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라대왕도 두려워한 무당의 정체
염라대왕도 두려워한 무당의 정체 『동야휘집(東野彙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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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사자도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그 무서운 염라대왕조차 벌벌 떨었다는 무당이 조선 땅에 실제로 있었더랍니다. 죽은 자를 되살리고, 사무친 원혼을 극락으로 인도하며, 급기야 저승의 임금 앞에까지 불려 간 여인. 헌데 그 수수한 무당의 진짜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염라대왕마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대체 그녀는 누구였을까요? 오늘 염라야담이, 신보다 강한 힘을 지녔던 한 여인의 충격적인 비밀을 들려드립니다.
※ 1: 저승사자를 꾸짖은 무당
저승사자가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그 무서운 염라대왕조차 두려워했다는 무당이 있었더랍니다. 조선 숙종 임금 시절, 한양 남산골에 살던 연화라는 여인 이야기지요. 겉보기엔 그저 수수한 중년 아낙이었더랍니다. 키도 자그맣고, 얼굴도 평범하고, 목소리도 나직나직했지요. 헌데 이 여인에게, 세상 사람은 짐작도 못할 무서운 비밀이 숨어 있었더랍니다.
그해 가을, 한양에 이상한 소문이 슬금슬금 돌기 시작했지요. 죽을 병에 걸렸던 이들이 연화라는 무당을 만나고 나면, 씻은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는 것이었더랍니다. 처음엔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요. 그저 용한 무당이겠거니 했던 겁니다. 헌데 점점, 예사롭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더랍니다.
어느 날 밤, 남산골 어느 대갓집에서 난리가 났지요. 그 집 외동아들이 멀쩡히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픽 쓰러지더니,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질 않는 것이었더랍니다. 이름난 의원을 다 불러다 진맥을 해봐도, 맥은 뛰는데 정신은 돌아오지 않는 괴이한 상태가 이어졌지요. 꼭 넋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더랍니다.
온 집안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늙은 하인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지요.
"마님, 남산골에 연화라는 무당이 있는뎁쇼. 이런 일에는 도가 아주 높다 하옵니다. 다른 무당이 못 푸는 일도 척척 풀어낸다지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던 식구들은, 한밤중인데도 부랴부랴 사람을 보내 연화를 모셔 왔더랍니다.
연화가 그 집에 당도했을 땐, 밤이 이슥한 뒤였지요. 그녀는 혼절한 청년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낯빛이 대번에 어두워졌더랍니다.
"이 아이의 혼이 저승으로 끌려갔습니다. 저승사자들이 데려간 게지요."
식구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지요. 아직 숨이 붙어 있는데 저승사자가 다녀갔다니, 이 무슨 청천벽력입니까.
"아직 이 아이가 갈 때가 아닌데, 명부가 잘못된 게야. 제가 직접 저승에 가서 이 아이의 혼을 도로 데려오겠습니다."
식구들은 반신반의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지요. 연화는 방 한가운데 조촐한 제단을 차리고 굿을 시작했더랍니다. 헌데 이게 여느 굿과는 사뭇 달랐지요. 그녀가 장구를 둥, 둥 울리며 나직이 주문을 외자, 대뜸 방 안 공기가 서릿발처럼 싸늘해지는 것이었더랍니다. 촛불이 꺼질 듯 파르르 떨고, 어디선가 축축한 바람이 스멀스멀 불어들었지요.
바로 그때였더랍니다. 방 한구석 어둠 속에서, 검은 도포에 갓을 눌러쓴 그림자들이 스르르 솟아나기 시작했지요. 바로 저승사자들이었더랍니다. 헌데 참 묘한 일이었지요. 그 서슬 퍼런 저승사자들이, 연화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웬 계집이냐! 감히 저승의 일에 끼어들려 하느냐!"
저승사자 하나가 으름장을 놓았지요. 헌데 연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더랍니다. 도리어 서릿발같이 차분한 목소리로 되받았지요.
"나는 연화다. 이 아이의 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니, 어서 그 혼을 내어놓아라."
저승사자들은 어안이 벙벙했더랍니다. 여느 인간 같으면 벌벌 떨며 빌 텐데, 이 여인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맞서니 기가 찰 노릇이었지요.
"무엄하다! 염라대왕의 명을 받고 데려가는 것이거늘, 네가 무엇이기에 앞을 막느냐!"
그 순간, 연화의 두 눈에서 형형한 빛이 뿜어져 나왔더랍니다. 그녀가 허공에 손을 들어 무언가 그리자, 방 안이 대낮처럼 번쩍 밝아졌지요. 저승사자들은 그 빛에 눈이 부셔 비명을 질렀더랍니다.
"으악! 이, 이게 대체 무슨 빛이냐!"
연화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일렀지요.
"나는 너희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어서 이 아이의 혼을 돌려놓고 물러가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가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다."
저승사자들은 연화에게서 뻗어 나오는 그 신령한 기운에 짓눌려, 그만 어쩔 줄을 몰랐더랍니다. 우두머리 사자가 마지막으로 발악하듯 소리쳤지요.
"네 이년! 염라대왕의 진노를 어찌 감당하려고!"
허나 연화는 도리어 빙긋 웃었더랍니다.
"염라대왕이라... 그가 만일 나를 알아본다면, 감히 이런 명은 내리지 못했을 터인데."
그 말에 저승사자들은 더욱 오싹해졌지요. 도대체 이 여인이 누구이기에, 저승의 임금인 염라대왕조차 어쩌지 못한단 말입니까. 마침내 저승사자들은 더 버티지 못하고, 청년의 혼을 놓아준 채 황급히 자취를 감추었더랍니다.
그 찰나, 죽은 듯 누워 있던 청년이 번쩍 눈을 떴지요.
"어? 나는... 여태 어디 있었던 게지?"
식구들은 기뻐 울며 청년을 끌어안았더랍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식이 되살아났으니, 그 기쁨을 어찌 말로 다 하겠습니까. 청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금 캄캄한 길을 한참 걷다가 누군가 자기 손을 잡아끌어 되돌려 놓더라는 말만 되뇌었지요. 허나 정작 사람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 것은 따로 있었지요. 저 수수한 무당 연화가, 대체 무엇이기에 저승사자를 꾸짖어 물리친단 말입니까. 그 진짜 정체가, 참으로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2: 능력의 시작
헌데 연화가 처음부터 그런 무서운 힘을 지녔던 것은 아니었더랍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을 아는 이들 말로는, 연화는 충청도 단양 어느 두메산골에서 나고 자란 여느 농사꾼의 딸이었지요. 다만 남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어릴 적부터 남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종종 보곤 했다는 것이었더랍니다.
연화가 열 살 되던 해였지요. 어느 달 밝은 밤, 마당에서 홀로 놀고 있는데 난데없이 하얀 소복을 입은 할머니 한 분이 스르르 나타났더랍니다. 그 할머니는 연화에게 다가와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리 일렀지요.
"얘야, 너는 남다른 아이로구나. 앞으로 수많은 사람을 구할 귀한 운명을 타고났느니라. 훗날 힘든 일이 닥치거든, 네 마음속 어진 마음만은 결코 놓지 말거라."
연화가 이 말을 부모님께 전했지만, 아무도 곧이듣지 않았더랍니다. 그저 아이가 꿈을 꾸었거니 했지요. 허나 그 하얀 소복 할머니의 얼굴만은, 연화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또렷이 남아 있었더랍니다.
연화가 스무 살 되던 해, 단양 골짜기에 모진 가뭄이 들었더랍니다. 몇 달째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논밭이 쩍쩍 갈라지고 곡식이 모조리 타 죽어 갔지요. 마을 사람들이 용왕제도 지내고 기우제도 올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더랍니다. 하늘이 야속하기만 했지요. 그때 연화가 조용히 나섰더랍니다.
"제가 비를 내려 보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코웃음부터 쳤지요.
"허허, 저 어린 처녀가 대체 무슨 수로 비를 부른단 말인가."
허나 연화는 개의치 않고 홀로 뒷산 꼭대기에 올랐더랍니다. 그러고는 밤을 꼬박 새우며 하늘을 향해 두 손 모아 빌었지요.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더랍니다. 이튿날 새벽부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주룩주룩 단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었지요. 며칠을 이어 내린 비에 타 죽어 가던 곡식이 되살아나고, 갈라진 논에 물이 그득 찼더랍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만 입을 딱 벌렸지요.
"세상에, 정말로 저 처자가 비를 불러온 게야!"
이 일을 계기로 연화는 마을에서 어엿한 무당으로 대접받게 되었더랍니다.
서른 살이 되자, 연화는 봇짐을 꾸려 한양으로 올라왔지요. 시골에서는 제 능력을 온전히 쓸 수 없다고 여겼던 겁니다. 한양에는 사람도 많고, 딱한 사연도 그만큼 많았으니까요. 연화는 남산골 어귀에 조그만 집 한 채를 얻어, 무당 일을 시작했더랍니다.
처음 얼마간은 별일이 없었지요. 점을 봐 달라는 이, 굿을 청하는 이가 이따금 찾아드는 정도였더랍니다. 연화의 점이 용하긴 했으나, 여느 무당과 크게 달라 보이진 않았지요. 헌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예사롭지 않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더랍니다.
어느 날, 한 아낙이 사색이 되어 연화를 찾아왔지요.
"무당님, 우리 서방이 며칠 전부터 아주 이상해졌습니다. 텅 빈 허공에다 대고 자꾸 누구랑 이야기를 나누질 않나, 밤만 되면 짐승처럼 울부짖질 않나... 아무래도 뭐가 씐 것 같아요."
연화는 아낙을 따라 그 집으로 갔더랍니다.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온 집 안에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느껴졌지요. 방 안에 누운 사내는 눈동자가 흐리멍덩하고, 쉴 새 없이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더랍니다. 연화가 가만히 살펴보니, 그 사내에게 예사롭지 않은 귀신이 달라붙어 있었지요. 그것도 아주 독하고 사나운 원귀였더랍니다.
"네 이놈, 어이하여 이 사람에게 붙었느냐?"
연화가 준엄하게 묻자, 사내의 입을 빌려 귀신이 으르렁댔지요.
"이놈이 내 무덤을 파헤쳤다! 내 편히 잠든 자리를 짓뭉갰으니, 그 앙갚음을 하러 왔다!"
알고 보니 그 사내가 집터를 넓히려고 오래된 무덤 하나를 함부로 파헤쳤던 것이더랍니다. 그 무덤 임자가 원한을 품고 따라붙은 게지요. 여느 때 같으면 굿을 벌여 넋을 어르고 달래 보냈을 테지만, 이 원귀는 어찌나 독한지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더랍니다.
바로 그때, 연화는 저도 모르게 낯선 힘을 끌어냈지요. 그녀가 허공에 손을 들어 무언가를 그리자, 방 안 가득 눈부신 빛이 확 번졌더랍니다. 그 빛을 본 원귀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지요.
"으아! 이, 이게 무슨 빛이냐! 너는... 너는 예사 무당이 아니로구나!"
원귀는 공포에 질려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났더랍니다. 그 순간 사내도 번쩍 정신을 차렸지요. 정작 가장 놀란 것은 연화 자신이었더랍니다. 제 안에 이런 힘이 숨어 있을 줄은, 그날 처음 알았으니까요. 손끝이 아직도 저릿저릿한데, 어디서 그런 빛이 뿜어져 나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요. 이 일이 있고부터, 연화의 능력은 나날이 강해졌더랍니다. 처음엔 잔챙이 귀신을 쫓는 정도였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사나운 것들과도 겁 없이 맞설 수 있게 되었지요. 허나 그 힘이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연화 자신도 도무지 알 길이 없었더랍니다.
그날 밤, 연화의 꿈속에 그 하얀 소복 할머니가 다시 나타났더랍니다.
"연화야, 이제 네 진짜 힘이 깨어나기 시작하는구나. 허나 몸조심하여라. 네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저승에서도 결코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라."
의미심장한 경고였지만, 그때만 해도 연화는 그 말뜻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했더랍니다.
※ 3: 황 판서 집의 원혼들
연화의 이름이 한양 바닥에 본격적으로 자자해진 것은, 어느 세도가의 집에서 벌어진 괴변 때문이었더랍니다. 그 집 주인은 황 판서라는 벼슬아치였는데, 조정에서도 위세가 대단한 인물이었지요. 그런데 이 황 판서의 집에, 어느 날부터 무서운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 시작했더랍니다.
밤만 되면 집 안에서 괴이한 소리가 들렸지요. 무거운 것이 방바닥을 질질 끄는 소리, 어디선가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 그러다 느닷없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찬바람이 휘몰아쳤더랍니다. 하인들은 무서워서 밤에 눈도 못 붙였지요.
더 심각한 것은, 황 판서네 식구들이 하나둘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것이었더랍니다. 먼저 큰아들이 까닭 모를 열병에 쓰러졌지요. 이어 며느리가 헛것을 보며 밤낮으로 비명을 질러 댔더랍니다. 이름난 의원들이 번갈아 다녀갔지만, 하나같이 병의 근원을 짚어 내지 못했지요.
황 판서는 용하다는 무당을 죄다 불러들여 굿을 시켰더랍니다. 헌데 굿을 하면 할수록 괴변은 도리어 심해졌지요. 멀쩡하던 촛불이 저절로 픽 꺼지고, 상에 올린 제물이 삽시간에 시커멓게 썩어 문드러지고, 굿을 하던 무당이 갑자기 거품을 물고 나자빠지는 일까지 벌어졌더랍니다. 어떤 무당은 굿을 하다 말고 "이 집은 도저히 안 되겠다"며 신발도 못 챙기고 도망쳐 버렸지요. 또 어떤 무당은 사흘을 앓아눕고는 다시는 이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더랍니다. 온 집안이 아주 초상집이 따로 없었지요.
그때 누군가 황 판서에게 넌지시 아뢰었더랍니다.
"대감마님, 남산골에 연화라는 무당이 있사온데, 도가 아주 높다 하옵니다. 다른 무당이 손도 못 대는 일을 척척 풀어낸다지요."
황 판서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연화를 불러들였지요.
연화가 황 판서네 대문을 들어서자, 참으로 묘한 일이 벌어졌더랍니다. 집 안을 뱅뱅 맴돌던 그 서늘한 기운들이, 마치 연화를 피해 숨듯 삽시간에 잦아드는 것이었지요. 함께 온 하인이 "아이고, 갑자기 등골이 안 시리네" 하고 중얼거릴 정도였더랍니다. 연화는 집을 한 바퀴 천천히 둘러보더니, 낯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더랍니다.
"이 댁에 아주 사나운 원혼들이 떼로 모여 있습니다. 헌데 이상하지요. 이토록 많은 원혼이 한자리에 뭉치는 일은 좀처럼 없는 법인데."
그 말에 황 판서는 안절부절못했지요.
"그, 그렇다면 우리 식구들은 대체 어찌 되는 겁니까?"
연화가 원혼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더듬어 보니, 그만 소름 끼치는 진실이 드러났더랍니다. 지난날 황 판서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억울하게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들의 원혼이, 앙갚음을 하러 몰려온 것이었지요. 황 판서는 제 권세를 등에 업고 죄 없는 백성을 옭아 죽이고, 그 재물을 가로챘던 것이더랍니다.
"대감, 바른대로 아뢰시지요. 억울하게 죽인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연화의 서슬 퍼런 물음에 황 판서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지요. 허나 식구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마당에, 거짓을 둘러댈 수는 없었더랍니다.
"그... 그런 일이 몇 번 있긴 있었소. 허나 다 나랏일을 하다 그리된 것이오!"
연화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지요.
"나랏일이라 한들, 억울한 죽음은 억울한 죽음입니다. 저기 목에 칼자국이 선연한 저 사내는, 대감께서 재물을 탐내 없는 죄를 씌워 죽인 이가 아닙니까. 저 피투성이 아낙은, 그 사내의 처였겠지요. 지아비 따라 목을 맨 것이고요. 그 한이 어찌나 깊은지, 여느 굿으로는 도저히 풀 수가 없어요."
연화가 허공을 가리키며 하나하나 짚어 내자, 황 판서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더랍니다. 남들 눈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그 자리를, 연화는 마치 대낮처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으니까요.
황 판서는 그만 털썩 주저앉았더랍니다. 그렇다면 온 식구가 이대로 원혼에게 끌려가 죽는단 말입니까. 사시나무 떨듯 떠는 황 판서를 물끄러미 보던 연화가, 이윽고 뜻밖의 말을 꺼냈지요.
"제가 직접 그 원혼들과 담판을 지어 보겠습니다. 허나 미리 말씀드리지요. 이 일은 저에게도 몹시 위험한 일입니다. 그들의 한이 워낙 깊어, 자칫하면 저마저 그 원한에 휩쓸릴 수 있으니까요."
"부디, 부디 우리 식구를 살려 주시오. 무당님만 믿겠소이다!"
황 판서가 연화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렸더랍니다. 연화는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헤아리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요.
'이 원혼들의 한을 풀지 못하면, 저 어린 것들까지 애먼 목숨을 잃겠구나. 무엇보다, 저 깊은 한을 저대로 두어서는 원혼들 또한 영영 구천을 떠돌 뿐이야.'
연화는 그 길로 황 판서네 너른 마당에 커다란 제단을 차리기 시작했더랍니다. 헌데 이번엔, 여느 굿과는 격이 다른 무언가가 준비되고 있었지요. 향을 사르고 정화수를 올리는 연화의 손끝에는, 어느새 은은한 빛이 감돌고 있었더랍니다. 과연 연화는, 그 사무친 원혼들을 어떻게 달래려는 것이었을까요.
※ 4: 극락의 문을 열다
이윽고 연화가 제단 앞에 곧게 앉아, 나직이 주문을 외기 시작했더랍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졌지요. 시퍼렇게 맑던 대낮 하늘이, 먹물을 풀어놓은 듯 삽시간에 캄캄해지는 것이었더랍니다. 대낮인데도 꼭 한밤중처럼 어두워졌지요. 마당을 둘러선 하인들이 겁에 질려 웅성거렸더랍니다.
그러자 마당 여기저기서, 시커먼 형체들이 하나둘 스멀스멀 솟아오르기 시작했지요. 목에 시퍼런 칼자국이 남은 사내, 온몸이 갈가리 찢긴 이, 피투성이가 된 아낙까지. 하나같이 원한이 사무친 눈으로 황 판서를 노려보고 있었더랍니다. 황 판서는 그만 오줌을 지릴 듯 벌벌 떨었지요.
"황 판서, 이놈! 네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억울하게 죽었는지, 네가 알기나 하느냐!"
원혼들이 일제히 아우성치자, 마당의 흙먼지가 회오리처럼 솟구쳤더랍니다. 헌데 연화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그 원혼들을 향해 차분히 입을 열었지요.
"여러분의 한, 제가 압니다. 그 억울함, 하늘인들 어찌 모르겠습니까. 허나 한 가지만 여쭙지요. 여러분이 지금 이 자를 죽여 그 한을 갚는다면, 여러분의 넋은 그 뒤에 편안해지겠습니까?"
원혼들은 잠시 멈칫했지요. 허나 이내 더욱 사납게 울부짖었더랍니다.
"닥쳐라! 복수 말고 우리의 한을 무엇으로 푼단 말이냐! 우리는 이놈의 피를 봐야만 눈을 감을 수 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원한은 또 다른 원한을 부를 뿐입니다. 그리 피를 본들, 여러분은 그예 구천을 떠도는 신세를 벗지 못해요. 제 말을 믿어 보시지요."
그 순간, 연화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더랍니다. 그러고는 두 손을 높이 들어, 캄캄한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정성껏 그렸지요. 그러자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더랍니다. 허공에 눈부신 황금빛 문 하나가 스르르 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문 너머로, 이 세상 것이 아닌 따스하고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더랍니다. 원혼들은 그 빛을 보고 흠칫 놀랐지요.
"저, 저것은... 설마 극락으로 가는 문이 아니냐?"
원혼 하나가 넋을 잃고 중얼거렸더랍니다. 연화가 온화한 목소리로 일렀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저 극락으로 인도해 드리겠습니다. 이 진창 같은 원한을 내려놓고, 부디 저 편안한 곳으로 가시지요. 복수가 아니라 해탈, 그것이 여러분이 진정 쉴 수 있는 길입니다."
원혼들은 크게 갈등했더랍니다. 이 자를 죽여 사무친 한을 풀 것인가, 아니면 저 빛을 따라 편안히 떠날 것인가. 마당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만 감돌았지요.
연화가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이번엔 어미가 자식을 어르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일렀더랍니다.
"여러분, 그 문 안으로 들어서면 이승의 배고픔도, 억울함도, 사무친 한도 다 봄눈처럼 녹아 없어진답니다. 그동안 얼마나 춥고 외로우셨습니까. 이제 그만, 따뜻한 곳으로 가서 편히 쉬시지요."
그 말에, 원혼들의 눈에서 붉은 핏발이 조금씩 스러지기 시작했더랍니다. 그러다 목에 칼자국이 있던 사내가, 스르르 원한을 내려놓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더랍니다.
"그래... 이깟 놈 하나 죽인다고, 우리 죽은 목숨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지. 이제는... 이제는 그만 쉬고 싶구나."
그 말을 시작으로, 원혼들이 하나둘 황금빛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더랍니다. 신기하게도, 그 문에 다가설수록 그들의 사납던 얼굴이 어린아이처럼 평온하게 풀어졌지요. 마지막 원혼이 문턱을 넘으며, 연화를 돌아보고 고개를 숙였더랍니다.
"무당님,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제야, 이 지긋지긋한 한을 내려놓고 편히 눈을 감겠네요."
원혼들이 모두 빛 속으로 사라지자, 황금빛 문은 스르르 닫히고, 먹빛이던 하늘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파랗게 개었더랍니다. 그 자리에 폭삭 주저앉은 황 판서는, 그제야 제 지난 죄가 사무치게 두려워, 뜨거운 눈물을 쏟았지요.
"내가... 내가 죽을죄를 지었소. 저 사람들에게, 그리고 무당님에게..."
연화는 조용히 그를 내려다보며 일렀더랍니다.
"살아 지은 죄는, 살아서 갚으셔야지요. 저들의 남은 식솔을 찾아 재물을 돌려주고, 두 번 다시 그런 죄를 짓지 마십시오. 그것만이 대감이 사는 길입니다."
황 판서는 그날로 개과천선하여,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유족을 수소문해 재물을 돌려주고 죄를 빌었더랍니다. 병으로 앓던 식구들도 씻은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요.
이 일이 있고부터, 연화의 이름은 한양 장안에 파다하게 퍼졌더랍니다. 극락으로 가는 문을 여는 무당이라니, 세상에 이런 무당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허나 정작 연화 자신은, 마음 한구석이 무겁기만 했더랍니다. 제 힘이 강해질수록, 그 하얀 소복 할머니의 경고가 자꾸만 떠올랐으니까요. 그리고 바로 그 무렵, 저 아득한 저승에서도 마침내 연화를 향해 스산한 눈길이 움직이기 시작했더랍니다. 과연 연화에게, 무슨 일이 닥치려는 것이었을까요.
※ 5: 염라대왕의 소환
연화의 능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마침내 저승이 움직이기 시작했더랍니다. 어느 깊은 밤, 연화의 집 사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지요. 문을 열어 보니, 검은 도포에 갓을 눌러쓴 낯선 사내가 서 있었더랍니다. 낯빛이 백지장처럼 창백한 것이, 한눈에도 이승 사람이 아니었지요. 바로 저승사자였더랍니다.
"연화, 네가 하는 일이 도를 넘었다. 염라대왕께서 너를 부르신다."
헌데 연화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더랍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나더러 순순히 따라오라, 이 말이냐?"
저승사자는 도리어 당황했지요. 여느 사람 같으면 사색이 되어 애걸복걸할 텐데, 이 여인은 너무나 태연했으니까요.
"네가 인간계에서 벌인 일들이 저승의 법도를 어지럽히고 있다. 죽어야 할 자를 살리고, 저승으로 와야 할 넋을 제멋대로 극락으로 보내다니! 이는 천리를 거스르는 큰 죄다."
연화가 차분히 되물었더랍니다.
"천리라... 과연 죄 없는 이가 억울하게 죽는 것이 천리이더냐? 원한에 사무쳐 구천을 떠도는 것이 천리이더냐? 나는 그저, 고통받는 넋들을 가엾이 여겨 도왔을 뿐이다."
저승사자는 그만 말문이 막혔지요. 연화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으니까요. 허나 명은 명이었더랍니다.
"어쨌든 염라대왕의 명이다. 순순히 오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끌고 가겠다!"
저승사자가 으름장을 놓자, 연화가 조용히 웃었지요.
"강제로? 어디 한번 해 보아라."
그 순간, 연화의 두 눈에서 황금빛이 번쩍 뻗어 나왔더랍니다. 저승사자는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을 쳤지요. 연화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 기운이, 도무지 인간의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마치 신령한 존재 앞에 선 듯한 오싹함이었더랍니다.
"너... 너는 대체 무엇이냐?"
저승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요. 연화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일렀더랍니다.
"그것은 염라대왕에게 직접 물어보아라. 내 발로, 내 뜻으로 저승에 가 주마."
저승사자는 어쩔 수 없이 연화를 저승길로 안내했더랍니다. 저승길은 어둡고 음침하기 그지없었지요. 헌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졌더랍니다. 연화가 지나는 곳마다, 사방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이었지요. 길가에서 신음하며 고통받던 넋들이, 그 빛을 쐬자 거짓말처럼 얼굴이 평온해졌더랍니다. 어떤 넋은 연화를 향해 두 손 모아 절을 올리기도 했지요. 저승사자는 이런 광경을 난생처음 보았더랍니다. 살아 있는 인간이 저승에서 이런 일을 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요.
'대체 이 여인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저승의 넋들이 도리어 이 여인을 우러르다니.'
가는 길에, 한 어린 넋이 길가에 웅크려 서럽게 울고 있었더랍니다. 연화는 걸음을 멈추고 그 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 주었지요.
"울지 마라, 아가. 무섭지 않은 곳으로 가는 길이란다."
그 말 한마디에 아이의 울음이 뚝 그치고, 얼굴에 화안한 웃음이 피어올랐더랍니다. 저승사자는 그 광경을 보며 등골이 서늘해졌지요.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는 죄인이, 도리어 저승의 넋들을 어루만지고 있었으니까요.
이윽고 두 사람은 염라대왕의 법정에 다다랐더랍니다. 어마어마하게 너른 법정 한복판에, 진홍빛 곤룡포에 면류관을 갖춘 염라대왕이 위엄 있게 앉아 있었지요. 그 둘레로는 수많은 판관과 저승사자들이 겹겹이 늘어서 있었더랍니다. 모든 눈길이 일제히 연화에게로 쏠렸지요.
염라대왕이 천둥 같은 목소리로 호령했더랍니다.
"연화! 네가 저지른 짓을 알고 있느냐? 죽을 운명인 자를 되살리고, 지옥에 가야 할 넋을 극락으로 빼돌리다니! 이는 천지의 질서를 어지럽힌 크나큰 죄다!"
허나 연화는 무릎을 꿇지 않았지요. 도리어 등을 곧게 펴고 당당히 서서, 또렷한 목소리로 되물었더랍니다.
"염라대왕님, 여쭙겠습니다. 질서가 중한 것입니까, 자비가 중한 것입니까? 억울한 죽음과 끝없는 원한이, 과연 올바른 질서란 말입니까?"
그 말에 법정이 크게 술렁였더랍니다. 감히 저승의 임금에게 대드는 인간이 있다니, 천지가 개벽할 노릇이었지요. 판관들이 저마다 수군거리고, 저승사자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더랍니다. 헌데 연화는 물러서기는커녕, 한 걸음 더 나아가 또박또박 아뢰었지요.
"제가 되살린 아이는, 명부가 잘못 적혀 억울하게 끌려온 목숨이었습니다. 제가 극락으로 보낸 넋들은, 산 자의 손에 억울하게 죽어 구천을 떠돌던 이들이었고요. 저는 하늘의 법도를 어긴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릇된 법도를 바로잡은 것입니다."
염라대왕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더랍니다.
"이런 발칙한 것을 보았나! 네가 아무리 신통한 재주가 있다 한들, 결국 한낱 인간일 뿐이다. 지옥의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염라대왕이 벌을 내리려 손을 번쩍 치켜든 바로 그 순간,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더랍니다. 연화의 온몸에서, 눈부시게 찬란한 빛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온 것이었지요. 그 빛은 온 법정을 대낮처럼 환히 밝혔는데, 마치 하늘에서 내린 천상의 빛과도 같았더랍니다. 그 서슬 퍼렇던 염라대왕마저, 그 빛에 눈이 부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요.
"이, 이게 대체... 무슨 빛이란 말이냐!"
과연 연화의 몸에서 뻗어 나온 이 신령한 빛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요.
※ 6: 진짜 정체의 비밀
바로 그때, 온 법정을 뒤덮은 그 빛 속에서, 장엄하고도 자애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더랍니다.
"염라야, 그만 두어라."
그 한마디에, 법정의 모든 존재가 일제히 무릎을 꿇었지요. 그토록 위엄이 넘치던 염라대왕조차, 예외가 아니었더랍니다. 염라대왕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었지요.
"부, 부처님!"
허공에 거대한 연꽃 한 송이가 스르르 피어오르더니, 그 위에 부처님이 자애로운 모습으로 나투셨더랍니다. 그 자비로운 얼굴에, 온 법정이 숙연해졌지요. 부처님이 나직이 말씀하셨더랍니다.
"연화는 내가 인간 세상에 보낸 보살이니라.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라, 내가 친히 내려보낸 것이지."
법정의 모든 존재가 벼락을 맞은 듯 얼어붙었더랍니다. 저 수수한 무당이, 실은 부처님이 보내신 보살이었다니요. 조금 전까지 연화를 죄인 취급하며 눈을 부라리던 판관들은, 그만 낯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지 못했지요. 서슬 퍼렇게 호령하던 염라대왕은 더더욱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맸더랍니다.
"부, 부처님. 허나 저승의 질서가 있는데... 소신은 그저 그 질서를 지키려 했을 뿐이옵니다."
부처님이 온화하게 타이르셨더랍니다.
"질서도 소중하나, 자비가 더 큰 것이니라. 억울한 죽음과 끝없는 원한보다는, 용서와 해탈이 더 귀한 가치가 아니겠느냐. 연화가 해 온 일은, 바로 그 자비를 몸소 행한 것이니라."
부처님이 연화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씀하셨지요.
"연화야, 이제 네가 잊고 있던 더 큰 진실을 알 때가 되었구나."
부처님이 가만히 손을 들어 연화의 이마에 대자, 그 자리에서 은은한 빛이 피어올랐더랍니다. 그 순간, 연화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기억들이 물밀듯 되살아나기 시작했지요.
연화는 본디, 관세음보살을 모시던 제자 중 하나였더랍니다. 천상에서 수많은 중생이 고통받는 모습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어느 날 부처님께 간절히 여쭈었지요.
"부처님, 제가 인간 세상에 직접 내려가, 고통받는 중생들을 손수 돕고 싶습니다."
부처님은 그 갸륵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어여삐 보시고, 청을 허락하셨던 것이더랍니다.
"그리하여 네가 인간으로 태어나며 지난 기억은 모두 잊었으나, 그 어진 마음만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구나."
부처님의 말씀에, 연화는 그만 뜨거운 눈물을 흘렸더랍니다. 이제야 알 것 같았지요. 어이하여 자신에게 이런 힘이 있었는지, 어이하여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었는지, 그 오랜 수수께끼가 마침내 풀린 것이었더랍니다.
'그랬구나. 내가 남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것도, 죽어 가는 이를 보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던 것도... 다 이 마음이 본디 보살의 마음이었기 때문이었구나.'
부처님이 말씀을 이으셨지요.
"네가 어려서부터 보았던 그 하얀 소복의 할머니가, 바로 관세음보살이시니라. 그분이 네가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늘 곁에서 인도해 주신 것이지."
연화는 그제야 모든 것이 환히 이해되었더랍니다. 열 살 적 마당에서 만난 그 할머니도, 꿈마다 나타나 경고해 주던 그 목소리도, 다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하나하나가 다 하늘의 안배였던 겁니다.
염라대왕이 조심스레 부처님께 여쭈었더랍니다.
"부처님, 그렇다면 앞으로 연화가 하는 일에, 저희 저승은 손을 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이 지그시 고개를 끄덕이셨지요.
"그렇다. 허나 아주 제멋대로 하라는 것은 아니니라. 연화와 서로 힘을 모아, 더 나은 길을 함께 찾아보아라. 산 자의 세상과 죽은 자의 세상이, 서로 미워하지 않고 자비로 이어지도록 말이다."
그러고는 연화에게 새로운 사명을 내리셨더랍니다.
"연화야, 이제 네 진짜 힘을 깨달았으니, 더 큰 일을 해야 하느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돕는 것을 넘어, 이승과 저승 사이의 다리가 되어라. 억울한 죽음을 줄이고, 원한의 고리를 끊는 일을 하여라."
연화가 깊이 절을 올리며 아뢰었지요.
"부처님, 제가 그 큰일을 감당할 수 있을는지요. 아직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은데..."
부처님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시며 대답하셨더랍니다.
"네 마음속에 있는 그 자비심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이니라. 그 마음만 잃지 않는다면, 못 할 일이 무엇이겠느냐."
염라대왕도 그제야 연화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지요.
"연화, 내가 그대를 몰라뵈었소. 앞으로는 그대가 하는 일에 저승도 힘을 보태리다. 저승의 법도와 인간 세상의 자비가 어우러지도록, 함께 애써 봅시다."
연화는 그만 가슴이 벅차올랐더랍니다. 이제 더는 홀로가 아니었으니까요. 그 오랜 세월, 제 힘의 뿌리도 모른 채 외로이 싸워 왔는데, 이제는 부처님도 염라대왕도 든든한 편이 되어 준 것이었지요. 부처님과 염라대왕의 축복을 받으며, 연화는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더랍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당부를 가슴 깊이 새기면서요.
"허나 명심하여라. 네 힘이 강해질수록, 그것을 시기하는 것들도 나타날 것이다. 늘 겸손하고, 자비심을 잊지 마라. 그것만이 네가 타락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니라."
※ 7: 자비가 남긴 것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연화의 삶은, 그날로 완전히 달라졌더랍니다. 제 진짜 정체를 알게 된 연화는, 이전보다 훨씬 지혜롭고 든든하게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지요. 무엇보다, 염라대왕과 손을 잡은 덕에 억울한 죽음을 미리 막을 수 있게 되었더랍니다. 명부가 잘못 적혀 애먼 목숨이 끌려갈 성싶으면, 저승사자가 도리어 연화에게 미리 귀띔해 주었으니까요.
어느 날, 연화에게 참으로 귀한 손님이 찾아왔더랍니다. 바로 그 하얀 소복의 할머니, 관세음보살이었지요. 연화의 스승이신 분이 몸소 나투신 것이었더랍니다.
"연화야, 그동안 참으로 애썼구나. 네가 해낸 일들을 보니, 이 스승이 다 흐뭇하구나."
관세음보살이 연화에게 뜻밖의 말씀을 건네셨더랍니다.
"이제 네게 한 가지를 택하게 해 주마. 천상으로 돌아와 본디 네 보살 자리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이대로 인간으로 남아 중생을 계속 도울 것이냐. 어느 쪽이든, 네 뜻대로 하여라."
연화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지요. 천상으로 돌아가면 더 큰 힘으로 더 많은 중생을 도울 수 있을 터. 허나 인간으로 사는 것도, 그 나름의 값진 뜻이 있었더랍니다. 사람들 곁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그 아픔을 더 가까이서 어루만질 수 있었으니까요. 문득, 자신을 붙들고 매달리던 이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더랍니다. 저승사자에게서 되찾아 준 그 대갓집 아들, 개과천선한 황 판서, 극락으로 곱게 떠나보낸 원혼들까지요.
"스승님, 저는 조금 더 이 인간 세상에 머물고 싶습니다. 아직 도와야 할 사람이 너무나 많고, 무엇보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배우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관세음보살은 그 갸륵한 뜻을 기뻐하셨더랍니다.
"참으로 어여쁜 선택이로구나. 그리하여라. 네 어진 마음이, 그 자리에서 더 많은 이를 살릴 것이니라."
그 뒤로 연화는, 참으로 많은 일을 해냈더랍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돕는 것을 넘어, 세상의 굽은 것들을 바로잡기 시작했지요. 백성을 등쳐 먹는 탐관오리의 죄를 낱낱이 밝혀내고, 억울하게 옥에 갇힌 이들의 누명을 벗겨 주고, 무서운 돌림병이 번지는 것을 미리 막아 수많은 목숨을 구했더랍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지요. 한 고을에 원인 모를 돌림병이 돌아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자, 연화가 한걸음에 달려갔더랍니다. 그러고는 병의 근원이 마을 우물에 있음을 단박에 짚어 내, 우물을 막고 새 물길을 트게 했지요. 덕분에 온 고을이 목숨을 건졌더랍니다. 사람들은 연화를 살아 있는 관음보살이라 부르며 우러렀지요.
또한 연화는, 다른 무당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지요. 참된 무당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사람을 돕는 것인지를 하나하나 일깨워 주었더랍니다.
"우리가 모시는 것은 재물도 권세도 아니다. 오직 딱한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 그것 하나뿐이니라."
연화의 이 가르침에, 한양의 무당들이 점점 어질고 반듯해졌더랍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연화가 이승과 저승 사이에 새로운 길을 놓았다는 것이었지요. 억울하게 죽을 뻔한 이를 미리 구하고, 한을 품은 넋을 평온히 인도하는 그 체계를, 염라대왕도 기꺼이 함께 도왔더랍니다. 이승과 저승이 서로 미워하던 시절은 가고, 자비로 손을 맞잡는 세상이 열린 것이었지요.
세월이 흘러, 연화의 이름은 조선 팔도에 두루 퍼졌더랍니다. 임금까지도 연화를 궁으로 불러 나랏일의 자문을 구할 정도였지요. 허나 연화는 그 위세에 조금도 우쭐하지 않고, 오직 힘없는 백성을 위한 일에만 그 힘을 썼더랍니다. 부처님이 당부하신 '겸손'을, 한시도 잊지 않았던 것이지요.
나이가 들자, 연화는 정성껏 제자들을 길러 냈더랍니다. 자신이 천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이 어진 일이 대대로 이어지도록, 마음이 곧고 자비로운 이들을 골라 하나하나 가르쳤지요.
그리고 마침내, 연화가 이승을 떠나는 날이 찾아왔더랍니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되었으나, 그 얼굴은 소녀처럼 맑고 평온했지요. 관세음보살이 다시 나투시어, 가만히 손을 내미셨더랍니다.
"연화야, 이제 그만 돌아갈 때가 되었구나. 참으로 장한 일을 해냈다."
연화는 정든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조용히 눈을 감았더랍니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씻은 듯 맑은 빛이 피어오르더니, 그 빛과 함께 연화의 넋이 천상으로 두둥실 떠올랐지요. 그 거룩한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더랍니다.
연화가 남긴 가르침은, 오래도록 이 땅에 전해 내려왔지요. 참된 힘이란 권세나 재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딱한 이를 가엾이 여기는 그 마음, 곧 자비심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승의 임금마저 두려워했다는 그 신비한 힘의 근원이, 실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마음이었다니. 참으로 곱고도 뭉클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네 마음속에도 저마다 그런 작은 등불 하나쯤은 있는 법이지요. 오늘 이야기, 여기서 곱게 맺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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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사자도, 염라대왕도 두려워한 무당 연화의 진짜 정체, 어떠셨는지요. 부처님이 보낸 보살이었다는 반전에 가슴이 뭉클하셨을 겁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일러 주는 것은 하나지요.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은 창칼도 권세도 아닌, 남을 가엾이 여기는 자비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하루, 곁의 누군가에게 작은 온정 한 자락 베풀어 보면 어떨까요. 재미있게 보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리며, 다음 이야기에서 또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