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갑자 동방삭의 숨바꼭질
삼천갑자 동방삭의 숨바꼭질
부제
수천 년을 살아온 동방삭을 잡기 위해 저승 최고의 엘리트 사자가 투입됩니다. 하지만 동방삭은 이승의 온갖 꼼수와 뇌물로 사자를 매번 따돌리고, 분노한 사자는 급기야 상투까지 풀어헤치고 동방삭의 시골집에 머슴으로 위장 취업하여 기회를 엿보며 벌어지는 좌충우돌 두뇌 싸움입니다.
태그 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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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저승의 명부에서 무려 삼천 번이나 이름을 지우며 수천 년을 살아온 동방삭! 분노한 염라대왕은 최고의 저승사자를 보내지만, 동방삭은 뇌물과 변장으로 번번이 달아납니다. 급기야 사자는 머슴으로 위장해 그의 집에 잠입하는데요. 과연 이 끝없는 숨바꼭질의 승자는 누구일까요?
※ 1: 저승 명부에서 사라진 이름
사람이 죽으면 그 혼백이 저승으로 가고, 저승의 판관들은 생전에 쌓은 선행과 악행을 빠짐없이 헤아린다고 합니다. 살아 있을 때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작은 욕심도, 남몰래 베푼 따뜻한 마음도 저승의 명부에는 먹물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승의 명부를 관리하던 젊은 판관 하나가 이상한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그날도 그는 산더미처럼 쌓인 명부를 넘기며 이승에서 막 들어온 혼백들의 이름과 수명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한 장을 넘기고, 또 한 장을 넘기던 그의 손이 낡은 장부 한가운데에서 멈췄습니다.
동방삭이라는 이름 옆에 적힌 수명이 어딘가 이상했습니다. 본래 수명은 오래전에 끝났어야 했지만, 붉은 먹으로 그어진 흔적 아래 새로운 숫자가 덧붙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숫자 위에 숫자가 겹쳐지고, 지운 흔적 위에 다시 글씨가 쓰여 있어 종이가 너덜너덜할 지경이었습니다.
판관은 눈을 비비고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살폈습니다.
"이 사람이 아직 이승에 살아 있다고?"
옆자리에서 졸고 있던 늙은 판관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들었습니다.
"누구 말인가?"
"동방삭이라는 자입니다. 이 기록대로라면 수명이 끝난 뒤에도 수천 년을 더 살았습니다. 명부에 삼천 번이나 손을 댄 흔적이 있습니다."
늙은 판관의 졸음이 한순간에 달아났습니다. 그는 장부를 빼앗듯 받아 들고 촛불 가까이에 가져갔습니다.
"이런 망측한 일이 있나! 수명이 다한 인간이 어찌하여 아직도 이승의 밥을 먹고 있다는 말이냐?"
두 판관은 저승의 창고 가장 깊은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먼지가 쌓인 고대 명부와 죽은 자들의 출입 기록까지 모조리 꺼내 대조한 끝에, 믿기 힘든 사실 하나가 드러났습니다.
동방삭은 오래전 우연히 자신을 잡으러 온 어린 저승사자에게 술을 먹인 뒤 명부를 훔쳐보았습니다. 자신의 이름 옆에 적힌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사자가 잠든 사이 붓으로 숫자를 고쳤습니다. 그 뒤에도 저승사자가 찾아올 때마다 갖가지 방법으로 명부를 훔치거나 이름을 지웠고, 어느 때는 자신과 이름이 비슷한 죽은 자의 기록 사이에 숨어들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며 동방삭의 수명은 한 갑자, 열 갑자, 백 갑자를 넘어갔습니다. 나중에는 저승의 관리들조차 몇 번을 잘못 계산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염라대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검은 수염이 부들부들 떨리고, 거대한 판결대 위에 놓인 붓이 분노에 찬 손아귀에서 우지끈 소리를 냈습니다.
"수명이 끝난 인간 하나가 수천 년 동안 이승을 돌아다녔는데, 이제야 발견했단 말이냐?"
판관들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죽을죄라니, 너희는 이미 저승에 있지 않느냐! 죽으면 어디로 갈 셈이냐?"
판관들은 대답하지 못하고 이마만 바닥에 붙였습니다. 염라대왕은 더욱 화가 났지만, 이미 죽은 자들에게 죽을 벌을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 동방삭이라는 자가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느냐?"
"현재는 이승 남쪽의 어느 산골 마을에 사는 것으로 보이옵니다. 그러나 이름과 얼굴을 계속 바꾸어 정확한 거처는 알기 어렵사옵니다."
"지금까지 사자를 몇이나 보냈느냐?"
"확인된 것만 서른일곱 명이옵니다."
"한 명도 잡지 못했단 말이냐?"
"어떤 사자는 술에 취해 명부를 빼앗겼고, 어떤 사자는 가짜 장례 행렬을 따라가다가 공동묘지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또 어떤 사자는 동방삭이 준 떡을 먹고 배탈이 나 사흘 동안 뒷간에서 나오지 못했사옵니다."
염라대왕의 눈썹이 꿈틀거렸습니다.
"저승사자가 인간의 떡을 먹고 배탈이 났다고?"
"동방삭이 떡 속에 이승의 강한 햇마늘과 찹쌀엿을 가득 넣었다고 하옵니다. 음기가 강한 사자에게는 매우 고약한 음식이었던 듯하옵니다."
전각 한쪽에 서 있던 사자들이 슬그머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동방삭이라는 이름은 이미 저승사자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를 잡으러 간다는 말은 곧 온갖 망신을 당하고 빈손으로 돌아온다는 뜻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은 사자들의 줄을 천천히 훑어보다가 가장 뒤에 서 있던 한 사내를 지목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자들보다 키가 크고 자세가 반듯했습니다. 먹빛 도포는 먼지 하나 없이 정갈했고, 머리에는 검은 관모를 썼으며 허리에는 혼백을 묶는 붉은 오라가 가지런히 감겨 있었습니다. 그가 맡은 혼백은 단 한 번도 도망친 적이 없었습니다.
"강림, 앞으로 나오너라."
강림이라 불린 사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명하소서."
"네가 그 동방삭을 잡아 오너라."
전각 안이 술렁였습니다. 강림은 저승에서도 손꼽히는 사자였습니다. 바위틈에 숨은 원귀도 찾아냈고, 죽음을 피해 깊은 굴로 달아난 장수도 혼자 붙잡아 왔습니다. 그의 오라에 묶인 혼백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강림의 표정도 아주 잠깐 굳어졌습니다.
"그자는 본래 평범한 인간이 아니옵니까?"
"평범한 인간이 수천 년이나 저승사자를 속이겠느냐? 힘은 없으나 여우보다 꾀가 많고, 뱀보다 미끄러운 놈이다. 얼굴을 믿지 말고, 이름을 믿지 말며, 죽었다는 말도 믿지 마라."
염라대왕은 판관에게 손짓했습니다. 판관은 누렇게 변한 명부 한 권과 붉은 오라를 강림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이 오라는 한 번 혼백을 묶으면 천 리를 달아나도 풀리지 않는다. 이번에도 놓친다면 네 관직을 거두고 저승 냇가의 돌이나 세게 할 것이다."
강림은 명부와 오라를 받아 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반드시 동방삭을 붙잡아 대왕 앞에 무릎 꿇리겠사옵니다."
강림이 저승문을 나서려 하자 한쪽에 있던 늙은 사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과거에 동방삭을 잡으러 갔다가 속옷만 입고 돌아온 전력이 있는 사자였습니다.
"조심하게. 그 늙은이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네."
"수천 년을 살았다면 백발에 허리도 굽었겠군."
"그게 문제야. 어느 날은 백발노인이고, 어느 날은 젊은 선비이며, 또 어느 날은 장터의 아낙으로 나타나지. 내가 잡았던 자가 동방삭인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허수아비였네."
강림은 코웃음을 쳤습니다.
"선배들이 방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릅니다."
늙은 사자는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나도 떠날 때는 바로 그렇게 말했지."
강림은 저승문을 지나 이승으로 올라왔습니다. 먹빛 안개가 걷히자 달빛이 내리는 조선의 산길이 펼쳐졌습니다. 멀리 초가집 굴뚝에서는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논에서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명부를 펼쳐 동방삭의 기운을 찾았습니다. 낡은 종이 위에서 희미한 붉은 빛이 깜박이더니 산 너머 어느 주막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강림은 소매를 털고 빠르게 길을 내려갔습니다.
그 시각, 산 아래 주막에서는 허리가 굽은 백발노인 하나가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낡은 삿갓 아래로 번뜩이는 눈을 숨긴 채 주막 문밖을 힐끗 바라보았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더니 처마 밑의 등불이 동시에 흔들렸습니다.
'이 냉기는 보통 귀신의 것이 아니로군. 이번에는 제법 높은 자를 보낸 모양이야.'
백발노인은 남은 막걸리를 단숨에 비우고 주모 앞에 엽전 몇 닢을 놓았습니다.
"노인장, 국밥은 안 드시고 벌써 가시게요?"
"갑자기 오래된 빚쟁이가 찾아오는 것 같아서 말이지."
노인은 뒷문으로 나가기 전에 주모에게 귓속말을 건넸습니다.
"잠시 후 얼굴이 창백하고 검은옷을 입은 사내가 와서 나를 찾거든, 방금 전 북쪽으로 갔다고 말해주시오."
"정말 북쪽으로 가시려고요?"
동방삭은 남쪽 산길로 몸을 돌리며 능청스럽게 웃었습니다.
"사람이 오래 살려면 빚쟁이와 저승사자에게는 늘 반대 방향을 알려줘야 하는 법이지."
주막 앞에 도착한 강림은 아직 따뜻한 술잔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명부를 펼쳐 붉은 기운을 확인하고 눈을 가늘게 떴습니다.
분명 동방삭은 바로 조금 전까지 이곳에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주모에게 행방을 묻는 순간, 동방삭은 이미 남쪽 산등성이를 넘어가며 새로운 얼굴로 변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수천 년을 달아난 인간과 한 번도 사냥감을 놓치지 않은 저승사자의 끝없는 숨바꼭질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 2: 천 년 묵은 인간과 백전백패 저승사자
강림은 주막을 나서자마자 북쪽 산길로 달렸습니다. 검은 도포 자락이 밤바람을 가르고, 그의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먹빛 안개가 피어올랐습니다. 이승의 사람 눈에는 그저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귀신의 눈에는 검은 번개가 산길을 달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북쪽으로 십 리를 가도 동방삭의 흔적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명부에서 깜박이던 붉은 기운도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강림은 걸음을 멈췄습니다.
'주모가 거짓말을 했군.'
그는 즉시 주막으로 되돌아갔지만, 주모는 이미 문을 닫고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강림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모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남쪽을 가리켰습니다.
"그 노인이 이걸 전해달라고 했어요."
탁자 위에는 작은 종이쪽지와 엿 한 덩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쪽지에는 웃는 얼굴을 닮은 동그라미 하나만 그려져 있었습니다.
강림의 눈썹이 꿈틀거렸습니다.
"감히 저승사자를 놀려?"
강림은 엿을 손에 들었다가 곧바로 내려놓았습니다. 동방삭이 준비한 음식이라면 무엇이 들어 있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자 그는 잠깐 고민에 빠졌습니다.
"사자가 인간의 음식에 흔들릴 리 없다."
강림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엿을 소매 안에 넣었습니다. 증거물로 보관하겠다는 이유였습니다.
남쪽 산길로 방향을 바꾼 그는 새벽 무렵 작은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마을 어귀에서는 상여 하나가 슬픈 곡소리와 함께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상여를 멘 사람들은 모두 흰 상복을 입었고, 뒤에서는 유족들이 땅이 꺼질 듯 울었습니다.
강림이 명부를 펼치자 붉은 빛이 상여를 가리켰습니다.
'동방삭이 저 안에 있구나. 죽은 척 누워 빠져나갈 셈인가?'
강림은 상여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여꾼들은 갑자기 불어온 찬바람에 몸을 떨면서도 그대로 걸어갔습니다.
강림은 붉은 오라를 꺼내 상여 위로 던졌습니다. 오라는 뱀처럼 날아가 관을 칭칭 감았습니다.
"동방삭! 잔꾀는 끝났다. 당장 나오너라!"
상여꾼들은 관이 갑자기 흔들리자 혼비백산해 달아났습니다. 유족들도 곡소리를 멈추고 논두렁 너머로 도망쳤습니다.
강림이 관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하얀 수염을 붙인 허수아비 하나가 튀어나왔습니다. 허수아비의 품에는 또 다른 종이쪽지가 꽂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삐뚤빼뚤한 선 몇 개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마치 저승사자의 화난 얼굴을 흉내 낸 것 같았습니다.
강림의 관모가 분노로 들썩였습니다.
"이놈이 정말!"
바로 그 시각, 진짜 동방삭은 상여꾼 가운데 한 명으로 변장한 채 논두렁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흰 상복 아래에는 평상복과 짚신을 미리 갖춰 입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숲에 들어가자 상복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고 수염까지 떼어냈습니다.
"저승 최고의 사자라고 하더니 성질은 가장 급한 사자로군."
동방삭은 산길을 따라 이웃 고을 장터로 향했습니다. 장터에 도착한 그는 오래된 약재상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엽전 한 꾸러미를 건넸습니다.
"오늘 하루만 가게를 빌립시다."
잠시 후 동방삭은 의원의 갓과 도포를 입고 약재상 주인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얼굴에는 검은 점을 찍고 수염도 짧게 잘라 붙였습니다.
강림은 정오가 되기 전에 장터로 따라붙었습니다. 명부의 붉은 기운은 약재상 근처에서 가장 강하게 빛났습니다.
그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동방삭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이곳에 백발의 노인이 오지 않았느냐?"
동방삭은 강림이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모르는 척 약재를 저울에 달았습니다.
"백발노인이야 장터에 수십 명도 더 오지요. 어느 노인을 찾으시오?"
"눈빛이 교활하고 말이 많으며, 남을 속이는 데 익숙한 자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 장터에서 물건을 파는 장사꾼을 전부 잡아가야겠구려."
강림은 의원의 얼굴을 의심스럽게 살폈습니다. 명부의 붉은 빛은 분명 눈앞의 사내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동방삭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동방삭은 저승사자의 눈을 속이기 위해 몸에 쑥과 마늘, 닭 피 냄새가 나는 약초를 발라 자신의 기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누구냐?"
"병든 사람을 고치는 의원이오. 그런데 얼굴이 창백하고 눈 밑이 검은 것을 보니, 당신도 병이 깊어 보이는구려."
"나는 병에 걸리지 않는다."
"본래 병든 사람일수록 자신은 멀쩡하다고 말하는 법이오. 혀를 내밀어 보시오."
강림은 어이가 없어 동방삭을 노려보았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도 이러는 것이냐?"
"병자에게는 임금도 환자일 뿐이지요."
동방삭은 강림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는 척했습니다. 그러고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습니다.
"큰일이오. 몸에 음기가 너무 많고, 오래 굶어 속이 텅 비었소. 달고 끈끈한 것을 먹지 않으면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오."
그는 탁자 위에 조청을 바른 찹쌀떡 하나를 내놓았습니다.
강림은 주막에서 챙겨온 엿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본래 이승의 음식을 먹지 않았지만, 하루 종일 동방삭을 쫓느라 기운을 많이 쓴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의원으로 변장한 동방삭의 말투가 너무도 자연스러웠습니다.
"이것을 먹으면 기운이 돌아온다고?"
"한 입이면 충분하오."
강림이 떡을 베어 무는 순간, 동방삭은 슬며시 가게 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떡 안에는 찹쌀엿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강림의 위아래 이가 찰싹 달라붙어 입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으읍! 으으읍!"
강림이 이를 떼어내려고 애쓰는 사이, 동방삭은 장터의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잠시 후 강림이 손가락으로 떡을 떼어내고 가게 밖으로 뛰쳐나왔지만, 장터에는 갓과 한복을 입은 수많은 조선인 남자들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명부를 펼쳐도 붉은 기운이 여러 방향으로 갈라졌습니다. 동방삭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등에 자신의 기운을 묻혀놓은 것이었습니다.
강림은 이를 악물었습니다.
"인간 하나가 저승의 명부까지 헷갈리게 만들다니."
그 뒤로도 추격은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동방삭은 혼례를 올리는 신랑으로 변장했습니다. 강림이 혼례청으로 들어가 면사포를 걷어보니 신부는 진짜였지만, 신랑은 볏짚을 채운 허수아비였습니다. 동방삭은 가마를 끄는 가마꾼으로 변장해 이미 마을을 빠져나간 뒤였습니다.
또 어느 날에는 절의 늙은 행자승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강림이 절에 도착하자 백 명이 넘는 승려가 모두 똑같은 삿갓과 회색 장삼을 입고 마당에 앉아 있었습니다. 강림이 한 명씩 얼굴을 확인하는 동안 동방삭은 부엌 아궁이의 재를 뒤집어쓰고 숯장수처럼 빠져나갔습니다.
겨울에는 얼어붙은 강 밑에 커다란 독을 숨겨 그 안에서 사흘을 버텼고, 여름에는 허수아비 수십 개에 자신의 옷을 입혀 참외밭 곳곳에 세워놓았습니다. 강림은 밤새 허수아비의 목에 오라를 걸다가 날이 밝고 나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추격이 한 달을 넘기자 저승에서는 강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승으로 올라오는 어린 사자들은 강림만 보면 웃음을 참으며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허수아비를 몇 명이나 잡으셨습니까?"
"찹쌀떡은 이제 잘 씹히십니까?"
강림은 대답 대신 붉은 오라를 힘껏 잡아당겼습니다. 어린 사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저승문 안으로 도망쳤습니다.
염라대왕에게서도 독촉이 내려왔습니다.
"동방삭을 잡지 못하겠다면 네가 대신 명부에 들어오너라."
강림의 자존심은 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는 산속 바위 위에 앉아 지난 추격을 하나씩 되짚어보았습니다.
동방삭은 명부가 자신의 기운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승사자가 사람의 말과 겉모습을 의심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강림이 정면으로 나타나면 싸우지 않고 미리 달아났습니다.
'쫓아가서는 잡을 수 없다. 그자가 달아날 생각조차 하지 않도록 곁에 숨어들어야 한다.'
강림은 마침내 추격을 멈췄습니다. 명부와 관모, 먹빛 도포와 붉은 오라를 깊은 동굴에 감추었습니다. 창백한 얼굴에는 햇볕에 그을린 듯한 흙을 바르고, 반듯한 상투를 풀어 거칠게 다시 묶었습니다.
검은 수염도 듬성듬성 붙이고, 낡은 삼베옷과 짚신을 구해 입었습니다. 허리에는 저승의 칼 대신 나무를 패는 도끼를 찼습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강림은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저승 최고의 사자인 내가 인간의 머슴 행세까지 해야 하다니."
하지만 동방삭에게 당한 망신을 떠올리자 마음이 다시 단단해졌습니다.
며칠 뒤, 강림은 산골의 어느 초가집 앞에 섰습니다. 그곳에는 장터와 산길에서 수없이 놓쳤던 동방삭이 이번에는 평범한 늙은 농부의 모습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강림은 일부러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사립문을 두드렸습니다.
"주인장, 지나가던 사람인데 밥 한 끼만 주시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마당에서 장작을 패던 동방삭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습니다.
동방삭은 거칠게 상투를 묶고 삼베옷을 입은 사내를 위아래로 살폈습니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떠돌이 머슴이었지만, 눈빛이 지나치게 차갑고 자세가 지나치게 반듯했습니다.
'저승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군.'
강림도 속으로 동방삭을 살폈습니다.
'드디어 찾았다. 이번에는 네가 잠든 뒤 혼백부터 묶어주마.'
두 사람은 서로를 의심하면서도 겉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순박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름이 무엇인가?"
"강돌이라고 합니다."
"힘은 좀 쓰는가?"
"도망치는 늙은이 하나쯤은 업고도 달릴 수 있습니다."
동방삭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습니다.
"그렇다면 들어오게. 마침 머슴이 하나 필요하던 참이었네."
천 년 묵은 인간과 이를 잡으러 온 저승사자의 두뇌 싸움은 이제 추격전이 아니라 한 지붕 아래의 수상한 동거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 3: 상투를 풀고 머슴이 된 저승사자
강림은 동방삭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간 첫날부터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승에서 그의 일은 정해진 시간이 되면 혼백을 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혼백이 달아나면 오라를 던져 묶었고, 악귀가 덤비면 저승의 칼로 제압했습니다. 그러나 이승의 농사일은 칼과 오라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동방삭은 동이 트기도 전에 방문을 열고 강림을 깨웠습니다.
"새로 온 머슴이 주인보다 늦게 일어나서야 되겠나? 일어나게."
강림은 밤새 동방삭의 숨소리를 들으며 혼백이 몸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을 기다리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아직 닭도 울지 않았습니다."
"닭보다 늦게 일어나려면 품삯을 닭에게 주어야지. 어서 소죽부터 끓이게."
강림은 아궁이 앞에 앉아 장작을 넣었습니다. 저승의 불은 손짓 한 번이면 피어났지만 이승의 젖은 장작은 연기만 뿜어냈습니다. 그가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자 검은 연기가 얼굴을 덮쳤습니다.
잠시 후 동방삭이 부엌으로 들어와 보니 강림은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아궁이와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자네 얼굴이 본래도 창백하더니 연기를 먹으니 숯검정까지 되었구먼."
강림은 이를 악물었습니다.
"장작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나무도 사람과 같아서 무조건 밀어붙이면 삐치는 법이야. 가는 솔가지로 불길을 만들고 그 위에 굵은 장작을 올려야지."
동방삭은 능숙하게 불을 피웠습니다. 강림은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며 의심을 키웠습니다. 수천 년을 도망 다닌 자가 평범한 농부처럼 아궁이를 다루고 소죽까지 끓이는 것이 오히려 더 수상했습니다.
아침을 먹은 뒤에는 지게에 거름을 싣고 밭으로 날라야 했습니다. 강림은 무거운 것을 드는 데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거름이 담긴 지게 세 개 분량을 한꺼번에 등에 올렸습니다.
"그렇게 많이 지면 지게가 부러질 텐데."
"이 정도는 깃털처럼 가볍습니다."
강림이 자신만만하게 일어서려는 순간, 낡은 지게의 다리가 우지끈 부러졌습니다. 거름 더미가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습니다.
동방삭은 코를 막고 뒤로 물러났습니다.
"힘은 좋은데 지게의 형편을 살피는 눈은 없구먼."
강림은 머리에서 떨어지는 지푸라기를 털며 속으로 이를 갈았습니다.
'오늘 밤 반드시 묶어간다.'
그러나 밤이 되자 동방삭은 잠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호롱불 아래에서 낡은 책을 펼쳐놓고 밤새 기침을 하며 글을 읽었습니다.
강림은 방문 밖에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숨소리가 일정해지면 들어가려 했지만, 동방삭은 잠들 듯하다가도 갑자기 몸을 일으켰습니다.
"강돌아, 자느냐?"
강림은 황급히 코 고는 흉내를 냈습니다.
"쿠우, 쿠우."
"자는 사람치고 대답이 빠르구나."
강림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잠시 후 동방삭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습니다. 강림은 문을 살며시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달빛 아래 동방삭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누워 있었습니다.
강림은 소매 안에 감춰둔 가느다란 오라를 꺼냈습니다. 본래의 붉은 오라는 동굴에 숨겨두었지만, 혹시 몰라 실처럼 가늘게 나눈 한 가닥을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불 위로 오라를 던지려는 순간,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한밤중에 남의 이불을 묶어서 무엇 하려는가?"
강림이 돌아보니 동방삭이 방문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은 짚을 채운 허수아비였습니다.
"방 안에 쥐가 들어간 것 같아 잡아드리려 했습니다."
"쥐를 잡는데 붉은 끈이 필요한가?"
"제가 살던 고을에서는 이렇게 잡습니다."
동방삭은 강림의 손에 들린 오라를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강림은 태연한 척 끈을 허리에 둘렀습니다.
"머슴이 장식으로 붉은 끈까지 차고 다니다니 멋을 아는 사람이구먼."
"주인장도 잠든 척 허수아비를 눕혀놓는 것을 보니 평범한 농부는 아닌 듯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싸늘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동방삭은 이내 하품을 하며 허수아비를 걷어찼습니다.
"내가 잠버릇이 험해 사람 대신 허수아비를 눕혀놓았을 뿐이네. 잘못하면 자다가 내 발에 걷어차일 수 있거든."
"허수아비가 주인장과 얼굴까지 똑같은 것은 우연입니까?"
"오래 살다 보면 손재주가 늘게 마련이지."
강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습니다.
"얼마나 오래 사셨기에 그렇습니까?"
동방삭은 잠시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능청스럽게 웃었습니다.
"자네처럼 의심 많은 머슴을 세 명쯤 겪을 만큼 살았네."
다음 날부터 두 사람은 겉으로는 주인과 머슴처럼 지냈지만, 속으로는 서로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시험을 시작했습니다.
동방삭은 아침 밥상에 팥죽과 마늘장아찌를 잔뜩 올렸습니다. 귀신과 저승사자가 붉은 팥과 강한 마늘 냄새를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떠올린 것이었습니다.
"새 머슴이 왔으니 특별히 잘 차렸네. 많이 먹게."
강림은 팥죽을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습니다. 팥의 붉은 기운과 마늘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피하면 정체를 들킬 수 있었습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강림은 눈을 질끈 감고 팥죽을 한 숟가락 삼켰습니다. 순간 속이 뒤집히는 듯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었습니다.
동방삭은 그의 얼굴을 살폈습니다.
"맛이 어떠한가?"
"아주 좋습니다."
"얼굴은 죽기 직전인데?"
"너무 맛있어서 놀란 것입니다."
강림은 팥죽 한 그릇을 모두 비운 뒤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헛간 뒤에서 한참 동안 기침을 했습니다.
'역시 사자인가? 하지만 진짜 사자라면 팥죽 한 그릇을 다 먹을 수 있을 리 없는데.'
동방삭은 더욱 헷갈렸습니다.
강림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방삭의 나이를 알아내기 위해 마을 노인들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아랫마을에 아흔 살 된 노인이 산다더군요. 그 나이면 세상의 온갖 일을 다 보았겠지요."
"아흔 살이면 이제 막 세상 구경을 시작한 나이지."
동방삭은 무심코 대답했다가 입을 다물었습니다.
강림의 눈이 반짝였습니다.
"아흔 살이 어리다고 하셨습니까?"
"거북이의 처지에서 말한 것이네."
"주인장은 거북이와 대화를 나누십니까?"
"농부가 오래 밭을 갈다 보면 말이 통하지 않는 것과도 이야기를 나누게 되지."
또 다른 날, 강림은 일부러 고대 왕조의 이름을 꺼냈습니다.
"옛날 어느 임금이 이 근처를 지나다 큰 느티나무 아래에서 쉬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동방삭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습니다.
"그 임금은 느티나무가 아니라 버드나무 아래에서 쉬었네. 그때 느티나무는 아직 어린 묘목이었지."
강림이 곧바로 물었습니다.
"직접 보셨습니까?"
동방삭은 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습니다.
"옛 문헌에서 읽었네."
"글도 모르는 농부가 어떤 문헌을 읽었습니까?"
"머슴이 주인의 과거를 너무 캐묻는군."
둘의 신경전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습니다.
강림은 동방삭이 목욕할 때 등에 죽은 자의 표식이 있는지 엿보려 했고, 동방삭은 강림이 잠들었을 때 그림자가 사람처럼 움직이는지 살폈습니다. 강림은 새벽마다 명부를 펼쳐 기운을 확인했지만, 동방삭은 집 곳곳에 자신의 머리카락과 낡은 옷가지를 숨겨 붉은 기운이 여러 방향에서 나타나도록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는 강림이 동방삭의 방에서 기척을 느끼고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방 안에는 동방삭과 똑같은 수염과 옷을 입힌 허수아비가 일곱 개나 앉아 있었습니다.
강림이 허수아비를 하나씩 들추는 동안 진짜 동방삭은 지붕 위에 앉아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저 머슴이 보통내기가 아닌 것은 분명한데, 성질이 너무 급해. 저승사자라면 조금 더 무서울 줄 알았더니 보는 재미가 있구먼."
그러나 동방삭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강림은 이전에 만났던 사자들과 달랐습니다. 몇 번을 속여도 포기하지 않았고, 모욕을 당해도 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농사일도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한번 배운 일은 다시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강림은 장작을 알맞은 크기로 패고, 소죽도 잘 끓였으며, 지게에 얼마나 실어야 부러지지 않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동방삭이 부지런하고 힘센 머슴을 얻었다며 부러워했습니다.
동방삭은 오히려 그것이 불안했습니다.
'저승사자가 아니라면 평생 머슴으로 부려도 좋을 사람인데, 저승사자라면 내 목숨을 노리고 곁에 붙어 있는 셈이군.'
강림 역시 초조했습니다. 동방삭이 눈앞에 있다는 확신은 들었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수명을 거두려면 이름과 혼백이 정확히 일치해야 했습니다. 동방삭이 또 다른 이름으로 명부를 속이고 있다면 엉뚱한 혼백을 잡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두 달이 흘렀습니다.
어느 저녁, 동방삭이 강림에게 물었습니다.
"강돌아, 자네는 이 집에 언제까지 머물 생각인가?"
"주인장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겠습니다."
동방삭은 밥을 먹던 숟가락을 멈췄습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몹시 무서운 말이구먼."
"오래오래 사시라는 뜻입니다."
"내가 아주 오래 살 것 같나?"
강림은 동방삭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아마 세상의 누구보다 오래 사셨겠지요."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맞부딪쳤습니다. 이번에는 어느 쪽도 먼저 웃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강림은 동굴에 숨겨둔 관모와 먹빛 도포, 붉은 오라를 꺼내왔습니다. 더는 머슴으로 기다리기만 해서는 동방삭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면으로 덤비면 또다시 놓칠 것이 분명했습니다. 동방삭이 스스로 자신의 오래된 세월을 입 밖에 내도록 만들어야 했습니다.
강림은 냇가에 쌓여 있는 검은 숯을 바라보았습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눈에 서늘한 빛이 번졌습니다.
'오래 산 자일수록 자신이 본 세월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법이다. 이승에서 아무도 하지 않을 일을 벌이면, 저자는 반드시 참견하러 올 것이다.'
다음 날 새벽, 강림은 동방삭이 일어나기 전에 집을 나섰습니다. 머슴옷 아래에는 저승사자의 먹빛 도포를 갖춰 입었고, 소매 안에는 붉은 오라를 감추었습니다.
그는 검은 숯을 지게에 가득 싣고 마을 앞 냇가로 향했습니다.
잠시 후 잠에서 깨어난 동방삭은 강림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마당에는 숯가루가 묻은 발자국이 냇가 방향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동방삭은 수염을 쓰다듬었습니다.
"머슴이 새벽부터 숯을 지고 냇가에는 왜 갔을까?"
평소 같았다면 수상한 기척을 느끼는 즉시 반대 방향으로 달아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달 동안 함께 지내며 강림의 행동을 지켜본 탓인지, 이번에는 호기심이 먼저 일어났습니다.
동방삭은 삿갓을 쓰고 발자국을 따라 냇가로 향했습니다.
냇가에는 머슴 강돌이 검은 숯을 물속에 담가 힘껏 문지르고 있었습니다. 숯가루가 흘러나오며 맑은 냇물이 새까맣게 물들었는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동방삭은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저 미련한 자가 대체 무엇을 하는 게야?"
강림은 동방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고도 고개를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검은 숯을 돌에 문지르고 물로 씻기를 반복했습니다.
마침내 동방삭이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강돌아, 검은 숯을 물에 씻어서 무엇 하려는가?"
강림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검은 숯이 희어질 때까지 씻는 중입니다."
동방삭의 입가에 어이없는 웃음이 번졌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강림의 소매 안에 감춰진 붉은 오라가 살아 있는 뱀처럼 조용히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 4: 냇가에서 숯을 씻는 수상한 사내
강림은 검은 숯덩이를 냇물에 담가 돌 위에 세차게 문질렀습니다. 숯가루가 새까맣게 풀어지며 맑았던 물을 흐려놓았지만, 숯은 조금도 희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물에 젖을수록 더욱 검고 번들거렸습니다.
동방삭은 냇가에 쪼그리고 앉은 강림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습니다.
"검은 숯을 희게 만들겠다니, 세상에 자네처럼 미련한 사람은 처음 보는구먼."
강림은 고개도 들지 않고 숯을 계속 문질렀습니다.
"계속 씻다 보면 언젠가는 희어지겠지요."
"백 년을 씻어도 검은 숯은 검은 숯이야."
"백 년으로 부족하다면 천 년을 씻겠습니다."
동방삭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천 년을 씻는다고 숯이 희어질 것 같은가? 숯은 나무가 불에 타 검게 변한 것이니, 아무리 물로 씻어도 본래의 흰 나무로 돌아갈 수 없네."
"그것을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강림이 처음으로 손을 멈췄습니다. 그러나 동방삭은 그의 질문에 담긴 날카로운 기운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것을 보아온 그는 자신의 경험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얼마나 오래 살았는데 그런 것도 모르겠는가? 산이 들판으로 변하는 것도 보았고, 흐르던 강의 물길이 뒤바뀌는 것도 보았네. 왕조가 일어나고 무너지는 것도 여러 번 지켜보았지."
강림은 일부러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습니다.
"그래도 검은 숯을 희게 만들려는 사람을 한 번쯤은 보셨을 텐데요."
동방삭은 코웃음을 쳤습니다.
"삼천갑자를 살아온 이 동방삭도 검은 숯을 물에 씻어 희게 만들겠다는 미련한 자는 처음 본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동방삭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습니다.
냇물 흐르는 소리만 조용히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나뭇가지에서 울던 새도 갑자기 입을 다문 듯 산골이 고요해졌습니다.
동방삭은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습니다.
'이런, 내가 무슨 말을 한 것이냐!'
강림은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숯을 내려놓았습니다.
"방금 자신을 누구라고 하셨습니까?"
동방삭은 눈을 끔벅거리다가 능청스럽게 웃었습니다.
"동방에서 삭풍이 불어온다고 했네. 나이가 드니 발음이 흐려졌구먼."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말도 바람 이야기입니까?"
"삼천 갑의 숯을 사 왔다고 했지."
"그 많은 숯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 장터에 있네."
"어느 장터입니까?"
"저기, 그러니까…… 동쪽 장터일세."
동방삭은 뒷걸음질을 치며 주변을 살폈습니다. 냇가 건너편에는 대나무숲이 있었고, 왼쪽으로 달리면 장터로 이어지는 길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강림은 이미 동방삭이 달아날 방향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젖은 머슴옷의 허리끈을 풀자 그 아래에서 먹빛 도포가 드러났습니다. 거칠게 묶었던 머리도 스스로 풀려 올라가 반듯한 상투가 되었고, 낡은 머리싸개는 검은 관모로 변했습니다. 소매 안에서는 붉은 오라가 살아 있는 뱀처럼 스르르 흘러나왔습니다.
동방삭은 뒤늦게 탄식을 내뱉었습니다.
"역시 저승사자였구나!"
"저승 최고의 사자 강림이다. 동방삭, 네 숨바꼭질은 여기서 끝났다."
동방삭은 발을 돌려 대나무숲으로 달렸습니다. 조금 전까지 허리가 굽은 노인이었던 몸이 순식간에 젊은 사내처럼 곧게 펴졌습니다. 낡은 도포를 벗어 던지자 그 아래에는 산길을 달리기 좋은 짧은 한복이 나왔습니다.
강림이 붉은 오라를 던졌습니다.
오라는 허공을 가르며 동방삭의 허리를 향해 날아갔습니다. 동방삭은 달리면서 삿갓을 벗어 뒤로 던졌습니다. 삿갓은 허공에서 그와 똑같은 얼굴을 한 허수아비로 변했습니다. 오라는 허수아비를 단단히 묶었지만, 강림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또 허수아비냐!"
강림이 손가락을 튕기자 오라는 허수아비를 찢고 다시 동방삭을 쫓았습니다.
동방삭은 대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휘돌며 자신의 겉옷을 나뭇가지마다 걸었습니다. 옷에 묻은 기운 때문에 명부의 붉은 빛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그러나 강림은 이번에는 명부를 보지 않았습니다.
"네 이름은 네 입으로 직접 밝혔다. 이제 옷이나 머리카락으로 명부를 속일 수 없다!"
동방삭은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이름을 바꾸고 기운을 흩어 저승사자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동방삭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 스스로 이름과 세월을 말한 순간, 혼백과 명부의 이름이 다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대나무숲을 빠져나와 장터로 이어지는 갈림길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소를 끌고 가던 농부와 장에 가는 아낙들이 길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동방삭은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며 얼굴을 바꾸었습니다. 늙은 농부가 되었다가 젊은 장정이 되었고, 다시 쪽진머리를 한 아낙의 얼굴로 변했습니다. 길 위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순간 동방삭처럼 보였습니다.
강림은 갈림길 앞에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수십 명의 동방삭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예전 같았다면 누구를 쫓아야 할지 몰라 망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달 동안 한집에서 지낸 강림은 동방삭에게 남들이 모르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동방삭은 급하거나 거짓말을 할 때마다 오른손으로 왼쪽 수염 끝을 만졌습니다. 얼굴과 성별을 바꾸어도 오랜 버릇까지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강림은 사람들 사이를 살폈습니다. 쪽진머리를 한 중년 여인 하나가 달리면서 무심코 왼쪽 턱을 만지고 있었습니다. 수염은 없었지만 손은 분명 수염을 쓸어내리는 동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찾았다!"
강림이 붉은 오라를 던졌습니다. 오라는 사람들 사이를 뱀처럼 빠져나가 여인의 허리를 감았습니다.
여인으로 변장한 동방삭은 바닥에 넘어지기 직전 몸을 빙글 돌렸습니다. 이번에는 작은 아이로 변해 오라 사이에서 빠져나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붉은 오라는 몸이 아니라 혼백을 묶는 저승의 물건이었습니다. 몸집이 작아지자 오라도 그만큼 줄어들어 더욱 단단히 조였습니다.
"이것도 놓아라! 지나가는 어린아이를 잡아가려는 못된 사자가 있나!"
"목소리부터 수천 년 묵은 늙은이가 아니냐!"
강림이 오라를 잡아당기자 동방삭은 다시 본래의 백발노인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저승 최고의 사자라더니 머슴살이까지 할 줄은 몰랐군. 자네가 이겼네."
"순순히 따라오겠다는 말이냐?"
"그 전에 자네가 내 집에서 먹은 밥값과 머슴 품삯부터 계산해야 하지 않겠나?"
강림은 어이가 없어 동방삭을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두 달 동안 소죽을 끓이고, 거름을 나르고, 장작까지 팼다. 품삯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나다."
"그렇다면 품삯을 줄 테니 오라를 잠시 풀어보게."
"누구를 또 바보로 아느냐?"
"아쉽군. 집 구들장 아래에 금붙이를 조금 묻어두었는데."
강림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습니다.
"저승사자는 이승의 재물에 흔들리지 않는다."
"금을 싫어한다면 천 년 묵은 산삼은 어떤가? 죽은 사자도 벌떡 일어날 만큼 좋은 것이네."
"나는 이미 저승사자다."
"그러니 더 잘 듣겠지."
강림은 오라를 더욱 세게 당겼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뇌물도 통하지 않는다."
동방삭은 그 말에 피식 웃었습니다.
"주막의 엿은 소매에 챙기지 않았나?"
강림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그것은 증거물이었다."
"약재상에서 준 찹쌀떡도 증거물로 먹었겠군."
"입을 다물어라."
"팥죽 한 그릇을 먹고 헛간 뒤에서 토한 것도 수사의 일부였겠지?"
강림은 대답 대신 동방삭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장터 사람들의 눈에는 백발노인이 혼자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영혼의 눈으로 보면 붉은 오라에 단단히 묶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동방삭이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강림, 정말로 내가 가야 할 때가 된 것인가?"
강림은 명부를 펼쳤습니다. 수없이 지우고 고친 흔적 사이로 동방삭의 본래 수명이 드러났습니다. 그 수명은 이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래전에 끝나 있었습니다.
"네가 훔쳐 쓴 세월만 해도 수천 년이다. 이제 더는 명부를 속일 수도, 이름을 숨길 수도 없다."
동방삭은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되돌아보듯 산과 들을 천천히 바라보았습니다. 수없이 많은 왕조와 마을, 사람의 탄생과 죽음을 지켜본 눈에도 잠시 쓸쓸한 빛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평소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되찾았습니다.
"그렇다면 떠나기 전에 집에서 밥 한 끼만 먹고 가세. 두 달이나 한솥밥을 먹었는데 마지막 인사도 없이 가면 분이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나?"
강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구들장이나 굴뚝 속에 숨어 또 달아날 것이다."
"자네는 나를 너무 못 믿는군."
"수천 년 동안 서른일곱 명의 사자를 속인 사람을 어떻게 믿느냐?"
"서른일곱이 아니라 서른여덟이네. 한 명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도 모르고 돌아갔지."
강림은 붉은 오라를 세게 잡아당겼습니다.
"한마디만 더 하면 저승까지 거꾸로 끌고 간다."
동방삭은 끌려가면서도 웃었습니다.
"머슴으로 있을 때보다 사자 옷을 입으니 훨씬 성질이 급해졌구먼."
그렇게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숨바꼭질은 냇가의 검은 숯 한 덩이 때문에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동방삭은 저승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마지막 꼼수를 포기하지 않은 눈치였습니다.
그의 소매 안에서는 몰래 숨겨둔 엿 한 덩이가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 5: 삼천갑자 숨바꼭질의 마지막
강림은 붉은 오라에 묶인 동방삭을 데리고 저승문으로 향했습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가까워질수록 하늘은 어두워지고 산길에는 흰 안개가 짙게 깔렸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조금 전까지 지나온 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동방삭은 오라에 묶인 채로도 주변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이 길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군."
강림이 걸음을 멈추며 돌아보았습니다.
"예전에 저승길을 와본 적도 있느냐?"
"그럴 뻔한 적은 많았지. 어느 때는 저승문 앞까지 끌려왔다가 사자에게 술을 먹이고 달아났고, 어느 때는 망자의 옷을 바꿔 입어 다른 혼백 행세를 했네."
"그 일 때문에 명부 창고의 문이 일곱 겹으로 늘어났다."
"나 하나 때문에 저승의 경비가 튼튼해졌으니 상이라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조용히 걸어라."
두 사람은 망자의 강 앞에 도착했습니다. 검은 물 위에는 안개가 낮게 흐르고, 강 건너편에는 저승의 거대한 성문이 보였습니다. 배를 지키는 늙은 뱃사공은 동방삭을 보자 눈을 가늘게 떴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동방삭은 반갑게 손을 들었습니다.
"오랜만이오. 예전에 내가 좋은 술 한 병을 드리지 않았소?"
뱃사공은 한참 기억을 더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너는 그때 술에 수면초를 넣어 나를 재우고 배를 훔쳐 달아난 놈이 아니냐!"
"훔친 것이 아니라 잠시 빌린 것이오. 배는 강 아래에 잘 매어두었는데 찾지 못했소?"
"급류에 떠내려가 삼 년 뒤에야 찾았다!"
뱃사공이 노를 들고 달려들자 강림이 두 사람 사이를 막았습니다.
"염라대왕의 명을 받은 죄인이다. 원한은 나중에 판결을 받은 뒤 따지시오."
동방삭은 배에 오르면서 강림에게 속삭였습니다.
"보았나? 저승에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네."
"원수를 많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오래 살다 보면 아는 사람이 늘게 마련이지."
배가 강 한가운데에 이르자 동방삭은 소매 안에서 엿 한 덩이를 꺼냈습니다. 냇가에서 붙잡히기 전 미리 챙겨둔 것이었습니다.
"강림, 오랜 추격으로 배가 고프지 않은가?"
강림은 엿을 보자 주막과 약재상에서 당한 일이 떠올라 눈을 가늘게 떴습니다.
"또 입을 붙여놓고 달아날 셈이냐?"
"이번 것은 평범한 엿이네. 두 달 동안 한집에서 살았던 정을 생각해 나누어 먹자는 것이지."
"네가 주는 음식은 저승문을 통과한 뒤에도 먹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너무 의심이 많으면 친구가 없네."
"나는 친구를 사귀러 온 것이 아니라 너를 잡으러 왔다."
동방삭은 엿을 자신의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습니다.
"생각보다 성실한 머슴이어서 친구로 삼을 만했는데 아쉽군."
강림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달 동안 동방삭의 집에서 지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아궁이 불을 피우지 못해 연기를 마셨던 날, 지게가 부러져 거름을 뒤집어쓴 날, 팥죽을 먹고 헛간 뒤에서 고생했던 날까지 어느 하나 즐겁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시간들이 아주 싫지만은 않았습니다.
강림은 저승에서 늘 정해진 이름과 수명만을 확인했습니다. 누가 어떤 밥을 먹고, 어떤 농사일을 하며, 무엇을 걱정하다 죽는지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머슴으로 지내며 그는 이승 사람들이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는지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묻겠다."
강림의 말에 동방삭이 고개를 돌렸습니다.
"무엇인가?"
"수천 년 동안 그렇게까지 죽음을 피해 무엇을 하려고 했느냐? 재물을 쌓으려 했느냐, 임금이 되려 했느냐?"
동방삭은 한동안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죽는 것이 무서웠네. 하루만 더 살고 싶어 명부를 고쳤고, 그 하루가 한 해가 되고 한 갑자가 되었지. 세월이 길어지자 다음 세상이 궁금해졌네. 어린 나무가 얼마나 크게 자라는지, 작은 마을이 어떤 고을이 되는지, 갓 태어난 아이가 어떤 사람으로 늙어가는지 보고 싶었어."
"그렇게 오래 살았으니 원하던 것은 모두 보았겠군."
"아니. 오래 살수록 보고 싶은 것이 더 많아졌네. 봄이 오면 가을의 곡식이 궁금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의 자식이 궁금했지. 내일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에게 끝없는 욕심을 만들어주더군."
강림은 조용히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붙잡힌 것이 억울하냐?"
동방삭은 씹고 있던 엿을 삼킨 뒤 웃었습니다.
"조금은 억울하고, 조금은 홀가분하네. 수천 년 동안 문 두드리는 소리만 나도 사자인가 의심했고, 새로 만난 사람의 얼굴부터 살폈지. 오래 살기는 했지만 마음 편히 늙어본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군."
배가 강 건너편에 닿았습니다. 저승의 성문 앞에는 판관들과 수십 명의 사자가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동방삭을 알아본 사자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습니다.
"정말 잡아왔어."
"허수아비가 아닌가?"
"얼굴을 잡아당겨 확인해봐야 하는 것 아니야?"
강림은 붉은 오라를 들어 보였습니다.
"명부와 혼백이 일치한다. 틀림없는 동방삭이다."
과거 동방삭에게 속았던 늙은 사자가 다가와 그의 수염을 잡아당겼습니다.
"이번에도 가짜 수염 아니냐?"
동방삭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진짜 수염이오! 저승사자가 사람을 잡았으면 예의를 지켜야지!"
사자들은 그제야 환호했습니다. 어떤 사자는 강림의 등을 두드렸고, 어떤 사자는 동방삭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다리와 소매를 붙잡았습니다.
강림과 동방삭은 수많은 판관이 늘어선 염라전으로 들어갔습니다. 높은 판결대 위에는 염라대왕이 위엄 있게 앉아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은 동방삭을 내려다보며 수염을 쓸어내렸습니다.
"네가 바로 삼천갑자 동방삭이냐?"
동방삭은 공손히 절을 올렸습니다.
"사람들이 오래 살았다고 부풀려 붙인 이름일 뿐이옵니다."
판관 하나가 낡은 명부를 펼쳤습니다.
"명부를 삼천 번이나 고친 흔적이 남아 있사옵니다."
"붓을 잡은 김에 조금 손을 본 것이옵니다."
"저승사자 서른여덟 명을 속였다."
"저를 잡으러 오신 분들이 너무 쉽게 속으셨사옵니다."
전각 곳곳에서 사자들이 분한 소리를 냈습니다. 염라대왕이 판결대를 내리치자 모두 조용해졌습니다.
"네 죄는 오래 산 것만이 아니다. 저승의 법을 어지럽히고 명부를 훔쳐 수많은 혼백의 기록을 뒤섞은 죄가 크다."
동방삭은 이번에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벌을 받겠사옵니다."
염라대왕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가늘게 떴습니다.
"또 무슨 꾀를 꾸미고 있느냐?"
"수천 년 동안 꾀를 부렸으나 결국 검은 숯 한 덩이에 붙잡혔사옵니다. 이제 더 꾸밀 꾀도 없사옵니다."
강림은 동방삭의 소매를 살폈습니다.
"다만 소매 안에 엿 하나가 더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동방삭이 억울한 표정으로 소매를 뒤집었습니다. 정말로 안쪽에서 작은 엿 한 조각이 떨어졌습니다.
판관들과 사자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습니다. 염라대왕조차 경계하는 눈빛으로 엿을 바라보았습니다.
동방삭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길에서 먹으려고 챙긴 것이옵니다."
염라대왕은 판관들에게 명부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동방삭이 이승에서 보낸 수천 년의 기록이 전각 바닥을 가득 채웠습니다. 처음에는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하고 뇌물을 쓴 일이 많았지만, 긴 세월 동안 굶주린 사람을 돕고 전쟁고아를 돌보며 마을의 재난을 막은 기록도 적지 않았습니다.
염라대왕은 오랫동안 기록을 살핀 뒤 판결을 내렸습니다.
"동방삭은 빌려 쓴 수명을 모두 끝내고 다시는 이승으로 돌아갈 수 없다. 또한 어지럽힌 명부를 바로잡을 때까지 저승의 기록고에서 일하게 하라."
동방삭의 눈이 커졌습니다.
"기록고라면 제가 명부를 만지게 되는 것이옵니까?"
판관들이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건 너무 위험하옵니다!"
염라대왕은 곧바로 말을 고쳤습니다.
"붓과 먹은 절대로 주지 말고, 판관들이 읽어주는 기록을 분류하는 일만 맡겨라. 두 손에는 저승의 장갑을 씌워 글씨를 고치지 못하게 하라."
동방삭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습니다.
"한 글자 정도는 고쳐도 되지 않겠사옵니까?"
"안 된다!"
염라전 안의 모든 이가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염라대왕은 이어 강림을 바라보았습니다.
"강림은 수천 년 동안 잡히지 않던 동방삭을 붙잡은 공이 크다. 원하는 상을 말해보아라."
강림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이승에 사자를 보낼 때 명부의 이름과 수명만 알려주지 마시고,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함께 기록해주시길 바라옵니다."
염라대왕은 뜻밖의 청에 눈썹을 올렸습니다.
"어째서냐?"
"머슴으로 지내며 알게 되었사옵니다. 이승의 한 사람을 데려온다는 것은 이름 하나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족과 이웃, 오래 이어진 사연 하나를 거두어오는 일이었사옵니다."
염라대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은 깨달음이로구나. 그리하도록 하라."
재판이 끝나자 동방삭은 기록고로 끌려갔습니다. 강림은 다시 사자의 일을 맡기 위해 염라전을 나섰습니다.
갈림길에서 동방삭이 그를 불렀습니다.
"강림."
강림이 돌아보자 동방삭이 저승의 장갑을 낀 손을 들어 보였습니다.
"내가 머슴 품삯을 주지 못했군."
"필요 없다."
"언젠가 자네가 기록고에 오면 막걸리 한 사발은 대접하겠네."
"저승 기록고에 막걸리가 어디 있느냐?"
동방삭은 눈을 찡긋했습니다.
"수천 년을 살다 보면 술을 숨길 만한 곳은 얼마든지 알게 되지."
강림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이번에 또 사고를 치면 숯 씻는 곳으로 보내버리겠다."
동방삭은 검은 숯이라는 말에 질린 듯 두 손을 내저었습니다.
"그것만은 사양하겠네. 검은 숯은 씻어도 절대 희어지지 않으니까."
강림은 먹빛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저승문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동방삭도 판관들에게 둘러싸인 채 기록고로 향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숨바꼭질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하지만 저승의 판관들은 그날부터 명부를 펼칠 때마다 붓과 먹이 제대로 잠겨 있는지 가장 먼저 확인했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삼천갑자 동방삭이 다시 숫자 하나를 슬쩍 고칠지 몰랐기 때문이랍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수천 년 동안 죽음을 피해 다닌 동방삭과 그를 잡기 위해 머슴까지 된 강림의 이야기, 재미있게 들으셨나요? 아무리 뛰어난 꾀도 삶과 죽음의 순리까지 영원히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긴 추격 속에서 사자는 인간의 삶을 이해했고, 동방삭도 끝내 떠날 때를 받아들였지요. 오늘 이야기가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부탁드립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