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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의 왕도 포기한 죽음의 진실

    태그 (Ta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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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Hook)

    스스로 목숨을 끊은 죄보다 더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 염라대왕의 불호령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여인. 그녀의 죄를 비추던 업경대가 산산조각 나고, 지옥의 판관들이 붓을 던지니, 과연 그 불가사의한 죽음 뒤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디스크립션 (Description)

    조선 시대, 해동잡록에 기록된 기이한 이야기.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옥에 끌려온 여인 '연실'. 마땅히 가장 끔찍한 형벌을 받아야 할 그녀 앞에서 저승의 법도가 무너져 내립니다. 염라대왕마저 심판을 포기하게 만든 그녀의 삶! 죄와 벌의 경계를 무너뜨린 위대한 사랑과 희생. 과연 인간의 어떤 마음이 하늘의 법도마저 거스를 수 있는지, 그 감동적인 마지막 재판이 시작됩니다.

    ※ 저승길, 명부전 앞

    길의 끝도, 시작도 없는 망망한 어둠의 길. 산 자의 숨결은 단 한 올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저승길 위를, 한 여인이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녀의 앞과 뒤에서는, 창백한 얼굴의 저승차사 둘이 마치 죄인을 압송하듯 그녀를 이끌고 있었다. 여인의 손목에는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으나,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죄인에게서 마땅히 느껴져야 할 두려움이나 절망감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담담하고 평온하여, 마치 오랜 여정 끝에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나그네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 기묘한 평온함이, 수천의 망자를 다뤄온 베테랑 차사들마저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앞에서 길을 이끌던 연륜 깊은 차사가 뒤따르던 젊은 차사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여보게, 저 여인에게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가?" 젊은 차사가 답했다. "사수님, 저 역시 그러합니다. 분명 스스로 목숨을 끊어 천륜을 어긴 대죄인인데, 어찌 저리 평온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통 이런 죄인들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지독한 원한을 품어, 그 영혼에서 시체 썩는 악취가 나기 마련인데 말입니다."

    연륜 깊은 차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일세. 저 여인의 영혼을 보고 있노라면, 지은 죄의 무게에 짓눌려 어두컴컴해야 마땅하거늘, 어찌하여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저리 맑고 따스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인지… 내 수백 년 차사 노릇에 이런 영혼은 처음일세. 마치… 마치 갓 피어난 연꽃 위에 맺힌 아침 이슬 같구나. 죄의 흙탕물 속에서 피어났으되,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은 저 순수한 빛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의 수군거림에도 아랑곳없이, 여인은 그저 곧은 자세로 걷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연실'이라 불렸던 여인이었다. 살아생전 박복하기 그지없었으나,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도 평화로웠던 여인.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거대한 성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 세상의 그 어떤 권세가의 대문보다도 웅장하고 위압적인, 염라대왕의 법정인 명부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문 앞에는 수많은 죄인들이 자신의 죄의 무게에 짓눌려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옥졸들에게 짐승처럼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영혼에서는 하나같이 시커먼 연기와 같은 악업의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연실이 문 앞에 다다르자, 실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문을 지키던 험상궂은 귀신 병졸들이 그녀의 영혼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가사의한 빛에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길을 비켜선 것이다. 그들의 손에 들린 시뻘건 쇠몽둥이가 마치 한낮의 태양을 마주한 얼음처럼 스르르 녹아내릴 듯했다. 연실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발로 당당하게 지옥의 문턱을 넘어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두 차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앞으로 벌어질 재판이 결코 평범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한낱 여인의 영혼이, 감히 지옥의 질서를, 저승의 법도를 뒤흔들고 있었다. 명부전 앞에 당도하자, 육중한 문이 끼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에서는 수천수만 죄인들의 원혼이 내뿜는 한기와 절망감이 칼바람처럼 몰아쳐 나왔다. 보통의 영혼이라면 그 기세에 눌려 형체도 없이 흩어져 버렸을 테지만, 연실은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그 바람을 맞으며 법정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담담한 발걸음 소리가, 쥐 죽은 듯 조용한 명부전 안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 모인 저승의 모든 존재들이, 숨을 죽인 채 이 불가사의한 여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 명부전(冥府殿)

    명부전 안은 실로 장엄하고도 공포스러웠다. 좌우로는 인간의 죄업을 낱낱이 기록하는 판관들이 서릿발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법정의 가장 높은 옥좌에는 지옥의 군주인 염라대왕이 거대한 그림자처럼 앉아 있었다. 그의 깊고 어두운 눈빛은 세상의 모든 비밀과 거짓, 인간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욕망까지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연실은 그 지엄한 권위 앞에 끌려 나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위축되거나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오히려 맑고 투명한 눈으로 옥좌의 염라대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당돌한 모습에 판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수석 판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루마리를 펼쳐 들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무릎 꿇은 죄인 연실은 듣거라! 네게 주어진 삶은 하늘의 명이요, 부모가 주신 귀한 선물이거늘, 어찌하여 감히 스스로 목숨을 끊어 천명을 거역하였느냐! 이는 너를 낳아주신 부모님과 조상님들께 씻을 수 없는 누를 끼친 불효의 죄요, 하늘의 질서를 어지럽힌 오역죄에 버금가는 대죄이니라! 마땅히 발설지옥과 도산지옥을 두루 거친 뒤, 영원히 빛이 들지 않는 무간지옥에 떨어져 고통받아야 할 것이다! 대왕이시여, 저 죄인을 어서 국법에 따라 엄히 다스리소서!"

    수석 판관의 말이 끝나자, 다른 판관들도 모두 입을 모아 연실을 벌해야 한다고 외쳤다. "천륜을 어긴 죄인을 용서할 수는 없사옵니다!", "저승의 법도를 바로 세우셔야 하옵니다!" 명부전의 공기가 금방이라도 연실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버릴 듯 험악해졌다. 그러나 옥좌에 앉은 염라대왕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깊은 눈으로 연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수억의 영혼을 심판해왔지만, 이토록 담담한 눈빛을 가진 죄인은 본 적이 없었다. 보통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영혼들은 지독한 후회와 원망, 그리고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형체조차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연실의 영혼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평화와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가뭄 끝에 단비를 내리고 장렬히 흩어지는 비구름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하여 무언가 위대한 일을 끝마친 존재처럼. 염라대왕의 육중한 목소리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 울려 퍼졌다. "…고요하구나. 네년의 영혼은, 폭풍이 지나간 뒤의 새벽 바다처럼 고요해. 어찌하여 죽음의 공포도, 지옥의 형벌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냐."

    연실은 조금도 떨지 않고 맑은 목소리로 답했다. "대왕이시여. 소인은 죄를 지었사오니, 그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나이다. 하오나, 두려움은 없습니다. 소인은 이승에서 이미 한 아이의 어미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과 가장 큰 슬픔을 모두 맛보았고, 제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바라던 것을 제 두 손으로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염라대왕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바라던 것을 이루었다? 죽음으로써 무언가를 이루었단 말이냐. 요망한 것. 좋다. 네년의 그 오만한 혀가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보겠다. 여봐라! 저기 업경대를 가져와 저 여인의 삶을 낱낱이 비추어라! 저 여인이 말하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그 죽음의 진실이 무엇인지, 이 자리에서 모두가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 염라대왕의 명이 떨어지자, 인간의 모든 눈물이 모여 만들어졌다는 거대한 구리 거울, 업경대가 법정의 한가운데로 옮겨졌다. 거울은 이내 스스로 빛을 발하며, 연실의 기구했던 일생을 남김없이 비추기 시작했다. 지옥의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거울 속에서 펼쳐지는 한 여인의 삶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업경대 속 과거

    업경대의 표면이 맑은 호수처럼 일렁이더니, 이내 한 장면을 비추기 시작했다. 낡고 볕이 잘 들지 않는 어느 초가집의 방 안이었다. 방 안에는 약초 달이는 냄새와 병자의 거친 숨소리가 가득했다. 갸름한 얼굴의 연실이, 지금보다 훨씬 앳되고 생기 넘치던 모습으로 앓아누운 어린 아들의 이마를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열에 들떠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들썩이며 쇳소리가 났다. 연실은 자신의 끼니는 며칠째 거른 채, 어떻게든 아들의 입에 미음이라도 떠 넣으려 애썼지만, 아이는 그것마저 삼키지 못하고 거친 기침과 함께 모두 토해냈다. 연실의 눈에는 이미 눈물마저 마른, 깊은 절망감이 서려 있었다. 지옥의 판관들은 저마다 혀를 찼다. 어미의 정이야 가상하지만, 저런 가난과 질병은 인간 세상에 흔한 비극일 뿐, 그것이 그녀의 죄를 덮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화면은 바뀌어, 연실이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가 애원하는 모습이 비쳤다. "의원 나리, 제발… 제발 우리 아이 좀 살려주십시오. 집안에 있는 것이라곤 이것뿐이지만, 이것이라도 받으시고 제발…." 연실은 자신이 시집올 때 받아온 유일한 패물인 작은 은가락지를 내밀었다. 그러나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부인, 안타깝지만 아이의 병은 하늘의 뜻입니다. 아이의 몸속에서 생명의 불꽃 자체가 사그라들고 있습니다. 이미 백약이 무효한 상태이니, 이제 그만 마음을 정리하시는 것이…." 의원의 말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연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그녀의 울음소리는 보는 이의 마음마저 아프게 할 만큼 처절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유명한 절을 찾아가 불상 앞에서 이마에 피가 나도록 삼천 배를 올리기도 하고, 영험하다는 굿당을 찾아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바치며 빌기도 했다. 그러나 아들의 병세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이제는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에서 약초를 구하려 넋을 놓고 있던 연실에게 한 노인이 다가왔다. 행색은 남루했으나 눈빛만은 범상치 않은 노인이었다. "아들을 살리고 싶은가." 노인의 말에 연실은 미친 사람처럼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다. "네, 네! 제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습니다! 제발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제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노인은 연실을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아이의 병은 단순한 병이 아니라, 생명의 기운 자체가 꺼져가는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약초로도 그 불씨를 되살릴 수는 없지. 오직 하나의 방법밖에는 없느니라."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미의 생명. 어미의 영혼과 생명력을 스스로 녹여내어 약으로 만들어 먹이는 것이다. 끓어오르는 모정의 피와,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을 함께 달여내야 비로소 약이 완성되지. 허나, 이것은 하늘의 순리를 거스르는 비방이라, 그 대가는 어미가 죽어서 가장 큰 죄인이 되는 것이니… 그래도 하겠는가?" 노인의 말은 실로 기괴하고 무서웠다. 그러나 연실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마침내 길을 찾았다는 듯 결연한 빛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노인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업경대를 지켜보던 판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 설마 저 여인이 정말로… 그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업경대의 화면은 연실이 아들을 업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 업경대 속 과거

    업경대 속 화면은 깊고 고요한 산 중턱을 비추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잠든 듯, 오직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아들의 옅은 숨소리와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만이 가득한 곳이었다. 연실은 그곳, 가장 깨끗하고 평평한 바위 위에, 곤히 잠든 아들을 눕혔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 아이를 겹겹이 덮어주고, 차갑게 식어버린 아이의 작은 손과 발을 자신의 입김으로 녹이고 또 녹여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 이상 슬픔이나 절망의 빛이 없었다. 오히려 무언가 성스럽고 장엄한 의식을 치르는 사제처럼, 비장하고도 평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녀는 잠든 아들의 얼굴을 한참 동안, 마치 그 모습을 제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영원히 새기려는 듯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들의 까만 눈썹, 오똑한 코, 앙다문 작은 입술.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자신의 세상 전부였던 아이. "아가야… 내 아가야…." 연실은 아들의 뺨을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어미는 이제 너와 함께 갈 수 없구나. 허나, 슬퍼하지 마라. 어미는 그저 네 몸속으로 들어가, 너의 일부가 되는 것일 뿐이니. 앞으로 너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네가 걷는 모든 길, 네가 꾸는 모든 꿈속에서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네가 처음 글을 배울 때, 어미는 너의 눈이 되어 줄 것이고, 네가 훗날 장가를 가 어여쁜 아내를 맞을 때, 어미는 따스한 바람이 되어 너희를 축복해 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아비를 닮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으면, 어미는 밤하늘의 달이 되어 너희 가족의 앞날을 환하게 비춰주마."

    그녀는 품에서 작은 은장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끝을 베었다. 선홍빛 피가 방울져 떨어지자, 그녀는 그 피를 미리 준비해온 깨끗한 옥그릇에 받기 시작했다. 노인이 일러준 비방이었다. '어미의 피는 단순한 피가 아니라, 생명의 정수이니, 그것을 약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그 피에, 자식을 위해 흘리는 어미의 눈물이 더해져야 비로소 약이 완성된다.' 피가 그릇에 차오르는 동안, 연실은 조금도 고통스러운 기색 없이, 오히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에게 마지막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자거라, 우리 아가. 앞뜰에 복숭아꽃 활짝 피었네… 네가 무럭무럭 자라서, 저 꽃처럼 환한 사람이 되려무나…."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기운을 잃어갔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져 갔다. 마침내 그릇이 피로 가득 차자,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품속에서 작은 약초 꾸러미를 꺼냈다. 그것은 그녀의 눈물과 간절한 기도를 먹고 자란다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영초(靈草)였다. 그녀가 약초를 피가 담긴 그릇에 넣자, 놀랍게도 피가 끓어오르며 붉은빛 대신 맑고 영롱한 금빛 액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살릴 생명의 약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연실은 완성된 약을 아들의 입에 조심스럽게 흘려 넣었다. 약이 들어가자,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아이의 얼굴에 서서히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거칠던 숨소리가 고르게 바뀌고, 차갑게 식었던 몸에 온기가 퍼져나갔다. 그 모습을 본 연실의 입가에 마침내 완전한 행복의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아들을 품에 꼭 껴안았다. "사랑한다… 내 아가야… 다음 세상에서도… 꼭 어미의 아들로 태어나주렴…."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의 몸이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한 줄기 눈부신 빛이 되어 아들의 몸속으로 스며들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업경대의 화면은, 깊은 산속에서 평화롭게 잠든 아이의 모습과, 그 주위를 맴도는 따스한 햇살을 마지막으로 비추며 고요해졌다. 연실은 자신의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아들의 생명으로 온전히 옮긴 것이었다.

    ※ 명부전(冥府殿)

    업경대의 빛이 스러지자, 명부전 안에는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멎은 듯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누구도, 심지어 지옥의 판관들조차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죄인을 향한 분노나 경멸 대신, 인간의 가장 숭고한 행위를 목격한 자의 경외와 깊은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수석 판관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자신도 모르게 툭, 떨어뜨렸다. 죄인의 죄목을 기록해야 할 붓이, 차마 그 숭고한 희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한참의 침묵 끝에, 한 젊은 판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왕이시여… 이, 이를 어찌 판결해야 하옵니까. 저 여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천륜을 어긴 것은 명백한 죄이오나… 그 동기는… 그 동기는 죽어가는 자식을 살리기 위한 지극한 사랑이었나이다. 이는… 이는 자신의 몸을 던져 굶주린 호랑이를 구제한 석가모니의 행적과도 같은, 보살의 행이 아니옵니까!" 그러자 법도를 중시하는 늙은 판관이 반박했다. "아니 되오! 아무리 동기가 숭고하다 한들, 스스로 생을 저버리는 것은 저승의 법도를 어지럽히는 대죄이다! 만약 저 여인을 벌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승의 모든 인간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대며 함부로 목숨을 끊으려 할 것이니, 이는 세상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 될 것이오! 법도는 만인에게 평등해야 하며, 예외가 있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판관들의 의견이 엇갈리며 법정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떤 이는 그녀를 가장 깊은 지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떤 이는 그녀를 극락으로 보내 상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죄와 벌, 선과 악의 경계가 한 여인의 모정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 저승의 법도는 수만 년 동안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으나, 연실의 삶 앞에서는 그저 무력한 문자에 불과했다. 소란이 극에 달했을 때, 옥좌에 앉아 있던 염라대왕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염라대왕은 법정의 모든 이들을 둘러본 뒤, 나지막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하거라. 모두 틀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고뇌가 담겨 있었다. "저 여인의 행위는, 선도 악도 아니다. 죄도 공덕도 아니다. 그것은… 이성과 법도로는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어미의 마음, 그 자체였다."

    염라대왕은 옥좌에서 내려와, 무릎 꿇고 있는 연실의 영혼 앞에 섰다. 지옥의 왕이, 죄인의 영혼 앞에 스스로 내려온 것은 저승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연실이라 하였느냐. 나는 너를 심판할 수 없다. 내가 관장하는 지옥의 형벌로는 네 숭고한 희생에 티끌만 한 상처도 낼 수 없으며, 내가 줄 수 있는 극락의 복락으로는 네 위대한 사랑에 대한 보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옥은 이기심을 벌하는 곳이고, 극락은 이타심을 상주는 곳이다. 허나, 자식을 위한 어미의 마음은 이기심과 이타심의 경계마저 넘어선, 그보다 더 근원적인 우주의 섭리이니… 나의 법도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구나. 너의 사랑은, 이 저승의 법도보다도 더 위에 있구나." 염라대왕은 깊은 한숨과 함께 선언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지옥의 왕으로서의 판결을… 포기하노라." 그 선언에 모든 판관과 옥졸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승의 절대자가, 심판을 포기한 것이다. 한 여인의 위대한 모성애가, 마침내 지옥의 왕을 무릎 꿇게 만든 순간이었다.

    ※ 삼도천 나루터

    심판을 포기한 염라대왕의 고뇌는 깊었다. 연실의 영혼을 이대로 저승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죄인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극락으로 보내기에는 스스로 목숨을 버린 선례를 남길 수 없었다. 오랜 침묵 끝에, 염라대왕은 마침내 마지막 결단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층 더 장엄했다. "연실의 영혼에 새로운 명을 내리노라. 저 영혼은 죄의 대가를 치르지도, 공덕의 상을 받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업보에 따라 다음 생을 기약하는 윤회의 수레바퀴에도 들지 않을 것이다." 판관들이 숨을 죽이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연실의 영혼은 다시 이승으로 돌아가라. 허나,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이 아니다. 너는 이제부터 네 아들의 수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그의 곁을 맴돌며 그를 지켜주는 '그림자 어미' 즉, 수호신(守護神)이 될 것이다. 이는 벌도 상도 아닌, 네가 스스로 이루어낸 위대한 사랑에 대한 나의 마지막 경의이니라. 가서, 네가 목숨으로 피워낸 그 삶이 얼마나 아름답게 자라나는지, 네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거라." 실로 파격적인 판결이었다. 지옥도, 극락도 아닌 제3의 길. 오직 한 영혼만을 위해 저승의 법도가 새로 쓰이는 순간이었다. 연실은 아무 말 없이, 눈물 어린 미소를 지으며 염라대왕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저승차사들은 경외심이 가득한 눈으로 연실의 영혼을 이끌고 삼도천 나루터로 향했다. 그녀가 강을 건널 때, 죄인들이 건너는 탁한 흙탕물 강이 아닌, 극락으로 향하는 영혼들이 건너는 맑고 투명한 유리처럼 강물이 변했다. 강의 양편에서는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나 그녀의 앞길을 축복했다. 연실의 영혼은 마침내 강을 건너, 한 줄기 따스한 햇살이 되어 이승으로 돌아갔다. 그 후, 이승의 아이는 기적처럼 병석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훗날 나라의 큰 동량이 되는 훌륭한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평생 동안 이유를 알 수 없는 따뜻함과 평온함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고 느꼈다. 추운 겨울밤에는 누군가 이불을 덮어주는 듯한 포근함에 잠에서 깼고, 어려운 시험을 앞두고는 꿈속에서 다정한 어머니의 격려를 듣기도 했다. 소년 시절, 높은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에는 마치 부드러운 바람이 자신을 감싸 안아주듯 상처 하나 없이 땅에 내려앉는 기이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었지만, 단 한 순간도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 적이 없었다. 연실은 비록 인간의 몸은 잃었지만,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의 곁에서, 그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함께하며 영원한 기쁨을 누렸다. 지옥의 왕도 심판하지 못한 그녀의 사랑은, 그렇게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아 숨 쉬게 된 것이다.

    유튜브 엔딩멘트

    어미의 사랑은 지옥의 법도보다 위에 있고, 하늘의 뜻보다 깊었습니다. 해동잡록이 전하는 이 이야기는, 우리네 삶에서 가장 위대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한 노부부의 애틋한 사연입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가, 남편을 저승길로 인도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찾아옵니다. 과연 그들이 나눈 마지막 대화는 무엇이었을까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나눈 마지막 대화',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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