만 했지요. 연꽃마다 은은한 빛을 뿜어, 물 위가 온통 별밭처럼 반짝였습니다.
"저 연꽃은유……. 무슨 꽃이 저렇게 커유?"
"저것은 왕생연화라 한다. 이승에서 착하게 산 이가 죽으면, 저 연꽃 속에서 새로 태어나는 게야. 마음이 맑을수록 더 큰 꽃에서 나고, 더 환한 빛에 싸이지."
득수가 보니, 정말로 연꽃 몇 송이가 스르르 벌어지면서 그 안에서 사람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하나같이 얼굴에 근심이 없고, 눈빛이 아이처럼 맑았지요. 그들은 서로를 보고 반갑게 웃으며, 누각을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갔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연못가 한쪽에서, 한 여인이 득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운 쪽진머리에, 흰 저고리와 옥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었지요. 나이는 서른 남짓 되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득수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렸지요.
"저……. 아주머니, 왜 우셔유?"
여인은 대답 대신, 떨리는 손으로 득수의 뺨을 어루만졌습니다. 그 손길이 어찌나 따뜻하던지, 득수는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잊고 있던 아득한 기억 하나가 마음속에서 스르르 피어올랐습니다. 세 살 적, 열병에 시달리던 자기를 밤새 품에 안고 자장가를 불러 주던 목소리. 바로 그 목소리였습니다.
"……어무이?"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 없이 웃었습니다. 눈물은 계속 흘렀지만, 그 얼굴은 세상 무엇보다 환했지요.
"우리 득수가……. 이렇게 컸구나. 이렇게 의젓하게 컸구나."
득수는 왈칵 울음이 터졌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울지 않았던 아이가, 저승길에 끌려와서도 씩씩하던 아이가, 어미 앞에서 그만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습니다.
"어무이! 어무이 보고 싶었어유! 지가 얼마나…….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러유!"
어머니는 득수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말했지요.
"안다. 다 안다. 우리 아들, 어미 없이 얼마나 서러웠을까. 그래도 이렇게 곱게 자라 줘서 고맙다. 매일 새벽 종을 치고, 물을 긷고, 병든 노파에게 제 밥을 내어 주는 우리 아들……. 어미가 여기서 다 보고 있었단다. 하루도 빠짐없이 다 보고 있었어."
"그, 그러믄 어무이가 여기 극락에 계셨던 거여유? 이 좋은 데서요?"
"그래. 어미는 가난했어도 남의 것을 탐한 적이 없고, 배고파도 이웃과 나눠 먹었단다. 그 덕에 이곳에 왔지. 그런데 이곳에 와서도 딱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어. 어린 너를 두고 온 것 말이다. 그래서 매일 저 연못가에 나와, 이승의 너를 들여다보았단다."
득수는 어머니의 품에서 한참을 울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무이. 근디 지는 지금 잘못 끌려온 거래유. 사흘 뒤에 도로 이승으로 돌아가야 한대유. 그러믄……. 지는 또 어무이랑 헤어져야 하는 거여유?"
어머니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스쳤습니다. 그러나 이내 다시 환하게 웃었지요.
"그럼. 돌아가야지. 네 명은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득수야, 슬퍼 마라. 우리는 헤어지는 게 아니란다. 네가 이승에서 착하게 살면, 그 착한 마음이 여기까지 다 전해져. 네가 남을 도울 때마다, 이 어미 연꽃이 한 뼘씩 더 환해진단다. 그러니 우리는 늘 이어져 있는 거야."
이 광경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오 차사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습니다. 검은 갓 그늘 아래로 어깨가 들썩였지요. 득수가 그것을 보고 다가갔습니다.
"아저씨. 왜 그러셔유? 어디 아프셔유?"
오 차사가 헛기침을 하며 눈가를 훔쳤습니다.
"……아니다. 그냥, 나도 이승에 두고 온 이가 있어서……."
"아저씨도유?"
오 차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습니다.
"나도 살아서는 사람이었다. 처자식이 있었지. 헌데 내가 성미가 급하고 입이 험해서……. 죽는 날까지 아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못 했다. 그게 한이 되어, 차사 노릇을 자청한 게야. 죄 없는 혼이라도 한 명 덜 데려가면, 그만큼 내 죄가 씻길까 하고."
득수는 그 말을 가만히 듣다가, 오 차사의 소매를 꼭 잡았습니다.
"아저씨. 그러믄 아저씨는 지금 아주 좋은 일을 하고 계신 거네유. 아까 삼도천에서도 지가 염불하니까 사람들 건너게 도와주셨잖어유. 아저씨 아내분도, 저 극락 어딘가에서 아저씨 보고 웃고 계실 거여유. 지 어무이가 지 보고 웃으시는 것처럼유."
오 차사가 흠칫하며 득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 눈이 붉게 젖어 있었지요. 삼백 년을 저승에서 보내며 수없이 눈물을 보았으나, 정작 자기 눈물이 이렇게 뜨거운 건 처음이었습니다.
이윽고 어머니가 득수의 손을 놓으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일렀습니다.
"득수야. 이승에 돌아가거든, 네가 본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려무나. 지옥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극락이 이렇게 따뜻하다는 걸 전해 주렴. 나쁜 짓을 겁내라 하지 말고, 착한 일이 이렇게 복이 된다고 전해 주렴. 그리고……. 아랫말 그 노인 말이다."
"최 영감님유?"
"그래. 그 노인의 얼음자리, 네가 보았지? 그 자리는 아직 비어 있어. 아직 늦지 않았다는 뜻이야. 네가 가서 손을 내밀어 보렴.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 순간까지 연꽃 하나쯤은 피울 수 있는 법이란다."
말을 마친 어머니의 모습이 서서히 빛에 감싸였습니다. 그러고는 커다란 연꽃 한 송이 속으로 스르르 스며들었지요. 그 연꽃이 어찌나 환하던지, 온 극락이 다 밝아지는 듯했습니다. 득수는 그 빛을 향해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더랍니다.
※ 6: 사흘 만에 뜬 눈, 그리고 열린 곳간
사흘이 지났습니다.
극락의 연꽃 못을 마지막으로 둘러본 뒤, 오 차사는 득수를 등에 업었습니다. 그러고는 왔던 길을 되짚어, 삼도천을 건너고 관문을 지나, 흰 안개가 자욱한 황천길을 거슬러 올랐지요.
"아저씨. 지 이제 진짜 돌아가는 거쥬?"
"그래. 눈을 감아라. 다시 눈을 뜨면 이승이니라."
"아저씨, 고마웠어유. 지 안 무섭게 해 주셔서유."
"……내가 더 고맙다, 이 녀석아. 네 덕에 내가 삼백 년 만에 처음으로 울어 봤다."
오 차사의 등이 어찌나 따뜻하던지, 득수는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아득한 종소리 하나가 들려왔지요. 그것은 새벽마다 자기가 치던 연화암의 종소리였습니다.
한편, 그 사흘 동안 연화암에서는 큰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이후로 득수가 숨을 쉬지 않았던 것입니다. 노스님이 아무리 흔들어도, 아무리 불러도 아이는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몸은 차게 식어 갔고,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졌지요. 마을 사람들이 올라와 보고는 다들 혀를 찼습니다.
"쯧쯧. 그 착한 것이 명이 짧았구먼."
"안됐네. 안됐어. 스님 혼자 얼마나 상심이 크실꼬."
노스님은 사흘을 꼬박 아이 곁을 지켰습니다. 밥도 물도 넘기지 못한 채, 그저 염주를 굴리며 앉아 계셨지요. 그러다 사흘째 되던 새벽, 마을 사람들이 마침내 다비를 준비하자며 멍석과 장작을 지고 올라왔습니다.
"스님, 이제 그만 보내 드리셔야지유. 이러다 스님 몸이 상하십니다."
노스님이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이마를 마지막으로 쓰다듬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음……. 스님, 저 물 안 길어다 놨는디……."
멍석 위에 누워 있던 득수가, 눈을 번쩍 뜬 것입니다. 노스님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마을 사람들은 장작을 내던지고 뒤로 나자빠졌습니다.
"귀, 귀신이여!"
"아니여! 살아났어! 득수가 살아났어!"
득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어나 앉았습니다. 그러고는 대뜸 이렇게 말했지요.
"스님, 지가유……. 저승엘 다녀왔어유. 지옥도 보고 극락도 보고, 우리 어무이도 만나고 왔어유."
처음에 사람들은 아이가 헛것을 보았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득수가 풀어놓는 이야기가 어찌나 생생하던지, 하나둘 입을 다물기 시작했지요. 도산지옥의 칼밭, 화탕지옥의 가마솥, 발설지옥에서 혀가 밭이 되던 광경, 그리고 인색한 자들이 가는 한빙지옥의 화롯불 이야기까지. 열두 살 아이가 지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득수는 마지막으로, 한빙지옥 가장 안쪽에서 본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디 거기 빈자리가 하나 있었는디유. 나무패에 이름이 적혀 있었어유. '연화골 최득수'라구유. 아직 못이 안 박혀서 임자는 없는 자리라구, 저승사자 아저씨가 그러셨어유."
마을 사람들이 술렁였습니다. 최득수라면 아랫말 그 인색한 최 노인이 아닙니까. 그런데 마침 그 자리에, 최 노인도 지팡이를 짚고 구경을 나와 있었습니다. 이 소란이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말이지요. 자기 이름이 나오자, 최 노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이, 이놈아! 무슨 그런 방정맞은 소리를 하느냐! 멀쩡한 사람을 잡아 놓고!"
득수는 그 앞으로 다가가,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영감님. 지가 영감님 흉보려고 하는 말이 아니어유. 그 자리는유, 아직 비어 있어유. 아직 안 늦었다는 뜻이래유. 화롯불이 바로 옆에 있는디, 나눌 줄 몰라서 못 쬐는 자리여유. 영감님은 나쁜 분이 아니라, 그냥 나눠 본 적이 없으신 것뿐이잖어유.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곳간 문을 열어 보시믄유. 그 자리가 스르르 없어질 거여유. 지 어무이가 그러셨어유.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까지 연꽃 하나쯤은 피울 수 있다구유."
최 노인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습니다. 그러더니 지팡이를 짚은 채, 아무 말 없이 마을로 내려가 버렸지요. 사람들은 저러다 아이만 미친놈 만들겠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 년 열두 달 자물쇠가 채워져 있던 최 노인의 곳간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최 노인은 종을 시켜 쌀가마를 마당에 죄다 부려 놓았습니다. 그러고는 마을 사람들을 하나하나 불러, 그동안 빼앗았던 논문서를 돌려주고, 못 갚은 빚을 모두 없던 일로 해 주었지요. 굶는 집에는 쌀을 지어다 주고, 병든 집에는 약값을 대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서 물었습니다.
"영감님, 대체 어인 일이시래유? 갑자기 왜 이러셔유?"
최 노인은 눈시울을 붉히며 이렇게 답했다지요.
"내 평생 곳간을 채우는 게 복인 줄만 알았네. 헌데 그 어린 중이 그러더군. 나눌 줄 몰라서 얼어 죽는 자리가 나를 기다린다고. 이제라도……. 이제라도 그 자리를 비워야 하지 않겠나. 죽어서 얼음 위에 앉느니, 살아서 이웃과 밥 한 그릇 나누는 게 낫지."
그 뒤로 최 노인은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마을에 흉년이 들면 제일 먼저 곳간을 열었고,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거두어 먹였지요.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쇠불알 최 영감'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연화골 부처님'이라 불렀더랍니다. 그리고 최 노인은 그로부터 십수 년을 더 살다가, 아주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지요.
득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뒤로 훌륭한 스님이 되었습니다. 팔도를 다니며 자기가 본 저승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했지요. 겁을 주려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착하게 살면 어머니처럼 저 환한 연꽃 속에 다시 난다는, 따뜻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들이 하나둘 마음을 고쳐먹으니, 세상이 조금씩 밝아졌더랍니다.
훗날 사람들이 득수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스님, 저승에서 본 것 중에 가장 무서운 게 무엇이었습니까?"
득수 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지요.
"지옥의 칼산도 아니고, 끓는 가마솥도 아니었소. 가장 무서운 건, 바로 옆에 온기를 두고도 나눌 줄 몰라 얼어붙은 그 빈자리였소. 허나 가장 다행인 것도 그것이었지. 그 자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언제든 비울 수 있으니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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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하나 잘못 적힌 저승사자의 실수가, 한 마을을 통째로 바꿔 놓았습니다. 어린 동자승 득수가 저승에서 본 것은 무서운 형벌이 아니라, 온기를 곁에 두고도 나눌 줄 몰라 얼어붙은 빈자리였지요. 그리고 그 자리는, 살아 있는 동안엔 누구나 비울 수 있다는 것. 오늘 우리 곳간의 자물쇠는 어디에 채워져 있는지, 한 번쯤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이야기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좋아요'와 '구독'으로 함께해 주세요. 다음 저승야담에서 또 뵙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