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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의 아내를 범한 역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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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250자 내외)
아내의 침소, 그곳에 다른 사내가 있었다. 천하의 절색이라 칭송받던 아내의 옷고름이 풀어진 채 낯선 사내와 뒤엉켜 있는 그 순간, 남편은 칼 대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분노를 넘어선 초월적 용서, 그 뒤에 숨겨진 인간과 신의 경계에 선 한 남자의 고뇌와 사랑.
디스크립션 (300자 내외)
신라의 밤을 밝히던 사내, 동해 용왕의 아들 처용. 인간 세상의 절세미녀 가은을 아내로 맞았지만, 그의 비범함은 때로 아내를 외롭게 했다. 그 틈을 파고든 역병의 신, 역신. 아내를 범한 역신을 마주한 처용은 분노가 아닌 기이한 노래와 춤으로 그를 제압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처용 설화, 그 행간에 숨겨진 고혹적인 사랑과 슬픈 운명을 파헤친다.
※ 동해 용왕의 아들로 태어나 인간 세상에서 벼슬을 하는 처용.
황금의 도시, 신라 서라벌의 밤은 낮보다 화려했다. 귀족들의 저택에서 흘러나오는 등불이 밤거리를 대낮처럼 밝혔고, 흥겨운 가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왕경에서도 가장 깊고 고요한 곳에 자리한 한 저택만은 예외였다. 그곳은 마치 세상의 소란과 단절된 심해의 공간처럼, 늘 정적과 신비로운 기운에 감싸여 있었다. 동해 용왕의 일곱 번째 아들, 처용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는 헌강왕의 눈에 띄어 인간 세상의 벼슬을 살았지만, 그의 근본까지 인간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뼛속까지 바다의 존재였다. 그가 조정에 나타나면, 화려한 비단옷과 관모 아래에서도 이질적인 기운이 흘러나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의 눈동자는 다른 신료들의 탐욕과 질시를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간결했으나 파도처럼 무게가 있었다. 그런 그의 곁에는 서라벌 최고의 미녀로 칭송받는 아내, 가은이 있었다. 그녀는 본디 평범한 귀족의 여식이었으나, 그 아름다움이 너무나 뛰어나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왕이 직접 처용에게 아내로 맞을 것을 권한 여인이었다. 처용은 왕의 뜻을 거절하지 않았고, 가은 또한 신비로운 사내인 처용에게 운명처럼 끌렸다. 부부가 된 후, 처용은 그녀에게 지극한 사랑을 베풀었다. 동해 깊은 곳에서만 자란다는 야광주를 가져와 그녀의 침실을 밝혔고, 인어의 눈물로 엮었다는 진주 목걸이를 목에 걸어주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가은을 행복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깊은 고독에 빠뜨렸다. 그는 며칠씩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왕과의 연회는 핑계일 뿐, 그는 주기적으로 바닷속 용궁으로 돌아가 기운을 회복해야만 하는 몸이었다. 그럴 때마다 가은은 시녀 몇몇과 함께 텅 빈 저택을 지켜야 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시기하는 다른 귀부인들은 교류를 꺼렸고, 처용의 비범함을 두려워하는 사내들은 감히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그녀는 완벽한 고립 속에 살았다. ‘그녀의 남편은 밤마다 바다의 암컷들과 뒹군다지.’, ‘용의 자식이라니, 뱀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필시 그 아내도 온전치 못할 게야.’ 저잣거리의 추문은 바람을 타고 그녀의 귓가에까지 흘러들어와 날카로운 비수처럼 심장을 찔렀다. 오늘 밤도 처용은 곁에 없었다. 가은은 창밖으로 보이는 화려한 서라벌의 야경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저 불빛 아래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웃고, 사랑하고, 다투고 있었다. 오직 자신만이 이 거대한 저택이라는 감옥에 갇혀, 돌아올지 오지 않을지 모르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사무치게 외로울 뿐이었다. 그의 체취, 서늘하면서도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듯한 바다 내음이 그리웠다. 그의 손길, 투박하면서도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기억하는 그 다정한 손길이 고팠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차가운 비단옷의 감촉 아래로 느껴지는 것은 자신의 쓸쓸한 온기뿐이었다. 그녀는 결코 알지 못했다.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저택의 가장 높은 지붕 위에서, 한 존재가 굶주린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역병과 죽음의 냄새를 온몸에 두른 그 존재는,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순수하고 찬란한 생명력에 홀린 듯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집으로 돌아온 처용이 아내 가은과 깊은 사랑을 나눈다.
깊은 밤의 정적을 깨고 저택의 육중한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 소리는 마치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가은의 잠든 의식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그녀가 희미하게 눈을 떴을 때, 방 안의 공기가 이미 바뀌어 있음을 느꼈다. 건조하고 외롭던 공기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서늘하고 습한 바다의 기운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처용이었다. 그가 돌아온 것이다. “기다리게 하였구나.” 촛불 없이도 어둠 속에서 빛나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가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단단한 몸을 끌어안았다. 그의 갑옷에서는 차가운 쇠의 냄새와 함께 짙은 바다 소금의 냄새가 풍겨왔다. 처용은 그런 그녀의 등을 말없이 쓸어주다, 이내 그녀를 가볍게 안아 올려 침상으로 향했다. 그의 사랑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바다와 같았다. 때로는 잔잔한 파도처럼 부드럽게 애무하다가도, 어느 순간 거친 폭풍우처럼 그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오늘 밤은 후자였다. 그는 마치 오랜 갈증에 시달린 사람처럼 급하고 거칠게 그녀의 옷을 벗겨냈다. 부드러운 비단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달빛 아래 드러난 가은의 하얀 나신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처용은 그런 그녀의 몸을 경이로운 눈으로 감상하듯 내려다보다, 이내 자신의 뜨거운 몸으로 덮쳐왔다. 그의 입술은 단순한 입맞춤이 아니라, 그녀의 존재를 통째로 흡수하려는 듯했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안을 헤집고, 목덜미를 지나, 봉긋 솟아오른 젖가슴을 탐했다. “아… 아읏…!” 가은은 그의 거친 애무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의 손길은 그녀 몸의 가장 예민한 곳, 그녀 자신도 몰랐던 쾌락의 중심을 정확하게 찾아내어 무자비하게 자극했다. 그녀의 허리가 활처럼 휘고, 다리가 저절로 벌어지며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처용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거대하고 뜨거운 몸의 일부를 그녀의 가장 깊고 부드러운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 순간 가은은 자신의 몸이 둘로 갈라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듯한 극한의 쾌락을 동시에 느꼈다. 인간의 정사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신의 힘에 온전히 복속되는 듯한 압도적인 감각이었다. 그의 움직임은 조수간만의 차처럼, 느리고 깊게 시작되었다가 점차 빠르고 거세졌다. 침상이 부서져라 삐걱거리는 소리와, 가은의 교성과, 처용의 거친 숨소리가 뒤섞여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녀는 그의 등과 어깨를 손톱으로 할퀴며 그의 움직임에 매달렸다. 쾌락의 파도가 몇 번이고 그녀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마침내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그녀의 안 깊숙이 쏟아냈을 때, 가은은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며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은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처용은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깊고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방금 전의 폭풍우가 남긴 미세한 흔들림이 남아 있었다. 그는 다시 돌아온 일상 속에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이 남자가 인간 세상의 규율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존재임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주는 안도감과 불안감 사이에서, 그녀의 외로움은 더욱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 처용이 또다시 왕의 부름을 받고 떠난 밤,
용왕의 아들인 처용의 힘을 빌려 역병의 기세를 잠재운 왕은 크게 기뻐하며, 며칠 밤낮으로 그를 위한 연회를 열었다. 처용은 인간 세상의 정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왕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궁에 머물러야 했다. 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남편과의 격정적인 밤이 남긴 흔적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가은은 또다시 차갑고 텅 빈 침소를 홀로 지켜야 했다. 무료함과 외로움을 견디다 못한 그녀는 독한 술을 몇 잔 연거푸 마셨다. 알코올 기운이 온몸에 퍼지자, 억눌려 있던 그리움과 설움이 봇물 터지듯 밀려왔다. 그녀는 흐느끼며 침상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택의 담벼락을 휘감던 음습한 기운이 스멀스멀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신이었다. 그는 며칠 동안이나 먹잇감을 노리는 굶주린 이리처럼 가은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녀가 가진 상처와 외로움의 냄새까지 맡을 수 있었다. 역신에게 있어,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은 달콤한 영양분과도 같았다. 특히나 저렇게 고귀하고 순수한 영혼이 느끼는 고독은, 그에게 최고의 미식이었다. 그는 연기처럼 형체를 바꾸어 잠긴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따스하던 실내의 공기가 순식간에 시체처럼 차갑게 식었다. 타오르던 촛불이 파랗게 질려 요동쳤고, 화병에 꽂혀 있던 싱싱한 모란꽃이 순식간에 검게 시들어 바스러졌다. 역신은 술에 취해 붉은 얼굴로 잠든 가은의 모습을 황홀하게 내려다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색색거리는 숨소리, 느슨해진 옷고름 사이로 언뜻 보이는 새하얀 속살. 그 모든 것이 그의 파괴적인 욕망을 들끓게 했다. ‘처용… 용왕의 아들이라 뽐내더니, 결국 네년도 외로움에 떠는 한낱 계집일 뿐이구나. 네놈이 채워주지 못하는 그 갈증을, 이 몸이 남김없이 채워주마.’ 역신은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자신의 몸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처용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택했다. 처용이 강건하고 믿음직스러운 바위 같은 사내라면, 역신은 병적으로 창백한 피부에 퇴폐적이고 나른한 눈빛을 가진 미소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여인들의 모성애와 연민을 자극하여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위험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는 잠든 가은의 뺨에 자신의 차가운 손을 가져다 댔다. 잠결에 차가운 감촉을 느낀 가은이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였다. 그녀의 움직임에 옷고름이 스르륵 풀리며, 탐스러운 젖가슴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역신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몸 위로 천천히 자신의 몸을 겹쳤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의 꿈속으로 파고들어, 그녀가 마치 남편과 사랑을 나누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꿈속에서 가은은 남편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늘 느껴지던 바다 내음 대신, 축축하고 비릿한 흙냄새가 났고, 그의 손길은 다정하기보다 집요하고 탐욕스러웠다. 하지만 술과 외로움에 지친 그녀는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채지 못한 채, 꿈속의 남자에게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역신의 그림자가 달빛을 가리며, 서라벌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무참히 꺾고 있었다.
※ 밤늦게 돌아온 처용이 문 앞에서 두 켤레의 신을 발견한다.
밤늦도록 이어진 연회는 지루하고 답답했다. 인간들의 탐욕과 시기, 덧없는 권력 다툼이 오가는 궁궐은 처용에게 숨 막히는 공간이었다. 그는 왕이 내리는 술잔을 받으면서도, 마음은 이미 동해의 깊은 용궁이나 아내 가은이 기다리는 고요한 저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마침내 연회가 파하고 궁을 나선 그의 발걸음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역병이 휩쓸고 간 서라벌의 거리는 죽음의 냄새로 가득했다. 길가에 나뒹구는 시신과, 꺼져가는 등불 아래서 들려오는 희미한 신음 소리가 그의 예민한 감각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그는 이 모든 죽음과 부패의 기운이 한곳을 향해, 거대한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 강의 끝이, 바로 자신의 집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의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저택의 대문 앞에 섰을 때, 그는 이미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늘 그를 맞이하던 정원의 풀벌레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밤에도 향기를 뿜어내던 화단의 꽃들은 시커멓게 타들어 간 듯 죽어 있었다. 공기 중에는 짭조름한 바다 내음 대신, 역병이 뿜어내는 비릿하고 축축한 부패의 악취가 진동했다. 그는 성큼성큼 자신의 침소로 향했다. 그리고 굳게 닫힌 방문 앞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문 앞에는 신발 두 켤레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비단 꽃신, 자신의 아내 가은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내의 신발 한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신발에서는 시체의 썩은 내와 병자의 고름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처용은 말없이 허리에 찬 칼자루를 쥐었다. 인간 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살의에 가까운 분노가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그는 용왕의 아들이었다. 들끓는 감정을 차가운 이성으로 억누르며, 그는 소리 없이 방문을 열었다. 방 안의 풍경은 그의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직접 눈으로 확인한 그 광경은, 상상보다 훨씬 더 참혹하고 충격적이었다. 그의 아내, 서라벌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결했던 가은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하얀 몸은 거의 다 드러나 있었고, 그 위를, 낯선 사내가 짐승처럼 덮고 있었다. 사내의 피부는 병자처럼 창백했고, 눈은 퇴폐적인 열기로 번들거렸다. 그는 가은의 몸을 탐하며,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가은은 술과 약에 취한 듯, 악몽을 꾸는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린 채 희미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 순간, 처용의 눈에 비친 것은 단순히 아내의 부정이 아니었다. 그는 보았다. 역병의 신, 역신이 자신의 아내를 숙주 삼아, 자신의 신성한 공간을 더럽히고 있는 것을. 가은의 몸에 새겨진 붉은 흔적들은 정사의 흔적이 아니라, 역병이 퍼져나가는 끔찍한 징후였다. 역신의 더러운 숨결이 닿은 곳마다 그녀의 살결은 생기를 잃고 푸르스름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처용의 손이 칼자루 위에서 부르르 떨렸다. 인간의 피가 반만 섞였더라면, 그는 당장 뛰어들어 저 더러운 역신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온전한 바다의 존재였다. 그의 분노는 인간의 그것처럼 뜨겁게 폭발하는 대신,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수천 길 바닷속처럼, 고요하지만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 거대한 압력으로 변해갔다. 그는 칼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시작했다.
※ 처용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처용은 문지방을 넘어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삐걱이는 마룻바닥 소리에, 가은의 몸을 탐하던 역신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처용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조롱과 경멸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네놈이냐. 이 계집의 지아비라는 용왕의 아들이.’ 그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질투와 분노에 미쳐 칼을 빼 들고 달려들 가여운 남편의 모습을 기대했다. 그러나 처용의 반응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처용은 그들을 향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머리에 쓰고 있던 관모를 벗어 내려놓고, 허리에 두른 띠를 풀어냈다. 그 모습은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르기 전, 몸을 정갈히 하는 사제와도 같았다. 역신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지켜보는 사이, 처용은 천천히 팔을 들어 올리고 발을 떼어놓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의 춤은 연회에서 추던 화려하고 기교 넘치는 춤이 아니었다. 느리고 장중하며, 하나하나의 동작에 의미를 담은 듯한, 주술적인 몸짓이었다. 그의 발이 마루를 구를 때마다, 방 전체가 바다의 심장처럼 낮게 울렸다. 그의 팔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역신이 흩뿌려놓은 탁한 기운이 정화되는 듯했다. 이어서, 그의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서라벌 밝은 달 아래,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내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그의 목소리는 슬픔을 머금고 있었으나, 구슬프기보다는 장엄했다. 그것은 단순한 탄식이 아니었다. 자신의 신성한 영역이 침범당했음을 천지에 고하는 선언이었다. 역신은 처음에는 그를 비웃었다. 아내를 빼앗긴 무능한 사내가 미쳐서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래가 계속될수록, 역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처용의 노래는 단순한 소리의 파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용왕의 아들이 가진 권능 그 자체였다. 노래의 음절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창이 되어 역신의 존재 자체를 꿰뚫었다. 그의 춤사위 하나하나가 거대한 파도가 되어 역신의 더러운 기운을 씻어내렸다. “둘은 나의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이었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마지막 구절이 방 안에 울려 퍼졌을 때, 처용은 춤을 멈추고 역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제 분노도, 슬픔도 넘어선, 모든 것을 초월한 신의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 눈빛과 마주한 순간, 역신은 깨달았다.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반인반신 따위가 아니었다. 인간의 탈을 쓴, 바다 그 자체라는 것을. 질투와 소유욕 같은 인간적인 감정으로는 결코 속박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의지라는 것을. 역신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처용의 노래와 춤이 만들어낸 신성한 기운은, 부패와 질병을 본질로 하는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마치 어둠이 빛을 만나 스러지듯, 그의 존재가 소멸될 것 같은 극심한 공포가 그를 덮쳤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가은의 몸에서 황급히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처용의 발치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 처용의 초월적인 기세에 굴복한 역신이 무릎을 꿇고
역신은 처용의 발 앞에 짐승처럼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그의 몸은 더 이상 퇴폐적인 미소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흉측하고 뒤틀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왕의 아들이시여. 당신의 신성한 권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감히 당신의 영역을 침범하였나이다. 부디 이 미천한 목숨만은 살려주시옵소서.” 그의 목소리는 공포와 경외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처용의 노래와 춤은 분노의 표출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비였다. 자신을 단칼에 베어 소멸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물러날 기회를 준 것이다. 처용은 무릎 꿇은 역신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경멸도,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바다 위를 떠다니는 오물을 바라보는 듯, 무심하고 초연한 눈빛이었다. “네놈이 탐한 것은 내 아내가 아니다. 네놈은 그저 내 아내의 몸을 빌어, 나를 시험하고 더럽히려 했을 뿐. 네놈의 더러운 수작에 인간의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네놈의 뜻대로 놀아나는 것이니. 나는 그럴 수 없다.” 처용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천둥과 같은 위엄이 서려 있었다. “내 아내는 죄가 없다. 병에 걸린 것을 어찌 죄라 할 수 있겠느냐. 네놈이라는 역병에 잠시 물들었을 뿐. 내 분노로 너를 벌하여 피를 본다면, 그 피는 결국 내 아내를 더럽힐 뿐이다. 그러니, 썩 물러가라.” 그 말에 역신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자신을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그 이유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내를 위해서라는 사실에 더욱 큰 충격과 감명을 받았다. 이것은 인간의 사랑이나 용서와는 차원이 다른, 신의 영역에 속한 자비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오늘 당신께서 보여주신 대인의 풍모에 감복하였나이다. 이제부터 맹세하겠사옵니다. 당신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조차 비추지 않겠나이다. 당신의 이름이 들리는 곳에는, 결코 발을 들여놓지 않겠나이다.” 역신은 이마가 바닥에 닳도록 절을 올린 뒤, 한 줄기 검은 연기가 되어 창문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역신이 사라지자, 방 안을 가득 채웠던 죽음의 냄새와 한기가 거짓말처럼 걷혔다. 처용은 그제야 침상에 쓰러져 있는 아내, 가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모든 상황을 깨닫고,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흐느끼고 있었다. 수치심과 죄책감, 그리고 남편에 대한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렸다. 처용은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말없이 이불을 걷어내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의 손길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저 깊고 고요한 바다처럼, 그녀의 모든 떨림을 잠재워줄 뿐이었다. “부인. 고개를 드시오.” 가은이 눈물 젖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처용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대는 아무 잘못이 없소. 광풍을 만난 조각배가 어찌 바람을 탓할 수 있겠소. 그저, 못난 지아비를 만나 모진 풍파를 겪게 한 내 탓이오.” 그는 자신의 넓은 소매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가은은 그제야 깨달았다. 남편의 용서는 역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향한 것이었음을. 자신의 몸이 더럽혀졌다는 사실보다, 그로 인해 자신이 받을 상처와 수치심을 먼저 걱정한 남편의 지극한 사랑이었음을.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다. 동쪽 창문으로 새벽의 첫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그 빛은 지난밤의 악몽을 씻어내고, 신의 사랑과 인간의 슬픔이 하나로 얽힌 부부의 모습을 고요히 비추고 있었다.
유튜브 엔딩멘트
아내를 범한 자 앞에서 칼 대신 노래와 춤을 택한 남자, 처용. 그의 용서는 나약함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넘어선 신의 자비이자 아내를 향한 가장 깊고 숭고한 사랑의 방식이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구독과 좋아요는 더 깊이 있는 야담을 만드는 데 큰 힘이 됩니다.
다음 이야기 예고:
다음 시간에는 『용재총화』에 기록된, 사람의 간을 빼먹으며 천 년을 살아온 구미호의 기묘하고도 섬뜩한 이야기, '천 년 묵은 여우의 변신술' 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