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사자는 뭐하는 존재
저승사자는 뭐하는 존재 — 저승사자는 왜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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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여러분,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요? 그냥 사라지는 걸까요?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검은 갓에 검은 도포를 입은 저승사자가 찾아와, 적패를 들이밀고, 혼을 거두어 저승까지 데려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하필 죽음에 이런 절차가 필요했을까요? 왜 누군가가 와서 데려가야만 했을까요? 그냥 죽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깊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저승사자가 데려간다는 것은 죽음이 우연이 아니라 때가 되어 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죽은 자를 위한 장치가 아닙니다. 남은 자들을 위한 위로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시면, 저승사자라는 존재가 전혀 다르게 보이실 겁니다.
※ 1: 죽음 앞에 선 인간의 공포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안고 산다. 반드시 죽는다는 것. 왕이든 거지든, 영웅이든 범부든,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는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토록 확실한 사실 앞에서 사람은 늘 두려워한다. 왜일까. 죽음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다.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 김 노인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나이 일흔둘. 평생 산에서 나무를 하고 밭을 일구며 살았다. 자식 넷을 키워 출가시키고, 아내와 둘이서 조용히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건강한 편이었으나, 그해 겨울부터 기침이 잦아지고 몸이 부쩍 야위기 시작했다.
어느 밤, 김 노인이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서 아내가 잠든 숨소리가 고르게 들렸다. 바깥에서는 겨울바람이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노인의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구나.'
의원이 직접 말하지는 않았으나, 약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보았다. 김 노인은 자신의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힘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살이 줄고 숨이 가빠지는 것이 하루가 다르게 느껴졌다.
무서웠다. 평생 산짐승을 만나도 겁내지 않던 사내가, 홍수에 논이 잠겨도 이를 악물고 버틴 사내가, 죽음 앞에서만은 아이처럼 무서웠다. 무엇이 무서웠을까. 죽는 순간의 고통? 그것도 두려웠지만 진짜 공포는 다른 데 있었다.
'죽으면 나는 어디로 가는 거지?'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 질문이었다.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물어볼 곳이 없었다. 그냥 사라지는 것인가. 깜깜한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것인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끝없는 무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인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면, 살아온 이 칠십 년은 무엇이었단 말이냐.'
김 노인의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 나무를 하고 밭을 갈고 자식을 키운 그 세월이, 아내와 함께 웃고 울었던 그 날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냥 꺼지는 것이라면. 그 생각이 노인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며칠 뒤, 김 노인이 마을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있다가 옆집 박 영감에게 물었다.
"박 형, 자네는 죽으면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나?"
박 영감이 담뱃대를 빨며 한참 생각하더니 답했다.
"글쎄, 나는 저승이 있다고 믿네."
"저승?"
"그래, 저승. 죽으면 저승사자가 와서 데려간다잖은가. 그러니까 아무 데로나 가는 게 아니라 갈 데가 정해져 있다는 거지."
"자네는 그걸 정말 믿나?"
"믿고 안 믿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 놓여. 누가 와서 데려가 주면 혼자 가는 것보다 낫지 않겠나."
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묘하게 가슴에 와닿았다. 누가 와서 데려가 준다는 것. 혼자 깜깜한 곳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길을 안내해 준다는 것.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속 공포가 한 뼘쯤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저승사자라... 정말 그런 존재가 있는 걸까.'
노인은 느티나무 위로 펼쳐진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빛 구름 사이로 햇살이 한 줄기 비쳐 내렸다. 그 빛줄기가 마치 하늘에서 누군가 손을 내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2: 저승사자가 없던 시절
저승사자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주 먼 옛날, 아직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제대로 나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었으나, 죽은 뒤에 혼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무도 정해주지 않았다. 갈 곳을 모르는 혼들이 이승을 떠돌았다.
옛 어른들은 그 시절을 이렇게 전했다.
그때는 밤마다 산과 들에 혼불이 떠다녔다. 죽은 자의 혼이 갈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는 것이었다. 마을 어귀에서, 우물가에서, 다리 밑에서, 고갯마루에서 혼들이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여 산골짜기에 메아리쳤다. 산 자들은 그 소리를 듣고 겁에 질렸다.
죽은 할아버지의 혼이 손자의 꿈에 나타나 울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 길을 모르겠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손자가 깨어나 울며 가족에게 말했으나, 아무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죽은 아내의 혼이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살아 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 남편 옆에 앉아 있었으나 말을 할 수 없었고, 만질 수 없었고, 다만 찬 기운만 남겼다. 남편은 아내의 기척을 느끼며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보, 가야 할 곳이 있을 것 아니오. 이러고 있으면 당신도 나도 편치 않소."
그러나 아내의 혼은 갈 곳을 몰랐다.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문이 없었고, 길이 없었고, 안내하는 자가 없었다. 혼들은 이승에 머물러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엉킨 혼돈의 세상이 되었다.
마을에 병이 돌았다. 죽은 자의 혼이 산 자의 기운을 빨아들인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아이가 밤마다 열이 오르면 죽은 조상의 혼이 붙은 것이라 했고, 청년이 갑자기 쓰러지면 떠도는 혼이 홀린 것이라 했다. 진실이 무엇이었든, 사람들의 공포는 진짜였다.
"이러다 산 사람이 다 죽겠구나."
마을의 가장 늙은 어른이 한탄했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경계가 없으니 세상이 뒤숭숭하고 불안했다. 죽은 자는 떠나지 못해 괴롭고, 산 자는 죽은 자의 기운에 눌려 괴로웠다.
그때 사람들이 깨달은 것이 있었다. 죽음에는 질서가 필요하다는 것. 죽은 뒤에 혼이 갈 곳이 있어야 하고, 가는 길이 있어야 하며, 그 길을 안내해 줄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죽은 자도 편히 가고, 산 자도 편히 살 수 있다.
'누군가가 있어야 해. 죽은 자를 데려가 줄 누군가가.'
이 절실한 필요에서, 이 간절한 바람에서, 저승사자라는 존재가 싹텄다. 죽음의 혼돈을 정리해 줄, 어둠 속에서 길을 밝혀 줄, 이승과 저승의 문을 여닫는 자. 사람들은 그런 존재를 상상했고, 이야기를 만들었고, 믿기 시작했다.
그것은 미신이 아니었다. 살기 위한 지혜였다. 죽음을 감당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기 위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의 힘이었다.
※ 3: 저승사자의 탄생
저승사자의 기원을 가장 온전하게 전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제주도에서 전해 내려오는 차사본풀이, 강림차사 설화다. 이 이야기는 저승사자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알려주는 유일한 서사다.
아주 먼 옛날, 이승에 과양생이라는 자가 살았다. 이자는 원래 저승에서 죽어야 할 자였으나 죽음을 거부하고 이승으로 도망쳐 숨어 살았다.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고 버티니, 이승과 저승의 질서가 어그러졌다. 다른 사람이 대신 죽거나,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세상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염라대왕이 노했다.
"과양생이를 잡아 와라. 이승의 누구든, 저 자를 잡아 올 수 있는 자에게 저승차사의 직을 내리겠다."
그러나 저승의 귀졸들은 이승에서 과양생이를 찾지 못했다. 이승은 저승과 달라 복잡하고 넓었으며, 과양생이는 교활하게 숨었다. 염라대왕이 이승의 관아에 명을 내렸다.
이때 한 사내가 나섰다. 이름은 강림. 이승의 포졸이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눈빛이 날카로운 사내였다. 그러나 강림이 특별했던 것은 힘이 아니라 지혜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두려움을 모르는 성격이었다.
"내가 가겠소. 과양생이를 잡아오겠소."
주위에서 말렸다.
"미쳤나? 과양생이는 저승에서도 못 잡은 자야. 이승 포졸이 어찌 잡겠다고 나서는 게야?"
"저승 귀졸이 못 잡은 건 이승을 모르기 때문이오. 나는 이승을 안다."
강림은 과양생이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뒤졌다. 과양생이는 교묘하게 모습을 바꾸고, 장소를 옮기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숨었다. 보통 사람은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강림은 포기하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강림은 과양생이의 약점을 알아냈다. 과양생이는 욕심이 많았다. 이승에서 죽지 않으려 한 것도 이승의 재물과 쾌락을 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강림은 덫을 놓았다. 큰 잔치를 벌여 과양생이를 유인한 것이다. 과양생이는 잔치의 풍성함에 이끌려 제 발로 나타났고, 강림이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과양생이지?"
"아, 아니오! 나는..."
"거짓말은 저승 가서 하거라."
강림이 과양생이를 포박했다. 도망치려 발버둥 쳤으나 강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강림은 과양생이를 끌고 저승으로 향했다. 이승의 사람이 저승에 간다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 길은 험하고 어두웠다. 삼도천을 건너고, 칼산을 넘고, 불의 강을 지났다. 강림은 물러서지 않았다. 과양생이를 끌고 염라대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왕, 과양생이를 잡아왔습니다."
염라대왕이 크게 기뻐했다.
"장하도다. 저승의 귀졸도 못 한 일을 이승의 포졸이 해냈구나. 약속대로 너에게 저승차사의 직을 내리겠다."
강림이 고개를 들어 염라대왕을 바라보았다.
"대왕,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저승차사란 무엇을 하는 자입니까?"
"이승에서 수명이 다한 자의 혼을 거두어 저승으로 인도하는 자다. 적패에 적힌 대로 움직이되,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하지 말 것이며, 혼이 길을 잃지 않도록 끝까지 호위하라."
'나는 이승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인가.'
강림의 마음이 흔들렸으나, 이미 저승에 들어선 몸이었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강림은 결단을 내렸다. 이승의 포졸에서 저승의 차사로. 이렇게 최초의 저승사자가 탄생했다.
※ 4: 적패와 절차
강림이 저승차사가 된 뒤, 죽음에는 비로소 질서가 생겼다. 아무렇게나 죽고 아무렇게나 떠돌던 혼들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저승으로 인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절차의 핵심은 적패였다. 적패란 염라대왕이 발부하는 문서로, 죽을 사람의 이름과 나이, 사는 곳, 죽을 날짜와 시각이 적혀 있다. 이 적패가 저승사자의 손에 들려지면, 그 순간부터 죽음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천지의 법도가 된다.
어느 야담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양에 이름 높은 정승이 있었다.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 재산이 산더미 같았다.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고, 왕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정승이 어느 날 중병에 걸렸다. 온갖 명의를 불렀으나 차도가 없었다.
"대감,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력이 다하셨습니다."
의원의 말에 정승이 벌컥 화를 냈다.
"닥쳐라! 내가 죽다니, 이 나라에서 나 없이 돌아가는 일이 어디 있느냐! 약을 더 가져와라!"
정승은 죽음을 거부했다. 권력으로, 재력으로, 죽음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산삼을 먹고, 기도를 올리고,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그러나 몸은 하루하루 쇠약해져 갔다.
그날 밤이었다. 정승이 잠결에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방 안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검은 갓, 검은 도포, 검은 신발. 손에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었다.
'누, 누구냐?'
정승이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꼼짝할 수 없었다. 검은 사내가 두루마리를 펼쳤다. 거기에는 정승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감, 때가 되었소."
"네놈이 누구냐! 내가 누군 줄 알고!"
"알고 있소. 이조판서 겸 우의정. 그러나 이 적패 앞에서는 벼슬이 소용없소."
"내 아직 할 일이 남았다! 가문을 일으켜야 하고, 손자의 혼사도 치러야 하고..."
"대감, 이승의 일은 이승에 남은 자가 할 것이오. 대감은 이제 저승의 일을 해야 하오."
정승이 난생처음 무력감을 느꼈다. 평생 권력을 휘둘렀으나, 이 검은 사내 앞에서는 권력이 통하지 않았다. 정승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분노의 눈물이 아니라 체념의 눈물이었다.
"정녕... 피할 수 없는 것이냐?"
"적패에 적힌 것은 바꿀 수 없소. 그러나 대감, 두려워 마시오. 내가 길을 안내하겠소."
저승사자가 손을 내밀었다. 정승은 한참을 망설이다, 마침내 그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정승의 몸에서 혼이 빠져나왔다. 가볍고 투명한 혼이 정승의 육신을 내려다보았다. 육신은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가시지요."
저승사자가 앞장서 걸었다. 정승의 혼이 그 뒤를 따랐다. 방을 나서자 길이 나타났다. 어둡지만 발밑에 희미한 빛이 비치는 길이었다. 저승사자가 걷는 곳마다 빛이 번졌다.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다. 적패는 예외를 두지 않는다. 왕도, 정승도, 거지도, 아이도 적패 앞에서는 평등하다. 이것이 죽음에 부여된 가장 중요한 질서였다. 죽음은 공평하다.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누구도 특별 대우를 받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적패가 있다는 것은 죽음이 무작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름이 적혀 있고, 날짜가 정해져 있고, 절차가 있다. 이것은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장치였다.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어 불려가는 것. 그 차이가 남은 자들에게 주는 위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 5: 저승사자의 눈물
저승사자는 냉혹한 존재일까. 감정 없이 혼을 거두어 가는 차가운 기계 같은 존재일까.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승사자도 울고, 망설이고, 때로는 규칙을 어기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존재로 그렸다. 이것이야말로 저승사자라는 캐릭터가 가진 가장 깊은 매력이다.
이런 야담이 전해진다.
어느 산골 마을에 젊은 어미가 살았다.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홀로 세 살배기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가난했으나 아이를 향한 사랑만은 부자 못지않았다. 낮에는 남의 집 빨래를 해주고, 밤에는 삼을 삼아 아이의 옷을 지었다. 손이 트고 갈라져 피가 맺혔으나 아이가 웃으면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그 어미가 병에 걸렸다. 역병이었다. 마을에 돌던 병이 어미에게 옮은 것이다. 열이 오르고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며칠을 앓다가 자리에 누웠다. 아이가 어미 곁에 앉아 작은 손으로 이마를 만졌다.
"엄마, 아파?"
"아니야, 괜찮아. 엄마 금방 나을 거야."
그러나 낫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숨이 가빠지고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
그날 밤, 저승사자가 왔다. 세 명의 차사가 문 앞에 섰다. 선임 차사가 적패를 펼쳤다. 젊은 어미의 이름, 나이 스물셋, 오늘 자시.
"들어가자."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선임 차사의 발이 멈추었다. 아이가 어미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어미는 열에 들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아이를 꼭 안고 있었다. 마른 손으로 아이의 등을 쓸고 있었다. 아이의 뺨에 어미의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선임 차사가 멈칫한 채 서 있었다. 뒤의 두 차사도 말이 없었다.
'저 아이는 어미가 죽으면 어찌 되는 것이냐. 세 살이다. 세 살배기가 혼자 이 세상을 어찌 살아간단 말이냐.'
저승사자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 염라대왕의 명이었다. 적패에 적힌 대로 수행하는 것이 차사의 본분이었다. 그러나 선임 차사의 눈이 젖어들고 있었다. 검은 도포 소매 안에서 적패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차사님, 시각이 다 되었습니다."
뒤의 차사가 조용히 재촉했다. 선임 차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미가 눈을 떴다. 열에 들뜬 눈이었으나 저승사자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당신이... 저승사자입니까."
"그렇소."
"알고 있었어요. 오늘인 줄 알고 있었어요."
어미의 목소리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다만 품에 안긴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아이만...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이 아이가 깨기 전에 데려가 주세요. 엄마가 떠나는 걸 보면 이 아이가 울 거예요."
선임 차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목구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아이는 이웃집 아낙이 돌봐줄 거예요. 약속을 받아놓았어요. 그러니까 저는... 갈 수 있어요."
어미가 아이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마지막 입맞춤이었다. 아이는 깨지 않았다. 어미가 아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일어섰다. 아니, 어미의 혼이 몸에서 빠져나와 일어선 것이었다. 몸은 여전히 아이를 안은 자세로 누워 있었다.
"가시지요."
선임 차사가 몸을 돌렸다. 어미의 혼이 문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잠든 아이의 얼굴이 달빛에 비쳐 보였다. 어미의 혼이 소리 없이 울었다.
선임 차사도 울고 있었다. 검은 갓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리를 내지 않았다. 저승사자의 울음은 소리가 없다. 그러나 그 울음은 이승의 어떤 울음보다 깊었다.
방 안에서 아이가 뒤척이며 중얼거렸다.
"엄마..."
저승사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미의 혼도 멈추었다. 그러나 아이는 다시 잠들었다. 두 존재는 말없이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이것이 저승사자였다. 사람들이 상상한 저승사자는 감정이 없는 집행자가 아니었다. 울 줄 아는 존재, 마음이 흔들리는 존재, 그러나 끝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존재. 그래서 더 슬프고, 그래서 더 인간적이었다.
※ 6: 남은 자들을 위한 장치
저승사자라는 존재가 죽은 자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토록 오랜 세월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저승사자의 진정한 역할은 죽은 자를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남은 가족은 무력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는데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이미 떠난 사람에게 밥을 지어줄 수도, 옷을 입혀줄 수도, 길을 가르쳐줄 수도 없다. 이 무력감이 슬픔을 더 깊게 만든다. 아무것도 못 해주었다는 죄책감이 산 자를 갉아먹는다.
저승사자는 이 무력감에 작은 틈을 만들어 주었다. 남은 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을 준 것이다.
밥 세 그릇. 사람이 죽으면 상가의 문 앞에 밥 세 그릇을 놓는다. 삼차사자에게 각각 한 그릇씩 대접하는 것이다. 밥을 지어 놓으며 남은 가족은 속으로 빈다.
'저승사자님, 이 밥 드시고 우리 아버지를 편히 데려가 주십시오. 길에서 고생시키지 마시고, 무섭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었다. 남은 가족이 떠난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그 행위 자체가 위로였다. 밥을 짓고, 그릇에 담고, 문 앞에 놓는 그 과정에서 슬픔이 행동으로 바뀌었다. 가만히 앉아 울기만 하는 것보다, 무언가를 하는 것이 사람을 덜 무너지게 만들었다.
노잣돈도 마찬가지였다. 관 속에 동전을 넣는 풍습. 이것은 망자가 삼도천을 건널 때 뱃삯으로 쓰라는 것이었다. 저승까지 가는 길에 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남은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 이 돈 가지고 가세요. 저승 가시는 길에 드실 것도 사시고, 뱃삯도 내시고, 부족함 없이 가세요."
아들이 관 속에 동전을 넣으며 울먹였다. 그 행위가 아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다. 살아 있을 때 더 잘해드리지 못한 죄책감을, 마지막 노잣돈으로나마 갚고 싶었던 것이다.
수의를 정성껏 짓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저승 가는 길에 입을 옷을 만들어 드린다는 것. 삼베를 짜고 바느질을 하는 동안 가족들은 망자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어머니, 이 옷 따뜻하게 지었어요. 저승에서도 춥지 않게 입으세요."
며느리가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며 울었다. 그 눈물이 실에 배었다. 슬픔이 바느질이 되고, 바느질이 옷이 되고, 옷이 어머니의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저승사자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승사자가 데려간다는 전제가 있으니 밥을 차릴 수 있었고, 저승이라는 목적지가 있으니 노잣돈을 넣을 수 있었고, 저승 가는 길이 있으니 옷을 지을 수 있었다.
만약 저승사자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죽으면 그냥 끝이고, 갈 곳도 없고, 가는 길도 없다면. 남은 가족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밥을 지어도 먹을 이가 없고, 옷을 지어도 입을 이가 없고, 돈을 넣어도 쓸 곳이 없다. 그 무력감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을 것이다.
저승사자는 남은 자들에게 할 일을 만들어 주었다. 슬픔을 행동으로 바꿀 수 있게 해주었다. 무력감 대신 정성을, 죄책감 대신 마지막 봉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이야말로 저승사자가 존재하는 가장 깊은 이유였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있구나. 마지막까지 해줄 수 있는 게 있구나.'
그 안도감이, 남은 자들을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 주었다.
※ 7: 저승사자가 주는 위로
사람이 죽으면 남은 자들은 묻는다. 왜.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우리 아버지가. 왜 하필 저렇게 젊은 나이에. 왜 하필 아이를 남겨두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으면 사람은 무너진다.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은 슬픔을 넘어 분노가 되고, 분노는 원한이 되고, 원한은 산 자의 삶까지 잡아먹는다.
저승사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했다. 그 답은 간단하면서도 깊었다.
때가 되어 간 것이다.
적패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날짜가 정해져 있었다. 저승사자가 데려갔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정해진 것이었다. 이 세 문장이 남은 자들에게 주는 위로의 무게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마을에 사이좋은 부부가 살았다. 남편은 나무꾼이었고 아내는 길쌈을 했다. 가난하지만 서로를 아끼며 오순도순 살았다.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볼이 빨갛고 웃음이 예쁜 다섯 살배기였다.
그해 여름, 남편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 벼랑에서 떨어졌다. 마을 사람들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서른둘의 젊은 나이였다.
아내의 울음이 산을 울렸다. 울고 또 울었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고, 마른 뒤에도 울었다. 딸이 엄마의 치마를 잡고 같이 울었다.
며칠이 지나도 아내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울음 사이사이로 같은 말을 되뇌었다.
"왜, 왜 우리 서방이. 착하디착한 사람이 왜. 나쁜 짓 한 번 안 한 사람이 왜. 하늘이 무심하지. 왜 하필 우리 서방을 데려가신 거야."
왜. 이 질문이 아내를 갉아먹고 있었다.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납득할 수 없었다. 서른둘에 죽을 이유가 없었다. 착하게 살았고, 아내와 딸을 사랑했고, 해코지 한 적 없는 사람이었다. 왜 이 사람이 죽어야 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웃들이 위로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힘내야지, 딸도 있잖은가."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야지."
맞는 말이었으나 아내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아내는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하루 종일 남편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딸이 배고프다 해도 일어나지 못했다. 삶의 의지가 꺼지고 있었다.
그때 마을의 늙은 할머니가 찾아왔다. 팔십이 넘은 할머니였다. 남편도, 아들도, 며느리도 먼저 떠나보낸 할머니. 상을 수없이 치르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할머니가 아내 곁에 앉았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아내가 울음 사이로 물었다.
"할머니, 왜 우리 서방이 죽어야 했어요? 왜요?"
할머니가 아내의 손을 잡았다. 주름진 손이 젊은 손을 감쌌다.
"아가, 저승사자가 데려간 거야."
"저승사자요?"
"그래. 적패에 이름이 적혀 있었던 거야. 네 서방 이름이, 오늘 날짜로 적혀 있었던 거야. 저승사자가 와서, 때가 되었으니 가시지요 했을 거야."
"그게 무슨 위로가 된다고요!"
"아가, 잘 들어. 때가 되어 간 거야. 아무렇게나 간 게 아니야. 하늘이 정한 때가 있었고, 저승사자가 와서 데려간 거야. 네 서방은 혼자 깜깜한 곳으로 떨어진 게 아니야. 누군가가 와서 손잡고 데려간 거야. 길을 안내해 줬을 거야. 저승까지 무사히 갔을 거야."
아내의 울음이 잠시 멈추었다. 할머니의 말이 가슴에 스며들고 있었다.
"네 서방은 지금 저승에 편히 가 있을 거야. 혼자가 아니야. 먼저 간 부모님도 만났을 거고, 조상님들도 만났을 거야. 외롭지 않아."
"정말요? 정말 외롭지 않을까요?"
"그럼. 저승사자가 끝까지 데려다줬을 테니까. 네 서방은 길을 잃지 않았어. 떠돌지 않았어. 갈 데를 찾아서, 제대로 간 거야."
아내가 다시 울었다. 그러나 이번 울음은 달랐다. 전에는 분노와 원한이 섞인 울음이었다면, 이번에는 슬프지만 놓아주는 울음이었다. 때가 되어 간 것이라는 말이 아내의 마음에 작은 구멍을 뚫어 주었다. 납득할 수 없던 죽음에 이유가 생긴 것이다. 하늘이 정한 때, 적패에 적힌 날짜, 저승사자의 안내. 이것이 아내를 숨 쉬게 해주었다.
사실일까? 정말 저승사자가 온 것일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실 여부가 아니었다. 그 이야기가 산 자를 살렸다는 것. 때가 되어 간 것이라는 한마디가, 무너지던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것. 그것이 전부이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 8: 저승사자는 왜 존재하는가
김 노인이 세상을 떠난 것은 그해 겨울이 다 가기 전이었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박 영감에게 저승사자 이야기를 들은 지 두 달 뒤였다.
마지막 밤, 김 노인이 아내의 손을 잡고 조용히 말했다.
"여보, 나 이제 갈 것 같소."
"영감..."
"울지 마오. 저승사자가 올 거요. 내가 혼자 가는 게 아니니까."
"영감이 그걸 믿는 거요?"
김 노인이 웃었다. 주름 가득한 얼굴에 평온한 미소가 번졌다.
"믿는 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 거요. 누가 와서 데려가 준다고 생각하니까 무섭지가 않아. 길을 안내해 준다고 생각하니까 깜깜하지가 않아."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남편의 손을 꼭 잡았다.
"가서 뭐 하실 거요?"
"먼저 간 우리 아버지, 어머니 찾아뵐 거요. 그리고 거기서 당신 기다릴 거요. 당신이 올 때 내가 마중 나가리다."
김 노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숨이 고르게 이어지다 점점 가늘어지더니, 마지막 한 번 깊이 들이쉬고는 고요해졌다. 아내가 남편의 이름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그 순간 바깥에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겨울바람이었으나 차갑지 않았다. 방문이 살짝 열리며 바람이 방 안을 한 바퀴 돌고 나갔다. 아내가 눈물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승사자가 데려간 거야. 영감이 혼자 간 게 아니야.'
장례를 치르며 아내는 문 앞에 밥 세 그릇을 놓았다. 관 속에 동전을 넣었다. 수의를 정성껏 여며 주었다.
"영감, 이 밥 드시고 가세요. 저승 가는 길에 배고프지 않게."
"이 돈 가지고 가세요. 삼도천 건너실 때 쓰세요."
"이 옷 따뜻하게 입으세요. 저승이 춥다면 이걸 여며 입으세요."
아내는 울면서도 할 일이 있었다. 해줄 것이 있었다. 밥을 짓고, 돈을 넣고, 옷을 여미는 그 행위들이 아내를 붙잡아 주었다. 무너지지 않게 해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조문을 왔다.
"어떻게 돌아가셨소?"
아내가 담담하게 답했다.
"때가 되어 가셨어요. 저승사자가 데려간 거예요."
그 한마디에 조문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되어 간 것. 이 말에는 납득이 있었고, 수긍이 있었고, 받아들임이 있었다. 불의의 사고도 아니고, 억울한 죽음도 아니고, 때가 되어 간 것이었다. 이 말이 남은 자들의 마음에 질서를 부여했다.
저승사자는 왜 존재하는가. 이제 그 답이 보인다.
인간은 이 세상 모든 생물 중에서 유일하게 죽음을 미리 아는 존재다. 다른 동물은 죽는 순간에만 죽음을 경험하지만, 인간은 살아 있는 매 순간 죽음을 의식한다.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 반드시 올 것을 알면서 막을 수 없는 공포,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었다. 죽음에 이야기를 입혔다.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데려간다는 이야기. 아무 데로나 가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곳으로 간다는 이야기.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안내를 받아 간다는 이야기. 무작위가 아니라 때가 있다는 이야기.
저승사자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검은 갓에 검은 도포를 입고, 적패를 들고, 문 앞에 서서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존재. 이 존재 하나로 죽음은 혼돈에서 질서가 되었고, 공포에서 이별이 되었으며, 무의미에서 의미가 되었다.
저승사자는 죽은 자를 위한 존재가 아니었다. 산 자를 위한 존재였다. 남은 자들이 떠난 이를 보내줄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무언가를 해줄 수 있도록, 때가 되어 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도록. 저승사자는 그렇게 수천 년 동안 산 자들의 곁에 서 있었다.
어쩌면 저승사자는 지금도 어딘가에 서 있을지 모른다. 검은 갓을 쓰고, 적패를 손에 들고, 문 앞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때가 되면 나지막이 말할 것이다.
"때가 되었소. 두려워 마시오. 내가 길을 안내하겠소."
그 말이 무섭게 들리는가. 아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 갈 곳이 있다는 것. 누군가가 함께해 준다는 것.
저승사자는 그래서 존재한다.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이야기, 저승사자는 왜 존재하는가. 어떠셨습니까? 저승사자는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죽음의 공포를 감당하기 위해 만들어 낸 가장 따뜻한 지혜였습니다. 때가 되어 간 것이라는 그 한마디가, 수천 년간 남은 자들의 마음을 붙잡아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알림 설정 부탁드립니다. 다음 이야기에서 또 뵙겠습니다.
썸네일 이미지 프롬프트 (영어, 16:9, 실사, no text)
A photorealistic cinematic scene of a mysterious figure standing at the wooden gate of a traditional Korean thatched-roof house at twilight. The figure wears an entirely black traditional Korean outfit including a black gat hat, black dopo robe, and black shoes, holding a rolled parchment scroll in one hand. The figure is seen from behind, silhouetted against a dim amber glow emanating from inside the house. A narrow dirt path leads to the gate, flanked by old stone walls. Faint wisps of ethereal blue-white mist float around the figure's feet suggesting a supernatural presence. The sky is deep indigo transitioning to dark purple with a single crescent moon. Warm candlelight flickers through the paper-screen door of the house creating a contrast between the warmth of life inside and the cold stillness of the visitor outside. The mood is solemn yet strangely peaceful. Ultra-detailed, atmospheric lighting, shallow depth of field, 16:9 aspect ratio, no t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