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사자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돈도 권세도 소용없었다 , 저승사자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시작된 천석꾼의 최후의 밤 『해동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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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400자 내외)
"혹시, 아무도 없는 방에서 누군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적 없으십니까?"
세상 천지 돈으로 안 되는 게 없다지만, 딱 하나! 억만금을 줘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죽음'입니다. 여기,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천석꾼 김 대감이 있습니다. 환갑잔치가 무르익던 그날 밤, 대문 밖 어둠 속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 "김... 창... 식..." 세 번 불리면 꼼짝없이 따라가야 한다는 저승사자의 부름! 살고 싶은 욕망에 몸부림치는 인간과,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는 검은 도포의 방문자. 과연 김 대감은 저승사자의 명부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울 수 있을까요? 오늘 밤, 당신의 등 뒤를 서늘하게 만들 기이하고도 슬픈 운명의 밤으로 초대합니다.
디스크립션 (300자 내외)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아주 명확하고 공포스러운 징조와 함께 찾아오기도 하죠. 오늘 들려드릴 이야기는 삶에 대한 집착으로 저승의 법도마저 거스르려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문풍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깊은 밤, 저승사자와 마주 앉은 인간의 공포와 그 속에 숨겨진 반전. 『저승사자가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 지금 시작합니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보세요. 혹시 압니까? 당신의 이름이 불릴지...
※ 화려한 잔치
자, 때는 바야흐로 조선 중기, 가을걷이가 끝나고 찬바람이 문풍지를 슬슬 건드리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저기 경상도 땅에 김창식이라는 대감이 살고 있었는데, 이 양반 재산이 어찌나 많은지 걷다가 발에 채는 게 자기 땅이요, 눈을 돌리면 보이는 게 자기 집 소작농들이라 할 정도였습니다. 평생을 악착같이 모아 천석꾼 부자가 되었으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늘은 바로 그 김 대감의 환갑날입니다. 육십 평생 탈 없이 잘 살았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잔치를 벌였는데, 그 규모가 입이 떡 벌어질 지경입니다. 마당에는 멍석을 백 장이나 깔고, 황소 두 마리를 잡아 가마솥에 국을 끓이는데 그 고기 굽는 냄새가 십 리 밖까지 진동을 합니다. 동네 거지들부터 고을 원님까지 와서 "대감마님, 만수무강하십시오!" 하며 술잔을 올리니, 김 대감 얼굴에는 벌건 꽃이 피었습니다. 비단옷에 호박 단추를 단 김 대감이 상석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며 술을 들이킵니다.
"으허허, 좋구나! 내 나이 육십이지만 기력은 청춘이다! 여봐라, 풍악을 더 크게 울려라! 오늘 마시고 죽자꾸나!"
꽹과리 소리, 장구 소리가 '덩기덕 쿵덕'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기생들은 춤을 추고 난리가 났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요. 술이 몇 순배 돌고 흥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 갑자기 김 대감의 등골이 '찌릿' 하니 오싹해지는 겁니다. 마치 얼음장 같은 찬물이 등 뒤로 쪼로록 흘러내리는 것 같은 기분 나쁜 한기. 김 대감은 술기운인가 싶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왁자지껄하던 잔칫상 촛불 하나가 바람도 없는데 '파르르' 떨리더니, 푸르스름한 빛을 띠며 확 꺼져버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순간 김 대감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옛말에 잔칫날 불이 꺼지면 불길하다 했는데... 찝찝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는데, 마당 구석에 묶여 있던 누렁이가 허공을 향해 미친 듯이 짖어대기 시작합니다.
"캉! 캉! 캉! 끄으응..."
개는 귀신을 본다지요? 그 누렁이가 꼬리를 사타구니 사이로 바짝 말고, 대문 쪽을 향해 짖다가 뒷걸음질을 치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이 무서운 맹수라도 본 꼴입니다. 김 대감은 슬슬 부아가 치밉니다.
"에잉! 재수 없게 개새끼가 왜 저러나! 여봐라! 저놈의 개 주둥이를 묶어라! 내 좋은 날에 이게 무슨 변고냐!"
하인들이 달려가 개를 쫓는데, 김 대감의 귀에 기이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꽹과리 소리도 아니고, 사람들 웃음소리도 아닙니다. 저 멀리 대문 밖 어둠 속에서, 마치 쇠를 긁는 듯한, 혹은 마른 낙엽이 바스러지는 듯한 스산한 발소리... '스르륵, 스르륵...'
김 대감은 술잔을 든 손을 멈칫했습니다. 분명 아무도 듣지 못한 것 같은데, 오직 김 대감의 귓가에만 그 소리가 점점 크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가슴이 '쿵, 쿵, 쿵' 뛰기 시작합니다. 천하의 김 대감이,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그 배짱 두둑한 양반이, 알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였습니다. 상석에 앉은 김 대감의 눈에, 대문 틈 사이로 언뜻 스쳐 지나가는 검은 옷자락이 보인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분명 사람은 아닌데, 사람의 형상을 한 그 무언가가 잔치판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 김 대감은 자기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들이켰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대감마님, 왜 그러십니까? 어디 편찮으십니까?" 하고 묻는데, 김 대감 귀에는 그 소리가 웅웅거리며 멀게만 들립니다. 오직 하나, 저 어둠 속에서 자기를 노려보는 차가운 시선만이 뇌리에 박혀, 뼛속까지 시려오는 공포를 느끼며 김 대감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내려놓았습니다. 이 화려한 잔치 끝에, 초대받지 않은 무서운 손님이 당도했음을 직감한 것입니다.
※ 검은 도포의 불청객
밤이 깊어 축시(새벽 1시
3시)가 되었습니다. 그 요란하던 잔치도 파하고, 손님들도 다 돌아가고, 하인들도 곤드레만드레 취해 행랑채에 쓰러져 잠들었습니다.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한데, 오직 안방에 켜진 호롱불 하나만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김 대감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아까 느꼈던 그 한기가 가시질 않아, 비단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웅크리고 있었지요. 술기운은 온데간데없고 정신이 말똥말똥한데, 문밖에서 바람 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휭
휭~' 하고 귓가를 때립니다.
"제기랄, 오늘따라 밤공기가 왜 이리 차냐. 장작을 더 넣으라 해야겠다."
김 대감이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습니다. 방문 창호지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달빛을 등지고 선 그 그림자는, 갓을 쓴 사내의 형상인데 어깨가 딱 벌어지고 키가 문지방을 넘을 듯 큽니다. 김 대감은 숨이 턱 막혔습니다. '도둑인가? 아니면 원한 품은 소작농인가?'
"누, 누구냐! 거기 누구야!"
김 대감이 짐짓 호통을 쳤지만, 목소리는 염소 소리마냥 떨려 나왔습니다.
대답 대신, 잠겨 있던 문고리가 스르르 돌아갑니다. 안에서 걸쇠를 걸어 잠갔는데도, 마치 누가 밖에서 쇠를 녹이기라도 한 듯 문이 소리 없이 스르륵 열리는 겁니다. 그리고 문턱을 넘어 들어오는 사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칠흑 같은 검은 도포를 입었고, 머리에는 갓을 썼는데 그 챙이 넓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갓 아래로 뿜어져 나오는 두 눈... 그 눈빛이 마치 깊은 우물 속에 빠진 듯 시퍼렇고 차가워서, 마주치는 순간 김 대감의 심장이 멎을 뻔했습니다.
사내는 아무 말 없이 방 한가운데로 들어와 김 대감 앞에 털썩 앉았습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방 안의 온도가 뚝뚝 떨어져 입김이 나올 지경입니다. 김 대감은 벽에 등을 딱 붙이고 오들오들 떨며 물었습니다.
"누... 누구시오? 재물을 원하시오? 내 광 열쇠를 줄 테니 다 가져가시오! 제발 목숨만은..."
평생 돈으로 해결 못 한 게 없는 김 대감이니, 이번에도 돈으로 떼우려 한 게지요. 하지만 사내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을 뿐,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냅니다. 낡고 헤진 두루마리 책. 표지에는 붉은 글씨로 '명부(冥府)'라 적혀 있습니다.
사내가 천천히 책장을 넘깁니다. '차르륵, 차르륵...' 그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김 대감의 목을 조여옵니다. 마침내 사내의 손가락이 어느 한 곳에 멈춥니다. 그리고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마치 땅 밑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엽니다.
"김... 창... 식..."
자기 이름입니다. 분명 자기 이름인데, 남의 입에서 나오니 마치 사형 선고처럼 들립니다. 김 대감은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이 자는 사람이 아니다. 이승의 사람이 아니다.
"네 이놈!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네 정체가 무엇이냐!"
김 대감이 마지막 발악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사내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김 대감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합니다.
"내 이름을 모르는가? 사람들이 나를 저승사자라 부르더군. 김창식, 금일 축시 삼각. 네 수명이 다하였다. 가자."
"저... 저승사자?!"
김 대감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습니다. 오줌이 질질 새어 나와 바지를 적시는 줄도 모르고, 김 대감은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려 빌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사자님! 대왕님! 뭔가 착오가 있으십니다! 내 나이 이제 겨우 육십입니다! 아직 할 일도 많고, 써야 할 돈도 태산 같은데 벌써 가다니요!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하지만 저승사자는 무정하게도 붓을 들어 명부에 무언가를 적으려 합니다.
"인명은 재천이라. 억만금을 가져도 하루를 더 살 수 없는 법. 잔말 말고 일어나라."
저승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김 대감의 팔을 잡으려 하자, 그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김 대감의 살갗을 파고듭니다. '이대로 잡히면 끝이다.' 김 대감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 그는 살기 위해 평생 해본 적 없는 미친 짓을 저지르기로 마음먹습니다.
"자, 잠깐! 내 죽더라도 소원 하나만 들어주시오! 내 광에 숨겨둔 금덩이가 있는데, 저승 가는 노잣돈으로 챙겨가게만 해주시오!"
김 대감의 눈동자가 탐욕과 공포로 뒤섞여 이리저리 굴러갑니다. 과연 그는 이 절대절명의 순간에 저승사자를 속일 수 있을까요?
※ 명부의 기록
자, 상황이 이렇습니다. 천하의 김 대감이 방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고, 그 앞에는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는 저승사자가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습니다. 방 안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운데, 김 대감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집니다.
"사자님,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습니다. 내 이름이 김창식은 맞으나, 이 조선 팔도에 김창식이 나 하나뿐이겠습니까? 저기 아랫마을 사는 똥게네 아버지도 창식이고, 옆 고을 대장장이도 창식이 아닙니까? 분명 동명이인을 착각하신 겁니다!"
김 대감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억지를 부려보지만, 저승사자는 들은 척도 안 합니다. 그저 그 창백하고 긴 손가락으로 낡은 책장을 '스르륵' 넘길 뿐입니다. 그 책, 그러니까 명부(冥府)라는 것이 참으로 기이합니다. 종이는 누렇게 바래 삭아버릴 것 같은데, 그 안에 적힌 글씨들은 마치 방금 닭 피로 쓴 것처럼 시뻘겋게 살아 움직입니다. 저승사자가 책을 김 대감 코앞에 들이밉니다.
"보아라. 네 눈이 옹이구멍이 아니라면 똑똑히 보일 것이다."
김 대감이 덜덜 떨리는 눈으로 책을 들여다봅니다.
[김창식(金昌植). 무자년 생. 경상도 안동 거주. 부(父) 김철수, 모(母) 이씨. 향년 육십 세. 금일 축시 삼각, 심정지로 사망.]
아이고, 맙소사. 이름만 적힌 게 아닙니다. 태어난 해와 사는 곳, 부모님 함자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적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사인(死因)까지 적혀 있습니다. 김 대감은 숨이 턱 막힙니다.
"아니... 심정지라니요? 내 심장이 이렇게 쿵쿵 잘 뛰고 있는데 멈추다니요? 엊그제 용하다는 의원에게 진맥도 받았는데, 맥박이 황소 같다고 칭찬까지 들었습니다! 내가 매일 산삼을 달여 먹고 녹용을 씹어 먹는데 죽다니, 이건 모함입니다!"
김 대감은 책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감히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 붉은 글씨가 마치 살아서 자기를 노려보는 뱀의 눈 같았기 때문이지요. 저승사자가 책을 탁 덮으며 일어납니다. 그 소리가 마치 관 뚜껑 닫는 소리처럼 묵직하게 울립니다.
"이승에서의 부귀영화도 죽음 앞에서는 한낱 뜬구름인 것을. 육신에 미련을 버려라. 네 영혼이 빠져나갈 시간이다."
사자가 허리춤에서 놋쇠로 만든 방울 같은 것을 꺼내려 하자, 김 대감은 기겁을 하며 사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집니다. 검은 도포 자락을 움켜쥐었는데, 그 감촉이 옷감이 아니라 마치 차가운 안개를 잡는 것처럼 허공을 맴돕니다.
"안 됩니다! 못 갑니다! 내가 이 돈을 어떻게 모았는데! 내 재산, 내 땅, 내 마누라! 다 두고 나 혼자 어떻게 갑니까! 억울해서 못 갑니다! 사자님, 제발 통촉하여 주십시오! 내가 지금 가면 우리 집안은 망합니다! 며칠만, 아니 딱 하루만이라도 말미를 주십시오!"
김 대감은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갓을 벗어던진 채 맨머리로 방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아이고, 나 죽네! 사람 살려!"
하지만 방 안에서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도, 밖에서는 쥐 죽은 듯 고요합니다. 사자가 쳐놓은 결계(結界) 때문일까요? 문밖의 하인들은 주인이 방 안에서 생사를 오가는 사투를 벌이는 줄도 모르고 드르렁드르렁 코만 골고 있으니, 김 대감 속이 타다 못해 숯덩이가 될 지경입니다. 저승사자의 눈빛이 점점 더 매섭게 변해가고, 김 대감의 목숨 줄은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는데... 과연 김 대감은 이대로 끌려갈까요? 아니면 천석꾼 특유의 장사 수완을 발휘할까요?
※ 뇌물과 거래
울며불며 매달려도 사자가 꼼짝도 안 하자, 김 대감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평생을 장사치로 살아온 본능이 꿈틀거린 거지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리고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다. 저승사자도 어차피 심부름꾼 아닌가? 저승 가는 노잣돈이라도 챙겨주면 눈감아주지 않을까?'
김 대감은 눈물을 쓱 닦더니, 갑자기 표정을 싹 바꿉니다. 그리고 엉금엉금 기어서 장롱 쪽으로 갑니다. 장롱 깊숙한 곳, 이중 삼중으로 잠가둔 비밀 금고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엽니다.
'철컥, 끼익...'
금고 문이 열리자, 어두운 방 안이 순간 황금빛으로 환해집니다. 그 안에는 김 대감이 평생 긁어모은 금괴와 은덩이, 옥구슬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김 대감은 금괴 두 개를 꺼내 양손에 쥐고 저승사자 앞으로 다시 기어옵니다.
"나으리... 아니, 사자 대감님. 이것 좀 보십시오. 이게 순금입니다. 이승에서도 귀하지만 저승에서도 요긴하게 쓰이지 않겠습니까? 먼 길 오시느라 고단하셨을 텐데, 이거 받으시고 약주나 한잔하고 가시지요."
김 대감이 금괴를 사자 코앞에 들이밉니다. 사자가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김 대감은 '옳거니, 흔들리는구나!' 싶어 더 적극적으로 나옵니다.
"이게 부족합니까? 그럼 내 금고를 통째로 드리리다! 여기 있는 거 다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내 명부에 적힌 이름, 먹물로 살짝 지워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면 실수로 찢어졌다거나... 방법은 많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승사자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칩니다.
"어리석은 인간. 황천길에는 주머니가 없는 법. 그깟 돌덩이가 저승에서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내 눈을 돈으로 가리려 하다니, 죄를 더하는구나."
사자가 소매를 홱 뿌리치자, 김 대감 손에 있던 금괴가 '쨍그랑' 하고 바닥에 나뒹굽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포기했겠지만, 김 대감은 아닙니다. 돈이 안 통한다면 더 큰 걸 걸어야지요. 그의 눈에 광기가 서리기 시작합니다.
"그럼 땅! 내 땅을 드리리다! 저기 문전옥답 천 마지기! 그거 다 사자님 앞으로 돌려놓겠습니다! 저승에도 밭 갈고 농사지을 땅이 필요할 거 아닙니까? 제사상은 누가 차려줍니까? 내가 매년 제사상도 임금님 수라상처럼 차려 올리겠습니다! 제발... 제발 나 좀 살려주시오!"
김 대감은 이제 딜(Deal)을 하는 게 아니라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침을 튀겨가며, 눈을 희번덕거리며, 자기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내 수명 1년만 늘려주면 재산 절반을 주겠소! 3년만 늘려주면 전 재산을 다 주겠소! 나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죽어! 돈 써보지도 못하고 죽는 게 말이 돼!"
저승사자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김 대감과 눈을 맞춥니다. 그 깊고 어두운 눈동자 속에 김 대감의 비틀린 욕망이 비칩니다.
"네놈이 가진 그 재물, 네가 죽으면 다 남의 것이 될 터. 어차피 두고 갈 것을 가지고 생색을 내는구나. 거래는 없다. 다만..."
사자가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다만?"
김 대감의 귀가 번쩍 뜨입니다.
"잠시 눈을 돌려줄 테니, 네 발로 도망칠 수 있다면 도망쳐 보아라. 닭이 울기 전까지 나를 피할 수 있다면, 명부의 시간을 잠시 늦춰주마."
이게 웬 떡입니까? 김 대감은 저승사자가 뇌물에 흔들렸다고 착각했습니다. 체면 때문에 대놓고 받지는 못하고, 틈을 주는 것이라 생각했지요.
"고맙습니다! 대감님, 고맙습니다! 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김 대감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방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신발도 짝짝이로 신고, 버선발로 마당을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냅다 뛰기 시작합니다. 뒤에서 저승사자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과연 김 대감은 저승사자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것 또한 저승사자의 잔인한 놀이일까요?
※ 헛된 도망
자, 이제 김 대감은 미친 듯이 뜁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뜁니다. 비단 신발 한 짝은 진작에 벗겨져 어디 도랑에 처박혔고, 하얀 버선발은 흙탕물 범벅이 되어 찢어지고 피가 나지만 아픔을 느낄 새가 어디 있습니까. 오직 살아야겠다, 저승사자보다 멀리 도망쳐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치고 나갑니다. 평소엔 가마 타고 다니느라 백 걸음도 안 걷던 양반이, 죽음이 닥치니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처럼 산길을 내달리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처절하기 그지없습니다.
김 대감이 향한 곳은 마을 뒤편 깊은 산속에 있는 작은 암자였습니다. 거기가 어디냐 하면, 김 대감이 몇 해 전 주지 스님에게 시주 돈을 좀 쥐여주고 "내가 죽으면 극락 가게 빌어달라"며 미리 찜해둔 곳이었지요.
'그래, 거기로 가자! 부처님 품이라면 저승사자도 함부로 못 들어오겠지! 거기 법당 불상 뒤에 숨으면 살 수 있을 거야!'
나뭇가지가 얼굴을 할퀴고, 칡넝쿨이 발목을 잡아채 넘어지면 기어서라도 갑니다. 숲속 부엉이가 "부엉~ 부엉
" 하고 우는데, 그 소리가 마치 "어딜 가나
못 간다~" 하고 비웃는 것 같아 등골이 오싹합니다.
얼마나 뛰었을까요.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심장이 터질 것 같을 때쯤, 저 멀리 암자의 희미한 불빛이 보입니다. 김 대감은 "살았다!" 하고 비명을 지르며 암자 마당으로 들어섰습니다.
"스님! 주지 스님! 나 좀 살려주시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이상하게도 암자는 쥐 죽은 듯 조용합니다. 목탁 소리도 안 들리고, 인기척 하나 없습니다. 김 대감은 다급한 마음에 법당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습니다. 황금빛 불상이 은은한 미소를 띠고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김 대감은 불상 뒤 비좁은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습니다. 거미줄이 얼굴에 달라붙고 먼지가 풀풀 날리지만, 지금 그게 대수겠습니까.
김 대감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아... 하아... 따돌렸나? 내가 이긴 건가? 그래, 아무리 저승사자라도 부처님 계신 법당까지야 못 들어오겠지. 날이 밝을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닭이 울 때까지만...'
시간이 흐릅니다. 밖에서는 바람 소리만 '윙윙'거릴 뿐, 사자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김 대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쿵쿵거리던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으흐흐... 내가 해냈다. 김창식이가 저승사자를 따돌렸다! 역시 돈이 최고야. 내가 여기 시주 안 했으면 어디로 숨었겠어?"
그 와중에도 돈 타령입니다. 긴장이 풀리니 슬슬 졸음이 몰려옵니다. 이대로 잠들었다가 아침 해가 뜨면 집으로 돌아가서 소금부터 뿌려야지, 생각하며 눈꺼풀이 무거워지는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법당 안 촛불이 '파르르' 떨리더니, 불상 그림자가 기이하게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분명 김 대감 혼자뿐인데, 좁디좁은 법당 안에 꽉 찬 듯한 서늘한 냉기. 그리고 등 뒤, 바로 귀 뒤쪽에서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닙니다. 바로 옆, 아니 김 대감의 귓속에서 울리는 소리입니다.
"김... 창... 식... 여기가 네가 고른 자리더냐?"
김 대감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헛된 희망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입니다.
※ 세 번째 부름
김 대감은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돌리면 마주칠 테니까요. 그 시퍼런 눈빛을.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칩니다.
"아, 아니야... 여긴 못 들어와... 여기는 부처님 앞이야..."
김 대감이 웅얼거리며 현실을 부정해보지만, 검은 그림자는 이미 김 대감의 온몸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저승사자가 천천히 불상 앞으로 걸어 나옵니다. 마치 벽을 통과하듯 스르륵 나타난 사자는, 도망치느라 만신창이가 된 김 대감을 내려다보며 비릿한 미소를 짓습니다.
"어리석은 중생아. 네가 뇌물로 바친 그 시주 돈으로 지은 죄가 씻길 줄 알았더냐? 그리고 네가 도망친 이곳이, 바로 명부에 적힌 네가 죽을 장소니라. 네 발로 찾아왔구나."
아!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입니까. 저승사자가 도망칠 기회를 준 것은 자비가 아니라, 예정된 장소로 유인하기 위한 수순이었던 것입니다. 김 대감은 절망감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합니다.
"사, 사자님... 한 번만... 딱 한 번만..."
저승사자는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듯, 손에 든 명부를 다시 펼칩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펴서 카운트다운을 하듯 하나씩 접기 시작합니다.
"이미 두 번 불렀다. 이제 마지막이다."
김 대감은 귀를 막았습니다. 안 들으면 안 끌려갈까 싶어서,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으아아아!" 하고 괴성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저승의 부름은 고막으로 듣는 게 아니지요. 영혼으로 듣는 것입니다. 사자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입니다.
"김... 창... 식!"
세 번째 이름이 불리는 순간, 법당 안에 천둥 같은 소리가 '콰광!' 하고 울려 퍼졌습니다. 동시에 김 대감의 몸에서 무언가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 마치 껍질을 벗는 매미처럼, 혹은 헌 옷을 벗어던지듯,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끔찍하고도 기묘한 감각. 김 대감은 허공에 붕 뜬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헝클어진 머리에 흙투성이가 된 늙은 노인 하나가 불상 뒤에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푹 떨구고 죽어 있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아... 아... 내가... 내가 죽었구나. 진짜 죽었어."
김 대감의 영혼이 자기 시체를 보며 멍하니 서 있는데, 저승사자가 쇠사슬을 짤그랑거리며 다가옵니다.
"이제 가자. 황천길이 멀다."
사자가 쇠사슬을 김 대감의 목에 툭 걸자, 거부할 수 없는 힘이 그를 끌어당깁니다. 김 대감은 손을 뻗어 자기 시체를 잡아보려 합니다. 품속에 넣어둔 금괴라도 꺼내고 싶어서, 아니면 입고 있는 비단옷이라도 챙기고 싶어서 허우적거리지만, 손은 허공만 가를 뿐입니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습니다.
"안 돼! 내 돈! 내 금덩이! 저거 내가 어떻게 모은 건데! 저걸 두고 어떻게 가! 안 돼!"
김 대감은 울부짖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서러운 바람 소리만 '휭~' 하고 법당을 맴돌 뿐입니다. 밖에서는 새벽닭이 "꼬끼오!" 하고 홰를 치며 아침을 알리는데, 김 대감의 밤은 이제 영원히 끝나지 않을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 황천길의 깨달음
암자를 나선 저승사자와 김 대감의 영혼은 안개 낀 산길을 걸어갑니다. 이상하지요. 올 때는 그렇게 험하고 가시밭길 같던 산길이, 갈 때는 평탄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내리막길입니다. 길 양옆으로는 이승에서는 보지 못한 붉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데, 향기가 어찌나 진한지 맡기만 해도 눈물이 주르륵 흐릅니다. 상사화(相思花), 이승의 기억을 잊게 한다는 꽃입니다.
김 대감은 자꾸만 뒤를 돌아봅니다. 저 멀리 산 아래 자신의 기와집이 보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떵떵거리며 살던 그 집, 곳곳에 숨겨둔 내 보물단지들. 이제 날이 밝으면 사람들이 내 시체를 찾으러 오겠지? 마누라는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할 테고, 자식 놈들은 유산 싸움을 하겠지? 내가 죽어라 모은 그 돈을 자기들끼리 찢어발기겠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김 대감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을 합니다.
"아이고, 억울해라. 내가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고, 남한테 인색하게 굴면서 모은 재산인데... 십 원 한 닢 못 가져가는구나. 저승 올 때 입은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더니, 그 말이 참말이구나!"
앞서 가던 저승사자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봅니다. 그 차가웠던 눈빛이 조금은 연민 어린 눈빛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보아라, 김창식. 네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느냐?"
김 대감이 자기 손을 내려다봅니다. 빈손입니다.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은, 앙상하고 하얀 빈손.
"이승에 올 때도 주먹 쥐고 빈손으로 왔거늘, 갈 때도 빈손으로 가는 것이 순리(順理)다. 네가 평생 움켜쥐려 했던 것은 모래알 같은 욕심이었을 뿐. 네가 베풀지 않은 재물은 족쇄가 되어 너를 무겁게 할 것이고, 네가 남에게 흘리게 한 눈물은 강이 되어 네 앞길을 막을 것이다."
저승사자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힙니다. 그제야 김 대감은 후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금괴가 아니라 따뜻한 밥 한 끼라도 이웃에게 베풀 걸. 땅문서가 아니라 고생하는 마누라 손이라도 한 번 더 잡아줄 걸. 하지만 늦었습니다. 버스는 이미 떠났고, 배는 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저 앞에 시커먼 강물이 흐릅니다. 삼도천(三途川). 저 강을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나룻배 사공이 손을 내밉니다. 삯을 내라는 거지요. 하지만 김 대감에게는 땡전 한 푼 없습니다. 결국 김 대감은 입고 있던 헌 옷가지마저 벗어주고, 벌거벗은 영혼으로 배에 오릅니다.
배가 안개 속으로 멀어지면서, 김 대감의 흐느끼는 소리도 점점 희미해집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 덧없고 덧없도다..."
그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금자탑은 이승에 남아 남들의 먹잇감이 되고, 그는 오직 생전에 지은 업보(이력서) 한 장만 달랑 들고 염라대왕 앞에 서게 되겠지요. 바람이 붑니다. 산사의 풍경 소리가 '뎅그렁~ 뎅그렁~' 울리며, 떠나간 영혼을 위로하듯 맑게 퍼져 나갑니다.
유튜브 엔딩 멘트
"자, 여러분. 천석꾼 김 대감의 마지막 가는 길, 잘 보셨습니까?
어떻습니까. 등골이 좀 서늘해지셨나요, 아니면 가슴 한구석이 헛헛해지셨나요?
우리는 모두 잠시 소풍을 온 여행자들입니다. 100년을 살든 1000억을 벌든, 갈 때는 누구나 공평하게 빈손입니다. 김 대감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금덩이는 그저 차가운 돌멩이일 뿐, 저승 가는 길엔 물 한 모금 값도 안 되더라는 것이지요.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내 손을 한번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너무 꽉 쥐고 살고 있진 않은지, 혹시 놓아야 할 것을 붙들고 끙끙대고 있진 않은지 말입니다. 저승사자가 이름을 부를 때 "네, 잘 놀다 갑니다!" 하고 웃으며 일어날 수 있도록, 오늘 하루는 조금 더 베풀고, 조금 더 사랑하며 살아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