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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사자를 통해 보게 된 미래

황금 인생 21 2026. 7. 18.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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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사자를 통해 보게 된 미래

부제

죽음의 문턱에서 내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다면, 과연 나는 떳떳할 수 있을까? 후회 없이 눈을 감을 수 있을까? 평생 재산만 지키며 살아온 늙은 곡물상이 저승사자를 따라가다가 자신이 죽고 난 뒤의 미래를 보게 된다.

태그 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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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평생 모은 재산만큼은 자식들을 지켜 줄 것이라 믿었던 늙은 곡물상.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서 저승사자를 따라간 그는 자신이 죽고 난 뒤, 곳간 때문에 원수가 된 가족과 쓸쓸히 버려진 자신의 무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미래에는 아직 쓰이지 않은 마지막 하루가 남아 있었습니다.

※ 1: 잠기지 않은 마지막 곳간, 곡물상 최덕만은 흉년을 걱정해 곳간을 지키다가 갑작스럽게 쓰러지고 저승사자를 만난다

조선 후기, 한양에서 하루 길쯤 떨어진 송현 고을에는 최덕만이라는 늙은 곡물상이 살고 있었다. 그의 집 뒤편에는 기와를 얹은 곳간이 일곱 채나 늘어서 있었다. 가을이면 쌀과 보리, 조와 콩이 가득 들어찼고, 겨울에도 쥐 한 마리가 숨어들 틈 없이 단단히 관리되었다.

덕만은 새벽마다 가장 먼저 일어나 곳간의 자물쇠를 확인했다. 열쇠 꾸러미가 허리춤에서 짤랑거릴 때마다 그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첫째 곳간 이상 없음. 둘째 곳간 쌀가마 백스물셋. 셋째 곳간 보리 일흔여덟.”

늙은 하인 만복이 등불을 들고 뒤따르며 하품을 삼켰다.

“어르신, 어젯밤에도 세 번이나 살피셨습니다. 쌀가마에 다리가 달린 것도 아닌데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쌀에는 다리가 없어도 사람 손에는 다리가 달렸다. 가난한 해에는 자물쇠보다 사람 마음이 먼저 헐거워지는 법이야.”

“쌀을 훔칠 사람보다 어르신 걱정 때문에 잠을 못 자는 식구가 더 많겠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등불이나 똑바로 들어라.”

덕만은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지만 만복은 피식 웃었다. 마흔 해를 함께 산 주종 사이였기에 가능한 웃음이었다.

덕만은 젊은 시절 지게 하나로 장사를 시작했다. 장터에서 남은 곡식을 헐값에 사서 말리고, 벌레 먹은 낟알을 골라 다시 팔았다. 남들이 잠든 시간에도 장부를 정리했고, 비 오는 날에는 쌀가마를 지키느라 곳간 처마 아래에서 밤을 새웠다. 그렇게 모은 재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자가 된 뒤에도 굶주렸던 시절의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밥상에 떨어진 쌀 한 톨도 손가락으로 집어 먹었고, 곳간 열쇠를 며느리에게조차 맡기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는 첫눈부터 무릎 높이까지 쌓였다. 지난해 홍수로 농사가 좋지 않았던 탓에 마을마다 식량이 부족했다. 아침나절, 남루한 솜저고리를 입은 과부 한 씨가 어린 딸을 데리고 덕만의 집을 찾아왔다.

“대감마님, 보리 한 되만 꾸어 주십시오. 봄이 오면 품을 팔아서 두 되로 갚겠습니다.”

덕만은 마루 끝에 앉아 장부에서 눈도 떼지 않았다.

“지난달에도 좁쌀을 꾸어 가지 않았느냐?”

“그것은 병든 시어머니께 죽을 쑤어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아이가 사흘을 굶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치마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추위에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덕만의 손이 장부 위에서 잠시 멈췄다.

그때 여덟 살 난 손자 윤이가 마당으로 뛰어나왔다.

“할아버지, 우리 집에는 쌀이 저렇게 많은데 조금 주면 안 됩니까?”

“아이들은 모르는 일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다.”

“곳간 하나만 열어도 온 마을이 먹을 수 있잖아요.”

“곳간을 한 번 열기 시작하면 바닥이 드러나는 것은 순식간이다. 봄까지 무엇을 먹고 살려고 그러느냐?”

덕만은 만복에게 눈짓했다. 만복은 과부 모녀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보리 한 줌이 담긴 작은 주머니를 건넸다.

“이것이라도 가져가시오.”

“만복아.”

덕만의 서늘한 목소리에 만복의 손이 멈췄다.

“그 보리는 네 품삯에서 빼겠다.”

“그리하십시오. 늙은 놈이 한 끼 덜 먹으면 되지요.”

과부는 연신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다. 아이가 대문을 나서며 곳간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 눈빛이 덕만의 마음에 가시처럼 걸렸다.

‘나도 저만한 나이에 굶어 보았다. 그러니 더 잘 안다. 한 번 가진 것을 놓으면 다시는 채울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손자 윤이는 그날 저녁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밥상에 따뜻한 흰쌀밥이 올라왔는데도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왜 먹지 않느냐?”

“아까 그 아이는 굶는데 저만 먹으면 밥이 목에 걸릴 것 같습니다.”

“네가 굶는다고 그 아이 배가 부르겠느냐?”

“할아버지께서는 배고픈 사람을 보면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덕만의 얼굴이 굳었다.

“내가 네 나이 때는 풀뿌리도 없어서 나무껍질을 씹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어. 그래서 이를 악물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으니 할아버지도 아무도 돕지 않으실 겁니까?”

숟가락 놓는 소리가 방 안에 크게 울렸다. 덕만의 아들 성호가 윤이를 꾸짖었다.

“할아버지께 무슨 말버릇이냐? 어서 사죄드려라.”

윤이는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잘못했습니다.”

덕만은 손자의 정수리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묵직했다. 그는 바람을 쐬겠다며 곳간으로 향했다.

밤이 되자 눈발이 다시 굵어졌다. 덕만은 일곱 번째 곳간 앞에서 자물쇠를 확인했다. 그런데 분명 잠갔던 문이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큼 열려 있었다.

“만복아!”

대답이 없었다. 바람이 문을 밀 때마다 안쪽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덕만은 등잔을 들고 곳간으로 들어갔다.

쌀가마 사이에 검은 도포를 입은 사내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검은 갓 아래로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허리에는 긴 쇠사슬과 붉은 목패가 매달려 있었다.

“누구냐? 감히 남의 곳간에 들어와 무엇을 하는 게냐?”

사내는 쌀가마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참 많이도 모았군.”

“도둑이냐?”

“도둑이라면 쌀을 가져가겠지. 나는 사람을 데리러 왔다.”

사내가 돌아섰다. 창백한 얼굴과 검은 눈동자, 피처럼 붉은 입술이 등잔불 아래 드러났다.

“최덕만, 예순셋. 네 이름이 맞느냐?”

덕만의 손에서 등잔이 떨어졌다. 불꽃이 꺼지며 곳간이 어둠에 잠겼다.

“저승사자…….”

“알아보니 설명할 수고는 덜었군. 함께 가자.”

덕만은 뒷걸음질을 쳤다.

“말도 안 된다.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야. 장부를 정리하지 못했고, 아들에게 열쇠도 넘기지 않았어.”

“죽음이 장부 정리되는 날만 골라 찾아오면 세상에 죽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잠깐만 기다려라. 가족에게 할 말이 있다.”

“산 사람은 늘 마지막에야 할 말이 많아지는 법이지.”

저승사자가 쇠사슬을 들어 올리는 순간 덕만의 가슴을 짓누르던 통증이 갑자기 터졌다. 그는 쌀가마를 붙잡으려 했지만 손이 그대로 통과했다. 바닥에는 자신의 몸이 쓰러져 있었고, 열린 문으로 달려온 만복이 다급히 소리치고 있었다.

“어르신! 정신 차리십시오!”

성호와 며느리 연화, 손자 윤이도 맨발로 뛰어왔다. 윤이는 덕만의 손을 붙잡고 울었다.

“할아버지, 눈을 떠 보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말대꾸하지 않을게요.”

덕만은 손자를 안으려 했지만 팔이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윤아, 내가 여기 있다. 울지 마라.”

아무도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저승사자가 곳간 밖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서둘러라. 네 숨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에 확인할 것이 있다.”

“확인할 것이라니?”

“네 장부에 죽은 날짜가 두 개 적혀 있다.”

저승사자가 붉은 목패를 펼쳤다. 한쪽에는 오늘 날짜가, 다른 한쪽에는 십 년 뒤의 날짜가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사람에게 죽을 날이 어찌 둘일 수 있느냐?”

“그래서 내가 직접 데리러 온 것이다.”

저승사자는 눈 내리는 대문 밖을 가리켰다. 마을길 끝에 살아 있을 때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검은 문이 서 있었다.

“문을 지나면 네가 죽은 뒤의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말이냐?”

“보고도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한다면 오늘 죽는다. 마음이 달라진다면 십 년이 남는다.”

덕만은 쓰러진 자신의 몸과 검은 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손자의 울음소리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저승사자가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덕만 자신의 장례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 2: 죽은 뒤에도 계속되는 장부, 저승길에 오른 덕만은 자신의 장례와 재산을 두고 다투기 시작한 가족의 모습을 목격한다

검은 문 너머로 발을 내딛자 겨울밤이 순식간에 잿빛 아침으로 바뀌었다. 덕만의 집 대문에는 흰 천이 걸렸고, 마당에는 상여꾼들과 조문객이 가득했다. 처마 아래로 곡소리가 흘렀지만 덕만의 귀에는 장부 넘기는 소리보다 가볍게 들렸다.

“내 장례가 맞느냐?”

“상여 위에 네 이름이 적혔는데 남의 장례이겠느냐?”

덕만은 빈소 안으로 들어갔다. 아들 성호는 굴건제복을 입고 곡을 하고 있었고, 며느리 연화는 쪽진 머리에 흰 댕기를 두른 채 손님상을 챙겼다. 손자 윤이는 영정 앞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았다.

덕만은 자신의 영정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저 그림은 누가 그린 것이냐? 눈썹이 지나치게 치켜올라 사나워 보이지 않느냐?”

“살아 있을 때보다 온화하게 그렸는데도 그렇다.”

“저승사자라는 자가 말이 꽤 많구나.”

“죽은 사람과 걷다 보면 말동무가 필요하다.”

마당 한쪽에서는 친척들이 음식상을 앞에 두고 소곤거렸다.

“곳간이 일곱 채라던데 성호가 팔자를 고쳤구먼.”

“논밭까지 합하면 송현 고을 절반은 최씨 집안 땅 아닌가?”

“누이 옥분에게도 재산이 돌아가려나?”

“시집간 딸이 무슨 재산을 받겠나. 그래도 아비가 워낙 아꼈으니 뭔가 남겨 두었겠지.”

덕만은 누이 옥분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내 딸 옥분이도 왔느냐?”

“직접 찾아보아라.”

부엌 뒤편 장작더미 옆에서 옥분이 홀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덕만은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다. 옥분은 삼 년 전 가난한 옹기장이와 혼인하겠다고 고집했다가 덕만과 크게 다투고 집을 나간 딸이었다.

“옥분아, 네가 왔구나.”

옥분은 들을 수 없었다. 그때 성호가 빈소에서 나와 누이 앞을 막았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 다시는 이 집 문턱을 넘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도 마지막 가시는 길에 절은 올리게 해 주세요.”

“재산을 노리고 온 것이 아니냐?”

옥분의 얼굴이 붉어졌다.

“오라버니는 제가 아버지께 돈을 달라는 말을 들었습니까?”

“아버지께서 네 이름만 나오면 혀를 차셨어. 집안을 버리고 가난한 옹기장이를 따라간 딸에게 줄 것은 없다고 하셨다.”

덕만은 성호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지만 손이 통과했다.

“내가 언제 옥분에게 줄 것이 없다고 했느냐? 안채 벽장에 혼수로 주려던 비단과 은전이 있다.”

저승사자가 혀를 찼다.

“마음속으로 남긴 것은 유언이 아니다.”

옥분은 빈소를 향해 멀리 절을 올리고 돌아섰다. 어린 윤이가 뒤따라 나와 고모의 손을 잡았다.

“고모, 가지 마세요. 할아버지가 깨어나시면 제가 말씀드릴게요.”

“윤아, 할아버지는 이제 깨어나지 않으신단다.”

“아니에요. 아까 손끝이 움직였어요.”

덕만과 저승사자가 동시에 윤이를 바라보았다.

“저 아이가 네 몸의 변화를 느꼈군.”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냐?”

“숨이 붙어 있으니 이 길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장례가 끝나자 풍경이 빠르게 바뀌었다. 마당의 조문객이 사라지고 저녁이 되었다. 상복을 벗기도 전인 성호는 안방에 앉아 곳간 열쇠 꾸러미를 세고 있었다. 며느리 연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지 사흘도 되지 않았습니다. 장부는 나중에 보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친척들이 눈을 번뜩이고 있는데 나중이 어디 있소? 아버지는 누구보다 재산에 철저한 분이셨소.”

“아가씨에게도 남겨 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옥분이에게 줄 것은 없소.”

“안채 벽장에 아버님께서 따로 넣어 두신 함이 있습니다.”

성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것을 왜 이제 말하오?”

그는 벽장을 열어 옻칠한 함을 꺼냈다. 덕만이 옥분에게 주려고 모아 둔 비단과 은전, 어린 시절 옥분이 쓰던 나무비녀가 들어 있었다. 맨 아래에는 덕만의 손으로 쓴 편지가 있었다.

성호는 편지를 읽다가 표정이 굳었다.

옥분에게 논 세 마지기와 은전 백 냥을 남긴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곳간 하나를 열어 흉년 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라는 부탁도 적혀 있었다.

덕만은 안도했다.

“보았느냐?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저승사자는 대답하지 않고 성호를 바라보았다.

성호는 편지를 등잔불 가까이 가져갔다. 종이 가장자리에 불이 붙었다.

“안 돼!”

덕만이 달려들었지만 편지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성호는 타들어 가는 종이를 놋그릇 안에 떨어뜨렸다. 검은 재만 남자 그는 은전을 꺼내 자신의 궤짝으로 옮겼다.

연화가 문밖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방금 태운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아니오. 아버지가 오래전에 적은 장사 기록이었소.”

“그 안에 아가씨 이름이 보였습니다.”

성호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당신은 본 것이 없소.”

“아버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긴 뜻을 어기실 셈입니까?”

“아버지가 평생 모은 재산이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모았겠소?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소. 곳간을 한 번 열면 바닥이 드러나는 것은 순식간이라고.”

덕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손자에게 했던 말이 아들의 입에서 똑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곳간을 지키라고 가르쳤을 뿐이다. 남의 몫까지 빼앗으라고 가르친 적은 없다.’

저승사자가 덕만의 생각을 들은 듯 말했다.

“자식은 부모의 말보다 부모가 평생 보인 모습을 더 오래 기억한다.”

연화는 놋그릇의 재를 손수건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편지는 태워도 뜻까지 태울 수는 없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하면 윤이까지 이 집에서 내보낼 것이오.”

문밖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윤이가 깨진 약과 접시 옆에 서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 편지를 태웠습니까?”

“아이들은 어른 일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다.”

성호의 말에 덕만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것도 자신이 윤이에게 했던 말이었다.

윤이는 아버지를 피해 뒷마당으로 달려갔다. 일곱 번째 곳간 앞에 멈춘 아이는 잠긴 문에 이마를 대고 흐느꼈다.

“할아버지, 왜 아무 말씀도 안 남기셨어요?”

“남겼다. 내가 분명 남겼어.”

덕만은 손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윤아, 미안하다. 편지 한 장이면 될 줄 알았다.”

저승사자가 검은 장부를 펼쳤다. 덕만의 이름 아래에서 새로운 글자들이 붉게 번졌다.

말하지 않은 진심은 전해지지 않았고, 보여 주지 않은 선의는 본받을 수 없었다.

덕만은 장부를 빼앗듯 들여다보았다.

“내 아들이 저렇게 된 것이 모두 내 탓이라는 말이냐?”

“모든 잘못이 네 탓은 아니다. 그러나 네가 뿌린 씨앗이 어느 밭에서 자랐는지는 보아야겠지.”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느냐?”

저승사자가 곳간 문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굳게 잠긴 문이 열리자 안쪽에는 쌀가마가 아니라 눈보라 치는 십 년 뒤의 마을이 펼쳐졌다.

“네가 없는 세상의 열 해 뒤다.”

문 너머에서 다 자란 윤이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불에 그을린 장부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뒤따르는 사내들이 몽둥이를 들고 소리쳤다.

“최윤을 잡아라! 제 아비의 곳간에 불을 지른 패륜아다!”

※ 3: 내가 없는 집의 열 해, 덕만은 십 년 뒤의 미래에서 무너진 가족과 버려진 무덤, 그리고 자신을 원망하는 손자를 본다

덕만은 열린 곳간 문을 통과해 십 년 뒤의 송현 마을로 들어섰다. 열여덟 살이 된 윤이는 눈 쌓인 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둥근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해진 도포 아래로 앙상한 어깨가 드러났다.

윤이는 품에 장부를 끌어안은 채 버려진 방앗간으로 숨어들었다. 뒤쫓던 장정들은 눈 위의 발자국을 발견하지 못하고 반대편 골목으로 달려갔다.

“저 아이가 어쩌다 저 꼴이 된 것이냐?”

덕만이 방앗간 안으로 들어갔다. 윤이는 추위에 언 손으로 장부를 펼쳤다. 장부에는 성호가 가난한 농부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두 배, 세 배로 받아 낸 기록이 적혀 있었다. 빚을 갚지 못한 집의 논밭과 소까지 빼앗은 내용도 있었다.

저승사자가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네가 남긴 일곱 곳간은 이제 열두 곳간이 되었군.”

“그러면 더 부자가 된 것 아니냐?”

“곳간은 늘었지만 집안은 줄었다.”

풍경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두 사람은 최씨 집의 대청마루에 서 있었다. 집은 예전보다 훨씬 크고 화려했지만 사람의 온기가 없었다. 하인들은 성호와 눈이 마주칠까 고개를 숙이고 다녔고, 마당에는 곡식을 꾸러 온 농민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보리 한 섬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아이가 병들어 약값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성호는 아버지가 쓰던 주판을 튕겼다.

“약속한 날을 넘겼으니 밭을 내놓아라.”

“그 밭을 빼앗기면 저희 식구는 굶어 죽습니다.”

“그 사정까지 내가 헤아리면 장사를 어떻게 하겠느냐?”

덕만은 아들의 손에서 주판을 빼앗으려 했다.

“성호야, 장사는 사람을 죽이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다.”

성호는 들을 수 없었다. 그의 표정과 말투는 젊은 날의 덕만을 빼닮아 있었다. 다만 덕만에게 남아 있던 망설임과 부끄러움만 빠져 있었다.

며느리 연화가 병색이 짙은 얼굴로 나왔다.

“윤이를 찾아야 합니다. 장정들을 거두어 주세요.”

“그놈은 곳간에 불을 지르고 장부까지 훔쳤소.”

“불을 지른 사람이 윤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 아이가 장부를 관아에 넘기면 우리 집안은 끝장이오.”

“집안이 끝나는 것이 두려워 아들을 도둑으로 만들 셈입니까?”

성호가 주판을 세게 내려놓았다.

“당신이 어려서부터 쓸데없는 동정심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놈이 저 모양이 된 것이오.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다면 진작 내쫓았을 것이오.”

덕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나는 윤이를 내쫓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그러했겠느냐?”

저승사자의 물음에 덕만은 입을 다물었다. 가문의 재산을 훔쳐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손자를 보았다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연화는 기침을 하며 기둥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수건에는 붉은 핏자국이 번졌다.

“며느리가 병들었구나.”

“삼 년 전부터 병을 앓았다. 그러나 성호는 의원을 부르는 것보다 곳간 자물쇠 바꾸는 데 더 많은 돈을 썼지.”

“저 많은 재산을 두고 아내의 약값을 아꼈단 말이냐?”

“그것도 네게 배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덕만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가족에게는 아끼지 않았다.”

저승사자는 대답 대신 마당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덕만이 생전에 사용하던 낡은 식탁이 놓여 있었다. 어린 윤이 밥을 먹지 않던 날, 덕만이 했던 말이 바람처럼 되살아났다.

네가 굶는다고 그 아이 배가 부르겠느냐.

그 말은 성호의 입을 거쳐 다른 모습으로 자라고 있었다. 네가 아프다고 곳간의 곡식이 약이 되겠느냐. 네가 불쌍하다고 빚이 사라지겠느냐. 네가 울어도 장부는 달라지지 않는다.

덕만은 귀를 막았다.

“그만 보여 다오.”

“아직 네 무덤을 보지 않았다.”

마을 풍경이 다시 변했다. 눈 덮인 공동묘지 끝에 잡초가 무성한 봉분 하나가 나타났다. 비석에는 최덕만의 이름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다. 봉분 한쪽은 빗물에 무너졌고, 제기에는 낙엽과 흙만 쌓여 있었다.

“성호는 성묘도 오지 않느냐?”

“처음 삼 년은 왔다. 그 뒤로는 장삿길이 바쁘다는 이유로 하인에게 맡겼지. 하인도 품삯을 받지 못하자 오지 않았다.”

“옥분이는?”

“네 장례식에서 쫓겨난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윤이는 나를 기억하느냐?”

저승사자가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눈발 사이로 윤이가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도망 중에도 작은 술병과 마른 대추 세 알을 품고 있었다.

윤이는 봉분 앞에 앉아 눈을 치웠다. 술을 따르고 대추를 올려놓은 뒤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덕만은 손자의 곁에 앉았다.

“윤아, 그래도 네가 왔구나.”

윤이가 낮게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저는 어릴 때 할아버지가 참 미웠습니다.”

덕만의 표정이 굳었다.

“곳간에는 곡식이 썩을 만큼 많았는데 배고픈 사람에게 한 줌도 내주지 않으셨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할아버지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되고 나니 알겠습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칭찬받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윤이는 불에 그을린 장부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저는 이 장부를 관아에 가져갈 것입니다. 우리 집안의 재산을 모두 잃더라도 빼앗은 논밭은 돌려주겠습니다.”

덕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그렇게 하여라.”

“하지만 한 가지가 두렵습니다.”

윤이가 봉분을 바라보았다.

“저도 나이를 먹으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변할까 두렵습니다. 사람보다 곳간을 먼저 보고, 눈물보다 장부를 더 믿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떠나려 합니다.”

“가지 마라. 네 어머니가 기다린다.”

“어머니를 모시고 고모가 사는 남쪽 마을로 갈 것입니다. 다시는 최씨 집안의 이름을 쓰지 않겠습니다.”

덕만은 손자를 붙잡으려 했지만 손끝은 윤이의 어깨를 그대로 통과했다. 윤이는 마지막 절을 올리고 산을 내려갔다.

멀리서 종소리가 울렸다. 산 아래 최씨 집 방향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성호가 증거를 없애려 장부가 보관된 곳간에 불을 놓았다가 불길이 집 전체로 번진 것이었다.

붉은 불길 속에서 쌀가마가 터지고, 수많은 곡식이 재로 변했다. 성호는 금고를 끌어내려다 무너지는 들보에 갇혔다.

덕만은 산 아래로 달려가려 했다.

“성호야!”

저승사자가 쇠사슬로 그의 앞을 막았다.

“이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다. 네가 들어갈 수는 없다.”

“아들이 죽는데 보고만 있으라는 말이냐?”

“오늘 네가 죽는다면 저 미래는 그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럼 내가 살아나면 바꿀 수 있느냐?”

“그것을 확인하려고 네게 미래를 보여 준 것이다.”

저승사자는 검은 장부를 펼쳤다. 오늘 죽는 날짜는 붉은 글씨로 굳어 있었지만, 십 년 뒤의 날짜는 물 위의 먹처럼 계속 흔들렸다.

“네 숨은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가려면 미래의 매듭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찾아야 한다.”

“내가 곳간을 지킨 것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냐?”

“그보다 오래된 일이다. 네가 열일곱 살이던 해, 함께 장사를 시작했던 동생 최복만이 강에서 죽었다.”

덕만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동생 이야기는 하지 마라.”

“복만이 죽은 뒤 너는 다시 가난해지는 것을 죽음보다 두려워했다. 곳간을 채우기 위해 사람도 가족도 믿지 않았지.”

“그 아이는 내 말을 듣지 않고 얼어붙은 강을 건넜다가 빠져 죽었다.”

“정말 그렇게 기억하느냐?”

“내 눈앞에서 죽었다!”

저승사자는 손에 든 붉은 목패를 뒤집었다. 뒷면에는 덕만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최복만, 사망 기록 없음.

“죽은 사람에게 사망 기록이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네 동생은 그날 강에서 죽지 않았다.”

덕만의 입술이 떨렸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얼음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네가 본 것은 복만의 짚신과 곡식 자루뿐이었다.”

저승사자가 불타는 최씨 집을 가리켰다. 무너지는 곳간 벽 뒤에서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작은 방 하나가 나타났다. 방 안에는 덕만이 젊은 시절 사용했던 낡은 장부와, 동생 복만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패가 놓여 있었다.

“미래를 바꾸려면 먼저 네가 잘못 기억한 과거로 가야 한다.”

“복만이가 살아 있었다면 어디로 간 것이냐?”

“그 답을 들으면 네가 평생 모은 재산이 누구의 희생 위에 세워졌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검은 하늘이 갈라지며 얼어붙은 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열일곱 살의 덕만과 열다섯 살의 복만이 곡식 자루를 멘 채 강 한가운데 서 있었다.

얼음 아래에서 쿵, 쿵, 누군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 덕만은 동생을 구하려는 대신 곡식 자루부터 끌어안고 있었다.

현재의 덕만은 그 모습을 보며 숨을 삼켰다.

“아니야. 저것은 내가 기억하는 일이 아니다.”

저승사자가 조용히 대답했다.

“사람은 견딜 수 없는 후회를 진실과 다르게 기억하기도 한다.”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과거의 문이 열렸다.

※ 4: 과거에서 지워 버린 한 사람, 미래를 바꾸려면 덕만이 외면했던 동생의 죽음과 숨겨진 곡식 장부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

얼어붙은 강 위로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쳤다. 열일곱 살의 덕만과 열다섯 살의 복만은 몸집보다 큰 곡식 자루를 등에 지고 있었다. 해진 저고리와 짚신 사이로 눈이 파고들었지만 두 형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강 건너에서는 곡물상 장두칠이 등불을 흔들었다.

“서둘러라! 날이 밝기 전에 창고로 옮겨야 한다!”

어린 복만이 얼음 아래 흐르는 검은 물을 내려다보았다.

“형님, 돌아가요. 얼음이 울고 있어요.”

“저 자루 두 개만 옮기면 쌀 한 말을 준다고 했다. 어머니가 사흘째 미음을 드시지 못했어.”

“그래도 죽으면 쌀이 무슨 소용이에요?”

“내가 앞장설 테니 내 발자국만 밟아.”

현재의 덕만은 눈앞의 광경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평생 기억한 장면과 조금씩 달랐다. 그는 동생이 욕심을 부려 먼저 강을 건넜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 앞장선 사람은 자신이었다.

젊은 덕만의 발밑에서 얼음이 갈라졌다. 복만은 등에 멘 자루를 내던지고 형의 팔을 잡았다. 두 사람이 가까스로 균형을 잡는 순간, 장두칠이 강 건너에서 고함을 질렀다.

“곡식부터 잡아라! 저것 한 자루가 너희 형제 목숨보다 비싸다!”

물에 빠진 곡식 자루가 갈라진 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젊은 덕만은 본능적으로 자루의 밧줄을 움켜잡았다. 바로 그때 복만의 발밑이 무너졌다.

“형님!”

복만이 형의 소매를 붙잡았다. 한쪽에는 동생이, 다른 쪽에는 곡식 자루가 매달렸다. 젊은 덕만의 팔이 사정없이 떨렸다.

“자루를 놓아요!”

“이것을 놓으면 어머니가 굶어 죽는다!”

“형님, 손이 미끄러워요!”

복만의 손가락이 소매 끝에서 하나씩 풀렸다. 젊은 덕만은 곡식 자루를 끌어올리느라 다른 손을 내밀지 못했다. 마지막 손가락이 떨어지며 복만은 검은 물속으로 사라졌다.

현재의 덕만이 얼음 위에 주저앉았다.

“그만 보여 다오.”

“네가 먼저 보자고 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끝까지 보지 않으면 돌아갈 수도 없다.”

저승사자의 말과 함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다음 장면에는 장두칠의 창고가 나타났다. 장두칠은 살아남은 덕만 앞에 엽전 꾸러미와 곡식 자루를 내려놓았다.

“네 동생은 안타깝게 되었지만 네 잘못은 아니다. 가난이 죽인 것이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강을 뒤져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른 것이 관아의 구휼미라는 사실도 알릴 셈이냐?”

젊은 덕만의 얼굴이 굳었다.

“구휼미라니요?”

“백성에게 나누어 줄 곡식을 내가 빼돌렸다. 너희 형제는 그 일을 도왔으니 관아에 가면 나와 함께 옥에 갇힌다. 네 늙은 어머니는 누가 돌볼 것이냐?”

장두칠은 엽전 꾸러미를 덕만의 손에 쥐여 주었다.

“오늘 일은 잊어라. 이 돈으로 장사를 시작하면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다.”

장면이 다시 바뀌었다. 한 달 뒤, 젊은 덕만은 시장 한구석에 작은 곡식 좌판을 펼쳤다. 그 좌판에 놓인 쌀은 동생 대신 붙잡았던 자루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 장사의 밑천이 구휼미였단 말이냐…….”

“너는 훗날 장두칠의 창고와 논밭까지 사들였다. 그 재산이 지금의 일곱 곳간이 되었지.”

“나는 정당하게 일해서 값을 치렀다.”

“열매는 네 땀으로 키웠을지 몰라도 첫 씨앗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눈보라 속으로 또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강에서 떠내려간 복만은 멀리 떨어진 나루에서 늙은 옹기장이에게 구조되었다. 그는 고열로 몇 달을 앓았지만 살아남았다.

이듬해 봄, 야윈 복만은 형을 찾아 장두칠의 창고까지 왔다. 그러나 창고 안에서는 장두칠과 젊은 덕만이 대화하고 있었다.

“복만이 살아 돌아오면 어쩔 셈이냐?”

“죽은 아이가 어떻게 돌아옵니까?”

“시신을 찾지 못했으니 모르는 일이지. 그놈이 구휼미 이야기를 하면 네 장사도 끝난다.”

젊은 덕만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살아 있다면 다른 곳에서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형에게 돌아오지 않더라도 말이냐?”

“그 아이를 보면 강에서 놓친 손이 떠오를 겁니다. 나는 평생 그 눈을 보고 살 자신이 없습니다.”

문밖에서 그 말을 들은 복만은 손에 쥔 나무패를 내려다보았다. 형제의 이름을 나란히 새긴 패였다. 복만은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돌아섰다.

현재의 덕만이 그 뒤를 쫓았다.

“복만아, 기다려라! 그때의 나는 겁이 났던 것이다. 네가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복만은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살린 옹기장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옹기를 굽고 지게를 지며 살았다. 이름을 최복만에서 박복만으로 바꾸었지만 형제의 나무패는 버리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뒤 복만은 형에게 편지를 보냈다. 장두칠이 빼돌린 구휼미의 기록과 함께, 재산 일부를 굶주린 사람들에게 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받은 덕만은 밤새 고민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그는 편지를 장부 사이에 숨기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곳간을 잠갔다.

덕만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나는 그 편지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기억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복만은 지금 어디 있느냐?”

저승사자는 얼어붙은 강 건너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등이 굽은 노인이 서 있었다. 거친 무명옷에 상투를 틀었고, 손에는 형제의 나무패가 들려 있었다.

덕만은 떨리는 걸음으로 다가갔다.

“복만아.”

노인은 오래전부터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형님은 여전히 곡식 자루를 무겁게 지고 계시는군요.”

“미안하다. 내가 네 손을 놓았다.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도 찾지 않았다.”

“형님이 놓지 않은 것은 제 손이 아니라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었지요.”

덕만은 동생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 번만 용서해 다오.”

“제가 용서한다고 형님의 장부가 저절로 깨끗해지지는 않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 남았으니까요.”

복만은 형제의 나무패를 반으로 갈라 한쪽을 건넸다.

“저는 사흘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쪽 마을에서 옹기를 구우며 잘 살았으니 저 때문에 더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형님 딸 옥분이가 마지막까지 제 곁을 지켜 주었습니다.”

“옥분이가 너를 알고 있었느냐?”

“삼 년 전 우연히 저를 찾아왔습니다. 형님을 미워하면서도 늘 걱정하더군요. 제가 죽으면 이 나무패와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복만의 모습이 안개처럼 희미해졌다.

“이번에는 곡식 자루가 아니라 사람의 손을 잡으십시오.”

덕만이 손을 뻗었지만 동생은 사라지고 없었다. 손바닥에는 반쪽짜리 나무패만 남았다.

저승사자가 붉은 목패를 펼쳤다.

“산 자의 시간으로 하루를 주겠다. 그 안에 세 가지를 해야 한다. 진실을 말하고, 빼앗은 것을 돌려주고, 가족의 손을 잡아라.”

“하루가 지나면 어떻게 되느냐?”

“오늘 죽을지 십 년 뒤에 죽을지는 네가 만든 결과에 따라 정해진다.”

멀리서 덕만을 부르는 윤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얼어붙은 강에 금이 가며 현실로 돌아가는 문이 열렸다.

덕만은 반쪽 나무패를 품에 넣었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

※ 5: 빌려 온 마지막 하루, 덕만은 단 하루 동안 살아 돌아와 곳간을 열고 가족들에게 진심을 전하지만 예상치 못한 방해를 받는다

덕만은 차가운 곳간 바닥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에 얹혀 있던 바위가 굴러 떨어진 듯 거친 기침이 터졌다. 그의 손을 잡고 울던 윤이가 놀라 뒤로 넘어졌다.

“할아버지!”

만복이 덕만의 코앞에 손가락을 대었다.

“숨이 돌아왔습니다! 어르신께서 살아나셨습니다!”

성호와 연화가 황급히 덕만을 방으로 옮겼다. 의원은 맥을 짚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는데 맥이 다시 뛰고 있습니다. 오늘 밤이 고비이니 움직이지 마십시오.”

덕만은 의원의 손을 붙잡았다.

“오늘이 지나면 늦소. 만복아, 일곱 곳간의 문을 모두 열어라.”

방 안의 사람들이 말을 잃었다. 만복이 자신의 귀를 두드렸다.

“제가 늙어서 잘못 들은 것입니까?”

“곳간을 열어 마을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라. 지난해 빌려주고 아직 받지 못한 곡식도 모두 없는 셈 쳐라.”

성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정신이 온전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곳간을 열면 장사꾼들이 몰려와 모두 가져갈 것입니다.”

“각 집의 식구 수를 적고 봄까지 먹을 양만 나누어라. 장사를 하려는 자에게는 주지 마라.”

“그 많은 곡식을 공짜로 준다는 말씀입니까?”

“공짜가 아니다.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덕만은 자신이 본 과거를 처음부터 털어놓았다. 구휼미를 나르던 밤과 강에 빠진 복만, 장두칠이 준 밑천과 감춰 둔 편지까지 하나도 빼지 않았다.

성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죽었다 살아나시더니 악몽을 현실로 믿으시는군요.”

덕만은 품속을 더듬었다. 반쪽짜리 나무패가 손에 잡혔다. 저승에서 가져온 물건이 현실에도 남아 있었다.

“내 동생이 살아 있었고 사흘 전 세상을 떠났다. 옥분이가 그의 마지막을 지켰다.”

“옥분이 말을 믿으십니까? 재산을 얻으려고 꾸민 일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믿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이번에는 듣기도 전에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덕만은 만복에게 옥분을 데려오라 했다. 눈길을 쉬지 않고 달린 만복은 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 옥분과 함께 돌아왔다. 옥분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것을 보고도 방문 앞에서 한동안 들어오지 못했다.

“옥분아.”

“아버지께서 다시는 이 집에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부터 거두마. 들어오너라.”

옥분은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왔다. 품에서는 복만의 편지와 나무패의 나머지 반쪽을 꺼냈다. 두 조각을 맞추자 최덕만과 최복만이라는 이름이 나란히 완성되었다.

옥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숙부님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아버지께서 곳간 문밖에 있는 사람도 한 번쯤 바라보길 바라셨습니다.”

덕만은 편지를 받아 들었다. 동생의 마지막 문장은 짧았다.

형님, 배고픔은 사람을 겁쟁이로 만들지만, 한 그릇을 나누는 순간 다시 사람이 됩니다.

덕만의 눈물이 편지 위로 떨어졌다.

“나는 평생 배고픔에서 도망친 줄 알았는데, 곳간 안에 가두어 두고 함께 살았구나.”

그는 마당으로 나왔다. 소문을 듣고 모인 마을 사람들이 대문 밖에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덕만은 일곱 번째 곳간의 가장 큰 자물쇠 앞에 섰다.

“열쇠를 가져오너라.”

성호가 열쇠 꾸러미를 등 뒤로 감추었다.

“아버지의 몸도 재산도 지금은 제가 지켜야 합니다.”

“재산을 지킨다는 말로 네 욕심을 감추지 마라.”

“아버지께서 평생 가르치신 대로 하는 것입니다!”

성호의 외침이 마당에 울렸다. 덕만은 아들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저리된 데에는 내 몫이 크다. 곳간을 잘 지키면 좋은 아들이라 했고, 손해를 보면 어리석다고 꾸짖었다. 하지만 이제라도 다른 말을 가르치마.”

덕만은 대장간 망치를 가져오게 했다. 몇 번의 힘찬 망치질 끝에 자물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문이 열리자 황금빛 곡식 자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덕만은 첫 번째 쌀자루를 과부 한 씨 앞에 내려놓았다.

“아이와 함께 봄까지 먹으시오. 지난번에 돌려보내 미안했소.”

과부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윤이는 환하게 웃으며 또래 아이와 함께 작은 바구니에 보리를 담았다.

성호는 입술을 깨물다가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잠시 뒤 곡식창고 쪽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성호가 장부를 숨기려 등잔을 들고 비밀방에 들어갔다가 발을 헛디딘 것이었다.

“불이야!”

사람들이 물동이를 들고 뛰었다. 덕만은 연기 속에서 아들의 기침 소리를 들었다. 비밀방 앞에는 장두칠의 옛 장부와 금고가 함께 놓여 있었다.

“아버지, 금고부터 꺼내 주십시오! 집안의 땅문서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십 년 뒤의 불길이 눈앞에 겹쳐졌다. 그 미래에서 성호는 금고를 안고 나오려다 목숨을 잃었다. 덕만은 주저하지 않고 금고를 발로 밀어 불길 속에 떨어뜨렸다.

“아버지,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이번에는 곡식 자루도, 금고도 잡지 않겠다.”

덕만은 성호의 손을 힘껏 붙잡았다.

“사람부터 살린다.”

무너지는 들보를 피해 두 사람이 밖으로 굴러 나왔다. 불은 곧 마을 사람들이 나른 눈과 물로 진압되었다. 비밀방과 금고는 타버렸지만 일곱 곳간의 곡식은 대부분 무사했다.

성호는 검게 그을린 얼굴로 아버지의 손을 바라보았다.

“땅문서를 모두 잃었습니다.”

“다시 쓰면 된다.”

“장부도 타버렸습니다.”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

“아버지께서는 평생 모은 것을 하루 만에 버리셨습니다.”

덕만이 아들의 어깨를 감쌌다.

“내가 버린 것은 재산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다. 덕만은 마을 사람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새 문서를 작성했다. 옥분에게 논 세 마지기와 은전 백 냥을 주고, 곳간 두 채는 흉년마다 여는 공동 곳간으로 내놓았다. 구휼미에서 비롯된 재산의 절반은 빚으로 땅을 잃은 사람들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붓을 성호에게 건넸다.

“네 이름을 직접 적어라. 이 약속을 지킬 것인지 네가 정해라.”

성호는 오래 망설이다가 문서 아래에 이름을 썼다.

“아버지를 이해해서가 아닙니다.”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마음이 따라오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

덕만은 윤이를 불러 품에 안았다.

“할아버지께서 왜 우세요?”

“네 이름을 기억할 수 있어서 기쁘구나.”

“제 이름을 잊으신 적이 있습니까?”

“잊을 뻔했다. 그래서 지금 불러 두는 것이다. 윤아, 최윤.”

손자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서쪽 하늘로 해가 넘어갔다. 덕만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는 가족들의 손에 받쳐져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당 끝에는 저승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빌린 하루가 끝났다.”

※ 6: 후회 없이 눈을 감는 법,| 달라진 미래를 확인한 덕만은 재산이 아닌 따뜻한 기억을 남기고 편안히 저승길에 오른다

덕만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검은 문 앞에 서 있었다. 문 한쪽에는 오늘 날짜가, 다른 한쪽에는 십 년 뒤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오늘 날짜를 덮고 있던 붉은 빛은 희미해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모두 했다.”

“진실을 말했고, 빼앗은 것을 돌려주었으며, 가족의 손도 잡았다.”

“그럼 나는 십 년을 더 살 수 있는 것이냐?”

저승사자가 대답 대신 두 번째 문을 열었다.

“네가 바꾼 미래를 먼저 보아라.”

문 너머에는 봄 햇살이 내리쬐는 송현 마을이 펼쳐졌다. 최씨 집의 거대한 담장은 절반 높이로 낮아졌고, 대문에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작은 쪽문이 생겼다.

일곱 곳간 가운데 두 채에는 마을 공동 곳간이라는 나무패가 걸려 있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알아볼 수 있도록 밥그릇 그림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만복은 지팡이를 짚고 곡식 자루를 세고 있었다.

“한 집에 보리 한 말씩이오. 작년에 받은 집은 올해 형편이 나아졌으면 한 줌이라도 돌려놓으시오. 그래야 다음 사람이 먹지.”

과부 한 씨의 딸은 건강하게 자라 만복의 장부를 정리해 주고 있었다. 어린 시절 굶주렸던 아이가 이제는 곳간지기가 된 것이다.

덕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저 아이가 살아 있구나.”

“네가 건넨 곡식 한 자루가 아이의 열 해를 만들었다.”

최씨 집 대청에서는 성호가 농민들과 마주 앉아 있었다. 얼굴은 전보다 늙었지만 날카롭던 눈빛은 누그러져 있었다.

“올해 홍수 피해를 본 집은 이자를 받지 않겠습니다. 대신 내년 수확이 좋으면 공동 곳간에 조금씩 보태 주십시오.”

한 농부가 웃으며 물었다.

“최 대행수께서 손해를 보시면 장사가 되겠습니까?”

성호는 아버지가 쓰던 주판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남긴 말씀이 있습니다. 장부에는 곡식의 수는 적을 수 있어도, 그것을 먹고 산 사람의 내일은 적을 수 없다고 하셨지요.”

덕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산 사람들은 죽은 이의 말을 조금씩 아름답게 고쳐 기억한다.”

“나쁘지 않군.”

“그래서 살아 있을 때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마당 건너편에서는 옥분과 연화가 쪽진 머리에 소박한 한복을 입고 장독을 살피고 있었다. 옥분의 남편이 만든 옹기에는 곡식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이중 뚜껑이 달려 있었다. 최씨 집은 그 옹기를 팔아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재산을 일구고 있었다.

병색이 짙었던 연화도 건강을 되찾았다. 성호가 장사를 줄이고 아내의 치료와 휴식을 먼저 챙긴 덕분이었다.

“며느리가 살아 있구나.”

“이번 미래에서는 성호가 약값보다 자물쇠를 먼저 사지 않았다.”

“윤이는 어디 있느냐?”

풍경이 바뀌며 마을 서당이 나타났다. 스물여덟 살이 된 윤이는 상투를 틀고 단정한 도포를 입은 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벽에는 작은 주판과 곡식 됫박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글만 알아서는 백성을 돕기 어렵고, 셈만 알아서는 사람을 잊기 쉽다. 그러니 둘 다 배워야 한다.”

수업을 마친 윤이는 아이들을 데리고 공동 곳간으로 향했다. 곳간 앞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덕만은 그 노인의 얼굴을 보자 숨을 멈췄다.

“저 사람이…… 나냐?”

“십 년을 더 살게 된 너다.”

미래의 덕만은 예전처럼 허리춤에 열쇠를 차고 있었다. 그러나 열쇠는 단 하나뿐이었고, 공동 곳간 문은 안쪽에서 잠기지 않게 만들어져 있었다.

윤이가 다가와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오늘은 몸이 어떠십니까?”

“내 몸보다 장부가 더 늙었다. 숫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구나.”

“이제 장부는 제가 보겠습니다.”

“그래. 대신 사람 얼굴부터 살펴라. 장부는 틀리면 고칠 수 있어도 사람 마음은 닫히면 다시 열기 어렵다.”

미래의 덕만은 대청에 모인 가족을 바라보았다. 성호와 연화, 옥분 부부, 윤이와 마을 아이들이 한 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상에는 흰쌀밥보다 보리밥이 많았지만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덕만은 저승사자를 돌아보았다.

“저 미래가 반드시 오는 것이냐?”

“미래는 장부가 아니라 길이다. 오늘의 선택이 첫걸음을 바꾸었으니, 계속 같은 방향으로 걸으면 저곳에 닿을 수 있다.”

“내게 선택권이 있는 것이냐?”

저승사자가 붉은 목패를 내밀었다. 오늘 날짜는 물에 씻긴 먹처럼 지워졌고, 십 년 뒤의 날짜만 선명하게 남았다.

“최덕만, 네게 남은 수명은 십 년이다.”

덕만은 기뻐하다가 문득 저승사자의 얼굴을 살폈다.

“처음부터 내가 살아날 것을 알고 있었느냐?”

“알았다면 이 추운 길을 함께 다녔겠느냐? 저승 장부도 사람 마음만큼 복잡하다.”

“그대 이름은 무엇인가?”

저승사자는 잠시 망설였다.

“사람들은 보통 저승사자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십 년 뒤에도 그대가 나를 데리러 올 것 아니냐. 길동무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묵철이다.”

“묵철이라. 십 년 뒤에는 숭늉이라도 준비해 두겠네.”

“저승사자에게 음식을 대접하려 하지 마라. 날짜가 헷갈린다.”

검은 문이 닫히고 덕만은 다시 가족들이 둘러앉은 방에서 눈을 떴다. 윤이가 가장 먼저 소리쳤다.

“할아버지가 눈을 뜨셨어요!”

덕만은 열 해를 더 살았다. 그는 매년 첫눈이 내리면 곳간 두 채를 열었고, 봄이 오면 빌려준 곡식보다 사람들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복만의 이름으로 작은 다리를 세우고, 그 옆에는 굶주린 나그네가 쉬어 갈 주막을 마련했다.

성호에게 장사를 가르칠 때에는 이익보다 손님의 형편을 살피게 했다. 옥분에게는 뒤늦게나마 아버지 노릇을 했고, 연화에게는 집안의 큰일을 함께 의논했다. 윤이와는 저녁마다 장기를 두었다. 일부러 져 주려다가 손자에게 들켜 함께 웃는 날도 많았다.

십 년째 되는 겨울밤, 덕만은 가족들을 방으로 불렀다. 그는 두려움 없이 한 사람씩 이름을 불렀다.

“성호야.”

“예, 아버지.”

“연화야.”

“여기 있습니다.”

“옥분아.”

“아버지 손을 잡고 있습니다.”

“윤아.”

“할아버지 곁에 있습니다.”

덕만은 가족들의 손을 차례로 잡았다.

“내가 남기는 곳간과 논밭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방에서 서로의 손을 놓지 않은 일은 오래 기억해 다오.”

마당에서 작은 방울 소리가 들렸다. 검은 도포를 입은 묵철이 문밖에 서 있었다. 십 년 전과 달리 쇠사슬은 들고 있지 않았다.

“시간이 되었다.”

덕만은 머리맡의 숭늉 그릇을 가리켰다.

“약속한 숭늉이네.”

“날짜가 헷갈린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번에는 날짜를 제대로 맞추었으니 한 모금쯤 괜찮지 않겠나?”

묵철은 못 이기는 척 숭늉을 들었다. 덕만은 가족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누구의 이름도 잊지 않았고, 전하지 못한 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는 곡식 자루가 아니라 사람의 손을 잡고 가는구나.’

덕만은 편안히 눈을 감았다.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남았다.

검은 문 너머에서 복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형제는 어린 시절처럼 나란히 걸었다. 이번에는 어느 누구도 먼저 가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상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유튜브 엔딩멘트

죽음 앞에서 덕만이 되찾은 것은 재산도, 잃어버린 젊음도 아니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진심을 말하고, 잘못을 바로잡으며,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을 기회였지요. 오늘 미뤄 둔 감사와 사과가 있다면 더 늦기 전에 전해 보세요. 이야기가 마음에 남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로 함께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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