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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동안 한양을 떠돈 귀신 (출처: 어우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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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248자)
300년의 긴 세월, 한양의 낡은 집터에는 밤마다 구슬픈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복수를 원하는 것도, 재물을 탐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름도, 위패도 없이 스러져간 한 영혼이 그토록 간절히 찾던 것은 단 하나, 잊혀진 자신의 이름 석 자였습니다. 한 선비의 따뜻한 마음이 300년 묵은 한을 풀어주는 기적, 오늘 밤 그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디스크립션 (298자)
'어우야담'의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가슴 뭉클한 전설. 억울한 죽음을 맞고 역사 속에서 이름마저 지워진 채 300년간 구천을 떠도는 한 선비 귀신의 이야기입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귀신의 울음소리에서 깊은 슬픔(한)을 읽어낸 마음씨 고운 선비가, 잊혀진 영혼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벌이는 고된 여정을 담았습니다. 기억과 위로의 진정한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감동적인 야담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한양의 흉가, 밤의 울음소리
조선 숙종 시절, 번화한 도성 한양에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진 곳이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서산(西山) 아래 오래된 기와집 한 채는 장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쉬쉬하며 이야기하는 흉가였습니다. 집은 지어진 지 족히 수백 년은 되어 보였는데, 기둥은 썩고 기와는 깨져나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모습이었습니다. 대낮에 보아도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그 집에서는, 해가 지고 인적이 끊기면 어김없이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깊은 밤, 온 세상이 잠들었을 때면 어디선가 구슬픈 울음소리가 담장을 넘어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는 남자의 것 같기도 하고, 여인의 것 같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어린아이의 흐느낌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원한에 사무친 절규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위협하는 소리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세상의 모든 슬픔을 다 짊어진 듯한,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이는 처절한 서러움이 담긴 울음소리였습니다.
처음에는 담력 좋은 장정들이나 호기심 많은 한량들이 기왓장을 던지며 소리의 정체를 밝히려 했지만, 그럴수록 울음소리는 더욱 구슬퍼질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 굿을 벌이기도 했지만, 무당마저도 "이것은 원한이 아니라 한(恨)이 너무 깊어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라,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다"며 혀를 내두르고 도망쳤습니다. 그 뒤로는 아무도 그 집에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집은 자연스레 버려졌고, 마당에는 잡초가 사람 키만큼 자라나 스산한 분위기를 더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집의 귀신을 '울보 귀신' 혹은 이름 없이 떠돈다 하여 '무명귀(無名鬼)'라 부르며 두려워했습니다. 혹자는 수백 년 전 역모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일가의 원혼이라 했고, 또 혹자는 전란 통에 부모를 잃고 굶어 죽은 아이의 넋이라 수군거렸지만, 그 유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 집은, 그 안에 깃든 영혼의 슬픈 사연과 함께 한양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 가는 듯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가을, 그 흉가에 뜻밖의 인물이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박진원, 비록 가세는 기울어 끼니를 걱정하는 처지였지만, 성품이 대쪽같이 곧고 마음이 비단결처럼 고운 가난한 선비였습니다. 그는 과거 준비를 위해 한양에 올라왔으나, 방 한 칸 구할 돈이 없어 막막해하던 차에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나와 있는 이 집을 얻게 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역시 흉가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집주인조차 "목숨이 아까우면 들어가지 말라"고 혀를 찼고, 주변 이웃들은 그를 미친 사람 보듯 했습니다. 하지만 박 선비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산 사람도 머물 곳이 없는데, 죽은 이의 사정이라고 다를 바 있겠습니까. 귀신 또한 필시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을 터, 내 어찌 사람 사는 집을 귀신에게 내어주고 길바닥에서 떨겠습니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짐을 풀고, 먼지가 뽀얗게 쌓인 집안을 쓸고 닦으며 새 보금자리를 정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정성스러운 손길에, 오랫동안 온기라곤 없었던 낡은 고택은 아주 조금씩, 사람 사는 온기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손님은, 해가 진 뒤에야 찾아올 터였습니다.
※ 마음씨 고운 선비, 귀신과 마주하다
어느덧 해가 지고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박 선비는 손수 쑤어 올린 멀건 죽으로 저녁을 때우고, 작은 등잔불 아래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이 문풍지를 흔드는 소리, 귀뚜라미 우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깊은 정적이 흘렀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잠든 듯한 그 고요함 속에서, 그는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흉가라는 소문이 무색할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헛소문을 믿고 이 좋은 집을 비워두었구나.’ 그가 그리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어디선가, 아주 희미한 흐느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인가, 혹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인가 하였지만, 그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하고 가까워졌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바로 그 울음소리였습니다.
"흐읍... 흐으윽..." 마치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쥐어짜 내는 듯한 소리. 그 소리에는 칼날 같은 원망도, 불같은 증오도 없었습니다. 그저 가슴이 꽉 막힌 사람이 차마 터뜨리지 못하고 삼키고 또 삼키는, 그런 종류의 슬픔이 담겨 있었습니다. 소리는 대청마루를 맴도는 듯하다가, 박 선비가 있는 방문 앞까지 다가와 멈추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듯, 소름 끼치는 상황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 떨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박 선비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등잔불에 흔들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깊은 연민의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그는 두려움 대신, 저 울음소리의 주인이 겪었을 깊은 슬픔을 먼저 헤아렸던 것입니다. ‘오죽이나 서럽고 억울하면,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밤마다 저리 설피 울고 있을까. 산 자와 죽은 자의 길은 다르다 하나, 슬픔의 무게야 어찌 다르겠는가.’
박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혔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듯,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밖에 계신 분이 뉘신지는 모르겠으나, 그 울음소리를 들으니 제 마음이 다 아파옵니다. 필시 이 세상에 풀지 못한 깊고 깊은 한이 맺히신 게겠지요." 그의 목소리는 조금의 떨림도 없었습니다. "이 미천한 선비가 당신의 한을 풀어드릴 능력은 없겠으나, 그 억울한 사연이라도 들어드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혹여 괜찮으시다면, 저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혼자서만 끌어안고 있으면 병이 되는 법,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으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의 진심 어린 위로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방문 밖에서 들려오던 울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내, 언제 울었냐는 듯 주변은 다시 깊은 정적에 휩싸였습니다. 박 선비는 그 밤,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혹시나 영혼이 다시 찾아올까 싶어, 밤이 새도록 잠들지 않고 뜬눈으로 등잔불 앞을 지켰습니다. 그 따뜻한 마음이, 300년간 굳게 닫혀 있던 어느 외로운 영혼의 마음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열고 있었습니다.
※ 300년의 한, 꿈속의 호소
뜬눈으로 밤을 새운 박 선비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시 책상에 엎드려 눈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주 깊고도 기이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낡은 기와집의 대청마루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은 낡고 허름한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기둥은 웅장했고, 서까래에는 아름다운 단청이 선명했으며, 마당에는 이름 모를 고운 꽃들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마치 수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집은 과거의 영화로웠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박 선비가 넋을 잃고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 마루 저편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갓을 단정히 쓰고, 푸른색 도포를 입은 젊은 선비의 모습이었습니다. 용모는 무척이나 준수하였으나, 그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고, 두 눈에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슬픔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그의 몸이었습니다. 달빛에 비친 그의 모습은 마치 옅은 안개처럼 투명하여, 그의 등 뒤로 마당의 풍경이 희미하게 비쳐 보였습니다. 사람이 아닌, 영혼이었습니다.
박 선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지만, 젊은 선비 귀신은 그를 해칠 듯한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박 선비의 앞에 멈추어 서서, 깊이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밤사이, 선비님의 따뜻한 위로에 소생의 굳었던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부디 저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지난밤 들었던 울음소리처럼, 깊은 한이 서려 있었습니다. 박 선비는 꿈속임을 인지하고, 침착하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이 집에 깃든 영혼이십니까? 대체 어떤 사연이 있기에, 그리도 오랜 세월을 슬피 울고 계셨던 겁니까." 그러자 선비 귀신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300년 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자신의 기구한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인 광해군 시절, 이 집에 살던 전도유망한 젊은 학자였습니다. 그는 스무 살의 나이에 장원급제를 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아름다운 여인과 혼인하여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길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정을 휩쓸던 끔찍한 당쟁의 소용돌이가 그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킨 것이었습니다. 그는 올곧은 성품 때문에 간신들의 눈 밖에 났고, 결국 있지도 않은 역모 사건에 휘말려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는 의금부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에 눈이 먼 간신들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대역죄인이라는 오명을 쓴 채, 젊은 나이에 망나니의 칼날 아래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의 어여쁜 아내는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끔찍했던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역모로 몰았던 세력은 그의 존재 자체를 역사에서 지워버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모든 관청 기록에서 삭제되었고, 그가 쓴 모든 글은 불태워졌으며, 심지어 집안의 족보에서마저 그의 이름이 파내어졌습니다. 그는 그렇게,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흔적도 없이, 이름도 없이 죽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 위패는 누가 모셔주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차가운 원혼이 되어 자신이 살던 이 집터를 300년 동안 떠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선비 귀신은 박 선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습니다. "선비님... 소생은 복수를 원치 않습니다. 저를 해친 이들은 이미 세월 속에 모두 사라졌으니,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저의 마지막 소원은 단 하나, 그저 저의 이름 석 자를 되찾는 것이옵니다. 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제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단 한 사람이라도 기억해 주는 것... 그것이 저의 300년 묵은 한이옵니다. 부디... 저의 이름을 찾아주시옵소서..." 그의 처절한 호소와 함께, 박 선비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창밖은 이미 동이 터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 선비의 귓가에는, 꿈속 선비의 애절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맴돌고 있었습니다.
※ 잊혀진 이름을 찾아서
꿈에서 깨어난 박 선비의 마음은 무겁고도 비장했습니다. 간밤의 꿈은 그저 하룻밤의 허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3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억울함에 몸부림쳤던 한 영혼의 처절한 절규이자, 이 미천한 자신에게 마지막 희망을 담아 보낸 간절한 부탁이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그 집의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영혼의 깊은 한(恨)을 풀어주는 것이 이 집에 발을 들인 자신의 숙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박 선비는 붓과 종이를 챙겨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300년 전, 광해군 시절에 역모로 몰려 이름 없이 죽어간 젊은 선비. 단서는 그것뿐이었습니다. 망망대해에 떨어진 바늘을 찾는 것과도 같이 막막하고 아득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첫걸음은 관청의 기록 보관소, 즉 사료고(史料庫)로 향했습니다. 그는 먼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공식적인 역사 기록부터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혹시라도 광해군 시절의 수많은 옥사(獄事) 기록 속에 이름이 지워진 흔적이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며칠 밤낮으로 그는 먼지와 좀벌레 냄새가 진동하는 서고에 틀어박혀, 사람 키만 한 서책 더미와 씨름했습니다. 빽빽하게 적힌 한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역모에 대한 기록을 찾았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꿈속 귀신의 말대로, 관련된 기록은 모두 있었으되, 그의 이름이 들어갈 만한 자리는 텅 비어 있거나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의 존재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너무나도 완벽하고 잔인하게 지워져 있었습니다. 권력이 한 인간의 삶을 얼마나 철저하게 유린할 수 있는지, 그는 삭막한 글자들 속에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서고를 지키는 늙은 관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젊은 선비가 과거 공부는 않고, 어찌하여 돈도 안 되는 뜬구름 잡는 소리에 매달리는가"라며 혀를 차기도 했습니다.
공식적인 기록에서 단서를 찾는 것을 포기한 박 선비는, 이제 야사(野史)나 개인이 남긴 문집들로 눈을 돌렸습니다. 나라의 기록이 아닌,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나 개인이 남긴 기록이라면 혹시 지워지지 않은 진실의 파편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한양의 헌책방을 뒤지고, 오래된 양반가들을 찾아다니며 족보나 문집을 빌려 읽기를 청했습니다. 하지만 300년이라는 세월은 너무나도 길었습니다. 대부분의 기록은 사라졌거나, 벌레가 먹어 읽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가난한 선비가 돈도 되지 않는 옛날이야기에 미친 듯이 매달리는 것을 보며 수군거리거나 손가락질했습니다.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고, 잠잘 시간을 쪼개어 낡은 책들을 뒤지는 고된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그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밤마다 자신의 집에서 들려오는 듯한 그 구슬픈 울음소리가 그의 귓가에 맴돌며, 그를 채찍질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저 영혼은 또다시 300년, 아니 영원히 구천을 떠돌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다 떨어진 짚신을 고쳐 신으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방법으로, 그가 살고 있는 집과 그 주변의 역사에 대해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시작된 그곳에, 어쩌면 마지막 단서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집 근처의 가장 오래된 절을 찾아가 보기도 하고, 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을 찾아가 그 집에 얽힌 전설이라도 없는지 캐묻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옛날부터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무서운 집"이라는 막연한 이야기뿐이었습니다.
※ 작은 단서, 그리고 정성 어린 제사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고, 박 선비는 깊은 무력감에 휩싸였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는 듯했습니다. 그날 밤, 밖에는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낡은 집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삐걱거렸고, 박 선비는 차가운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거센 바람에 낡은 부엌 아궁이의 벽돌 하나가 툭, 하고 안으로 떨어져 나왔습니다. 그는 무심코 그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벽돌이 막고 있던 안쪽의 작은 공간과, 그 안에 놓인 기름종이에 싼 네모난 물건이었습니다. 박 선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기름종이 뭉치를 꺼내 들었습니다. 기름종이는 300년의 세월을 견디며 딱딱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펼쳤습니다. 그 안에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작은 나무 상자 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숨을 죽이고 나무 상자를 열었습니다. 상자 안에는 곱게 접힌 종이 한 장과, 빛바랜 비단 주머니 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종이를 펼쳐보았습니다. 그것은 불에 타다 만 족보(族譜)의 일부였습니다. 누군가 집안이 풍비박산 나던 그 순간, 훗날을 기약하며 필사적으로 숨겨놓은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종이는 너무 낡아 대부분의 글씨는 희미해져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박 선비는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종이를 등잔불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바로 그때, 종이의 접힌 부분 안쪽에, 기적처럼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는 글자 몇 개를 발견했습니다. ‘광해 5년, 대역죄로 사사(賜死)되다. 휘(諱)는 선우(善祐), 향년 스물...’ 이름은 선우. 성씨는 종이의 윗부분이 불에 타 없어져 알 수 없었지만, 박 선비는 직감했습니다. 이 이름이 바로 300년간 구천을 떠돌던 그 영혼의 이름이라는 것을. 그는 비단 주머니를 열어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작은 매화꽃잎이 곱게 말려 있었습니다. 아마도, 꿈속에서 보았던 그의 아내가 남긴 유품일 터였습니다. 박 선비는 자신도 모르게 족보 조각과 꽃잎을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길고 길었던 그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밤, 박 선비는 깨끗하게 목욕재계를 하고, 자신의 가장 좋은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는 소박하지만 정성을 다해 제사상을 차렸습니다. 갓 지은 쌀밥 한 그릇, 맑은 물 한 사발, 그리고 시장에서 어렵게 구해온 과일 몇 알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벼루에 정성껏 먹을 갈아, 깨끗한 한지에 또박또박 위패(位牌)를 썼습니다. ‘학생부군 광주 이씨 선우 신위(學生府君 廣州 李氏 善祐 神位)’. 성씨는 족보의 필체와 양식을 보아 광주 이씨일 것이라 짐작하여 쓴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성껏 쓴 위패를 제사상 가운데에 모셨습니다. 그리고는 향을 피우고, 깊이 허리를 숙여 절을 올렸습니다. 그는 술잔을 채워 올리고, 마치 살아있는 사람에게 말하듯, 그리고 자신의 벗에게 말하듯,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습니다. "이선우 선비님, 제가 왔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선비님의 고귀한 이름을 되찾으셨습니다. 당신은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이 땅에 존재했던 훌륭한 학자이자, 한 여인의 지아비였습니다. 부디 이 미천한 술 한 잔 받으시고, 300년 묵은 한을 모두 잊고 편안히 잠드소서." 그의 진심 어린 목소리가 빈방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위패를 불살랐습니다. 이름이 적힌 종이가 타오르며 피어오른 한 줌의 연기는, 마치 억눌렸던 영혼이 자유를 찾아 하늘로 올라가는 듯 보였습니다.
※ 한(恨)이 풀린 영혼, 평안을 찾다는다.
그날 밤, 박 선비는 아주 오랜만에 깊고 평안한 잠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또다시 300년 전의 그 아름다운 고택에 서 있었습니다. 마당에는 여전히 고운 꽃들이 만발해 있었고, 밤하늘에는 휘영청 밝은 달이 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대청마루 저편에서 이선우 선비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안개처럼 희미하고 투명했던 그의 몸은 이제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죽은 사람의 창백함 대신 온화한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깊은 수심과 슬픔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따뜻하고 평온한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원통함에 묶인 귀신이 아니라, 모든 것을 초월한 평화로운 영혼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선우는 박 선비의 앞에 다가와, 이전보다 더욱 깊이 허리를 숙여 감사의 큰절을 올렸습니다. 박 선비가 황급히 그를 일으키려 하자, 그는 고개를 들고 환한 미소로 말했습니다. "선비님 덕분입니다. 선비님의 온후하신 마음과 꺾이지 않는 의지 덕분에, 소생의 길고 길었던 300년의 밤이 마침내 끝이 났습니다. 잊혀졌던 제 이름을 불러주셨을 때, 저를 묶고 있던 모든 쇠사슬이 끊어지고 제 영혼이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슬픔에 젖어 있지 않았습니다. 맑은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기쁨과 평온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말을 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저를 기다리는 아내의 곁으로, 저승의 부모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비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는, 비록 몸은 다른 곳에 있더라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부디 만수무강하십시오." 그의 진심 어린 감사 인사에 박 선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습니다. 이선우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살았던 집을, 그리고 박 선비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마당 끝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마당 끝에서부터 눈부시게 하얀 빛이 피어오르며 그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고운 한복을 입은 한 여인의 그림자가 나타나 그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바로 그의 아내였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박 선비를 향해 마지막으로 고개 숙여 인사한 뒤, 함께 빛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박 선비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창밖은 동이 터 밝아오고 있었고, 방 안에는 따스한 아침 햇살이 가득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전에 없이 평온하고 가벼웠습니다. 그날 이후, 그 집에서는 더 이상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집을 감돌던 음산한 기운도 깨끗이 사라지고, 그저 평범하고 고즈넉한 옛집이 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박 선비에게는 좋은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 가을에 치러진 과거 시험에서 그는 장원 급제를 하였고, 그의 답안지에 담긴 ‘잊혀진 이들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길’이라는 문장은 임금에게까지 큰 감명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어진 관리로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평생을 부귀영화 속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억울한 영혼의 한을 풀어준 그의 착한 마음씨에 하늘이 감동하여 복을 내린 것이라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이름 없이 스러져간 한 영혼의 300년 묵은 슬픔은, 한 선비의 따뜻한 마음을 만나 비로소 마침표를 찍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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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의 한을 품고 구천을 떠돌던 영혼. 그가 원했던 것은 복수가 아닌, 잊혀진 자신의 이름 석 자였습니다. 한 선비의 따뜻한 마음이 마침내 그를 편안한 안식으로 이끌었네요. 누군가를 기억해준다는 것의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마음에 드셨다면 구독과 좋아요를 눌러주세요. 다음 시간에는 조선 궁궐에 나타난 상서로운 용의 현신, 그 놀라운 이야기 '어우야담' 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