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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을 악착같이 모으기만 했던 한 노인

    그가 마침내 죽어 저승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저승사자가 그를 다시 이승으로 돌려보냅니다. 단, 사흘의 시간을 주면서 말입니다.

    저승 문턱에서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저승사자가 그에게 건넨 '깨달음의 선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죽음의 강을 건너다 돌아온 노인의 기적 같은 사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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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300자 미만)

    경상도 상주 땅, 소문난 구두쇠 황억만 영감. 굴비 한 마리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그저 쳐다보는 것으로 반찬을 삼던 지독한 자린고비였지요. 그런 그가 어느 늦가을 밤, 열쇠 꾸러미를 움켜쥔 채 홀로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런데 저승 문턱 검은 강가에서, 저승사자가 그를 다시 이승으로 돌려보냅니다. 단, 사흘의 시간을 주면서 말입니다. 황 영감이 검은 강물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저승사자가 건넨 '깨달음의 선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죽음의 강에서 돌아온 노인의, 기적 같은 사흘이 지금 시작됩니다.

    ※ 1: 소문난 자린고비 황억만의 인색한 삶

    경상도 상주 땅에 황억만이라는 노인이 살았더랍니다.

    나이가 일흔을 훌쩍 넘긴 백발노인이었는데, 이 고을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요. 어찌나 유명했던지, 철없는 아이가 떼를 쓰면 어미가 "너 자꾸 그러면 저 아랫말 황 영감처럼 된다" 하고 겁을 줄 정도였으니까요.

    무엇으로 그리 유명했느냐고요? 바로 그 지독한 인색함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구두쇠가 또 없었어요. 황 영감은 밥을 먹을 때 반찬을 상에 올리는 법이 없었더랍니다. 그 대신 천장에다 굴비 한 마리를 대롱대롱 매달아 놓았지요. 그러고는 밥 한 술 뜨고 굴비 한 번 쳐다보고, 또 밥 한 술 뜨고 굴비 한 번 올려다보고. 그게 반찬이었습니다.

    하루는 어린 손자가 밥을 먹다가 그 굴비를 두 번 연달아 쳐다봤나 봐요. 그랬더니 황 영감이 숟가락을 탁 내려놓고 호통을 치는 겁니다.

    "이놈아! 짜다, 짜! 그렇게 자꾸 보면 물켜서 어쩌려고 그러느냐! 한 번만 봐도 밥이 술술 넘어가거늘!"

    황당하지요. 하지만 이건 약과였습니다.

    여름에 부채를 부칠 때도 남들처럼 부채를 흔드는 법이 없었어요. 부채가 닳는 게 아까워서요. 부채를 얼굴 앞에 딱 펴서 고정해 놓고, 대신 제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지요. 그래야 부채가 안 닳는다면서 말입니다. 그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더랍니다.

    짚신이 닳는 것도 아까워서 맨발로 다니다가, 마을 어귀에 이르러서야 짚신을 신었다지요. 남들 보는 데서는 신은 척을 해야 하니까요. 장에 갈 때도 개울을 건너면 버선이 젖는다고, 버선을 벗어 품에 꼭 안고 찬물에 맨발을 담그며 건넜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옆집에서 굴뚝에 연기가 나면, 황 영감은 냉큼 밥그릇을 들고 담장 곁으로 갔더랍니다. 남의 집 고기 굽는 냄새를 반찬 삼아 밥을 먹겠다는 심보였지요. 그러다 옆집 주인이 "냄새 맡은 값을 내놓으라"고 우스갯소리를 하자, 황 영감은 정색을 하고 이렇게 되받았습니다.

    "허, 내가 언제 자네 집 고기를 먹었나? 냄새만 맡았지. 그럼 나도 값을 냈네. 엽전 소리 들려줬으니 냄새값은 소리로 치른 셈일세!"

    이러면서 주머니 속 엽전을 짤랑짤랑 흔들고는 유유히 돌아갔다지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옆집 주인이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더랍니다.

    이러니 재산이 안 불어날 수가 있나요. 논이 늘고 밭이 늘고, 곳간에는 쌀가마가 천장까지 쌓였습니다. 뒤주 밑에는 은자가 그득한 항아리가 몇 개나 묻혀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요. 상주 땅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바로 황억만 영감이었더랍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많은 재물을 쌓아 두고도, 황 영감은 참 외로운 사람이었어요.

    젊어 함께 고생하던 아내는 십수 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가 병들어 누웠을 때도, 황 영감은 약값이 아깝다며 좋은 약 한 첩을 제대로 지어 주지 않았지요. 그게 두고두고 한이 되었는지, 아내는 눈을 감으며 이런 말을 남겼더랍니다.

    "영감, 그 돈… 다 짊어지고 저승 갈 수 있을 것 같소?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법인데…"

    황 영감은 그 말을 흘려들었습니다. '죽은 사람 말이 다 무슨 소용인가. 산 사람은 어떻게든 모으고 봐야지.' 그렇게 속으로만 되뇌었지요.

    하나 있는 아들과도 진작에 등을 돌린 지 오래였습니다. 아들이 흉년에 굶주리는 이웃을 보다 못해 곳간 쌀 몇 되를 퍼 준 일이 있었거든요. 그날 황 영감은 아들에게 몽둥이를 들고 쫓아가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내 피땀 흘려 모은 곡식을 거저 퍼 주다니! 너 같은 놈은 내 자식도 아니다! 썩 나가거라!"

    그길로 아들은 처자식을 데리고 집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지요. 황 영감은 그런 아들이 괘씸하다면서도, 밤이면 홀로 빈 방에 앉아 애먼 담뱃대만 태우곤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황 영감을 슬슬 피했어요. 길에서 마주치면 혹시 뭐라도 빌려 달랄까 봐, 아니 반대로 빌려 간 거 갚으라 할까 봐 다들 슬금슬금 돌아갔습니다. 잔칫집에 불러 주는 이도, 상 치를 때 찾아와 주는 이도 없었지요.

    명절이 되면 더 쓸쓸했습니다. 이웃집에서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어오고, 떡 치는 소리, 전 부치는 냄새가 온 동네에 퍼지는데, 황 영감의 집만은 굴뚝에 연기 한 줄기 없이 적막했지요. 그래도 황 영감은 곳간 문을 열고 쌀가마를 세어 보는 것으로 헛헛한 마음을 달랬습니다. 재물이 늘어난 것을 확인할 때만큼은, 그 순간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흐뭇했으니까요.

    그렇게 황 영감의 곁에는 오직 재물뿐이었습니다. 사람은 없고 돈만 남은 삶이었지요. 하지만 정작 황 영감 본인은 그게 외로운 줄도 몰랐더랍니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는지도 모르지요.

    세월은 야속하게도 빨라서, 어느덧 황 영감의 등은 활처럼 굽고 머리는 서리처럼 하얘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늦가을이었어요. 찬 바람이 문풍지를 울리던 밤, 황 영감이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습니다.

    "어이쿠… 이게 웬일이냐…"

    숨이 턱턱 막히고 눈앞이 아뜩해졌지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황 영감의 손은 저도 모르게 허리춤을 더듬고 있었습니다. 뒤주와 곳간을 여는 열쇠 꾸러미. 그것을 꼭 움켜쥔 채였지요.

    '안 돼… 내 재물… 아직 안 돼…'

    넓은 기와집에 그 흔한 종년 하나 두지 않았으니, 쓰러진 노인을 발견해 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황 영감은 차디찬 방바닥에 홀로 누운 채, 점점 흐려지는 정신을 붙들려 안간힘을 썼지요.

    '게 아무도… 아무도 없느냐…'

    목구멍에서는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하고, 그저 마른 숨만 새어 나올 뿐이었습니다. 이 넓은 집에, 이 많은 재물을 두고, 물 한 모금 떠다 줄 사람이 없다니. 황 영감은 그제야 어렴풋이 무언가를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끝까지 붙들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지요.

    문틈으로 스며든 달빛이 노인의 야윈 얼굴을 비추었습니다. 그 순간, 황 영감의 귀에 아득히 먼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더랍니다. 넘실넘실, 검은 강물이 흐르는 소리였지요.

    그리고 열쇠를 움켜쥔 노인의 손이, 스르르 힘없이 풀렸습니다.

    ※ 2: 거울이 된 강물에 비친 텅 빈 마음의 장부

    얼마나 지났을까요.

    황 영감이 눈을 떴을 때, 그는 낯선 길 위에 서 있었습니다. 사방이 어스름한 잿빛으로 물든, 끝도 없이 뻗은 황톳길이었지요.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데, 이상하게도 몸이 조금도 무겁지 않았습니다. 그 지긋지긋하던 허리 통증도, 무릎 시린 것도 씻은 듯이 사라졌지요.

    "허, 이거 몸이 왜 이리 가뿐한고. 내가 병이 다 나은 겐가?"

    황 영감은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앞쪽에, 사람들이 줄을 지어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게 보이는 겁니다. 하나같이 넋이 나간 얼굴로, 말없이 터벅터벅. 황 영감도 얼결에 그 행렬을 따라 걷기 시작했지요.

    그 행렬 속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었습니다. 하얗게 센 머리의 노인도 있고, 아직 앳된 얼굴의 젊은이도 있었지요.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다들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습니다. 벼슬아치도, 장사치도, 농부도, 저승길에서는 하나같이 빈손이었지요. 이승에서 그리도 아등바등 움켜쥐던 것들을, 여기서는 아무도 지니고 있지 않았던 겁니다.

    "거, 뉘신지 모르나 여기가 대체 어디요?"

    황 영감이 옆에 걷던 노파에게 물었지만, 노파는 대꾸도 없이 그저 앞만 보고 걸을 뿐이었습니다. 저마다 제 앞길을 가느라, 남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 보였지요.

    한참을 걸어가니 커다란 강이 나타났습니다. 검디검은 물이 소리도 없이 넘실거리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강이었지요. 강가에는 안개가 자욱했고, 저편 기슭은 아득해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바로 그 강가에, 한 사내가 우뚝 서 있었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도포를 두르고, 검은 갓을 눌러쓴 사내였지요. 얼굴은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데, 두 눈만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손에는 두툼한 명부를 한 권 들고 있었고요.

    황 영감은 그 사내를 보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그제야 깨달은 겁니다. 아, 내가 죽었구나. 여기가 이승이 아니구나.

    "화, 황억만이 여기 있소만…"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대자, 검은 도포의 사내가 명부를 사르륵 넘겼습니다. 그러고는 나직하지만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지요.

    "경상도 상주 사는 황억만. 갑자년 생. 이제야 왔구먼."

    저승사자였습니다.

    황 영감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습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황 영감은 정신을 못 차리고, 저도 모르게 허리춤을 더듬는 겁니다. 그 열쇠 꾸러미를 찾으려고요. 하지만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곳간 열쇠도, 은자 항아리도, 논밭 문서도. 이승에 다 두고 온 것이지요.

    그 모습을 본 저승사자가 픽, 하고 헛웃음을 지었습니다.

    "허허, 죽어서까지 열쇠를 찾는 게냐. 참으로 지독하구나. 그 손에 쥐고 온 것이 무엇인지, 어디 한번 펴 보아라."

    황 영감이 얼떨결에 두 손을 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텅 비어 있는 겁니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지요. 그 많던 재물 중에 단 한 푼도, 저승길에는 가져오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자, 이제 저 강을 건너야 한다. 이 강을 건너면 다시는 이승으로 돌아가지 못하지. 그 전에, 네게 보여 줄 것이 있다."

    저승사자가 손을 들어 강물을 가리켰습니다. 그러자 검게 넘실거리던 강물 위로, 스르르 무언가가 비치기 시작했지요. 마치 거울처럼 말입니다.

    황 영감은 홀린 듯 강물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 비친 광경에, 그만 숨이 턱 막히고 말았지요.

    강물 속에는 자신의 집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방바닥에는, 싸늘하게 식은 자신의 시신이 홀로 누워 있었지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그 누구 하나 찾아오는 이가 없었습니다. 문상객은커녕, 노인이 죽은 줄을 아는 사람조차 없었던 겁니다.

    "보이느냐. 네가 평생을 바쳐 모은 그 재물이, 지금 네게 무엇을 해 주고 있느냐."

    황 영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강물에 비친 자신의 외로운 주검을 바라볼 뿐이었지요.

    이윽고 강물 위로 또 다른 광경이 떠올랐습니다. 이번엔 흉년이 들었던 어느 겨울이었어요. 굶주린 이웃들이 황 영감의 대문을 두드리며 쌀 한 줌만 꿔 달라 애원하는데, 황 영감은 문을 걸어 잠근 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요. 그 겨울, 굶어 죽은 아이의 어미가 황 영감의 집 대문 앞에서 통곡하던 모습까지, 강물은 낱낱이 보여 주었습니다.

    "이, 이건…"

    황 영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잊고 있었던, 아니 애써 잊으려 했던 지난날의 모습들이었지요. 강물은 마치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장부처럼, 황 영감이 살아온 세월을 고스란히 펼쳐 보였습니다.

    "이 강물은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니라. 이승에서 네가 쌓은 재물이 아니라, 네가 사람들에게 베푼 정과 덕을 비추는 거울이지. 자, 보아라. 네가 평생 쌓은 덕이 얼마나 되는지."

    저승사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물이 다시 잔잔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습니다. 텅 비어 있었지요. 마치 황 영감의 펼친 두 손처럼 말입니다.

    황 영감은 그제야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평생 그러모은 재물은 저승에서 한 푼도 쓸모가 없고, 정작 저승에서 값어치가 있다는 '덕'은 단 한 톨도 쌓지 못했다니.

    세상을 떠나던 아내가 남긴 말이, 그제야 천둥처럼 귓가에 울렸습니다.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법인데…' 그때는 흘려들었던 그 말이, 지금 이 강가에서는 뼈에 사무치도록 옳은 말이었지요.

    집을 나가던 아들의 얼굴도 떠올랐습니다. 굶주린 이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쌀 몇 되를 퍼 주었던 그 착한 아들을, 자신은 몽둥이를 들고 내쫓았지요. 그 아들이 옳았던 겁니다. 재물을 나눌 줄 알았던 아들이, 그 애가 옳았던 거예요.

    노인의 두 눈에서, 뜨거운 것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평생 단 한 번도 흘려 본 적 없던 눈물이었지요.

    "내가… 내가 헛살았구나… 이 어리석은 것이, 죽어서야 이걸 깨닫다니…"

    황 영감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습니다.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지만, 이미 강 앞에 선 몸. 되돌릴 방법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지요. 그저 검은 강물만이, 무심하게 넘실거릴 뿐이었습니다.

    ※ 3: '사람의 속을 보는 눈'이라는 선물

    주저앉아 흐느끼는 황 영감을, 저승사자는 한참이나 말없이 내려다보았습니다. 그 형형하던 눈빛이, 어쩐 일인지 조금 누그러진 듯도 했지요.

    이윽고 저승사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황억만. 너는 이제 저 강을 건너 염라대왕 앞으로 가야 한다. 허나 그 전에 묻겠다. 네가 만약… 다시 이승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하겠느냐."

    황 영감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번쩍 들었습니다.

    "도,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 늙은이가 무엇인들 못 하겠소! 내 재물을, 그 아까워서 벌벌 떨던 재물을, 굶주린 이들에게 다 나누어 주겠소! 아들을 찾아가 무릎 꿇고 빌겠소! 제발, 제발 한 번만…"

    저승사자는 그 말을 가만히 듣더니, 들고 있던 명부를 천천히 덮었습니다.

    "본래대로라면 너는 오늘 저 강을 건너야 마땅하다. 허나…"

    저승사자가 잠시 말을 멈추었습니다. 그러고는 강물에 비쳤던 한 장면을 다시 떠올리게 했지요. 다름 아닌, 흉년에 아들이 몰래 이웃에게 쌀을 퍼 주던 그 장면이었습니다.

    "네 핏줄 중에 덕을 아는 이가 있었다. 네 아들이 남몰래 베푼 그 쌀 몇 되가, 여러 목숨을 살렸느니라. 그 아이가 쌓은 덕이, 오늘 네게 실낱같은 길을 열어 주었다. 자식이 쌓은 덕으로, 아비가 기회를 얻은 셈이지."

    황 영감은 그 말에 그만 목이 메었습니다. 그렇게 매질하고 내쫓은 아들이, 결국 이 마지막 순간에 아비를 구하는 밧줄이 되어 준 것이었으니까요.

    "염라대왕께서 특별히 명하시었다. 황억만에게 사흘의 말미를 주라. 사흘 동안 이승으로 돌려보내, 스스로 깨달은 바를 행하게 하라. 만일 그 사흘을 헛되이 보낸다면, 너는 영영 이 강을 건너 가장 어두운 곳으로 떨어질 것이다. 허나 그 사흘을 참되게 산다면…"

    저승사자가 말끝을 흐렸습니다. 그 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황 영감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지요. 무언가 다른 길이 열릴 수도 있다는 것을요.

    "명심하여라. 사흘이다. 단 사흘. 그 시간이 지나면,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든 나는 너를 데리러 갈 것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네게 선물을 하나 주마."

    저승사자가 검은 소맷자락을 들어, 황 영감의 두 눈을 스윽 쓸었습니다. 순간 황 영감의 눈앞이 환해지는 듯하더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지요. 세상이 전과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이제 너는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속마음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누가 진정으로 웃고 누가 속으로 우는지, 누가 참되고 누가 거짓인지, 네 눈에 훤히 보일 것이다. 이것이 네게 주는 깨달음의 선물이니라. 부디… 헛되이 쓰지 말거라."

    '사람의 속마음을 보는 눈이라니…'

    황 영감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재물도 아니고, 목숨을 늘려 주는 것도 아니고, 고작 남의 속을 들여다보는 눈이라니요. 이게 무슨 선물인가 싶었지요. 하지만 저승사자의 눈빛이 어찌나 깊던지, 함부로 되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하여 하필 그런 눈을 주시는 게요?"

    황 영감이 조심스레 묻자, 저승사자가 나직이 대답했습니다.

    "네가 평생 재물만 보고 살았으니, 이제는 사람을 보고 살라는 뜻이다. 재물은 셈할 줄 알면서 사람의 마음은 셈할 줄 몰랐던 것이, 네 가장 큰 죄였느니라. 이 눈으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무엇이 참으로 귀한 것인지 절로 알게 될 것이야."

    황 영감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저승사자가 손을 들어 왔던 길을 가리켰습니다.

    "자, 어서 돌아가거라. 사흘 뒤, 다시 보자꾸나."

    그 말과 함께, 저승사자가 검은 도포 자락을 크게 휘둘렀습니다. 그러자 자욱하던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황 영감을 감쌌고, 검은 강물 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지요. 몸이 아득히 높은 곳으로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 잠깐! 사흘 뒤라니, 그게 정확히 언제요? 그리고 어떻게 해야 참되게 사는 것이오? 좀 더 일러 주시오!"

    황 영감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저승사자의 모습은 이미 안개 속으로 흐릿하게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서늘하면서도 어딘가 따뜻한 목소리가 아득히 들려왔지요.

    "그건 네 마음이 알 것이다. 참되게 사는 법을 몰라서 못 사는 이는 없느니. 다만 안 하려 할 뿐이지…"

    그 목소리를 끝으로, 황 영감의 정신이 아뜩해졌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꼬끼오― 하고 새벽을 알리는 그 소리에, 황 영감이 번쩍 눈을 떴지요.

    눈을 뜨니, 낯익은 천장이 보였습니다. 굴비가 대롱대롱 매달린, 바로 자기 방 천장이었지요. 손을 더듬어 보니 차디찬 방바닥, 그리고 허리춤에는 여전히 열쇠 꾸러미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허, 헉! 이, 이게 꿈이었나! 아니, 아니야. 분명 저승사자를… 그 검은 강물을…"

    황 영감은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지요. 창호지 문틈으로 희붐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이승으로 돌아온 것이었어요.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을 만져 보고, 팔다리를 주물러 보았습니다. 틀림없는 자신의 몸, 살아 있는 몸이었지요. 그 순간 황 영감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습니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서니, 동녘 하늘이 발갛게 물들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보던 그 아침 해였지만, 오늘따라 어찌 그리 눈부시던지요. 살아 있다는 것이, 이 아침을 다시 맞을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고맙고 벅찰 수가 없었습니다. 황 영감은 마당 한복판에 서서 한참을 하늘만 올려다보았지요.

    '사흘… 사흘이라고 하였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딱 사흘…'

    황 영감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평생 재물을 움켜쥐던 그 손으로, 이번엔 전혀 다른 결심을 움켜쥐었지요.

    '그래, 이 늙은이가 남은 사흘을 어찌 사는지, 저승사자 그자에게 똑똑히 보여 주마. 헛되이 살지 않으리라! 이 황억만이가, 죽어서 부끄럽지 않을 사흘을 살아 보이리라!'

    그리고 그날 아침, 상주 땅 제일가는 구두쇠 황억만 영감의, 지금껏 세상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놀라운 사흘이 시작되었더랍니다.

    ※ 4: 처음으로 베풀며 알게 된 뜨거운 기쁨

    그길로 황 영감은 곳간 문을 활짝 열어젖혔습니다.

    천장까지 그득 쌓인 쌀가마들이 눈에 들어왔지요. 예전 같으면 이 쌀 한 톨이 축날까 봐 밤잠을 설쳤을 황 영감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어요. 이 쌀이, 이 재물이 다 무슨 소용인가. 저승 강물에 비친 텅 빈 장부가 떠오르자, 황 영감은 이를 악물었습니다.

    "게 아무도 없느냐! 이 쌀들을, 어서 지게에 지고 마을로 나르거라!"

    허나 부를 사람이 있어야지요. 종 하나 두지 않은 집이니, 결국 황 영감이 손수 쌀자루를 짊어졌습니다. 일흔 넘은 노인이 쌀가마를 지고 비틀비틀 대문을 나서니,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졌지요.

    "아니, 저게 누구여? 황 영감 아녀?"

    "어이구, 해가 서쪽에서 떴나! 저 자린고비가 쌀자루를 지고 나오다니!"

    황 영감은 그 수군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집부터 찾아갔습니다.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흉년에 아이를 잃었던 바로 그 집이었지요. 문을 두드리자 뼈만 앙상한 아낙이 겁먹은 얼굴로 나왔습니다.

    "화, 황 영감님이 어인 일로…"

    빚 독촉이라도 온 줄 알았는지, 아낙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저승사자가 준 눈이 빛을 발했습니다. 황 영감의 눈에, 아낙의 속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겁니다. 두려움과 서러움, 그리고 어린 자식들을 굶기지 않으려 밤낮으로 애태우는 그 지친 마음이요.

    황 영감은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그러고는 짊어진 쌀자루를 마당에 털썩 내려놓았지요.

    "이거… 이걸 받아 두게. 그동안… 내가 참 모질었네. 자네 집 굶는 걸 뻔히 알면서도 문을 걸어 잠갔으니… 이 늙은이를 용서하게."

    아낙은 어리둥절해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저 지독한 구두쇠 황 영감이, 쌀을 거저 주다니요. 게다가 용서를 빌기까지 하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지요.

    "어, 어찌 이런 걸… 무슨 다른 뜻이 있으신 겝니까?"

    아낙이 선뜻 받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 겁부터 났던 게지요. 하기야, 평생 남에게 물 한 모금 안 주던 사람이 갑자기 쌀을 한 가마니나 주니, 어찌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그 마음을 눈으로 읽은 황 영감이, 껄껄 웃으며 말했습니다.

    "허허,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내가 그동안 어찌 살았는지 내가 잘 아니까. 허나 다른 뜻은 없네. 그저… 이 늙은이가 이제라도 사람답게 살아 보려는 것뿐이야. 어서 받게. 아이들 배 안 곯리는 게 먼저 아닌가."

    그제야 아낙이 왈칵 눈물을 쏟으며 쌀자루를 끌어안았습니다. 방 안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어린 남매도 쪼르르 달려 나와 어미 치마폭에 매달렸지요. 그 아이들의 밝아지는 얼굴을 보는데, 황 영감의 가슴속에서 여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뜨겁고 뭉클한 것이 차올랐습니다.

    '허, 이런 기분이었구나. 남에게 무언가를 주고 이리 기쁠 수가 있다니. 내 평생 쌀 한 가마를 손에 쥘 때보다, 지금 이 쌀 한 가마를 내어 줄 때가 백 배는 더 기쁘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황 영감의 발걸음은 어찌나 가볍던지요. 곳간이 한 가마 줄었는데도, 마음은 되레 그득하게 채워진 느낌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목에서, 황 영감은 우물가에 모여 앉은 아낙들을 보았습니다. 그중 한 젊은 아낙이 유독 낯빛이 어두웠지요. 저승사자가 준 눈으로 그 속을 들여다보니, 병든 시어머니 약값이 없어 애를 태우는 마음이 훤히 보였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동이를 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었던 게지요.

    황 영감은 잠시 망설였습니다. 예전 같으면 남의 일에 엽전 한 닢 내놓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내 품에서 은자 몇 냥을 꺼내, 그 아낙의 손에 슬며시 쥐여 주었습니다.

    "이걸로 시어머님 약을 지어 드리게. 좋은 약으로 말이야."

    아낙이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습니다. "아이고, 황 영감님, 이 큰돈을 어찌…" 하지만 황 영감은 빙그레 웃으며 아낙의 손을 도로 꼭 쥐여 주고는 돌아섰지요. 등 뒤로 아낙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황 영감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예전엔 내 아내가 병들었을 때도 약값이 아까워 벌벌 떨었더랬지. 그게 두고두고 한이 되었건만. 이제라도 누군가의 어미를 살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조금이나마 갚는 셈이려나.'

    그런데 마을을 지나며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저승사자가 준 눈 덕분에 참 많은 것이 보였습니다. 겉으로는 웃으며 인사하지만 속으로는 남을 헐뜯는 사람, 반대로 무뚝뚝한 얼굴이지만 속은 더없이 따뜻한 사람. 비단옷을 걸쳤어도 마음이 텅 빈 이가 있는가 하면, 누더기를 걸쳤어도 마음만은 비단결 같은 이가 있었지요.

    황 영감은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평생 자신이 얼마나 헛된 것에 눈이 멀어 살았는지를요. 사람의 겉만 보고, 재물의 많고 적음만 보고 살았으니, 정작 중요한 사람의 마음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던 겁니다.

    '재물로는 살 수 없는 것이 있었어. 저 아이들의 웃음, 저 아낙의 눈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저 따뜻한 정… 내가 그걸 모르고 평생을 살았구나.'

    첫째 날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황 영감은 자리에 누워 오래도록 뒤척였습니다. 후회와 뉘우침, 그리고 벅찬 기쁨이 뒤섞여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풀지 못한 큰 응어리가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집을 나가 소식이 끊긴 아들이었지요.

    '그 아이를… 그 착한 아이를 내가 그리 내쫓았으니. 남은 이틀 안에, 반드시 그 아이를 찾아가 무릎 꿇고 빌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내 눈을 감을 수가 없어.'

    황 영감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부릅떴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아들을 찾아 길을 나서리라, 그렇게 굳게 다짐하면서 말이지요. 이제 남은 시간은 이틀. 그 이틀 안에 반드시 아들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노인의 가슴은 초조하게 뛰었습니다. 창밖에서는 첫날밤의 별들이, 유난히도 총총하게 빛나고 있었더랍니다.

    ※ 5: 내쫓았던 아들을 찾아가 무릎 꿇고 이룬 화해

    이튿날 첫새벽, 황 영감은 봇짐을 꾸려 길을 나섰습니다.

    아들이 처자식을 데리고 떠난 뒤로 소식이 끊긴 지 어언 여러 해. 어디로 갔는지도 몰랐지만, 풍문에 이웃 고을 어드메에서 남의 집 농사를 지으며 산다는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었지요. 황 영감은 그 실낱같은 소문 하나에 의지해, 지팡이를 짚고 산길을 넘고 또 넘었습니다.

    일흔 넘은 노인의 걸음이 오죽했겠습니까.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턱에 차올랐지요. 예전 같으면 짚신 닳는 게 아까워 맨발로 걸었겠지만, 오늘만은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오직 아들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뿐이었지요.

    '그 아이가 나를 보면 문전박대하지는 않을까. 하기야, 그럴 만도 하지. 내가 그 애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산을 넘는 내내, 황 영감의 머릿속에는 지난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어린 아들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던 모습, 처음으로 "아버지" 하고 부르던 그 목소리. 그때는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 같던 아들이었건만, 언제부터인가 재물에 눈이 멀어 자식마저 뒷전으로 밀어냈던 겁니다.

    '내가 재물을 곳간에 쌓는 동안, 정작 곁에 있던 사람들을 다 잃었구나. 아내를 잃고, 자식을 잃고, 이웃을 잃고… 그러고도 나는 그게 부자인 줄 알았으니.'

    발이 부르트고 다리에 쥐가 나도, 황 영감은 쉬지 않았습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한시가 급했던 게지요.

    해가 중천에 뜰 무렵, 황 영감은 마침내 이웃 고을의 어느 초라한 마을에 다다랐습니다. 지나가는 이에게 아들의 이름을 대며 수소문하니, 한 노인이 저 산비탈의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을 가리켰지요.

    "아, 그 사람이라면 저 집에 사오. 참 성실하고 인심 좋은 사람이지. 가난해도 제 것 나눌 줄 아는 양반이여."

    그 말을 듣는 순간, 황 영감의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가난 속에서도 나눌 줄 아는 사람이라니. 제 아비와는 딴판으로 자란 아들이, 그렇게 곱게 살고 있었던 겁니다.

    떨리는 손으로 사립문을 밀고 들어서니, 마당에서 지게를 손질하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세월에 그을리고 야위었지만, 틀림없는 아들의 얼굴이었지요.

    "아, 아버지…?"

    아들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습니다. 몇 해 만에 나타난 아버지라니. 반가움인지 원망인지 모를 복잡한 표정이었지요. 바로 그때, 저승사자가 준 눈이 아들의 속마음을 비추었습니다.

    그런데 황 영감은 그만 목이 메고 말았습니다. 아들의 마음속에는, 원망보다 그리움이 더 컸던 겁니다. 매정하게 쫓겨났으면서도, 늙은 아비가 홀로 어찌 지내나 늘 걱정하던 마음. 명절이면 고향 쪽 하늘을 바라보며 남몰래 눈물짓던 마음. 그 애틋한 속정이, 황 영감의 눈에 훤히 들여다보였던 것이지요.

    "이 아비다… 이 못난 아비가, 너를 보러 왔다."

    황 영감은 더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습니다. 일흔 넘은 아비가 아들 앞에 무릎을 꿇으니, 아들이 기겁을 하며 달려와 부축했지요.

    "아버지! 이러지 마십시오! 어찌 이러십니까!"

    "아니다. 이건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얘야, 그때… 흉년에 굶는 이웃에게 쌀 몇 되 퍼 준 널 내가 몽둥이로 내쫓았지. 그게 옳은 일이었거늘, 그 착한 마음이 옳은 것이었거늘, 이 눈먼 아비가 그걸 몰랐구나. 내가 잘못했다. 정말… 정말 잘못했다."

    황 영감의 두 뺨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평생 재물밖에 모르던 아비의 눈물을 본 아들도, 그예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지요. 부자가 마당에 엉겨 붙어 한참을 울었습니다. 몇 해의 원망과 그리움이, 그 눈물로 다 씻겨 내려가는 듯했지요.

    방 안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며느리와 손주들도 하나둘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특히 어린 손자는, 언젠가 밥상머리에서 굴비를 두 번 봤다고 혼이 났던 바로 그 아이였지요. 이제 제법 자란 그 손자가 쭈뼛쭈뼛 다가와 "하, 할아버지…" 하고 부르자, 황 영감은 아이를 와락 끌어안았습니다.

    "오냐, 오냐, 내 새끼. 이 할애비가 미안하다. 그때 굴비 한 번 더 본 게 무슨 대수라고… 이 할애비가 참으로 어리석었다."

    그날 저녁, 아들네 식구는 없는 살림에도 정성껏 밥상을 차렸습니다. 보리밥에 나물 몇 가지, 된장국이 전부인 조촐한 상이었지만, 황 영감에게는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맛있고 따뜻했지요. 온 식구가 둘러앉아 도란도란 정을 나누는 그 밥상이야말로, 황 영감이 평생 곳간 가득 쌓아 두고도 누리지 못한 진짜 부(富)였던 겁니다.

    '이것이었구나.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이. 재물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었어.'

    문득 며느리의 얼굴을 살펴보니, 그 눈에는 원망이 서릴 법도 한데 오히려 시아비를 딱하게 여기는 따뜻한 마음이 어려 있었습니다. 저승사자가 준 눈으로 그 속을 들여다본 황 영감은, 또 한 번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지요. 이토록 고운 사람들을, 자신이 얼마나 모질게 내쳤던가 싶어서요.

    "아가야, 그동안 이 못난 시아비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겠구나. 남편 하나 믿고 시집와서, 시아비라는 자가 그 모양이었으니… 참으로 면목이 없다."

    며느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어요, 아버님. 이렇게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저이가 얼마나 아버님을 그리워했는지 모릅니다." 그 말에 황 영감의 가슴이 다시 한 번 뭉클해졌지요.

    밤이 깊도록 황 영감은 아들 내외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저승사자와의 약속이 떠올랐지요. 사흘.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황 영감은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얘야. 내일 아침, 나와 함께 상주 집으로 가자꾸나. 이 아비가 너에게… 꼭 보여 주고, 또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구나."

    아들은 영문을 몰랐지만,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의 청을 마다할 리 없었지요. 그렇게 부자는, 다음 날을 기약하며 오랜만에 한 방에 나란히 누웠습니다. 황 영감은 아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 편히 눈을 감았더랍니다.

    ※ 6: 전 재산을 마을에 나누고 평온히 저승길에 오르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황 영감은 아들 내외와 함께 상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들은 그제야 아버지의 뜻을 어렴풋이 짐작했지요. 황 영감이 곳간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온 마을에 이렇게 외쳤던 겁니다.

    "동네 사람들! 다들 우리 집으로 오시오! 이 황억만이가,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소이다!"

    처음엔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습니다. 저 지독한 구두쇠가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서요. 하지만 어제 쌀을 받은 아낙이, 은자로 시어머니 약을 지은 젊은 아낙이 앞장서서 사람들을 데려왔지요. 이윽고 마당 가득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황 영감은 곳간에 쌓인 쌀가마를 하나하나 내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이 쌀을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다 나누어 드리겠소. 형편이 어려운 집부터, 가져갈 수 있는 만큼 가져가시오! 그리고 이 논밭 문서들도…"

    황 영감이 품에서 두툼한 문서 뭉치를 꺼냈습니다. 평생을 그러모은 논밭의 땅문서였지요.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이 문서에 적힌 논밭을, 그동안 소작을 부치던 이들에게 그냥 나누어 주겠소. 이제 그 땅은 여러분 것이오. 뼈 빠지게 농사지어 소출을 나에게 바칠 것 없이, 여러분 식솔들 배불리 먹이시오!"

    마당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사람들은 제 귀를 의심했지요. 상주 제일의 부자가, 그 지독한 자린고비가, 전 재산을 통째로 마을에 내놓겠다니요. 여기저기서 감격의 울음이 터지고, 황 영감을 향해 넙죽 절을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들이, 조용히 아버지 곁으로 다가와 물었습니다.

    "아버지, 어인 일로 갑자기 이러십니까. 무슨… 무슨 연유가 있으신 겝니까?"

    황 영감은 빙그레 웃으며 아들의 어깨를 다독였습니다.

    "얘야, 사람이 죽을 때 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재물이 아니더구나. 오직 살아생전 베푼 정과 덕뿐이더라. 나는 이제야 그걸 알았으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갚으며 가려는 것뿐이다. 너는 그저 이 아비를 이해해 다오."

    아들은 그 말의 깊은 뜻을 다 헤아리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눈빛에서 무언가 결연한 것을 느끼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요.

    그날 황 영감의 집에서는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곳간의 쌀로 밥을 짓고 떡을 치고, 그동안 아까워서 못 잡던 소도 한 마리 잡았지요. 온 마을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들었습니다. 평생 굴뚝에 연기 한 줄기 없이 적막하던 황 영감의 집이, 그날만은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지요.

    아이들은 마당을 뛰어다니고, 노인들은 오랜만에 배불리 먹었다며 연신 황 영감을 칭송했습니다. 예전에 냄새값을 소리로 치렀다던 그 옆집 주인도 찾아와, "황 영감, 오늘은 내가 자네한테 절이라도 올려야겠네!" 하며 껄껄 웃었지요. 서로 등 돌리고 살던 이웃들이, 그 잔치마당에서 다시 정을 나누고 화해했습니다. 황 영감의 베풂 하나가, 온 마을을 이렇게 훈훈하게 데워 놓은 것이었지요.

    황 영감은 그 광경을 마루에 앉아 흐뭇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저승사자가 준 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니, 그 어디에도 거짓이나 미움이 없었습니다. 다들 진심으로 기뻐하고, 진심으로 황 영감에게 고마워하고 있었지요. 그 따뜻한 마음들이 마당 가득 넘실거리는 것을 보며, 황 영감은 생각했습니다.

    '이제야 내 마음의 장부에도, 무언가 적히기 시작하는구나. 텅 비었던 그 장부에 말이야.'

    잔치가 끝나고 밤이 깊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하나둘 돌아가자, 황 영감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고는 아들 내외를 방으로 불러, 두 손을 꼭 잡았지요.

    "얘야, 아가야. 오늘 이 아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너희와 이렇게 다시 만나고, 마을 사람들과 정을 나누고… 이보다 더 바랄 게 무엇이 있겠느냐. 부디 앞으로도, 가진 것 없어도 나누며 살거라. 그것이 참으로 부자가 되는 길이니라."

    그 말을 남기고, 황 영감은 자리에 편안히 누웠습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었지요. 창밖을 보니, 어느새 안개가 스멀스멀 마당으로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낯익은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지요.

    검은 도포에 검은 갓을 쓴, 바로 그 저승사자였습니다.

    "약속한 사흘이 되었구나, 황억만."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황 영감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가운 벗을 맞듯, 잔잔한 미소를 지었지요.

    "오셨소이까. 덕분에… 참으로 값진 사흘이었소. 이 늙은이, 이제 여한이 없소이다."

    저승사자가 황 영감의 마음을 들여다보듯 가만히 응시하더니, 나직이 말했습니다.

    "네 마음의 장부를 보았다. 사흘 만에 텅 비었던 장부가, 이토록 그득하게 채워졌구나. 재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던 것이, 정과 덕으로 가득하니… 참으로 놀랍도다."

    그러고는 저승사자가, 처음으로 빙긋이 웃었습니다.

    "염라대왕께서 명하시었다. 황억만은 저 어두운 강 대신, 밝고 따뜻한 길로 인도하라. 그리고 다음 생에는… 나누는 기쁨을 아는 넉넉한 마음으로 태어나게 하라 하시었느니라."

    황 영감의 두 눈에 맑은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는 편안히 눈을 감으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속삭였지요.

    '고맙습니다… 이 어리석은 늙은이에게, 다시 사람답게 살 기회를 주셔서…'

    이튿날 아침, 아들이 아버지를 깨우러 방에 들어갔을 때, 황 영감은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습니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 있었지요.

    그 후로 상주 땅에서는 이런 말이 오래도록 전해졌더랍니다. 평생 재물만 그러모으던 자린고비 황 영감이, 마지막 사흘을 세상에서 가장 넉넉한 부자로 살다 갔노라고요. 그리고 사람들은 알게 되었지요. 곳간에 쌓은 재물이 아니라, 마음에 쌓은 덕이야말로 저승길에 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오늘 내가 쌓고 있는 것은, 곳간의 재물입니까, 아니면 마음의 덕입니까. 부디 우리 모두, 황 영감의 사흘을 마음에 새기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250자 내외)

    오늘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평생 곳간만 채우던 황 영감이 마지막 사흘 동안 채운 것은, 다름 아닌 마음의 장부였습니다. 재물은 저승길에 한 푼도 지고 갈 수 없지만, 살아생전 나눈 정과 덕은 영원히 남는다는 옛 어른들의 지혜가, 참 깊고도 따뜻하지요. 오늘 하루,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 보시는 건 어떨까요. 이 이야기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립니다. 다음 이야기로 또 찾아뵙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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