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승사자의 기막힌 실수! 암행어사 박문수의 몸으로 환생한 죽은 선비
저승사자의 기막힌 실수! 암행어사 박문수의 몸으로 환생한 죽은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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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젊고 효심 깊은 선비 학봉.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마는데! 저승길에서 만난 저승사자는 생사부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소리칩니다. "이런, 내가 사람을 잘못 데려왔구나!" 이미 육신은 죽어버린 상황, 다시 이승으로 돌아갈 유일한 방법은 죽어가는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환생'하는 것뿐입니다. 과연 학봉은 누구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까요? 운명을 뒤바꾼 기막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 1: 과거 급제의 꿈을 안고 길을 나선 선비 학봉, 불어난 강물에 목숨을 잃다
때는 숙종 임금께서 나라를 다스리시던 조선시대, 경기도의 어느 작고 조용한 산골 마을에 학봉이라는 젊은 선비가 살고 있었습니다. 올해로 스물아홉 살이 된 학봉은 그야말로 마을이 자랑하는 으뜸가는 수재였지요.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이미 천자문을 모두 떼고, 열다섯에는 사서삼경을 줄줄 외워 서당의 훈장님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학봉의 집안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하나뿐인 아들의 글공부를 위해 뼛골이 빠지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뙤약볕 아래서 남의 집 농사일을 거들며 밤낮으로 땀을 흘리셨고, 어머니는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밤이 늦도록 길쌈과 바느질을 하며 푼돈을 모아 아들의 지필묵을 사주셨지요. 부모님의 그 깊고도 헌신적인 사랑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학봉이기에, 그는 단 하루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살을 에이는 듯한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책장을 넘겼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한여름에도 부채질 한번 없이 꼿꼿하게 앉아 글공부에만 매진했습니다.
'내 반드시 이번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평생 고생만 하신 우리 어머니, 아버지께 번듯한 기와집을 지어드리고 비단옷을 입혀 드릴 것이다. 그것만이 내가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다.'
마침내 한양에서 과거 시험이 열린다는 방이 나붙고, 학봉이 길을 떠나야 할 날이 밝았습니다. 어머니는 지난밤 꼬박 새워 지은 눈처럼 하얀 새 버선과 정성스레 다린 도포를 내어주셨습니다. 아버지 역시 쌈짓돈을 털어 마련한 귀한 놋쇠 갓을 씌워주시며 아들의 어깨를 토닥이셨지요.
"학봉아, 한양 가는 길이 멀고도 험할 터이니 부디 몸조심하거라. 밤길은 걷지 말고, 찬물은 피해야 한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것도 좋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네 건강하게 돌아오는 것이 가장 큰 복이자 기쁨이란다."
어머니의 눈가에는 어느새 촉촉한 이슬이 맺혀 있었습니다. 학봉은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부모님을 향해 넙죽 큰절을 올렸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너무 염려 마십시오. 제가 누굽니까. 이 학봉이 반드시 좋은 소식을 품고 당당하게 고향 땅을 밟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두 분 모두 옥체 강녕하시옵소서."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배웅을 뒤로하고 한양으로 향하는 학봉의 발걸음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며칠 밤낮을 걸어야 하는 고단한 여정이었지만, 훗날 붉은 관복을 입고 어사화를 꽂은 채 금의환향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 짚신을 신은 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듯 가벼웠지요.
하지만 호사다마라 하였던가요. 한양을 불과 하루 앞둔 어느 날, 학봉의 앞을 가로막는 커다란 시련이 닥치고 말았습니다. 며칠 전 억수같이 쏟아진 장맛비로 인해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큰 강물이 무섭게 불어나 있었던 것입니다. 평소라면 나룻배가 쉼 없이 오갔을 터였지만, 성난 짐승처럼 굽이치는 흙탕물 앞에서는 늙은 뱃사공도 혀를 차며 노를 내려놓은 상태였습니다.
"아이고, 이를 어쩐다... 내일모레가 당장 과거 시험일인데, 여기서 발이 묶이다니."
강가에는 학봉처럼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과 장사꾼들이 모여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하루 이틀 비가 멎기를 기다리면 물살이 잦아들겠지만, 학봉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번 과거를 놓치면 또다시 몇 년을 기다려야 했고, 늙어가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입신양명해야만 했습니다.
'그래, 저기 상류 쪽을 보아하니 물살이 조금 잔잔하고 깊이도 얕아 보이는구나. 조심해서 건너면 충분히 강을 넘을 수 있을 게야.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봉은 조심스레 도포 자락을 걷어 올리고 신발을 벗어 봇짐에 단단히 묶었습니다. 그리고는 차가운 강물 속으로 발을 내디뎠습니다. 처음에는 무릎 언저리에서 찰랑거리던 물결이, 강 한가운데로 갈수록 점점 허리까지 차올랐습니다.
"좋아, 이대로만 가면 무사히 건널 수 있겠어."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학봉이 물속에 잠긴 커다란 바위를 밟는 순간, 물이끼에 미끄러져 헛디디고 말았습니다.
"앗!"
짧은 비명과 함께 몸의 균형을 잃은 학봉은 순식간에 거센 흙탕물 속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차갑고 거센 물살은 마치 거대한 괴물의 손아귀처럼 학봉을 강바닥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살려... 살려주시오! 쿨럭, 사람 살려!"
학봉은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며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려 했지만, 불어난 강물의 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탁한 강물이 코와 입으로 쉴 새 없이 밀려들어 왔고, 숨이 막혀오는 고통 속에서 학봉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불효자를 용서하십시오. 부디 만수무강하시옵소서...'
눈앞이 새카맣게 점멸하는 순간, 학봉의 뇌리에는 낡은 초가집 마당에서 자신을 배웅하며 눈물짓던 부모님의 주름진 얼굴이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갔습니다. 과거 급제의 푸른 꿈도,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겠다던 굳은 다짐도 모두 차가운 강물 속으로 영영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 2: 저승길을 안내하는 저승사자와의 서늘한 만남, 그리고 삼도천의 공포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학봉이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을 때, 그는 자신이 전혀 낯선 곳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뼛속까지 파고들던 차가운 강물의 감촉도, 숨이 막히던 끔찍한 고통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지요. 심지어 강물에 흠뻑 젖었던 도포 자락마저 금방 다림질을 한 듯 뽀송뽀송하게 말라 있었습니다.
"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분명 끔찍한 급류에 휩쓸려 의식을 잃었는데... 누군가 나를 구조하여 이리로 옮겨 놓은 것인가?"
학봉은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하지만 사방은 온통 짙은 잿빛 안개로 자욱하게 뒤덮여 있어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늘에는 해나 달은커녕 작은 별빛 하나 보이지 않았고, 발밑으로는 메마르고 차가운 흙바닥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킨 듯한 기괴한 적막만이 공간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짙은 안개 너머에서 쇠붙이가 바닥에 끌리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챙그랑... 챙그랑...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이내 안개를 뚫고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학봉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족히 여덟 척은 넘어 보이는 엄청난 장신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칠흑같이 검은 옷을 두른 사내였습니다. 푹 눌러쓴 검은 갓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핏기하나 없이 창백했고, 두 눈은 텅 빈 해골처럼 깊게 패어 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습니다. 사내의 창백한 손에는 차갑게 번뜩이는 굵은 쇠사슬이 쥐어져 있었지요.
학봉은 뒷걸음질을 치며 침을 꼴깍 삼켰습니다. 본능적인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뻗어 올라왔습니다.
"뉘... 뉘신데 이리 기척도 없이 다가오시는 겁니까? 여, 여기가 어디인지 혹시 아십니까?"
검은 옷의 사내는 학봉을 굽어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가 입을 열자, 마치 깊은 동굴 속에서 바람이 울리는 듯한 기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김학봉. 내 너를 데리러 왔다."
"저를... 데리러 오셨다고요? 뉘신데 제 이름을 아는 것입니까?"
"나는 이승에서 생을 다한 자들의 영혼을 거두어 명부로 안내하는 자, 곧 저승사자이니라. 학봉아, 너는 이미 이승의 사람이 아니다. 너의 육신은 성난 강물에 목숨을 잃었고, 지금 네가 서 있는 이곳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황천길 초입이니라."
저승사자라는 말에 학봉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가 죽다니요! 제 몸은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지 않습니까! 무언가 착오가 있으신 게 분명합니다!"
학봉은 현실을 부정하며 소리쳤지만, 저승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쏘아붙였습니다.
"어리석은 것. 네가 지금 느끼는 것은 한낱 영혼의 감각일 뿐, 너의 껍데기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강가로 떠밀려 갔다. 지금쯤 네 늙은 부모에게도 부고가 전해져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터. 헛된 미련을 버리고 순순히 내 뒤를 따르거라."
부모님께서 피눈물을 흘리고 계실 거란 말에 학봉의 억장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아... 정말 내가 죽었단 말인가. 늙으신 부모님을 남겨두고 이토록 허망하게 생을 마감하다니.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이란 말인가.'
학봉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짐승처럼 오열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눈에서는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흐르지 않았습니다. 영혼이 되어버린 자에게는 흘릴 눈물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승사자가 쇠사슬을 쩔렁이며 앞장서 걷기 시작하자, 학봉의 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저승사자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안갯길을 얼마나 걸었을까요. 썩은 내가 진동하는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더니, 눈앞에 거대한 강줄기가 가로막아 섰습니다. 하지만 그 강은 학봉이 이승에서 보았던 그 어떤 강과도 달랐습니다. 핏빛이 섞인 듯한 검붉은 강물이 소리 없이 굽이치고 있었고, 물살 아래로는 고통에 찬 수만 명의 망자들이 살려달라며 앙상한 손을 수면 위로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저... 저 무시무시한 강은 대체 무엇입니까?"
"저것이 바로 이승의 모든 기억을 씻어내고 저승으로 들어가는 관문, 삼도천이니라. 저 강을 건너면 다시는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지."
삼도천 기슭에는 낡은 나룻배 한 척이 정박해 있었습니다. 노를 쥐고 있는 뱃사공은 살점 하나 없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백골의 모습이었습니다. 백골의 뱃사공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턱관절을 달그락거리자, 학봉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극심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안 돼... 저 배를 타면 정말 끝이다. 다시는 어머니 아버지를 뵐 수 없어. 제발, 제발 누군가 나를 살려주었으면...!'
※ 3: 생사부를 확인한 저승사자의 황당한 실수와 염라대왕이 내린 기막힌 제안
삼도천의 검붉은 강물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굽이치고, 해골 뱃사공이 낡은 노를 배에 걸치며 학봉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저승사자 역시 차가운 눈빛으로 턱짓을 하며 나룻배에 오를 것을 지시했지요. 발을 떼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학봉의 영혼은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배 쪽으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사자님! 저승사자님, 제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다급해진 학봉이 저승사자의 검은 옷자락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가 이리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습니다! 고향에는 저만 바라보고 평생 흙바닥을 기며 살아오신 늙은 부모님이 계십니다. 제가 죽으면 그분들은 굶어 돌아가실 것이 뻔합니다. 제발, 제발 저를 다시 살려주십시오! 과거 따위는 보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살아서 부모님 곁으로 돌아갈 수만 있게 해주십시오!"
학봉의 처절한 애원에도 저승사자의 얼굴에는 바늘구멍만 한 동정도 비치지 않았습니다.
"어리석은 인간이로다. 삼도천 앞까지 끌려와서도 이승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니. 생과 사는 하늘의 이치요, 명부에 정해진 수명은 염라대왕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바꿀 수 없는 법이다. 헛소리 그만두고 어서 배에 오르거라!"
저승사자는 단호하게 학봉을 뿌리치며, 품속에서 낡고 두꺼운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수명과 운명이 빼곡히 적혀 있다는 명부의 생사부였습니다.
"내 친히 네놈의 생사부를 확인시켜 줄 터이니, 똑똑히 보고 단념하거라."
저승사자는 길고 뾰족한 손톱으로 침을 묻혀가며 생사부의 책장을 빠르게 넘겼습니다.
"어디 보자... 김학봉... 김학봉... 옳지, 여기 있구나."
그런데, 학봉의 이름이 적힌 구절을 읽어 내려가던 저승사자의 미간이 갑자기 확 구겨졌습니다. 핏기없던 창백한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떠오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종이가 뚫어져라 글귀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예? 잘못되다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이름이 김학봉이 맞느냐? 나이는 스물아홉이고, 고향은 경기도 파주가 틀림없지?"
"예, 틀림없습니다. 제가 파주에서 나고 자란 스물아홉 김학봉이 맞습니다."
저승사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제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냈습니다.
"아뿔싸! 이놈의 정신머리를 어찌할꼬! 내가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구나!"
"실수라니요? 대체 무슨 일이기에 사자님께서 이리 놀라시는 겝니까?"
저승사자는 멋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더니, 생사부를 학봉의 눈앞에 들이밀었습니다.
"잘 보거라. 여기 적힌 경기도 파주의 스물아홉 살 김학봉, 즉 너의 원래 수명은 무려 여든 살까지다. 아직 오십 년도 넘게 명줄이 남아있단 말이다!"
"예?! 제가 여든 살까지 산다고요? 그럼 어째서 저를 이승에서 데려오신 겁니까!"
"그게... 여기 다음 장을 보거라. 경상도 안동에 사는 쉰아홉 살의 '김학봉'이라는 자가 있다. 오늘 물에 빠져 죽을 운명은 바로 이 안동의 김학봉이었는데, 하필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네놈을 보고 내가 동명이인을 착각하여 그만 네 영혼을 먼저 낚아채 버린 것이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천하의 저승사자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멀쩡히 살아갈 젊은 선비의 영혼을 잘못 거두어왔다니요.
"아니, 그런 황당한 실수가 어디 있습니까! 제 명줄이 아직 오십 년이나 남았다 하셨으니, 어서 저를 이승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당장 제 몸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학봉이 기뻐하며 소리쳤지만, 저승사자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습니다.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내가 실수를 깨닫고 부랴부랴 알아보았으나, 이승에 남겨진 네 육신은 이미 물을 너무 많이 먹고 숨이 끊어져 썩어가기 시작했다. 혼백을 다시 집어넣는다 한들 움직일 수가 없단 말이다."
"그, 그럼 이대로 꼼짝없이 억울한 귀신이 되어야 한단 말씀입니까?"
그때였습니다. 잿빛 하늘이 쩌렁쩌렁 울리며 천둥 같은 호통 소리가 떨어졌습니다.
"이 못난 저승사자 놈아! 네놈의 멍청한 실수로 천계의 질서가 어지러워졌거늘, 어찌 핑계만 대고 있느냐!"
저승사자가 기겁하며 바닥에 엎드렸습니다. 하늘의 구름이 걷히며 불꽃에 휩싸인 무시무시한 염라대왕의 환영이 나타난 것입니다.
"대왕마마! 신의 불찰이옵니다! 부디 죽여주시옵소서!"
"시끄럽다! 네놈의 죗값은 나중에 치르게 할 것이니, 당장 저 억울한 선비의 영혼을 달랠 방도를 찾아라! 듣거라, 학봉아. 본디 저승의 법도상 한번 육신을 벗어난 영혼은 제 몸으로 돌아갈 수 없다. 허나 이번 일은 우리 쪽의 명백한 실수이니, 내 특별히 네게 다른 자의 몸을 빌려 이승으로 돌아갈 수 있는 '환생'의 기회를 주마."
염라대왕의 제안에 학봉의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환생이라 하심은... 제가 다른 사람의 몸으로 살아간단 말씀이시옵니까?"
"그렇다. 마침 한양에 수명이 찰랑찰랑하여 숨을 거두기 직전인 젊은 사내가 하나 있다. 네 혼백을 그 사내의 몸에 넣어주면, 너는 남은 수명만큼 다시 이승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단, 절대 어겨서는 안 될 무서운 조건이 하나 있다."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습니다.
"너는 이승으로 돌아가는 즉시 그 사내의 신분으로 살아가야 한다. 네가 과거에 '김학봉'이었다는 사실을 발설해서도 안 되며, 특히 네 본래 부모를 찾아가 정체를 밝히는 것은 엄격히 금지한다. 만약 이 천기를 누설한다면, 그 즉시 네 영혼은 지옥불에 떨어져 영겁의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떠냐, 이 모든 조건을 감수하고서라도 다른 이의 몸으로 다시 살겠느냐, 아니면 이대로 저승에 남겠느냐? 선택은 네 몫이다."
※ 4: 박문수의 몸으로 환생한 학봉, 낯선 가족과 새로운 운명을 마주하다
삼도천의 검붉은 강물 앞에서 학봉은 잠시 숨을 죽이고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부모님을 다시는 뵐 수 없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밝힐 수 없다는 염라대왕의 조건은 너무나도 가혹했습니다. 당장이라도 늙으신 어머니의 주름진 손을 잡고 싶고,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요. 하지만 이대로 차가운 저승의 강을 건너 영원히 소멸해버린다면, 부모님은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평생을 가난과 절망에 시달리다 돌아가실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 내 비록 다른 사람의 껍데기를 쓰고 살아갈지언정, 살아서 이승의 공기를 마시고 있다면 언젠가는 부모님을 멀리서나마 도울 방도가 생길지도 모른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하였으나, 나는 내 이름 석 자를 버리고서라도 반드시 살아남아야겠다.'
학봉은 입술을 꽉 깨물며 염라대왕을 향해 엎드려 절을 올렸습니다.
"대왕마마, 제게 환생의 기회를 주시옵소서.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치더라도, 과거의 저를 완전히 지우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겠나이다."
염라대왕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고, 곁에 있던 저승사자가 품에서 은은한 푸른빛을 내뿜는 신비로운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습니다.
"이것은 혼백구슬이다. 네 영혼의 정수를 이 구슬에 담아 이승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인 그 사내의 몸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자, 이제 눈을 감거라."
저승사자가 푸른 구슬을 학봉의 이마에 가져다 대는 순간, 학봉의 영혼은 눈부신 빛에 휩싸이며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귓가에는 삼도천의 거친 물소리 대신 낯선 여인의 애달픈 곡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기 시작했지요.
"여보... 제발 눈을 떠보세요. 이대로 우리 모자를 두고 가시면 아니 됩니다..."
학봉이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을 때, 그의 눈앞에는 비단옷을 곱게 차려입은 낯선 여인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코끝으로는 쌉싸름한 탕약 냄새와 고급스러운 향냄새가 스며들었고, 등 밑으로는 낡은 볏짚 대신 푹신하고 부드러운 비단 요의 감촉이 느껴졌습니다. 가난한 촌부의 아들이었던 학봉의 평생에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화려한 방 안 풍경이었습니다.
"아... 여기가... 어디요..."
학봉이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냈습니다. 그런데 입 밖으로 튀어나온 목소리는 자신이 알던 가늘고 낭랑한 선비의 음성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깊은 산속의 범이 으르렁거리듯, 굵고 묵직하며 쇳소리가 섞인 장정의 목소리였지요. 학봉은 깜짝 놀라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습니다. 붓을 쥐느라 먹물이 배어있던 가녀린 손가락은 온데간데없고, 칼과 활을 다루느라 투박한 굳은살이 훈장처럼 박혀있는 크고 단단한 무관의 손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습니다.
"여보! 의식을 차리셨군요!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여인은 기쁨의 눈물을 쏟아내며 학봉의 거친 손을 덥석 부여잡았습니다. 학봉은 당황하여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갑작스러운 환생의 여파인지 쇳덩이처럼 무거운 몸뚱이는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그때, 방문이 활짝 열리며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와 일곱 살쯤 된 어여쁜 여자아이가 방 안으로 우르르 뛰어들어왔습니다.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학봉의 넓은 품으로 와락 안겨 들며 엉엉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아버지, 다신 안 깨어나시는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갑작스레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버린 학봉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공에서 손을 맴돌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품에 안겨 작은 어깨를 들썩이는 아이들의 체온을 느끼자, 얼어붙었던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며 묘한 온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아... 이들이 바로 내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새로운 가족들이구나. 저승사자의 말대로라면, 나는 이제 한양의 무관, 박문수라는 사내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학봉은 어색하지만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이들의 등을 토닥여 주었습니다.
"울지 마라... 아비는 이제 괜찮다. 훌훌 털고 일어날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며칠의 시간이 흐르면서, 학봉은 박문수의 육신과 삶에 점차 적응해 나가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서재에 쌓인 수많은 장계와 서책들을 밤낮으로 뒤적이며 박문수가 어떤 직책을 맡고 있었고, 조정에서 어떤 인물들과 교류했는지를 머릿속에 욱여넣었지요. 박문수는 무과에 급제하여 의정부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뛰어난 무관이었으며, 불의를 참지 못하는 곧은 성정 탓에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충신이었습니다. 평생 사서삼경만 파고들던 문약한 선비 학봉에게, 무예에 통달한 장수의 삶을 연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나 가장 큰 난관은 바로 박문수의 아내, 숙희였습니다. 그녀는 매우 현명하고 눈썰미가 예리한 여인이었지요. 어느 날 저녁, 다과상을 내어온 숙희가 근심 어린 눈빛으로 학봉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 요즘 당신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꼭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아 마음이 쓰입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던 고서적들을 밤새워 읽으시는가 하면, 말씀하시는 투도 예전의 호탕함 대신 어딘지 모르게 선비처럼 조심스럽고 낯설어졌습니다. 혹여 몹쓸 병의 후유증으로 심신에 큰 탈이라도 나신 것은 아닌지요?"
학봉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습니다. 천기를 누설하면 즉시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라는 염라대왕의 서늘한 경고가 귓가를 맴돌았지요.
"허허, 부인은 참으로 걱정도 많으시오. 사경을 헤매다 깨어나 보니, 내 그동안 무예에만 정진하느라 학문을 너무 등한시했다는 깨달음을 얻었소. 문무를 겸비해야 진정한 충신이라 할 수 있지 않겠소? 그저 병치레 후 심경에 작은 변화가 생겼을 뿐이니 너무 괘념치 마시오."
학봉은 애써 호탕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낯선 가족의 애정 어린 시선과 끝없는 의심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아슬아슬한 하루하루가 이어졌습니다. 고향에 두고 온 진짜 부모님을 향한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은 매일 밤 그의 가슴을 후벼 팠지만, 학봉은 박문수라는 이름 뒤에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긴 채 새로운 운명의 굴레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 5: 암행어사가 되어 옛 고향 근처로 향하게 된 학봉의 깊은 고뇌
박문수의 몸으로 환생하여 새로운 삶의 궤도에 어느 정도 안착해 가던 어느 날, 학봉의 평온한 일상을 뒤흔드는 거대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의정부의 전령이 헐레벌떡 자택으로 달려와 다급한 어명을 전한 것입니다.
"박 대감! 주상 전하께서 대감을 시급히 편전으로 들라 하명하셨습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어서 입궐 채비를 갖추시지요!"
학봉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하며 서둘러 관복으로 갈아입고 대궐로 향했습니다. 웅장한 궐문을 지나 편전에 들어서자, 용상에 앉은 임금의 안색은 몹시 수심에 잠겨 있었습니다. 학봉이 예를 갖추어 엎드리자, 임금이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박문수, 네가 큰 병을 앓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지만, 조정에 너만큼 믿고 맡길 만한 충신이 없어 부득이하게 너를 불렀다. 최근 경기도 일대의 탐관오리들이 흉년을 핑계로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고 있다는 원성이 자자하다. 특히 파주 일대의 수령이 관아의 곡식을 빼돌리고 억울한 자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는 소문이 흉흉하니, 네가 암행어사가 되어 그곳의 비리를 낱낱이 파헤치고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거라."
임금의 입에서 '파주'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순간, 학봉의 심장은 벼락을 맞은 듯 덜컥 멈춰버리고 말았습니다. 파주는 다름 아닌 학봉이 나고 자란 고향이자, 그토록 그리워하던 늙은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머릿속은 하얗게 백지장처럼 변해버렸습니다.
'파주라니! 하필이면 파주라니! 염라대왕께서 내게 신신당부하지 않으셨던가. 고향 근처에는 절대 발을 들이지 말며, 본래의 부모를 찾아가 정체를 밝히는 날에는 즉시 저승으로 끌려갈 것이라고! 행여 암행을 하다 동네 사람들과 마주치거나 부모님을 뵙게 된다면 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학봉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오나 소신이 아직 병환의 후유증으로 심신이 온전치 못하옵니다. 중차대한 어사 임무를 그르칠까 두려우니, 부디 다른 적임자를 찾아 명하시옵소서."
임금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가볍게 혀를 찼습니다.
"네가 어찌 그리 나약한 소리를 한단 말이냐.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데, 충신이 제 몸을 먼저 돌보아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게다가 너는 과거부터 불의를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호탕한 사내였거늘. 어명이다! 지체 없이 마패를 받아 들고 파주로 떠나도록 하라!"
임금의 단호한 하명 앞에 학봉은 더 이상 거역할 명분을 찾지 못했습니다. 파르르 떨리는 양손으로 임금이 하사하는 마패와 어사화를 받아 드는 학봉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습니다.
그날 밤, 학봉은 처소의 창문을 열어젖힌 채 밤하늘의 둥근 달을 올려다보며 깊은 시름에 잠겼습니다.
'내일이면 나는 어사가 되어 파주로 떠나야 한다. 마을 어귀의 커다란 당산나무, 부모님과 함께 밭을 일구던 정든 흙냄새... 만약 어머니가 굽은 허리로 밭을 매고 계신 모습을 본다면, 내가 어찌 다가가 부축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김학봉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뻔뻔하게 어사 행세를 할 수 있을까.'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학봉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살아서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렸지만, 정작 가장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눈길조차 줄 수 없는 가혹한 운명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때, 곁에서 촛불을 끄려 다가온 아내 숙희가 학봉의 슬픈 뒷모습을 보고는 가만히 다가와 어깨를 감싸 쥐었습니다.
"나으리, 무엇이 그리 대감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입니까. 백성을 구하러 가는 고귀한 길이건만, 어찌하여 사지로 떠나는 분처럼 이토록 슬피 우시는 겝니까."
"부인... 내 가슴속에 묻어둔 한이 너무 깊어, 차마 입 밖으로 낼 수조차 없구려. 그저 내 운명이 얄궂고 야속할 따름이오."
학봉은 숙희의 따뜻한 손을 맞잡으며 흐느꼈습니다. 그때 문득, 환생하기 전 저승사자가 남겼던 마지막 말이 학봉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진정한 효도는 형태를 바꿔서라도 계속될 수 있는 법이다.'
학봉은 눈을 번쩍 떴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직접 부모님 앞에 나서서 문안 인사를 올리고 아들 노릇을 할 수는 없지만, 탐관오리의 수탈에 고통받는 고향 백성들을 구하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야말로 늙으신 부모님이 그토록 원하시던 '훌륭한 관리'가 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하늘이 자신을 박문수의 몸으로 다시 살려낸 진짜 이유일지도 몰랐습니다.
'그래, 내가 지금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일 때가 아니다. 내 비록 이름도 얼굴도 달라졌지만, 내 영혼의 본질은 백성을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던 선비 김학봉이다. 박문수라는 거대한 칼을 쥐었으니, 내 고향과 부모님을 괴롭히는 썩어빠진 관리들을 모조리 베어버리리라!'
학봉은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며 밤하늘을 향해 굳은 결의를 다졌습니다. 가혹한 운명의 장난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새로운 모습으로 진정한 대의를 실현하겠다는 학봉의 두 눈동자에는 암행어사로서의 매서운 투지가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 6: 진정한 효도의 의미를 깨닫고 백성을 위한 삶을 살아간 위대한 암행어사
허름한 삿갓을 깊게 눌러쓰고 다 해진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파주 땅에 들어선 학봉은, 고향의 참담한 현실을 마주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과거 자신이 거닐던 평화롭던 산골 마을은 온데간데없고, 백성들의 피눈물만 진동하고 있었지요. 파주 수령은 흉년으로 먹을 풀뿌리조차 없는 백성들에게 억지 세금을 매기고, 이를 내지 못하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관아로 끌고 가 무자비한 매질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사또 나으리! 제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작년에 꾼 관아의 쌀은 이미 다 갚았거늘, 어찌하여 또다시 장부를 조작하여 생사람을 잡으시나이까!"
관아 앞마당에서는 한 늙은 농부가 피투성이가 된 채 울부짖고 있었고, 툇마루에 비스듬히 누운 수령은 기생을 끼고 술잔을 기울이며 비릿한 조소를 흘릴 뿐이었습니다.
"시끄럽다! 네놈이 갚은 것은 원금일 뿐, 그동안 불어난 이자는 어찌할 셈이냐! 저놈의 집문서와 딸자식을 모조리 관노로 끌고 가라!"
그 끔찍한 만행을 지켜보며 학봉은 분노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그는 며칠 밤낮을 장터와 주막을 돌며 탐관오리의 비리가 적힌 장부 조각과 억울한 백성들의 증언을 은밀히 수집해 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학봉은 주막 한구석에서 막걸리를 들이켜던 동네 노인들의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습니다.
"자네 그 소식 들었는가? 아랫마을 김 영감네 외아들 학봉이 녀석 말이야. 한양에 과거 보러 간다더니, 며칠 전 강물에 빠져 퉁퉁 부은 송장으로 돌아왔다네. 평생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살던 노인네들이 넋이 나가서 곡기조차 끊고 누워있다는구먼. 쯧쯧,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 순간, 학봉은 쥐고 있던 낡은 찻잔을 와장창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날카로운 사기 조각이 손바닥을 베고 지나갔지만, 가슴을 후벼 파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죽었다는 소식에 곡기마저 끊고 누워 계실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학봉은 피가 흐르는 주먹을 꽉 쥐며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눌렀습니다. 여기서 정체를 드러내면 모든 것이 끝이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불효자를 용서하십시오. 지금 당장 두 분을 찾아뵐 수는 없지만, 이 아들이 다른 방도로 반드시 두 분의 한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이튿날 아침, 관아 마당에서 수령이 또다시 무고한 백성들을 모아놓고 형장을 치려던 찰나였습니다.
"암행어사 출두야!!!"
천지를 뒤흔드는 우렁찬 고함 소리와 함께, 역졸들이 사방에서 관아를 에워싸며 들이닥쳤습니다. 허름한 삿갓을 벗어 던진 학봉이 눈부시게 빛나는 마패를 높이 치켜들고 당당한 걸음으로 마당 가운데로 나섰습니다.
"파주 수령은 똑똑히 듣거라!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고 국법을 기만한 죄, 내 오늘 이 마패의 이름으로 네놈의 목을 치고 옥에 갇힌 억울한 백성들을 모조리 방면할 것이다!"
사색이 된 수령과 아전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었고, 고통받던 백성들은 어사의 늠름한 자태 앞에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비리를 낱낱이 파헤쳐 탐관오리들을 모조리 하옥시킨 후, 학봉은 곁에 있던 관노를 은밀히 불러 명령을 내렸습니다.
"듣자 하니 아랫마을에 외아들을 잃고 곡기를 끊은 김 영감 내외가 있다 하더구나. 어사 본관의 특별한 하명이니, 관아의 창고를 열어 가장 좋은 멥쌀 열 가마와 질 좋은 포목을 그 집에 몰래 가져다 놓아라. 그리고 의원을 보내 노인들의 병구완을 돕되, 절대 관에서 나온 것임을 발설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비록 얼굴을 마주하고 아들 노릇을 할 수는 없었지만, 암행어사의 권한으로나마 부모님의 노후를 편안하게 돌보아 드리는 것. 그것이 학봉이 선택한 진정한 의미의 효도였습니다.
모든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한양으로 돌아온 학봉은, 더 이상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내 숙희와 두 아이들에게도 과거의 무뚝뚝했던 박문수가 아닌,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가장으로 거듭났지요.
세월이 흘러 백발이 성성해진 어느 밤, 학봉의 꿈속에 낯익은 저승사자가 찾아왔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차갑고 끔찍했던 모습과는 달리, 저승사자의 입가에는 인자한 미소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학봉아, 아니... 박문수 대감. 네가 이승에서 베푼 선행과 의로운 삶이 하늘을 감동시켰다. 껍데기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영혼의 가치를 실현한 너는 하늘이 내린 최고의 어사로 기억될 것이다. 네 고향의 옛 부모들도 천수를 누리고 편안히 눈을 감았으니 이제 모든 시름을 놓거라."
꿈에서 깨어난 학봉의 두 눈에는 맑고 따뜻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억울한 죽음과 가혹한 환생의 굴레 속에서도 결코 선한 본성을 잃지 않았던 선비 학봉. 그는 박문수라는 이름으로 조선 팔도를 누비며 억울한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었고, 훗날 역사에 길이 남을 가장 위대한 암행어사로 영원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여러분, 오늘 들려드린 암행어사 박문수의 숨겨진 전설, 어떻게 들으셨나요? 억울한 죽음을 넘어 다른 사람의 몸으로 환생해서라도 부모님을 향한 효심을 잊지 않고, 나아가 온 백성을 구하는 위대한 뜻으로 승화시킨 학봉의 이야기가 참으로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도 예상치 못한 거센 강물을 만나 완전히 다른 길로 흘러갈 때가 있지요. 하지만 어떤 모습,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내 안의 따뜻한 사랑과 선한 의지만 잃지 않는다면, 그 길 끝에는 반드시 찬란한 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작은 위로와 희망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에는 '저승사자의 검은 두루마리'라는 또 다른 신비롭고 감동적인 전설로 찾아뵙겠습니다. 구독과 좋아요 꾹 눌러주시고,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