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사자가 훔쳐간 그림자, 그림자가 사라지면 죽는다」
「저승사자가 훔쳐간 그림자, 그림자가 사라지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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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어르신들께서 옛부터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는가요. "사람의 그림자가 흐려지면 곧 떠난다"는 그 무서운 옛말 말입니다. 한낮에 햇볕이 쨍쨍한데도 누군가의 그림자만 유독 안개처럼 흐릿하게 드리운다면, 그것은 저승사자가 이미 그 사람의 혼을 절반쯤 가져간 표시라 했지요. 오늘 들려드릴 이야기는 충청도 어느 산골 마을에서 실제로 벌어졌다는 한 효자의 가슴 뜨거운 사연입니다. 아버지의 흐려진 그림자를 발견한 외아들 만석이가 그믐날 깊은 밤 산속 갈래길로 저승사자를 만나러 가는데요.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끝까지 함께해 주십시오. 듣는 동안 가슴 깊은 곳에서 따스한 무언가가 차오르실 것입니다.
※ 1: 한낮의 들녘, 흐려진 그림자
조선 영조 임금 시절, 충청도 어느 산골 마을에 박씨 성을 가진 한 늙은 농부가 살고 있었다. 박 노인은 일흔이 가까운 나이였지만 평생을 부지런히 농사지으며 살아온 덕에 허리도 곧고 손마디도 단단했다. 슬하에는 외아들 박만석이 있었는데, 만석은 아버지를 끔찍이 위하는 효자로 마을에 소문이 자자한 청년이었다.
그해 가을걷이가 한창이던 어느 한낮의 일이었다. 만석은 아버지와 함께 논두렁에 서서 황금빛으로 익은 벼이삭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 햇살이 따끈따끈하게 두 부자의 등을 데워 주었고, 가벼운 바람이 벼이삭을 사르르 흔들었다.
"아부지요, 올해는 풍년이라예. 작년보다 두 가마는 더 나올 것 같십니더."
"그래, 그래. 이게 다 네가 새벽부터 밤까지 발이 부르트도록 일한 덕분이지. 이 늙은 애비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시는교. 아부지가 저를 키워 주신 은혜에 비하면 이까짓 일이 무슨 일이라꼬요."
만석은 환하게 웃으며 아버지의 굽은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드렸다. 그러다 문득 만석의 시선이 아버지의 발끝에 머물렀다. 만석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분명 한낮의 햇살이 정수리 위에서 내리쬐고 있었고, 자기 그림자는 발밑에 또렷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데 옆에 서 계신 아버지의 그림자가 어딘지 이상했다.
'어라, 이게 무슨 일이고. 아부지 그림자가 와 이리 흐릿하노.'
만석은 한 발짝 옆으로 비켜서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다시 살펴보았다. 분명히 다른 사람들의 그림자는 햇빛이 강한 만큼 진한 검은빛으로 또렷하게 드리워져 있는데, 유독 아버지의 그림자만 마치 옅은 안개가 깔린 듯 흐리멍덩했다. 그것은 분명 그림자라기보다는 그림자의 흔적, 혹은 그림자가 막 사라지려고 발버둥치는 마지막 자취 같았다.
만석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어릴 적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동네 무당이 하셨던 그 말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람의 그림자가 흐려지는 것은 저승사자가 혼의 일부를 미리 가져갔다는 표시여. 그림자가 다 사라지면, 그 사람은 그날로 저승길 나서는 게야.'
그때는 어머님이 정말로 그 말을 듣고 사흘 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님의 그림자도 마지막 며칠 동안은 마치 종이를 한 장 한 장 벗겨내듯 점점 옅어지더니, 마지막 날에는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 기억이 만석의 가슴에 못처럼 박혀 있었던 것이다.
"아부지, 잠깐만요."
"와 그라노, 만석아. 무슨 일이고."
만석은 아무 말 없이 아버지를 햇살이 정면으로 비추는 자리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아버지의 발끝을 살펴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한낮의 정오에 가까운 시각, 햇볕이 가장 강할 그 시각에도 박 노인의 그림자는 흐릿하게 거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만석은 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아, 아입니더. 잠깐 발이 저려서요. 어서 점심 먹으러 들어가입시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만석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아버지의 굽은 등을 따라 걸으며, 만석은 자꾸만 아버지의 발치를 훔쳐보았다. 흙길 위에 드리워져야 할 그림자가, 마치 누군가 일부러 묽게 풀어 놓은 먹물처럼 옅었다.
'우찌해야 되노. 우리 아부지가… 우리 아부지가 시방 저승사자한테 혼을 절반이나 빼앗기고 계신단 말이가.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내가 우찌든지 막아야 한다.'
만석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는 얼른 그 눈물을 옷소매로 훔쳤다. 아버지께 들켜서는 안 되었다. 아버지가 자기 그림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으로 더 빨리 무너지실까 봐, 만석은 차마 입 밖으로 한 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만석은 아버지께 따뜻한 죽 한 그릇을 끓여 드린 후, 마당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그 달빛 아래서 만석은 결심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버지를 살려 내겠다고. 그림자를 훔쳐 간 그 저승사자를 어떻게든 찾아내겠다고.
※ 2: 청송 할미를 찾아간 새벽길
다음 날 새벽, 만석은 아버지가 깊이 잠드신 것을 확인한 후 살며시 집을 나섰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길을 부지런히 걸어 다다른 곳은 마을에서 십 리쯤 떨어진 산자락의 외딴 초가집이었다. 그곳에 마을에서 가장 영험하다고 소문난 늙은 무당, 청송 할미가 살고 있었다.
청송 할미는 나이가 아흔이 넘었다고 하기도 하고 백 살이 넘었다고 하기도 했는데, 그 정확한 나이는 본인조차 모른다고 했다. 마을에 우환이 있을 때마다 그녀의 굿 한 판으로 액운이 풀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만석은 이슬 맺힌 마당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할미를 불렀다.
"청송 할매요, 계시는교. 만석이입니더. 박 노인 아들 만석이입니더."
방문이 삐걱 열리며 새하얀 머리를 풀어 헤친 할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만석의 얼굴을 한 번 쓱 훑어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올 줄 알았다. 어제부터 까마귀가 자네 아부지 집 지붕 위로 세 마리나 모이더니, 결국 자네가 새벽길을 나섰구먼. 들어오게."
만석은 가슴이 뜨끔했다.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는데 청송 할미는 이미 사정을 다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떨리는 다리를 끌고 방 안으로 들어가 할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할매요, 사실은… 우리 아부지 그림자가… 어제 보니까 마치 안개처럼 흐려져 있었십니더. 한낮인데도 거의 안 보일 정도로 옅어져 있었십니더. 우리 어무이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랬는데… 할매요, 우리 아부지 우찌해야 됩니꺼."
청송 할미는 만석의 말을 듣는 동안 가만히 자기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고 눈을 감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는 보통 사람한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듯한 깊은 빛이 어려 있었다.
"만석아, 잘 듣거라. 사람이라는 것은 본디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는 게야. 하나는 살과 피로 된 몸뚱이고, 또 하나는 그 몸뚱이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란다. 그런데 그 그림자라는 것이 그저 햇빛이 만들어 내는 어두운 자국 그 정도가 아니여. 사람의 혼이 빛에 비쳤을 때 땅에 새겨지는 자국이지."
"혼이 땅에 새겨지는 자국이라꼬예?"
"그렇다. 그러니께 사람의 혼이 강하면 그림자도 진하고, 혼이 약해지면 그림자도 옅어지는 게여. 헌데, 사람이 늙어 가면서 자연스레 그림자가 옅어지는 일도 있긴 하지만, 자네 아부지처럼 갑자기 그림자가 안개처럼 흐려진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란 말씀이여."
청송 할미는 자기 앞에 놓인 작은 향로에 향 한 자루를 사르며 말을 이었다. 매캐한 향 연기가 방 안을 천천히 감쌌다.
"저승에는 저승사자라는 분들이 계시지. 그분들이 사람의 명이 다해 데려가야 할 때가 되면, 한꺼번에 혼을 가져가는 게 아니란다. 사람의 혼이라는 게 그렇게 한 번에 떼어지면 그 사람도 너무 갑자기 가셔서 정신이 없고, 또 가족들도 너무 갑자기 잃어버리면 슬픔이 너무 큰 까닭이여. 그래서 저승사자께서는 사흘이면 사흘, 이레면 이레에 걸쳐 혼을 조금씩 미리 떼어 가신단다. 그것을 옛 어른들이 '그림자를 거두어 간다' 하셨던 게야."
만석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라믄 우리 아부지 그림자가 그렇게 흐려진 것은… 이미 저승사자가 우리 아부지 혼을 절반이나 가지고 가셨다는 말씀이라예?"
"그래. 정확히 보았구먼. 자네 아부지 그림자가 어제 그렇게 흐려져 있었다 카니, 사흘이면 사흘, 길어야 닷새 안에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질 게야. 그러믄 그날로 자네 아부지는 저승길 나서시는 게지."
만석의 두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는 청송 할미의 무릎을 부여잡고 통곡했다.
"할매요, 한 가지만 알려 주이소. 살릴 방법이 있다 카믄, 무슨 짓이라도 하겠십니더.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우리 아부지 살릴 수만 있다 카믄, 지가 무슨 짓이든 하겠십니더. 제발 한 가지만 알려 주이소."
청송 할미는 한참 동안 만석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법이 영 없는 것은 아니여. 다만 그 방법이라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게야. 자네가 들으면 도리어 가슴이 무너질 만한 그런 방법이라네."
※ 3: 비방의 대가, 갈래길의 약속
청송 할미는 향로의 향 연기를 한 번 흩어 놓더니,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사연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옛날부터 우리네 조상님들이 전해 오는 비방이 한 가지 있단다. 저승사자가 가져간 그림자를 다시 빼앗아 오는 방법이지. 다만 이것은 사람이 사람한테 함부로 일러 주는 비방이 아니여. 이걸 잘못 쓰면 가져간 그림자도 못 찾고, 도리어 자네 그림자까지 빼앗기게 되니까 말이여."
"할매요, 우찌하든지 알려만 주이소. 죽기를 각오하고 하겠십니더."
"좋다. 그러믄 잘 들으거라. 음력으로 그믐날, 그러니까 달이 하나도 뜨지 않는 깊은 밤에 산속 외딴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거기에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하나 있어야 하느니라. 사람이 다니는 길도 아니고, 짐승이 다니는 길도 아닌, 산속 깊은 곳의 그 갈래길 말이여."
"갈래길이라꼬예?"
"그렇다. 갈래길은 이승과 저승을 잇는 통로니라. 저승사자께서 사람의 혼을 거두어 가실 때, 그 갈래길을 통해 저승으로 가시지. 그러니께 그믐날 자정 무렵에 그 갈래길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자네 아부지 그림자를 가져가는 저승사자를 만날 수 있을 게야."
만석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저승사자를 만나믄… 우찌해야 합니꺼?"
"저승사자께서 자네 아부지의 그림자를 가지고 지나가실 때, 자네는 길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야 한다. 그러고는 통곡하며 빌어야 하느니라. 부디 우리 아부지 그림자만은 다시 돌려 달라고. 자네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킬 만큼 깊고 진실하다면, 저승사자께서도 마음이 흔들릴 수가 있느니라."
"마음이 흔들리신다 카믄… 정말로 돌려주실 수도 있다는 말씀이라예?"
"그래. 다만 거기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 저승사자께서 한 사람의 혼을 도로 풀어 주신다 카믄, 그 대신 다른 무엇인가를 받아 가셔야만 하느니라. 그것이 저승의 법도여. 무엇 하나가 들어가면 무엇 하나가 나오고, 무엇 하나가 풀려나면 무엇 하나가 들어가야 하는 게여."
만석은 가슴이 죄어들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다른 무엇이라 카믄… 무얼 의미하는교?"
청송 할미는 잠시 만석의 얼굴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 아부지 명이 다하셨는데 그 명을 다시 늘려 달라고 한다믄, 다른 누군가의 명에서 그만큼을 빌려 가야 한다는 것이여. 흔히는 자식의 명에서 가져가시지. 부모를 위해 자기 명을 내놓는 자식의 마음이 가장 진실하다고 저승사자께서도 인정하시기 때문이여."
만석은 그 말을 듣고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즉시 대답했다.
"좋십니더. 지가 명을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내놓겠십니더. 우리 아부지 평생 농사일에 허리가 다 굽으셨고, 어무이 일찍 보내고 혼자서 저를 키우시느라 고생만 하셨십니더. 우리 아부지가 늘그막에 좀 편안하게 사시다가 천명을 다 누리고 가실 수 있다 카믄, 지가 무슨 짓이든 하겠십니더."
"잠깐, 만석아. 자네 마음은 알겠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보거라. 자네는 아직 젊은 사람이고, 앞으로 장가도 들어 자식도 봐야 하는 사람이여. 그런 자네가 명을 나누어 준다는 것은 자네 인생의 절반을 내놓는다는 말이란다."
"할매요, 더 생각할 것도 없십니더. 우리 아부지가 안 계시면 지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교. 우리 아부지가 살아 계셔야 지도 살 수 있는 거 아입니꺼. 부디 그 비방을 가르쳐 주이소."
청송 할미는 만석의 굳은 결심을 보더니,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작은 보따리를 풀더니, 그 안에서 누런 부적 한 장과 작은 옥구슬 하나를 꺼냈다.
"이 부적은 자네 품에 넣고 가거라. 갈래길에서 저승사자를 만났을 때 자네를 보호해 주는 부적이여. 이거 없이 그 자리에 가믄 자네 혼까지 빼앗기게 되니께 절대 잊지 말거라. 그라고 이 옥구슬은 자네 아부지 그림자를 받아 올 그릇이여. 저승사자께서 그림자를 풀어 주시면 이 옥구슬에 담아서 가져오너라. 그라고 이 옥구슬을 자네 아부지 베개 밑에 넣어 두믄 사흘 안에 그림자가 도로 살아날 게다."
만석은 부적과 옥구슬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깊이 절을 올렸다.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매요, 정말 고맙심더. 지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아부지 살려 내겠십니더."
"부디 무사히 다녀오너라. 그리고 한 가지 명심해라.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거라. 알겠지?"
※ 4: 그믐밤, 저승사자의 발걸음 소리
청송 할미를 만난 그날 이후로 만석은 마음이 더욱 다급해졌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어제보다 그림자가 한층 더 옅어져 있었다. 마치 한지 위에 그려진 먹그림이 비에 한 번씩 씻겨 나가듯, 박 노인의 그림자는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박 노인 본인도 어딘지 모르게 기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 같으면 새벽에 벌떡 일어나 밭으로 나갈 사람이, 요즘에는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입맛도 뚝 떨어져 만석이 끓여 드리는 죽도 두어 숟가락 뜨는 시늉만 하다 그치곤 했다.
"아부지, 우찌 영 기운이 없으신 것 같십니더. 의원을 모시고 올까예?"
"아니다. 그냥 가을 농번기에 너무 무리를 했나 보다. 며칠 푹 쉬믄 괜찮아질 게야. 너무 걱정 말거라."
만석은 아버지의 손을 가만히 잡아 보았다. 그 손은 평소보다 훨씬 차가웠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손이라기보다, 이미 절반쯤 식은 듯한 그런 차가움이었다. 만석은 가슴이 무너지는 것을 가까스로 견디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 아부지. 푹 쉬시이소. 지가 죽이라도 한 그릇 더 끓여 올께요."
마침내 그믐날이 되었다. 그날따라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별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을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어디선가 부엉이 우는 소리만 음산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만석은 살며시 일어나 봇짐을 챙겼다. 봇짐 안에는 청송 할미가 준 부적과 옥구슬, 그리고 작은 등불 하나가 들어 있었다. 만석은 잠든 아버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야위어 있었고, 숨소리도 어딘지 가늘어진 듯했다.
'아부지요, 지가 꼭 살려 드리겠심더. 지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부지 그림자를 도로 찾아 오겠십니더. 잠시만 기다려 주이소.'
만석은 아버지의 이불을 다시 한 번 잘 덮어 드린 후 살며시 집을 나섰다. 마을을 빠져나와 산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어둠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만석은 등불에 의지해 한 걸음 한 걸음 산을 올랐다.
산을 한참 오르자 청송 할미가 일러 준 갈래길이 나타났다. 그곳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외딴 산속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길이 정확히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한 갈래는 산 위쪽으로, 한 갈래는 산 아래쪽으로, 그리고 또 한 갈래는 산 너머 어딘지 모를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만석은 그 갈래길의 한가운데에 등불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청송 할미가 일러 준 그대로 자세를 잡았다. 부적은 가슴 안쪽 옷섶에 단단히 넣어 두었고, 옥구슬은 두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방은 점점 더 깊은 적막에 잠겨 들었다. 멀리서 들리던 부엉이 울음소리도 어느 순간 뚝 끊겼다. 바람도 없었다. 산속의 모든 생명이 마치 누군가의 명에 의해 일제히 숨을 죽인 것 같았다.
그때였다. 만석의 등 뒤쪽에서 어떤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또각. 그 발걸음은 결코 사람이 내는 것 같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흙길을 걸을 때 자갈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야 마땅한데, 그 발걸음은 마치 단단한 돌바닥을 걷는 것처럼 또렷하고 차가운 소리를 냈다.
만석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는 청송 할미가 한 마지막 당부를 떠올렸다.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 것. 만석은 이를 악물고 두 눈을 꼭 감았다. 두 손에 쥔 옥구슬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발걸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러더니 만석의 바로 뒤에서 우뚝 멈춰 섰다. 만석은 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선은 마치 차가운 얼음물이 등에 부어지는 것 같은 그런 시선이었다.
"여기서 무얼 하는 게냐, 산 사람아."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만석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이 세상 사람이 내는 그런 따스함이 전혀 없었다. 마치 깊은 우물 바닥에서 올라오는 듯한 그런 한기 어린 목소리였다.
※ 5: 통곡으로 빚은 효심의 청원
만석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깊이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충청도 산골 마을에 사는 박만석이라 하옵니더. 우리 아부지 박씨 노인의 그림자를 가지고 가시는 저승사자 어른을 뵙고자 이 자리에 왔십니더.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이소."
만석의 등 뒤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그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네가 어찌 알았느냐. 그 노인의 그림자를 거두어 가는 것은 저승의 일이거늘, 어찌 산 사람이 이 자리에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단 말이냐."
"저… 저희 마을 청송 할매께서 알려 주셨십니더. 우리 아부지 그림자가 사흘 전부터 안개처럼 흐려져 있는 것을 보고, 무슨 변고가 있는 줄 알고 새벽에 청송 할매를 찾아갔십니더. 청송 할매께서 그림자가 흐려진 것은 저승사자께서 혼을 미리 거두어 가신 표시라 하시며, 이 자리에서 자비를 청해 보라고 하셨십니더."
만석의 등 뒤에서 길고 무거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청송이라. 그 노인이 아직도 살아 있더란 말이냐. 허, 그 노인은 옛날부터 우리 저승의 일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었지. 그래, 그 노인이 알려 주었다면 네가 이 자리에서 나를 만나는 것도 운명이로구나. 좋다. 네가 무슨 청을 가지고 왔는지 한번 들어 보자."
만석은 두 눈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저승사자 어른요,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이소. 우리 아부지는 평생을 농사일에 허리가 다 굽어 가시면서 고생만 하셨심더. 어무이가 일찍 돌아가신 후로는 혼자서 저를 키우시느라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끼니도 거르시면서 그렇게 살아오셨심더. 이제 막 저도 다 자라서 아부지를 모실 수 있게 되었는데, 이렇게 가실 수는 없십니더. 우리 아부지가 잠시만이라도 더 사실 수 있게, 저승사자께서 가지고 가신 그림자를 도로 돌려주시이소. 부탁드립니더, 저승사자 어른요."
만석은 흙바닥에 이마를 박고 통곡을 멈추지 않았다. 굵은 눈물방울이 흙바닥에 뚝뚝 떨어져 작은 자국을 만들었다.
만석의 등 뒤에서는 한참 동안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적막이 어찌나 무거웠던지, 만석은 자기 가슴이 짓눌려 부서질 것만 같았다.
이윽고 그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처음과는 조금 다른, 어딘지 모르게 누그러진 듯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네 효심이 깊구나. 산 사람이 그믐날 자정에 이 갈래길까지 찾아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다. 게다가 자기 목숨을 걸고 부모의 그림자를 도로 찾고자 하는 그 마음은, 저승의 우리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지."
"그라믄… 그라믄 정말로 우리 아부지 그림자를 돌려주신단 말씀이라예?"
"잠깐, 산 사람아.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릴 일이 아니다. 저승의 법도라는 것이 있느니라. 한 사람의 명을 늘려 주려면, 다른 누군가의 명에서 그만큼을 빌려 와야 하는 것이여. 청송이 그 노인이 아마 이미 너한테 일러 주었을 게다."
"예, 들었십니더. 지 명에서 빌려 가시믄 됩니더.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마음껏 가져가시이소. 우리 아부지만 살릴 수 있다 카믄, 지 명을 절반이라도 내놓을 각오로 왔십니더."
만석의 등 뒤에서 또다시 무거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아, 너는 정말로 그 대가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이냐. 네가 명을 빌려 준다는 것은, 네가 앞으로 살아갈 그 시간을 스스로 포기한다는 말이다. 너는 아직 젊은 사람인데, 장가도 들어야 하고 자식도 보아야 하느니라. 그 모든 시간을 버리고도 아버지를 살리겠다는 말이냐."
"예, 그렇십니더. 우리 아부지가 안 계신 세상에서 지가 백 년을 산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교. 우리 아부지가 살아 계셔야 지 인생도 의미가 있는 거 아입니꺼. 부디 우리 아부지를 살려 주시이소. 지 명을 가져가시믄 됩니더."
만석의 등 뒤에서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그 차가운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따스함마저 어린 듯한 그런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산 사람아, 너의 그 마음은 내 충분히 보았느니라. 그러나 한 가지 너에게 일러둘 것이 있다. 저승에서도 효자를 함부로 데려가지는 않는단다. 효자의 명을 빼앗는 것은 저승의 법도에도 어긋나는 일이여. 그러니까 네가 명을 내놓겠다 하더라도, 저승은 그것을 그대로 받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저승사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 갔다.
"다만, 네 효심이 하늘에 닿은 것을 보았으니, 내 한 번 자비를 베풀어 보겠노라. 그 옥구슬을 등 뒤로 내밀거라. 네 아버지의 그림자를 그 안에 담아 주마."
※ 6: 옥구슬 속에 담긴 아버지의 혼
만석은 떨리는 손으로 옥구슬을 등 뒤로 내밀었다. 두 눈은 여전히 꼭 감은 채로였다. 청송 할미의 마지막 당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그 말이 만석의 가슴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서 누군가의 차갑고 긴 손가락이 만석의 손에 닿았다. 그 손가락이 닿은 자리에서 만석의 살갗에 마치 얼음이 닿은 것 같은 짜릿한 한기가 퍼졌다. 그러나 그 한기는 결코 악의가 있는 한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깊은 슬픔이 어린, 그런 차가움이었다.
옥구슬이 만석의 손에서 등 뒤로 살며시 옮겨졌다. 그러더니 잠시 후 다시 만석의 손바닥 위로 돌아왔다. 만석이 가만히 손을 쥐어 보니, 옥구슬에서 어딘지 모를 따스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작은 심장이 그 안에서 두근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산 사람아, 그 옥구슬에 네 아버지의 그림자를 담아 두었다. 그것을 가지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의 베개 밑에 넣어 두거라. 사흘 후 새벽에 그 옥구슬을 다시 꺼내어 보면, 옥구슬은 그저 평범한 옥구슬로 돌아와 있을 게다. 그것이 그림자가 다시 네 아버지께 돌아갔다는 표시니라."
"저승사자 어른요, 정말… 정말 고맙심더.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심더."
"고맙다 할 일이 아니다. 너의 효심이 너 자신을 살린 것이여. 다만 한 가지, 네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저승사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만석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네 아버지의 명이 늘어난 만큼, 너는 그 시간을 더욱 정성으로 모셔야 할 것이니라. 효라는 것은 그저 부모를 살려 두는 일이 아니라, 살아 계신 부모를 매일매일 정성껏 모시는 일이여. 오늘 네가 이 자리에서 내놓고자 했던 그 마음을, 부디 매일 그대로 지키며 살아라.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자리에서 일어난 일은 누구한테도 이야기하지 말거라. 네 아버지께도, 청송 그 노인 외에는 그 누구한테도.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심더. 저승사자 어른요, 정말 고맙심더."
저승사자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또각, 또각, 또각. 그 소리가 산 너머 갈래길로 점점 사라져 가더니, 결국 사방에는 다시 깊은 적막만이 남았다.
만석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두 눈은 여전히 꼭 감은 채였다. 그러다가 멀리서 들려오던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만석은 천천히 눈을 떴다.
손바닥 위에 놓인 옥구슬이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새벽 별처럼 맑고 따스한 빛이었다. 만석은 그 옥구슬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고 가슴에 품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만석은 등불을 들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갈래길에서 산 아래로 내려가는 그 길은 올라올 때보다 훨씬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가슴속에 따스한 옥구슬을 품고 있어서 그런지, 산 속의 차가운 한기마저도 견딜 만했다.
산을 절반쯤 내려왔을 때, 만석은 문득 등 뒤에서 어떤 기척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나 만석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청송 할미의 당부와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아직도 또렷이 남아 있었다.
'뒤돌아보믄 안 된다. 뒤돌아보믄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된다. 그저 앞만 보고 가야 한다.'
만석은 이를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산을 내려갔다. 그러는 동안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 오기 시작했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빛이 산자락에 비치자, 멀리서 마을의 첫 닭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마을 어귀에 다다랐을 때, 만석은 비로소 자기가 무사히 산 아래로 내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서야 만석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나 아직 일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옥구슬을 아버지의 베개 밑에 넣어 드려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만석은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마당에 들어서니 아버지의 방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만석은 살며시 방문을 열고 들어가 아버지의 곁에 다가갔다. 아버지는 평소처럼 잠들어 계셨지만, 그 얼굴이 어쩐지 어제보다 더 야위어 보였다. 숨소리도 어딘지 가늘어진 듯했다.
만석은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그 아래에 옥구슬을 가만히 넣어 두었다. 옥구슬에서 흘러나오던 따스한 빛이, 베개 아래로 들어가자 더욱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마치 작은 햇살 한 줄기가 그 자리에 들어앉은 것 같았다.
만석은 아버지의 머리맡에 가만히 앉아, 잠든 아버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 손은 어제보다 한결 따스해진 듯했다.
'아부지요, 이제 살아나실 깁니더. 저승사자께서 그림자를 돌려주셨심더. 사흘만 더 견뎌 주이소.'
※ 7: 다시 또렷이 새겨진 마당의 그림자
사흘이 흘렀다. 그 사흘 동안 만석은 한순간도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죽을 끓여 드리고, 따끈한 차를 끓여 드리고, 손과 발을 정성껏 주물러 드렸다. 만석의 두 손은 아버지의 손을 주무르느라 굳은살이 잡힐 지경이었다.
첫째 날 저녁이 되자 박 노인이 가만히 눈을 떴다. 그는 만석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석아, 어쩐지 가슴이 좀 따스해지는 느낌이구나. 어제까지만 해도 어찌나 가슴이 차갑고 답답하던지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오늘은 어쩐지 마음이 편안하구나."
"아부지, 푹 쉬시이소. 곧 좋아지실 겁니더."
만석은 아버지의 손을 더욱 꼭 잡아 드렸다.
둘째 날 아침이 되자 박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입맛도 조금씩 돌아와서, 만석이 끓여 드린 죽을 한 그릇 다 비우셨다. 그러더니 만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만석아, 우찌 된 일이고. 어제까지만 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는데, 오늘 일어나니 몸이 한결 가뿐하구나. 마치 누가 내 가슴에 담요를 한 장 덮어 준 것처럼 따스한 기운이 들었다. 참 신기한 일이로구나."
"아부지가 푹 쉬셨으니 그렇겠지예. 자, 이제 죽 한 그릇 더 드시이소."
만석은 환한 웃음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가슴 안쪽에서는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잔잔히 메아리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일어난 일은 누구한테도 이야기하지 말거라.'
만석은 그 말씀을 굳게 지키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가 살아나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만석에게는 천만금보다 귀한 일이었으니, 그 비밀을 평생 가슴에만 묻어 두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셋째 날 새벽이 되었다. 만석은 청송 할미가 일러 준 그대로, 아버지가 깊이 잠드신 새벽 시각에 살며시 베개 아래에 손을 집어넣어 옥구슬을 꺼냈다. 처음 받았을 때는 따스한 온기가 흐르고 은은하게 빛나던 그 옥구슬이, 이제는 그저 평범한 차가운 옥구슬로 변해 있었다. 빛도, 온기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만석은 그 옥구슬을 가슴에 품고 마당으로 나왔다.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만석은 마당에 서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정말로 돌아왔을까.
마침 그때 박 노인이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오셨다. 어제보다도 한결 정정해진 모습이었다. 박 노인은 마당에 서서 동쪽 하늘을 한번 둘러보더니,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오늘은 참 날씨가 좋구나. 새벽 공기가 어찌나 상쾌한지, 평소 같으면 코끝이 시릴 텐데 오늘은 마치 봄날 같다. 만석아, 너도 한번 나와 보거라."
만석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마당으로 한 걸음 더 나섰다. 동쪽에서 막 떠오르는 햇살이 두 부자의 등을 비추기 시작했다. 만석은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발치를 살펴보았다.
거기에 분명히, 아주 분명히, 박 노인의 그림자가 또렷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어제까지 안개처럼 흐릿하던 그 그림자가, 마치 누가 진한 먹물로 다시 그려 넣은 듯이 선명하게 마당의 흙바닥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만석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는 마당의 흙바닥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의 그림자에 자기 두 손을 가만히 갖다 대었다. 차가운 흙바닥이었지만, 그 위에 드리운 아버지의 그림자만은 따스하게 느껴졌다.
"아부지요… 아부지요…"
"와 그라노, 만석아. 어찌 새벽부터 마당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게야."
박 노인은 영문을 모른 채 만석을 일으켜 세우려 하셨다. 만석은 그 손에 의지해 일어서며, 아버지를 두 팔로 와락 끌어안았다.
"아부지, 오래오래 사시이소. 지가 이제 평생 곁에서 모실 깁니더. 무슨 일이 있어도 평생 곁에서 모실 깁니더."
박 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들의 등을 가만히 두드려 주셨다.
"하이고, 우리 만석이가 우찌 그라노. 효자도 그렇게 효자가 어디 있노. 알겠다, 알겠어. 이 애비도 너랑 오래오래 살자꾸나. 너랑 같이 새벽 햇살도 보고, 가을 들녘도 같이 거닐고, 겨울에는 따끈한 아랫목에 누워서 옛날 이야기도 같이 하자꾸나."
만석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한참을 울었다. 그러나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잃을 뻔한 가장 소중한 것을 다시 찾은 사람만이 흘릴 수 있는, 그런 깊고 깊은 감격의 눈물이었다.
그 후로 박 노인은 무려 십팔 년을 더 살았다. 그 십팔 년 동안 만석은 단 하루도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아버지께 효도하는 일이라면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았다. 만석은 좋은 처녀를 만나 장가도 들었고, 자식도 셋이나 두어 그 자식들 모두에게 할아버지를 정성껏 모시는 법을 가르쳤다. 박 노인은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천수를 누리고, 결국 여든이 훌쩍 넘어서야 평안히 세상을 떠나셨다.
마을 사람들은 그 효성에 감복하여 박 노인의 무덤 앞에 작은 효자비를 세워 주었다. 그 효자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졌다고 한다.
"아들이 그림자를 보아 아비를 살리니, 그 효심이 하늘에 닿았다."
그리고 청송 할미와 만석 외에는 그 누구도 그날 밤 산속 갈래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 채로,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다만 마을의 노인들은 가끔 자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해 주곤 했다고 한다.
"사람의 그림자가 흐려지거든 무엇보다 부모님께 효도부터 하거라. 부모의 그림자를 지키는 것은, 곧 자식의 효심이니라."
그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한 폭의 따스한 옛이야기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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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오늘 이야기는 어떠셨는지요. 그림자라는 것이 그저 햇빛이 만든 어두운 자국인 줄로만 알았는데, 우리네 옛 어른들은 거기서 사람의 혼까지 보셨다고 하니 참 깊고 신비로운 옛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드시기 전, 부모님이나 가족분들의 손을 한 번 꼭 잡아드리시는 것은 어떠실는지요.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짧으니까요. 좋아요와 구독, 따뜻한 댓글은 다음 이야기를 준비하는 큰 힘이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또 다른 저승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늘 평안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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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reathtaking photorealistic 16:9 cinematic horror-mystic scene set in late Joseon Dynasty Korea on a moonless pitch-black night. In the foreground, a young Korean man in his late twenties wearing a worn traditional white hanbok with a dark vest, kneeling in surrender on cold packed earth at a deep mountain three-way fork crossroad, eyes tightly shut, both hands clasped together holding a small glowing pale-green jade orb that emits an ethereal ghostly light. Tear streaks visible on his dust-covered cheeks. Behind him, looming in deep shadow, the silhouette of a Korean grim reaper (jeoseung saja) wearing a tall traditional black gat hat and long flowing black robe, face completely obscured by shadow except for two faintly glowing pale eyes, holding wispy translucent shadowy mist in his outstretched skeletal hand representing the stolen shadow soul. A small flickering oil lamp on the ground casts dramatic warm orange flickering light against the cold blue darkness. Ancient gnarled pine trees with twisted dark branches frame the scene. Pale wisps of mountain fog drift around the figures. Distant misty Korean mountain peaks visible in deep indigo twilight. Atmosphere of profound supernatural dread mixed with desperate filial devotion, the boundary between the living and dead worlds. Color palette: deep midnight indigo, cold ghostly pale green from the jade orb, warm flickering amber from the lamp, stark black silhouettes, ash gray fog. Hyper-detailed photorealistic cinematography, ultra-shallow depth of field, atmospheric volumetric lighting, museum-quality historical accuracy, 85mm lens quality, evoking traditional Korean folk supernatural horror with deep emotional resonance. No text, no letters, no logos, no watermarks, no signatu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