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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기는 저승사자 숨겨준 농부 [청구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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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300자 미만)
폭풍우 치는 밤, 가난한 농부의 집에 검은 도포의 사내가 뛰어듭니다. 억수 같은 비를 맞고도 옷 한 자락 젖지 않은 사내. 그의 정체는 놀랍게도 저승에서 쫓기는 저승사자였습니다. 죽은 이를 데려가는 저승사자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승의 추포 신장들에게 쫓기는 걸까요? 농부가 내어놓은 마지막 보리밥 한 그릇이 만들어 낸 기적. 죽음의 사자와 가난한 농부의 이틀간의 동거가 지금 시작됩니다.
※ 1: 폭풍우 치는 밤의 손님
조선 인조 임금 시절, 강원도 두메산골에 덕보라는 가난한 농부가 살았더랍니다. 나이 마흔에 아내와 어린 아들 하나를 둔 덕보는, 남의 땅을 부쳐 먹는 소작농이었지요. 한 해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절반은 지주에게 바치고 나면, 남는 것이라고는 보리쌀 몇 가마니가 고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요. 그렇게 가난한 덕보네 집에는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왜냐고요? 덕보의 마음씨 때문이었습니다.
"여보게 덕보, 자네도 먹을 게 없으면서 왜 자꾸 남을 퍼 주는가?"
"허허, 이 사람아. 배고픈 설움을 아는 놈이 배고픈 사람을 못 본 척하면, 그게 사람인가."
지나가는 나그네가 하룻밤 재워 달라 하면 군말 없이 아랫목을 내주고, 거지가 문 앞에 서면 제 밥그릇의 보리밥을 반으로 덜어 주는 사람. 그것이 덕보였습니다. 아내 순덕이도 남편을 닮아 인정이 많았지요. 다만 어린 아들 놈이 배를 곯을 때면, 순덕이는 남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습니다.
'우리 식구 먹을 것도 없는데... 그래도 저 양반 마음씨를 어찌 말리겠나. 저 마음씨 하나 보고 시집온 것을.'
그러던 어느 해 가을이었습니다. 그해는 유난히 흉년이 들어, 덕보네 형편도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웠습니다. 곳간은 텅 비었고, 남은 것이라고는 보리쌀 한 됫박이 전부였지요. 그런데도 덕보는 며칠 전 마을에 돌림병으로 부모를 잃은 이웃집 아이들에게 그나마 있던 좁쌀 반 자루를 들려 보냈습니다. 순덕이가 한숨을 쉬며 말렸지만, 덕보의 대답은 한결같았지요.
"여보, 우리는 어른이니 하루 이틀 굶어도 살지만, 어린것들은 굶으면 죽네. 사람 목숨보다 귀한 곡식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바로 그날 밤이었습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밤이었지요. 천둥이 산을 쪼갤 듯 울고, 번개가 밤하늘을 찢을 때마다 문풍지가 파르르 떨었습니다.
덕보네 세 식구는 호롱불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쿵. 쿵. 쿵.
누군가 사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폭풍우 치는 밤에, 이 깊은 산골에 누가 찾아온단 말입니까. 순덕이가 겁먹은 얼굴로 남편의 소매를 붙잡았지요.
"여, 여보. 이 밤중에 누구겠어요. 산짐승이면 어쩌지요."
"산짐승이 문을 두드리겠는가. 필시 길 잃은 나그네일 것이네."
덕보가 문을 열자, 비바람과 함께 한 사내가 마당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행색이 참으로 기이했습니다. 머리에는 검은 갓을 쓰고, 몸에는 먹물보다 검은 도포를 둘렀는데, 이상하게도 그 억수 같은 비를 맞고도 옷이 하나도 젖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희고, 그믐밤처럼 깊은 두 눈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지요.
"주인장... 부탁이 있소. 하룻밤만, 아니 반나절만 이 몸을 숨겨 주시오."
목소리는 우물 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낮고 서늘했습니다. 순덕이는 등골이 오싹해져 아이를 끌어안았습니다.
'저, 저 사람... 사람이 맞는가. 비를 맞고도 젖지 않다니.'
보통 사람 같으면 문을 쾅 닫아걸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덕보는 달랐습니다. 그는 사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지요. 그 깊은 눈 속에 서린 것은 분명 다급함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쫓기는 자의 눈빛. 덕보는 그것을 알아보았습니다.
"뉘신지는 모르오나, 사정이 있어 보이는구려. 들어오시오. 누추하지만 비바람은 피할 수 있을 것이오."
"주인장... 내가 누군지 묻지도 않고 들이는 것이오? 나를 숨겨 주면 주인장에게 화가 미칠지도 모르는데."
"허허, 쫓기는 사람더러 통성명부터 하자면 그게 어디 사람의 도리요. 화가 미치고 아니고는 하늘이 정할 일. 어서 드시오, 비바람이 차오."
사내는 잠시 덕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 창백한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지요. 놀라움 같기도 하고, 서글픔 같기도 한 표정이었습니다.
사내가 방 안에 들어서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호롱불이 저 혼자 파랗게 흔들리더니, 방 안 공기가 얼음장처럼 서늘해진 것입니다. 아랫목에서 자던 아이가 갑자기 깨어나 울음을 터뜨렸고, 마당의 누렁이는 꼬리를 만 채 헛간 구석으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역시... 예사 손님이 아니구나.'
덕보도 그쯤 되니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아내에게 일렀지요.
"여보, 남은 보리밥이 있거든 상을 좀 차려 주시게. 손님이 먼 길을 오신 모양이니."
순덕이는 떨리는 손으로 부엌에 나가 상을 차렸습니다. 보리밥 한 그릇에 된장 한 종지, 김치 한 보시기가 전부인 초라한 상이었지만, 그것은 내일 아침 세 식구가 먹을 마지막 양식이었지요.
사내는 그 상을 받아 들고 한동안 말없이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직이 물었습니다.
"주인장. 이것이... 이 집의 마지막 양식이 아니오?"
덕보가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지요.
"별말씀을. 산 입에 거미줄 치겠소? 내일은 내일의 밥이 생기는 법이라오. 어서 드시오. 식으면 맛이 없소."
그 말에 사내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습니다. 그리고 사내는 수저를 들어 보리밥을 한 술, 두 술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덕보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내가 밥을 먹는데, 이상하게도 밥이 줄지 않는 것 같았거든요. 마치 밥의 냄새와 김만 거두어 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쾅! 쾅! 쾅!
사립문이 부서질 듯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그리고 천둥소리보다 더 우렁운 목소리가 빗줄기를 뚫고 들려왔지요.
"이 집에 숨어든 자가 있음을 안다! 문을 열어라!"
사내의 얼굴이 백지장보다 더 하얗게 질렸습니다. 그가 덕보의 팔을 붙잡고 속삭였지요.
"주인장, 저들이오. 나를 쫓는 자들이 기어이 여기까지 왔소."
※ 2: 뒤주 속의 비밀
"이 집에 숨어든 자가 있음을 안다! 문을 열어라!"
문밖의 호통 소리에 온 집이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검은 도포의 사내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지요. 덕보는 침착하게 방 안을 둘러보았습니다. 좁은 단칸방에 숨을 곳이라고는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때 덕보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바로 방 한구석에 세워 둔 낡은 뒤주였습니다. 흉년에 곡식이 떨어져 텅텅 빈, 바로 그 뒤주였지요.
"손님, 어서 이 안으로!"
사내가 뒤주 속에 몸을 웅크리고 들어가자, 덕보는 뚜껑을 덮고 그 위에 아무렇지 않게 이불 보따리를 얹었습니다. 그리고 순덕이에게 눈짓을 했지요.
"여보, 당신은 아이를 안고 자는 척하시게. 무슨 일이 있어도 입을 열지 마시고."
덕보가 방문을 열고 나가자, 마당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시커먼 관복 차림에 붉은 띠를 두른 장정 둘이 우뚝 서 있는데, 그 키가 지붕에 닿을 듯했고, 부릅뜬 눈에서는 시퍼런 불빛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괴이하게도, 그 억수 같은 빗줄기가 그들의 몸에 닿기도 전에 척척 비껴가는 것이었습니다.
'저승의 나졸들이로구나... 소문으로만 듣던.'
덕보는 오금이 저렸지만, 이를 악물고 태연하게 허리를 굽혔습니다.
"이 밤중에 뉘신지요. 보시다시피 찢어지게 가난한 농가올시다."
"우리는 명부의 명을 받들어 죄인을 쫓는 신장이다. 죄인의 자취가 이 집 앞에서 끊겼다. 검은 도포에 검은 갓을 쓴 자를 보았느냐!"
"검은 도포에 검은 갓이라... 글쎄올시다. 이 산골에 갓 쓴 양반이 오실 일이 있겠습니까요. 저녁부터 식구들과 방에만 있어서 본 것이 없습니다만."
키 큰 신장이 덕보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시퍼런 눈빛이 덕보의 낯을 뚫을 듯이 파고들었지요.
"인간, 거짓을 고하면 어찌 되는지 아느냐. 명부를 속인 죄는 삼대가 짊어지느니라."
덕보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삼대가 짊어진다... 아이고, 내 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아내와 자식까지 있는 몸이.'
하지만 그 순간, 덕보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아까 그 사내의 눈빛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딘가 슬퍼 보이던 그 깊은 눈. 그리고 마지막 보리밥상 앞에서 가늘게 떨리던 그 어깨.
'모르겠다. 흉악한 죄인의 눈빛은 아니었어.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면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덕보는 허리를 더 깊이 굽히며 말했습니다.
"나으리들, 소인이 어찌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정 못 미더우시면 집 안을 살펴보시지요. 보시다시피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이 전부인 집이올시다."
이것은 실로 목숨을 건 도박이었습니다. 두 신장은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방문이 벌컥 열리자, 아이를 안고 누워 있던 순덕이가 부스스 일어나는 시늉을 했지요. 신장들의 시퍼런 눈이 방 안 구석구석을 훑었습니다. 천장을 보고, 벽장을 열고, 이불을 들추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신장의 눈길이 구석의 뒤주에 가서 멎었습니다.
"저것은 무엇이냐."
덕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껄껄 웃었지요.
"뒤주올시다. 곡식을 담는 뒤주인데, 보시다시피 흉년이라 텅 빈 지 오래입니다. 쥐새끼 한 마리 안 들어 있습죠. 열어 보시겠습니까?"
덕보는 오히려 성큼 다가가 뒤주 뚜껑에 손을 얹었습니다. 손끝이 떨렸지만, 목소리만은 태연했지요. 신장은 뒤주를 뚫어져라 노려보았습니다.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순덕이는 아이를 끌어안은 채 숨도 쉬지 못했지요.
'하늘이시여, 굽어살피소서. 제 남편이 사람 하나 살리자고 저러는 것이니, 부디...'
신장이 한 걸음, 두 걸음 뒤주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마룻바닥이 그 무게에 삐걱삐걱 울었습니다. 시퍼런 눈빛이 뒤주 바로 앞까지 이르렀을 때, 덕보는 눈을 질끈 감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습니다.
'열겠다면 열어야지. 하지만 저 손이 뚜껑에 닿기 전까지는, 나는 끝까지 태연해야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뒤주 코앞까지 다가온 신장이 코를 킁킁거리더니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었습니다.
"흠... 이상하군. 이 집에서는 온통 사람 사는 냄새뿐이다. 밥 냄새, 된장 냄새, 아이 냄새... 저승의 기운이 느껴지질 않아."
여러분, 나중에 알게 된 일입니다만, 여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답니다. 아까 그 사내가 덕보네 보리밥을 받아먹지 않았습니까. 저승의 존재가 인간이 정성으로 차려 준 밥, 이른바 사잣밥을 얻어먹으면, 한동안 그 몸에서 산 사람의 밥 냄새가 나서 저승의 기운이 감추어진다지요. 덕보가 아무것도 모르고 차려 준 마지막 보리밥 한 그릇이, 사내의 목숨을 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자. 자취를 잘못 짚은 모양이다. 산 아랫마을을 뒤져 보자."
두 신장은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덕보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지요. 다리가 후들거려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윽고 뒤주 뚜껑이 스르르 열리고, 검은 도포의 사내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사내는 덕보 앞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렸습니다.
"주인장,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목숨을 걸고 나를 지켜 주었구려."
"허허, 절은 무슨. 그나저나 손님, 이제는 말씀해 주시지요. 대체 뉘시기에 저런 무시무시한 분들에게 쫓기는 것입니까."
사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고개를 들었는데, 그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지요.
"주인장, 놀라지 마시오. 나는... 나는 저승사자요."
※ 3: 사자가 쫓기는 사연
"저, 저승사자라고요?"
방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순덕이는 까무러칠 뻔했고, 덕보도 입이 딱 벌어졌지요. 짐작은 했지만, 막상 제 입으로 밝히니 그 무게가 달랐던 것입니다.
"그렇소. 나는 염라대왕의 명을 받아 수명이 다한 사람의 혼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저승사자. 이 일을 맡은 지 어언 삼백 년이 되었소."
"하, 하오면 어찌하여... 저승사자께서 저승의 신장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셨단 말입니까."
저승사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한숨이 어찌나 깊은지, 호롱불이 다 흔들릴 지경이었지요.
"들어 보시오, 주인장. 열흘 전의 일이오. 나는 명부에 적힌 대로 아랫고을 어느 여인의 혼을 데리러 갔소. 나이 스물여섯의 젊은 아낙이었지."
"그런데 그 집에 당도해 보니... 여인은 병들어 누운 몸으로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소. 지아비는 이태 전에 세상을 떠났고, 시부모도 친정 부모도 없는 혈혈단신. 그 여인이 눈을 감으면, 갓난것은 이 세상에 온전히 혼자 남는 것이었소."
"저런, 저런..."
"여인은 나를 보자마자 모든 것을 알아차렸소.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내 모습이 보이는 법이니. 그런데 그 여인이 울며불며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갓난것을 품에 안고 조용히 이러는 것이오. '사자님, 소녀 목숨이 아까워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이레만, 딱 이레만 말미를 주십시오. 이 아이를 받아 줄 절간이 산 너머에 있다 들었습니다. 이 몸이 기어서라도 아이를 그곳에 데려다 놓고, 그다음에는 군말 없이 따라가겠나이다.' 하고 말이오."
호롱불이 지지직 소리를 내며 흔들렸습니다. 순덕이는 어느새 제 아이를 꼭 끌어안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지요.
"삼백 년이오, 주인장. 삼백 년 동안 나는 수만 명의 혼을 데려갔소. 우는 사람, 매달리는 사람, 원망하는 사람... 다 보았소. 명부의 법은 추상같아서, 나는 단 한 번도 정해진 때를 어긴 적이 없었소. 그런데..."
사자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차마 그 여인의 혼줄을 끊을 수가 없었소. 어미 품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젖을 빠는 갓난것의 얼굴을 보는 순간, 삼백 년 동안 얼음장 같던 이 가슴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단 말이오."
"하여... 어찌하셨습니까."
"이레의 말미를 주었소. 명부에 적힌 시각을 어기고, 내 마음대로 말이오."
덕보 내외는 숨을 죽였습니다. 저승의 법도를 잘은 모르지만,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지요. 이승으로 치면, 어명을 어긴 것과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명부의 법에 따르면, 정해진 시각에 혼을 거두지 못한 사자는 직무를 저버린 죄로 잡혀가 벌을 받소. 저 신장들은 죄인이 된 사자를 쫓는 추포사자들이오."
"아이고, 이런... 하오면 그 여인은, 그 아기는 어찌 되었습니까?"
"여인은 지금 산길을 오르고 있을 것이오. 병든 몸으로 아기를 업고, 한 걸음 한 걸음... 절까지는 아직 이틀 길이 남았소. 내가 잡히면, 다른 사자가 즉시 그 여인에게 보내질 것이오. 새로 오는 사자는 법대로만 움직일 터, 여인은 산길 한가운데서 혼이 끊기고, 아기는 그 곁에서..."
사자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덕보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요.
"하여 나는 도망치고 있는 것이오. 잡히지 않으려는 게 아니오. 그 여인이 아기를 절에 맡길 때까지, 이틀. 딱 이틀만 저들의 눈을 피하면 되는 것이오. 그 후에는 내 발로 저승에 돌아가 어떤 벌이든 달게 받을 작정이오."
방 안에 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문풍지 밖에서는 여전히 비바람이 울고 있었지요. 이윽고 덕보가 무릎을 탁 치며 입을 열었습니다.
"사자님. 그 이틀, 우리 집에서 채우시지요."
"주인장...!"
"들으셨지 않소. 아까 그 신장님들이 그러시더이다. 이 집에서는 사람 사는 냄새만 나서 저승 기운을 못 찾겠다고. 헌데 사자님, 그게 어인 까닭입니까?"
사자가 젖은 눈으로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주인장이 차려 준 그 보리밥 덕이오. 산 사람이 정성으로 지어 준 밥을 얻어먹으면, 우리 같은 존재의 몸에서 한동안 사람의 밥 냄새가 나서 저승 기운이 감추어지는 법이라오. 예로부터 초상집에서 사잣밥을 정성껏 차리는 것도 그 때문이지."
"그것 보시오! 하늘이 도우신 게요. 우리 집에 보리쌀이 아직 반 됫박 남았소. 이틀 동안 하루 세 끼, 내 사자님께 더운밥을 지어 올리리다. 그 밥 냄새로 몸을 감추고 계시면 될 것 아니오!"
저승사자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덕보를 바라보았습니다. 삼백 년 동안 죽음의 문턱에서 온갖 인간 군상을 지켜본 그였지만, 이런 인간은 처음이었던 것입니다. 제 식구 먹을 마지막 양식을, 저승사자를 살리는 데 내어놓겠다는 사람이라니요.
"주인장...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오. 나를 숨긴 것이 발각되면 주인장 내외에게 어떤 화가 미칠지 모르오. 게다가 나는 사람도 아닌, 죽음을 나르는 저승의 관원이오.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그러자 덕보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사자님, 소인은 어려운 이치는 모릅니다. 다만 이것 하나는 압지요. 병든 어미가 아기를 살리려 산길을 기어오르고 있고, 그 모자를 살리려고 사자님이 삼백 년 지켜 온 법을 어기고 쫓기는 몸이 되셨소. 그럼 소인은 그 사자님을 살려야, 그 모자가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콩 심은 데 콩 나고, 정을 심은 데 정이 나는 법이지요."
곁에서 순덕이도 눈물을 훔치며 거들었습니다.
"사자님, 저도 아이 키우는 어미입니다. 그 산길의 아기 어미 심정을 생각하면... 보리밥이 아니라 제 살점이라도 떼어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승사자는 고개를 깊이 숙였습니다. 그 창백한 뺨 위로 맑은 것이 한 줄기 흘러내렸지요. 삼백 년 만에 처음 흘려 보는, 저승사자의 눈물이었습니다.
'인간이란... 인간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존재로구나. 곳간이 가득한 자는 문을 닫아걸고, 뒤주가 텅 빈 자는 마지막 밥을 내어놓다니.'
그리하여 그날 밤부터, 세상에서 가장 기이한 동거가 시작되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단칸방에 저승사자가 숨어 지내게 된 것이지요. 과연 덕보네는 추포 신장들의 눈을 이틀 동안 무사히 피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산길을 오르는 그 여인과 아기의 운명은 어찌 될까요.
※ 4: 이틀간의 동거
그날부터 덕보네 단칸방에서 기이한 동거가 시작됐습니다.
순덕이는 새벽같이 일어나 남은 보리쌀로 정성껏 밥을 지어 가장 따뜻한 첫술을 사자의 상에 올렸습니다. 저승사자는 그 밥상 앞에 앉아 냄새와 김을 거두었고,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그의 몸에서 풍기던 서늘한 기운이 옅어지며 구수한 밥 냄새가 배어들었지요.
"사자님, 찬이 없어 민망합니다. 된장에 김치가 전부라..."
"부인, 무슨 말씀이시오. 삼백 년 동안 수천 번의 사잣밥을 받았소. 고래등 같은 기와집의 진수성찬도 있었지. 허나 이 집 보리밥처럼 따뜻한 밥은 처음이오. 두려워서 차린 밥과 마음으로 차린 밥은, 냄새부터 다른 법이라오."
낮이 되자 어린 아들 놈이 사자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은 벌벌 떠는 저승사자인데, 아이는 겁도 없이 그 검은 도포 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저씨는 왜 맨날 검은 옷만 입어? 아저씨 일이 뭔데?"
"...먼 길 가는 사람들을, 잘 데려다주는 일이니라."
"우와, 그럼 좋은 일 하는 거네!"
사자는 순간 멍해졌습니다. 삼백 년 동안 그는 저주받은 존재였습니다. 그가 문 앞에 서면 곡소리가 났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를 꺼렸지요. 그런데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니.
'좋은 일이라... 그래, 이 아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가는 길이 정해진 것이라면, 그 길을 무섭지 않게 데려다주는 것. 그것이 본래 내 일이 아니었던가.'
저녁이 되자 다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사립문 밖에서 그 서슬 퍼런 기운이 다시 느껴진 것입니다. 추포 신장들이 되돌아온 것이지요.
"아무래도 수상하다. 그날 밤 자취가 끊긴 곳이 이 집 앞이야. 다시 한번 뒤져 보자."
사자가 황급히 뒤주로 몸을 숨기려는데, 덕보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 되오. 같은 곳에 두 번 숨으면 들키는 법. 사자님, 이리 오시오."
덕보는 사자에게 제 낡은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히고, 얼굴에는 아궁이 검댕을 문질러 발랐습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다 해진 패랭이를 씌웠지요.
"오늘부터 사자님은 우리 집 머슴이오. 이름은... 그래, 밥쇠라 합시다. 밥 덕에 사는 몸이니 밥쇠가 딱 맞지 않소?"
"바, 밥쇠라니... 명색이 삼백 년 저승 관원에게..."
"허허, 목숨이 먼저요 체면이 먼저요?"
문이 벌컥 열리고 두 신장이 들이닥쳤습니다. 시퍼런 눈이 방 안을 훑다가,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불을 때는 검댕투성이 사내에게 멎었지요.
"저자는 누구냐. 그저께 밤에는 없던 자다."
덕보가 태연하게 껄껄 웃었습니다.
"아, 저놈 말입니까요. 저희 집 머슴 밥쇠올시다. 산 너머 숯막에 숯 구우러 보냈다가 오늘 돌아왔습죠. 저놈이 미련해서 밥은 곱빼기로 먹는데 일은 반 몫이라, 아주 골칫거리입니다요."
신장이 성큼성큼 다가가 사자의 턱을 치켜들었습니다. 사자의 심장이 얼어붙는 순간이었지요. 그런데 그때,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사자의 무릎에 척 앉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밥쇠야, 나 목마 태워 줘!"
"어험... 도련님, 지금은 아니 되옵니다. 불을 때야 하니..."
"칫, 밥쇠 미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신장이 코를 킁킁거렸습니다. 사내에게서 나는 것은 밥 냄새, 검댕 냄새, 아이의 살 냄새뿐. 게다가 저승사자란 본디 아이들이 무서워 우는 존재인데, 이 집 아이는 저 사내에게 목마를 태워 달라 조르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군. 가자."
신장들이 떠나고 문이 닫히자, 사자는 그대로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덕보를 올려다보며 허탈하게 웃었지요.
"주인장... 삼백 년을 살았어도, 오늘처럼 간이 졸아 본 적은 처음이오. 헌데 밥쇠가 무어요, 밥쇠가."
"하하하! 그 덕에 살지 않았소, 밥쇠 어른!"
세 식구와 저승사자의 웃음소리가 가난한 초가집에 가득 찼습니다. 그날 밤, 사자는 잠든 아이의 머리맡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해 질 무렵, 사자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지요. 그 얼굴에 안도와 슬픔이 반반씩 어려 있었습니다.
"주인장... 지금 막, 그 여인이 산 너머 절에 당도했소. 스님들이 아기를 받아 안았구려. 여인이... 여인이 웃고 있소. 홀가분하게, 아주 편안하게 웃고 있소."
"그, 그것이 보이십니까?"
"보이다마다. 내가 혼줄을 쥐고 있는 사람의 일이니. 이제... 이제 되었소. 내가 저승으로 돌아갈 시간이오."
덕보 내외의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이틀 사이에 정이 든 것이지요. 순덕이가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사자님, 돌아가시면... 큰 벌을 받으시는 것 아닙니까. 차라리 며칠 더 계시다가..."
"아니오, 부인. 약조한 일이오. 그 여인이 일을 마치면 내 발로 돌아가겠다고, 나 스스로에게 한 약조. 저승사자가 저와의 약조마저 어기면, 그때는 정말로 죄인이 되는 것이지요."
사자는 검댕 묻은 무명옷을 벗고 다시 검은 도포를 갖추어 입었습니다. 그리고 덕보 내외 앞에 마주 앉아 깊이 고개를 숙였지요.
"주인장, 부인. 이 은혜는 저승에 가서도 잊지 않겠소. 마지막 양식을 털어 나를 먹이고, 목숨을 걸고 나를 숨겨 준 이 정을, 삼백 년 묵은 이 사자가 어찌 잊겠소."
"사자님도 참. 밥 몇 끼 지어 드린 것뿐인데요."
"밥 몇 끼가 아니오, 부인. 삼백 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이 집에서 사람 대접을 받았소. 저승사자가 아니라, 밥쇠라는 이름의 식구로 말이오."
잠들었던 아이가 부스스 눈을 뜨더니, 떠나려는 사자의 도포 자락을 붙잡았습니다.
"밥쇠야... 어디 가? 가지 마..."
사자는 아이를 번쩍 안아 올려 목마를 태워 주었습니다. 어제는 못 태워 준 그 목마였지요. 아이가 까르르 웃는 동안, 사자의 눈가가 젖어 들었습니다.
"도련님, 잘 크시오. 부디 아버님을 닮아, 남의 설움을 아는 사람이 되시오."
문을 나서던 사자가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주인장, 한 가지만 기억해 주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사흘 안에는 절대 이 집 식구 누구도 몸져눕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시오. 그리고 혹여... 혹여 검은 옷의 손님이 다시 찾아오거든, 그것이 누구든 오늘처럼 따뜻한 밥 한 그릇 지어 주시오. 그 밥이 언젠가 이 집을 지킬 것이니."
그 말을 남기고, 저승사자는 달빛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바람처럼 말이지요.
※ 5: 염라대왕의 심판
저승사자는 약조한 대로, 제 발로 저승 문을 두드렸습니다.
덕보네 집을 나선 사자는 밤길을 걸어 저승 어귀에 이르렀습니다. 황천길 삼거리를 지나고,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강을 건너는 동안, 사자의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지요.
'삼백 년을 살며 수만 명을 이 길로 데려왔건만, 정작 내가 죄인이 되어 이 길을 걸을 줄이야. 허나 이상하구나. 두렵지가 않아. 그 보리밥의 온기가 아직 이 몸에 남아 있는 까닭인가.'
저승 문 앞을 지키던 수문장이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열흘 동안 저승을 발칵 뒤집어 놓은 도망자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입니다.
"죄인 흑암사자, 스스로 돌아와 벌을 청하옵니다."
저승의 관원들이 술렁거렸습니다. 도망친 사자가 제 발로 돌아온 것도 처음이거니와, 그 얼굴이 죄인답지 않게 평온했기 때문이지요. 사자는 곧장 쇠사슬에 묶여 염라대왕의 심판정으로 끌려갔습니다.
시왕전 깊은 곳, 염라대왕의 심판정은 그 이름만 들어도 혼백이 얼어붙는 곳입니다. 하늘까지 닿을 듯한 어좌 위에, 진홍빛 곤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쓴 염라대왕이 태산처럼 앉아 계셨지요. 그 좌우로 최판관이 붓을 들고 서 있고, 업경대라는 커다란 거울이 죄인의 지난 일을 낱낱이 비추고 있었습니다.
"죄인은 고개를 들라."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심판정을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흑암사자. 너는 삼백 년 동안 명부의 법을 한 치의 어김없이 지켜 온 모범 사자였다. 헌데 어찌하여 명부에 적힌 혼을 거두지 않고 달아나, 추포 신장들을 우롱하고 저승의 법도를 어지럽혔느냐. 죄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옵니다, 대왕마마."
사자는 조금도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명부의 시각을 어긴 것도, 이레의 말미를 준 것도, 신장들을 피해 달아난 것도 모두 소인이 한 일이옵니다.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다만 한 말씀만 올리겠나이다. 소인은 그 일을... 후회하지 않사옵니다."
"무엇이라? 후회하지 않는다?"
심판정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판관들이 수군거리고, 나졸들이 창을 고쳐 쥐었지요. 염라대왕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습니다.
"저놈이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게로구나! 업경대를 돌려라! 저놈의 죄상을 낱낱이 비추리라!"
업경대가 천천히 돌아가며 빛을 뿜었습니다. 거울 속에 지난 열흘의 일들이 흘러갔지요. 병든 여인이 갓난아기를 안고 애원하는 모습. 사자가 차마 혼줄을 끊지 못하고 돌아서는 모습. 폭풍우 치는 밤 가난한 농부가 문을 열어 주는 모습. 마지막 보리밥 한 그릇. 텅 빈 뒤주. 검댕을 묻힌 얼굴로 아궁이 앞에 앉은 사자와, 그 무릎에 앉아 웃는 아이.
죄상을 밝히려고 돌린 업경대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거울에 비치는 장면마다, 죄가 아니라 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목숨을 살리려는 마음, 마지막 밥을 내어놓는 마음, 목숨을 걸고 남을 지키는 마음이 말입니다.
심판정이 조용해졌습니다. 수군거리던 판관들도, 창을 쥔 나졸들도 어느새 숨을 죽이고 거울만 바라보고 있었지요. 어느 늙은 판관은 슬그머니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훔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거울은 마지막 장면을 비추었습니다. 병든 여인이 아기를 업고 산길을 오르는 모습이었습니다. 열이 펄펄 끓는 몸으로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무릎이 깨져 피가 흘러도 기어이 다시 일어나 걷는 그 모습. 그리고 마침내 절 문 앞에서 스님들에게 아기를 건네고, 부처님을 향해 마지막 절을 올리는 모습이었지요.
"스님들, 부디 이 아이를... 이 아이의 이름은 산이라 하옵니다. 산처럼 굳세게 살라고..."
그때, 심판정의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의 혼백이 조용히 걸어 들어왔습니다. 바로 그 여인이었습니다. 아기를 절에 맡기고, 그날 밤 편안히 눈을 감은 여인의 혼백이 저승에 당도한 것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여인의 얼굴에는 원망도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맑고 편안한 낯빛으로, 여인은 염라대왕 앞에 엎드려 절을 올렸습니다.
"대왕마마, 소녀 아뢰옵니다. 저기 묶여 계신 사자님은 죄인이 아니옵니다. 소녀에게 주신 이레 덕분에 소녀의 아기가 살았나이다. 소녀는 여한 없이 눈을 감았고, 이렇게 웃으며 저승에 왔나이다. 대왕마마, 원한을 품고 온 혼과 웃으며 온 혼 중에 어느 쪽이 저승의 법도에 이로운지요. 만일 벌을 내리셔야 한다면, 그 벌은 말미를 달라 조른 소녀에게 내려 주시옵소서."
"아니 되옵니다, 대왕마마!"
이번에는 흑암사자가 소리쳤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아무 죄가 없나이다. 죄는 법을 어긴 소인에게만 있사옵니다!"
죄인과 망자가 서로 제가 벌을 받겠다고 다투는 광경이라니. 저승이 생긴 이래 처음 보는 일이었습니다. 냉엄하기로 소문난 최판관마저 붓을 든 채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지요. 염라대왕은 한동안 말없이 두 혼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 얼굴에서 노기가 조금씩 걷히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최판관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급히 아뢰었습니다.
"대왕마마, 기이한 일이옵니다. 업경대가... 업경대가 저절로 다시 돌고 있사옵니다!"
업경대가 스스로 빛을 내며 새로운 장면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지난 일이 아니라, 앞으로 올 일이었습니다. 절에서 자란 아기 산이가 훗날 큰스님이 되어, 돌림병이 도는 마을마다 찾아다니며 수천 명의 목숨을 구하는 모습이었지요.
"저 아이가... 장차 수천 명을 살릴 명의 스님이 된다는 말이냐."
염라대왕이 낮게 중얼거렸습니다. 심판정에 모인 모든 혼들이 숨을 죽이고 대왕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요. 과연 염라대왕은 어떤 판결을 내릴까요.
※ 6: 하늘이 갚은 밥값
이윽고 염라대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심판정의 모든 혼들이 마른침을 삼켰지요.
"흑암사자는 들으라."
"예, 대왕마마."
"명부의 법은 추상같아야 한다. 법이 흔들리면 삼계의 질서가 흔들리는 까닭이다. 네가 명부의 시각을 어긴 죄, 결코 가볍지 않다."
사자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런데 염라대왕의 말이 이어졌지요.
"허나... 법이란 본디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이냐. 하늘의 이치를 지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늘의 이치란 무엇이냐. 살릴 것을 살리고, 이어질 것을 잇는 것이다. 업경대가 보여 주지 않았느냐. 네가 어긴 것은 법의 조문이나, 네가 지킨 것은 법의 근본이었다."
심판정에 나직한 탄성이 흘렀습니다. 염라대왕은 잠시 말을 멈추고 업경대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지요.
"과인이 이 자리에 앉아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혼백들을 심판해 왔다. 법대로 살라 호통도 쳤고, 법을 어긴 죄를 물어 벌도 내렸다. 허나 오늘 과인은 배웠느니라. 법의 자와 저울로도 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사람의 정이라는 것을."
"명부를 다시 살펴보니, 그 여인의 수명은 본래 이레가 더 적혀 있어야 할 것이 판관의 붓끝에서 잘못 옮겨진 것이었다. 하늘은 그 아이가 어미 손에서 절에 맡겨지도록 애초에 정해 두었던 것. 흑암사자, 너는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대신 이룬 것이니라."
"대, 대왕마마..."
"들으라. 흑암사자의 죄를 사하노라. 아울러 삼백 년 동안 한결같이 소임을 다하고, 마지막에는 법의 근본까지 깨우쳤으니, 이제부터 너를 인도사자에 봉하노라. 앞으로 너는 어미 잃은 아이, 자식 잃은 어미, 그런 가엾은 혼들을 저승길에서 따뜻이 인도하는 소임을 맡으라."
흑암사자, 아니 인도사자는 눈물을 흘리며 엎드렸습니다. 여인의 혼백도 감격하여 절을 올렸지요. 염라대왕은 여인에게도 부드럽게 일렀습니다.
"너의 모정이 갸륵하니,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게 하리라. 네 아들 산이는 장차 수천 명을 살리는 큰스님이 될 것이니, 어미 된 자로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
그런데 그때, 염라대왕이 문득 최판관을 돌아보며 물었습니다.
"헌데 그 농부는 어찌할 것이냐. 덕보라 하였느냐. 저승의 일에 끼어들어 신장들을 속인 죄가 있다마는..."
심판정이 다시 긴장에 휩싸였습니다. 인도사자가 황급히 엎드려 아뢰려는데, 염라대왕이 손을 들어 막고는 껄껄 웃는 것이었습니다.
"허허, 그리 놀랄 것 없다. 명부를 보아라. 그자의 이름 곁에 무엇이 적혀 있느냐."
최판관이 명부를 펼치더니 놀란 목소리로 읽었습니다.
"덕보. 평생 남의 배고픔을 제 배고픔같이 여긴 자. 마지막 양식으로 쫓기는 혼을 먹인 자. 적선지가에 필유여경이라... 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으리니, 수명 삼십 년을 더하고, 자손 삼대에 곳간이 마르지 않게 하라. 이미... 이미 하늘이 먼저 적어 두셨나이다!"
"보아라. 하늘은 밥 한 그릇도 잊지 않는 법이다. 인도사자, 네가 직접 가서 하늘의 상을 전하고 오너라. 그 집 밥값이다."
그리하여 며칠 뒤, 덕보네 집에 다시 검은 도포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얼굴이 어찌나 환한지, 검은 도포마저 환해 보일 지경이었지요.
"밥쇠야아!"
아이가 제일 먼저 알아보고 달려와 안겼습니다. 인도사자는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고는, 덕보 내외에게 저승에서 있었던 일을 다 들려주었습니다. 여인의 혼백이 웃으며 저승에 온 이야기, 업경대에 비친 보리밥 한 그릇 이야기, 그리고 염라대왕의 판결까지. 순덕이는 그 여인의 이야기 대목에서 앞치마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지요. 이윽고 사자가 마당 한구석을 가리켰습니다.
"주인장, 저 빈 뒤주를 열어 보시오."
덕보가 뒤주를 여는 순간, 세 식구의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텅 비었던 뒤주에 뽀얀 쌀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이것이 대체..."
"하늘이 갚는 밥값이오. 그 뒤주는 앞으로 퍼내도 퍼내도 바닥이 나지 않을 것이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소. 그 쌀로 지은 밥은, 배고픈 이가 문 앞에 서거든 반드시 나누어야 하오. 나누기를 멈추는 날, 뒤주도 마를 것이니."
"허허, 그런 조건이라면 백 년이라도 지키지요! 나 혼자 먹자고 쌓아 두면 그게 무슨 재미요!"
과연 그 후로 덕보네 뒤주는 마르는 법이 없었고, 덕보네 집은 배고픈 나그네들의 쉼터가 되었답니다. 덕보 내외는 건강하게 백수를 누렸고, 아들은 자라서 아버지를 꼭 닮은 인정 많은 부자가 되었지요. 그리고 훗날, 큰스님이 된 산이가 덕보네 마을에 찾아와 돌림병에서 온 마을을 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밥 한 그릇의 인연이 돌고 돌아, 마을 전체를 살린 셈이지요.
여러분, 저승사자는 무서운 존재라고들 하지요. 하지만 이 이야기 속 사자는 어땠습니까. 법보다 목숨을 무겁게 여겼고, 은혜를 잊지 않았으며, 끝내는 가엾은 혼들을 위로하는 인도사자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저승사자란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마지막 길을 지켜 주는 배웅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덕보를 보십시오. 그가 내놓은 것은 보리밥 한 그릇이었지만, 돌아온 것은 삼십 년의 수명과 마르지 않는 뒤주였습니다. 베풂이란 그런 것이지요. 내 손을 떠날 때는 한 됫박이지만, 하늘을 한 바퀴 돌아올 때는 곳간이 되어 돌아오는 법입니다.
오늘 밤, 혹시 여러분의 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거든,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것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부디 오늘 밤도 편안한 꿈 꾸시기를 바랍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250자 내외)
오늘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나요? 마지막 보리밥 한 그릇이 저승사자를 살리고, 그 인연이 돌고 돌아 마르지 않는 뒤주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저승의 염라대왕도 밥 한 그릇의 정은 잊지 않는 법이지요. 오늘 여러분이 베푼 작은 친절도,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이야기가 마음에 드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다음 이야기에서 또 만나요.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