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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사자를 통해 보게 본 미래

황금 인생 21 2026. 8. 26.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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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사자를 통해 보게 본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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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평생 피눈물로 모은 재산만이 험한 세상에서 자식들을 지켜줄 유일한 방패라 굳게 믿었던 늙은 곡물상.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서 저승사자를 따라간 그는 자신이 죽고 난 뒤, 그놈의 곳간 때문에 원수가 되어버린 가족과 쓸쓸히 버려진 자신의 무덤을 마주하게 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의 미래, 그런데 그곳에는 아직 쓰이지 않은 마지막 하루가 남아 있었습니다. 과연 그는 엇갈린 운명을 되돌릴 수 있을까요?

※ 1: 잠기지 않은 마지막 곳간, 흉년을 걱정해 곳간을 지키던 곡물상 최덕만은 갑작스럽게 쓰러져 저승사자를 만난다.

조선 후기, 한양에서 하루 길쯤 떨어진 송현 고을에는 최덕만이라는 늙은 곡물상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집 뒤편에는 튼튼한 기와를 얹은 곳간이 무려 일곱 채나 늘어서 있었지요. 가을이면 곡식이 가득 들어찼고, 겨울에도 쥐 새끼 한 마리 숨어들 틈 없이 단단하게 관리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덕만의 으리으리한 곳간을 부러워하면서도, 그가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이 지독하게 재산을 모았는지 알기에 함부로 칭송하지는 않았습니다.

새벽안개가 미처 걷히기도 전인 이른 아침, 덕만은 일어나자마자 곳간의 육중한 자물쇠부터 꼼꼼히 살폈습니다. 차가운 열쇠 꾸러미가 허리춤에서 짤랑거릴 때마다 그는 비로소 깊은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뒤를 따르던 늙은 하인 만복이 하품을 삼키며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어르신, 어젯밤에도 주무시기 전에 세 번이나 샅샅이 살피시지 않았습니까요. 쌀가마에 제 발로 다리가 달린 것도 아닐진대, 무거운 것들이 밤새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네 이놈, 만복아. 쌀에는 다리가 없어도 사람 손에는 다리가 달린 법이야. 가난한 해에는 무쇠 자물쇠보다 사람의 마음이 먼저 헐거워지는 법이다. 방심하는 찰나에 평생 모은 재산이 빈털터리가 되니, 내 어찌 편히 눈을 감겠느냐."

덕만은 젊은 시절 썩은 나무 지게 하나를 짊어지고 맨몸으로 험한 장사판에 뛰어들었습니다. 흙 묻은 낟알을 헐값에 사서 말리고, 벌레 먹은 곡식을 밤새 골라내어 팔며 피눈물로 일군 재산이었습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일찍 찾아왔고, 지난해 대홍수로 농사가 엉망이었던 탓에 마을마다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차가운 삭풍이 부는 아침, 낡고 해진 솜저고리를 입은 과부 한 씨가 피골이 상접한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대감마님, 제발 보리 반 되만이라도 꾸어 주십시오. 봄이 오면 밭을 매고 품을 팔아 기필코 두 배로 갚겠습니다. 이 어린것이 사흘을 꼬박 굶어 숨이 넘어갈 지경입니다."

마루 끝에 꼿꼿하게 앉은 덕만은 두꺼운 장부에서 눈길 한 번 떼지 않은 채 차갑게 내뱉었습니다.

"지난달에도 네 시어미 미음을 쑨다며 좁쌀을 반 되나 꾸어 가지 않았느냐. 갚을 능력도 없는 주제에 또 빚을 지려 하다니 염치가 없구나. 내가 젊은 시절 눈밭을 맨발로 헤매며 썩은 나무껍질을 씹어 삼킬 때, 세상 그 누구도 내게 곡식 한 줌 내어주지 않았다. 내 피땀으로 일군 재산이거늘, 썩 물러가라!"

그때, 안방에서 글공부를 하던 여덟 살 난 손자 윤이가 마당으로 뛰어나와 덕만의 옷자락에 매달렸습니다.

"할아버지! 우리 집 곳간에는 쌀이 썩어 넘치는데, 저 가엾은 아이에게 조금만 나누어 주면 안 됩니까? 곳간 하나만 열어도 온 마을 사람들이 이 추운 겨울을 날 수 있잖아요."

"이 철없는 녀석아! 곳간을 한 번 열어 베풀기 시작하면, 바닥이 드러나는 것은 눈 깜짝할 새다. 세상이 나를 돕지 않았으니, 나 또한 세상을 도울 의무가 없다!"

매몰찬 호령에 과부 모녀는 눈물을 훔치며 나섰고, 손자 윤이 역시 큰 상처를 받은 얼굴로 입을 굳게 닫아버렸습니다.

그날 밤, 휑한 마음을 달래려 곳간을 순찰하던 덕만은 일곱 번째 곳간 문이 미세하게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등잔불을 들고 안으로 들어선 그의 눈앞에, 산처럼 쌓인 쌀가마 사이에 시커먼 도포를 입은 사내가 기괴하게 서 있었습니다. 챙이 넓은 갓 아래로 창백한 얼굴과 핏빛 입술을 한 저승사자 묵철이었습니다.

"너... 너는 설마 귀신이냐! 내 곳간에서 당장 썩 나가지 못할까!"

"참으로 딱한 노인이로군. 평생 쌀가마니만 끌어안고 살더니, 저승으로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곡식 타령이냐. 나는 사람의 혼을 거두러 온 저승사자다. 최덕만, 네 수명이 다하여 데리러 왔으니 순순히 따라나서라."

덕만은 온몸을 덜덜 떨며 아직 장부를 다 정리하지도 못했고 아들에게 열쇠도 넘겨주지 못했다며 발악했습니다. 그 순간, 심장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터져 나왔고, 그는 그대로 쌀가마 위로 고꾸라졌습니다. 바닥에는 눈을 부릅뜬 채 쓰러진 자신의 육신이 보였고, 가족들이 달려와 오열하고 있었으나 아무도 영혼이 된 덕만을 보지 못했습니다. 묵철이 덕만의 영혼을 향해 붉은 목패를 내밀었습니다.

"네 장부에는 특이하게도 죽은 날짜가 두 개 적혀 있다. 하나는 바로 오늘이고, 다른 하나는 십 년 뒤의 날짜지. 지금부터 저 문 너머로 들어가 네가 없는 세상의 미래를 보여주마. 그 미래를 보고도 지금과 같은 삶을 고집한다면 너는 오늘 이대로 저승으로 갈 것이고, 네 마음이 바뀐다면 십 년의 세월을 더 얻게 될 것이다. 자, 따라오너라."

※ 2: 죽은 뒤에도 계속되는 장부, 저승길에 오른 덕만은 자신의 장례식에서 엇갈린 진심과 재산을 두고 다투는 가족을 목격한다.

저승사자 묵철의 손짓을 따라 서늘한 검은 문을 넘어서자, 칠흑 같던 겨울밤은 순식간에 잿빛 구름이 낀 스산한 아침으로 변했습니다. 덕만의 기와집 대문에는 흰 천이 걸렸고, 마당에는 상여꾼들과 조문객들이 어수선하게 모여 있었습니다. 마루 밑에서는 곡비들의 곡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덕만의 귀에는 살아생전 넘기던 장부의 종이 소리보다 공허하게만 들렸습니다.

"이게 정녕 내 장례식이라는 말이냐? 어찌 곡소리 하나하나에 진심이라곤 묻어나지 않는 것 같으냐."

빈소 안에서는 아들 성호가 영정 앞에서 기계적으로 곡을 하고 있었고, 며느리 연화는 손님상 음식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오직 여덟 살 난 어린 손자 윤이만이 핏기가 가신 얼굴로 엎드려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마당 한쪽 구석에 모인 동네 사람들은 음식상을 앞에 두고 수군거렸습니다.

"곳간이 일곱 채나 된다더니, 성호 저놈이 하루아침에 팔자를 고쳤구먼. 평생 굶주린 이웃 피를 빨아먹고 모은 재산인데, 적선 한 번 베풀지 않고 죽었으니 저승길이 꽤나 고통스러울 게야."

덕만이 흉흉한 소문에 흠칫 놀라 뒷걸음칠 때, 장작더미 옆에서 홀로 서럽게 눈물을 훔치고 있는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삼 년 전, 가난한 옹기장이와 혼인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다 쫓겨났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옥분이었습니다. 덕만이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지만 영혼의 손은 허공을 갈랐습니다. 그때, 상복을 입은 성호가 다가와 옥분의 앞을 차갑게 가로막았습니다.

"네가 무슨 낯짝으로 여길 찾아왔느냐. 가난한 놈을 따라가 집안을 버렸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유산이라도 한 몫 챙겨보려고 눈물을 짜내는 것이냐!"

"오라버니! 어찌 그런 모진 말씀을 하십니까! 재산 한 푼 달라는 말을 입에 올린 적이 없습니다. 비록 불효를 저질러 쫓겨났으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술 한 잔 올리고 절이나마 올리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는 네 이름 석 자만 나와도 노여워하셨다. 당장 이 집에서 나가거라!"

성호의 매몰찬 축객령에 옥분은 결국 빈소를 향해 멀리서 엎드려 절을 올리고는 오열하며 돌아서야만 했습니다. 덕만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 가슴을 치며 절규했습니다.

"이 녀석아! 안채 벽장 깊숙한 곳에 옥분이가 시집갈 때 주려고 몰래 모아둔 비단과 묵직한 은전이 들어 있다! 옥분아, 가지 마라!"

하지만 산 자의 귀에는 망자의 외침이 닿지 않았습니다. 묵철이 차가운 눈빛으로 낮게 속삭였습니다.

"아무리 가슴속에 사랑을 품었다 한들,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은 진심은 유언이 될 수 없다. 네가 평생 자식에게 보여준 것은 돈을 향한 집착과 매정한 얼굴뿐이었거늘, 아들이 어찌 네 숨겨진 마음을 헤아리겠느냐."

시간이 며칠 뒤의 밤으로 뛰어넘어갔습니다. 성호는 상복을 벗기도 전에 안방에 틀어박혀 곳간 열쇠 꾸러미와 장부를 탐욕스럽게 세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안채 벽장 구석에서 덕만이 몰래 숨겨두었던 옻칠한 함을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는 옥분에게 주려고 모아 둔 귀한 비단과 은전, 그리고 흉년이 들면 곳간 하나를 열어 가난한 이웃에게 곡식을 나누어주라는 덕만의 마지막 유언 편지가 있었습니다. 덕만은 자신이 그리 매정한 아비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아들이 알아주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성호의 표정은 차갑게 식어갔습니다. 그는 등잔불을 끌어당기더니, 덕만의 유언 편지를 불꽃에 가져다 댔습니다.

"안 돼! 성호야, 무슨 짓이냐! 그것은 내 진심이 담긴 마지막 부탁이다!"

종이는 무심한 불꽃 속에서 검은 재로 타들어 갔습니다. 성호는 섬뜩할 정도로 차분하게 읊조렸습니다.

"아버지. 평생 피눈물로 모은 이 거대한 재산을 어찌 가난한 자들에게 헛되이 흩뿌리란 말씀이십니까. 곳간을 한 번 열면 바닥이 드러나는 것은 순식간이라 제게 가르치신 분은 바로 아버지 아니셨습니까. 저는 아버지가 남기신 이 재산을 아버지의 방식대로, 아니 그보다 더 지독하게 지켜내어 집안을 키울 것입니다."

자신이 손자 윤이에게 했던 그 지독하고 차가운 말이, 아들 성호의 입을 거쳐 무서운 독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평생 바쳐 지키려 했던 곳간이, 결국 괴물을 낳는 저주의 인큐베이터였음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 3: 내가 없는 집의 열 해, 십 년 뒤의 미래에서 철저히 무너진 가족과 버려진 무덤, 그리고 자신을 원망하는 손자를 본다.

타오르던 유언장의 재가 바람에 흩날리며, 덕만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십 년 뒤의 겨울로 바뀌었습니다.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골목길, 열여덟 살의 청년이 된 손자 윤이가 거친 숨을 헐떡이며 쫓기듯 눈밭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맑은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앙상한 어깨와 깊은 절망만이 가득했습니다. 윤이의 품에는 불에 그을린 두꺼운 장부 한 권이 소중하게 안겨 있었습니다.

"최윤 저 패륜아 놈을 잡아라! 제 아비의 곳간에 불을 지르고 재산이 적힌 장부를 훔쳐 달아난 놈이다!"

윤이는 폐가에 숨어들어 품에 안은 장부를 펼쳤습니다. 그 안에는 성호가 십 년 동안 가난한 농부들에게 곡식을 고리대로 빌려주고 착취한 기록이 빼곡했습니다. 흉년에 빚을 갚지 못한 이웃들의 논밭과 소를 빼앗고 노비로 전락시킨 만행들이었습니다. 성호는 아버지 덕만보다 훨씬 더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 같은 장사꾼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풍경이 다시 일렁이며, 으리으리하게 덩치를 키운 최씨 집안의 거대한 대청마루가 나타났습니다. 집은 화려해졌지만 사람의 따뜻한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마당에는 곡식을 꾸러 온 농민들이 벌벌 떨며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있었습니다.

"어르신, 제발 보리 한 섬만 꾸어 주시고 기한을 한 달만 늦춰 주십시오. 제 여식이 몹쓸 병에 걸려 약값을 마련하느라 그리되었습니다요."

하지만 비단옷을 휘감은 성호는 주판을 튕기며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습니다.

"약속한 기일을 넘겼으니 담보로 잡힌 밭을 내놓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네 딸년이 죽어가는 사정까지 내가 다 헤아려준다면 상단을 어찌 이끌어 간단 말이냐. 당장 밭문서를 내놓고 꺼지거라."

그 곁에서 기침을 하며 기둥을 붙잡고 선 며느리 연화의 얼굴은 잿빛이었고, 손수건에는 붉은 핏자국이 선명했습니다.

"여보, 제발 윤이를 찾아 장정들을 멈추어 주세요. 곳간에 불을 지른 것은 야반도주하려던 소작농의 짓이라는 것을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어찌 집안이 망하는 것이 두려워 하나뿐인 아들에게 방화범 누명을 씌워 쫓아낸단 말입니까!"

"시끄럽소! 그놈이 장부를 관아에 넘긴다면 우리 집안은 하루아침에 끝장이오. 당신이 쓸데없는 동정심을 가르쳤기에 그놈이 저 모양이 된 것이오!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진작에 저런 배은망덕한 놈은 내쫓았을 것이오!"

덕만은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았습니다. 성호는 병든 아내의 약값조차 아끼며 오직 곳간의 자물쇠를 늘리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이 맹신했던 '곳간이 살아야 가족이 산다'는 철학이, 참혹한 지옥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마을 풍경이 또다시 변하며 스산한 산기슭의 공동묘지가 나타났습니다. 잡초가 무성하고 허물어진 봉분 하나. 비석에는 최덕만의 이름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제기에는 썩은 낙엽과 진흙만이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그 초라한 무덤 앞으로, 추위에 떨며 도망치던 윤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윤이는 할아버지의 무너진 봉분 앞의 눈을 치워내며 작은 잔에 술을 따랐습니다. 덕만이 떨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손자의 곁에 앉았습니다.

"할아버지. 저는 어릴 적,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하던 할아버지가 참으로 미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할아버지보다 더 끔찍한 괴물이 되어 사람들의 피눈물을 쥐어짜는 모습을 보고 나니 알겠습니다. 아버지는 그저 할아버지의 방식대로 재산을 불려, 인정받고 싶었던 가엾은 괴물일 뿐이었습니다."

윤이는 불에 그을린 장부를 봉분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저는 이 장부를 관아에 넘기고 모든 진실을 밝힐 것입니다. 우리 집안의 재산을 모두 잃더라도, 아버지가 빼앗은 논밭은 억울한 백성들에게 다시 돌려주겠습니다. 저는 나이를 먹어 사람의 눈물보다 쌀가마니를 먼저 보는 괴물이 될까 두렵습니다. 영원히 이 끔찍한 최씨 가문의 이름을 버리고 떠날 것입니다."

윤이가 큰절을 올리고 산을 내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덕만은 짐승처럼 오열했습니다. 그때, 산 아래 최씨 집 방향에서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포졸들이 들이닥친다는 소식에 이성을 잃은 성호가 증거를 없애려 비밀 곳간에 불을 놓았다가 저택 전체를 집어삼킨 것입니다. 시뻘건 불길 속에서 수만 가마니의 곡식이 잿더미로 변해갔고, 금고를 끌어안고 나오려던 성호는 무너지는 들보에 깔려 끔찍한 비명을 질렀습니다.

"안 돼! 성호야! 내 아들아!"

덕만이 미친 듯이 산 아래로 달려가려 했지만, 묵철의 무거운 쇠사슬이 그의 앞을 팽팽하게 막아섰습니다.

"이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너희 가문의 끔찍한 미래다. 네가 평생 숭배했던 거대한 재산이 결국 네 자식들을 괴물로 만들고 집안을 불태워버리는 땔감이 된 것이다. 만약 네가 숨겨진 원한의 매듭을 풀지 못하고 오늘 죽는다면, 이 지옥 같은 미래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네 가족을 덮칠 것이다."

※ 4: 과거에서 지워 버린 한 사람, 외면했던 동생의 죽음과 숨겨진 곡식 장부의 추악한 진실을 마주하다.

거세게 타오르는 최씨 집안의 시뻘건 불길과, 무너지는 들보 아래서 처절하게 울부짖는 아들 성호의 비명이 덕만의 귓전을 미친 듯이 때렸습니다.

"사자 양반! 제발 나를 살려주시오! 내가 평생 피눈물 흘리며 저 재산을 모은 것은 자식들을 저 지옥 불에 태워 죽이기 위함이 아니었소! 제발 나를 현실로 돌려보내 주시오! 당장이라도 저 저주받은 곳간을 내 손으로 부수고 아들을 살려내겠소!"

덕만이 얼음 바닥에 엎드려 애원하자, 묵철은 붉은 목패를 뒤집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네가 정녕 미래를 바꾸고 살아 돌아가고 싶다면, 네가 굳게 잠가버린 곳간 문이 아니라 네 스스로 지워버린 기억 속 과거의 문부터 열어야 한다. 모든 비극의 씨앗은 네가 일곱 곳간을 채우기 훨씬 이전, 네가 열일곱 살이던 그해 겨울 강가에서 시작되었느니라."

덕만의 숨이 턱 멎었습니다. 열일곱 살의 겨울 강가. 그것은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고 스스로의 기억 속에서도 지워버리려 애썼던 가장 깊고 어두운 트라우마였습니다.

"내 동생 복만이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냐? 그 아이는 무리하게 얼어붙은 강을 건너려다 빠져 죽었다! 그 가엾은 죽음이 내 재산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네가 정녕 그렇게 기억하고 있단 말이냐? 눈으로 보고도 외면한 진실을 스스로 속이며 평생을 살아온 끔찍한 위선을 똑똑히 보여주마."

묵철이 쇠사슬을 내리치자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꽁꽁 언 강가로 변했습니다. 열일곱 살의 덕만과 열다섯 살의 동생 복만이 자신들의 몸집보다 거대한 곡식 자루를 등에 짊어진 채 위태롭게 서 있었습니다. 강 건너편에서는 악명 높은 곡물상 장두칠이 매섭게 등불을 흔들며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습니다.

"이 느려 터진 놈들아! 날이 밝아 순라군이 깔리기 전에 이 창고로 모두 옮겨야 한다!"

어린 복만이 발밑에서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나는 얇은 얼음판을 내려다보며 사색이 되어 형 덕만의 옷자락을 잡았습니다.

"형님, 돌아가요! 얼음이 우는 소리가 납니다. 빠져 죽을 것 같아요!"

"안 돼! 이 자루 두 개만 옮기면 장두칠이 쌀 한 말을 준다고 했다! 사흘째 굶어 피를 토하시는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놔둘 작정이냐! 내 발자국만 밟고 따라오너라!"

어린 덕만이 무거운 곡식 자루를 짊어진 채 먼저 얼음 위로 발을 내디뎠습니다. 현재의 덕만은 그 광경을 보며 경악했습니다. 평생 복만이 욕심을 부려 먼저 건너려다 죽었다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살아왔지만, 진실은 자신이 앞장서서 동생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쩍 하는 파열음과 함께 앞서가던 덕만의 발밑 얼음이 푹 꺼졌습니다. 복만이 기겁하며 등에 멘 자루를 내던지고 몸을 날려 형 덕만의 팔을 간신히 붙잡았습니다. 두 사람이 얼음판 위에서 사투를 벌이는 순간, 장두칠이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곡식 자루부터 꽉 잡아라! 쌀자루 하나가 너희 목숨 열 개보다 비싸단 말이다! 곡식을 강물에 빠뜨리면 너희 어미까지 가만두지 않겠다!"

물에 빠진 곡식 자루가 거센 강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려 하자, 어린 덕만은 살아야 한다는 끔찍한 강박에 사로잡혀 본능적으로 곡식 자루의 밧줄을 꽉 움켜쥐었습니다. 그 반동으로 복만의 발밑 얼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형님! 살려주세요! 손이 미끄러워요!"

복만이 필사적으로 형 덕만의 소매를 붙잡고 매달렸습니다. 한쪽 손에는 동생 복만이, 다른 한쪽 손에는 쌀자루가 매달려 어린 덕만의 양팔이 찢어질 듯 떨렸습니다.

"형님! 제발 자루를 놓고 두 손으로 저를 당겨주세요!"

"이것을 놓으면 우리 셋 다 굶어 죽는다! 조금만 더 버텨봐라!"

어린 덕만은 끝내 쌀자루를 놓지 못한 채 한 손으로만 동생을 끌어올리려 발버둥을 쳤습니다. 하지만 얼음물이 묻은 소매는 미끄러졌고, 복만의 앙상한 손가락이 하나씩 풀려나갔습니다.

"형님...!"

복만은 시퍼런 검은 강물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동생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어린 덕만의 두 손은 결국 쌀자루를 물 위로 기어이 끌어올리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덕만은 얼음판 위에 주저앉아 오열을 토해냈습니다.

"내가 동생을 죽였다! 쌀자루 하나에 눈이 멀어 내 아우의 손을 놓아버렸다! 나를 죽여라, 사자 양반!"

"네가 사람보다 곡식을 선택한 대가로 얻어낸 첫 씨앗이 일곱 곳간이라는 흉측한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무대가 장두칠의 창고로 바뀌었습니다. 동생을 잃고 넋이 나간 어린 덕만 앞에 장두칠이 묵직한 엽전 꾸러미를 던져주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밤 나른 것이 관아에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풀려던 '구휼미' 장물이라는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넌 의금부에 끌려가 목이 달아날 것이다."

"구휼미라니요? 백성들을 살릴 쌀을 훔쳤단 말입니까?"

"그래. 하지만 너도 그 대가로 쌀자루를 끌어올리지 않았느냐. 이 돈으로 시장 구석에서 좌판이라도 시작해라. 굶어 죽는 것보다는 도둑놈으로 살아남는 게 낫지 않겠느냐."

어린 덕만은 눈물을 흘리며 엽전 꾸러미를 품에 안았습니다.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은 구휼미 장물이 그의 화려한 부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묵철은 마지막으로 가장 잔인한 진실을 보여주었습니다. 강물에 떠내려가 죽은 줄만 알았던 복만이 하류 나루터에서 늙은 옹기장이에게 구출되어 목숨을 건졌던 것입니다. 이듬해 봄, 야윈 모습으로 복만이 형을 찾기 위해 장두칠의 창고를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창고 문밖에서 복만이 들은 것은 덕만과 장두칠의 대화였습니다.

"복만이가 살아 돌아와 구휼미 이야기를 꺼내면, 네 장사도 끝장이고 내 목도 날아간다. 어찌할 텐가?"

"......그 아이가 다시 나타난다면 원망하던 그 눈빛을 보고는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동생이 영원히 죽은 사람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문밖에서 형의 말을 들은 복만은, 낡은 나무패를 꽉 쥔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아니다! 그때의 나는 감옥에 갈까 봐 미친 듯이 겁이 났던 것이다! 복만아, 가지 마라!"

복만은 이름을 바꾸고 남쪽 마을에서 옹기장이로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늙은 복만이 마지막으로 형 덕만에게 훔친 구휼미의 진실을 밝히고 속죄하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힌 덕만은 그 편지를 비밀 금고에 숨기고 진실을 묵살해버렸습니다.

"이 모든 비극은 나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동생을 버리고, 오직 곡식 자루만 껴안고 평생을 벌벌 떨며 살아온 탓이다."

덕만이 얼음 바닥에 엎드려 피눈물을 흘리자, 묵철이 붉은 목패를 펼치며 서늘하게 선언했습니다.

"네 수명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 네게 산 자의 시간으로 단 '하루'의 시간을 주겠다. 그 하루 동안 네가 과거의 추악한 진실을 밝히고 빼앗은 것을 돌려주며 흩어진 가족의 손을 다시 맞잡는다면 너의 미래는 십 년 연장될 것이다. 실패한다면 내일 당장 지옥 불에 떨어지고 네 가족은 방금 본 잿더미의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얼어붙은 강이 쩍 갈라지며, 덕만의 영혼은 어둠 속으로 강하게 빨려 들어갔습니다.

※ 5: 빌려 온 마지막 하루, 살아 돌아온 덕만이 곳간을 열고 진심을 전하려 하나 예상치 못한 방해를 받다.

"허억!"

덕만은 막혔던 숨이 터지며 차가운 곳간 바닥에서 눈을 번쩍 떴습니다. 굳은 손을 붙잡고 목 놓아 울던 어린 윤이가 화들짝 놀랐습니다.

"할아버지!"

넋이 나가 있던 늙은 만복이 기겁을 하며 펄쩍 뛰어 소리쳤습니다.

"숨이 돌아왔습니다요! 돌아가신 줄 알았던 어르신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급히 달려온 의원이 덕만의 맥을 짚어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심장이 멎기 직전이었는데 다시 힘차게 뛰고 있습니다. 하늘이 도우셨습니다.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덕만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뿐이었습니다.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만복아! 당장 마당으로 나가 내 일곱 곳간의 문을 모조리 활짝 열어라!"

가족들과 의원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만복이 떨리는 손으로 귀를 매만졌습니다.

"어르신? 제가 놀라 귀가 먹은 모양입니다. 곳간의 문을 잠그라 하신 겁니까?"

"일곱 곳간의 빗장을 모두 부수고 활짝 열어라! 내일부터 고을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쌀과 보리를 아낌없이 나누어주어라! 고리대로 빌려준 묵은 빚의 장부도 모조리 불태워라!"

아들 성호가 사색이 되어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버지! 헛것을 보신 모양입니다! 제정신이 아니십니다! 아버지께서 평생 피눈물로 지켜오신 가문의 명줄을 열면 거간꾼들이 몰려와 집안을 거덜 낼 것입니다!"

"이놈아! 그 재산이 본디 내 것이 아니었다! 더러운 재산을 지키려다 네가 십 년 뒤 잿더미 속에서 비참하게 타죽는 꼴을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왔단 말이다!"

덕만은 저승사자와 함께 돌아보았던 과거의 끔찍한 진실을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구휼미를 훔치다 강물에 빠진 동생 복만의 손을 놓아버린 일, 더러운 엽전으로 장사를 시작한 일, 살아 돌아온 동생을 모른 척 외면한 이기심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성호는 아버지의 회개를 거짓된 망상으로 치부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음의 문턱에서 악몽을 현실로 착각하시는 모양입니다. 저는 장자로서 가문을 망치는 것을 절대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여봐라! 아버님께서 심신이 미약하시니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게 막아라!"

성호가 밖으로 나가버리자, 며느리 연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님... 아버님의 뼈저린 참회가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아가씨가 쫓겨나기 전날 밤, 제게 눈물로 건네주고 간 작은 나무패가 하나 있습니다."

연화가 꺼낸 낡은 비단 주머니에는 덕만이 저승에서 보았던 동생 복만의 '형제 나무패' 반쪽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가씨가 혼인하여 떠난 곳이 숙부님이 숨어 사시던 남쪽 마을이었습니다. 숙부님께서 눈을 감으시며 이 나무패를 아버님께 전해달라 유언하셨다고 합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아버님을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덕만은 나무패를 부여잡고 오열했습니다. 참회의 눈물을 닦아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연화야, 당장 사람을 풀어 옥분이를 이 집으로 불러오너라. 만복아, 나를 부축하여 곳간으로 가자!"

덕만은 일곱 번째 곳간의 가장 거대한 무쇠 자물쇠 앞에 섰습니다.

"만복아, 쇠망치를 가져오너라!"

망치를 치켜들려는 순간, 성호가 장정들을 대동하고 나타나 가로막았습니다. 성호의 품에는 곡식 장부와 비밀 금고 열쇠가 들려 있었습니다.

"아버지! 그 망치를 내려놓으십시오! 저는 이 재산의 절반을 챙겨 이 집을 떠날 것입니다!"

성호가 장부와 땅문서를 빼돌리기 위해 곳간 안쪽의 비밀방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 순간, 성호가 발을 헛디디며 들고 있던 등잔불이 마른 짚단 위로 굴러떨어졌습니다. 시뻘건 불길이 곳간 벽면을 타고 맹렬히 치솟아 올랐습니다.

덕만의 눈앞에 십 년 뒤 미래에서 보았던 끔찍한 잿더미의 환영이 겹쳐 보였습니다. 성호는 비밀 금고와 장부를 끌어안고 밖으로 나오려 발버둥 쳤습니다.

"이 장부와 땅문서가 없으면 우리 집안은 끝장이다!"

들보가 무너져 내리려는 찰나, 덕만은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성호야! 금고를 당장 버려라!"

덕만은 성호가 끌어안고 있던 금고를 발로 걷어차 불길 깊숙한 곳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아버지! 무슨 짓입니까! 우리 전 재산이...!"

"껍데기에 불과한 재산보다 살아 숨 쉬는 내 자식이 먼저다!"

덕만은 성호의 옷자락을 쥐고 밖으로 뒹굴었습니다. 그들이 문지방을 넘는 순간 거대한 들보가 무너져 내려 비밀 금고와 장부를 잿더미로 덮어버렸습니다.

새카맣게 그을린 성호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습니다.

"땅문서도 빚 장부도 모두 타버렸습니다... 평생 모은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덕만은 아들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습니다.

"괜찮다, 성호야. 내가 영원히 불태워 버린 것은 재산이 아니라 두려움과 욕심이다. 장부가 탔으면 다시 쓰면 되고, 재산은 처음부터 다시 일구면 그만이다. 네가 무사히 살아있으니 천하를 다 얻은 기분이다."

그 따뜻한 말 한마디에 성호는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오후 기적처럼 남은 여섯 채의 곳간이 열렸고, 가난한 자들에게 조건 없이 곡식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옥분 부부와도 뜨거운 화해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덕만은 새로운 가족 문서를 작성하여 재산의 절반은 이웃에게 돌려주고 '공동 곳간'을 운영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성호도 기꺼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습니다.

서쪽 하늘로 붉은 해가 넘어가며 덕만에게 허락된 마지막 하루의 시간이 저물어가고 있었습니다. 덕만은 손자 윤이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습니다.

"윤아. 내 강아지, 최윤. 우리 손자 이름 참으로 듬직하고 예쁘구나."

그 순간, 대문 밖에서 차가운 쇠사슬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승사자 묵철이 조용히 마당에 들어섰습니다. 덕만은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가족들의 손을 꽉 잡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 6: 후회 없이 눈을 감는 법, 달라진 미래를 확인하고 따뜻한 기억을 남긴 채 편안히 저승길에 오르다.

"나에게 약속된 하루가 모두 끝난 모양이군."

덕만은 가족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마당 구석으로 걸어 나가 저승사자 묵철을 향해 미소를 지었습니다. 묵철의 손에는 더 이상 무서운 쇠사슬이 쥐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모두 끝이 났다. 억울하게 빼앗은 것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돌려주었고, 얼어붙은 가족의 손을 다시 따뜻하게 맞잡았다."

"그럼 나는 이제 죽어 지옥으로 가는 것이냐? 아니면 십 년의 세월을 더 살게 되는 것이냐?"

묵철은 붉은 목패를 펼쳐 보였습니다. 핏빛 같던 '오늘 날짜'는 지워져 있었고, '십 년 뒤'의 날짜만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네가 끊어졌던 핏줄의 매듭을 이었고 탐욕의 미래를 희망의 길로 바꾸어 놓았다. 저승의 장부 또한 네가 만든 새로운 길을 따라 스스로 고쳐 쓴 것이다. 다시 한번 네가 새롭게 바꾼 십 년 뒤의 미래를 들여다볼 차례다."

허공이 일렁이더니 봄 햇살이 내리쬐는 십 년 뒤의 송현 마을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최씨 집의 거대한 저택 담장은 절반 높이로 다정하게 낮아져 있었고, 육중한 대문 옆에는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작고 앙증맞은 쪽문이 생겨 있었습니다. 일곱 곳간 가운데 가장 볕이 잘 드는 두 채에는 '마을 공동 곳간'이라는 정감 넘치는 나무패가 걸려 있었습니다. 나무패 옆에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고봉밥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늙은 하인 만복이 곳간 앞에서 곡식 자루를 세고 있었고, 십 년 전 쫓겨났던 과부 한 씨의 딸이 어엿하게 자라 곳간지기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대청마루에서는 성호가 가난한 소작농들과 빙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성호의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지만, 과거의 독사 같은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온화한 상인의 품격이 배어 있었습니다.

"올해는 홍수 피해가 극심하니 상단에서 내어드린 빚의 이자는 전면 탕감하겠습니다. 대신 내년에 수확이 풍성해지면 마을 공동 곳간에 조금씩만 보태 주십시오."

장독대에서는 딸 옥분과 며느리 연화가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옥분의 남편이 구워낸 곡식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옹기를 팔아 최씨 집안은 새로운 방식으로 재산을 일구고 있었습니다. 병약했던 연화 역시 건강한 얼굴을 되찾았습니다.

마을 한복판 작고 소박한 서당에서는 이십 대 청년으로 자란 윤이가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천자문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서당 벽면에는 붓과 주판, 곡식 됫박이 나란히 걸려 있었습니다.

윤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 공동 곳간 앞 양지바른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따사로운 햇볕을 쬐며 졸고 있었습니다. 덕만은 그 평화로운 노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숨을 멈추었습니다.

"저 평온한 얼굴을 한 노인이 정녕 십 년 뒤의 나란 말이냐?"

"그렇다. 저 모습이 십 년의 세월을 존경 속에 넉넉하게 살아낸 네 진짜 미래다."

미래의 덕만은 허리춤에 작고 앙증맞은 열쇠 단 하나만을 여유롭게 차고 있었습니다. 공동 곳간의 문은 안쪽에서 빗장을 걸어 잠글 수 없도록 개조되어 있었습니다.

미래의 덕만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대청에 모여 앉은 가족들을 온화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성호와 연화, 옥분 부부, 윤이와 마을 아이들이 큰 밥상에 빙 둘러앉아 왁자지껄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덕만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묵철을 돌아보았습니다.

"네가 죽음의 문턱에서 회개하고 내디딘 그 하루의 첫걸음이 저 아름다운 곳으로 향하는 물길을 연 것이다."

눈앞의 환영이 걷히고, 덕만은 다시 자신의 숨소리가 들리는 현실의 안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덕만은 십 년의 세월을 존경을 받으며 넉넉하게 살아냈습니다. 매년 첫눈이 내리면 굶주린 자들을 위해 곳간을 열었고, 동생 복만의 이름으로 튼튼한 돌다리와 따뜻한 주막을 지어 베풀었습니다.

약속된 십 년째 되는 고요한 겨울밤. 덕만은 누워서 가족들을 방으로 불렀습니다.

"내가 평생 바쳐 모았던 재산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밤 서로 원망하지 않고 따뜻하게 맞잡은 손의 체온만큼은 오래도록 남아있기를 바란다. 나는 이제 여한이 없다."

마당 밖에서 낮고 은은한 방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검은 도포를 입은 묵철이 서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었다. 가자꾸나."

덕만은 머리맡에 놓인 따뜻한 숭늉 한 그릇을 묵철을 향해 가리켰습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약속했던 따뜻한 숭늉이네만."

묵철은 흠칫 놀라며 못 이기는 척 숭늉을 들어 목을 축였습니다. 덕만은 가족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바라보고, 평안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띤 채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들 듯 두 눈을 감았습니다.

검은 문 너머 저승길 입구에는 오래전 자신이 손을 놓아버렸던 사랑하는 동생 복만이 환한 미소로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두 형제는 어린 시절의 해맑은 모습으로 돌아가 다시는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굳게 맞잡은 채 빛을 향해 평온하게 걸어갔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시청자 여러분, 오늘 들려드린 <저승사자를 통해 본 미래> 어떠셨나요? 눈앞의 물질에 집착하다 곁에 있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 입히곤 하는 우리에게, 진짜 소중한 것이 사람의 체온임을 깨달은 덕만의 이야기가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오늘 밤은 사랑하는 가족의 손을 한 번 더 꽉 잡아주는 따뜻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야기가 감동적이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따뜻한 댓글 잊지 마시고요. 다음 시간에도 여러분의 삶을 훈훈하게 데워줄 야담으로 찾아오겠습니다. 평안한 밤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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