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눈을 가진 무녀의 탄생
저승눈을 가진 무녀의 탄생 / 무녀에게 차사가 청혼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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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을 볼 땐 여느 눈이었지만, 죽은 자가 곁을 지나면 왼쪽 눈동자가 붉게 물드는 무녀 월이. 사람들은 그 눈을 저승눈이라 불렀지요. 열다섯부터 굿판에 서서 죽은 이의 말을 산 자에게 전해온 외로운 무녀에게, 어느 늦가을 밤. 검은 갓을 쓴 창백한 사내가 찾아옵니다. 저승의 관리, 저승차사였지요. 헌데 그가 건넨 첫마디가 참으로 기막힙니다. 나는 너를 데리러 온 것이 아니다. 청혼하러 왔다. 삼백 년을 산 저승차사가, 산 사람에게 청혼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사연일까요?
본 이야기는 전통 저승 설화를 바탕으로 새롭게 각색한 창작 드라마입니다.
※ 1: 저승눈을 가진 아이
옛날 옛적, 깊은 두메산골 어느 마을에 월이라는 아이가 살았더랍니다.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업둥이였지요. 갓난쟁이 적에 마을 어귀 성황당 앞에 덩그러니 버려진 것을, 늙은 무당 신어미가 거두어 길렀더랍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겨울밤, 강보에 싸인 아이가 파랗게 얼어가며 앙앙 울고 있는 것을, 새벽 정화수 뜨러 나온 신어미가 발견했다지요. 신어미는 그 아이를 냉큼 품에 안고 방으로 들어와, 제 체온으로 밤새 녹였더랍니다. 그렇게 목숨을 건진 아이가 바로 월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어릴 적부터 좀 남달랐어요. 뭐가 남달랐느냐. 바로 눈이었습니다. 산 사람을 볼 때는 여느 아이와 똑같은, 까맣고 맑은 눈이었지요. 헌데 죽은 자가 곁을 스쳐 지나가면, 왼쪽 눈동자가 스르르 붉게 물들었더랍니다. 새벽 노을처럼, 아니, 갓 흘린 핏방울처럼 새빨갛게요. 마을 사람들은 그 눈을 두고 '저승눈'이라 불렀습니다.
처음엔 신어미도 몰랐지요. 월이가 세 살 무렵이었을 겁니다. 마당에서 소꿉놀이하던 아이가 갑자기 허공을 가리키며 그러더래요. "할미, 저기 아저씨가 울어. 다리가 아프대." 헌데 마당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단 말이지요. 신어미가 소름이 쫙 끼쳐 아이 눈을 들여다보니, 왼쪽 눈이 발갛게 타오르고 있더랍니다. 그날 밤, 아랫마을에서 사람이 하나 죽었다는 부고가 왔지요. 산에서 나무하다 벼랑에서 굴러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채 죽은 사내였답니다. 그제야 신어미는 알았어요. 이 아이가 죽은 자를 본다는 것을요. 그것도 그 죽은 자가 어찌 죽었는지까지 훤히 안다는 것을요.
무섭죠. 소름 끼치죠. 헌데 신어미는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이를 꼭 끌어안고 이렇게 말했더랍니다. "불쌍한 것. 네가 짊어질 짐이 무겁겠구나. 허나 걱정 마라. 이 할미가 있는 한, 넌 혼자가 아니여." 참 따뜻한 할미였지요.
그렇게 월이는 자랐습니다. 열 살이 되고, 열두 살이 되고. 저승눈은 점점 또렷해졌지요. 길을 걷다가도 문득 왼쪽 눈이 화끈, 달아오르면 근처에 죽은 자의 혼이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혼일수록 그 붉은빛이 짙었고, 곱게 눈감은 혼일수록 옅었더랍니다. 월이는 그 빛의 짙고 옅음만 보고도 죽은 자의 사연을 어렴풋이 읽어낼 수 있었지요. 신어미는 그런 월이에게 굿하는 법, 비손하는 법, 죽은 자를 달래어 보내는 법을 하나하나 가르쳤답니다.
열다섯이 되던 해, 신어미가 자리보전을 하고 눕더니 시름시름 앓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새벽, 조용히 눈을 감았지요.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신어미는 월이의 손을 꼭 쥐고 그랬더랍니다. "월아. 네 눈은 저주가 아니여. 죽은 자들이 못다 한 말을, 산 자에게 전하라고 하늘이 주신 것이여. 그 말을 전해주면, 저승 가는 이도 편하고, 남은 이도 편하고. 그게 네가 할 일이여. 잊지 마라. 그리고… 언젠가 네게도 봄이 올 게다. 꼭 올 게야."
그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신어미는 떠났습니다. 헌데 참 신기하지요. 신어미가 숨을 거두는 순간, 월이의 왼쪽 눈은 붉게 물들지 않았더랍니다. 아주 옅은 노을빛만 살짝 스쳤을 뿐. 곱게, 아무 원한 없이 떠났다는 뜻이었지요. 월이는 그 옅은 빛을 보며 오히려 마음을 놓았답니다. '할미는 편히 가셨구나. 다행이야, 참말로 다행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월이는 홀로 남았습니다.
그날부터 월이는 마을의 무녀가 되었습니다. 신어미의 뒤를 이어 굿판에 섰지요. 헌데 월이의 굿은 여느 무당과 달랐습니다. 다른 무당들은 신이 내렸다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늘어놓았지만, 월이는 정말로 죽은 자의 말을 들었으니까요. 왼쪽 눈이 붉어지면 곁에 온 혼을 보았고, 그 혼이 하고픈 말을 그대로 산 자에게 전했더랍니다.
먼저 간 남편이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말. 병들어 죽은 어미가 어린 자식에게 못다 한 당부. 억울하게 맞아 죽은 머슴이 밝히고 싶던 진실. 월이는 그 모든 말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남은 이들은 목놓아 울다가도, 이내 마음을 풀고 죽은 이를 곱게 보내주었지요. 원한 맺힌 혼도 제 말을 다 쏟아내고 나면, 붉던 눈빛이 스르르 옅어지며 저승으로 훨훨 떠나갔더랍니다. 참 신통하고도 고마운 무녀였지요.
마을 사람들은 월이를 고마워했습니다. 허나 동시에, 무서워했지요. 아무래도 죽은 자를 두 눈으로 보는 아이니까요. 아이들은 월이 곁에 오길 꺼렸고, 처녀 총각들도 슬금슬금 피했습니다. 혼담 하나 들어오지 않았어요. 스무 살이 다 되도록 월이는 늘 혼자였답니다. 명절에도, 잔칫날에도, 월이의 신당엔 죽은 자들만 드나들 뿐이었지요.
굿판이 끝나고 텅 빈 신당에 홀로 앉아 있노라면, 월이는 문득 서러워지곤 했지요. '나는 죽은 이들의 말은 이리도 잘 전해주는데. 정작 내 마음을 들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구나.' 왼쪽 눈에 죽은 자만 담기고, 산 자의 온기는 담기지 않는 삶. 참 외로운 삶이었습니다.
그래도 월이는 제 일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저 때문에 산 자와 죽은 자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응어리진 한을 풀고, 서로를 놓아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제 삶에 뜻이 있다 여겼지요. 다만, 굿이 끝나고 사람들이 다 돌아간 뒤. 홀로 남아 찬 밥을 물에 말아 먹을 때면. 그럴 때면 어김없이 가슴 한켠이 텅 비어 시렸더랍니다.
그 외로움이 얼마나 깊었는지, 월이 자신도 다 헤아리지 못했어요. 그저 신어미의 유언대로, 하루하루 죽은 자의 말을 전하며 살아갈 뿐이었지요. 언젠가 봄이 온다던 할미의 말은, 이제 가물가물 잊혀가고 있었습니다. '나 같은 무녀에게 무슨 봄이 오겠어. 할미도 그저 위로하려 하신 말씀이겠지.' 월이는 그렇게 스스로 마음을 접었더랍니다.
그런 월이에게, 어느 늦가을 밤. 여느 때와 사뭇 다른 손님이 찾아오게 됩니다. 굿판도 아니고, 신당도 아닌. 바로 월이가 홀로 잠든 자기 방에 말이지요.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답니까. 신어미가 말한 그 '봄'이, 참으로 뜻밖의 모습으로 월이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 2: 한밤의 손님
그날 밤은 유난히 바람이 스산했더랍니다.
늦가을 찬 바람이 문풍지를 울리고, 마당의 감나무 가지가 서걱서걱 흔들리던 밤. 월이는 낮에 치른 굿에 지쳐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지요. 그날 굿은 유난히 힘들었거든요. 물에 빠져 죽은 처녀의 혼을 달래는 굿이었는데, 그 원한이 어찌나 깊던지 월이의 왼쪽 눈이 하루 종일 새빨갛게 타올랐더랍니다. 겨우겨우 혼을 달래 보내고 나니,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지요.
얼마나 잤을까요. 문득, 왼쪽 눈이 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에 월이는 눈을 번쩍 떴습니다. '뭐지? 이 시간에?' 굿을 마친 밤엔 죽은 자가 잘 찾아오지 않는 법인데, 이 야심한 밤에 저승눈이 달아오르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지요. 방 안이 이상하게 서늘했어요. 한여름도 아닌데, 입김이 하얗게 서릴 만큼요. 그리고 문가에, 누군가 우두커니 서 있었더랍니다. 월이는 소스라치게 놀랐지요. 허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죽은 자를 하도 많이 봐온 터라, 웬만한 혼에는 이제 놀라지도 않았거든요. '또 누가 못다 한 말이 있어 찾아왔구나' 싶었지요.
헌데 이 손님은 어딘가 달랐습니다. 여느 혼들은 붉은빛이 흐릿하고 형체도 어렴풋한 것이, 안개처럼 스러질 듯했는데. 이 사내는 달빛 아래 또렷하게, 산 사람처럼 서 있었어요. 검은 갓을 반듯하게 눌러쓰고, 검은 도포를 걸친 훤칠한 사내.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한데, 입가엔 은은한 웃음을 띠고 있었더랍니다. 그 웃음이 어찌나 서늘하고도 고요하던지요. 월이는 저도 모르게 이불깃을 꼭 그러쥐었습니다.
월이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앉았습니다. 그러곤 여느 때처럼 조용히 물었지요. "누구시오. 무슨 말을 전하고 싶어 오셨소. 말씀하시면 산 이에게 전해드리리다. 원한이 있거든 풀어드리고, 못다 한 말이 있거든 이어드리리다."
사내는 대답 대신 방 안으로 스르르 들어섰습니다. 발소리 하나 없이요. 옷자락 스치는 소리조차 없었지요. 그러곤 월이의 앞에 마주 앉더니, 그 창백한 얼굴로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더랍니다. "네가 월이로구나. 저승눈을 가진 무녀." 목소리가 깊은 우물 밑에서 울려 나오는 듯 낮고 그윽했습니다.
월이는 흠칫했습니다. 죽은 자가 제 이름을, 그것도 저승눈까지 알고 부르는 일은 처음이었으니까요. 보통 혼들은 제 사연에 빠져 월이가 누군지엔 관심도 없었거든요. 그저 제 말만 쏟아내고 떠날 뿐이었지요. "어찌 내 이름을 아시오?" 월이가 조심스레 되물었습니다.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떨렸지요.
사내의 웃음이 조금 더 깊어졌지요. "네 이름을 아는 것뿐이겠느냐. 나는 너를 아주 오래전부터 지켜보아 왔다." 그 말에 월이의 등줄기로 서늘한 것이 훑고 지나갔습니다. 오래전부터 지켜봤다니. 대체 이 사내는 누구란 말인가요.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요.
월이는 사내의 왼쪽 눈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이상했어요. 여느 혼이라면 사연에 따라 붉은빛의 짙고 옅음이 있는데, 이 사내는 그런 게 없었습니다. 그저 깊고 검은, 밤보다 짙은 어둠만이 눈 속에 고요히 고여 있었지요. '이자는… 죽은 사람이 아니야. 헌데 산 사람도 아니야. 대체 뭐지? 이런 혼은 스무 해 무녀 노릇에 처음이야.' 월이는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사내가 나직이 입을 열었습니다. "궁금하겠지. 내가 무엇인지." 그러곤 갓을 살짝 고쳐 쓰며 말했더랍니다. "나는 저승의 관리다. 죽은 자의 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자. 사람들은 나를 저승차사라 부르지." 그 말이 방 안에 무겁게 내려앉았습니다.
저승차사. 그 말에 월이는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습니다. 죽은 자의 혼이야 수없이 봐왔지만, 그 혼들을 데려간다는 저승차사를 두 눈으로 마주한 건 처음이었으니까요. 소문으로만 듣던, 검은 도포에 검은 갓을 쓴 저승의 사자가, 지금 제 눈앞에 떡하니 앉아 있는 거였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어요, 진짜.
월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저승차사가 산 사람의 방을 찾아온다는 건 딱 한 가지 뜻이었으니까요. 데리러 왔다는 것. 이제 제 목숨이 다했다는 것. 월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요. "나를… 데리러 오셨소? 내 명이 다한 것이오? 그렇담… 그렇담 잠시만 말미를 주시오. 신당 정리라도 하고 가야 하지 않겠소."
떨리는 손을 꼭 그러쥐며 월이는 생각했습니다. '아직 스무 살인데. 신어미 유언도 다 못 지켰는데. 나 하나 붙들어줄 사람 하나 없이, 이렇게 가는 건가.' 서러움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지요. 헌데 바로 그 순간, 저승차사가 뜻밖의 말을 내뱉었습니다.
"아니다." 사내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어요. "나는 너를 데리러 온 것이 아니다." 월이가 어리둥절해 눈을 껌뻑이자, 사내는 그 창백한 얼굴에 처음으로 사람다운, 어딘가 수줍은 듯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더랍니다. "청혼하러 왔다."
…네? 청혼이요? 저승차사가, 산 사람에게, 청혼을 하러 왔다고요? 월이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눈만 끔뻑끔뻑했지요. "지금… 뭐라 하셨소? 청혼이라 하셨소?" 월이가 되묻자, 무영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 청혼이다. 너를 아내로 맞고 싶다." 그 말이 어찌나 또렷하고 진중하던지, 농으로 넘길 수도 없었지요.
방 안엔 문풍지 우는 소리만 서걱서걱 흐르고, 두 사람 사이엔 알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습니다. 월이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을 느꼈어요. 두려운 것인지, 놀란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이었지요. 이 무슨 황당한 일이랍니까. 저승차사의 청혼이라니. 살면서 이런 일을 겪는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요.
월이의 밤은, 그렇게 세상 어디에도 없던 이상한 밤으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내가 어찌하여 저를 알고, 어찌하여 청혼까지 하게 되었는지. 그 기막힌 사연은, 이제부터 하나하나 밝혀지게 됩니다.
※ 3: 스무 해 전의 밤
"청혼이라니. 지금 나를… 놀리시는 게요?"
월이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습니다. 저승차사가 산 사람에게 청혼을 한다니,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필시 무슨 흉계가 있는 게다, 월이는 그리 생각했지요. 혼을 홀려 저승으로 데려가려는 수작인가 싶기도 하고요. 헌데 사내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습니다. 장난이나 흉계 따위와는 거리가 먼, 오래 벼르고 벼른 자의 눈빛이었어요.
"놀리는 것이 아니다." 사내가 나직이 말했습니다. "내 이름은 무영. 저승차사가 된 지 벌써 삼백 년이 넘었지." 삼백 년이라는 말에 월이는 또 한 번 놀랐습니다. 눈앞의 사내는 기껏해야 서른 안팎으로 보였는데, 그게 삼백 년을 산 존재라니요. 와, 상상이나 되겠어요.
무영은 천천히 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저승차사에게는 명부가 있다. 이승에서 명이 다한 자의 이름이 적힌 장부지. 나는 그 명부를 들고 이승에 내려와, 이름이 적힌 자의 혼을 거두어 저승으로 데려간다. 삼백 년을, 나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 일을 해왔다. 하루도 게을리한 적 없고, 하나의 혼도 놓친 적 없지."
그러곤 무영은 잠시 말을 멈추었습니다. 무언가 아득한 것을 떠올리는 눈빛이었지요. "헌데 딱 한 번. 명부에 이름이 적혀 있었으나, 내가 차마 데려가지 못한 혼이 있었다." 월이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습니다. 어쩐지 그 이야기가 제 일처럼 느껴졌거든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지요.
"스무 해 전이었지." 무영의 목소리가 한결 낮아졌습니다. "겨울, 눈보라가 몰아치던 밤이었다. 마을 어귀 성황당 앞에, 갓난아이 하나가 버려져 있었어. 명부에는 그 아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 '오늘 밤 얼어 죽을 아이'라고." 월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스무 해 전, 눈보라 치던 겨울밤, 성황당 앞에 버려진 갓난아이. 그건 다름 아닌 월이 자신이었으니까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나는 그 아이를 거두러 갔다." 무영이 월이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헌데 아이가… 어찌나 작고 여린지. 눈보라 속에서 파랗게 얼어가면서도, 조그만 손을 꼭 쥐고 살겠다고 앙앙 울어대더구나.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애처롭던지. 삼백 년간 수만의 혼을 거두며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던 내 손이, 그날은 도무지 뻗어지질 않았다."
무영은 그날을 회상하며 쓸쓸히 웃었습니다. "나는… 명부를 어겼다. 아이를 데려가는 대신, 마을 무당의 집 앞으로 그 아이를 살포시 옮겨놓았지. 신어미가 새벽에 정화수 뜨러 나와 아이를 발견하도록 말이다. 저승차사가 명부를 어기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죄다. 저승의 법도를 어긴 것이니까. 허나 나는 그 아이를… 차마 데려갈 수가 없었다."
월이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까닭. 신어미의 따뜻한 품에 안겨 자랄 수 있었던 까닭. 그 모든 것이 눈앞의 이 저승차사 덕분이었다니요. "그럼… 내 이 저승눈은…." 월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본디 저승으로 건너갔어야 할 혼이, 이승에 남으면 그런 흔적이 남는다. 반은 이승에, 반은 저승에 걸친 눈이 생기는 게지. 산 자를 보는 오른눈과, 죽은 자를 보는 왼눈. 네 저승눈은 저주가 아니라, 네가 한 번 저승 문턱까지 갔다 온 증표인 게다." 월이는 제 왼쪽 눈을 가만히 만졌습니다. 평생을 저주라 여겼던 이 눈이, 실은 목숨을 건진 흔적이었다니. 눈물이 자꾸만 흘렀지요.
"나는 그 후로 스무 해 동안, 이승에 내려올 때마다 너를 지켜보았다." 무영의 목소리에 따스한 것이 배어났습니다. "네가 신어미 품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저승눈 때문에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홀로 굿판에 서고, 텅 빈 신당에서 밤마다 서러워 우는 것을. 나는 다 보았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너를 보는 내 마음이, 여느 혼을 볼 때와 사뭇 달라졌음을 알았지."
월이는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세상 누구도 제 외로움을 몰라준다 여겼는데. 저승차사 하나가, 스무 해를 곁에서 그 외로움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니요. "허나…." 월이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당신은 저승의 관리이고, 나는 산 사람이오. 어찌 우리가… 맺어질 수 있단 말이오." 말끝을 흐리는 월이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지요.
"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본디 맺어질 수 없지." 무영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습니다. "허나 나는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너를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을. 네가 외로워 우는 밤마다, 나 또한 함께 울었으니." 그러곤 무영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월이 앞에 조심스레 내려놓았습니다. 낡고 오래된, 검붉은 명부 한 권이었지요.
"이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스무 해 전, 내가 어긴 명부다." 무영의 목소리가 비장하게 가라앉았습니다. "이 명부에는 아직도 네 이름이 적혀 있다. '스무 해 전 얼어 죽었어야 할 아이'라고. 염라대왕께서 이 사실을 아시는 날엔… 나는 죄를 물어 벌을 받고, 너는 뒤늦게라도 저승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것이 저승의 법도다."
월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습니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그 죄로 벌을 받는다니요. 그리고 저 또한 저승으로 끌려간다니요. "그럼… 어찌하여 이제 와 청혼을 하시는 게요? 그리 위험한 일을." 월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무영은 쓸쓸히 웃으며 답했습니다. "언젠가는 발각될 일이다. 그렇다면 그전에 단 하루라도, 너와 부부의 연을 맺고 싶었다. 저승의 벌을 받더라도, 그 하루면 나는 여한이 없겠기에."
그 말에 월이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평생 누구의 사랑도 받아본 적 없던 월이였지요. 헌데 삼백 년을 산 저승차사가, 목숨과도 같은 저승의 법도를 어겨가며, 오직 저 하나를 위해 이 밤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사무쳤으면요. 얼마나 그 마음이 깊었으면요.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방문 밖에서 스산한 바람 소리와 함께, 뼛속까지 시린 서늘한 음성 하나가 들려왔지요. "무영. 네 이놈. 여기 숨어 있었더냐." 무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습니다. 아, 올 것이 기어이 오고야 만 겁니다. 무영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저승의 법도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으려 들이닥친 것이지요.
※ 4: 염라의 그림자
방문이 벌컥 열렸습니다. 찬 바람이 훅 들이치며, 문가에 또 다른 저승차사 하나가 우뚝 섰지요.
무영보다 한결 나이 들어 보이는,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차사였습니다. 검은 도포에 붉은 띠를 두른 것이, 무영보다 높은 상급 차사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지요. 노차사는 방 안을 쓱 훑어보더니, 무영과 월이,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검붉은 명부를 발견하곤 눈살을 잔뜩 찌푸렸습니다.
"무영. 삼백 년을 한결같던 네가, 요 근래 이승에 자꾸 드나드는 것이 수상하여 뒤를 밟았더니." 노차사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요. "기어이 이런 일을 벌이고 있었구나. 산 사람의 방에서, 어긴 명부를 꺼내놓고. 이것이 대체 무슨 짓이냐. 저승의 법도가 네게는 아이들 장난쯤으로 보였더냐."
무영이 월이 앞을 가로막고 섰습니다. "선배님. 이 아이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스무 해 전 명부를 어긴 것도, 오늘 이 아이를 찾아온 것도, 모두 저 혼자 한 일입니다." 무영의 목소리엔 두려움 대신 굳은 각오가 서려 있었지요. 제 한 몸 던져서라도 월이를 지키겠다는, 그런 각오였습니다. 방금까지 청혼을 하던 그 수줍은 사내는 어디로 가고, 이제는 태산처럼 든든한 사내가 월이 앞을 막아섰지요.
노차사가 검붉은 명부를 스윽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곤 낡은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어느 대목에서 손을 멈추더니 눈을 크게 떴지요. "이럴 수가. 스무 해 전, 얼어 죽었어야 할 아이의 이름이… 아직도 명부에 살아 있구나. 저승으로 건너오지 않은 혼이 이승에 스무 해나 머물렀다니. 이건 저승의 법도를 뿌리째 뒤흔드는 큰일이다."
월이는 무영의 등 뒤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제 이름 석 자가, 저승 명부에 스무 해나 빚으로 남아 있었다니요. 그것도 무영이 저를 살리느라 진 빚이었지요. "저기…." 월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제 탓입니다. 제가 살아남는 바람에 이 어른이 죄를 지으신 겁니다. 벌을 주시려거든, 저를 벌하십시오."
노차사는 월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 눈빛에 잠시 안쓰러움이 스쳤지만, 이내 매섭게 굳었지요. "네 마음은 갸륵하다만, 이 일은 나 혼자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명부를 어긴 죄, 산 자와 정을 통한 죄. 이 모두는 오직 염라대왕께서만 심판하실 수 있는 중죄다." 그 말에 무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염라대왕의 심판이라니. 그건 곧 씻을 수 없는 큰 벌을 뜻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선배님. 부디 저 아이만은…." 무영이 무릎을 꿇으려는 순간, 노차사가 손을 들어 막았습니다. "무영. 명부에 이름이 남은 자는,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어중간한 혼이다. 이대로 두면 이승의 법도까지 어지러워진다. 염라대왕께서 친히 이 아이를 부르셨다. 지금 당장, 저승으로 데려가야 한다." 노차사의 말은 추상같았지요. 조금의 에누리도 없었습니다.
월이의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저승으로 소환이라니. 살아 있는 몸으로 저승 문턱을 넘는다는 건, 열에 아홉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스무 해를 죽은 자의 말을 전하며 살아왔지만, 정작 제가 저승으로 끌려가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요. 월이는 저도 모르게 무영의 소매를 꼭 붙들었습니다. "무영님… 저는… 무섭습니다." 처음으로 무영의 이름을 부르며, 월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지요.
무영이 월이의 손을 마주 잡았습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었지만, 그 안엔 뜨거운 무언가가 담겨 있었지요. "두려워 마라. 내가 함께 간다. 저승 문턱까지도, 그 너머까지도. 나는 결코 네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설령 염라대왕 앞에 선다 해도, 내가 너를 지킬 것이야." 그 말에 월이는 조금, 아주 조금 마음이 놓였습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 한마디가 이토록 큰 힘이 될 줄, 월이는 미처 몰랐지요. 평생을 홀로 견뎌온 월이에게, 함께 가주겠다는 그 말은 세상 무엇보다 든든한 약속이었습니다.
노차사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허어, 저승차사가 산 사람의 손을 놓지 않겠다니. 삼백 년 만에 참으로 별일을 다 보는구나." 허나 그 목소리엔 어쩐지 매서움보다 안쓰러움이 더 짙게 배어 있었지요. 노차사 또한 두 사람의 애틋한 정을 모르지 않았던 겁니다.
노차사가 도포 자락을 크게 휘두르자, 방 안에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랐습니다. 그 안개는 삽시간에 온 방을 가득 채우더니, 월이와 무영을 함께 휘감았지요. 마치 살아 있는 짐승처럼, 안개가 두 사람의 발목을 휘감고 어디론가 끌어당겼습니다. 월이는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아득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귓가엔 신어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맴돌았지요. '월아, 언젠가 네게도 봄이 올 게다. 꼭 올 게야.'
'할미. 이게… 할미가 말한 봄인가요? 아니면 이대로 저승길로 끌려가는 건가요?' 월이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제 손을 꼭 잡은 무영의 손길만이,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유일한 등불이었지요. 그 손을 놓치면 영영 어둠 속에 삼켜질 것만 같아, 월이는 있는 힘껏 그 손을 그러쥐었습니다.
검은 안개가 걷혔을 때, 월이가 눈을 떠보니. 그곳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서슬 퍼런 저승 관아의 뜰이었습니다. 사방이 온통 잿빛 안개에 잠겨 있고, 어디선가 낮게 우는 바람 소리가 끊이질 않았지요. 눈앞엔 하늘을 찌를 듯한 붉은 대문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문 앞을 지키는 저승사자들의 눈빛이 어찌나 서슬 퍼렇던지, 월이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지요.
그 문 너머에, 저승을 다스리는 이. 염라대왕이 기다리고 있었더랍니다. 아, 이제 정말 피할 수 없는 심판이 시작되려는 참이었습니다. 무영은 월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그 붉은 대문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지요. 삼백 년을 살아온 저승차사조차도, 그 발걸음이 무겁기 그지없었더랍니다.
※ 5: 저승 문턱의 심판
붉은 대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습니다.
문 안으로 들어서니, 그야말로 서늘한 위엄이 온 사방에 서려 있었지요. 시퍼런 관복을 입은 저승사자들이 양옆으로 줄지어 서 있고, 그 한가운데 높다란 단상 위에. 진홍빛 곤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쓴 이가 앉아 있었습니다. 부리부리한 눈에 긴 수염을 늘어뜨린, 위엄이 하늘을 찌르는 존재. 바로 저승을 다스리는 염라대왕이었지요. 그 눈빛 한 번에 산 자든 죽은 자든 오금이 저리는, 그런 어른이었습니다.
월이는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습니다. 무영이 곁에서 그 손을 꼭 잡아주지 않았다면, 진작 주저앉고 말았을 거예요. 노차사가 앞으로 나아가 검붉은 명부를 두 손으로 바쳤습니다. "대왕마마. 스무 해 전 명부를 어긴 차사 무영과, 저승으로 건너오지 않은 채 이승에 남은 아이 월이를 대령하였나이다." 그 목소리가 관아에 무겁게 울려 퍼졌지요.
염라대왕이 명부를 받아 천천히 넘겨보았습니다. 관아 안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팽팽한 정적이 흘렀지요. 이윽고 염라대왕이 무거운 입을 열었습니다. "무영. 삼백 년을 한 치 어긋남 없던 네가, 어이하여 명부를 어겼느냐. 저승의 법도가 네게는 우스웠더냐." 그 목소리가 천둥처럼 관아를 울렸습니다.
무영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대왕마마. 소인의 죄, 백번 죽어 마땅합니다. 허나 그 갓난아이를 차마 데려갈 수 없었나이다. 눈보라 속에서 조그만 손을 쥐고 살겠다 울던 그 아이를… 소인의 손이 도무지 뻗어지질 않았습니다. 벌을 내리시려거든, 오직 소인에게만 내려주소서. 이 아이에겐 아무 죄가 없나이다."
염라대왕의 시선이 이번엔 월이에게로 향했습니다. "월이라 했느냐. 너는 본디 스무 해 전 저승으로 왔어야 할 혼이다. 명부의 법도로 따지자면, 너는 지금 이 자리에서 저승으로 넘어가야 마땅하다. 헌데 무영이 네 목숨을 억지로 붙들어, 저승의 이치가 스무 해나 어그러졌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월이는 온몸을 떨면서도,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습니다. "대왕마마. 소인은… 소인이 살아온 스무 해가 하늘의 뜻이 아닌, 저 어른의 죄로 얻은 것임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허나 소인은 그 스무 해를, 결코 헛되이 보내지 않았나이다." 떨리던 목소리가 차츰 또렷해졌지요. "소인의 저승눈은 죽은 자를 보았고, 소인은 그들이 못다 한 말을 산 자에게 전하며 살았나이다. 그것이 소인의 업이자, 소인이 살아온 까닭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월이를 지그시 내려다보았습니다. "허어. 저승눈을 가진 무녀라. 과연 네 말이 참인지, 이 자리에서 가려보아야겠구나." 그러곤 저승사자들에게 명하였지요. "지난 스무 해, 이 무녀의 손을 거쳐 저승으로 건너온 혼이 있거든, 모두 이 자리로 불러오너라."
바로 그때였습니다. 관아 뒤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더니, 저승사자 하나가 다급히 아뢰었습니다. "대왕마마! 명을 내리시기도 전에, 저승 곳곳의 혼들이 관아 앞에 구름처럼 모여들었사옵니다. 하나같이, 저 월이라는 무녀를 위해 증언하겠다 하옵니다." 염라대왕의 눈썹이 꿈틀했지요. "무녀를 위해 증언을 해? 어디 데려와 보아라."
붉은 대문이 다시 열리자, 수많은 혼들이 줄지어 들어왔습니다. 먼저 간 남편의 손을 잡고 온 혼, 어린 자식에게 마지막 당부를 전한 어미의 혼, 억울하게 죽어 원한을 풀지 못하던 머슴의 혼까지. 하나같이 월이의 저승눈을 통해 이승에 말을 전하고, 편안히 저승으로 건너온 혼들이었지요. 그들이 입을 모아 아뢰었습니다.
"대왕마마. 저 무녀 덕분에 소인,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편히 눈감았나이다." "저 무녀가 아니었다면, 소인은 원한을 풀지 못해 아직도 구천을 떠돌았을 것이옵니다." "저 무녀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응어리를 풀어, 이승과 저승을 모두 편안케 하였나이다. 부디 굽어살펴 주소서." 혼들의 증언이 관아를 가득 메웠습니다. 어느 혼은 눈물을 흘렸고, 어느 혼은 월이를 향해 넙죽 절을 올리기도 했지요. 하나같이 진심에서 우러난 증언이었습니다.
한 늙은 혼이 앞으로 나서며 아뢰었습니다. "대왕마마. 소인은 억울하게 맞아 죽어 그 한이 하늘을 찔렀사온데, 저 무녀가 소인의 말을 산 자에게 전해준 덕에 마침내 누명을 벗고 편히 저승에 들었나이다. 저 무녀는 산 자의 무녀일 뿐 아니라, 저희 죽은 자들의 은인이기도 하옵니다." 그 말에 관아에 모인 혼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지요.
염라대왕이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았습니다. 부리부리하던 눈빛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듯했지요. 삼백 년, 아니 수천 년을 저승을 다스려온 염라대왕이었지만, 이토록 많은 혼이 한 사람의 산 자를 위해 제 발로 나서는 광경은 처음이었으니까요. "허어…." 염라대왕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새어 나왔습니다.
무영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아뢰었습니다. "대왕마마. 이 아이가 스무 해 이승에 머문 것은, 결코 저승의 이치를 어지럽히기 위함이 아니었나이다. 오히려 떠나지 못한 원혼들을 달래어 저승으로 인도하였으니, 이는 저승의 짐을 덜어준 것이 아니겠나이까. 소인이 어긴 명부가, 뜻밖에도 수많은 혼을 구제하는 씨앗이 되었나이다."
염라대왕이 한참을 침묵하다,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네 말에 일리가 있다. 허나 법도는 법도. 명부를 어긴 죄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 말에 월이와 무영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지요. 잠시나마 피어올랐던 희망이, 다시 스러지는 듯했습니다. 헌데 염라대왕의 다음 말이, 두 사람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바꾸게 됩니다. "하여 나는… 이 일을 저승의 저울에 올려, 죄와 공을 함께 달아보고자 한다. 저승의 저울은 거짓을 모르니, 그 앞에서 죄가 무거운지 공이 무거운지 가려질 것이다." 저승의 저울. 그 한마디에, 관아 안의 모든 이가 숨을 죽였습니다. 월이는 무영의 손을 더욱 꼭 쥐었지요. 이제 두 사람의 운명은, 저 황금 저울에 달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 6: 적덕과 인과응보로 뒤집힌 심판
저승사자들이 거대한 황금 저울을 관아 한가운데로 옮겨왔습니다.
한쪽 접시엔 무영이 어긴 명부가, 다른 한쪽엔 월이가 스무 해 동안 쌓은 공덕이 올려지는 저울이었지요. 이 저울은 저승에서도 가장 공정한 물건이라, 그 어떤 거짓도 통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염라대왕이 손을 들자, 저울이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명부가 올려진 접시가 무겁게 내려앉았지요. 명부를 어긴 죄가 그만큼 무겁다는 뜻이었습니다. 월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요. '아, 이대로 죄가 더 무겁다 판결나면… 무영님도 나도 어찌 되는 걸까.'
헌데 그때였습니다. 관아에 모여든 혼들이 하나둘, 반대편 접시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월이의 저승눈 덕에 한을 풀고 편히 건너온 혼들이었지요. 하나가 오르고, 둘이 오르고, 셋이 오르고. 그 수가 수십, 수백을 넘어서자. 무겁게 내려앉았던 명부의 접시가 스르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공덕의 접시가 점점 더 무겁게 기울었지요. 혼들은 저마다 월이에게 고맙다는 눈인사를 건네며, 기꺼이 그 접시에 제 몸을 실었습니다.
대박이죠. 스무 해 동안 월이가 전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풀어준 원한 하나하나가. 이 순간 이렇게 공덕이 되어 돌아온 겁니다. 저울이 마침내 완전히 기울어, 공덕의 접시가 바닥에 닿았습니다. 죄보다 공이 무겁다는, 저승의 판결이 내려진 순간이었지요. 관아 안에 나직한 탄성이 퍼졌습니다.
염라대왕이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저승의 저울은 거짓을 모른다. 무영이 명부를 어긴 죄는 무거우나, 그 죄가 스무 해에 걸쳐 수백의 혼을 구제하였으니. 죄는 공으로 씻겼도다."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지요. 월이와 무영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그 판결을 숨죽여 들었습니다.
"허나." 염라대왕이 말을 이었습니다. "명부를 어긴 자를 아무 일 없이 돌려보낼 수는 없는 법. 하여 나는 무영에게 벌이자 상인, 특별한 명을 내리고자 한다." 벌이자 상이라니. 대체 무슨 말일까요. 무영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습니다. 염라대왕은 무영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지요.
"무영. 너는 삼백 년을 저승차사로 성실히 일하였고, 이제 한 산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게 되었다. 하여 나는 너의 차사 직을 거두고, 너를 이승으로 돌려보내겠다. 사람의 몸으로, 사람의 수명으로. 남은 한평생을 저 아이 곁에서 사람으로 살거라. 이것이 네게 내리는 벌이자, 상이다." 무영의 눈이 크게 벌어졌습니다.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월이 곁에서 살라니요. 삼백 년을 죽은 자들 사이에서 외로이 떠돌던 무영에게, 이보다 더한 상이 어디 있겠어요. 무영의 창백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발그레한 핏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차사의 검은 도포가 스르르 걷히고, 그 자리에 여느 사내의 무명옷이 나타났지요.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월이 너는." 염라대왕이 이번엔 월이를 바라보았습니다. "본디 스무 해 전 왔어야 할 혼이나, 이승에서 쌓은 공덕이 그 빚을 모두 갚고도 남았다. 하여 네 이름을 명부에서 지우고, 너를 온전한 산 사람으로 되돌리겠노라. 이제 네게는 하늘이 정한 천수가 새로이 주어질 것이다." 염라대왕이 붓을 들어, 명부에서 월이의 이름을 스윽 지웠습니다.
그 순간, 월이의 왼쪽 눈이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평생을 붉게 물들던 저승눈이. 스르르, 여느 사람의 까맣고 맑은 눈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지요. 이제 월이는 죽은 자를 보지 못합니다. 대신, 온전한 산 사람으로. 산 자들 틈에서, 산 자의 온기를 나누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었지요. 월이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이번엔 서러움의 눈물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자,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두 번 다시 저승 문턱을 넘지 말고, 이승에서 백년해로하거라." 염라대왕이 손을 휘젓자, 다시 검은 안개가 두 사람을 부드럽게 감쌌습니다. 이번엔 서늘하지 않았어요. 어쩐지 따뜻하고 포근한 안개였지요. 월이는 무영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이제는 얼음장 같지 않은, 사람의 온기가 도는 따뜻한 손이었습니다.
안개가 걷혔을 때, 두 사람은 다시 월이의 방에 있었습니다. 문풍지 사이로 새벽빛이 희붐하게 스며들고 있었지요. 긴긴 밤이 지나고, 마침내 아침이 밝은 것이었습니다. 무영이 월이를 가만히 바라보며 웃었습니다. 이제는 창백하지 않은, 발그레한 사람의 얼굴로요. "월아. 이제 나는 저승차사가 아니다. 그저 네 곁의 사람, 무영이다. 스무 해를 기다린 나의 청혼을… 이제 받아주겠느냐?"
월이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두 눈 가득 맑은 눈물을 담고서요. "예. 받아들이고말고요. 스무 해를 기다려 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 말에 무영이 월이를 가만히 끌어안았습니다. 이제는 온기가 도는, 따뜻한 사람의 품이었지요.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마주 안고, 밝아오는 새벽을 함께 맞이했더랍니다.
그해 봄, 마을에선 조촐하지만 더없이 정겨운 혼례가 열렸더랍니다. 죽은 자만 보이던 무녀의 눈에, 마침내 산 사람 하나가 온전히 담긴 것이지요. 월이를 늘 어려워하던 마을 사람들도, 이날만큼은 한마음으로 나와 두 사람을 축복했습니다. 저승눈이 사라진 월이는 이제 여느 아낙과 다를 바 없이, 이웃과 정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지요.
무영은 사람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 성실한 농사꾼이 되었습니다. 삼백 년을 죽은 자들 사이에서 외로이 떠돌던 그가, 이제는 따뜻한 아내와 지지고 볶으며 사람 사는 재미를 알아갔지요. 두 사람은 그 후로 오래오래, 아들딸 낳고 백년해로하였다 합니다. 이따금 무영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삼백 년 세월과 저승에서의 그 밤을 떠올렸지만. 그럴 때마다 곁에 잠든 월이의 온기를 느끼며 빙그레 웃었더랍니다. '이 온기 하나면, 삼백 년도 아깝지 않지.'
신어미가 그토록 말하던 '봄'이, 마침내 월이에게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곱고 따뜻한 봄이었지요. 죽은 자의 말을 전하며 쌓은 그 모든 공덕이, 돌고 돌아 제 행복으로 돌아온 셈이니. 참으로, 착하게 산 이에게는 하늘도 저승도 복을 내린다는, 그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더랍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263자)
자,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평생 저주라 여겼던 저승눈이, 실은 목숨을 건진 은혜의 증표였다니. 참으로 뭉클하지 않으신가요. 착하게 살며 남의 한을 풀어준 월이에게, 하늘도 저승도 마침내 따뜻한 봄을 내려주었지요. 우리네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요. 오늘 흘린 정성과 온기가, 언젠가 돌고 돌아 복이 되어 돌아오는 법이니까요. 재미나게 들으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꾹 눌러주시고요. 여러분의 삶에도 곱고 따뜻한 봄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또 찾아뵐게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