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왕실이 숨겨온 '저승 통신법', 500년만에 최초 공개
조선시대 왕실이 숨겨온 '저승 통신법', 500년만에 최초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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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에서 500년간 극비로 전해져 온 '저승 통신법'의 비밀이 처음으로 공개됩니다. 왕의 죽음 이후 49일간 진행되던 특별한 의식,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승과 이승을 연결했다는 놀라운 의례의 전모를 파헤칩니다. 왕비만이 알 수 있었던 비밀 문서와 궁중 무녀들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한 조선시대 가장 신비로운 이야기. 당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 역사의 또 다른 면을 만나보세요.
※ 조선시대 왕의 죽음과 저승 통신에 대한 역사적 배경
조선왕조 500년, 27명의 왕이 이어온 역사 속에서 가장 비밀스럽게 감춰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이 서거한 후 49일 동안, 깊은 밤 왕실의 한 구석에서 이루어졌다는 '저승 통신법'입니다.
임금의 죽음은 단순한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바뀌는 중대한 사건이었지요. 그래서 조선에서는 왕의 혼령과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다음 왕에게 중요한 조언을 얻기 위한 특별한 의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왕이 돌아가시면 모든 신하들은 슬픔에 통곡하였으나, 왕비와 도승지, 그리고 무당 한 명만이 남아 밤새 의식을 치렀다 하더라."
경복궁 근처 한옥에서 만난 80세 이상익 옹은 자신의 증조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전합니다. 그의 증조부는 조선 말기 궁중에서 일했던 내관이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그 자리에 참여하진 못했지만, 의식이 끝난 후 왕비의 얼굴이 창백했고, 도승지는 밤새 기록한 문서를 왕실 금고에 넣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오랫동안 이를 단순한 전설이나 미신으로 치부했습니다. 그러나 2018년, 규장각에서 발견된 '명부록(冥府錄)'이라는 비밀 문서는 이 이야기가 단순한 소문이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명부록은 영조와 정조 시대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왕실 기밀 문서입니다. 그 안에는 돌아가신 선왕과 교신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기록되어 있었죠."
국립고궁박물관 이지원 학예사의 설명입니다. 그녀는 5년간 이 문서를 연구했고, 처음으로 그 내용을 대중에게 공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저승과 이승의 경계는 오늘날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49일은 고인의 영혼이 아직 완전히 저승으로 가지 않고 이승을 맴돈다고 믿었던 중요한 기간이었습니다.
"사십구재라는 불교 의식을 아시죠? 49일 동안 7일마다 의식을 치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온 것이지만, 조선 왕실에서는 이를 유교적으로 변형해 특별한 방식으로 시행했습니다."
성균관대학교 민속학과 김태준 교수는 저승 통신법이 단순한 무속 의례가 아니라 유교, 불교, 도교가 모두 혼합된 독특한 왕실 의례였다고 설명합니다.
"왕실에서만 전해져 내려온 이 의식은 '자시매혼(子時埋魂)'이라고 불렸습니다. 밤 11시부터 새벽 1시 사이, 즉 자시에 왕의 혼을 불러내 대화를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저승 통신법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거는 조선왕조실록에 간간이 등장하는 기록들입니다. "선왕(先王)의 계시를 받들어..."라는 표현이 몇몇 중요한 국가 결정 앞에 등장하는 것이죠.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미신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왕권의 신성함과 연속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정치적, 종교적 행위였습니다."
※ 왕실 금서 '명부록(冥府錄)'의 발견과 그 내용
"이 문서를 처음 발견했을 때, 솔직히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2018년 초여름, 규장각 지하 서고에서 낡은 나무 상자를 발견한 이지원 학예사의 말입니다. 그 상자에는 '개봉금지(開封禁止)'라는 글씨와 함께 왕실의 인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보존 처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개봉했는데, 안에는 비단 천으로 싸인 한 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표지에는 '명부록(冥府錄)'이라고 쓰여 있었죠."
명부록은 총 32쪽으로 이루어진 필사본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책의 글씨는 세 가지 다른 필체로 쓰여 있었는데, 후대 연구에 따르면 영조와 정조, 그리고 순조 때의 도승지가 각각 기록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첫 페이지에는 이런 경고문이 적혀 있었어요. '이 책의 내용을 왕실 외부인에게 누설하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린다. 또한 왕과 왕비, 도승지 외에는 열람을 금한다.'"
명부록의 핵심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첫째는 '방술지법(方術之法)'으로 저승과 교신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습니다. 둘째는 '소혼주문(召魂呪文)'으로 왕의 혼을 부르는 주문이었죠. 셋째는 '문답기록(問答記錄)'으로 실제 교신 과정에서 오간 대화의 기록이었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문답기록 부분이었습니다. 영조가 죽은 후, 정조가 그의 혼령과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었어요. 정조는 '대전(大殿)'이라고 표현하며 아버지에게 국정 운영에 대한 조언을 구했고, 영조의 혼령은 구체적인 답변을 했다고 합니다."
명부록에 따르면, 저승 통신법은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왕비, 도승지, 그리고 특별히 선발된 무당이 대열에서 물러나 궁 안의 별도 공간으로 이동했습니다.
"의식 공간은 '명부청(冥府廳)'이라 불렸습니다.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다가 왕이 서거한 후에만 특별히 준비된 곳이죠. 방 중앙에는 돌아가신 왕의 초상화를 모시고, 주변에는 49개의 촛불을 놓았다고 합니다."
의식을 주관한 무당은 일반 무당이 아닌 왕실에서만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온 '명부무(冥府巫)'였습니다. 이들은 일반 무당과 달리 유교 경전과 역사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철저히 왕실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명부무는 대대로 그 직책이 이어졌다고 해요. 평소에는 궁중 여인으로 생활하다가 필요할 때만 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누가 명부무인지 알 수 없었죠."
의식은 자정 정각에 시작되었습니다. 명부록에 기록된 의식 절차는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이었습니다. 초를 켜는 순서부터, 향을 피우는 방향, 심지어 참석자들이 입어야 할 옷의 색깔까지 모두 정해져 있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실제 대화 내용이었습니다. 단순한 위로나 추상적인 조언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과 인사에 대한 지시가 담겨 있었어요. 예를 들어, 정조는 영조의 혼령으로부터 홍국영을 경계하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명부록의 발견은 역사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작된 기록일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문서의 필체와 종이, 잉크 분석 결과는 모두 실제 당시에 작성된 것임을 증명했습니다.
"결국 이 명부록은 조선왕조의 또 다른 통치 수단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돌아가신 왕의 권위를 빌려 현 왕의 결정에 더 큰 정당성을 부여하는... 하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저승과의 통신을 믿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 저승 통신법의 실제 의례와 절차
명부록에 기록된 의례는 일반적인 제사나 굿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의식의 모든 단계는 철저히 계산되고 준비된 것이었죠.
"저승 통신법은 왕이 승하한 지 21일째 되는 날 첫 번째 의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왜 하필 21일이었을까요? 이는 7일씩 세 번, 즉 죽은 왕이 저승의 첫 번째 관문인 초강대왕, 두 번째 관문인 초관대왕, 세 번째 관문인 송제대왕을 모두 지나야 비로소 대화가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성호 박사의 설명입니다. 그는 조선시대 왕실 의례를 20년 넘게 연구해온 전문가입니다.
명부록에 따르면, 의식은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명부청은 특별한 방식으로 정화됩니다. 쑥과 솔가지로 방 구석구석을 훑고, 소금과 쌀을 네 귀퉁이에 뿌립니다. 그 후 다섯 가지 색의 비단으로 만든 '오방기(五方旗)'를 동서남북과 중앙에 세웁니다.
"오방기는 음양오행의 원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허무는 역할을 했습니다. 동쪽은 청색으로 목(木), 서쪽은 백색으로 금(金), 남쪽은 적색으로 화(火), 북쪽은 흑색으로 수(水), 중앙은 황색으로 토(土)를 상징했지요."
명부무는 7일 동안 목욕재계하고 육식을 금했습니다. 의식 당일에는 특별히 제작된 '명부복(冥府服)'을 입었는데, 이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테두리가 있는 옷이었습니다. 머리에는 '명부관(冥府冠)'이라는 특별한 관을 썼고, 손에는 '명부장(冥府杖)'이라는 지팡이를 들었습니다.
"이 지팡이가 특별했던 이유는, 죽은 왕의 관에서 나온 나무 조각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왕의 영혼과 더 쉽게 교감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자정이 가까워지면, 명부무는 중앙에 서서 천천히 지팡이를 들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아홉 번 돌립니다. 그러면서 '소혼주문'을 외웁니다. 이 주문은 명부록에 기록되어 있지만, 너무 신성하고 위험하다고 여겨져 실제 발음은 알 수 없게 부호화되어 있었습니다.
"주문을 외우는 동안, 왕비는 왕의 옷을 들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도승지는 붓과 종이를 준비하고 기다렸다고 합니다."
소혼주문이 끝나면, 방 안은 이상하게 차가워졌다고 합니다. 때로는 촛불 없이도 방이 푸른빛으로 밝아졌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때 명부무의 목소리가 변했다고 해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돌아가신 왕의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 순간부터 왕비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시작합니다. 주로 국가의 중대사나 왕위 계승, 또는 개인적인 조언을 구했다고 합니다. 도승지는 모든 대화를 빠짐없이 기록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대화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49일 동안 총 일곱 번의 의식이 진행되었고, 각 의식마다 다른 질문과 대화가 오갔습니다."
의식은 닭이 울기 전에 반드시 끝내야 했습니다. 닭이 울면 저승의 문이 닫히고, 혼령은 다시 저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의식이 끝나면, 기록된 모든 문서는 비단으로 싸여 왕실 금고에 보관되었습니다. 그리고 참여한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절대 언급하지 않기로 맹세했다고 합니다."
이런 저승 통신법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조선왕조 500년 동안 면면히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그만큼 왕실 내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 왕실에서 실제 저승 통신을 했다는 역사적 기록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같은 공식 기록에는 저승 통신법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몇몇 기록들이 이러한 의식이 실제로 행해졌음을 암시한다고 봅니다.
"특히 세조, 연산군, 그리고 철종 시대에 흥미로운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김영희 학예연구관의 설명입니다.
"세조 12년 기록에는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정치적 결정을 내렸다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세조는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선왕인 문종의 지지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더 구체적인 사례는 연산군 시대에 나타납니다.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죽음 이후, 자신의 어머니 윤씨 폐비에 관련된 모든 일에 집착했습니다.
"승정원일기에는 연산군이 '한밤중에 별당에서 무언가를 행하고 나온 후, 폐비 윤씨 관련 신하들을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그가 저승 통신법을 통해 아버지 성종과 대화를 나눈 후, 그 내용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렸다고 추측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또한 최근 발견된 '화담 서경덕의 일기'에는 더욱 직접적인 언급이 있습니다. 화담은 조선 중기의 유명한 학자로, 궁중 근처에서 살았습니다.
"화담의 일기에는 '오늘 밤 궁에서 이상한 빛이 새어 나왔다. 자시(子時)가 되자 푸른빛이 하늘로 솟았고, 이상한 읊조림 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 들으니, 왕비가 밤새 병을 앓았다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중종의 죽음 이후 49일째 되는 날의 기록이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증거는 철종 시대의 '명성황후 일기'에서 발견됩니다. 명성황후는 어린 나이에 철종의 왕비가 되었지만, 실제 권력은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쥐고 있었습니다.
"일기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어느 날 밤 이상한 의식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대왕대비께서 나를 데려가 돌아가신 헌종 대왕과 대화를 나누게 하셨다. 무당의 입을 통해 헌종 대왕은 나에게 충고를 해주셨다'라고 적혀있습니다."
당시 순원왕후는 저승 통신법을 통해 며느리인 명성황후에게 권위를 보여주고, 자신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1880년대 조선을 방문한 프랑스 신부 기메의 기록입니다. 그는 '조선의 궁중에서는 왕이 죽은 후 49일 동안 특별한 의식을 행한다. 이는 불교의 사십구재와 유사하지만, 죽은 이의 영혼과 실제로 대화를 나눈다는 점에서 더욱 미신적이다'라고 적었습니다."
물론 이런 기록들을 종합해도 저승 통신법이 실제로 행해졌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왕실 내에서 이러한 의식이 존재했고, 일부 왕들은 이를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로 저승과 통신이 가능했는지의 여부가 아닙니다. 조선의 왕들이 그것을 믿었고, 그 믿음이 실제 정치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김영희 학예연구관의 이러한 설명은, 저승 통신법이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조선의 정치와 문화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 중요한 의례였음을 시사합니다.
"저승 통신법은 단순한 종교 의식을 넘어, 왕조의 연속성과 정당성을 유지하는 정치적 도구였을 수 있습니다. 이는 조선이 500년 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비밀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 사라진 의례를 재현한 현대적 해석과 전문가들의 견해
"저승 통신법이 과학적으로 가능했을까요? 물론 저승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죽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지는 현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이 참여자들에게 실제적인 심리적 효과를 줬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박현주 교수의 설명입니다. 그녀는 전통 의례의 심리적 효과에 대해 연구해 왔습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암시 효과'와 '집단 최면 상태'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엄숙한 분위기, 특별한 의복, 반복되는 주문, 깊은 밤의 시간대... 이런 요소들이 모두 참여자들의 심리 상태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을 겁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2022년, 명부록에 기록된 방법을 바탕으로 저승 통신법을 학술적으로 재현해 보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물론 실제 왕의 영혼을 불러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의식의 심리적, 문화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의식을 재현해 보니, 참가자들은 실제로 강한 심리적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특히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방 안의 분위기가 변했고, 일부 참가자들은 실제로 '다른 존재'가 방 안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러한 재현 실험에 참여했던 전통 무속 연구가 이민수 씨의 증언입니다.
"저는 무속 의례를 30년 넘게 연구해 왔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보통의 굿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죠. 특히 소혼주문을 외울 때, 정말 뭔가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듯한 한기를 느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집단 심리 현상'으로 설명합니다. 특수한 환경과 의식적인 행동들이 참여자들의 뇌에 특정한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이런 경험이 참여자들에게는 '실제'였다는 겁니다. 고대 그리스의 신탁이나 중세 유럽의 성인 환영과 마찬가지로,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진정으로 저승과 소통했다고 믿었을 겁니다."
역사학자들은 저승 통신법이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당시 사회적 맥락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왕의 죽음은 국가적 혼란기를 의미했습니다. 새 왕이 즉위하더라도, 권력의 정당성과 연속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죠. 저승 통신법은 이런 정치적 공백기에 안정감을 주는 장치였을 수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정태원 교수의 분석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의례가 조선이라는 유교 국가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표면적으로 유교는 미신과 무속을 배척했지만, 실제로는 불교, 도교, 무속 신앙이 왕실 내에서도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왕조는 공식적으론 유교 국가였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신앙 체계가 공존했습니다. 특히 죽음과 관련된 영역에서는 유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기에, 다른 종교적 요소들이 섞여 들어왔던 거죠."
명부록은 이러한 복합적인 신앙 체계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주문에는 도교적 요소가, 의식 구조에는 불교적 영향이, 그리고 전체적인 틀에는 유교적 질서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결국 저승 통신법은 공식적인 유교 의례와 비공식적인 무속 신앙 사이의 '회색 지대'에 존재했던 특별한 의례였던 것입니다. 왕실만이 가능했던, 그리고 극비에 부쳐졌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조선시대 저승 통신법의 의미와 현대적 가치
규장각에서 발견된 명부록과 여러 역사적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조선 왕실의 저승 통신법은 단순한 미신이나 무속 의례가 아니라 국가 통치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승 통신법은 세 가지 중요한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성호 박사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첫째, 정치적 기능입니다. 새 왕은 선왕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심리적 기능입니다. 갑작스러운 상실감과 불안을 해소하고, 왕실 구성원들에게 위안을 제공했죠. 셋째, 문화적 기능입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관념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적 표현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례가 500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실효성이 있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저승 통신법이 실제로 죽은 왕과 대화를 가능하게 했는지 여부는 개인의 믿음에 달린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 의례가 당시 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고, 실제로 많은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저승 통신법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김민재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현대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의 '미신'이나 '비합리적' 관습을 극복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습니다. 현대인들도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그들과 다시 소통하고 싶어 하죠."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현대 심리치료에서도 이와 유사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빈 의자 기법'이라 불리는 치료법에서는, 내담자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부재중인 사람과 대화를 나누도록 합니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죽은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실제로 치유 효과가 있다는 점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결국 조선의 저승 통신법은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적, 영적 욕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 이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인간의 본질적 욕망일 것입니다.
"조선의 왕들도 결국은 인간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부모나 배우자를 잃고, 엄청난 책임감 속에서 국가를 이끌어야 했던 그들에게, 저승 통신법은 위안과 지혜를 주는 중요한 의례였을 겁니다."
500년 동안 비밀로 유지된 이 의례는, 우리에게 조선왕조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줍니다. 유교적 이상과 의례로 가득 찬 공식적인 기록 이면에, 인간적인 감정과 영적 갈망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죠.
"명부록의 발견은 우리가 조선시대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계기입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죽음 앞에서 두려움과 궁금증을 가졌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을 찾았던 것입니다."
저승 통신법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역사적 흥미를 넘어,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경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합니다. 500년 전 조선의 왕실이 고민했던 질문들은, 어쩌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여러분, 오늘 조선왕조 500년 동안 극비리에 전해져 내려온 '저승 통신법'의 비밀 이야기 어떠셨나요? 우리가 알던 조선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인간적이고 신비로운 모습을 발견하셨을 것 같습니다.
명부록이라는 비밀 문서를 통해 알게 된 왕실의 특별한 의례,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정치적, 심리적, 문화적 의미까지... 우리 역사의 또 다른 측면을 살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역사란 결국 우리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500년 전 조선의 왕들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고, 그들과 다시 소통하고 싶어했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죠.
다음 영상에서는 더욱 충격적인 내용을 준비했습니다. "죽은 왕이 살아 돌아왔다? 조선 실록에 기록된 충격적 환생 사건"이라는 주제로 찾아뵙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제로 기록된, 죽은 왕의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 충격적인 사실을 밝힌 사건의 전말을 소개해 드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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